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예정의 논리/고광필 교수
좐 칼빈 2012. 12. 30. 06:23
칼빈의 예정의 논리
pp.12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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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여러가지 우려와 비판이 칼빈 당시뿐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 가운데도 많은 논란이 되어 왔음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카톨릭에서 장로교회로 개종했다가 칼빈과 예정론에 대해서 싸운 후 다시 카톨릭으로 개종한 제롬 볼섹은 강력하게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 이유는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은 말하기를 볼섹이 진정한 의미에서는 예정론 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 모독이 된다고 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더치(Duchess)의 페라라 공작(duke of Ferrar) 부인인 프랑스의 르네(Renee of Franc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변질시키는 자는 설령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1)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칼빈의 자세를 시사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볼섹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볼섹은 우리가 선택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제네바 시의회는 볼섹의 주장이 이단임에는 사실이지만 그를 처벌 규정에 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기회를 포착한 방종파들은 다른 도시 개혁자들의 자문을 구하자고 제의해서 시의회는 그렇게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제네바시의 규정에 의하면 이단은 처형이 아니라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불링거나 파렐은 심한 처벌을 요구했지만 베른주나 바젤 지도자들은 예수님은 진리를 사랑하고 자기를 배반한 사람도 사랑했다고 하면서 관용을 베풀기를 원했으며 아무튼 예정론은 인간을 고뇌케 만드는 교리라고 각주를 달아서 회신했다. 나중에 칼빈은 파렐과 불링거에게 편지를 내 면서 볼섹은 처형되어야 하는데 영원한 추방은 만족스러운 처벌이 아니라고 했을 때 칼빈은 불링거로부터 인정과 관용이 적다는 책망의 편지를 받고 칼빈 과 불링거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2)
칼빈은 자신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에 반대하여 조건적인 예정론을 말한 위 트레트의 부감독인 알버투스 피기우스와 베네딕트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의 견해를 반박하고 변증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1552)" 논문을 쓰기도 했다. 칼빈의 예정론은 그가 살았을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칼빈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의 전택설(타락전 예정론)에 반대한 알미니우스의 반대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심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들은 칼빈주의에 반대해서 다섯 가지 항목을 제안했다. 칼빈주의 에 반대했기 때문에 항론파로 불려지게 되었다. 항론파가 제안한 다섯 가지 항목을 성경의 입장에서 변증하고 항론파의 오류를 고침으로서 구원 교리의 핵심을 잘 요약한 도르트신조를 낳게 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정론은 칼빈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교리이다. 예정론은 칼빈이 말한 데로 성경적인 교리이며 이 교리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음으로 영접할 때 많은 이익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일 먼저 예정 교리를 확립한 사람은 성 어거스틴 이다. 독일 엘랑겐 대학(the university of Erlangen)의 뮬러(E.F. Karl Muller)교수는 초기 장로교회에서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기 때문에 교회 가 구원의 확실성을 준다는 주장에 반대했으며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중요한 교리라고 설파했다. 3) 그래서 장로교인은 예정론자라는 정치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4) 삼대 칼빈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불린 벤자민 워필드도 말하기를 종교개혁이란 영적인 관심에서 비롯한 종교부흥이요,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어거스틴주의 부흥(a great revival of Augustinianism)이라고 했으며, 예정론은 칼빈이 창설한 교리가 아니며 칼빈주의가 필연적으로 도출한 논리적 귀결로 서, 성 어거스틴, 마틴루터, 마틴 부처로부터 영향받은 교리이라고 했다. 5) 루이스. 벌코프(L. Berkhof), 헤르만 바빙크(H. Bavink), 헌터도(A.M. Hunter) 등도 예정론은 종교 개혁자들 모두가 중요시한 교리이며 장로교회의 중요한 교리의 하나라고 했다. 6)
오늘날에는 많은 신학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신학의 혼수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시대의 이슈를 성경을 통해서 변증하고 험증하는 것도 신학의 임무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 시대 그 시대마다 상황이 다르고 이슈가 다르기 때문에 신학의 강조 점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 이란 단순히 시대의 산물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그 시대를 진단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바로잡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의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2000년대를 준비하고 바라보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하고 새로운 기술과 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다. 선지자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과학적인 사고와 논리를 신학에 직접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가? 신학을 과학의 논리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을 지배하는 논리와 신학을 지배하는 논리는 두 개의 다른 논리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면에서 2000년대를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성직자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고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이 깊이 이해한다는 말일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논리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깊이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논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를 알아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혼탁하고 개방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구원의 메시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확신하며 감격과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명료하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존재의 절대성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인가? 우리 신앙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이 세상을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부르심을 확신 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가 예정론에서 다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정론은 구원의 근본 문제를 다루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에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정론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향하여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요 종교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예정론을 살핌으로서 오늘의 교회와 자신의 신앙 뿌리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생활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유산인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도 오늘 도 내일도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성경에 있어야하며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올바르게 가르 치려면 우리 신앙의 뿌리를 늘 새롭게 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새롭게 보려면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요 성령의 역사이다. 새롭게 하는 역사의 뿌리는 예정론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칼빈의 예정론을 그의 생애와 작품속에서 살펴봄으로서 우리 신앙의 뿌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예정의 논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I. 예정론의 역사
어거스틴도 초기에는 무조건적인 예정론이 아니라 조건적인 예정론을 가르쳤으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서 그의 분명하고 성경적인 예정론을 확립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는 말하기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속해 있으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을 통해선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믿음과 의지를 준다고 했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믿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고 했다. 8) 이와 같은 사상은 다분히 초대 교부들의 사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 있어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예정은 예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예정이며 이중예정론을 강조 했다. 죄를 다분히 환경의 탓으로 돌리며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가르쳤던 펠라기우스에 반대해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가르쳤으며 아담의 타락에 의한 의지의 왜곡을 가르쳤다. 9) 따라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왜곡된 의지는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지는 회복되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다고 했다. 주여 이제 명령하소서라고 했다. 칼빈 자신이 고백한 대로 자신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에게 힘입은바가 크다.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도그의 유명한 에리스무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인간의 의지란 은혜 없이는 자유 하지 못한다는 노예 의지 (bondage of will) 를 천명하므로서 절대적 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을 역설했다.
