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기도에 대한 소고(1)

자료실 2010. 12. 4. 10:20
이글은 "관상기도 정체성 도입 경계령 -관상기도,신일합일 위장 자기 확신"
이라는 제목으로 "좁은 길을 걸으며"라는 개혁주의 한 카페에 실린 글을
그대로 퍼온 것입니다.

[본 글은 림헌원 목사가(한돌교회 담임목사, 예장합동, 명지대학교
교양학부 강의 역임, 협성대학교 교양학부 강의)연구한 글임을
밝힌다(편집자 주:).

시작하는 말

관상기도는 형식상으로 보면
① 거룩한 성경읽기 단계
② 읽은 것 묵상단계
③ 묵상한 것을 놓고 기도하는 단계로 나눠진다.

여기까지는 보통 QT와 거의 같아서 분별이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4단계에
설정된 관상기도의 단계이다.
그들이 표방하는 관상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불교나
천주교, 여타 동양종교의 명상 기도법이 가미된 것이다. 다 같으나 마치
이단(異端)처럼 끝이 다른 것이다. 바른 교회라 하면 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기도, 믿음의 기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신약 성경의 사도들이나 예수님은 기도를 할 때,하나님이 임재하는 시간이니
촛불을 켜라! 주먹 크기의 종을 쳐서 소리를 울려라!’는 등과 같이 어렵고도
요상하게 승려들이 좌선하고 명상하는 식으로, 혹은 무당이 폭포수 밑바위에서
촛불을 켜고 종을 흔들어 소리를 내며 신(神)내림 굿을 하듯이 가르치지 않았다.

1. 관상이란 정의와 용어 자체의 문제.

관상(觀想)이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이며, 생각과 말과 감정을 뛰어
넘어 우리의 모든 인식 활동을 활짝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수행과 노력, 지력이나 어떤 사람의 뛰어난 안목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불교 사상, 이성주의, 과학주의 사상(복음이 아닌 인본주의
사상)등이 끼여 있다.마치 인도 명상가들의 모습과 그 옛날 중국이나 한국의
도사들 모습같지 아니한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 신앙의 세계관 속에 독소같은 불순물로써 접목할 수
없는 요소가 되어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가장 싫어하시는
종교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로 급 비화 될 수 있어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물론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66권 말씀의 든든한 초석 위에서 영혼과 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다양하게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정적인 침묵 행위의 위험성.

관상가들은"내 마음이나 생각, 언어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 안에서 쉬면서 말씀하시면 듣고,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조급해 말라"
고 한다. 명상의 도를 깨우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안에 영적 바이러스가
있다. 이것들은 타 종교의 명상, 참선, 무아의 경지사상과 다를 바 없다.

'침묵기도’,‘경청기도’라고 하는 미명아래 분위기를 조성하여 놓고,
깊고도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면‘두 가지의 계시’를 인정하고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이 임한다면 이미 기록된 정경 66권 말씀과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결국 두 개의 계시를 인정하는가?’라는 질문에
관상가들은 마땅히 대답해야 한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계시의 종결성
(혹은 충족성)과 그 완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구약 성경은 계시의 방편으로 여호와의 사자(하나님의 현현), 자연, 구름,
불꽃, 사건, 말씀 등으로 임하였다. 구약성경에서는 예언의 성격에 따라서
계시되기 때문에 세미하게 또는 강렬하게 또는 강, 약, 격정적으로 계시가
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계시의 시대가 끝났기에 음성이 들려질 이유가 없다.

