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구원론 2017. 5. 21. 02:01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이 글은 채경락 교수가 지난 4월 22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 69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채 경 락 교수(고신대학교)

 

Ⅰ. 들어가는 글

구속사적 설교는 설교학의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다.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성경적 설교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반대편에서는 해석학적으로 무리가 있는 접근이라고 우려한다. 구속사적 설교 주창자는 대표적으로 Sidney Greidanus, Graeme Goldsworthy 등이 거명되는데, 그들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구속사적 진전 안에서 신약과 구약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절정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혹은 구속사적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강한 확신은 은연중에 혹은 때로 명시적으로, 그렇지 않은 설교를 향해 미완의 설교 내지는 심지어 비기독교적 설교라는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한편, 구약학자인 Walter Kaiser는 저자-지향적 해석학 원리에 기초하여 구속사적 설교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구속사적 설교가 이슈가 되는 것은 특히 구약을 설교할 때인데,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구약을 읽을 때에도 신약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의 진전 속에서 신약이 구약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Kaiser는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는 주입(eisgesis)이라고 비판한다. Kaiser에게 저자는 우선적으로 인간 저자이며, 타당한 해석(exegesis)의 울타리 역시 인간 저자의 의도다. 따라서 인간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내용을 본문에 억지로 주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약 저자는 구약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약을 읽을 때 구약을 참고하는 것은 당연하고 타당하지만, 구약 저자는 신약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이해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한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Kaiser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Greidanus의 길을 따를 것인가? 특히 구약을 설교할 때 Greidanus 등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미완의 설교라고 우려하는 Kaiser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Kaiser가 시대착오적 주입이라고 비판하는 Greidanus의 길을 따를 것인가? 이것은 설교학자들의 논의 속에서도 민감한 이슈지만, 현장 설교자들에게도 난감한 갈림길이다. 둘 모두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성경적 설교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해설교자들은 Kaiser의 저자-지향적 해석학을 원리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면서 또한 구속사적 진전에 기초한 그리스도 중심적 메시지의 가치도 충분히 공감한다. 이 둘을 동시에 포섭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본 논문은 바로 그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본 논문은 해석과 적용의 구도 속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새로이 이해함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하며, 이를 통해 구속사적 설교 논의의 긴장감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Kaiser의 저자-지향적 해석이 말 그대로 해석의 범주에 속한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둘의 논의 범주가 서로 다르다는 의미다. 따라서 둘은 양자택일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공존의 관계다. 구속사적 설교를 자주 구속사적 ‘해석’이라고 부르는데, 본 논문은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며, 이를 통해 Kaiser와 Greidanus 사이의 긴장감이 해소된다고 본다. 해석이 옳고 그름의 엄밀한 판단 대상이라면, 적용은 다분히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가 실천하고 있는 고유한 적용 자산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구속사적 설교는 전통적인 강해 설교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적용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구속사적 메시지로 나타난다. 성경신학적 적용, 하나님 중심의 적용, 그리고 고백형 적용 등의 이름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기존 설교 강단에 보다 풍성한 적용의 기조를 공급한다. 또한 이미 일부 구속사적 설교자들 사이에 시도되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소위 실존적 적용을 구분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본 논문을 통해 구속사적 설교와 전통적 강해설교 사이의 긴장감이 다소간 해소되고, 보다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Ⅱ. 펴는 글

 

1.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본 논문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는 구속사적 설교와 전통적인 강해설교의 설교 작성 단계를 비교하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Haddon Robinson의 강해설교 작성법과 Sidney Greidanus의 구속사적 설교 작성 단계를 비교해보자. 둘은 공히 10단계 작성법을 소개하는데, 병치하면 다음과 같다.

 

Robinson의 작성 단계

Greidanus의 작성 단계

1단계. 단락 선택하기

1단계. 본문 선택하기 - 청중의 필요 고려

2단계. 단락 연구하기

2단계. 본문 읽기 - 문학적 문맥 안에서

3단계. 본문 개요 작성하기

4단계. 본문 해석하기 - 역사적 배경 안에서

3단계. 석의 주제 발견하기

5단계. 본문의 주제와 목적 기술하기

- 원독자에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4단계. 석의 주제 분석하기

- 설명, 증명, 적용의 발전 질문

6단계.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메시지

이해하기 - 구속사적 해석의 일곱 다리 활용

5단계. 설교 주제 결정하기

6단계. 설교의 목적 결정하기

7단계. 설교 주제와 목적 기술하기

7단계. 목적 달성 방법(설교 유형)

결정하기

8단계. 설교 형식 선택하기

8단계. 설교의 개요 작성하기

9단계. 설교 개요 준비하기

9단계. 설교의 개요 채우기

10단계. 서론과 결론 작성

10단계. 설교문 작성하기

- 구어체로

주목할 대목은 Robinson의 3-5단계와 Greidanus의 5-7단계인데, 공히 석의 주제(본문 주제)에서 설교 주제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Robinson의 4단계와 Greidanus의 6단계에 주목하라. Robinson의 4단계를 통해 석의 주제를 현청중에게 ‘적용’한다. 석의 주제가 원독자에게 주어진 메시지라면, Robinson은 4단계 발전 질문들(적용 질문 포함)을 통해서 그것이 현청중에게 의미하는 바를 추적하는데, 그 결과물이 설교 주제(5단계)다. 다시 말해, Robinson은 석의 주제(3단계)를 현청중에게 적용(4단계)함으로써, 설교 주제(5단계)를 확보한다.

