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타락

 

(요한복음 6장)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유혹이 있을 가능성을 허락하셨다. 아담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증거한다. 거듭났다고 하여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아진다. 가장 센 유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1) 안일해지려는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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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편견으로 돌아간다는 이러한 예외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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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으로 안일해지려는 경향은 인간의 몸의 자연스러운 법칙이다. 도덕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에도 도덕적인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은 비영적인 것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1) 쉼의 욕구 욕망의 포로

 

요한복음 6:10-15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참된 영적인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연합하고 싶은 원함이 있다. 이 원함을 실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에서 쉼을 얻으려는 경향은 욕망의 포로가 된다. 영적 축복만을 구하면 영적으로 잠이 들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영적 축복 가운데 안일하여지려는 경향은 타락의 시초이다. 나는 하나님과의 연합만이 목적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다른 이유가 있는가? 수고도 없이 예수님을 통하여 빵을 먹고 싶은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닌가? 요한복음 6장의 군중들의 모습은 인간의 속성에 내재하는 안일하고 싶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이 욕구가 만족되어지면 모든 성품이 무너지게 된다.

 

(2) 실체의 부패 -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움

 

요한복음 6:30-31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실체란 하나님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의 축복(예를 들어, 거룩하게 됨)을 내 삶의 마지막 목적과 목표로 삼는다면 그 순간부터 내 영적인 삶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거룩하게 됨은 하나님과의 실제적 연합을 위한 입구여야 한다. 오직 하나님과의 연합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생의 상태이다. 베드로는 이 점을 그의 서신에서 분명히 한다. 그는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으며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잠이 들면서 거룩함의 축복을 최종 목표로 오해하는 위험에 빠진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거룩하게 됨은 단지 입문일 뿐이다 (참조, 벧후 1:12-13). 우리는 성령으로 충분히 잘 배워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자들을 격려하여 더욱 하나님과의 완벽한 하나됨, 곧 실체중의 실체에 임할 수 있도록 하겠는가?

 

타락하려는 경향은 매우 은밀한 곳에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재촉하신 것은 당연하다 (마 26:41; 막 14:38). 타락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위험이다. 따라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안일함에 빠지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신체에는 휴식이 필요하지만 영적인 삶에는 휴식이란 있어서는 안 된다. 욕망의 포로가 되는 때는 영적인 축복 가운데 안일한 때이다. 특히 자신이 영적으로 이룬 일들로 만족하고 있을 때 영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다 이룬 것 같아.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내신 것으로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엡 4:13). 완전 성결(entire sanctification)의 결과로 오는 안식과 안일함의 쉼은 전혀 다른 것이다. 참된 실체의 쉼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한 안식이다. (역자 주 챔버스에게 있어서 완전 성결의 단계는 하나님께 내 자신에 대한 나의 모든 권리를 철저하게 내려 놓고 주님과 연합된 상태의 단계를 의미한다.)

 

(3) 휴식하고 싶은 꿈 - 재난의 밤

 

요한복음 6:34-35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퍼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염려하시는 영적 안일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헛된 비전과 꿈이 생긴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어떠한 환상을 가지는가? 영적인 삶의 가장 큰 함정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꿈을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시키지 않고 나름대로의 환상과 꿈을 키우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궤도에서 벗어나 광명의 탈을 쓴 마귀에서 속아 넘어간다. 안일해지고 싶은 욕구에 지는 자마다 영적 재난이 뒤따른다. 성도의 유일한 자세는 언제나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는 (빌 3:13) 자세여야 한다.

 

2) 복귀하려는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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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도덕 시험이 아닌가?

망설임의 상태가 영혼이 시험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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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체적인 생명은 원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다. 꽃들과 식물은 잘 개발되어 경작될 수 있어도 몇 년을 내버려 두면 경작되기 전의 모습으로 복귀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가만히 두면 하나님의 자녀들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더욱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참조, 롬 8:29).

 

(1) 마음이 상할 가능성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

 

사람들 사이에 마음이 상한다는 것은 뭔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예수님께 애착이 없던 사람은 예수님에 의하여 마음이 상할 리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마음 상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비교, 마 11:6). 사탄은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제안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에게 이러 저러한 일들을 하라고 당부하시지는 않으실 거야. 하나님께서 과연 그런 식으로 당신을 인도하실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으로 인하여 마음 상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2) 마음이 상한 후에 삐뚤어지는 마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0-61).

 

삐뚤어지는 마음은 내가 마음을 다하던 대상이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이러한 삐뚤어진 마음을 갖게 되는 때는 거듭나기 전이나 혹은 후에도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할 때 그것이 전에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이면 당장 내 마음에 삐뚤어진 마음이 든다.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 주지 않으셨는데 당신에게 알려 주셨을 리 없다. 마음이 상하게 되면 그 다음은 삐뚤어진 마음이 들게 된다. 마음이 상하고 삐뚤어지게 되면 더 이상 내 편견과 일치되는 내용이 아니면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도들 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진리에 대하여 귀를 막고 있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그들의 마음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따라서 영적 침체에 빠질 뿐만 아니라 외고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에 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 같이 언제나 빛 가운데 머물기를 힘쓰는 것이다.

 

(3)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의 배반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6).

