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에 비춰본 "십일조"
자료실 2011. 9. 15. 04:27한국교회(이민교회 포함)에서 유난히도 강조 되어지는 십일조에 대한 시비론은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닌줄 안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내외적으로 심한 타락상을 보임과 동시에 많은 치부를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사회로 부터 불신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 되어지며 이는 앞으로 더욱 더 뜻있는 자들에 의한 논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매우 민감한 문제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어떠한 부분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한국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참으로 많은 부분들이 비 성경적이요 비 진리적인 커다란 모순속에 빠저 있지마는 그중에서 특별히 지적 하고자 하는 것이 율법주의적 신앙과 기복주의적 신앙이라 하겠다.
율법주의 신앙이란 징계에 의한 벌과 저주가 두려워 계명 및 말씀을 지키며 복종하는 것을 의미 함이요 기복신앙이라 함은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타산적인 동기에서 예배와 헌금(특히 십일조)을 바치며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살아가는 복음주의적 신앙 생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겠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율법주의와 기복사상에 의한 신앙관을 복음적 신앙으로 승화 시키는 개혁이 필요하고 율법주의의 노예적인 맹목적 복종과 극히 타산적이며 이기적인 기복주의적 신앙을 하나님께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되돌려 놓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 되어진다.
십일조에 관해서 논하다 율법과 복음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언급 하게 됨은 이 문제를 나름대로 정립하지 못할 경우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계명들이 인간들의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겠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나마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십일조 하면 의례 첫번째로 제기 되는 것이 모세가 받은 613 가지의 율법에 속한 계명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를 지킬 의무가 없다하며 십일조를 배척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신약에 의해서 구약 성경의 일점 일획이라도 무시 되어지거나 경시 되어저서는 결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율법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를 속박하며 우리의 삶에 참으로 성가시고 부담을 주는 계명들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 받은 율법이 과연 그런것들일까.
바울은 로마서 4:13 이하의 말씀에서 성경(구약)을 율법의 선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약속의 선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있게 말하기를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
12)라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바울처럼 한차원 높은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서 주신 율법을 볼것 같으면 복과 저주를 놓고서 우리로 하여금 둘중 하나를 택하라 하시는 융통성 없는 엄하시기만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해 우주보다 크신이가 실오라기 하나하나 까지도 간섭하시며 가르쳐 주신 참으로 자상하신 사랑이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을 유대인들 처럼 율법이기 때문에 지킨다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품격에서 발현된 선한 일이기 때문에 지키겠다고 할때에는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율법의 개념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구안록을 집필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속죄의 원리편에서 "구약적인 엄중한 도덕을 가르치지 않고 대번에 신약적인 부드러운 은혜를 가르치는 자는 자활(自活)의 길을 걷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막대한 유산을 넘겨주는 미련한 아버지와 같다" 라고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바 있다.
십일조를 율법이냐 아니냐 하는 단순한 논리로만 전개시킨다면 이제까지 논란 되어저온 그 범위를 벗어저 날 수 없을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시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과 회막에서 봉사하던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 제정된 것인데(민18:21)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그리던 동물제사 제도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서 더 이상 제사장도 동물제사도 레위인들의 회막 봉사도 필요없게 되므로서 이 모든 것들이 폐지 될때 십일조도 함께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것 같다.
그러나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대책 이전에 그 근본이 하나님의 것(레27:30) 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활이 끝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은 결단코 폐지될 수 없다 하겠다.
인류 최후의 심판이 있기까지 이 지상에는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업이 중단 되어질 수 없기에 하나님의 것은 절대 필요하며 또한 지켜야 할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사업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겠기에 이일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의 생활을 돕고 선교와 구제등 지상 교회에 맡겨진 사명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물질 또한 필요 하기에 교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극히 경계해야 할것은 아직도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며 찬반 논쟁을 벌이는 자들의 주장과 참으로 많은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십일조와 세상의 물질의 복을 연결시키는 기복주의적 신앙관이다.
우리가 율법을 존중한다면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더욱 더 존중하며 지켜 나가야 하듯이 십일조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 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22:37) 하셨고 이 말씀의 뜻을 깨달은 사도들 및 믿음의 선진들은 기꺼히 목숨까지도 드리지 않았던가.
초대교회때에 사도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그에 따른 영혼 구원을 크게 외치며 가르쳤을 때 구원의 확신과 은혜 받은 성도들은 그들 소유의 밭과 집을 팔아 전액을 사도들 앞에 가져왔고 이를 위임 받은 사도들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율법 시대의 때가 아니요 은혜 시대의 신앙 생활이었을 때이다.
이러한 믿음 앞에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옳다 그르다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인가.
사도들 및 바울은 이미 이러한 믿음을 소유 하였기에 십일조에 대해서 일체 언급함이 없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그러기에 십일조는 율법에 의한 것이기에 하지 않아도 된다 함이 아니라 더 깊은 큰 뜻을 따라 행함이 옳고 좋은 행위라 하겠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십일조 및 헌금관을 바로 세워야 하겠다.
칠일중에 하루를 성별하여 안식일로 지키는 교인중에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면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참된 믿음의 발로라 하겠다.
그러나 일반적인 율법의 개념을 가지고서의무적으로 드린 십일조라면 바리새인들이 바치던 의미의 십일조이기에 이는 아직까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증거요 아무런 유익함이 없는 행위라 하겠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더 많은 세상의 재물을 얻기 원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신성해야할 연보가 뇌물성 헌금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 신 이시므로 조건부적인 뇌물성 헌금을 기뻐 하시지 않으시며 순수한 연보를 원 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좀 더 성숙된 신앙인으로서 생각 행야 할 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으로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십분의 일이 아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린다 해도 무엇이 아까울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뜻을 외면하고 바친즉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 주신다며 싸구려 축복과 가치없는 은혜와 구원을 외쳐대며 설교를 하는 목사들,
그뿐 아니라 많이 바치는 자가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며 십일조 외에도 주정헌금, 월정헌금, 갖가지 감사헌금, 각종 적기헌금, 구역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교육헌금, 부흥회헌금, 사경회헌금, 수양회헌금(일일히 다 나열할 수 없어 줄임)등 갖가지 명목을 부쳐서 교인들로 부터 헌금이란 명목의 돈을 거둬들이는 이러한 일들이 정말 성경적이며 합당한 행위들인지는 생각 해복 문제인것 같다.
신앙 교육을 앞세워 교묘한 말을 내세우며 헌금에 대한 설교를 열심히 하는 목사일수록 하늘의 신령한 복이 교인들 위에 임하시기를 바라는 것 보다는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이고 자기는 지지 않으면서 교인들에게는 무거운 멍에를 지우는 자들은 아닌지.
이러한 자들이 목회하는 교회일수록 교회적인 일은 외면 하면서 무엇 하나 교회가 이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참된 교회 교육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는 것이요 그러한 가르침만 잘되면 헌금 강조는 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 뿐 아니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 하는데(신14:29)도 사용 하라 하시었건만 현 사회로 부터 억눌리고 소외당한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과연 얼마나 생각하며 사용 하였는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가르침은 풍성하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선을 찾아 보기 힘든 한국교회들을 보면서 거둬들인 것을 하나님의 뜻 하신대로 사용치 않으면서 자기들만의 유익을 위해서 호사스러운 일을 위해 아낌없이 지출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가 없다.
그러기에 십일조는 거둬들이는 일이 문제가 되서는 아니되고 거둬들인 십일조가 하나님께서 제정 하신바 대로 사용 되어지고 있는 지가 문제가 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아멘넷 게시판, 작성자/ 마란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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