다른 어떤 것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음성을 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에 감화를 받고 깨달아서 그 계시된 말씀의 지표에 맞추어
걸어가며 사는 것이 오늘날 정경을 손에 든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이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말씀묵상을 통하여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3.‘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자들은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한 경험을 자기 내면에서 하게 되는데 지성적인
냉랭함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정감적인 경험이요, 직관적인 경험’
이라고 한다.
관상 기도를 통해 일상적이지 않는 종교적 신비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쟁점은 관상기도를 통해 어떤 경험을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성경이 계시한 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관상가들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경험은 타 종교, 곧 힌두교의
요가를 통한 명상법이나 불교의 명상수련, 단 수련원의 뇌 호흡, 마음
수련원의 자기를 비우는 명상 수련법 등을 통해 어떤 종교적 절정을
경험했다는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타 종교인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와 자신이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벗어나 신의 경지에 이르러 신과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말하는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체험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명상수련을 통해 궁극에는 인간이
신이 되는 정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지 않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했던 경우를 보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사 6장),
에스겔 선지자(겔 1:1; 40:1), 다니엘 선지자(단 10:5-17), 자신이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의 상태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사도 바울(고후 12:1-5),인자같은 이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던
사도 요한(계 1:9-20) 등이 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이나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의
체험은 자기들이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하는 자기 수련
기도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신비한 경험을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들에게 알리시고, 그 종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사건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들이 경험한 이런 신비한 체험에 대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거나, 객체와 주체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런 정황조차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히
이를 수 없는 영광 앞에 피조물 된 하나의 객체로서 두려움으로 주님을 뵈었다.

관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신비한 경험’이
실제로 하나님과 그들이 하나 된 것일까? 앞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면 관상가들이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경험은 내적 경험이든
외적경험이든 실제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절정의
어떤 감정적 직관적 경험을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체험을 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그렇게 말하는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씀하는‘하나 됨’은 관상가들이 말하는 하나 됨과는 다르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길은 주님 안에 있는 것, 즉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곧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이다(요15:1-10)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한다”
(요15:10)고 말씀하셨다.

또한 관상으로 기도하는 자들은‘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관계를 성찰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세계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선같아 보이고, 이보다 더
이상적인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또 무슨 사상인가?

교인들이 쉽게 도달하기 어렵고 소위 그들이 말하는‘중보기도’이상의
훈련이 된 사람들에 한하여 자기 혼자 가정에서, 또는 그들이 지어 놓은
영성수련장에서 이교도의 도사들처럼 오랜 세월 수련해 도달해야 하는
굉장한 수준의 높은 경지를 논하는 것 같아서 그 고상함의 매력에 이끌려
미혹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4.‘모든 기도가 본질적으로 관상기도’라는 말의 허구성.

예장 통합 측 J대 R 교수는 2007년 05월 16일의 인터뷰 기사에서
“관상이 란 하나님과 친밀한 삶”이라는 제목 하에 관상기도를 묻는
뉴스엔조이 기자에게 “관상기도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말로 시작하지만
사실 그는 모든 기도가 다 관상기도라고 말하고 있다.

R 교수는 관상과 관상기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관상은 방법이 아니라 상태를 말한다.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고 전 피조세계를 통해서 스스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상적인 체험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형성한다. 그러기에 모든 기도는 본질적으로 관상적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R 교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관상’으로 덮어씌우고 모든
기도를 ‘관상기도’로 덮어씌우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관련된 것들을 모두‘관상’이라 대체하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대체하자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도 관상기도요, 주님이
하신 기도도 관상기도요, 사도들이 드린 기도도 관상기도이며 묵도,
합심기도,통성기도, 부르짖음의 기도 등 모든 기도가 다 관상기도라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 영지주의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을 모르니 미혹이 따로 없는 것이 아닌가?

R 교수와 같은 관상가들의 언어적 유희를 보면 그 얼마나 기상천외한
문구를 사용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관상의 성경적
근거들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같은 소리만 그럴듯하게 전개하니 많은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다.

5. 관상기도는 성경계시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부정하는 것.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으로만 성도를 바르게
성숙케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내려놓고 관상가들이 실천하는 4단계
관상에서 신, 구약 성경 그 어디에서도 발견된 사실이 없는
‘관상’이란 용어를 새삼 끼워 넣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그의 음성을 듣겠다고 하니 그 얼마나 황당한 일이며 모순인가?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관상가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 말씀의
충분성(딤후 3:16-17)을 믿지 못하므로 ‘관상’이란 이교도의 용어를
삽입하여 새로운 반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이 탄식하시기를 “내 백성이 자기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 망하는구나”하였고, 예수님은“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셨고, 바울 사도는“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
(골3:16)라고 가르쳤고, 사도 베드로 역시“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고 하였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주님, 오직 세세토록 있을 유일한 말씀이 내
영혼 속에 채워져 하나님과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하여 주소서. 성령님이 저를 주관하셔서 내 영혼에 채워진
말씀의 능력으로 인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바르게 묵상하기 위한
기도를 한다면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은혜로 충만한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이니 뭐니 하면서 기도의 방법론을 말하기 이전에
성경 말씀의 본질이 지향하는 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6. 관상가들의 자유주의 다원주의 포용주의 신학적 해석.