한편, Greidanus는 본문 연구의 결과물인 본문 주제(5단계)를,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이해(6단계)함으로써, 설교 주제(7단계)를 확보한다. Greidanus의 본문 주제(textual theme)는 Robinson의 석의 주제(exegetical idea)와 사실상 동일한데, 본문이 원독자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의미한다. 두 사람 모두 여기서 출발하여 현청중을 위한 설교 주제로 나아가는데, Robinson이 4단계 ‘적용’을 통해 5단계 설교 주제로 나아간다면, Greidanus는 6단계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이해하기’를 통해 7단계 설교 주제로 나아간다. 구도상 Robinson의 4단계와 Greidanus의 6단계는 동일 단계로서, 원독자에게 주어진 본문의 메시지를 현청중에게 적용하여 설교 주제를 확보하는 단계다. 다시 말해, Greidanus의 구속사적 설교는 본문 해석의 결과물이 아니라, 적용의 산물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구속사적 적용을 통해 확보된 구속사적 메시지다.

 

석의 주제 ======> 구속사적 적용 =====> 구속사적 설교(메시지)

 

이로써 Greidanus와 Kaiser 사이의 긴장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둘은 논의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Kaiser가 본문 해석(Robinson의 2-3단계, Greidanus의 2-5단계)을 다룬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의 영역(Robinson의 4-5단계, Greidanus의 6-7단계)에 속한다. 둘은 양자택일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충분히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공존의 관계다. 물론 Kaiser가 Greidanus의 구속사적 적용을 거부할 수는 있다. 적용은 원리적으로 다양성으로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Greidanus가 Kaiser를 거부할 수는 없으며, 사실 거부하지도 않는다. Greidanus는 자신의 2-5단계를 통해 Kaiser가 요구하는 인간 저자-지향적 해석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Greidanus와 Kaiser의 논의 사이에 다소간 긴장감이 감도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용어 사용의 혼선 때문으로 보인다. Greidanus를 비롯한 구속사적 설교 이론가들은 흔히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구속사적 해석과 구속사적 설교는 익숙하지만, 구속사적 적용이라는 용어는 지극히 생소하다.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명칭을 통해 구속사적 메시지는 적용이 아니라 해석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여기서 Kaiser의 해석과의 긴장이 발생한다. 사실 둘은 범주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다른 말로, 구속사적 설교를 적용의 범주가 아니라 해석의 범주로 이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과도한’ 확대의 결과라고 판단된다. 문학적 문맥의 과도한 확대, 그리고 역사적 문맥의 과도한 확대다. 설교를 위한 본문 해석에 관한 Greidanus의 다음 말에서, 두 가지 과도한 확대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역사적 주제와 목적을 확고히 마음에 품은 채, 이제 우리는 지평을 확대하여 그 메시지를 전체 정경과 모든 구속 역사의 맥락(context) 안에서 이해하기를 시도할 수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수준에서, 문학적(literary) 해석은 정경(canonical) 해석이 된다. 그것은, 이 단락이 창세기 1장에서 계시록 22장까지 전체 성경의 문맥(context)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역사적(historical) 해석은 이 수준에서 구속사적(redemptive-historical) 해석이 된다. 그것은, 이 단락이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이야기의 맥락(context)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첫째,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본문의 문학적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한다. 위에서 보듯이 Greidanus는 본문(text)의 문학적 문맥(literary context)을 정경 문맥(canonical context)으로 확대하는데, 이는 과도하다. 강해설교의 문학적 해석의 대원칙은 문맥 안에서(in its context)의 연구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문맥은 좁게는 말 그대로 문학적 단위 내에서의 문맥이다. 좁게는 절별 문맥 혹은 장별 문맥, 최대로 확대해도 권별 문맥을 의미한다. 사무엘상 17장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해석한다면, 작게는 사무엘상 16장과 18장 문맥을 살펴야 하고, 크게는 사무엘상 전체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Greidanus는 문학적 문맥의 범위를 정경 문맥으로까지 확대한다. 이는 일반적인 문학적 문맥을 넘어서는 과도한 확대다.

필자는 하나의 단락을 정경 전체의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다. 성경 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역사 전체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신약은 물론 구약 본문도 정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이라고 칭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해석이 전제하는 통상적인 문학적 문맥인 권별 문맥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은 지혜롭지만, 과도하게 문맥을 넓히는 것은 말 그대로 과도한 해석의 단초가 될 수 있다.

Greidanus가 문학적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하는 것은, 문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설교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반동의 결과로 보인다. 그는 소위 ‘본문 설교(textual preaching)’에 대한 오해를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본문 설교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주제 설교와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선택된 본문을 그것의 문맥에서 분리하여 오직 그 본문에만 설교를 제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본문을 중시하는 설교자들이 주어진 본문 자체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칫 문맥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피력하고 있다. 문맥에 대한 소홀은 곧 본문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1) 본문의 원래 의미 결정하기. (2) 정경 전체 문맥에서의 의미로 나아가기. 그리고 (3) 이 의미를 오늘 우리 청중을 위해 적용하기. 청중을 위한 적용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본문을 정경 전체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문맥을 소홀히 한 본문 해석에 대한 Greidanus의 우려와 비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그 대안이 문맥의 과도한 확대가 될 수는 없다.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본문 해석도 문제지만,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하는 것도 건강한 본문 해석에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Kaiser가 우려하는 대로,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과도한 의미의 주입(eisgesis)을 초래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Greidanus의 소위 구속사적 ‘해석’은 해석이 아니라 적용으로 봐야 한다. 문학적 문맥의 경계인 권별 문맥 안에서 이루어진 본문 이해는 해석이요, 권별 문맥을 넘어선 정경 문맥 안에서의 본문 이해는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마땅하다.

