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하다
유대교 바로 알기 2013. 5. 25. 12:30
바로, 폴란드의 오슈비엥침(Oświęcim) 이라는 도시.
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Auschwitz)라고 부른다.
아우슈비츠 입구 철문에는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수많은 입장객 중에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민족은 작은 원형모자(키파)를 쓴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참담했던 역사를 잊지 않으려 아우슈비츠를 찿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선생님을 따라 단체로 견학 온 어린 고등학생들도 많다.
철문 앞에서 사진촬영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온 이스라엘 경찰들.
*히믈러는 1940년 4월, 'Rudolf Höss'를 아우슈비츠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수용소를 방문한다. 원래, 폴란드 포병막사였던 아우슈비츠 주변에는 광대한 땅들이 널려있었으며..
지리적으로도 유럽의 중심이었기에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손쉽게 이동시킬 수가 있었다.
하인리히 히믈러가 총책임자 회스에게 수용소 캠프의 건설을 명령한 것은 1940년 4월 27일.
첫 번째로 끌려온 포로들은 유대인 아닌 폴란드 정치범들이었다.
1년쯤 세월이 지나자 수용소 인구는 3만명을 훌쩍 넘었다.
1941년 3월, 히믈러는 아우슈비츠를 다시 방문하고 수용소의 대대적인 확대를 명령했다.
그래서 세워진 수용소가 아우슈비츠 제2호로 불리는 비르케나우(Birkenau) 집단수용소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치밀하게 계획됐다.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머리카락(7톤 나무로 제조된 칫솔..
수 만 개의 안경..
한 통으로 400명 정도를 질식사 시킬 수 있었던 치클론 B(Zyklon B)가 전시돼 있다.
* 공동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은 가짜 샤워기가 달려있어 희생자들을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이곳에서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포로들이 잔인한 심문을 받은 후 총살형 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총살에 의한 처형장은 옆 건물 빌딩인 10과 빌딩 11 사이에 있었다. 유대인 대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가 유대인을 전멸시킬 목적으로 자행했던 것이었지만,
포로들 중에는 유대인 외에도 동성애자, 집시, 보이스카우트, 정신박약아, 쌍둥이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치료병동(19, 20, 21, 28)이 있었지만 이것은 포로들을 치료하려고 만든 병동은 아니었다.
의사가 보기에 병약해 보이는 포로는 독극물 주사를 놓든가 가스실로 보내졌다.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은 포로들은 좁고 더러운 막사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포로들이 화장실에 가는 시간은 하루에 딱 한 번, 시간은 10초였다고 한다.
대다수의 포로들은 아우슈비츠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수용소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을 살해한 것은 1943년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동안의 기간이다.
이 기간동안에 살해된 유대인은 105,000명에 이른다.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된 총희생자는 유대인 사이트에는 2백만에서 4백만이라고 적혀 있고..
아우슈비츠에는 1940 ~ 1945년동안 1,100,000명(유대인 90%)이 희생됐다고 적어놓았다.
3명의 친구들 *사진설명아우슈비츠 수감번호(918번), 카지미에쉬 피초프스키
그 중, 가장 드라마틱하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한 포로는.. 폴란드 정치범이었던 카지미에쉬 피초프스키(Kazimierz Piechowski)와 3명의 친구들이었다.
보이스카우트 출신이었던 피초프스키는 당시 23살의 나이로 힘이 좋고 체격도 건장했다.
3명의 친구들 또한 독일말을 구사할 수 있어 수용소에서는 모두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의 친구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에우게니우스 벤데라(Eugeniusz Bendera)라는 친구. 벤데라는 자동차 기술자로 독일군 차량을 정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독일군 파일을 통해 자신이 곧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죽음을 함께 맹세한 4명의 친구들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탈출을 계획하게 된다. 독일군의 복장과 승용차로 정문을 통한 탈출을 계획한 그들은 거사의 날을 정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들이 탈출에 사용하려 점찍어 놓은 차는 수용소 총책임자 루돌프 회스의 승용차 ‘Steyr 220’였다. Steyr 220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는 차 중에는 가장 빨리 달리는 승용차였다. 혹시라도 있을 독일군의 추격을 따 돌리려면 그들에게는 빠른 속도의 승용차가 필요했던 것.
1942년 6월 20일 토요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거사의 날이 밝았다. 2층에 있는 창고에 몰래 들어간 그들은 독일 친위대 장교복 등 군복으로 갈아 입고 무장한다. 한편, 벤데라는 복사된 키를 가지고 차고에서 승용차를 가져왔다. 정문을 통과할 때는 조마조마 했으나 승용차를 본 보초병이 손을 쳐들며 먼저 ‘하일 히틀러’를 외친다. 4명의 친구들은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쾌재를 불렀다.
승용차는 수용소 정문을 지나 달리고는 있지만 아직 마지막 바리게이트가 남아있다. 이곳은 친위대 보초병이 패스를 보여 달라고 할 수 있기에 4명의 친구들은 긴장한다. 80미터 앞까지 왔지만 바리게이트 차단봉은 그대로 내려져 있다. 60미터에도 바리게이트 차단봉은 올라 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40미터에도 그대로.. 25미터에도 그대로.. 이때, 뒤에 있던 친구(Jozef Lempart)가 친위대 장교복 차림의 피초프스키의 등을 치며 말했다. ‘뭐라고 말좀 해 봐!’ 정신이 번쩍난 피초프스키는 그때서야 차 문을 열고 보초병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야 이놈아 빨리 차단봉 올리지 못해!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차단봉은 즉시 열렸으며, 4명의 친구는 수용소를 완전히 탈출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포로들은 모두 죄수 번호 문신을 팔뚝에 새겨야 했다.
*그의 탈출기는 다큐멘타리 영화로도 제작됐고..
70 년후..
*92세의 피초프스키는 아직도 정정하게 살아서 수용소의 참상을 증거하고 있다.
나치의 몰락
*하인리히 히믈러는 패전후 영국군에 체포되자 독극물을 먹고 자살했으며.. (1945년 4월 29일)
루돌프 회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 새로 만든 교수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7년 4월 16일) 글 사진: 서정 Gabriel.S Oboe |
출처: http://mission.bz/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