루터에 의하면 가롯 유다의 배반의 경우에 있어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 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강제가 아니며 사탄의 노예(slave of satan)가 되어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다. 그래서 배반은 유다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유다를 회개시키지 안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에서 루터는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숨은 뜻이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순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루터는 그것은 하나님께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우리 인간이 왜곡된 논리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정론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대한 인간 무지의 고백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기뻐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다. 10) 어거스틴과 루터 , 칼빈 이전의 모든 종교 개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조건적인 예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정 교리는정통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교리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II. 칼빈의 생애와 예정론
"양심상 나는 현재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심의 소리 때문에 스트라스부르그를 쉽게 떠나지 못하겠다. 양심은 타당하고 거룩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증거이다. 나의 사역이 나에게 불행하고 불운한 것처럼 보였던 재난의 시간(칼빈이 제네바로부터 추방된 때)이후 나는 주님께서 직접 나에게 분명한 음성으로 부르시지 않은 한, 즉, 주님께서 내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도록 어떤 필요를 제시해 주시지 않은 한 내가 먼저 교회의 어떤 지위를 떠맡지는 않겠다고 결심 했다." 11)
칼빈에 있어서 부르심이란 우리의 선택의 확신을 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기독교 강요에서 맡했다. 이점에서 본다면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그 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직 자에게 부르심이란 아주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 주며 부르심은 선택의 확신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복음을 위해서 사도로 부르신 것을 분명히 했으며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받아 드렸다(롬 1:1).
칼빈은 그가 죽기 전 고별사와 유언에서도 나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나님의 자비스러운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이나 피난처를 내가 갖고 있지 않으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라고했다. 12) 이 고백을 통해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칼빈은 자기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체험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와 은혜 가운데 잠자는 것처럼 죽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예정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근거해 있다. 셋째, 칼빈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예정에 기초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굳게 믿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오늘의 상당수의 성직자들은 성경의 중요한 교리를 믿지도 않으면서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칼빈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사람은 아직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칼빈의 신학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는 그의 예리하고 명석한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깊이 체험 하고 창세 전에 모든 것의 미래를 예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 신학 (theology form the fear of God ) 이라는 점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시에 개혁 신앙을 고백한 믿음의 동역 자들과 성도들의 순교와 고난과도 관계가 있다. 그들은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로 개종한 후부터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내일의 소망이 없이 불안과 초조가운데 살아야 했으며 그 중의 어떤 성도는 불안과 회의 가운데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예정 신앙에 굳게 서서 구원을 확신하며 개혁 신앙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13)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믿는 신앙만이 이 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희망과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음을 우리는 칼빈의 생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III. 예정론의 위치
IV. 예정론 이해의 전재 조건
다른 한편으로는 칼빈의 예정론은 이론이나 사변이 아니라 성경의 교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위트레트(utrecht) 부감독인 알버투스 피기우스(Albertus Pighius)와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Georigius of Sicily)의 조건적 예정론에 대한 반박 논문인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에서 예정론의 교리의 창시자는 어거스틴도 아니고 자신도 아니며 성경이라고 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지 안했다면 예정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안했을 것이라고 했다. 15) 성경이 예정론의 창시자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자동차가 고장이 났을 때 정비소에 가서 고치게 된다. 그러나 정비소에서도 고치지 못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이 만든 데로 가지고 가시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시사하는 것이 무엇안가? 결국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정론의 창시자가 성경이라고 한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이해 하는 것이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이성 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겸손히 참 지혜이며 인간의 지혜를 규율하는 원 리라고 했다. 16) 그렇다.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은 설 명이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깊이 이해한 사람에게는 설명이 먼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먼저 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어느 사형수가 고백했 듯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예정론을 인간의 사변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피상적인 이해이요 번뇌케 하며 양심에 고통을 당하게 하며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영접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은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30배, 60배, 100배의 행복하고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V. 예정론의 정의, 중요성 및 목적
VI. 선택과 유기의 근거
신약에서 하나님은 창세 전(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εξελεξατο)하셨다. εξελεξατο는 εκλεξαΥω(선택하다)의 부정 과거 시제(aor. mid. ind.)로서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선택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엡 1:4) 또한 이 선택이라는 언어가 시사하는바와 같이 선택에는 유기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1:5절에서 "그 기쁘신 뜻 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προοριοα ημαει υιοθεσιανδια Ⅰ ησουχριστου ει αυτον) 여기서 προοριοα는 부정과거시제(aor.act. part)로서 하나님이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칼빈은 에베소서(1:4-6) 주석에서 예정은 첫째,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의 주체이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은 전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고 했다. "너희가 나를 택(εξελεξασθ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εξελεξαμην)하여 세웠나니"(요 15: 16) 둘째, 선택은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결정이요 예수 안에서 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선택은 누구의 압력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ιω)와 "그리스도를 통하여"(δια Χριοτου)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택자의 선택의 근거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다. 