둘째,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역사적 문맥도 과도하게 확대한다. 위에서 보듯 Greidanus는 본문의 역사적 문맥(historical conext)을 구속사적 문맥(redemptive-historical context)으로 확대하는데, 이는 과도하다. 강해설교자들은 본문 해석에 있어 문학적 문맥과 더불어 역사적 해석을 중시한다. 역사적 정황과 실존적, 문화적 상황을 감안할 때 본문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석서들은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역사적 배경 연구를 포함한다. 그런데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그 본문이 기록된 역사적 시대를 넘어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로 과도하게 확대한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17장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에 관하여, 구약의 왕정 시대라는 배경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배경으로 상정한다.

필자는 하나의 본문 혹은 사건의 의미를 구속사 전체를 배경으로 추적하고 이해하려는 Greidanus의 열심과 방법론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존경하는 마음으로 수용한다. 특정한 시대적 배경에 집중하는 미시적 안목이 놓칠 수 있는 깊은 의미를, 구속사의 거시적 안목이 추적하고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경 문맥에서의 본문 이해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하듯이, 저자가 본문을 기록한 특정한 시대적 배경을 초월하는 구속사적 조망 속에서 본문을 보는 것은 일반적인 해석의 범주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Greidanus의 구속사적 해석은 ‘(구속)역사적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사적 적용’이라 부름이 마땅하다. 이는 Greidanus 자신이 구분한 해석과 적용의 범주에도 부합한다. 그는 “[성경] 메시지가 처음에는 한 고대 교회에 전달되었기에 설명(explication)이 필요하다면, 이제는 그 메시지가 한 현대 교회에 전달되어야 하기에 적용이 필요하다.”고 정리한다. 해석(혹은 설명)이 저자가 원독자에게 의도한 메시지를 발굴하는 과정이라면, 적용은 그것이 현청중에게 가지는 의미를 발굴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Greidanus가 강조하는 구속사적 메시지는 원리적으로 원독자였던 구약 교회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교회에 선포되는 메시지다. 다시 말해,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설교자들이 역사적 해석을 실천하는 이유는, 원저자와 원독자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함이다. 저자와 원독자의 대화는 특정한 역사적 정황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기에,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 사이에 주고받은 메시지를 오해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인데, 여기에 구속사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은 해석의 차원을 넘어선다. 구속사적 메시지 자체가 오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일반적인 본문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는 메시지라는 말이다. 구속(역)사적 적용을 역사적 해석의 범주에 놓는 것은, 일종의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해석이 다루는 역사와 구속(역)사가 가리키는 역사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전자가 본문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거대한 통치와 섭리를 지칭한다.

요컨대, 구속사적 설교(메시지)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Greidanus가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본문 해석의 문학적 문맥과 역사적 맥락을 과도하게 확대한 처사다. 권별 문맥을 정경 문맥으로 확대하고, 역사적 배경을 구속사 전체로 확대하였는데, 이는 저자와 원독자 사이의 대화 지평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이로 보건대, 구속사적 설교는 구속사적 ‘해석’이 아니라 구속사적 ‘적용’으로 칭함이 바람직하다.

 

2. 구속사적 적용의 특성

지금까지 우리는 구속사적 설교(메시지)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범주에 속함을 살펴보았다. 이제 구속사적 적용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겠다.

 

1) 성경신학적 적용

우선,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이다. 먼저 논의를 위해 필자는 대(大)적용과 소(小)적용을 구분할 것은 제언한다. 대적용은 석의 주제를 청중에게 적용하여 설교 주제를 얻는 과정이라면, 소적용은 설교 주제를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과정이다. 설교에서 적용은 사실상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지는데, 먼저 원독자를 겨냥했던 석의 주제를 현청중을 위한 설교 주제로 변환하는 대적용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설교 주제를 청중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소적용이 이루어진다. 구속사적 적용은 대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성경신학적인 대적용을 추구한다. 강해설교자들이 실천하는 대적용의 일반적 루트가 원리화 혹은 추상화였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을 전향적으로 도입한다. “성경신학의 통찰들은 한 본문을 그 단락과 복음 전반에 부합하도록 풀어주기를 원하는 설교자들에게 결정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인 강해설교가 미처 깊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새로운 적용 루트다. Graeme Goldsworthy는 강해설교 작업에 성경신학의 중요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설교를 주제로 다루는 서적들 사이에서 성경신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조사했다. 나는 설교에서 성경신학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징후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설교와 관련된 상당수의 서적들을 검토했다. 하지만 심지어 강해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서적들 사이에서도 성경신학이 설교 준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경우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성경신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되살아나고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여전히 먼 것 같다.

 

구속사적 설교는 곧 성경신학적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속사적 메시지가 생산되는 주요 (대적용) 루트가 성경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신학적 적용은 그 신학적인 특성으로 인해 적용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적용의 영역보다 오히려 신학적 해석의 영역으로 인식된다.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구체적인 적용 대신 다분히 신학적인 선언의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그 자체로 (대)적용의 영역이다.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이 빈약하다는 비판에 대하여 이우제는 적실성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다를 뿐, 구속사적 설교도 매우 적실한 설교라고 변호한다. 적용은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하는 방편인데, 설교의 적실성은 구체적인 행동 적용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필자는 대적용과 소적용의 구분을 제언하였는데,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을 때의 적용은 소적용을 일컫는다. 반면, 구속사적 설교도 적실성을 충분히 확보한 설교라고 변호할 때, 그때의 적용은 대적용을 가리킨다. 구속사적 설교는 소적용보다 성경신학에 의거한 대적용을 통해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하는 설교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구속사적 설교가 소적용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 관하여 Greidanus는 다음과 같은 적용을 제언한다.

