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 운동(사도의 부활을 꿈꾸는 자들)

이단경계 2010. 6. 29. 16:35
컬럼 난에 ‘신사도 운동’과 세계 기도의 집 IHOP에 대한
두분 목사님들의 각각의 견해를 접하면서 우리가 한번쯤은
진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사도’라는 명칭에 대한 개인적 소고를 이곳 논객 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10여년 전부터 소위 ‘신사도 운동’이라는 용어가 회자되면서
건전성에 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사도운동’이라는 것은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지난 19세기 중반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미국교회 안으로 들어온
교리의 하나로써 전쟁을 치르며 말세현상을 실감하자
말세에 기적과 부흥이 일어난다는 ‘늦은비’라는 신학을 조성하면서
이 교리가 알려졌다고 합니다.

이 ‘늦은 비’ 라는 운동은
요엘서 2장 23~24 절과 28~29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봄철에 이른비를 주시고 가을철에 늦은비를 주셔서
귀한 열매를 얻도록 도우시는 것처럼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이와 같이 부어주실 터인데
예수님 승천 이후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은 이른비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이후 오늘날에도 초대 오순절의 역사와 같은 성령을 부어주실 것인데
이것이 ‘늦은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늦은비라는 표현이 수 차례 나오지만
이것을 성령의 부어주심과 같은 상징적 표현으로 논리화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이 말씀은
예수님 부활 이후 오순절에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이 구절을 본문으로 인용해서
800여 년 전의 그 예언이 오늘 성취 되었음을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늦은 비" 교리는 말세에 교회가 새롭게 될 것이며
다시 사도들이 위임되고 초대 사도시대의 표적 은사들이
동일하게 생긴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물론 은혜의 시대인 오늘날도 갖가지 은사와 표적이 분명이 있을 것입니다만,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은 교회가 세워지기 위한 단 일회적인 것이었으며,
그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은 이미 교회와 성도 안에 들어와 계시다는 것이
말씀 안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인식해온 지식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 이 운동의 교리는 20세기 초에 오순절운동이 처음 생길 때부터
그 오순절 계통 교회의 핵심적인 교리로 자리 잡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사도운동”은 이러한 예전의 늦은비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훌러 신학교 교수였던 피터 와그너(Charles Peter Wagner)라는 교수가
‘신사도 개혁운동’을 외치며 ‘제2의 사도시대’를 선언하면서 시작 되었다고 합니다.

이 피터 와그너와 깊이 교제하며 상호 연계하여 사역을 넓혀온 사람들이  
바로 빈야드의 존 윔버(John Wimber),
그리고 마이크 비클(Mike Bickle), 밥 존스(Bob Jones),
폴 케인(Paul Cain), 릭 조이너(Rick Joyner),
존 폴 잭슨(John Paul Jackson) 등을 비롯한  소위 캔자스 시티 자칭 선지자들,
바로 세계 기도의 집, IHOP 관련 예언자들 그룹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이합의 리더(예언자)들은 자신들을 사도를 칭하고
예언의 대상인 특정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하거나
앞으로 사도쉽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마이크 비클, 폴 케인, 그리고 밥 존스 목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소위 예언자 그룹은 자칭 스스로 사도요 선자자(Prophet)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교계에서 건전성에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서울 ‘큰믿음교회’의 치유집회 등에 밥 존스 목사 및 캔사스시티의 선지자들이
주요 강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사료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도직은 그리 간단하게 생각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누구라도 사도적 직임을 가진다는 문제는
대단히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베소서 4장 11절)

위의 에베소서 말씀의 직분들이 오늘날에도 다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일련의 질문에 ‘그렇다’ 라고 대답하며 역사적 정통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벋어나고 있는 것이 이들의 상태이고
신사도운동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도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인식해온 지금까지의 전통적 이해 속에서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특별한 자격 요건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 후에 직접 예수님을 목격했어야 하고,
둘째, 그리스도에 의해 특별히 사도로써 부르심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가롯유다를 대신할 자는 “그의 부활의 증인” 이어야 한다는
행전 1장 22절 말씀을 근거로 합니다.

