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어떤 면에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흡사하다. 등산가에게 낮은 봉우리들은 단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최정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에 불과하다. 이로 유추해 볼 때, 개인의 중생이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과격한 변화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이것만 알고 있으면 성령의 사역의 충만한 분량을 놓치게 되며 낮은 등성이에서의 조망으로 만족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거듭남이란 장차 완성을 기다리는 새로운 창조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한 바와 같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전체 역사에 관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 곧 그분의 광범위하고도 공동체적인 사역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하고, 이와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되어 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종말론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을 자신에게로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즉 모든 회중을 불러내신다.

그리스도 사역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묘사한 신약 성경의 많은 비유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떼를 이룬 양들이요, 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요, 신랑의 친구들이요, 성전의 돌들이요, 새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권면들은 개인적으로 심령에 적용되도록 의도된 것이면서도, 일반적으로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복수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은 개개인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한다.

바울의 신학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사용한 다음의 비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즉 교회란 우리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2-13).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다. 곧바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1) 바울이 교회를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사회적.문화적 장벽이 무너진 그리스도의 '몸'(body)이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무엇인가?

(2) 성령은 어떻게 세례를 통해 이런 몸으로 들어가도록 관여하는가?

 

 

그리스도의 몸

 

첫 번째 질문은, 바울이 사용한 몸의 비유의 기원을 추적함으로써 바울이 의도한 의미를 규명하려는 노력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노력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많다. 본문의 의미는 단순하게 어떤 용어의 어감이나 기원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바울이 가진 사고의 세계에서 몸이라는 개념이 나올 만한 배경을 다양하게 분석해 보면 여러 가지 가능성이 도출될 뿐이다.

 

로마 제국의 문학이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몸이란 개념은, 사람들이 중요한 측면에서 함께 결속된 집단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다. 이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메네니우스 아그립바(주전 약 494)의 우화인데, 이것은 리비의 '로마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메네니우스 아그립바는 한 우화를 통해서 민중에게 폭동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데, 그 우화는 몸의 다양한 부분들이 위장을 질투해서 먹을 것을 주지 않은 결과 몸 전체가 망쳐진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바울의 성례전적 신학에서 그 근거를 찾으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 및 그분의 백성의 하나됨을 동시에 상징하는 빵을 떼는데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좀더 최근에는 이것을 고린도 지방의 한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연구도 나왔다. 고린도의 아스클레피온에 대한 고고학적인 탐사에서 인체의 여러 부분을 조각한 테라코타 작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치료의 신(神)인,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피우스에 의해 치료된 신체의 각 부분을 묘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바울이 이 비유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이러한 접근은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 은유의 기원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단순하지만 최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는 개념이 '공중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바울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 이 용어를 채택한다. 특별히 그가 묘사하고 있는 '몸'은 매우 독특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분은 몸의 머리요 지배자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섭리 목적에 따라서 우주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머리이시듯이(엡1:22), 자신의 나라의 원리에 따라서 교회를 지배하며 지도하는 머리가 되신다(골1:18). 여기서 '머리'(kepbale)는 신체의 일부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해부학적 단어가 아니라, 관계성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요, 우주(kosmos)와 교회(ekklesia)를 동시에 지배하시는 분이다. 개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즉 은혜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의 생명덩어리로 분리 불가능하게 묶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또한 서로에게 속해 있다.

 

 

성령 세례

 

다음으로, 이러한 몸으로 들어가게 하는 세례에서 성령의 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례와 성령은 신약 성경에서 일곱 번 서로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여섯 번은 명백하게 오순절을 지칭하는데, 성령의 역할과 관련하여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사도행전 1:5, 사도행전 11:16  -->

성령으로(en pneumati bagio)

 

위의 각 구절에서 세례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며, 성령은 그 매개체이다. 일곱 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12:13  --> 영으로(en pneumati)

 