 

구체적인 적용은 교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핍박으로 고통당하는 교회라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정복하였고 또한 정복할 것이다. 만일 국가의 번영을 이기적으로 향유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우주적 전쟁의 시각을 놓쳐버린 교회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악을 향한 우리 시대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면할 수 있다. 만일 전쟁에 참여는 하지만 자기 힘을 의지하는 교회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에게 힘을 주셔서 싸우시도록, 초대할 것을 권면할 수 있다. 요는 구속사적 진전은 그리스도 중심적 초점만이 아니라 현시대 적용도 부여한다.

 

그런데 인용에서 보듯, Greidanus가 말하는 적용은 구체적인 삶 보다는 포괄적인 선언에 가깝다. 구체적인 삶 적용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비판자들이 바라는 만큼은 구체적이지 않다. 비판자들은 보다 구체적인 삶 적용을 기대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전쟁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 것인지, 또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투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한, 실제로 실천 가능한 구체적인 적용을 기대한다. 물론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설교의 적실성이 반드시 소적용, 즉 구체적인 행동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포괄적인 신학적 선언만으로도 충분히 적실한 설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적용에 관심을 쏟으라는 비판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요컨대,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이라는 새로운 적용 자산을 공급하였다. 본문에서 삶으로 바로 직진하지 않고, 구속사적 발전을 좇아 성경신학적인 메시지(적용)을 확보한 후, 거기서 청중의 삶으로 나아간다. 이는 전통적인 강해설교의 적용에 구속사적 설교가 선물하는 소중한 기여다.

 

2)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

둘째,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메시지)을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적용의 초점은 주로 사람에게 맞추어진다. 다시 말해 사람의 생각, 사람의 행동, 사람의 반응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말 그대로 사람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에 있어서도 하나님 중심성, 나아가 그리스도 중심성을 견지한다.

구속사적 설교의 주제 문장을 살피면, 대체로 “하나님은” 혹은 “예수님은”이라는 주어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가인과 아벨 사건을 설교하면서 Greidanus는 “그리스도가 최후의 승리를 얻으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 계보를 그의 성실로써 보존하신다.”를 설교 주제로 잡는다. 또 창세기 12장을 설교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되도록 하시려고 그의 백성들에게 이 땅을 주신다.”를 설교 주제로 잡는다. 물론 우리 인간이 주제 문장의 주어가 되기도 하지만, 그때도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예를 들어, 전도서 7장을 설교하면서 그는 설교 주제를 “하나님이 때를 주권적으로 정하셨으므로, 우리는 곤고한 날에는 그 날의 상대적 유익을 찾아야 한다.”로 정한다.

구속사적 설교의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성은, 본문에 대한 하나님 중심적 해석에 기초한다. Greidanus는 하나님 중심적 해석, 즉 신중심적(theocentric) 해석을 애초에 강해설교를 위한 본문 연구의 한 요소로 포함시킨다. 강해설교자들은 통상 본문의 문법적, 문학적, 그리고 역사적 해석을 실천하는데, Greidanus는 여기에 신중심적 해석을 추가하여 역사적 연구, 문학적 연구,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 연구로 구성한다. 본문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해하기까지는 본문 해석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Greidanus가 이렇게 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중시하는 이유는, 성경은 곧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 전체를 다음 네 포인트로 요약한다. “창조(창 1-2장), 구약 시대의 구속(창 3장-말 4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마 1장-계 20장), 새 창조(계 21-22장).” 네 포인트의 의미상 주어는 공히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창조요, 하나님의 구속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 창조다. 그는 이 네 포인트가 메타 내러티브가 되어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정당한 본문 해석을 위해서는 “이 단락이 하나님, 그의 구속 행위, 그의 언약, 그의 은혜, 그의 백성을 향한 그의 뜻에 관해 무엇을 계시하는가?”를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본문 해석은 곧 하나님 해석, 즉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하나님 중심적 해석은 구속사적 적용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레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된다. 하나님의 모든 구속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Greidanus는 모든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해석하기를 요구한다. 강해설교는 곧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는 Chapell의 주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고, 또 행하실 일을 중심에 세우지 않는 설교는 기독교적 독특성을 상실한 인간 중심적인 믿음을 창조한다.”고 우려한다. 그리스도를 비켜간 설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적 설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금언으로 사랑하는 “이 성경이 곧 나를 증거한다.”(요 5:39)는 구절의 설교학적 실천이다.

하나님/그리스도의 중심성이야말로 구속사적 설교가 전통적인 강해설교에 공급한 가장 소중한 자산일 것이다. 설교는 인간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 선포이고, 하나님 선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Timothy Keller는 성경을 읽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나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혹은 내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책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분이 행하신 일에 관한 책으로 읽을 것인가. 물론 이 둘은 양자택일의 대상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지만, 더불어 사람에 관한 메시지다. 요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이냐에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무게중심을 확고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둔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매번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요청한다. Greidanus는 『구약에서 그리스도 설교하기』를 출판한 후 창세기, 전도서 등 권별로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지에 관한 저작을 내놓고 있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설교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Keller 역시 성경의 모든 장르,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성경의 모든 주제와 모든 주요 인물, 또 모든 주요 이미지와 모든 구원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주창하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예시한다. 심지어 본능을 통해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설교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현장 목회자들에게는 다소 과한 지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설교가 중요하지만, 1년 52주 모든 설교를 그렇게 채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목회적으로 편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가능하다. 그러나 작은 나무 한 그루도 전체 숲의 조망 속에서 제대로 터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적 해석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으로 나아가라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의 외침은 모든 강해설교자들이 마음에 담아야 할 소중한 권면이다.

 

3) 고백형 적용

셋째, 구속사적 설교는 고백형 적용을 중시한다. 고백형은 행동화 적용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설교의 적용이 구체적인 행동 변화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세상,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으로 구성될 도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적용의 중심에 자주 세우는데, 이것이 강해설교의 적용에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공급한다.