이렇듯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주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위임하셨으며,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던 12사도와
바울과 바나바, 혹은 실라 그리고 야고보 외에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가 사도의 반열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오늘날 그 누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뵈었다고
사도로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익명의 사도가 몇 명 더 있을 수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 이후 사도직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입니다.
이렇듯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의 수는 극히 제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고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는
살아있는 사도 대신에 우리는 사도들이 기록한 신약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약 성경은 오늘 날 교회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이 행하던 다스리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유능한 교회 사역자나 선구자를 가르켜
사도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그러나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사도직에 주어진 엄청난 권세와 권위를
읽고 보는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기에
그것은 합당치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학자적 견해일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 속에서 대단히 중요했던 지도자들,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슬리, 윗필드, 무디, 등등
그 아무도 자신을 사도라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누가 사도라는 직분을 취하고자 한다면
교만이나 자기를 높이려는 발상,
혹은 지나친 야망과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권세를 교회에서
누리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할 것 입니다.

우리는 초대 당시 이후 사도들을 계승한 사람들을 속사도 라 칭합니다.
그리고 속 사도를 계승한 사람을 교부,
교부를 계승한 사람들을 감독들이라 칭합니다.
감독들을 계승한 사람들이 이후 일반 성직자들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럼 왜 그들을 사도라 부르지 않고 ‘속 사도’니, ‘교부’니,
‘감독’이라는 명칭을 사용 했을까요?
그들이 위치적, 상황적으로는 분명히 사도 직을 계승한 것입니다만,
‘기능적’으로는 결코 그들이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인 성경을
더 이상 계속해서 기록 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직분에서 성경 기록의 기능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바울이 거의 모든 서신서 초두마다 자신의 사도임을 강조하고
고린도전서 9장 1절과 15장 7~9절에서
그토록 일부러 자신의 사도직 정당성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아무나 사도임을 주장할 수 없었고
또 그리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바울에게 분명히 사도권을 직접 주셨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당시 예루살렘 당국은 바울을 사도로서 인정하였습니다.

또한 사도란 말의 본래 의미에 있어서
더 이상 사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전통적 이해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직에 대한 진정한 계승자는 신약의 교회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특정인이 사도를 계승하여 직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내에서 전체가 사도들의 직무를
계속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사도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교회는 “교회법”과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에 근거한 “교의, 또는 교리”,
그리고 장로나 감리제도와 같은 “감독제도”라는 것으로써
초대교회로부터 전수된 무형의 사도적 직임을 계승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가 아닌 특정인이 사도권을 가지게 된다면
위의 세가지 유형의 직무들(교회번, 교리, 감독제도)에 대하여
사도된 자가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는 가정도 할 수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입니다.

마치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스스로 제정하는 교리가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위를 갖는 행세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양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여라도 그들의 저주를 받기라도 하는 날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같이 될까 봐 벌벌 떨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나친 오버 일까요?

오늘날 수많은 직분의 명칭가운데
굳이 사도라는 명칭 칭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계속 기록하여 정경으로써
기존의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인정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캔사스시티 아이합의 자칭 사도들과 그들이 임명하는 사도들은
어떤 종류의 사도일까요?
그런 기능적 요소는 무시하고 혹시 오직 사도의 권세와 권위만을
구하는 형태는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이 예언하면 누구든 사도가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밥 존스 목사는 앞으로 자신의 예언에 의하여 전 세계에 30만 명의 사도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즉, 세워진 사도들에 의해서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신약의 시대에 스스로 웬 선지자(예언자) 일 것이며,
그 선지자의 권위로 사도직을 수여한다고 하는데,,,,,???
주님이 밥 존스와 캔사스시티 예언자들에게
특정 목사 혹은 성도를 사도로 세우라는 계시를 하셨다는 말을 정말 믿어도 될까요?

12 제자들을 직접 부르시고 사도로 임명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저들의 주장에 뭐라 하실까요?

