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도의 비극(7) 견디기 힘든 성폭력
사회/정치 2017. 7. 12. 11:26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 선감학원에서 죽은 소년들이 묻힌 배꼽산, 그 옆 비닐하우스가 예전에 소년들이 일하던 뽕나무밭이다. | |
ⓒ 이민선 |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7살 소년 임용남은 서울역 인근 남대문시장에서 국화빵 몇 개를 얻어먹은 것을 시작으로 걸인 생활로 접어들었다. 한뎃잠을 자고 구걸해서 배를 채우면서 유령처럼 도시를 떠돌았다. 그래도 엄마를 찾는다는 목표가 있어 참을만했다.
추위를 피하려고 우연히 찾아 들어간 다리 밑 거적때기 오두막에서 걸인 노인을 만났다.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잘 빌어먹는 법'을 터득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그는 걸인 노인과 헤어져 엄마 찾기에 나섰다. 본격적인 유랑을 시작한 것이다.
문산, 의정부, 안양, 인천, 부평….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질 때마다 '아들 버린 것을 후회하며 엄마도 지금쯤 나를 찾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이 상상만 하면 다리에 힘이 붙었다.
거리에서 만난 형들(걸인)과 어울리다가 범죄에 휘말려 파출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형들이 도둑질하는데 망을 본 것이다. 다행히 나이가 어려 감옥이 아닌 보육원에 보내졌다. 부평에 있는 에덴 보육원이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엄마를 찾는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 보육원을 탈출한 그가 향한 곳은 경기도 수원이다. 얻어먹고 한뎃잠을 자며 수원에서 한 달가량을 버텼다. 자연스럽게 다시 걸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맞춤한 잠자리를 찾아 누우려던 찰나였다.
"팔달산 근처였어요. 경찰이 저를 손짓하며 부르는데,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예요. 그 경찰이 저를 다짜고짜 지서로 끌고 갔고, 다음 날 아침 수원 군청(시청)으로 넘겼어요. 그곳에 도착해 보니 '전국 부랑아 일제 단속 기간'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붙어 있었어요. 그제야 저를 왜 끌고 왔는지 알 수 있었죠."
소년 임용남은 여기저기서 붙잡혀 온 30여 명의 아이들과 함께 선감도로 끌려갔다. 1963년, 그의 나이 만 12살이었다. 소년들은 죄가 있어서 끌려간 게 아니었다. 운이 나빴을 뿐이다. 죄가 있다면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것, 배가 고파서 밥을 얻어먹었다는 것, 잠 잘 데가 없어 한데서 잤다는 것, 그러다 보니 옷이 무척 남루하다는 것뿐이다.
지난 1998년경부터 선감학원의 진상을 조사한 정진각 안산지역사회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당시는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정권이 아이들을 무더기로 잡아서 수용하던 때였다. 이른바 '후리가리(일제 단속)'라고 해서, 100명을 잡아넣으라는 지침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채워 넣어야 하는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부랑아도 아니고 고아도 아닌, 부모가 멀쩡하게 있는 아이를 유괴하다시피 해서 끌고 간 경우도 허다하다.
폭력은 일상, 구걸해서 먹는 밥보다 못한 식사
▲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 |
ⓒ 이민선 |
선감학원은 걸인 생활보다도 못한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구걸해서 먹는 것보다도 못한 식사가 나왔고 매 맞는 일은 일상처럼 돼 있었다. 자유도 없었고, 그 대신 단체 생활에서 오는 고단함만 있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성폭력이었다. 어리고 곱상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검은 손이 뻗어 왔는데, 소년 임용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요. 엄청난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은 거죠. 밤만 되면 지옥이에요. 함께 잠을 자는 막사 안에서도 그 짓을 했고, 산에 끌고 가서 하기도 하고. 아파도 소리 못 질러요. 곡괭이 자루로 때리고, 낫이나 칼로 찌른다고 위협하니까요. 그때 총이 있었다면 다 쏴서 죽였을 거예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반항을 하니까 그때야 그들이 그 짓을 멈췄어요. 나중에 성인이 돼서 감옥에도 갔었는데, 그곳이 선감학원보다 훨씬 나았어요."