적용하면 으레 행동실천 혹은 행동화를 많이 떠올린다. 적용과 행동화의 동일시는 소위 ‘관찰-해석-적용’ 구도의 영향이 크다. 개인 묵상에 자주 활용되는 이 구도에서, 관찰은 본문 읽기를 의미하고, 해석은 본문 연구를 통한 원리화를, 그리고 적용은 행동화로 인식된다. 본문을 읽어 원리를 확보하고, 그것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것이 적용이라는 구도다. 이는 개인 묵상을 넘어 설교 작성에도 활용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구도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설교의 적실성은 행동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적용은 행동화보다 크다.

적용의 본질이 청중의 실천과 반응이라면, 설교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반드시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적실성을 논하건대, 꼭 적용된 행동 지침이 아니더라도 복음 자체가 적실하다. 설교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청중이 마음으로 받아 고백하는 자체로도 충분히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한다. 더욱이 구약의 원독자에게 전달된 미완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완성된 형태로 선포하고 함께 고백한다면, 그 자체로 더할 나위없는 적실한 적용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고백형 적용은, 성경의 직설형(indicative) 복음의 중시에서 나온다. 성경은 다양한 표현법을 사용하는데, 대표적으로 직설형과 명령형(imperative)다. 성경에 동원되는 언어 형태 혹은 패턴을 연구한 John Carrick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패턴은 직설-명령(indicative-imperative)의 조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형적으로 서신서의 전반부는 직설형 교리를 선포하고, 후반부는 명령형 윤리를 선포하는 패턴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 두 영역 가운데 구속사적 설교는 직설형 교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거기서 고백형 적용이 나온다.

물론 구속사적 설교는 명령형 적용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수용하되, 다만 직설형 복음에 철저히 기초한 명령이기를 요구한다. Bryan Chapell이 명령형 메시지에 대한 구속사적 설교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거하지 않는다. 다만 그 원천을 불가항력의 은혜 안에 위치시킨다. 순종의 법칙은 변함이 없다. 다만 이유가 변했을 뿐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이름 하여 ‘고백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고백은 단순 동의가 아니며,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수반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우리의 강단에서 자주 성경적 고백과 무관한 인본주의적 윤리가 선포된다고 우려한다. 다른 말로 복음의 동기가 아닌 인간적 열심에 기초한 윤리가 자주 선포된다고 염려한다. 선포되는 명령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해서 동일한 메시지는 아니다. 표면적인 선포와 더불어 이면의 동기가 메시지의 근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단순 윤리적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고백적 행동이어야 한다고 주창한다.

소위 Do 설교, 혹은 Be 설교에 대하여 Chapell은 다음과 같이 균형을 잡아준다. “Be 메시지 자체는(in themselves) 잘못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고립되면(in themselves) 잘못된 것이다.” 명령형 설교 자체가 오류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라!” 혹은 “저렇게 되라!”는 명령형 메시지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 가르침이 구속적 맥락에서 나왔음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온전한 의미의 기독교적 설교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Keller는 다음 말로 Chapell의 정리에 공감을 표한다. “어떤 설교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일러주고 그 원리를 복음의 맥락 안에 연계시키지 않는 것은, 자칫 열심히만 하면 스스로 감당할 만큼 충문히 완벽해질 수 있다는 [비복음적인] 인상을 주게 된다.”

설교자에게 고백과 명령, 혹은 직설형 복음 선포와 명령형 권면은 결코 양자택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많은 신학적인 이슈들이 그렇듯이, 이 경우도 둘 사이에 유기적인 균형이 필요하다. 설교의 이상은 본문에 충실한 설교일진대, 정창균이 말하듯이 “본문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본문은 무엇인가를 행하고자 한다. 즉 청중에게 장엄한 구속사를 설명하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어 진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회중에게서 어떤 반응을 창출해낼 것을 의도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할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에 기초하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반응을 지향하는 균형 잡힌 설교다. 행동 적용에 무게중심을 두었던 설교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강조하는 고백형 적용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행동 적용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실존적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

지금까지 우리는 구속사적 설교가 추구하는 적용의 특성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구속사적 설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이른바 실존적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적용)다. 일반적으로 구속사적 설교는 다분히 신학적인 설교로 알려져 있다. 성경신학의 루트를 좇아, 하나님 중심적인 고백형 적용을 중시한다.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접근도 시도되는데, 이른바 실존적 적용이다.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찾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고통의 문제인데, 고통은 신비의 영역으로 불릴 만큼 인간 실존의 풀리지 않는 난제 중의 난제다. 성도에게 고통이 찾아올 때, 설교자들은 자주 하나님의 선한 뜻을 가지고 접근한다. 섭리 신앙에 기초하여 ‘필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겁니다!’라는 말로 위로한다. 그런데 일정 부분 이해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지만, 고통의 깊이가 깊어지면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한다. 더 큰 신앙인으로 빚어가려는 연단의 과정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고통의 당사자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에 Bryan Chapell은 고통이라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명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소개한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하신 분이 결코 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 시대의 가장 극심한 고통 가운데 궁극적인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을 수 있는 바탕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고통에서 멀찍이 물러난 객관적인 고통 신학은, 고통 받는 실존에 다가갈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 오직 고통 중에 있는 자, 특히 나보다 더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고통을 당한 자가 고통 받는 실존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데,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고통 받는 실존들의 위로와 해명이 된다. 지금까지의 구속사적 설교가 신학적인 루트를 따라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면, 이 경우는 실존적인 요청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끌린다.