감히 사도의 반열에 설수 있다는 발상은 자신들의 현재 위치를
훨씬 넘어선 비성경적 변이가 아니고 무엇일 것인지요?

거기에다가 이 위대한 예언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명사(名師)화 내지는 신격(神格)화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고 합니다.

사도는 그 의미가 (그리스도로부터) 일정한 임무로 보냄을 받은 자이며
그는 이러한 임무에 따라 보낸 자를 대표하여 행동하며
보낸자(그리스도)로 부터 완전한 권위를 위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명사화되어 높아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가지고 싶고
탐나는 직임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사도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의 수장권을 계승하는 전통을 이어온 사람들보다
훨씬 더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자기의 직분을 자랑할
기회로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와 수고에로의
부르심으로 본 것과 얼마나 대조적일 것입니까?

이러한 제2의 사도시대를 주장하는 이들의 신학 핵심은
‘사도적 예언’ 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정의하는 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계시)를 받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주심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교적이고 건전하지 못한 집단에서 즐겨 사용하는
이른바 ‘직통계시’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전통적으로 고수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성경기록을 통해서 당신의 계시를 완성하셨고
이 성경말씀이라는 특별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외한 다른 계시의 존재는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며 우리의 정통신앙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 것입니까?

그리고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 꼭 이루어지고 성취된 것에 반해
캔사스시티의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성취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며 예언 성취 유무에는
상당히 유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끔은 공수표도 날리시는 분으로 만드는 건 아닌지,,,,,?

설령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환상이나 싸인이 있다면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옛적에 열왕의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을 그치고
3년 동안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이라는 성읍을 아람으로부터 돌려 받아야 할 성읍으로 생각하고
무력으로라도 다시 빼앗을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남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하였습니다.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자기와 함께 아람과 싸우러 가자고 요청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기꺼이 전쟁이 동참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를
여쭤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아합이 이에 동의하고 그 목적을 위해 4백여 명의
선지자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이 바알 선지자들은 아니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참 선지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아합은 자기와 여호사밧이 길르앗라못을 취하기 위해
아람과 싸우러 가도 되는지를 그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 모두는 그가 승리할 것을 흔쾌히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들의 예언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선지자에게 다시 물어 볼 것을 아합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미가야라는 선지자를 소개하면서
그는 흉한 일만 예언한다고 하며 자기는 그를 미워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의 요구에 따라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불러 들였는데
처음에 미가야는 다른 선지자들과 동일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가 4백명의 선지자들을 조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만을 말하도록 요구했을 때
미가야는 비로서 자기가 본 계시를 말하였는데
모든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음을 보았다고 하면서
이 예언을 통하여 미가야는 궁극적으로 아합의 죽음을 예고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22장)

오늘날에도 선지자를 자처하면서
온갖 예언을 쏟아내는 많은 예언자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아합왕 시절에 무수히 많던 선지자들처럼,,,,
그러나 과연 이들이 정말 그 옛날 미가야와 같은
사시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임이 확실 할 것입니까?


오늘날에도 예언자들이 특정인을 향하여 예언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무척 고무적이어서 마치 곧 큰 부흥이 일어날것만 같습니다.
그 옛날 아합과 여호사밧에게 승리를 예언하던
그 수백 명의 선지자들 예언처럼,,,,,,


우리는,
성경은 우리의 신약교회를 위해 허락하신 유일하며 충분한 권위임을 믿습니다.
기록된 말씀은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보다 더 확실한 줄 믿습니다.(벧후1:18-21).

또한 신약 성경에 드러난 양상과 형식만으로도 교회가 세워지는데
충분한 줄 믿습니다.
우리는 결코 새로운 종류의 교회를 만들 권한이 없으며
또한 성령님께서 초대 교회에서 운행하셨던 것과는 다른 식으로
혼동을 동반하며 운행하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 시대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완전한 계시로,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고 성도들에게 단 한번 주신 믿음을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미 종식되고 완성된 성경을 또 다른 계시로 대치하면서
성경의 근본적 가르침을 혼탁하게 하는 어떠한 사설(邪說)도
우리는 분명히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정리: 삭개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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