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성령의 얼굴"(2)
박영돈 목사 2012. 10. 19. 09:54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이번에 소개하는 강의는 두번째 주제강의인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다. 이 강의는 박영돈 목사의 저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요약한것으로 한국교회의 잘못된 성령운동을 지적하며 성경적으로 성령의 특성을 해석한 내용이다. 다음은 두번째 내용이다.
영적탈선의 요인들
성경적인 이해를 따지기 보다는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시대의 실용주의적인 가치관과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대중을 선동하는 표풀러리즘이 이런 성령운동을 부추켰다고 볼수있다. 이와 더불어 어떻게 하던 교인의 열심을 자극하여 교회를 속히 부흥시켜 보려는 사역자들의 열망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빚어낸 현상이라고 볼수있다. 어떤 목사는 온갖 세미나를 돌아다니며 쓰러뜨리는 기술이나 방언과 예언하는 법을 습득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전수받아 정체된 목회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안성 모수양관에서 이런 집회가 열렸을때 수백명의 목회자들이 모였다. 집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둘씩 짝을 짓게하고 입을 벌려서 아말감으로 때운 이를 확인하게 하고 "예수이름으로 아말감은 금니로 변할지어다"라고 하니 여기저기서 금니로 변했다는 환성이 터져나왔다. 처음에는 그런 현상은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막상 눈앞에서 그런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다고 한다. 기적앞에서는 너무도 상식적인 판단마저도 무기력해질수 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다. 성경은 사단도 이적과 표적을 행해서 미혹케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미국에서 어떤 그리스도인 여성은 마술적인 힘을 행사하는 한 주술사에게 놀랍게 치유함을 받았다. 두발의 길이가 5센티 차이가 나는데 주술사를 통해 놀랍게 치유함을 받았다. 그후에 그녀는 심한 우을증과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시달렸는데 담임목사에게 고백하고 회개하자 심리적인 압박이 떠나게 되었다. 그순간에 발의 길이는 원상태로 돌아갔다. 표적과 기사는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이슬람의 성자로 알려진 바바 화리드는 죽은자도 살리고 불치의 병을 고치고 마른 대추나무 열매를 황금덩이리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였다고 얼려졌다. 그러므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다 성령의 역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성경적으로 분별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 어떤 선교지에서 사람들이 나쁜음식으로 인해 잇몸이 상해서 이빨이 다 빠졌다. 이가 다시 날수가 없는 상태인데 선교사의 기도로 인해 기적적으로 생니가 돋아났다고 한다. 그것은 기도로 통한 하나님의 긍휼의 나타남,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가난해서 의료적인 혜택을 받을수 없는 곳에 기도를 통해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이를 요술과 같이 노란색 이로 둔갑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고 미혹의 영의 장난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와 질서의 영이시기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없이 기적을 남발해서 우리를 혼란과 무질서속에 빠뜨리게 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지금도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성령님은 기적을 경제적으로 행하신다. 분명한 경륜적인 목적과 의미가 없이 기적을 마구 행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하면 기적을 아끼신다. 그것은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데 인색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육체가운데 살도록 정하신 창조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 뜨림으로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시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가 육체가운데 살도록 이런 세상의 질서속에서 살도록 정하였다. 그런데 주님이 기적을 행함으로 당신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면 우리들은 엄청난 혼란속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표적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수는 있을수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을 주님앞에 인도하는데는 별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거침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의 의심과 불신을 일격에 날려버림으로 그 표적앞에 믿지 않을수 없도록 그들을 굴복시킬수는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 그들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순종과 사랑의 반응을 이끌어 낼수는 없다.
만약 기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사는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그로인해 유대인들은 더욱 강팍해지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을 하게된다. 그 이후부터 복음서에서 기적은 무대뒤로 사라지고 에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사건이 전면에 부곽되는 것을 볼수있다.
죄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그들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순종의 반응을 이끌어 낼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능력만이 완고한 죄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는 것이나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표적과 기사를 쫓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다.
지금도 십자가를 피상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십자가의 복음보다 마술과 같은 표적으로 사람을 끌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의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이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기적과 은사를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강조가 십자가에 대한 포커스를 흐리게 하는데 있다고 볼수있다.