위의 진술들 가운데 '으로'(en)라는 전치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세례에서 성령이 집행자('by the Spirit')임을 지적하는 것인가, 아니면 매개체('with/in the Spirit')임을 암시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혹은 '이 세례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가?'라는 좀더 깊은 질문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쓰인 '으로'(en)라는 전치사는, '의하여'(by), '함께'(with), '안에'(in)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성령을 매개체(with/in the Spirit)로 보고 있지 집행자('by the Spirit')로 보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주제를 만나는 곳마다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한 가지 용어, 즉 성령-세례(Spirit-Baptism)라는 언어 표현을 마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일관되게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보여 준다. 즉 "그분이 세례를 주실 것이요..."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몸의 모든 구성 요소가 한 성령을 공유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합병될 때 동시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일한 실재의 양면에 해당된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성령이 창시자인 어떤 사역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요, 회심 이후의 성령 체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며, 신자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물을 마시게 된, 즉 성령을 처음으로 받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참고. 요4:13-14; 7:37-39).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한 몸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령은 그 세례의 매개체이다. 그러나 이 몸 안에서 삶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정해 놓으신 수단들, 특별히 세례 의식, 주의 만찬과 사역 등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세례

 

물 세례의 시행은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다. 그것은 유대교로 개종하는 자에 대한 세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기 이전에도 그런 세례가 있었느냐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요한의 세례의 경우에는 확실히 해당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반응으로 참된 회개가 시작된 표식이었다. 한편 요한에게 받으신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 시대와, 십자가의 세례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될 사역으로 진입하는 공적인 시작을 알리는 표식이었다(참고. 눅12:50).

 

성령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시작하도록 한다. 물로 받는 세례는 이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상징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여기서 회개, 물 세례, 죄의 용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는,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속으로의 교제로 진입하는 하나의 실재의 연결된 측면들로 보인다(마28:19).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영적이며 내적인 특성을 가진다면, 그러한 외적인 의식들이 과연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새로움과 일치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곤 했다. 외적인 의식이 성령 사역의 충만함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내적인 빛'(inner light)에 대한 가르침이 지배적이던 17세기에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세례는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다....요한의 세례는 그에 대한 비유였고 한시적으로 명령된 것이며, 영원히 존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초대교회는 마태복음 28:18-20의 정신에 따라서 물 세례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조심스럽게 물 세레와 성령 세례의 차이점을 구별하였다(행10:47; 참고.11:16). 여기서 바클레이와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외적이며 물리적인 세례 의식에 내포된 신학적인 구조를 인식하는 데 실패하였다. 세례와 성만찬 모두 복음의 언어적인 표현에서 사용된 상징들(the signs; 단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그 말씀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이 알려지신 바 된다.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가 오면서 쓸모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복음이 우리 인간의 조건과 우리의 죄악된 상태에 더 잘 들어맞음을 가시적으로 예증해 주는 방법이다. 따라서 지상명령에는, 세례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생길 때마다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주님이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임재하시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마28:18-20).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내적인 끈으로 역사한다. 그분이 그들과 맺으신 각각의 언약은 말씀 가운데 포함된 약속을 보증하는 특별한 증표(sign)에 의해 확정되었었다. 노아와의 언약에서는 무지개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할례가 명백한 증거가 된다(창9:8-17; 17:1-4). 이것들은 언약의 약속을 상징하며, 믿음을 갖도록 그 언약을 확정시키는 물리적인 증표로 작용하는 것이다. '증표와 인침'이라는 용어는 할례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롬4:11), 이것은 모든 언약의 증표들이 작동하는 방법(modus operandi)을 잘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노아는 폭풍우 뒤에 언약의 상징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창9:12-17). 약속에 덧붙여서 증표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확증(도장)으로 작용하였다.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그가 베푼 세례의 주된 역할은, 세례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실존적이며 개인적인 중요성과는 별도로, 메시아가 계시되게끔 역사적 상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요1:31). 자주 간과되는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세례 시에 그분에게 주어진 증거와(막1:11), 그의 세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의 성취로서의 십자가에 대한 그의 견해와 함께(눅12:50; 막10:38-39), 물 세례가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 내적 의미(증표)를 지적하고 인치심을 받은 그에게 이를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의 세례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부의 말씀이 첨가되었으며, 성부의 성령이 그에게 강림하여 지금 상징된 그것이 십자가 상에서 참되고 최종적인 세례 가운데 충만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구비시킨 것이다. 곧 그분의 피에 담긴 새 언약을 향한 발걸음이요 그 중심에는 새 언약적 성령의 선물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겔36:26-27).

 

신약 성경에 의해 '세례'로 간주되거나 적어도 세례에 유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구약 성경의 두 사건은 한결같이 호된 물 시련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저주받는 동안 선택받은 자들은 구원으로 인도되었다. 이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벧전3:18-21),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고전10:2) 모두에게 해당된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진정한 세례도 물로 말미암은 호된 시련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시편 69편은 호된 물 시련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69:1-2).

