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골수 좌파 신학자의 고백>
사회/정치 2018. 1. 8. 06:51<어느 골수 좌파 신학자의 고백>
- 매우 길지만 읽을만한 글 -
"나는 왜 좌파 사상을 버렸나"
(김철홍,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저는 1962년생이고 대학 학번은 81학번입니다. 386세대 중 앞쪽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초등학생 시절 저의 어렸을 때 꿈은 농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는 아직 쌀을 자급할 수 없어서 분식, 혼식을 장려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데 농업연구소 연구원들이 통일벼 품종 개량에 성공해서 앞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그 뉴스를 듣고 저는 “바로 저거다. 내가 앞으로 할 일은 바로 농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커서 공산주의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좌파 사상에 빠진 친구들 상당수가 사실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에 공감하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소위 공감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민중의 삶의 고난에 공감(compassion)을 하게 되다가 공산주의 이념을 접하게 되면 그 이념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복음으로 들리게 됩니다.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을 고난으로부터 구원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좌파 서적을 처음 접한 것은 중고등학생 때였습니다. 당시 저의 아버지는 강원룡 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1976년 11월에 창간한 『대화』라는 월간지를 구독하셨고 나는 밤에 아버지 몰래 공부를 하는 척하면서 내 방에서 그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책 중에서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글은 유동우씨라는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가 처참한 노동현장을 고발하는 체험 수기, “어느 돌맹이의 외침”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학교 3학년 때인 1977년 1월부터 3월까지 3회에 걸쳐 월간 『대화』에 연재된 그 글을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고용주들을 향해 분노했습니다.
저는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에서 자랐고, 1970년대 말 광화문에는 ‘논장’이라는 서점이 있었습니다. ‘논장’ 서점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좌파 사회과학서적들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던 곳이었습니다. 교회에 가는 날이면 ‘논장’에 가서 사회과학이라는 신세계를 접하면서 입시공부에 찌들었던 저는 묘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백기완 씨가 쓴 책,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같은 책을 읽고, “우리가 민족 통일을 이루더라도 민중해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런 민족 통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통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민중해방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내가 살아야 할 올바른 삶은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택시운전이라도 하면서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저는 감성적인 좌파가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좌파들은 이런 감성적 좌파 단계를 초반에 다 거칩니다. 대학생들의 경우 상당수가 1-2학년 때 감성적 좌파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제가 보기에 현재 나이 20-40대 중에는 감성적 좌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감성적 좌파 단계에서 머물고, 어떤 사람은 그 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면서 이념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1981년에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메아리”라는 오픈 써클에 들어갔습니다. 메아리는 흔히 운동권 가요를 부르는 동아리로 알려져 있지만, 민중가요를 발굴, 보존할 뿐만 아니라 창작하고 보급하는 문화운동 단체입니다. 그 때에 민중가요에 푹 빠져서 1-2학년을 보냈고, “신작로”라는 제목의 노래를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노래는 2학년 때에는 구로동에 있는 공장의 여공들을 조직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어떤 누나의 요청 때문에 여공들을 만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영감이 떠올라 만든 노래입니다. 노래뿐만 아니라 군대에 다녀와서는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서 학교 밖에 있는 영화팀에 잠시 있기도 했습니다.
