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를 보면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열리는 장자의 회의에 참석할 뿐 아니라,

사탄이 욥을 참소하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다.

사람의 짧은 일생은 고난과 죄에 대한 유혹과 끊임없이 투쟁한다.


천국에 거주하는 천사들조차

루시퍼의 유혹이 허락되어 수많은 천사들이 타락하여 귀신의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유혹이 있을 가능성을 허락하셨는데,

에덴동산에 거주하던 최초의 부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인성측면에서 사탄의 유혹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가장 센 유혹인 세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그리스도인이 거듭났다고 하여 유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만약 지속적으로

죄의 유혹에 빠진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육체의 몸을 입고 살아가며

세상은 욕망과 정욕으로 끊임없이 신자를 유혹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죄와 구원>에서 사람이 세 가지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안일해지려는 경향과 옛품성으로 복귀해지려는 경향,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도덕적이지 못한 것으로,

영적인 것은 영적이지 못한 것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죄의 성향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것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반란이다.

그 성향이 남아 있는 한 유혹은 내 안에서 죄의 습성을 찾아낸다.


그러나 주님께서 죄의 성향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시면

유혹은 내 안에서 죄의 습성을 찾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가능성을 시험해 볼뿐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니다.

사람은 유혹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오히려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시당하는 것이다.


유혹하는 자는

유혹당하는 자가 연약하게 반응하는 요소를 잘 찾아낸다.


탐심, 간음, 교만, 술취함, 비방, 명예같은 것으로

모든 사람은 각가 속성에 맞게 유혹을 받는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유혹은 죄와 달리 원하는 목적의 경로에서 복잡한 상황으로 인도한다.

사람은 그 딜레마 가운데 어느 쪽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죄지을 가능성과 죄를 짓는 습성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지만 살인하는 습성은 없다.

죄의 습성은 그것이 실천에 옮겨지든 아니든 행위 자체와 다름없다.

천사나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불순종의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선택의 유혹이 왔을 때

그 유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불순종의 습성을 찾지 못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죄의 성향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인간중에 없다.


그리스도안에서 죄의 습성은 제거되었지만

죄를 지을 가능성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언제든지 죄로 돌아갈 경향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유혹에 넘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욕심이나 탐욕 때문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4)


욕심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특별히 보암직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종착지는 파국적이다.


그리스도인이 욕심의 결과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심지어 각자가 이해하는 자기 상황에 맞추어 자기 방식대로 성경을 해석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유혹 자체를 막아주지는 않으신다.


대신 유혹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시험이 오는 것을 막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각자 선택하는 환경도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다.


아브라함은

안락한 우르라는 도시를 떠나 가나안 초원으로 갔고

반대로 롯은 소돔 도시로 들어갔다.


솔로몬은 부귀와 많은 이방여자들에 둘러싸여

종교적으로 타락의 길을 자초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선택의 상황에서 딜레마에 빠질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신앙의 유익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방식을 우선순위로 놓을 때

유혹이 더 많은 길을 피하여 평강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보다 평강의 삶을 추구하자.



출처: 카이로스 / 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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