고통 외에도 Bryan Chapell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메울 수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 실존을 구멍이 송송 뚫린 스위스 치즈에 비유하는데, 이 구멍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구현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Greidanus가 약속과 성취의 구도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갔다면, Chapell은 실존적 공백과 메움의 구도를 따라 그리스도를 초청한다. 이것이 실존적인 구속사적 설교의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Timothy Keller는 문화적 압점(pressure points)이라는 개념을 통해 실존적 적용을 추구한다.

 

기독교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하자면 아픈 데가 있다. 꽉 끼는 신발을 신었을 때 발이 아파 오듯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아픔을 느끼는 데가 있다. 세상에 대해 그들이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정작 그들의 직관이나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아픈 데를 파악하고, 질문과 제안과 예화와 예들을 동원해 그곳을 눌러야 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예수님을 인간 실존의 대답으로 소개하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함께함 그리고 대신함을 통해서다. 신학적인 이름을 붙인다면, 성육신의 길과 십자가의 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육신적 함께함에 관해서는, 필자의 판단에 가장 현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혹은 구속사적 설교를 실천한다고 판단되는 Timothy Keller는,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성도들의 아픔과 고뇌에 함께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성도들을 돈과 관련해 후해지는 삶으로 초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킴으로써 그들의 두려움과 굳은 마음을 만져야 한다. 예수님은 가장 부요한 분이시지만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 친히 가난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고후 8:9 참조). 성도들이 응답 없는 기도에도 잘 인내하도록 돕고자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라’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유익이 되고, 비그리스도인에게는 낯선 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지만 거절당하신 한 분을 보게 하라.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온전히 아버지를 신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함을 넘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시는 주님이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에게 예수님을 설교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를 설교의 기초로 삼는 것이다. Keller는 예수님의 치유 기사를 설교할 때는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를 관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 사람과 자리를 바꾸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리자가 되셨다. 예수님이 이 사람의 삶에 들어오셔서 그를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를 위해 죽으셨고 죗값을 치르시고 본질상 이 모든 것을 친히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발가벗겨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옷을 걸칠 수 있다. 그분이 가장 깊은 좌절과 고뇌에 던져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알고 내적인 고요함을 누릴 수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 기사에 관한 두 설교자의 설교를 비교하면서, 한 설교자는 “그저 우리 상처에 대한 치유”를 설교하였다고 다소 낮게 평가하고, 다른 설교는 “위대한 복음 주제의 빛 안에서 읽었다”고 높게 평가한다. 전자는 십자가를 우회하였고, 후자는 십자가를 관통하였기 때문이다. Keller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넘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 메시지의 중심에 세우는 것이다. 설교가 인간 실존을 터치해야 한다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우리의 실존적인 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십자가는 단지 신학적인 선포를 넘어 인간 실존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근원이다.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의 미래를 위하여 실존적 적용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지나치게 실존적이고 실용적인 적용에 대한 반동으로 구속사적 설교는 다분히 신학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적용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도 균형이 지혜다. 설교는 하나님을 선포하지만, 인간 실존을 향해 선포한다.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의 성경신학적인 기조를 유지하되, 실존의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다면, 보다 적실한 설교가 가능할 것이다.

 

Ⅲ. 나가는 글

구속사적 설교는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성경적인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들에게 소중한 설교적 자양분을 공급하지만, 때로 진영논리의 향취를 풍기며 다른 설교의 길을 배제하는 강한 비판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 논의가 보다 생산적으로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해석과 적용의 구도 속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기를 시도하였다. 살펴본 대로,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해석이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이라면 적용은 다분히 선택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강해설교와의 공존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흔히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본 논문은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적 설교는 기존의 강해설교가 미처 중시하지 못한 중요한 적용 자산을 제공하는데, 성경신학적 적용과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 그리고 고백형 적용이다. 전통적 강해설교는 청중의 삶의 변화를 지향하며, 다분히 실존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적용, 그리고 행동화 적용을 중시하였는데, 여기에 구속사적 설교의 적용 기조가 의미 있는 균형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근자에 구속사적 설교자들 사이에 소위 실존적인 구속사적 적용이 시도되고 있는데, 모든 적용은 원리적으로 인간 실존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설교의 중요한 적용 기조가 되기를 희망한다.

1) 한국에 구속사적 설교가 소개된 데는 화란 선교사인 고재수(N.H.Gootjes)의 입국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 선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구속사적 설교를 소개하고, 그의 제자인 권수경이 Sidney Greidanus의 박사논문을 번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Sidney Greidanus, Sola Scriptura: Problems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 권수경 역,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서울: SFC, 1995).

2) 여기에 Edmund Clowney, Bryan Chapell 등도 구속사적 설교학자로 많이 거론되고, 근자에는 Timothy Keller도 구속사적 설교를 강조한다. Edmund Clowney,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 (Wheaton: Crossway, 2003).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Sermon (Grand Rapids: Baker, 2005). Timothy Keller, Preaching, 채경락 역, 『팀 켈러의 설교』 (서울: 두란노, 2016).

3)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Bibliotheca Sacra 161 (2004): 3. Greidanus는 자신이 구속사적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한 성도의 질문을 소개한다. 자신의 전도서 설교를 들은 후 한 노신사가 묻기를, “설교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설교라면 랍비가 회당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는 설교,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도 거부감이 없는 설교는 사실상 온전한 기독교 설교가 아닐 수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Graeme Goldsworthy,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 The Application of Biblical Theology to Expository Preaching (Grand Rapids: Eerdmans, 2000), 150. 그는 구약은 그 자체로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큰 이야기의 일부이기에 구약 자체만으로 설교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설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4) Jason Allen, “The Christ-Centered Homiletics of Edmund Clowney and Sidney Greidanus in Contract with the Human Author-Centered Hermeneutics of Walter Kaiser”, (Ph.D. Diss.,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11), 18. 그는 Walter Kaiser가 구속사적 설교 주창자들에 대한 균형추(counterbalance)의 위치에 선다고 정리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정경 문맥 안에서 신적 저자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면, 구약학자인 Kaiser는 본문 의미의 근본적인 좌소는 인간 저자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5) 해석과 적용의 구도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익숙한 구도이지만, 구속사적 설교를 이해하는 틀로서는 새로운 시도라고 필자는 자평한다.

