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목회, 그 상식을 깨다
박영돈 목사 2012. 11. 4. 10:40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라는 내용을 2번에 걸쳐 소개한다. 성령충만은 과연 무엇인가. 오해로 가득찬 성령충만의 세계를 소개한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성령충만과 목회
성경적인 의미로 목회를 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능력있는 사역, 풍성한 삶의 비결은 무엇인가. 너무 싱거운 대답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들의 삶과 사역이 달라질것이다. 구약에서 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만이 주의 일을 감당할수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가 그랬고, 신약의 사도들도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한 후에야 복음사역을 능력으로 수행할수 있었다. 하늘에서 능력이 임할때 까지 그들은 기다려야 했다. 그들에 임한 성령충만은 복음사역을 위한 능력부여였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성령충만한 사람들로 주로 묘사가 되어있다. 베드로, 요한등 제자들과 바울이 성령충만했다는 언급을 자주 발견한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15번 등장한다. 그중 14번을 누가가 사용했기에 누가의 전용어였다. 오직 한번만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5장 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의 표현을 사용했다. 누가복음에 4번, 사도행전에 10번의 표현이 등장한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해서 교회를 세우지만 모든 사건과 상황에서 제자들을 인도하고 주관하여 복음사역을 주도하는 이는 성령이라고 하는 것을 부곽시키기 위해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성령이 주관하셨다, 성령이 그들을 인도하셨다, 성령이 그들의 사역에 능력을 부여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선지자와 제자들의 전통을 따라서 복음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감당할수 있다. 목회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라고도 할수 있다. 목사가 목회를 하지만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혀서 우리를 통해 성령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거침없이 흘러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과 야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육신의 열심과 힘을 빼서 성령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실수 있도록 내가 옆으로 비켜서야 할것이다. 이렇게 성령님이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되지 않은채 목사가 되는 것이 현대교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학교육을 받아서 정식으로 목사 라이센스를 받았다고 해서 목사의 자격을 갖춘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성령의 기름부음 곧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신학교가 이런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양산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그래서 과거 서기관처럼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많은데 사역의 열매가 없고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목사들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라이센스를 따는 것이 시급하다. 알 에이 토레이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설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는데 극단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목사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이다. 목사에게 최고의 욕은 성령없이 목회하라는 말이라는 말도 있다.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충만이 유행어 처럼 사용된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떤이는 성령으로 충만하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신비체험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어떤 이는 광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들을 보고 성령충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그런 이들처럼 성령충만하기를 교인들이 꺼려하게 된다.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분명한 이해와 설명없이 남발하면 혼란과 오해가 야기된다.
에베소서 5장 18장(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서 성령충만은 구약적인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구약을 읽다보면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가득했다는 말씀을 접하게 된다. 바울 사도가 이 성전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1절(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에 바울사도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성전이다. 손으로 만든 성전이 아니라 성령이 친히 지으신 이동성전이다. 구약의 성전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영광스러운 성전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구약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가득한 것 처럼 영광의 영이 가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하고 있다.
구역에 또 하나의 성전 이미지가 등장한다. 에스겔서 47장에 에스겔의 환상에서 본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고 그 물이 흘러가는 곳 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나무의 과실이 풍성히 맺히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성전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충만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헬라어의 충만이라는 단어는 가득 채워지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넘친다는 의미가 있다. 교회가 성령의 생명수로 충만해서 흘러넘침으로 온누리를 적시고 만물을 충만케 하는 교회 종말론적인 비전을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23절(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에 유명한 교회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성령충만의 또 다른 의미, 비유적인 의미를 찾아볼수 있는데 에베소서 5장 18절에 성령충만이 술취함과 비교되어 있다. 술에 취하면 알콜의 영향과 주관을 받는 것 처럼 성령충만을 받게되면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에 의해서 주관을 받고 지배를 받게된다. 성령충만의 비유적인 의미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두가지 의미를 종합해서 성령충만을 정의한다면 우리 개인과 교회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성령에 의해서 주관되고 인도함을 받아서 성령의 생명수를 세상으로 흘러보낸다는 의미라고 볼수 있다. 또 성령충만은 명령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성전이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은혜로운 사실을 전지하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성전의 이미지가 변천되는 것을 우리는 잘안다. 성전의 전신은 성막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실체로 오셨다. 그래서 성전 다음의 온전한 성전이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전의 마침인 동시에 온전한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요소는, 첫째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육체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가 가득하다. 다른 요소는 제사이다. 주님이 자신의 육체를 영원한 희생제물로 바쳐서 하나님에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지냄으로 제사 제도를 폐지하시고 손으로 만든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하셨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다. 21절에는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말씀이 이어지고 있다. 유대인들이 온전한 성전인 예수님의 육체를 죽이면 파괴하면 우리 주님이 3일만에 부활하셔서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겠다는 하는 말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새로운 성전이 교회이다. 우리들이다. 더 영광스러운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약교회가 인간이 보기에는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공동체 인것 같지만 하나님 구원의 경륜의 관점에서 보면 더 영광스러운 성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 전초된 세워진 탁월한 성전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전으로서의 교회
신약시대에 우리는 목회자들은 솔로몬이 지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보다 더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삼위 하나님이 충만히 임재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영적인 성전을 지으라고 콜링을 받았다. 그래서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이 목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는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성전의 청사진을 먼저 발견해야 한다.
