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균형잡힌 부흥론

개혁주의 신학 2012. 11. 1. 23:52

4 부. 열심있는 사역자들이 경계해야 하는 함정들(Shewing what things are to be corrected or avoided in promoting this work, or in our behavior under it).


에드워즈는 4부에서 부흥을 촉진시키기 위해 피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인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특히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에 열성적인 많은 사람들이 치우치기 쉬운 점들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들은 비난을 받을 때 자신을 살펴서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신중치 못하고 무질서하다는 비난을 들을 때 그들은 어떤 행동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더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자기 반성을 덜한다.

부흥의 역사를 살펴 보면 마귀는 사람들을 더 이상 영적으로 조용히 잠재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그는 그들을 과도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감으로써 신앙의 부흥을 좌초시키곤 했다. 마귀는 할 수 있는데 까지 그들을 뒤로 잡아당기다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되면 떠밀어버려서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것이다. 마귀가 전 세계에 걸쳐 기독교를 전복시키고 마귀의 모든 사역 가운데 걸작품인 저 커다란 적그리스도의 배교를 초래한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분별한 열심을 부추겨서 그들을 광신주의, 미신, 그리고 적대자들에 대한 가혹함이라는 세 가지 극단으로 몰아간 것이다(270).

부흥이 일어날 때 부흥을 위해 큰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 많은 주목을 끄는 정말 열심있는 한 사람이 크고 강하게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백 명보다도 부흥을 더 많이 저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때 종종 그리스도의 일이 그리스도를 지지한 사람들 때문에 해를 입곤한다(슥13:6). 하나님의 부흥의 동역자들, 특별히 부흥을 크게 증진시키는 자들이 범하는 실수들은 부흥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할 빌미와 핑계를 제공함으로서 커다란 유익을 끼친다. 사실 신앙의 친구들이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부흥의 원수들은 무엇을 가지고 싸워야 할지 알지 못해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에 찬성하고 동참하며 쓰임받는 자들은 극히 조심스럽고 경성하여 자만이나 방심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벧전4:7,5:8). 사람들이 격렬하게 혈기를 부리며 훈계와 교정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것, 즉 자신들이 성령 충만하다는 이유로 틀림없이 옳은 편에 서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것은 근신하라 깨어라는 말씀의 취지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마귀에게 미혹당할 위험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 만일 그들에게 남아있는 무지와 부패 및 교묘한 대적 때문에 그들이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 경계를 늦춘다면 그들이 스스로 마귀의 올무와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의 위험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실수이다. 우리가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 사는 한 우리는 원수의 나라에 있는 셈이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비록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꺼이 보호하고자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두가 깊은 주의를 기울이면서 일할 것을 기대하신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날에 능히 설 수 있기를 기대하신다.

에드워즈는 영적인 자들을 권면해 줄 온전한 사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비록 하찮은 벌레에 불과한 자이지만 성도들의 진실하고 열렬한 친구인 한 사람으로서 권면을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일에 열성적으로 동조하는 자들이나 증진하는 자들이 빠졌거나 빠질 수 있는 관행들과 방법들에 있어 그들이 범했거나 범할 수 있는 오류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1. 광신주의가 생기는 일반적 원인 세 가지


신앙 부흥에서 생기는 오류들은 영적 교만, 잘못된 신학적 관점 그리고 사탄의 계교로 인한 영적 체험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발생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1) 영적 교만


부흥에 만연된 오류의 첫 번째 그리고 최악의 원인은 영적 교만이다. 이것은 마귀가 신앙 부흥에 열성적인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는 정문이다. 영적 교만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연기가 밑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주된 통로이다. 영적 교만은 마귀가 신앙적인 사람들을 붙잡는 주된 핸들이며, 하나님의 일을 저지하고 방해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모든 불행의 주된 원천이다. 이 오류의 원인은 나머지 모든 원인들의 근원, 최소한 주된 지원처가 된다. 이 지병이 치유되기까지는 다른 질병들을 치유하기 위해 쓰는 백약이 무효이다. 우리 가운데 최선의 사람들조차도 얼마나 많은 교만을 마음에 품고 있다. 교만은 죄와 사망의 몸 가운데 최악의 부분이다. 교만은 세상에 들어온 최초의 죄이며 마지막으로 뿌리 뽑힐 죄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가장 완악한 원수이다. 교만은 마귀를 가장 많이 닮았으며, 교만은 어떤 부패보다도 알아채기가 훨씬 어렵다.

