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복/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Ⅰ. 문제제기
침례교 목회자 가운데 사도신경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痼甄�. 처음부터 침례교의 이상과 전통을 받아들여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을 반대해왔던 목회자들은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별 관심이 없거나, 목회 현실상 불가피하다고 판단해서, 아니면 사도신경이 성도들의 신앙교육상 유익하다고 믿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공적 예배에서 암송하는 교회도 적지 않다.
필자는 오늘날 모든 한국 침례교회들이 반드시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제적 조항으로 그런 법을 만든다면, 그것 자체가 침례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성도들과 목회자의 판단에 따라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 암송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규제할 강제적 기구는 침례교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동안 침례교회의 선배들이 왜 사도신경을 거부해왔는가 하는 문제는 한번쯤 분명하게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은 침례교의 정신과 관련해서 사도신경의 문제를 몇 가지 각도에서 풀어보고자 한다.

II. 신앙고백과 신조의 차이점
“신앙고백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신조는 반대한다.” 이것이 바로 침례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침례교회는 수많은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지만, 신조는 거부해왔던 역사적 독특성을 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고백과 신조(사도신경)의 차이를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1. 신앙고백의 필요성
침례교회가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강조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앙고백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5)

신앙고백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신앙의 주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함이다. 주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내가 덤으로 안고 들어가는 것이 신앙일 수 없다. 나는 나의 신앙의 주체가 된다. 그것이 비록 개별적인 신앙고백이든, 아니면 특정한 집단의 신앙고백이든, 그 신앙고백을 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신앙고백의 세 번째 필요성은 이단사상을 분별하고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는 데 있다. 내가 믿고 있는 대상이 누구이며 어떤 내용을 복음으로 믿고 있는지 검증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신앙고백은 공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라고 하셨다.

2. 신앙고백의 문제점: 신조화(信條化)
세상에는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는 법이다. 신앙고백의 유용성 못지 않게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점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네 가지 차원에서 신앙고백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1) 형식성, 2) 강제성, 3) 획일성, 4) 우위성. 이 네 가지 특징을 보여줄 때 우리는 그것을 신조(Creed)라고 한다.
침례교 목회자 허셀 홉스(Herschel Hobbs)는 신앙고백과 신조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앙고백이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을 진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신조는 당신이 우리의 교회에 일부가 되려면 이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침례교는 결코 신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들이 ‘만일 이것을 믿지 않으면 나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고백이 아니라 신조다.”
신앙고백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이루어질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형식화되면 참 신앙은 살아남을 수 없다. 신앙고백이 강제성을 띠게 된다면, 그것은 자발적인 신앙을 보장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신앙체험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동일한 형태로 신앙고백을 하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획일화된 신앙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나치게 중요시되고 강조되면 그것은 성경보다 높은 실제적인 권위를 차지하게 된다. 신앙고백이 신조로 변하면, 그때부터 신조화된 신앙은 나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은 자발적이고 다양성이 용인되는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면서도 그것을 획일화하고 강제성을 띠는 신조로 변질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1963년 미국 남침례교의 신앙고백(Baptist Faith and Massage)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신앙고백의 원리를 보면,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신앙고백은 침례교회들의 일치된 견해로 이루어진다. 2) 신앙고백은 결코 완전한 진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유롭게 개정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3)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침례교의 어떤 단체라도 그들의 신앙고백을 기록하고 출판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한이 있다. 4) 침례교 가운데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는 신구약 성서다. 신앙고백은 해석에 있어서 안내의 역할을 할 뿐, 양심을 지배하는 권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5) 신앙고백은 성서로부터 나온 종교적 확신에 대한 진술이다. 다른 삶의 영역에서의 탐구나 사상의 자유를 방해할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3. 사도신경이 나온 배경과 문제점
  1) 배경
예수님에 대한 신약성경의 단순한 신앙고백들은 제2세기 교회에 전달되면서 여러 가지 다른 항목들이 추가되고 해석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형태의 신조가 생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적 사상과 헬레니즘 사상이 서로 혼합되고 상호 작용하기도 했다.
동방교회에서는 “니케아신조”를 필두로 여러 신조들이 형성되어 나갔고, 반면에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비교적 통일성을 이루었다.
사도신경의 초기 형태는 이른바 “로마신조”라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거룩한 교회, 육체의 부활 등에 대해 대체로 단순한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4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이 많이 첨가되었고, 오늘날 형태로 완성된 것은 8세기 경이었다.

