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부. 중생|다시읽고싶은글
keeper77 | 조회 93 |추천 0 |2006.07.31. 23:53 http://cafe.daum.net/keeper77/17Ia/13  

 

 

10. 중생


  중생이란 본질적으로 두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본질적인 측면, 성품, 우리의 마음 등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중생은 회개하도록 만들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새 생명의 시작이다. 이것을 현상으로 보면, 중생은 오관의 영역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우리의 관찰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현상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러한 새 생명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노출되어서 사람들이 명백하게 볼 수 있는 어떤 변화된 삶의 증거를 중생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는 반드시 우리 삶의 주변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반드시 일어나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이 우리 삶의 특징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본질적인 변화이기는 하지만 중생의 변화를 현상학적으로 관찰해서 그 증거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신비적인 것이지만, 가시적으로 눈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현상적인 중생의 증거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중생이란 의미가 통일된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지는 것은 아니다. 중생이 의미하고 있는 그 범위를 두고 학자들 간의 의견이 약간씩 다르다. 예를들면, 존 칼빈은 중생을 회심하고 돌이키고 성화까지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신학적 이유가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중생을 새롭게 되는 삶의 전부라고 하였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는 중생이라는 의미를 약간 좁게 해석하였는데,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것이다. 물론 현상학적으로 죤 칼빈은 성화까지를 중생의 측면을 접근하려고 하였다. 중생을 이해하는 가능한 것은 이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생이 어떤 변화를 수반한다고 했는데 그 변화가 단순히 어떤 부분에 멈추는 것이 아니하고 성화에 까지 변화가 나타난다면 그 변화를 중생이라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중생의 증거가 굉장히 다양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넓게 이해했다는 것은 중생을 단순히 본질적인 측면에서 신비로운 길로 성령의 하시는 우리가 볼수 없는 길로만 남겨놓지 않고 그것을 관찰 가능한 증거를 수반하는 경험으로 중생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넓게 이해되는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에서는 중생을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를 말한다. 그 이유는 그 중생이 그렇게 새롭게 된 삶에 중요한 변화들을 수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중생이다.  중생을 현상학적으로 보면 예수를 믿을 때 한 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보통 중생을 우리 일생에 단 한번 예수 믿을 때 일어나는 신생이다 라고 생각하는 데 이것은 본질적인 이해이다. 이 본질적인 신생이 우리 삶의 인격이나 말이나 생각이나 의지나 인간관계나 죄에 대한 관계나 하나님에 대한 관계나 교회에 대한 관계나 이 모든 것을 변화로 이끌어 갈 때 그 나타나는 변화되는 중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을 중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신학자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넓게 본 것이다. 중생이 단 한번 일어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상학적으로 볼때 우리 일생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상학적으로 보는 것을 지지한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단 한번의 인생에 한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적으로 본다면 우리의 생애의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그 중생의 내적인 변화가 외적인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내적인 변화가 국한된 시간이나 국한된 국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의 삶, 전 생애 동안에 중생이 어떤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정도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에 있어서 중생이 우리의 어떠한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에는 성화와 중생을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성화를 가르치면서 중생을 같이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는 중생을 현상학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수반하는 사건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에 성화를 이야기 할때 그 성화는 우리의 삶에 성숙이고 개성이고 변화이다. 그러한 성화론적 변화는 중생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성화를 중생과 떼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믿을때 한 번 중생하고 믿으면서 거듭 거듭나는 것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성화라는 것을 중생으로 말하자면 성화는 반복된 중생이고 중생은 성화를 위한 중생(거듭남)이다. 성화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반복된 중생이다. 그래서 어제 나는 죽고 오늘 나는 새로운 사람이다 라는 말이 성립된다. 다시 오늘의 나는 죽고 내일의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중생은 무엇인가하면, 성화를 위한 거듭남이다. 그냥 목적없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성화의 목적을 앞두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와 중생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면에서 성화론을 다룰때, 성화와 중생을 같이 이해하는 신학자는 상당히 성경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대표자 신학자가 누구인가하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수인 닥터 데이비스가 있다. 이분은 주로 성화론을 다룰 때 중생과 같이 이해하였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부터는 중생을 우리 일생에서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일어나는 신비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도 옳지만, 중생이란? 본질론적인 좁은 의미에서 정리하면,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엡2장 1~2절)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새 생명 가운데서 출생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중생이란? 거듭나고 회심과 믿음과 의롭게 되는 성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본질론적으로 중생이란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넓게 말하자면 중생은 단순히 우리의 구원의 경험에 제일 먼저오는 한번있는 사건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서 회심하고 믿고 거룩하게 되는 전 과정의 문제라고 이해해야 한다.