그리고 모든 교만 가운데 가장 감추어져 있고, 어렵사리 발견되는 것은 영적 교만이다. 영적 교만이야 말로 가장 은밀한 죄이다. 자신들이 빛을 받았고 겸손하다는 허황된 자부심 때문에 영적 교만은 생겨난다. 영적 교만의 본성 자체가 자만심을 일으키기고 자신들을 믿게 만든다. 영적 교만은 모든 것을 왜곡시키고 오용하며 심지어 참된 은혜와 참된 겸손을 표현하는 것에서 조차도 자신을 드러낼 기회로 삼는다. 우리는 사단이 타락하기 전에 천국에서 커다란 명예와 높은 특권을 누리면서도 교만하여 타락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성도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탁월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스스로 이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자야말로 사실은 가장 위험한 자이다(고후12장).

영적 교만은 본질상 아주 은밀하여 그 결과와 열매들 때문에 드러나게 된다. 영적 교만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신랄하게, 혹은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그리고 경멸하는 투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 가혹하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떻게 느껴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솔직하게 서로의 최악의 것을 드러내는 모든 용어들을 서로에 대해서 일상적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실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대할 때 최소한 그들보다 무한히 높으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대하시는 것만큼의 겸손과 온유함으로 해야 한다(마26:36-41,눅22:61). 교만한 사람은 외양에 있어서 독특성을 과시하게 만든다(홀리 보이스). 영적 교만은 사람들 속에 어떤 뻣뻣함과 경직성을 불러 일으킨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분리시키려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반대와 공격에 대해서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게 한다. 핍박이라고 외치던지, 아니면 반대자들을 향해서 바리새인들, 육신적인 박해자들, 그리고 뱀의 후손등의 단어들을 동원해서 비난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대와 욕을 당할 때 온유하고 고요하게 대처하면 하나님이 친히 변호해주신다. 박해에 대한 성도들의 가장 좋은 대책은 온유와 인내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싸운 방식은 논증과 거룩한 대화로 진리를 변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온유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그 이유를 개진했다(벧전3:15). 교만한 사람들은 비난을 당할 때에 비난당하는 일을 더욱 열성적으로 담대하게 행한다. 어떤 이들은 이상하고 궤도를 벗어난 일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강행함으로써 자신들의 담대함을 자랑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적절하고 자신감 넘치는 담대함을 가진다. 정절 혹은 염치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존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앙적인 대화를 할 때도 꼭 필요하다(롬13:7,벧전3:2,딤전2:9). 평신도들이 목사에게나 어울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가르치고 책망하는 것은 영적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이 주목받고 존경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배우려 하기 보다는 가르치려고 든다. 제자의 자세가 아니라 선생의 자세를 취한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받는 사람들, 특히 순회 설교자들은 영적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들이 받은 가장 탁월한 은사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과 복받은 최고의 증거들 조차도 변명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최선의 상태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가장 큰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 혹은 가장 뛰어나고 성공적인 목사가 무엇이기에 스스로 어떤 것을 받기에 충분하며 대단한 인물로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또 마치 스스로 현명하며 강하고 선한 자인 것처럼 자신을 내세우고 동료들 사이에서 행세한단 말인가?”(303). 에드워즈의 경고는 우리의 심장 폐부를 찌른다. 그는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받는 자들의 경고거리로서 므리바 물가에서의 모세의 망령된 행동(민20장), 웃사(삼하6장)등의 예를 든다. 젊은 목사들은 나이 든 목사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목사의 좋은 자질 가운데 하나는 반대자들에게 온유하게 잘 가르치는 것이다(딤전3:2,딤후2:24-25).