 

자기 뜻대로 사는 삶으로 돌아가 내 소견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고집하게 되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매우 불성실한 삶이 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상하게 한 그 진리를 향해 적극적으로 대적하게 된다. 진리를 향하여 가장 완고하게 대적하는 자는 보통 그 진리를 잘 아는 자이다. 이러한 배반의 극단적인 예가 히브리서 6:4-6절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만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불순종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여 버린다면 우리의 순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순종이 더 이상 마음의 자발이 아니라 기계적인 일이 되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된 후에 나는 내 멋대로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른다. 만일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롬 15:3) 라는 내용이 절대로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불순종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순종은 그만큼 가치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잘못된 성향의 노예들이기 때문에 주님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잘못된 성향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실 때 그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사람에게는 유혹이 가능하게 된다. 유혹은 죄는 아니다. 유혹은 하나님과 자녀 간의 관계를 더욱 가치 있게 한다. 기계적인 노예라면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화롭게 할 리도 없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주님께) 합당하도다(히 2:10)는 말씀은 노예들이나, 쓸모없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부지런히 항상 깨어서 마음과 뜻을 다하여 자신의 모든 힘과 재능을 주께 완벽하게 헌신하는 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3)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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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성의 특징인 독립하려는 마음은 각 개인에게 언제나 임하는 영원한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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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반란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통치자 밑으로 들어가기로 계약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퇴보와 반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퇴보하는 경향에 대해 다루어 왔다. 적극적인 면보다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면을 다루었다. 즉, 이 정도면 만족이다. 여기에 머물겠다는 타락의 면을 다루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지 아니면 다시 뒤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퇴보는 긍극적으로 반란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으로부터 일탈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의도적으로 다른 통치자와 계약을 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나를 버린 것은 타락이라기 보다 퇴보이다. 퇴보와 반란이 이 두 가지는 결국 타락으로 이어진다. 주께서 타락과 관련하여 끔찍한 단어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눈에 타락이 어떻게 비쳐지는지에 대한 묘사를 보면 도덕적 의식이 있는 각 개인들에게 충격을 주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계시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렘 3:8).

 

(1) 진리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한 반응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1).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

 

진리를 접하였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더 강퍅해지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본 후에 그 비전을 놓치면 우리는 , 그렇지. 그 비전은 다른 사람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었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거의 느끼지 못한다. 진리를 접한 후에 깨닫지 못한 영혼들을 사탄이 가로챌 가능성에 대해 주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의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얻도록 하셨으며 따라서 깨닫지 못한 점에 대하여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생명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받지 않은 채 깨달아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그들의 자세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후에 주께서 우리에게 알도록 계시하시는 것을 붙들지 못한다면 이는 주님께 무의식적인 모독이 된다. 이런 경우 주께서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맛을 잃은 소금은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영향을 준다. 거룩을 잃은 성도는 영적인 세계 속에서 전염병 같은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눈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성도의 모습을 잃는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죄악 및 실수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면 그 삶은 언제나 어린아이가 같이 진실하고 기쁨이 넘친다.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순종한다. 또한 부탁을 통하여 자신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얻어내는 비결을 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방탕한 자녀가 될 위험에 빠진다.

 

(2) 순종치 않은 자들의 수군거림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1).

 

하나님의 생명을 진실로 맛보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안 후에, 또는 몇 달 혹은 몇 년 전에 주의 뜻을 이미 알았지만 순종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지 않았다면, 그 뜻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현상은 반드시 일어난다. 우리가 했어야만 한 일을 하지 않았을 때 그 기준에 대하여 수군거리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도록 한 경우 우리는 순종하지 못한 진리에 대하여 수군거린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막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이려는 사업이다. 보이려는 사업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려는 욕구를 의미한다. 이러할 경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을 낮추어 사람에게 맞추려 한다. 둘째는 동감이다.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동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서로 동감을 느끼는 경우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준에 대하여 수군거리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노골적인 욕설을 발설하기 보다는 매우 경건한 한숨으로 말할 것이다. , 안돼. 절대로 그렇게 까지는 될  수 없어. 당신은 아마 완전 성결을 가르치고 당신의 메시지는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역자 주 오스왈드 챔버스에게 완전 성결은 우리의 모든 자아를 주께 전적으로 맡기고 주님과 일치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말하길,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이지만, 물론 이렇게 될 수는 없지요라고 한다. 이때 이 메시지를 듣는 영혼들에게는 한가지 결과만 나타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기준을 수군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에 따라 우리 모두는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많은 사역자들이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기준을 쉽게 선포한다. 그러나 곧 다음과 같이 겸손하게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러한 완전 성결의 자리에 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이 말은 무섭도록 잘못된 말이다. 그 이유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까지 나를 이끄실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또한 완전 성결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이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대하면 우리가 완전 성결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고 자명하고 쉽게 말한다. 모든 하나님의 명령은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 있지 못한 자들에게 절대로 동감하지 말라. 우리 주님은 결코 까다롭거나 잔인한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온유한 연민과 자상함의 본체시다.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뭔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려 놓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생명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할 것이다.

 

(3) 불신앙으로 인한 거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 6:70-71).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의해 세워진 기준을 수군거리는 것이 가능할 뿐더러 가룟 유다가 행한 일을 할 가능성도 있다. 곧, 불신앙 가운데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유다를 최악의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쉽지만,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한편 감사하게도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주의 은혜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언제나 내 자신이 가룟 유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러한 진리는 소름 끼치는 내용이지만 오히려 그 더운 밤의 공포는 우리로 하여금 말로 다할 수 없는 안전한 포구인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욱 이끈다. 성경에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 13:15)라는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다.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험하게 하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위험 신호를 그 길에 달아 놓으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사악한 자의 길은 분명하게 경계 신호들로 가득하다. 따라서 잘못된 길을 쉽게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내게로 오라(마 11: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라고 하신 말씀의 그 심오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출처] 6. 타락|작성자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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