서울대 뿐 아니라 대부분 대학에는 노래, 탈춤, 민요, 연극, 영화 등 당시 다양한 문화, 예술운동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이런 동아리들은 결국 좌파들이 문화 예술계를 장악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학과공부보다는 좌파 이념 서적들을 중심으로 해서 다양한 책들을 읽고 학습했습니다. 소위 당시 운동권 정규 커리큘럼을 물론, 철학, 역사, 문화예술론 등 다양한 좌파 서적들을 미친 듯이 탐독했습니다. 물론 동아리에서도 학습을 했지만 저는 주로 혼자서 학습하는 것이 더 많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 이념으로 완전히 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지도휴학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지도휴학은 학교에서 강제로 휴학을 시켜서 운동권 학생을 강제로 군대에 가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1983년 초에 메아리 노래책 6집을 제가 새로 편집해서 출판해서 전국적으로 보급하게 되었는데, 그 책에 80년 광주사태 당시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김준태 시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실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군생활은 철원에 있는 3사단 백골부대 23연대에서 소총수로 근무해서 병장으로 제대했습니다. 군복무 중 군 보안대에서 실시하는 소위 녹화 사업이라고 해서 서울 세운상가 쪽에 있던 보안대 분실에 끌려가 약 열흘간 녹화교육도 받았습니다. 원래 저는 극렬 운동권 학생도 아니고, 원래 등급은 제가 보기엔 c급이라서 자대 보안대에서 며칠만 받으면 되는데, a등급으로 잘못 분류되는 바람에 보안대 본부에서 열흘간 받았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코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소심하고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1985년 12월에 제대하고 1986년 1학기에 복학했습니다. 그 무렵 사회학과 동기 중 두 명이 당시 경인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저를 찾아와 합류할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 한 친구는 지금 해산된 통합진보당 대표직무대행도 지낸 사람입니다. 만약 그 때 그 친구와 합류했다면 저도 통합진보당 소속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제안은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공장에 들어가 한 명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를 조직하는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던 중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고 그 제안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제안은 한 마디로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지도할 “공산당”을 조직하는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공산혁명운동 역사를 연구해보면 혁명운동은 공산당을 조직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당을 만들지 않고 공산혁명을 할 수 없고, 당의 올바른 지도 없이 혁명이 성공할 수 없으므로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 당면한 가장 급한 사업이라는 것이었고, 저는 그것에 적극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당을 만드는 방법은 매우 간명합니다. 제일 먼저 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해야 하고, 그 다음에 는 중앙위원회에서 시작해서 위에서 아래로 조직을 해나가면 됩니다. 절대로 민주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중앙위원회를 조직하느냐? 그 대답은 “당을 조직할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가 한다”였습니다. 제가 속한 그룹은 중앙위원회 구성을 목표로 해서 활동을 시작했고, 우리가 직접 중앙위원회를 조직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먼저 혁명의 지도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매우 집중적으로 사상 학습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한 학기 만에 학교를 휴학하고 사상 학습을 시작했습니다. 그 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학습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에서 출판된 정치경제학 원론을 읽고 공부했다면, 이때에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영어번역으로 직접 밤을 새워 읽고 토론했습니다. 매일같이 만나서 하루 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마르크스의 정치 수필들과 레닌, 마오쩌뚱의 글 등을 함께 공부하면서 사상적 기초를 단단히 닦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오전에는 그 날 신문들을 펴놓고 정세분석을 하면서 투쟁의 방향을 토론하기도 하면서 직업적 혁명가로서 자신을 훈련하였습니다.
우리가 공산당을 만들 경우 과거 일제시대 때 조선공산당 창건 시도가 대부분 일제정보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검거되거나 조직이 무산되었던 것을 감안하여 앞으로 혁명 지도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중앙위원회는 중국이나 연해주에 두는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습니다. 과거 학생운동 조직이 보안과 비밀유지의 원칙을 지키지 않아 줄줄이 검거되었던 것을 감안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실명을 사용하지 않고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서로 개인적인 사항에 대해 깊이 서로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혁명가로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밀을 유지하고 보안을 지켜 절대로 검거되지 않는 것이고, 검거되더라고 점조직으로 되어 있으면 그 본인만 검거되고 끝나므로 보안 유지에 신경을 썼습니다. 저도 그 당시에 가명을 사용했고 지금도 당시 사람들의 본명을 모릅니다. 제 추측에는 우리 그룹 말고도 우리 그룹과 같은 다른 그룹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시절에 저는 완전히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대학 1학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그 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이 이제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되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인간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를 모두 통합하는 이론으로서 이것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신문을 읽으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설명이 됩니다. 이론이 주는 힘은 내가 세상의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 서서 내 발 아래에 있는 온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데, 그것이 주는 기쁨은 말로 설명이 불가합니다.