(2) 잘못된 신학적 관점


ꊱ 하나님이 직통 계시를 통해 성도하신다는 생각은 부흥에 가장 큰 해가 된다.

영감 혹은 직접 계시를 통해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무엇을 하는 것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를 자신들에게 알려주신다는 생각은 가장 해로운 것이다. 교회 내에 이러한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면 사탄은 하나님 백성의 안내자요 신탁자로서 자신을 부각시키고 자신의 말을 그들의 무오한 규범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그 결과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만들고 결국은 거의 쓸데없는 책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의 직접적인 계시에 따라 인도받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는 자신의 모든 잘못된 처신에 있어 교정 불능 그리고 난공불락이 되어 버린다. 선량하고 신앙적인 많은 사람이 이런 인식에 사로잡히곤 했지만,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직통계시는 모두 잘못된 것으로 판명나고 말았다. 목회 사역에 필요한 기술은 직접 계시가 아니라 배움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슥13:5).

성경 본문에 대한 충동적인 이해는 성령의 조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령의 조명은 어떤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시 없이 단지 마음으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며 이미 주어진 계시를 적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롬8:14와 갈5:·18에 언급된 성령의 인도는 충동적인 성령의 인도와 관계없다. 성령의 인도는 은혜로운 인도 혹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탁월한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생기에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룩한 천국을 소망케 함으로써 그들을 소생시키시고 그들로 하여금 진리와 기독교적 성결의 빛 된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탁월한 일들에 마음이 기울어지게 한다. 그리고 성도들의 눈을 단일하고 순수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의무에 대해 그들을 조명하신다.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영향은 영혼의 입맛을 바로 잡아서 하나님에게서 온 것들을 맛보며 거룩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일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만든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을 깨닫게 한다.

기도와 설교에 있어 초자연적 영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기도와 설교에 있어 성령의 은혜롭고 탁월하며 친절한 도우심은 내가 이해하도록 말씀을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뜨겁게 하여 말씀하실 일들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과 거룩한 감정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 그 깨달음과 감정으로 말씀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참으로 우리에게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말씀을 제시함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설교자들이 말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마음을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의 입술은 충만하게 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있어 크게 감동되고 그들의 마음이 충만할 때에는 말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게 되며 그 주제에 대해 유창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영적인 감동은 이런 경향이 훨씬 더 크다. 성령은 천국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그들에게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설교를 탁월하게 하도록 만드실 수 있다. 내적 충동을 직통 계시라 여기는 사람들은 마귀와 자기 상상력에 속을 위험이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ꊲ 믿음의 기도와 응답에 대한 오해

에드워즈는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해서 너무 많은 것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진실하고 뛰어난 많은 성도들이 실수와 올무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신들이 믿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계시, 즉 성경에서 믿음의 기도에 대해 주신 약속들에 따라 우리는 추론해야 하지, 상상이나 감동이나 자기 의를 기초로 기도 응답을 확신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자비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비를 간절히 원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는지, 우리가 기도하면서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는지, 하나님의 충족하심을 얼마나 깨달았는지,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도움을 얻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겸손, 심령의 가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맡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 마음이 이런 상태로 충만할 때 특별한 자비를 위해 기도하면 놀랍게 응답받는 것을 에드워즈는 종종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ꊳ 성령이 주시는 욕구대로 모두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오해

우리가 어떤 일에 하고자 하는 욕구가 간접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많은 것이 있다. 그 욕구가 일반적으로 선한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일 수 있으나, 특정한 행동들, 대상들 및 형편들에 따라, 그 욕구를 특별히 결행하는 것은 나쁠 수 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 눈멂, 부주의, 망상이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욕구가 전반적으로 허용되고 증진되어야 하지만, 그리고 단순히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은 모두 행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구가 어떤 다른 요인에서 비롯되어서 특별히 나쁜 방향이나 결심으로 나아간다면, 그 욕구대로 해서는 안 된다.