그들은, 막사에서 힘이 있는 계층인 사장(막사의 장) 반장 같은 스무 살 정도 된 청년들이었다. 가해자는 천국이었을지 모르지만, 피해자는 지옥이었다고 임 목사는 회상했다.
"그 사람들은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렸어요. 권력, 섹스 등. 쌀밥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요. 힘없는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었으니 그들은 어쩌면 밖으로 나가기 싫었을 수도 있어요. 다리 주무르기부터 빨래, 잔심부름까지 다 해주었거든요. 그 시절에 어디 가서 쌀밥을 먹고, 어디 가서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어요."
그러나 힘없는 소년 임용남에게 그곳은 지옥이었다. 엄마를 찾을 수 없어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탈출뿐이었다. 탈출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결국, 그는 7번이나 탈출을 시도해 자유를 얻게 된다. 6번째 탈출에도 성공했지만, 수원에서 다시 일제 단속에 걸려 선감학원으로 끌려가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잦은 탈출, 주의할 인물로 찍혀서...
▲ 선감학원 피해자 임용남 목사 | |
ⓒ 이민선 |
선감학원에 온 지 채 10일도 지나지 않아 소년 임용남은 탈출을 결심했고, 몇 달 뒤 첫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한 뱃사람 눈에 띄어 바다에 발도 담그지 못하고 실패했다. 뱃사람 만류로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고, 그와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선감학원 사감 선생 등에게 붙잡힌 것이다.
붙잡혀 와서는 죽도록 맞았다. 곡괭이 자루로 맞았고 쌀부대 같은 데 집어넣고 몰매를 가하는 '부대 말이'도 당했다.
두 번째 탈출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화장실 문짝을 떼서 뗏목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실패했다. 화장실 문짝으로 센 물살을 헤쳐 나가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바다에 떠서 오도 가도 못 할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나가는 배가 있어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역시 몰매가 뒤따라 왔다. 첫 번째 탈출 때보다 훨씬 센 강도였다. 겁도 없이 화장실 문을 뗐다며 사감 선생이 미친 듯이 회초리질을 했는데,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선감도를 오가는 선박의 창고에 숨어든 게 세 번째 탈출이었다. 바다로 나가기도 전에 선주에게 들켜서 실패했다. 그 뒤로도 소년 임용남은 2년 동안 총 2번의 탈출을 더 감행했는데, 그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밤에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은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여섯 번째 탈출은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우선 죽을 힘을 다해 수영을 연습했다. 그 덕분에 수십 명이 선수로 참가한 선감학원 수영대회에서 6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물때도 잘 맞춰 소년 임용남은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선감학원에 끌려간 지 3년여만이었다.
탈출한 지 3일만에 다시 일제 단속에 걸려서
▲ 어린 넋을 건져 올리는 홈 맞이 굿이 열린 선감 선착장, | |
ⓒ 김성균 |
그러나 기쁨도 잠시, 소년 임용남은 수원에서 또 경찰에게 붙잡히게 된다. 탈출한 지 약 5일만이었다. 경찰에게 붙잡혀 파출소로 간 소년 임용남은 또 한 번 소름 끼치는 글자를 마주하게 된다. '전국 부랑아 일제 단속기간!'이라는 글이다. 3년 전에 일제 단속에 결려 끌려가 죽을 고생 끝에 탈출했는데 또 일제 단속에 걸린 것이다.
소년 임용남은 다시 선감도로 끌려가게 된다. 선감도로 오는 배 안에서는 자살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려 했지만, 경찰에게 가로막혀 그마저도 실패했다.
"그 참담함이란, 가슴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탈출하기 위해) 헤엄치다가 차라리 고기밥이 되는 게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소년 임용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폭력이었다. 얼굴을 물에 처박은 다음 숨이 꼴딱 넘어가기 전에 꺼내주는 이른바 물고문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물고문과 함께 가해지는 채찍질과 몽둥이세례도 끔찍했다. 시야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필름이 끊기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 보니 양호실이었다.
"7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면서도 무턱대고 바다로 뛰어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요. 그곳에 있는 3년 동안 10번 정도 죽음을 목격했는데, 대부분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은 경우였어요. 정말 끔찍합니다. 몸은 퉁퉁 불어 있고, 조그마한 조개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시체를 건지면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묻으면 그만이에요. 개죽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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