내가 드디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것은 엄청난 자신감을 주고, 한 평생 직업적 혁명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줍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종교적 개종과 매우 유사한 경험입니다. 종교사회학에서 이것을 정치적 개종(political conversion)이라고 부르는 데,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종교적 개종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변화를 사람 안에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은 그런 면에서 매우 강력한 종교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마르크스의 책에 미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루는 자본론을 읽고 토론하는데 아무리 읽고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마르크스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인지 설명이 안 되어서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그 날 점심을 먹고 1시간 낮잠을 자는 시간에 꿈에 칼 마르크스가 나타나서 그 문장들의 뜻을 저에게 상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잠에서 깨어서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었더니 다들 완벽한 설명이라면서 좋아했습니다. 그 후부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나오면 동지들이 저더러 잠깐 마르크스를 직접 만나서 그의 대답을 듣고 오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에 완전히 빠져서 정치적 개종을 경험하면서 저는 공산주의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공산혁명을 위해서라면 저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고, 혁명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영광된 죽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었고 2-3년 내에 중앙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면서 지내던 중 구성원 중 한 사람이 토론 시간에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들어보니 주체 사상을 따르는 주사파의 주장과 유사했습니다.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내부에 논쟁이 발생하였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그 동지는 주체사상에 오염되어 있다고 판단되는데,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20여 일간의 사상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위 ‘사투’라고 하는 겁니다. 공책을 사서 서로 하는 말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서로 논리적으로 싸웠는데, 결국 그 동지가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은 주체사상을 따른다는 자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과의 대결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사상이 우리 조직에 침투한 것입니다. 제 추측에는 그 사람이 처음부터 주사파였던 것 같지는 않고, 우리와 조직 사업을 하던 중 주사파에 포섭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과거 주사파가 자주 써먹던 방식으로 우리 조직을 접수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저도 물론 그 전에 주체사상 문건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그 책들의 앞부분을 읽자마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를 읽자마자 저는 “이건 유물론이 아니다. 이건 Materialism이 아니고 Humanism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하부구조,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합이 인류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물론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상부구조, 즉 인간의 정신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좌파 이론들도 있습니다만 “사람이 주인이다”라든가,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분명 유물론의 원칙을 위반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주체사상의 저열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주사파의 지도자였던 김영환씨는 나중에 북한에 가서 직접 보고 북한체제에 회의를 느껴 전향했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북한의 상황은 굳이 가서 직접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사상의 후진성을 보면 북한이 얼마나 원시적 후진성에 머물고 있는지 그 수준이 그대로 뻔히 보입니다.
원래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공부 엄청 해야 합니다만, 주사파 하려면 공부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주사파처럼 공부 안하고 무식하고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이 혁명에 성공하면 얼마나 후진적인 나라를 만들지 뻔히 보입니다.
여하튼 유물론 철학만이 옳다고 믿고 있었던 당시 저는 주체사상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그 친구가 사상투쟁에서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승복하였습니다. 원래 주체사상과 같은 3류 이론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그 다음 날 자필로 된 자기비판 문서를 작성하여 오기로 약속을 받았고 약 20일 간의 사투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 친구는 자기비판 문서를 써오지 않았고, 새로운 주제로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혁명의 지도노선을 둘러싼 논쟁이었는데, 그 친구는 들고 온 새로운 주제는 혁명 전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남한에서의 공산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이미 무장투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이미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산혁명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장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 기본적인 혁명 전략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것을 비현실적인 혁명전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80년 광주사태는 기본적으로 민중의 무장봉기였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겁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부르고 있는데 당시 우리들은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광주인민무장봉기라고 불렀습니다. 공산 혁명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광주사태는 실패한 무장 봉기입니다. 시민군이 무기고를 털고 아무리 장갑차를 탈취해서 무장을 해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오는 정규군의 무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미제국주의의 주구 노릇을 하는 군사정권의 무력도 감당할 수 없다면 혁명적 상황에서 미제국주의의 보다 더 강력한 무력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민중 봉기로 혁명세력의 주적인 미국의 항공모함을 동원한 무력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없다. 실행 불가능한 혁명전략이다.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대책이 있느냐? 그 친구의 대답은 “북쪽에 있는 무력을 동원하는 것 외에 우리가 남조선에서 공산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였습니다. 북조선에 이미 준비되어 있는 무력, 즉 인민해방군을 동원하는 것 외에는 미제국주의와 군사 파쇼의 무력에 대항하여 혁명을 성공할 다른 길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가 이렇게 공산당을 만들게 아니라, 북조선 노동당과 긴밀한 협조 하에 남조선 혁명 사업을 함께 해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혁명 전략이라는 겁니다. 사실 무장 투쟁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이 맞습니다.