 

이 시편은 성격상 신약 성경에서 메시아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구절들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언급되었다(시69:9은 요2:17과 롬15:3에서; 시69:4은 요15:25에서; 시69:25은 행1:20에서; 시69:22-23은 롬11:9-10에서). 물 세례로 상징된 극도의 시련이 십자가 상에서 실재로서 나타난 것이다. 요단 강에서 행해진 상징이 십자가 상에서 그분의 머리 위에 퍼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폭풍의 압도적인 힘 속에서 성취된다. 그분은 자신을 죽이다시피 한 비애와 쓸쓸함을 경험하였다(막14:33-34). 여기서 그분의 할례(눅2:21)가 상징하는 바와 그분의 세례가 상징하는 바가 하나로 결합된다(참고. 골2:11-15). 그리스도는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다'(사53:8). 그는 자신의 양 어깨에 멘 '우리의 모든 죄악'(사53:5-6, 8, 10)으로 인해서 압제 당하신다(사53:7-8).

 

바로 이런 수단들에 의해서, 용서와 구원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가 언약적인 저주를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복이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로 성취된 것이다(갈3:13-14).

 

새 언약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이다. 이는 믿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실체를 상징하며 인치는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다. 따라서 믿음은 물 세례를 통해 상징되고 인쳐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령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세례가 지닌 내적인 의미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따라서 거듭나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는 상징과 실재 사이의 제삼의 조건(tertium quid)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세례에 대한 신약 성경의 모든 공식적인 진술 속에 전제되어 있다.

 

로마서 6장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은 이런 원리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표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세례 받았으며,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분의 부활의 권능 가운데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라고 여기도록 격려받는다.

 

자연스럽게도 해석자들은 이것을 실제적인(혹은 유사) 성례주의라고 추론하거나 그와는 정반대로 여기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물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교단적 입장을 대변한다. 제삼의 대안이란 허용될 수 없다(Tertium non datur). 그러나 믿음을 떠나 의식 자체만으로 그 상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신약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다. 제삼의 가능성이 있다. 즉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 결과로 세례를 통하여,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믿도록 조명한다("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따라서 말씀과 관련된 그분의 사역과 성례와 관련된 그분의 사역에는 직접적인 병행 관계가 존재한다. 둘 다 객관적인 증표이다. 두 경우 모두 성령이 의미를 깨우쳐 주고 적용시키며, 그것들이 지시하는 실재가 믿는 자들 속에서 효력을 발휘하게끔 한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회심이라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거울로 생각되며, 그 핵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증거로 종종 간주되곤 한다. 따라서 회심 시 복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한 증표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성경의 관점이 아니며, 세례의 축복을 과소평가함은 물론 세례와 관계된 성령의 조명의 역사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에 따를 때, 모든 사람은 세례를 자신의 믿음의 결단을 반영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은혜의 상징이요 인치심이며, 우리를 위해 그분이 예비하신 부요함의 상징이다. 상징되고 인침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물 세례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은혜이다. 따라서 믿음은 세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표에 의해서 인쳐지며,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에 대해서처럼 믿음이 그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말씀으로 해석되는 상징과 함께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우리에게 확증되며, 그 확증에 의해 믿음이 강화되고 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행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세례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되, 그분의 메시아적 사역에 포장된 바 그분께 속한 것들을 취하여 백성에게 그분을 밝히 드러낸다.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말씀은 변화를 시키든지, 강퍅하게 하든지 그 기능을 수행한다(사55:11; 막4:10-12). 이와 유사하게 복음의 성례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은혜 안에서 변화를 초래하거나 심판 아래 강퍅하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경고할 때 무분별한 정신으로 성만찬에 참여할 때 그들은 아무 변화 없이 떠나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실상 그들은 심판을 먹고 마신 것이다(고전11:27-30). 복음의 상징에 대한 거부는 복음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거스르고 반항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이런 원리를 인식하면서, 미혹으로 곤궁에 처했을 때에 스스로를 향해서 '나는 세례 받은 자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세례를 통해 성령이 밝혀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고백으로 대처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보내신 분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듯이, 세례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성취하게 된다.