6) 해석과 적용이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Sidney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Interpreting and Preaching Biblical Literature (Grand Rapdis: Eerdmans, 1988), 해석이 저자가 원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발굴하는 것이라면, 적용은 현청중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는 과정 혹은 그 결과물을 의미한다. 해석과 적용의 구분 가능성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에 대해서는 Daniel Doriani, Putting the truth to work : The theory and practice of biblical application, 정옥배 역,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성서유니온, 2009)을 참조하라. Robert H. Stein, A Basic Guide to Interpreting the Bible, 배성진 역, 『성경해석학』 (서울: CLC, 2011), 63-65. Stein은 해석(interpretation)과 이해(understanding) 사이를 구분하는데, “이해란 저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고, “해석이란 독자가 저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 것”이라고 구분한다.

7) Haddon Robinson, Biblical Preaching: The Development and Delivery of Expository Messages (Grand Rapids: Baker, 2001), 51-181. 명칭은 필자가 적절히 요약적으로 제시하였다.

8)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279-92. 단계의 명칭은 필자가 요약적으로 제시하였다.

9) 설교는 해석을 넘어 적용이라는, 강해설교의 기본 원리가 바로 이 대목에서 구현된다. Jerry Vines & Jim Shaddix, Power in the Pulpit: How to Prepare and Deliver Expository Sermons (Chicago: Moody Press, 1999), 134-35. Vines와 Shaddix의 구도와 비교해도 결론은 동일하다. Vines는 석의 주제를 가리키는 CIT(central idea of the text)에서 설교 주제를 의미하는 proposition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데, 그 과정은 CIT를 현시대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본문 주제를 현시대에 적용한 결과물이 설교 주제라는 의미다. CIT가 보편적인 메시지일 경우에는 proposition이 거의 CIT와 동일하고, 다른 경우에는 개인화(personalized)하거나 혹은 상황에 맞게 번역하여 proposition을 확보할 것을 주장한다.

10) 둘은 성경적이고 건강한 설교를 위한 양 기둥이다.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제42호(2008, 봄): 24.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나 회중과의 적용점이 분명하지 않은 설교는 설교의 적실성을 상실한 채 단순한 성경 진리의 진술이나 해설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회중과의 적용점은 분명하나 그것이 성경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교는 설교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 있다.”

11)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12) Tim Keller, Preaching, 채경락 역, 『팀 켈러의 설교』 (서울: 두란노, 2016), 68. “어떤 성경 본문이든,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문맥 아에서 살펴야 하는데, 여기에는 ‘정경 문맥’이 포함된다.”

13) Robinson, Biblical Preaching, 21. 강해설교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강해 설교란 문맥 안에서(in its context) 한 단락의 문법적, 문학적, 역사적 연구로 유추되고.”

14)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1.

15)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1. 여기서 그는 (1)과 (2)는 해석의 과정으로, 그리고 (3)은 적용의 과정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상 (2)도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16) Walter C. Kaiser, Recovering the Unity of the Bible: One Continuous Story, Plan, and Purpose (Grand Rapids: Zondervan, 2009), 217-118. Greidanus 자신도 주입(eisgesis)에 대한 우려를 피력한다.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212. “우리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구약으로 밀어넣어 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입(eisegesis)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첨언하기를, “대신 우리는 신약의 문맥 안에서 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17)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앞서 “역사적 해석은 이 수준에서 구속사적 해석이 된다.”는 그의 말이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18) Gre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183.

19)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5-88. 4단계 본문 해석하기에서 그는 역사적 해석을 요청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그리고 왜 이 본문을 기록했는가? 즉, 저자가 원독자에게 의도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을 막는 객관적인 통제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20)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그는 반드시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확고히 설정한 후에, 그리고 그것을 선명한 본문 주제로 담아낸 후에, 이 단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는지를 묻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도 스스로 직접 본문을 연구하는 본문 연구에서 적용적 차원으로 넘어간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는 방증이다.

21) Haddon Robinson의 추상화 사다리(abstraction ladder)가 대표적이다. Donald Sunukjian, Invitation to Biblical Preaching, 채경락 역, 『성경적 설교의 초대』 (서울: CLC, 2009), 63. Donald Sunukjian은 “역사에서 신학으로” 나아갈 것을 제언하는데, 보편적 원리화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지그재그다.” 출애굽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둘러가는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최단거리였다고 선포한다. 보편적인 원리로 확대한다.

22)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69.

23) Graeme Goldsworthy, Christ-Centered Biblical Theology, 윤석인 역, 『성경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3), 34.

24) 김재선, “적실성 있는 설교 적용을 통한 청중의 변화 방안”,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33권 (2014): 9. 그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대체로 적용에 소홀하다고 말하며, Greidanus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말씀은 적용되어지는 것이요, 성경은 케리그마다. 따라서 설교를 이 말씀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으로 보고 그것을 적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적용을 덧붙여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25) 이우제, “Sidney Greidanus의 설교 연구: 현대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을 중심으로”,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27권 (2013, 봄): 353-54. 이우제는 Greidanus를 비롯한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신학적인 지식에 치중한 나머지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적실한 적용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소개하면서,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논박한다.