솔직히 당시로서는 반박불가였습니다. 문화투쟁 같은 거요? 그람시의 진지이론 같은 건 사실 선전선동술이고, 무장투쟁의 관점에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입니다. 무장투쟁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공산혁명은 불가능합니다.
주체사상은 이미 85년부터 대학교 이념 서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해서 매우 빠른 속도로 학생운동 조직을 장악했습니다. 당시 아침 인사는 “어제 밤 대남방송 들었냐?”는 것이고, 듣지 못한 사람은 들은 사람에게 그 내용을 전달받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를 관철시킨 민주화 투쟁 당시 이미 주사파는 대세였습니다. 학생운동의 70-80%는 이미 주사파였고, 노동운동 역시 빠른 속도로 주사파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1988년부터 상당수의 사람들이 노동운동과 각종 조직 운동에서 주사파에 밀려나, 학교로 언론기관으로 각종 시민운동 단체로 흩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운동권이 급속히 주사파 천하로 바뀌고 비주사파는 조직에서 추방되었을까요? 주체사상이 워낙 뛰어난 이론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주체사상은 약점이 많은 혁명이론입니다. 주사파와 비주사파의 사상투쟁에서 주사파가 승리하고 조직을 접수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주사파의 혁명 전략 때문입니다. 북조선의 노동당과 인민해방군과 힘을 합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그나마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사파는 그 태생부터 종북 세력, 친북 세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사상투쟁에 서 저 같은 비주사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주사파가 되어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조국으로 삼고, 북조선 노동당의 혁명 지도 노선을 충실히 따르면서 김일성 수령 동지를 중심으로 혁명사업을 하는 길을 택하든지, 아니면 남한 내에서의 우리의 단독 역량으로 혁명적 봉기를 일으키는, 어떻게 보면 매우 비현실적인 노선을 선택하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는데, 출구다운 출구가 없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문제가 북한의 존재 때문에 왜곡되는 현상이 있다고 말하는데, 심지어 공산혁명을 추구하는 세력 내에서도 북한의 존재 때문에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오직 가능한 옵션은 주체사상을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대목에서 제가 공산주의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속했던 조직은 주체사상의 침투로 인해 결국 조직을 해산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어차피 그 조직은 주사파에게 조직이 드러났기 때문에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배신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즉각 해산하였고, 그 이후 때를 보아서 다시 재건하기로 했지만 저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한 때 신문사 기자가 되려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신학교로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왜 갑자기 신학교로 가게 되었느냐? 간단히 말하면 초월의 세계와 만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와서 공산주의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사상적 정신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199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신약성경 중 바울신학을 공부하면서 모든 사상적 방황이 끝나고 정리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2007년에 유학생활을 마치고 16년 만에 고국인 대한민국에 돌아와 장신대 교수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에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정치적 활동같은 것은 하지 않고 학교에서 바울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조용히 지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정말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지내야겠다는 저의 결심을 흔드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2013년 8월부터 언론에서 공개된 이석기와 RO조직 회합 사 건이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텔레비전에서 이석기와 RO조직 회합 사건에 대한 뉴스를 듣고 그 날 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솔직히 2007년 귀국 직후부터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매우 좌경화되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2007년에 돌아와서 제가 경험한 대한민국은 1991년에 제가 떠났던 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마치 타문화권에 들어온 선교사가 느끼는 그런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 너무 많이 왼쪽으로 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심각한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석기와 RO조직 회합 사건은 저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석기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인 2012년 5월 12일에 합정동의 어느 가톨릭 성당에서 소위 RO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 혁명가 조직) 모임을 했습니다. 그 모임의 주제는 남조선 해방을 위한 혁명적 상황이 곧 발생할 것인데, 그 때 혁명가들은 각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서, 무기고, 통신. 유류시설 등 국가기간 시설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방안을 협의한 겁니다. 그리고 북한 혁명가요인 '적기가'(赤旗歌)를 불렀다는 겁니다.