 

성령이 세례를(성찬도 마찬가지다)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성례 신학에서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잘못을 피할 수 있다.

(1) 한 가지 오류는, 의식의 상징적인 성격을 매우 주관화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행동, 결단, 경험에 의존하게 만들어 믿음의 기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즉, 믿는 자 스스로의 자원이나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로 돌이키게 하는 믿음의 기능을 망각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오류는, 상징이 축복의 효력을 지나치게 객관화함으로써, 상징의 수납을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수납과 동일시하고, 그 상징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믿음의 여지나,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는 것이다. 세례와 성만찬의 유효성은 성경을 읽는 것과 듣는 것의 효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듯이 성령의 사역으로부터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주의 만찬

 

세례와 성찬은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언약의 상징이자 인을 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리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성례는 독특한 기능과 독특한 목적을 갖고 있다. 세례는 시작이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상징으로서 단 한 번 받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의 상징이요 자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성령은 어떤 것을 특별히 증거하는가?

 

성찬의 핵심은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그것을 받아 먹는 것은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시고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10:16).

 

이것 역시 세례처럼 언약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월절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은(그것의 성취가 성만찬이다, 고전5:7-8), 하나님의 심판 곧 죽이는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들의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그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고 어린양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참여함을 의미했다(출12장). 그것은 언약에 의해 구속되고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한데 묶여 있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성만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새로운 언약을 인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복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담당하셨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도모할 새로운 언약의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언약의 저주와 심판의 잔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받으셨다.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자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그분의 간청은(마26:39),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이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암시한다(시75:8; 사51:17,22; 렘25:15,17; 겔23:31-33; 합2:16;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잔을 마심으로, 예수님은 헐벗음과 가난함과 목마름과 굶주림 가운데서(참고. 신28:45-48), 그리고 어둠 속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의 저주(마27:45; 참고. 창15:12) 아래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나무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는 저주 받은 사람의 경험을 모두 겪으셨다(갈3:13).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고 치시며 괴롭히신다고 느끼셨다(사53:4-6,10; 마27:46).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두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눅24:39).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 것이다. 그분이 떡을 떼실 때 제자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하나님의 언약의 근본적인 역동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가슴에 심판의 저주를 퍼부으시는 대신, 신자들은 믿음을 통해 언약의 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이제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이 그처럼 중요한 이유는 분명해졌다. 오직 성령의 사역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성찬에 대한 가톨릭(ex opere operato: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소위 예전적 성례론으로서, 성만찬을 신부로부터 받아 먹으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주장-역주)과 복음주의(기념설 주장자들: 루터에 반대하여 츠빙글리가 내세운 견해-역주)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다가 이제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누리는 것은 교회의 제도나 우리의 기억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장소적으로 빵과 포도주 안에 제한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로마 가톨릭의 견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단지 그분을 기억하는 일뿐인 것처럼 성만찬에서 떠나 계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기념설의 견해).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by the Spirit) 그 물질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알려지시는 이다. 성만찬에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교통(communion)이 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주님이 성경 안에(장소적으로), 혹은 믿음에 의해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에 의해 임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성찬 시에 빵과 포도주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임재하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어떤 물질적인 요소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다(행3:21). 그러나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되며 그분은 우리 가운데 서 계신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성만찬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기리켜 언급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것은 요한이, 교회가 '주님의 날에 성령 안에서'(계1:10) 그분과 함께 즐거워할 것에 대해 믿은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역사상 줄곧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예를 들면, 세빌의 이시돌은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임재하게 만든다고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몸에 자신을 묶음으로써, 믿음으로 성만찬을 받는 성도들에게 성찬의 권능 혹은 힘을 전달한다고 주장하였다. 코르비에의 라트람누스는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화체설에서 최고의 신학자로 자주 거론됨)와 맞서서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뛰어난 논쟁을 벌였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를 성령에 의한 임재로 간주하는 입장을 견지하고자 노렸했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칼빈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신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그의 강력한 설명에도 여전히 신비의 여지가 남아 있다.

