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8) "나도 안다, 내 아들아."

이응한 목사 2017. 3. 9. 00:39

(창 48) "나도 안다, 내 아들아."

 

야곱이 애굽에 와서 17년이 지나 147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눈도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147년을 살았으니 오래 산 셈입니다. 그러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 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 좋은 일일까요?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도 “이 땅에서 너희 연수가 길리라.” 하시며 부모공경에 대한 복으로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969세를 산 므두셀라의 인생이 성경에 오래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래 살면 어떻게 될까요? 오래 살면 결국은 육신이 허물어지고 기운이 쇠하여질 것입니다. 육신이 무너지고 기운이 쇠하여지면 이 땅에서의 삶의 미련도 없어지고 죽음의 두려움도 사그라지고 괴로운 인생길을 어서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 쉬고 싶어지게 될 것 같다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만 그러나 그저 오래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 하고 죽음의 너머를 알지 못 한다면 이 땅의 삶은 여전히 미련으로 남고, 죽음, 곧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두려운 공포로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약속 받은 것, 그리하여 평안히 하나님의 품에 안길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떠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복 중에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과 또 죽음의 너머를 두려워합니다.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쳤고 이 세상에 오래 남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자손대대로 자기를 기억하고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죽어서도 혼령이 제사상에 찾아올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렇게 이름이라도 세상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유럽의 유명관광지에다 자기 이름을 새기기도 한다지요. 북한의 독재자는 금강산, 묘향산의 거대한 바위들마다 자신의 이름을 깊이 파서 새겨놓았습니다. 심각한 자연훼손입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떠나지 못 하고 금수산궁 유리관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 지은 죄와 악행이 하늘에 사무치는 것을 알아서인지 죽음이 두렵고 이 세상 떠나기가 어려워서인지 썩어가는 육신에 방부제와 알콜을 쳐바르고 유리관 속에 누워서 버티는 가증하고 가련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다 불못에 던지우고 그들이 쌓아올린 것은 다 소멸되고 재와 같이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조상에게로, 또 하나님께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옴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 복을 허락하시고 약속하신 약속, 영원한 약속 말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후손과 약속의 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 말입니다. 야곱은 그 약속을 붙잡고 그 조상이 장사된 곳, 막벨라굴에 레아도 장사하고 또 자신도 그곳에 장사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회상합니다. 밧단아람을 떠나 남편을 따라 아버지가 계시는 브엘세바로 돌아가는 도중에 에브랏, 곧 하나님의 떡집 베들레헴 길에서 베냐민을 낳고 죽어 그곳 길가에 묻힌 라헬을 말입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가련한 라헬이지만 그 통곡과 절절한 사모가 묻힌 그곳 베들레헴에서는 먼 훗날 메시야가 탄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는 라헬을 통하여 나타낸 그 아픔과 슬픔과 애통과 소망과 생명의 그 길 베들레헴의 그 길로 아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이 낳은 요셉, 그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품에 안고 입 맞추고 이들을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손을 어긋맞겨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오른손으로 축복하고 장자 므낫세를 왼손으로 축복합니다. 요셉이 이를 지적하자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고 하면서 계속 에브라임을 앞세워 축복합니다. 야곱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곱 자신이 에서의 동생으로 둘째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사실이었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기 살기로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았습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았고 장자권을 붙좇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받은 축복을 품어안고 천리길 외삼촌 집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켰습니다. 그 야곱이 지금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손을 어긋맞겨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둘째였기 때문에 둘째를 축복한 것이었을까요? 둘째를 장자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지레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목숨을 걸고 붙잡으라고 권면하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소털에 속아 아버지가 축복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야곱이 목숨을 걸고 붙잡은 것이 바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의 회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이기를 바라시나요? 무엇을 붙잡고 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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