   2) 문제점
사도신경이 가장 악용된 사례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는 신학적 폐쇄성이다.
왜 성서 침례 교회에서는 예배 때마다 사도 신경을 외우지 않는지 생각해 보자.
첫째, 성서 침례 교회는 역사적인 뿌리나 교회의 전통이 장로 교회와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는 국가교회(state church)와 자유교회(free church)가 있는데, 자유교회는 국교에 반대하여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강조하며, 예배의 의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한다. 침례 교회는 자유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대표적인 교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분위기에 차이가 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도 아니고 또 그들이 우리의 신앙의 기준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성경적이면서 그들과는 다른 전통과 특징을 가진 교회나 교파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예배 의식이나 예배 순서가 조금 다르다고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식의 사고는 불식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도 신경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내용보다도 형식화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사도 신경에 언급된 내용중에 우리가 믿지 않는 교리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예배 때마다 외우는 것은 반대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그 내용은 뒷전이 되어 버리고 껍데기만 남아서 염불을 외우는 것과 방불하게 된다.
셋째, 사도 신경을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도 신경은 성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도 신경의 역사적 배경과 변천에 관해서 조금 고찰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사도 신경은 12사도가 한 구절씩 쓴 것을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완전한 전설에 불과하고, 실상은 서서히 발달되어 천주교회가 지배하던 AD700년경에 오늘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사도 신경의 초기 형태는 2세기말(약170년경)에 나타났다. 침례받을 때나 불신자들의 질문에 손쉽게 답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단한 신앙고백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때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거룩한 교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러한 단순한 초기 형태에 한 구절씩 더해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하데스(또는 지옥)로 내려갔다.' (이 구절은 우리말 사도 신경에는 없음)는 구절이나, 'holy church'(sanctam ecclesiam; 거룩한 교회)에ꡑcatholic'(보편적이라는 의미도 되고 천주교회라는 의미도 됨) 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것이라든지, '성도의 교통ꡑ(sanctorum communionem)이라는 표현은 모두 천주교회가 지배하던 6-7세기에 더해진 내용들이다.
이중에 특히 '성도의 교통ꡑ은 지금도 천주교회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교통으로 해석해 소위 천주교회의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특히 천주교회의 지배하에 여러 구절이 더해져 오늘의 형태가 된 사도 신경을 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반복해야 되는가? http://biblemap.kimc.net/church/bbc3.html; 2001년 2월 19일 접속.
*참고: 「한국천주교회 200년 이 땅에 빛을」, 66, 147.

4. 한국 침례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문제
얼마 전에 한국 침례교의 담임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내용 가운데 사도신경에 관한 대목이 있어서 이 자리를 통해 일부 밝히고자 한다. 전체 응답자(277명) 가운데 공적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한다고 답한 목회자는 88명(31.8%), 암송하지 않는다는 목회자는 189명(68.2%)이었다. 이 수치는 대체로 한국 침례교회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전체적인 설문분석은 차후에 발표될 것이다).
목회자들이 사도신경 암송을 공적 예배에 도입한 이유와 반대하는 이유를 직접 기록하도록 했다. 아래의 표는 위로부터 많이 응답된 순서로 정리한 것이다.

(표) 사도신경을 암송하거나 반대하는 이유
찬성하는 이유
반대하는 이유
한국 기독교의 풍토이므로
이단시비의 해소를 위해서
타교단에서 전입한 사람의 정착을 위해
복음적 신앙의 핵심이 들어있으므로
특별히 하지 못할 이유 없다
교회역사를 통해 검증된 것이므로
신앙교육을 위해(초신자와 노인들)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
신앙은 고백하는 것이므로
침례교에는 마땅한 신앙고백이 없어서
해서 손해볼 것이 없다
성경에 없다
동의할 수 없는 신학적 내용이 있으므로
침례교 전통이므로
신앙의 다양성을 위해서(개인적 신앙고백)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천주교 종교회의의 산물(신조)이므로
사도의 고백이 아니다
우리가 채택한 다른 신앙고백이 있으므로
형식에 빠지기 쉬우므로
주기도문과 같은 권위가 없으므로