선한 성향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부주의나 망상을 통해 선한 성향에 정반대 될 일을 하도록 강력히 이끌 수 있다. 간접적으로 성령이 주신 욕구라고 할지라도 표출할 때는 절제가 필요하다. 바울은 고전 14:31-33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에게 (예언하고자 하는) 욕구가 간접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더라도 억제되어야 하며, 욕구를 표출하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대해 예언하는 자들의 분별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권한다.


ꊴ 미래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당장 눈앞에 유익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좋다는 오해

물론 그 자체로서 우리의 의무인 일들에 있어, 즉 도덕적 규칙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명령들이 요청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해야만 하며 미래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 두어야 하지만, 그러나 다른 일들에서는 분별력이 받아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뱀 같이 지혜로워라고 말씀하셨다(마10:16). 성령이 복음 사역자의 일을 묘사할 때는 항상 지혜를, 미래의 사건들과 결과들을 현명하게 예견하고 대비를 필요로 하는 것에 발휘되어야 할 것으로 말씀한다. 목회자들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도 바울처럼 가능한 불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을 피해야 한다(고전10:30-33, 9:19-23, 롬15:1-2, 14:19). 지혜로운 어부처럼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재간을 사용해서 붙잡아야 한다(고후12:15-16).

그리고 박해의 필요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불신자들을 잘못된 태도로 대하게 만든다. 사람에 마음에 부흥에 대한 적대감이 있지만 가능한 한 그런 적대감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만일 이 부흥의 열성적 추진자들 대다수가 기독교적 자비, 온유, 겸손 및 신중함의 원칙들을 제대로 지켰더라면 부흥은 세 배나 더 진전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도입하고 낡은 것들을 철폐함에 있어서 우리는 사도들처럼 신중하고 온유해야 한다. 유대인의 안식일을 폐지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주일을 도입한 것도 아주 점진적이었다. 우리는 아주 생소한 것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도입하려고 할 때에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너무 무분별한 사람들은 열심 때문에 너무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고 만다. 우리는 범사에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ꊵ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오해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성공하게 하시는 것이 그 사람들과 그들이 취하는 모든 노선을 인정하신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이 주신 섭리적 성공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 말씀에 반대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와 커다란 명예를 오용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비난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 성령의 특별한 위로를 받았다는 이유로 자기 행위가 모두 정당하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잘못이다.

섭리적 사건들, 우리 자신의 관찰과 경험, 인간의 역사, 조상들과 탁월한 사람들의 견해를 선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한 가지 기준, 즉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해야 한다. 말씀만을 우리의 유일한 기준으로 여겨야 한다.


ꊶ 외적 질서와 은혜의 수단을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생각

참된 경건이 외양에 있지 않다는 것이 외적 질서와 은혜의 수단을 무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참된 경건이 먹과 종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먹과 종이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한다. 가시적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전12:14이하,롬12:4-8). 질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모든 외적 수단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다. 질서는 천국에서도 필수적이다. 비록 질서가 영혼의 양식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점에서 영혼의 방패막이가 된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생각도 외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가정예배에 습관적으로 불참하는 것도 외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목회 교육을 받은 사람만 목회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도 외적 질서에 대한 무시이다. 비상한 체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목회 사역에 받아들이게 되면, 폭넓은 지식이 부족한 탓으로 종종 다른 사람들을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같은 때에 사람들이 빠질 위험에 있는 일들, 즉 충동, 헛된 상상, 미신, 무분별한 열심 그리고 그와 유사한 극단적인 일들로 인도하는데 적극적이 되기 때문이다.


ꊷ 목회자의 권위에 대한 오해

목사들은 자신들이 옛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똑같은 권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비록 하나님이 목사들에게 커다란 명예를 주셨고 목사들은 하나님의 사신 자격으로 발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가 마지막 날 심판을 위해 오실 때 갖게 될 것과 똑같은 권위있는 외모와 위엄을 목사들에게 주시지 않았다.

(3) 영적 체험에 대한 무지

오류의 세 번째 원인은 마귀가 특별히 사용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무지 혹은 불찰이다.