제가 놀란 것은 이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날 그 자리에 소위 자칭 혁명가라고 하는 사람이 130명이나 모였다는 겁니다. 130명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 본명을 공개하고 함께 모였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지하 조직 운동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조직은 점조직으로 서로 본명을 모르는 사람들끼리만 만나서 가명으로 사업을 하고, 절대로 3-4명 이상이 한 자리에 모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10명이 모인다? 10명이 모이게 하면 그것은 보안원칙에 당연히 위반되는 것이며, 해당행위로서 징계사유가 됩니다. 그런데 10명도 아니고, 20명 도 아니고, 130명의 직업적 혁명가들이 보안이 확보되지도 않은 공개된 자리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한 자리에 모여서 토론을 했다? 이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친 짓입니다. 그러면 이 혁명가분들이 보안원칙을 교육받지 못해서 그렇게 한 걸까요? 이 분들이 갑자기 미친 겁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이분들이 합정동에서 130명이 모여서 회합을 한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지금 이미 남조선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항상 정세판단이란 것을 하는데 혁명에는 간조기와 만조기가 있다고 봅니다. 간조기 때에는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지하에서 혁명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고, 혁명의 만조기 때에는 바깥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활동을 해도 된다고 봅니다.
2012년에 이분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가명을 쓰고 점조직으로 모여 비밀리에 혁명 사업을 할 필요가 없다. 때가 이미 무르익었으므로 이제는 실명을 쓰고 130명이라고 하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해도 괜찮다. “우리는 지금 혁명의 만조기 상황에 있다”라고 정세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의 정세판단이 틀린 겁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분들의 정세판단이 틀렸을까요? 저는 그 사람들의 정세 판단이 매우 정확했다고 봅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이미 2012년도에 매우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재작년(2015년) 말에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때문에 글을 쓰게 된 것도 이런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이번 대통령 탄핵 사건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원래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경찰, 검찰, 안기부 같은 정보기관이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이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저 같은 사람이 마음 놓고 바울신학을 가르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세 가지 조직이 무력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북 세력이 이미 침투하여 활약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자유경제원에서 남파 간첩 이동식 선생님을 초청한 특강에서 북한의 대남사업부에서 남한의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을 포섭해서 사법, 교육, 정치, 문화, 예술, 언론 등 각종 영역에 침투시킨 것을 말씀해주셨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는 제가 조직 활동을 하던 1986년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특별히 군대에 침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가 혁명에 승리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 백군에 볼셰비키들이 미리 입대해 들어가서 초급 장교들이 되어 있었고, 이들이 혁명적 상황에서 지휘관을 처단하고 군대를 적군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우리도 군대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군대에도 적색분자들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군대는 국가 안보의 최후의 보루인데, 지금은 군대도 100% 신뢰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 같은 바울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가정주부라 할지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나와 싸우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것이 정확한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이 처한 이념적 위기는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경각심을 잃어버린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경각심을 잃어버린 계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1987년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관철시킨 이 운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싸웠던 운동권 세력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계급 독재로 보고 부정할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인 인민민주주의야 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 중 압도적 다수는 주사파, 종북 세력이었습니다.