■사도신경의 문제점
[1]배경.
사도 신경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부터 지금보다 훨씬 많은 내용으로 전승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 전승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 신경이 채택된 것은 서기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의 에베소회의, 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 진 것이고 이런 형태의 신앙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 회를 거치면서 수정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초의 종교회의를 참고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라는 신앙적으로는 상당히 덕목이 있는 사람과 같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 보다는 몇 년 젊은 아다나시우스라는 두 사람의 논쟁에서 출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관한 것이었고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거론되어 왔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교에 있어서 많은 신들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 별도로 계시다고 하는 두 하나님을 주장하였고 예수는 모든 피조물의 제일 첫째되고 가장 높은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이론이었고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참가했고 결국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끝냈으나 완전한 논쟁의 종결에는 실패했으며 다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신앙적 의결이 첨부되었고 다시 451년의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톤 회의에서는 예수의 양성론이 제기되어 정리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A.D. 4세기경 라틴어 [Symbolum-Apostolicum] - 사도들의 상징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지만 동방 교회(희랍 정교회)에서는 한번도 사도 신경을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2] 성경의 가르침을 다르게 가르치는 것과 문제가 되는 표현들.
전체보다는 몇몇 성경과 문제되는 부분만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①"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오늘날 '저리로서'라는 표현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알 수 없는 말을 신앙 고백으로 주문 외우듯이 하는 행위는 로마 카톨릭의 상징주의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옛 말에다가 조사 -으로부터에 해당되는 옛 표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그곳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②"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빌라도는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준 인물이지만 그는 오히려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쓴 흔적을 여러 곳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참고 : 마27:24; 눅23:4, 14~15, 20, 22; 요19:4, 6, 12].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틈만 나면 기회를 노려 예수님을 없애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빌라도를 통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형법상으로 보아도 빌라도는 종범이며 유대인들은 교사범에 해당합니다. 교사범은 그 형의 주된 범죄자로서 우리 나라의 형법 제 31조 1항에 의하면 타인을 교사하여 형을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 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같은 법 제 32조 2항에 의하면 종범의 형은 정범의 형보다 경감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간단한 세속적 관점에서 보아도 교사범이 더욱 파렴치한 지능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범을 정범으로 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처형한 정범이 누구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전히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행3:13)라고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들의 죄, 좀더 구체적으로는 나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므로 올바른 신앙 고백이 되려면 "나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
  ③"지옥에 내려가셨다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찜찜한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입니다. 이 구절은 한글 사도신경으로 번역되면서 개운하지 못한 기분을 덜기 위하여 삭제되었지만 영어 사도신경에는 그대로 남아 있어 독자들은 한영 성경의 첫 장에 나와 있는 한영 사도신경을 대조하여 참조하기 바랍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④"거룩한 공회"는 영어의 the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한 공교회)를 번역한 것입니다.  Catholic이란 뜻은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우주적인 이라는 뜻으로서 한영 사도신경을 보면 어떤 것은 Catholic이라는 단어를 감추기 위하여 이것을 풀어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될 경우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신교도 catholic church(보편 교회)라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시고 있던 당시의 카톨릭 교회로서는 땅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가 카톨릭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터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여 난관을 넘기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제로 '공회'란 표현은 애매하기 그지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공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참고 : 마10:17, 마26:59; 눅22:66; 요11:47]
⑤"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믿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죽은 카톨릭의 성인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와 산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카톨릭 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금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 또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고전1:2)을 가리키지만, 로마 카톨릭의 '성도'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 되는(복자, 성자) 죽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강신술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미신에 속한 것입니다.[신18:11; 사8:19-20] 트렌트 회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날 크리스마스에 싼타크로스에게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비슷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⑥"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원래의 사도신경이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신경 끝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끝 부분에 붙어 있던 이러한 표현을 빼버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초창기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는 말로 사도 신경은 끝맺음되어 있습니다.

[3]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 신경 암송의 부적격성의 이유를 정리해 보면 ①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②출처가 분명하지 못하고, ③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고, ④완전한 신앙의 고백이 되지 못하며, ⑤어떤 부분에서 성경과 다르며, ⑥미신적인 요소와, ⑦성경에 완전한 고백이 있으므로(마16:16), 필요치 않다고 보아집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 합니다. '과연 사도 신경이 이단 판별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경(the Apostles Creed)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 만든 신경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로마 카톨릭 신부들이 이단 정죄의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경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가지고 사도들의 신경이라 명하고 그것을 이단 규명의 잣대로 규정하는 것은 명백히 비 성경적입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사도신경을 가장 옹호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카톨릭 교회입니다. 그들은 사도신경을 반대하는 자는 신앙의 최대의 적, 곧 이단으로 정죄해 버립니다.  결국 현대 교회의 사도 신경 옹호론은 결국 중세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타락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한 프로테스탄트 정신, "Back to the Bible!" 정신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입니다. 이것 외의 어떤 것을 주장한다면 그것이 곧 이단일 것입니다. http://bible.or.kr/qna/46.htm; 2001년 2월 19일 접속.


출처: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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