기록된 66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마다 감사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성경말씀을 제쳐두고 촛불을 밝혀 놓고 구도자의 심정으로
자기 스스로 애써서 하나님을 찾아가 만나려는 수련을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관상하는 영성가들이 촛불을 사용하려는 행위는 무슨 이유일까? 촛불은
원시종교로의 회귀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모더니즘의 이성주의를
배격하는 감성주의)은 원시종교로의 회귀를 요구한다. 이러한 관상기도의
다양한 행위는 상호 종교간의 벽을 허물 수 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성경 없이도 이교도와 동일한 자리(미국의 영성수련장
'샬렘’에서는 이미 다종교가 함께 영성 수련을 하고 있다)에서 종교행위를
함께 시행할 수 있는 관상을 이용하여 서로 대화하며 종교간 통합을
유도하게 된다. 결국 관상이 세계 종교 일치(종교다원주의)로 가려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첫 단초(端初)가 아닌가 한다.

이미 한국의 유명한 몇몇 교회에서는‘관상당회’시간에 당회원들은
당회 주제에 대한 대화가 일체 없다고 한다. 아예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게 하고 당회를 끝낸다고 한다.‘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며 촛불을 켜고,두 개의 주먹크기만한 종을
갖고 임재지기들로 하여금 관상 종교의식을 시도하게 하여 관상기도와
관상회의 등과 같은 방식으로 그 열기를 더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 말씀까지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며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막힌 세상
(그래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요설이 나오는 것이다)을 구현하겠다는
관상가들의 입장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님께서 그 안에 내주해 계실 텐데
그들이 마음을 비운다면 큰 일이 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귀신이 와서 보니 그 집이 깨끗이 청소되어 빈 것을 알고 가서 다른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 갈 것이다. 물론 마음을 비운다고 성령님이
들어오시고 마음을 채운다고 나가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항상
내주해 계시기 때문이다.

좌선요가의 단계로 마음을 비우고 호흡, 즉 들숨에 성령님이 들어오고
날숨에 죄를 내보내고 하면서 어떤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니 도대체 그 경지에서 만나는 실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관상가들이 말하는 성령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성령님이 아니며 그들이
어떤 경지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성경적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 어떤 기술이나 훈련으로 도를 닦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비어 있는 데는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성령님이 분명히 안 계시니까 마음을 비우고 성령을 모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 씻음 받고 성결케 된 자에게
성령님이 계시고 주님의 자녀로 살면서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히 4:16).

관상에 관하여 성경적 근거를 제시 하였던 H대 K 교수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은 마태복음 5장 3절에서‘자기 부인’을 말하고 있다.
이를 불교의 무아(無我)나 유교의 ‘사(私)를 버려라’나 도교의
'오상아’(吾喪我 : 나를 잃어버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여타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의 결국은 “나는 없다”라든지 “마음을
비운다”라는 상태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자기 부인’의 상태는
‘죄인’이라는 존재가 전제된다. 죄인중의 괴수인 나’라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그 죄인, 자기를 부인하는 그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의롭다고 인쳐 주신다. 그리고 그 죄인은 자신을
의롭다 하신 그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빈 마음이나 ‘나’라는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이 또한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이유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이 미리 정하시고
홀로 행하신 결과일 뿐이다.

아울러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든지, “가만히 있어라”
든지 하는 말씀은 말을 적게 하고 떠들지 말고 침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7. 유혹이 전개되는 통로를 주의하자! .

21세기에 진입하여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관상기도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논쟁의 핵심은 그것이 성경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건하며 성경적인 기도라 하고, 주로
'경험을 통해서’ 강력하게 주장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다원주의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며 매우 주의할 것을 말하고 있다.

