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반율법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이신칭의/교의 2018. 1. 18. 22:012. 반율법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은 기본적으로 반(反)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에서 인간의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지 공로적 형식으로 참여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반드시 배격해야 할 신학 사상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믿는 행위가 칭의의 방정식 안에서 공로적 원인으로 참여한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율법주의는 안티노미아니즘(antinomianism) 혹은 율법폐기론으로도 불립니다. 여러 신학적 관점에서 이런 용어들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칭의론의 관점에서 이런 용어들을 해석하면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행동이란 그 어떤 형태의 "믿는 행동", "율법을 행함", "인간의 노력" 등을 포함합니다. 즉,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칭의는 인간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형태의 "무상(free)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바로 "무상 칭의"(free justification) 입니다.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반율법주의의 원류와 성격 들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반율법주의의 원류
반율법주의는 1630-1640년대의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학자들은 반율법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원류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고민의 결과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견이 주류를 이룹니다. 첫째, 일부 학자들은 반율법주의의 사상적 원류를 초대 교회의 각종 신비주의나 중세의 미신적 사상들, 혹은 16-17세기의 각종 분파 사상들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둘째, 보즈먼(T.D. Bozeman) 같은 경우에는 반율법주의의 원류를 반청교도주의(anti-Puritanism)라고 봅니다. 즉 청교도주의가 성경에 근거한 매우 높은 수준의 삶과 행함을 요구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를 일종의 율법주의로 인식해서 그것을 경계한 사람들에 의해 반율법주의가 생겨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셋째, 데이비드 코모(David Como)는 반율법주의를 극단적 칼빈주의(extreme Calvinism)로 이해합니다. 코모에 의하면 반율법주의는 칼빈주의와 많은 부분에서 신학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드높인 나머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일정 부분 경시합니다. 이런 의견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반율법주의의 원류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극단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반율법주의의 성격
반율법주의는 비록 "~주의"라는 접미사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어떤 특정 형태의 교단이나 종교 그룹이 일치된 교리적 논제를 가지고 잘 짜인 조직과 구성 아래서 펼친 정밀한 신학적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7세기 영국의 반율법주의는 넓은 스팩트럼을 가진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코모는 반율법주의자들을 단순화하여 보는 것 대신에 "전가적"(imputative), "내재적"(inherent) 혹은 "완전주의적"(perfecttionistic)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어 다양한 스팩트럼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칭의된 자는 이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설명할 때 전가적 반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적/문자적으로 아예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 반면, 내재적 혹은 완전주의적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된 자에게서 실제적/문자적으로 더 이상 죄를 찾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반율법주의 안에도 신학 사상의 정도 차이가 존재했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 이튼의 칭의론
반율법주의자 중 하나였던 존 이튼(John Eaton, 1619년경 사망)의 칭의론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튼의 칭의론에서 우리는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핵심 요소를 쉽게 발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튼의 칭의론은 그가 죽은 뒤인 1642년에 출판된 그의 책 [무상 칭의의 달콤함](The Honey-Combe Free Justification)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튼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을 신학적 원인, 내용, 결과의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튼이 [무상 칭의의 달콤함]을 쓴 이유는 칭의의 방정식에서 모든 형태의 인간의 이성. 감정. 노력, 심지어는 믿음의 역할까지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튼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튼에게 칭의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튼은 칭의가 반드시 "무상 칭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튼이 무상 칭의론을 전개한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칭의를 위한 인간의 내적 준비가 필요함), 개혁신학의 가르침(믿음은 도구적 원인),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 전체를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반(反) 로마 가톨릭, 반(反)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을 펼치기 위해 이튼의 결혼식 예복 은유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우리는 거룩한 "결혼식 예복"을 입게 되고, 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됩니다. 완전히 깨끗한 결혼식 예복을 입는 행위는 "하나님의 눈"에서, 완전히 "무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튼에게 믿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결혼식 예복을 입는 것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까요? 그렇습니다. 이튼에게 결혼식 예복을 입는 것(즉,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서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믿음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믿음이 하는 역할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결혼식 예복을 입었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뿐 입니다.
특별히 이튼의 죄에 대한 이해는 개혁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튼은 하나님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에게서 더 이상 죄를 찾지 않으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튼은 하나님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들의 죄를 깊은 바다 속에 다 던져 버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에게서 아무런 죄의 흔적이나 부산물을 찾지 않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와 반대로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 토머스 베이크웰(Thomas Bakewell, 1618년경 출생)은 하나님이 칭의된 자의 죄를 회심 전.후에 다 보신다고 주장합니다. 이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칭의된 자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죄 용서를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청교도 개혁신학자 버지스는 죄 용서를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죄를 지으므로" 반드시 "매일 그 새로운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튼의 이런 죄와 칭의 개념 이해는 신학적으로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해 무상으로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는 완전히 의롭게 되어 더 이상 죄가 없다는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이나 책임 혹은 성화에 대한 요구를 약화시킵니다. 마치 "한번 칭의된 자는 막 살아도 된다"는 식의 도덕적 방종과 무책임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튼도 성화의 필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칭의된 이후의 삶 속에서 죄를 찾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성화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와 근본적으로 묘한 신학적 긴장을 이룹니다.
이튼의 무상 칭의에서 가장 약화되는 것은 믿음의 역할입니다. 사람이 믿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 결혼 예복을 입는 순간 완전히 외롭게 되기 때문에, 종교개혁적 칭의의 원리인 "오직 믿음을 통해"(sola fide) 의롭게 된다는 원리는 무시됩니다. 칭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드높인 결과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고 무시된 것이 바로 이튼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강조, 인간의 역할 약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킨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과 대적하기 위해, 반율법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반대로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칭의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의 동기 자체는 칭찬받을 수 있겠지만, 반율법주의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추가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기울어진 추의 균형을 돌려놓기 위해 또 다른 신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에 살펴볼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입니다.
박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26-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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