복음사역의 편법을 동원하려는 유혹
성령운동 하는 이들이 그토록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을 갈구하는 것은 사람들을 제압하고 콘트롤하기에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편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은 아무리 전해도 사람들이 눈하나 까닥 안하지만 놀라운 표적앞에 사람들이 쉽게 압도된다. 표적이 사람들을 간단하게 굴복시키는 비결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불순종과 완고함을 오래참고 기다리는 고통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의 광적인 열심과 교인들의 자원과 에너지를 유도하는데도 효과만점이다. 몇년동안 아무리 말씀을 열심히 전해도 교인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을때 설교자는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복음전파 사역이 에너지와 정력과 시간을 마냥 소모하는 일같이 느껴진다. 자신의 청춘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왜 이렇게 맥없는 말을 주셨는가, 불을 좀 내려 주시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복음전파의 성과가 신속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는 조급증과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맞물리면 성령의 원칙보다 변칙을 따라서 목회하려는 사람들을 끌고 조종하려는 유혹이 극대화된다. 많은 사역자들이 복음만을 전하며 불순종하는 이들을 오래참고 기다리는 십자가의 길을 견디지 못하고 쉬운길을 택하려고 한다. 편법을 동원하려고 한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성령운동은 성령님을 따라가는 느리고 힘든길을 회피하고 속성반을 택하려는 방편으로 이용된다. 종교의 주식시장에서 기적만큼 인기있는 상품은 없다. 말씀은 아무리 전해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지만 병고치는 능력이라도 받아서 암환자라도 고쳐서 그것이 소문이 나면 텅빈 교회당이 가득할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워 진다. 복음사역자들은 비록 느릴지라도, 사역의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정도를 따라서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을 하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했던 것 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참음으로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사역이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과 우리들의 모든것을 소모하는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소모하는 것 같은 우리들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구체적으로 증거가 된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고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무한히 탕진하고 낭비하는 분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낭비하는 사랑과 소모하는 사랑이 우리의 소모하는 것 같은 복음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증거가 된다고 볼수있다. 이런 낭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탕자를 설복시킨것처럼 우리들의 소모하는 것 같은 복음사역이 탕자들을 결국 설복시켜서 주님앞으로 돌이키게 한다. 목사 자신도 하나님의 오래참음의 사랑을 실천하고 본받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게 된다.
성령은 우선적으로 기적과 표적이 아니라 복음의 세미한 음성가운데 역사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약하고 미련해 보이듯이 복음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방법이 약하고 어리석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약하심이 구원이 되는 것 같이 성령님의 약하심이 우리들에게 구원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강압적으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부드럽게 대함으로 우리가 충분히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신다. 우리가 얼마든지 불손종할수도 있게 하셨다. 성령님은 단숨에 우리들의 완고함과 강팍함을 꺽어서 우리를 하루아침에 뒤집어 놓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수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고집을 부리면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져주신다. 오래참고 기다려 주신다. "성령님도 자신의 성질은 고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이지만 일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다.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못된 성질을 성령님은 뜯어고치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자원해서 간절히 원할때까지 성령님은 기다려주신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죄의 삶에 신물이 나야, 죄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들이킨후에 죄의 쓴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더 이상 비참할수 없을정도로 비참하고 곤고해져야 죄에서 돌이키려고 한다. 죄의 삶이 아직 숨쉴 여유가 있는 동안 우리는 성화의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성화는 더디게 진행된다. 평생동안 성화가 거의 진행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완고한 옛자아가 성령님을 평생동안 이겨버린 것이다. 굉장히 센 사람들이다.
우리교회에 변화가 안된 교인이 많은 것은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오래참고 기다리신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만큼 성령님이 온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분명한 반증이라고 할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완악한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떤 신학자는 2천년 교회역사는 성령의 수난받은 역사라고 했다. 우리 개인의 신앙역사도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오래 고난을 받는 역사라고 할수있다. 성령님이 그동안 우리안에서 우리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심히 고난을 받아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평생을 걸쳐서 그들의 마음의 강팍함과 완고함으로 성령을 거스리고 근심시키며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한순간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무한한 인내와 온유로 기다리신다. 이 성령님의 오래참으심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성령님이 오래참으시고 기다려 주셨다. 나의 많은 죄악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너무 인자하심으로 나를 대해주셨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지금 우리는 전무후무한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사야 32장 15절에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라고 나온다. '부어주다'의 히브리어는 특별한 의미를 띄고 있는데 벌거벗기다, 비우다, 바닥을 드러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를 살려서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표현을 한다면, 하늘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하늘이 텅빌정도로 성령님을 몽땅 이땅에 부어주셨다는 말씀이다.
성령님이 그 거처를 완전히 하늘에서 이 지상으로 옮긴것과 같다. 우주에서 성령이 가장 거하시기 원하시는 곳이 우리안이다. 당신의 아들의 핏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거처로 그리고 성전으로 삼으셨으니 우리안에 얼마나 그분이 거하시기를 원하시겠는가. 우리는 더 이상 성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성령님이 우리를 오래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를 오래 기다리고 계시는 성령님께 돌이켜야 한다.
