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3) 교만
왜 교만은 신자의 생활과 교회에 대해 그토록 파괴적인가? 언제 적절한 자기존중이 오만함과 죄악의 선을 넘는가?

세 번째 질문
교만은 심지어 창조 이전에 하늘로부터 사탄을 타락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첫 번째 죄라고 일컬어집니다
(두로 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에스겔 28:14-17에 사탄의 교만을 기록한 에스겔 28장을 보십시오).
성경에서 교만이나 무례함으로 번역된 모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단어는 마음의 잘못된 태도, 거만한 영을 묘사합니다. 잠언 16:18 은 이 말의 부정적인 사용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그러나 영어 사전은 교만(pride)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면의 사용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함, 보화나 정말로 값어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깊은 애정, 혹은 영웅에 대한 사회의 존경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사이의 구별
을 인식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칭찬하는 말을 하면 그러한 표현이 그들을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 것이라고 두려워하여서 어떤 부모들이 그러한 말을 자녀들에게 사용하지 않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가치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가르침은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물에게 두신 가치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은사에 대해 감사할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생각이 이기주의적이며 경쟁적인 것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구분을 분명하게 하면서, 우리들은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의 눈에는 천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미묘하게, 주의하지 않는 사람을 사로잡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육체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성경이 인정하는 겸허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 속에는 창조물에게 사랑과 복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에 대항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로 하여금 생존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교만은 스스로에게
도취되게 만들어서 자신을 신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에,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들어내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경향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거나 심지어는 그들에게 상처나 굴욕을 주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도록 만듭니다 (시편 10:2-4; 디모데전서 1:12, 13). 사회에서 혹은 소수의 문화권 안에서, 총체적 교만은 인종 차별, 계급 차별, 그리고 편견을 낳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의식 속에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을 항상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교만을 점검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등 뒤에서 그 사람을 헐뜯음 (시편 101:5), 교만한 눈 (잠언 6:17),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함(이사야 28:1), 백성들을 임으로 주관함 (마태복음 20:25, 26), 가치 없는 칭찬을 받아들임(사도행전 12:21-23),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여기는 자만함 (고린도전서 4:6, 7), 이기적인 명예심이나 허영심 (빌립보서 2:3, 4), 장래 일에 대한 자만함 (야고보서 4:13-16), 장로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을 무시함 (베드로전서 5:5,6), 그리고 피차 복종하기를 거부함(에베소서 5:21) --- 랄프 해리스의 자만의 증상에서 인용함.

우리들 스스로가 항상 감시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잘못된 교만은 우리들의 삶 속으로 기어들어 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이 고의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은폐하기 때문에 교만이 겉으로 요란스럽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함이 주는 우리들의 영적인 삶을 망가뜨립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
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라고 한 다윗의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관심사: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은 오만하고 교만함을 다루기 위한 것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들의 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신약성경에서 여덟 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그 가치를 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내면의 교만을 감출 수 있는 가장된 표면적 겸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겸손함에 대한 교만이나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어주신 덕이나 성품에 대해서 교만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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