저는 1987년 민주화 운동 가두시위에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신문에서는 가두시위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마치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당시 제가 보기에는 그 시위를 조직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7년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고 난 뒤 공산주의 혁명을 추구하던 세력, 북조선과 연합하여 남조선 인민 해방을 추구하던 세력이 소위 “민주화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사회 각계각층으로 흩어져 갈때 머지않아 우리나라에 어떤 위기가 오게 될 것인지 그 때 이미 볼 수 있었습니다.
1987년의 민주화 투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넥타이 부대의 참여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하고 군부독재 세력이 패배한 것으로 보이지만, 길게 보면 누가 패배하고 누가 승리했습니까? 제가 보기에 결국은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패배하고 주사파가 승리했고 공산세력이 승리했습니다. 왜냐하면 87년 이후부터 이 종북세력과 공산세력을 우리 사회에서 손을 볼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손을 보려고 하면, 이것을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것으로 호도하여 선동을 하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선동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종북세력과 공산세력이 이들이 30년 동안 자유롭게 혁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0년 동안 이들을 내버려두고 손보지 않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작금의 대통령 탄핵 사건입니다.
8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이 이제 나이를 먹으면서 저처럼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우리 사회의 중추세력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드디어 종북 세력, 공산세력의 본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고편이 끝나고 본 영화 상영이 시작된 겁니다. 예를 들어 신문사를 예로 들면 지금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논설주간을 하고 계신데, 이분들이 곧 은퇴할 때가 옵니다. 그러면 누가 그 자리를 채우느냐? 바로 386세대 본진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그리고 그 세대 밑으로 15-20년 정도는 똑같은 사람들이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치계, 법조계, 문화예술계 모두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 20대 국회는 과거 어떤 국회보다 전대협 출신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국회고, 전대협은 학생운동의 주류였고, 그 주류는 주사파였습니다. 전대협 출신 국회의원들이 과연 사상적으로 얼마나 전향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과연 전향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서 지금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있을까요?
공산당을 만들기 위해 제가 속했던 조직을 해산할 때 앞으로 절대 이 조직 활동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기로 서약하고 헤어졌습니다. 제가 오늘 이 서약을 스스로 깨고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당하고 있지 않다면 제가 오늘 이런 자리에 나와서 이런 강연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학생운동 출신의 명망가가 아닙니다. 저는 a급이 아니고 소심한 c급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학생운동의 언저리에 있던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시뻘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면 1986년 이후 학생운동의 핵심적 지도부에 있었던 사람들, 주사파 조직 지도부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빨간 사람들인지 여러분 이제 가늠이 좀 되십니까?
지금은 인민민주주의냐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냐?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여러분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지금 중립 중립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분들에게 드릴 말은 “중립은 개나 줘라”입니다. 이념문제에서 중립은 기회주의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왼쪽 끝까지 가본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제 말을 잘 들으시길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문제는 자본주의다. 사회주의가 답이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이는 젊은 세대를 향해 한 말씀드립니다. 제가 왜 좌파 이념을 버렸느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해 열등한 제도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미끼로 해서 인민을 속이고 착취하는 사기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사회주의 제도의 우수성과 궁극적 승리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지만 이 이론은 아직 실증적으로 옳은 것으로 증명되지 못했습니다.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는 오히려 그 반대의 증거만은 양산했습니다.
현재의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인민민주주의지만, 경제적으로는 실제로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입니다.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대자본가가 되어 노동자와 인민들을 체계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기형적 형태에 불과합니다. 공산사회가 되면 착취가 없어진다고 선전하지만 공산주의야말로 노동자들을 제도적으로 착취하는 시스템입니다.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노동자에게 돌려주어야 착취가 없어집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 당분간 국가가 자본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전합니다. 그리고 확대재생산을 위해서 잉여가치를 통해 발생한 이윤을 모든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없고 자본 축적을 하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국가의 역할을 대행하는 정부 관료와 고위 공산당원 계층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프롤레타리아들을 착취하고 치부(致富)하고 있습니다. “축적을 위한 축적”을 무한대로 실시하면서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수준의 착취와 치부가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쉬차이허우(사진 徐才厚)라는 중국의 인민해방군 장군(상장)의 호화 주택을 압수 수색한 결과 605평 규모의 지하실에서 위안화, 미국 달러, 유로화가 나왔는데, 너무 양이 많아서 세는 것은 포기하고 저울로 달았더니 1톤이 되었다는 것 아십니까? 보물은 말할 것도 없고요. 현금과 보물을 옮기는 데 군용 트럭 10대를 동원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같은 시장경제제도에서는 이런 부정부패가 불가능합니다.