26) Sunukjian, 『성경적 설교의 초대』, 136. Sunukjian은 적실성과 적용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적실성은 청중이 그 성경적 진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눈으로 ‘볼’ 때 비로소 획득된다.” 적용이 모종의 설교학적 행위라면, 적실성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설교의 성격이다.

27)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9.

28)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적용 루트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구속사적 적용은 또 하나의 적용 루트를 공급할 뿐, 다른 루트를 포기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적용 루트는 아니다. 추상화와 원리화, 혹은 원리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적용 루트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여기에 더하여 구속사적 적용 루트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9)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Genesis, 강정주·조호진 역, 『창세기 프리칭 예수』 (서울: CLC, 2010), 151.

30) Greidanus, 『창세기 프리칭 예수』, 234.

31)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Ecclesiastes, 전의우 역, 『전도서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포이에마, 2012), 295.

32)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5.

33)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6. 그는 이 질문을 통해 소위 도덕주의적, 모범 설교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4)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27. 단지 ‘그때 그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으로의 원리적 적용을 넘어서는 듯하다. 하나님의 모든 구속 행위는 그리스도로 수렴된다는 차원에서, 보다 명시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요구하는 듯하다.

35)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72.

3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79.

37) Greidanus, Goldsworthy, Chapell, Clowny 등 구속사적 설교를 주창하는 학자들이 그들 주장의 성경적 근거를 찾을 때 이 구절을 빼놓지 않고 거론한다. 누가복음 24:25-27도 자주 거론된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강해설교자들에게 적용은 많은 경우 원리에서 행동화를 의미하지만, 구속사적 설교자들에게 적용은 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통한 그리스도 설교하기를 의미한다.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이요, 하나님 사역의 중심과 절정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38) Keller, 『팀 켈러의 설교』, 84.

39) Greidanus는 주제 문장에서는 대체로 하나님/그리스도를 주어로 삼지만, 설교의 목적을 진술할 때는 반응자인 청중을 중심에 세운다. 이를 통해 설교는 하나님에 관한 선포이지만, 사람을 향한 선포라는 균형을 확보한다.

40)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8-123.

41) 정승원, “교리적 주제를 시리즈로 설교하기”, 「헤르메니아 투데이」, 제44호 (2008, 가을): 118.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공로를 언급하지 않고 그 나라 백성인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과 모습을 주제로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 설교 역시 그리스도가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존귀케 한다.”

42) 행동이 중요하지만, 무리하게 행동 일변도의 적용을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설교를 경직화시킬 수 있다. 설교가 청중의 변화를 의도한다면, 그 변화는 행동 변화 이전에 믿음과 고백의 변화이며,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43) Greidanus,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187.

44) 또한 구속사적 설교의 고백형 적용은, 앞서 소개한 하나님 중심적 적용의 중시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술은 직설형으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행할 일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명령형으로 기술된다. 소위 윤리적 설교에서는 사람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설교의 중심에 세운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초점이 있다면, 그것을 담아내는 언어 상자는 명령보다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

45) John Carrick, The Imperative of Preaching: A Theology of Sacred Rhetoric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2002), 5.

4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302.

47)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85.

48)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Sermons: Models of Redemptive Preaching, 안정임 역, 『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 (서울: CUP, 2015), 325-86. Chapell은 서술형(indicative) 복음과 명령형(imperative) 복음을 어떻게 다룰지를 소개하면서, 동일한 복음 설교의 이름 아래 “서술적인 면이 강조된 설교”(325-54)와 “명령이 강조된 설교”(355-86)를 각각 예를 들어 소개한다. 복음 안에서 서술과 명령은 따로 분리될 수 없고, 다만 강조하는 초점의 선택만이 있다는 실천적인 예증이다.

49) Keller, 『팀 켈러의 설교』, 84.

50)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28.

51)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24.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나 회중과의 적용점이 분명하지 않은 설교는 설교의 적실성을 상실한 채 단순한 성경 진리의 진술이나 해설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회중과의 적용점은 분명하나 그것이 성경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설교는 설교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 있다.”

52) 욥기가 그토록 두꺼운 성경이 된 데는, 고통의 난제가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해답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가장 억울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죄인들의 용서를 구하셨던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욥의 마음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욥기는 기본적으로 창조주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범접할 수 없는 주권으로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실존적인 답을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욥기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결말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을 지향할 때 완성도 있는 설교가 구성될 수 있다.

53) 김병년, 『바람 불어도 좋아』 (서울: IVP, 2013). 고통을 더 큰 신앙으로 나아가는 연단의 과정으로 소개하는 이들에게 김병년은 “하나님, 제가 언제 큰 성도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 고통을 제거해 주세요.” 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54) Bryan Chapell ed., The Hardest Sermons You'll Ever Have to Preach: Help from Trusted Preachers for Tragic Times, 허동원 역, 『성도의 불행에 답하다』 (서울: 지평서원, 2014), 22.

55)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필자도 욥기를 본문으로 위로하는 설교를 시도하는데,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5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91.

57) John Stott, Between Two Worlds (Grand Rapids: Eerdmans, 1982), 325. 실존적 적용의 흔적은 John Stott에게서도 발견된다. “설교의 주된 목표는 성경을 신실하고도 적실하게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필요에 온전히 부합함을 인식되게 하는 것이다.”

58) Keller, 『팀 켈러의 설교』, 157. 덧붙여 말하기를, “기독교는 그 열망과 이슈를 단지 설명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성취하고 다루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 어떤 문화적 이야기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행복한 결말이 된다.”

59) Keller, 『팀 켈러의 설교』, 161.

60)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0.

61)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1.

62) 여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추가할 수도 있다. 함께함과 대신함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라면,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분과의 연합니다.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387-415.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새로운 정체성을 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준다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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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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