한국교회 문제는 설계도가 없이 교회가 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설계도가 없이 지어진 건물이 부실할수 밖에 없는 것 처럼 교회의 분명한 청사진 없이 지어져 가는 교회가 온전할수 없는 것이다. 좋은 예술품이 존재하기 전에 그것은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머리에 존재하듯이 좋은 교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비전에 먼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는 말씀속에서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비전과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꿈을 교인들에게 전해서 교인들과 함께 그 꿈을 공유하고 그 꿈을 꾸고 교인들을 설득하고 동력화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을 지어가는데 앞장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면 그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구약에는 신비한 구름이 가득했다고 했다. 지금도 신비하고 영험한 구름이 교회에 가득하다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질것이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예배를 드릴것이다. 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신비한 구름을 보기위해 사람들이 몰려올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런식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계시하지 않으실까. 구원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됨에 따라 주님의 임재 방편도 점진적으로 발전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성령이 상징적으로 임재했다. 구름과 불이라는 성징을 통해 백성가운데 임재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완성됨에 따라서 이제는 상징이 아니라 상징이 가르켰던 영적인 실체, 영광의 영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사인이 나타났다. 불의 혀, 강한 바람의 사인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모인 사람들이 오랜 세월 구약에서 부터 잘알던 성령의 상징적인 임재였다.
바람과 불이라는 상징으로 임재했던 성령님이 이제는 영적인 실체로 임했다고 하는 분명한 표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성령님이 더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런데도 아직도 열등한 방식으로 가시적인 증거와 상징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구원역사를 되돌려서 구약시대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에는 지금도 구름기둥이 나타난다는 교회가 있지만 이단적인 교회이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데 가시적인 구름을 통해서 임재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가운데 당신의 임재를 나타나고 계시다. 어떻게 나타나고 계시는가. 영은 보인다는 말이 있다. 영혼이 어떻게 보이는가. 영혼을 가졌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말을 가졌다는 것과 같다. 말을 통해서 영혼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저의 말을 계속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저의 영혼과 제가 추구하는 것, 그리고 영적인 상태를 알수가 있다. 그래서 계속 사람에게 말을 하고 설교한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사람들앞에 벌거벗기는 일이기에 어떻게 보면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의 얼굴과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내신다. 설교는 성령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얼굴, 성령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성령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수있는 설교는 듣기가 어렵다. 그것이 현대교회의 문제이다. 오히려 설교에서 미혹의 영의 모습이 살포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아주 가벼운 인격의 소유자, 잔꾀로 가득한 목사의 얼굴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욕망으로 일그러진 목사의 얼굴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방송에 등장하는 목사중에 간혹 그런 분이 있는데 교인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서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우리들의 영혼이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못한다. 성령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는 설교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교회에 구름이 가득하면 그것을 통해 무엇을 알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호기심과 두려움을 자극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신비주의적인 신앙에 빠뜨릴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주님이 누구이신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무엇인지, 주님이 우리들에게 어떠한 일을 행하여 주셨는지, 어떠한 은혜를 주시는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당신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여 주시니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사역과 그 은혜와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탁월한 영광과 그 은혜의 풍성과 탁월함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무엇인지, 너무나 당신의 뜻과 존재를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시니 우리는 구약 성도들보다 훨신 더 영광스러운 빛가운데 지금 신앙생활을 한다고 볼수 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면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것으로 그 증거가 나타난다. 그래서 성령님은 말씀하시는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에베소서 5장 18-21절 말씀과 골로새서 3장 16-17절 말씀은 평행구절이라고 할수 있다.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는 교회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교회가 아니라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교회라고 할수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복음이 바로 전파되는 곳에 교회가 있고 그곳에 성령이 계시다고 말했다. 성령충만은 신비충만이 아니고 열정충만도 아니고 감정충만도 아니고 말씀충만이다.
성령은 말씀하시는 인격으로 교회에 임재하실뿐만 아니라 행동하시는 인격으로 우리가운데 임재하신다. 당신의 말씀이 꼭 우리가운데 성취되도록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 전능하신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의 핵심내용은 '새언약'이다. 새언약의 은혜를 우리가운데 실현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신구약 성경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새언약이다. 구약은 새언약에 대한 약속이며 신약은 새언약의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언약의 중보이다. 내 피를 새언약을 위한 피라고 하셨다. 성령님은 새언약의 영이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새언약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시는 분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에는 성령의 7중사역,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 성도의 교제와 은사활용, 성령충만의 특권과 의무등의 내용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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