 

비록 우리로부터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에게 침투하여, 그로 인해서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하더라도, 어떻게 성령의 비밀스러운 능력이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초월하여 우뚝 솟아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분량을 우리가 측량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기억하자. 우리의 마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믿음으로 품어 안게 하자. 즉, 성령은 장소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거룩하게 나눌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뼈와 골수에 파고들게 되고, 그분은 또한 성만찬에서,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인을 치신다. 이것은 단순히 공허하며 헛된 상징을 보여 줌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이 그분께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함을 밝히 드러내심으로써이다. 그리고 진실로 그분은 거기에서 상징되는 실재를 영적인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고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믿는 자들, 즉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참된 믿음으로 그처럼 위대한 자애로우심을 받아들이는 자들만 받을 수 있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V.17.10.)

 

이러한 사상[그가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인성의 실재에 대해 강조한다는 이유로 실제주의라고 불리는]은 칼빈의 성만찬 교리 전체에 깊이 배어 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고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으며,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영광스럽게 되신, 바로 그 인간의 몸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신다. 그렇게 해서 생명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된다."(Institutes, IV.17.4.)

 

성만찬에 대한 일반적인 복음주의 교리보다 오히려 칼빈의 용어가 훨씬 더 실재적임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그의 강해는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용어는 요한복음 6:51-58과 고린도전서 10:16에도 확실히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의 말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 때문에 성경 자체에 대한 불편함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신중해야만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실제로(real) 먹고 마신다는 견해를 가진 모든 사람이 문자 그대로(carnal, 식인종처럼) 그 몸과 피를 마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문맥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칼빈이 주장하는 바 성령의 권능과 역할이다. 성만찬에 관한 그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것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강림하시는 성령 사이의 연결성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고자 강림하신다(참고. 골3:1-4). 이와 유사하게, 성만찬에서 성령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성도 사이의 '떨어진 간격을 메꾸려고', 그리고 승귀하신 구주와 교통하게 하려고 찾아온다.

 

그러나 칼빈의 질문은 좀더 나아간다. 성찬의 식탁에서 신자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와 교통하는가?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 당하고, 죽으시고, 장사지내고, 살아나실 때에, 또한 지금 영광 가운데 승천하실 때 인성으로 옷 입으신 그 그리스도다. 육신을 입으신 말씀(Logos ensarkos) 외에 다른 그리스도란 없다.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통을 통하지 않는 다른 은혜의 방법은 없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합체라는 신비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통한다. 우리는 성령으로/영적으로, 즉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교통한다.

 

칼빈이 이보다 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될 필요는 없다. 이보다 덜 말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고전10:16) 교통(koinonia)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혹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에게 있는 인성의 지속적인 실재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은 칼빈이 성만찬에 대한 가르침에서 말한 것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기독론적 사상이 '다른 그리스도란 없다'라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승천의 진리를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것을 파악하기만 하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은, 물론(이 종교개혁가 자신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것이 나타내는 진리는 여전히 신비 속에 감춰져 있지만, 덜 난감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6:14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것을 취하여 그것을 제자들에게 알린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도적 계시를 통해서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만찬에서는 성경에 이미 알려지지 않은 다른 것이 새롭게 계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만찬에는,

(1) 눈에 보이는 상징물이 있으며

(2)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보혈에 대해 단순하고도 특별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로 인도하며, 성령 사역의 핵심으로 이끌어 간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새로운 계시란 없다. 다른 그리스도가 알려지는 것도 아니다. 로버트 브로스(Robert Bruce, 1554-1631)가 잘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성만찬 때에 말씀에서 얻는 그리스도와 다르거나 혹은 더 나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이 말씀과 결합된 물질적 상징의 증거를 통해 역사하실 때, 동일한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Robert Bruce, pp. 64, 85.)

 

과거에 기독교 저자들이 솔로몬의 아가서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성을 설명하고자 구애, 사랑 그리고 결혼 등의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입맞춤'이란 말을 했는데, 이것은 성령의 비밀스러운 사역을 의미한다. 입맞춤이라는 육체적인 표시 혹은 행위가 사랑을 전하는 것처럼(또는 상징하는 것처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가리키는 물질적인 표시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에 의해 사용되어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을 향해 품으시는 사랑이 전달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은혜의 확정인 성만찬은, 성령에 의해서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 있다. 즉 신자들이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성령에 의해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 때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은 완성될 것이다(고전11:26). 또한 성령께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때(계22:17), 상징물에 의해서 표시되던 것의 충만한 실재가 임할 것이며, 그러한 상징물은 성전 건물처럼 쓸데없는 것이 될 것이다(계21:22).

 

 

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에서 발췌 / (219-235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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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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