침체된 목회의 유일한 돌파구
성령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살고 사용하던 것에서 우리들이 돌이켜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운동은 회개운동으로 시작한다. 오순절로 돌아가는 길은 한 길 밖에 없다. 우리의 옛자아가 예수그리스도와 못박힌 십자가가 우리의 삶과 사역의 한복판에 복귀되는 것이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십자가를 건너뛰고 곧장 오순절로 나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회개의 은혜를 추구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은사만을 체험하려고 하기에 성령운동이 변질된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오순절에 이르는 길은 없다. 십자가 없이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면 이 땅에 부흥이 아니라 재앙이 임하게 될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순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후에 오순절의 시간이 있었다. 우리가 오순절을 체험하기 위해 예수님의 구원사건에 주관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한후에 우리들은 오순절을 체험할수 있다. 객관적으로 구원역사의 관점에서는 오순절이 지난지가 2천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적인 신앙역사속에서는 아직 오순절을 맞이하지 못한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의 참여하지 못했기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자아가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체험을 하지 못했기에 우리 신앙의 주관적인 역사속에서는 아직 오순절을 맞이하지 못한것 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부진한 목회를 돌파하는 성경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침체한 한국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는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특별한 대안은 없다.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다른 기롤 우회하려고 할때 영적인 불모지에서 끓임없이 맴돌게 될 뿐이다. 옛사람의 부패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성령의 깊은 사역을 먼저 추구하지 않은채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성령운동이 한국교회를 참된 개혁과 부흥으로 이끌기 보다는 오히려 광신과 혼란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부진한 목회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교회의 강단에 말씀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 교회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말씀사역자에게 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는 목사대로 매주 반복되는 설교사역을 꾸려가기가 힘들고, 교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식상한 내용의 설교를 들어주느라 무척 힘들다. 교인들 뿐만 아니라 목사들도 자신의 설교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리 설교해도 변화가 안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점차 잃어간다. 그래서 여러가지 세미나나 은사집회에 기웃거리며 부진 목회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열매없고 무기력한 말씀사역의 공백을 다른데서 메우려고 하다 보니 복음사역의 정도에서 벗어나 편법을 사용하게 된다. 말씀의 능력대신 사람들을 쓰러뜨리거나 신비한 표적이나 은사를 나타냄으로 교인들을 제압하여 사역의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려는 유혹에 빠진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설교가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고 중요하다고 굳게 믿지만 실제 목회현장에서 나타나는 설교의 효과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것 같다. 우리 개혁교회가 설교중심의 목회를 포기하던가 아니면 개혁교회의 간판을 내려놓아야 할 판이다.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 능력있게 전파되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는 복음전파자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의 능력은 전하는 자와 상관없이 역사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사역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오순절을 체험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온전히 감당할수 있다. 십자가에서 못박혔으나 다시 사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다시 산 신자안의 성령을 통해 다시 사시고 강림으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못박힌 사람만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전할수 있는 것이다.
오순절에 이르는 광야의 훈련
이러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능력있게 사용하실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우리의 사역이기보다 우리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는 일을 먼저 끝내셔야 한다. 그래서 많은 실패와 고통을 통해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가신다. 이를 위해 성령님이 우리를 번성케 하시기 전에 우리를 시들게 하신다. 육신의 야망을 시들게 하시고 육신의 완고함을 깨뜨리셔서 육신의 힘을 다 빼게 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는 우리들의 기도를 많은 경우 거꾸로 응답하신다. 우리의 능하게 해달라는 간구를 우리를 깨뜨려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력한 자리로 내려가게 하는 희안한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심히 당혹스럽게 하신다. 육신의 힘과 지혜를 막다른 길에 이르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은 심히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성령의 충만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과정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죽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완강함이 불러온 비상사태이지 성령님이 지시한 정상코스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경험에서 이런 쓰라린 과정을 대개 맛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곤혹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는 절대 자원해서 하지 않려고 하는 자기 비움의 자리와 자기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수많은 실패와 아픔을 통해 아주 서서히 자기 죽음의 자리로 기어 내려가게 된다. 우리가 그토록 내려가기 싫어하는 죽음의 자리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는 축복의 동산이다. 그 심연이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장소이다. 새역사를 창조하시는 곳이다.
우리의 실패의 심연을 부흥의 정점으로 바꾸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공이시다. 오순절의 성령충만의 은혜는 철저히 실패한 제자들에게 임했다. 성령충만의 은헤는 실패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선물이다. 이러한 선물이 우리들에게도 임해서 다시 한번 우리 사역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성령충만은 영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인정하는 개인과 교회만이 받을수 있는 은혜이다. 이점에서 한국교회는 성령충만하기에는 자격미달이다. 한국교회는 성령충만하기에는 너무 충만하고 크고 강한것 같다. 막강한 숫적 위력과 거대한 조직력, 그리고 재정적인 파워가 상당부분 성령의 능력을 대신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령님이 사용하시기에 너무 비대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형교회와 탁월한 지도자들을 보면 부흥이 일어나면 과연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지 심히 의심이 된다.
한국교회는 자만할때가 아니라 회개할때이다. 외적성장을 자축할때가 아니라 내적인 타락을 애통해야 할 때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외형적인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고 숫자와 조직과 재정의 위력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게 하시기에 충분히 작고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교회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하게 하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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