이상득 의원이 7억 5천만원 정치자금 받은 것 때문에 구속되어 감옥에 갔을 때 중국 사람들이 한 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로 어떻게 대통령의 형이 감옥에 가냐? 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둘째로 어떻게 겨우 7억 5천만원 받았다고 감옥에 가냐? 중국에서는 그 열배를 받아도 아무도 감옥에 안 간다. 이처럼 자본주의 제도에는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고, 기능을 하고 있지만 공산주의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이기 때문에 아무도 부패를 감시할 수 없습니다.
가끔 터져 나오는 부정부패 사건은 공산당 내부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나오는 겁니다. 부패의 상징처럼 된 보시라이 (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는 1조 5천억원의 비자금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보시라이가 어떤 사람이었냐 하면 시진핑이 정권을 잡기 전 기준 당시 당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청렴하고 부정부패를 하는 당원들을 색출해서 처벌할 것을 가장 많이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사적소유제도를 폐지하고 산업을 국유화한 그 결과로 국가의 부(富)를 사적으로 마음껏 도용(盜用)하는 집단이 등장하게 하고, 결국 개인은 그 집단과 공산 이념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합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또 다른 절대왕정에 불과합니다. 한 명의 왕 대신 왕노릇 하는 집단이 프롤레타리아들을 노예로 부리는 독재다. 이것이 집단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 이념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사회주의에 대해 핑크 빛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문제는 자본주의다. 사회주의가 답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말을 듣고 쉽게 동감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것이 진정 당신들이 원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사유재산제도가 폐지되면 개인의 자유는 끝장이 납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개인은 사라지고, 국가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개인, 즉 집단에 예속된 개인만이 남고, 그 개인은 결국 노예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회주의가 답이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의 좌파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좌파는 천민 사회주의요, 주사파와 같은 천민 공산주의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에 “사회주의가 답이다”? 한심한 소리입니다. 이것은 마치 노래방에서 나훈아의 “물레방아는 도는데”를 부르는데, 뒤 배경화면에는 걸그룹이 댄스하는 장면이 나오나오는 것과 똑같습니다. 전근대적인 사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젊은 분들이 빨리 생각을 바꾸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좌파 이념을 버린 이유 중에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당장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자유의 위기상황에 우리는 몰려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이고, 자유시장경제제도의 위기입니다. 그리고 이 위기의 본질은 이념 전쟁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미 내전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6.25는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아닙니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 이념과 공산주의 이념은 공존할 수 없고, 서로 죽이고 죽여 상대방은 제거하고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준 전쟁입니다. 이념에는 동족, 그런 거 없습니다. 같은 가족이라도 이념이 다르면 적입니다. 이 전쟁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이미 시작된 전쟁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예전에 신문에 쓴 글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오래전에 내전(內戰)의 상황으로 들어갔다. 현재의 좌우(左右) 대립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전후로 한 시기의 좌우 대립을 이미 넘어섰다. 내가 보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거의 6.25 직전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 때는 공화국에 핵무기가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는 것이다 …. 대한민국은 휴전선 너머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지금 휴전 상태이지만, 우리 내부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적들은 한 번도 우리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해 온 적이 없다. 그들은 지금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완(未完)의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내전은 시작되었다. 아직은 총이 아닌 펜을 들고 싸운다. 부디 불가피하게 총을 집어 들어야 하는 상황이 절대로 오지 않기를ㅠ 바라지만 남과 북이 총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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