ꊱ 성도들의 내적 체험에 대한 무지

1) 참된 성도의 체험 속에 종종 불순물이 섞일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연적이고 육신적인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전적으로 순수하고 온전히 영적인 어떤 체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서 비롯되어 마음에 심긴 씨앗은 순수하지만, 그 씨가 마음에서 싹 날 때는 불순하기 때문이다. 영적 체험에 자주 혼합되는 것들로는 인간적 혹은 자연적 감정과 열정, 상상력에 가해지는 인상들 그리고 일정한 자기 의 혹은 영적 교만등이다. 영적 체험에 이런 혼합물이 많이 섞이게 되면 은혜의 아름다움을 가리게 된다. 짙은 연기가 찬란한 불꽃을 가리는 것처럼 말이다. 영적 체험이 불순물로 섞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체험을 잘 분별하여 대처할 수 있다.

2) 참 그리스도인들의 체험 속에서 가끔 간과되는 결함들(defects)이 있다. 참된 기독교적 체험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의 고유한 형상의 아름다움에 절대 필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듯이다. 그러한 결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심에 있어 하나님은 자기의 본성의 탁월성 혹은 완전성을 두 가지로 균형있게 표현하셨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무한히 크시고 순수하며 거룩하시고 마음을 감찰하시는 재판장으로 나타난다. 정의 거룩, 위엄, 권위의 하나님의 표현되는 것이다. 그 경우 그는 경외심과 존경심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를 낮추신다. 다른 한편 그는 자비, 온유, 겸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우리를 이끄시고 격려하시는 은혜로운 아버지요 사랑스러운 친구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달콤하고 새로운 힘을 주시는 빛이다. 하나님 안에는 이 두 종류의 일견 상반되는 듯한 속성이 아름답게 공존한다. 그러므로 그 두 속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적절한 비율로 균형이 잡혀야 한다. 전자 쪽으로 치우치면 불신, 죄악된 두려움, 노예의 영에 사로잡히게 된다. 후자 쪽으로 치우치면 영적 교만, 육신적 자신감, 주제넘음에 빠지게 된다.

가장 탁월한 체험들은 혼합물이 가장 적은 것, 즉 가장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요, 또 가장 결함이 적고 덜 부분적이며, 최고도로 고조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가장 사랑스러운 행위의 열매를 낳는다. 그것들은 가장 견실하고 달콤하며 영속적인 행실의 열매들로서 영혼의 기질에 가장 지속적이고 큰 영향을 준다.

3) 앞의 두 가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체험의 변질(degeneration of experience)이다. 그것은 체험의 퇴하나 점차적 쇠잔해짐, 혹은 감각 상실이 아니라 점점 더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즉, 그것이 점점 더 부분적이고 결함있는 것으로 변하며 부패한 혼합물이 더 많아지며, 점점 더 불균형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한 영적 요소는 점점 더 감소하는 반면 육신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이나 상상력의 작용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자기 의와 영적 교만이 점점 더 많이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처 보지 못한 영적 교만과 자만이야말로 체험을 변질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인간성의 부패한 부분에 사탄이 자리 잡고 역사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건강하게 시작되었던 어떤 사람의 체험이 나중에는 육신적 감정의 격렬한 발동, 상상력의 열기, 열광주의, 그리고 부풀은 영적 교만만 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에드워즈는 교회사에 나타난 많은 이단들과 분파들이 그러한 전철을 밟았다고 말한다.

ꊲ 내적 체험의 외적 결과에 대한 무지가 사탄에게 틈을 준다.

마음의 내적 감정이 외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표현되는지에 관련해서, 관습이 사람들에게 은밀하고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관습이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어떤 습관적인 행동에 자신이 익숙해져 있는 것,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와 행동으로 말미암아 옹호되고 승인되는 것 둘 다를 말한다. 관습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웃음과 경박한 태도로든지 더 엄숙하고 경외하는 태도로든지 말이다. 체험의 외적 결과와 표현을 적절하게 제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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