그래서 선택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숨겨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을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약속이다.21)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창세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지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셋째, 선택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κατα την ευδουκιαν του θελεματο αυτου)에 기인한다. 선택은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신앙의 최고의 표현은 찬양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의 자비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formal cause 예수님을 material cause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efficient cause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을 final cause 라고 했다.22)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 여기서 창세전이라는 말은 우리 가 선택된 것은 시간적으로 보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다. 그래서 선택의 근거가 절대적으로 우리 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다. 여기서 기뻐하신 뜻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 하시는 뜻을 의 미한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를 때가 차매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보내시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택자를 부르셔서 중생 하게 하시고 하나 님의 자녀 삼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도 록 당신의 섭리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다가 때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에 가게 하실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자비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혜가 아닌가! 23) 시간적으로 본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은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은혜로운 뜻이며 시간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진다. 전자는 선택의 이유요 후자는 근거가 된다.
ii) 유기의 근거
선택자나 유기 자나 다같이 유혹과 악을 행할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 자에게 고난은 다른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택자에게 환관과 고난은 택자를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택자를 훈련시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택자의 구원을 보호하시는 것이다. 25) 유기자에게 고난과 환난은 그들의 잘못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환난이나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공의를 보여주신다. 따라서 유기에 있어서 원인(遠因)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근인(近因) 은 유기자의 죄이기 때문에 유기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판단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된 자의 깊은 원인은 우리에게는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말했다. 2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VII.선택의 확신
우리는 누가 선택을 받고 누가 유기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칼빈은 예베소서 설교에서 우리의 선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 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 (registra)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선택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유기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선택을 복사할 수 있다고 했다. 27) 여기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한 볼섹이나 피기우스, 게오르기우스처럼 믿음의 결과로 선택된 것은 아니다.
칼빈이 에베소서 설교에서 사용한 선택의 확신에 관한 세 가지 메타포를 통해서 우리는 선택의 확신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생명 책에 택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확실성을 말해 주며 거울이라는 메타포는 우리의 선택을 보는 인식론적인 방법을 말해주는 메타포요 믿음의 복사는 선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적인 방법을 말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에서는
소요리문답 19번과 20번에도 후택설 입장으로 전개한다. "모든 인류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또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어 생전의 모든 비참함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벌을 받게 되었다 (19번)." 하나님께서는 다만 자기의 선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어떤 자들을 영생하도록 선택하시듯, 은혜의 언약을 세워 구속자로 말미암아 그들을 죄와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내어 구윈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셨다(20번) 33)
신 정통파로 알려진 칼 바르트가 예정론을 그의 교의학의 중요한 뼈대로 삼으면서 신중심의 예정론이 아닌 극단적인 기독론중심(exclusive Christ monism) 의 예정론을 기술함으로서 종교 개혁자들의 이중예정론을 부인했으며 예수님 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으며 보편 구원론으로 가 게 했다고 한다. 34) 이 견해는 참다운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론이 아니다.
IX. 신학적 적합성
미국 사람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한국 사람도 아니라는 정체서의 위기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처럼 신자 는 신자다운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 사상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신자는 예정론에 기초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여기에 개인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의 확실성과 소망을 주는 확신이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셋째, 인류 역사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에 의해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 인간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우리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분의 선하신 뜻과 섭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에서 탄탄 대로를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가들이 역사의 주체를 민중, 인간 의지에 두고 있다. 이런 사관의 견해가 다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 중심의 사관이다. 인류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나, 자 연의 순리에, 무산자와 유산자의 계급 투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나님은 선택자 를 통해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고 계신다는 예정과 섭리에 기초한 역사관을 확 립하며 살아가는 것이 칼빈주의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확신 과 소망 가운데서 완수해 나갈 수 있다.
X. 맺음말
선택과 유기는 인간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 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믿음으로 그것을 복사할 수 있다. 그래 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자에겐 우연은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예정과 선하신 섭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때가 차매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오게 하시며 지금까지 당신의 능력으로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며 선하신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고 섭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 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명을 바쳐서 감당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리는 생활일 것이다. 이것이 칼빈이 성경을 통해서 발견한 예정의 논리일 것이다.
각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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