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이신칭의/교의 2018. 1. 16. 07:031.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이란 네덜란드 신학자였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이름을 딴 칭의 개념입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은 후일에 아르미니우스주의로 불렸고 그 사상적 후예들은 항론파(remonstrant)라고도 불렸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전통적 칼빈주의와 대비되는 가르침을 설파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빈주의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해 항변서 형식으로 다섯 가지 논제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부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가항력적 은총, 구원의 탈락 가능성입니다. 이런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 사상은 그 당시 유럽 전체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그 반응으로 도르트회의가 소집되어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정죄와 비판을 받게 됩니다.
칭의의 행위적 조건인 믿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서 핵심은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 선택의 능력에서 비롯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기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 행위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의 행위적 "조건"이 됩니다. 얼핏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칭의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중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칭의의 4중 원인 개념이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가 믿음의 역할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칭의의 4중 원인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원인(cause)이 있습니다. 만약 밖에 비가 내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비는 스스로 내릴 수 없습니다.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비가 내린다"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복잡한 신학 개념을 다룰 때 기본적으로 원인을 네 종류로 분석하여 신학 개념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사실 이런 4중 원인론을 사용하는 것의 원류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였습니다. 그는 현상의 원인을 질료인(質料因), 형상인(形相因), 목적인(目的因), 작용인(作俑因)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신학자들도 각종 신학 개념을 4중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신자의 구원을 설명할 때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나 즐거움이고, 형상적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도구적 원인은 복음이며, 마지막으로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런 원인을 칭의에 적용시켜 봅니다.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인 앤서니 버지스는 그의 책 [참된 칭의 교리]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4중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칭의의 유효적 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형상적 혹은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와 그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이고, 도구적 원인은 믿음이며,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런 설명은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쳐진 칭의의 4중 원인입니다.
그러나 칭의의 4중 원인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생각은 사뭇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에 대한 것입니다. 개혁신학에서 믿음의 역할은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믿음 자체는 어떤 능력이나 힘, 공로가 없습니다. 믿음은 공로적 원인인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유익을 인지하고 믿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의 전적인 공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칭의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혹은 "덕분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에 근거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형상적 혹은 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칭의에서 "믿는 행위"는 칭의의 조건이 되며 자연스럽게 칭의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그 행위로 인해" 칭의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의 역할과 행동이 칭의의 방정식에서 사뭇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깊이 연구한 키스 스탱글린과 토머스 맥콜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다"라고 바르게 언급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것에 대해 그 당시에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역할과 공로는 작아지고 오히려 인간이 믿는 행위의 역할과 공로는 상대적으로 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은 칭의 때 믿음이 하는 바른 도구/수단적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를 부어 넣으심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을 통해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시킴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을 통해서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에서 칭의 때 믿음이 하는 역할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릅니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믿음은 어떤 공로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 믿음이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지식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나 구원에서 인간의 공로적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인협력설(synergism)이란 단어로도 표현됩니다. 신인협력설은 신인협동설이라고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 선택 의지/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협력하여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는 이론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신인협력설을 주장하기 위해 중간지식(scientia media)은 매우 유용한 개념입니다. 중간지식은 본래 예수회 신학자였던 페드로 데 폰세카와 루이스 데몰리나에 의해 발전된 개념입니다. 아르미니우스도 중간지식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구원론을 전개합니다.
그렇다면 중간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은 크게 "자연적(혹은 필연적) 지식"과 "자유 지식"으로 나뉩니다. 자연적(혹은 필연적) 지식이란 하나님이 스스로의 본성에 의해 자신뿐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필연적으로 다 알고 계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에 반해 자유 지식이란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한 지식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실체화되는 지식입니다. 하지만 예수회 신학자들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지식 외에 또 다른 지식을 추가합니다. 이 지식은 의도적으로 자연적/필연적 지식과 자유 지식 사이에 위치하여 미래의 우연성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개념입니다.
중간지식을 구원론에 적용해서 이해해 보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전통적 시각에서,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를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자유 지식에 의해 영원 전부터 주권적으로 선택하십니다(엡 1:4, 9, 11; 롬 8:30; 딤후 1:9; 살전 5:9; 벧전 5:10). 하지만 중간지식 개념에서의 구원은 인간의 선택 행위를 포함합니다. 인간이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하는 "조건에 근거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됩니다. 중간지식 개념에서는 인간이 선택할지 여부가 하나님의 지식 바깥 영역에 있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입니다. 결국 중간지식을 차용한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에 기초한 "조건적 구원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간지식 개념은 구원의 방정식에서 인간이 구원에 대해 자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인간 중심적 구원 지식론입니다.
개혁신학은 중간지식 개념을 반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연적/필연적 지식이나 자유 지식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는 포괄적 지식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우연성에 근거한 그 어떤 형태의 중간지식 개념을 위한 자리도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었던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Francis Turretin, 1623-1687년)나 윌리엄 트위스(Willian Twisse, 1578-1646년)는 중간지식 개념이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全知, 모든 것을 다 앎)를 무너뜨리고,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이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역할 강조, 하나님 주권 약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우를 범했습니다. 믿는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여김으로써 인간의 믿는 행위에 칭의의 공로를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믿음을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결과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는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 잡기에 실패한 칭의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서 약화되었던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높이기 위한 신학적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 신학적 바람은 다음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18-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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