우선 관상으로 하는 이런 관상기도방법(통합측 J대 R 교수는 태도라고
말하지만 분명히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이 유행하게
되는 사회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소위 마음을 다스림으로 성공하는
세속 사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철저한 성경적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익숙치않은
'먹고 살만한’ 지성인과 중산층 쯤의 교인들이 이러한 맥락에서 상당히
호응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실력이 탄탄한 신학교
교수들과 유명한 목회자들이 비성경적인 근거를 근거랍시고 제시하며
효과를 입증하여 이른바 ‘영성신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항상 유혹이란 ‘낯선 언어’를 선봉장으로 하여 보다 새롭고
좋아 보이는’ 하나의 흐름을 조장해 내게 된다.
예를 들어 ‘경건’이라는지 극히 성경적인 용어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그 의미도 애매모호하고 충분히 다원주의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영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자
‘경건을 경직으로 오해하여 질식할 듯한 상태에 있던 자’들이 마치
해방군이 온 것 마냥 ‘밀고 들어’ 왔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경건을 질식시키고 영성을 추앙하는 교묘한 배도적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는데 조금의 부족함이나 주저함도 없이 은밀하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성경적으로 철저하지 못한 교수들이나
목회자들이 무언가 새로운 유행을 불러 일으켜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고 싶어 하는 이들’(딤전 6:5)의 이해 조건과 맞아떨어지면
이는 곧바로 기독교계의 새롭고도 강력한 도구가 되고, 적당하게
손질하면 쓸 만한 프로그램으로 탄생하여 넉넉한 재정을 충당하는
요소도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들이 이른바 ‘영성에도 색갈이 있다’는 류의
사상이나 레노바레 운동, 관상기도 등이다.

우선 관상기도만 하더라도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비슷하나 결국은 다른 길로 인도하는 극히 교묘한
유혹이다. 물론 이들의 가르침이란 관상가들이 볼 때 기도에 대한
기본 자체도 잘못 형성되어 일부 교회가 그런 것처럼 소위 막가파식으로
울부짖고 시끄럽게 ‘따따 부따’ 기도(?)하는 그것에 대한 반작용의
대안으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신바 하나님과의 진실한 대화,‘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따른 실천, 마음을 살피며 자기를 부인하는 태도,
말씀 묵상에 따른 내용을 붙잡는 의지적인 간구 등으로도 충분히
성경적인 기도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성실하게 하지 않고 아버지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가 부족하니까 기도에 대해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고
새로운 방법론 을 찾다 보니 해아래 새 것이 없음에도 ‘무언가
신선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오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영적 세계는 참으로 혼돈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철저히 성경적인 신앙으로
무장하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적인 흔들림이다.
이들은 분명히 비성경적인 열매를 보고서도 엄청난 규모로 성장해버린
오순절 주의와 성령 운동의 세력 앞에 자신의 빈곤함을 느끼는 듯하다.
그리하여 연합해서는 안 될 자들과 함부로 연합을 선언하고 실천하며,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사상과 사조를 거리낌 없이 수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영향력과 인격을 단순하게 인정하며 따르는 수많은 성도들을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영적 시력저하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수많은 개혁주의자들과, 성경을 사랑하는 동료들과 후진들이 이를 지적하고
있지만 이미 대세는 우려할만한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관상기도를 하는 유명한 목사와 교수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영향력이 막강한 지도자들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할 때
교회가 얼마만큼 영적 혼동과 피해를 입게 될지 심히 우려가 된다.

진실로 성경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제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를
각오를 가져야만 하는 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교묘하게 흐르는 유혹의
강물을 따라 배도의 대해로 서서히 나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시력마저 상실한 지금의 상황은 안타까움 그 자체이다. 아무쪼록
깨어있는 소수라도 우리의 신앙 세계를 파고드는 유혹의 통로를 잘
분별하고 끝까지 말씀을 붙잡는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 개혁주의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깨닫는 법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부르짖는
간구와 묵도와 묵상이 언제나 성경계시와 조화를 이루도록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림헌원 목사 (onestone3@hanmail.net)]
출처: 아멘넷, 교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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