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7) 목자의 삶, 나그네의 삶

    7년 기근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을 떠나 야곱 일가가 모두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고센 땅에 도착합니다. 요셉은 형들 중 다섯을 택하여 바로를 알현하게 합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습니다, “너희 생업이 무엇이뇨?” 한국에서는 누구를 만나 인사를 나눌 때 옛날에는 어디에 사는 아무개, 누구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고, 요즈음은 대개 자신의 소속회사나 신분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끼리 어느 아파트 몇 평짜리에 사는지로 신분(?)과 등급과 써클이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이들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생업을 묻습니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존재가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로 결정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이 같은 질문을 하실지 모릅니다.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 그 때 “저는 이렇게 이런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외다.” 그런 다음 야곱이 바로에게 나아가 축복합니다. 아하, 그렇군요. 목자가 축복의 권세를 가진 사람, 천하의 바로까지 축복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로군요. (영어성경은 축복의 인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게 그거 아닌가요?)

    축복인지 축복인사인지가 끝난 후 바로가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나이인가 봅니다. 오래 살고 보아야겠군요. 야곱이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조상의 연수에 미치지 못 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보세요. 바로 앞에서 야곱의 대답은 ‘목자’였으며 ‘나그네’였습니다. 그리고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목자는 집이 없습니다. 양떼를 몰며 양떼와 함께 이동하며 장막에 기거합니다. 그 삶이 그리 평안하지는 못 합니다. 때로는 뜨거운 태양 아래 목마르고, 때로는 험악한 폭풍우에 부닥치며, 때로는 추위와 더위와 싸우며 때로는 악한 짐승을 지팡이와 막대기로 쫓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일백삼십 년을 살았다고 야곱은 대답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 인간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험하고 거친 세상 가운데서 악한 자들이 잡아먹고 삼키려고 노립니다. 양들은 악한 자들의 올무에 걸리고 구덩이에 빠지며 위험과 환난에 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시 28:9).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며 목자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누일 곳조차 없도다.” 하시며 거칠고 험악한 나그네의 삶을 몸소 사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 17)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 귀한 직업이 목자인데, 그러나 애굽사람들은 그들에게 고센 땅, 좋은 땅 라암세스를 주긴 했지만 목축을 가증히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목자를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목자를 따르려 하지도 않고, 목자의 삶을 살려고도 않고, 나그네의 삶은 더욱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초라한 장막 보다는 웅장한 집을 짓고 거하며, 거칠고 힘든 삶 보다는 안온하고 풍족한 삶을 살기 원하며, 재산을 모으며, 명예와 권력을 좇으며, 좋은 것. 즐거운 것들을 좇으며, 영원히 죽지 않고 이 땅에 살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땅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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