  중생이란 말은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성경에서는 딱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마태복음 19장28장에 나타나는 중생은 한 개인의 신생을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온 우주가 새롭게 될 것을 중생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신생에 관해 말하는 것은 오직 디도서 3장 5절에만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진실로 거듭남의 중생한다고 말한다. 마19장28절의 종말론적 우주론적 변화에 중생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만물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현재 이 땅에 있는 것을 새롭게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데 이것은 있던 땅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은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마19장28절 중생이라고 말하는데 이 중생은 본질적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 있는 것을 고치는 것은 개선이 아니다. 새로운 것의 유익이다. 그전의 어떠한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그전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어떠한 것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완전의 새로운 것으로 재 창조를 의미한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중생을 언약적으로 볼 때 사람이 태어나면서 죄인이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담의 행위언약에서 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적으로 죄인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은 죄를 더욱 죄 되게 만들고 죄를 생각나게 만들고 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삼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율법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율법에는 구원을 상징하거나 구원을 암시하거나 구원의 가능성이 일체 그안에 없다. 그런데 행위언약에서 태어나는 자는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결국에는 언약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 언약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아담의 행위언약안에서 태어남으로써 죄인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안에서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적으로 볼때 중생은 필연적이다. 중생이 없이는 언약에 들어갈 수 가 없다. 따라서 중생은 새 언약의 들어갈 수 있는 절대 조건이다. 중생은 우리가 새 언약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시에 새 언약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말하면, 중생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백성이 누리게 될 은혜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아담 언약안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모든 죄의 전가와 죄의 결과를 모두 우리에게 전적으로 다 물려받게 되고 그 저주와 심판 아래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담의 언약가운데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이 중생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약속된 그 모든 은혜를 언약안에서 누리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그러하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 다는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지식을 깨닫는 것도 아니고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깨달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안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일평생 세가지 중요한 사건은 태어나고 결혼해야 하고 죽는 것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집행하신다. 태어날 시간과 장소와 부모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하므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언제 어떻게 부르실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 한번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결혼이다. 결혼생활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선택적 생활에 맡겨진 것이다. 이 세가지 중대한 사건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결혼에는 권리가 있고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잘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의와 진리로 태어나는 사건이다. 태어남으로서 구원받는다. 기독교의 이 진리를 잊지마길 바란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남으로써 자녀로 살고 태어남으로써 자녀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아무런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행을 믿어 하지 않고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그 선행으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오직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중생하길 바랍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회개하라고 말할 수 있고, 다만 믿어라 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중생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 그 청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단지 외치기만 할 뿐이고 그 외침을 통해서 중생케 할 일은 성령이다. 그래서 성령이 외치는 자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외침이 무익하고 변명일 뿐이다. 특별히 강단에서 서는 목사들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설교문을 잘 준비하고 아무리 성경본문을 철저히 잘 준비하더라도 아무리 뛰어난 수사적 표현을 동원하여 증거한다 할찌라도 성령이 불러주지 아니하고 성령이 중생케 하지 아니하면, 그 전하는 외치는 자의 수고가 무익되고 전혀 헛된 것이다. 이 말은 목회의 성공도 하나님의 뜻이고 목회의 실패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인간이 목회에서는 적어도 성공했다, 실패했다 라고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만 가르칠 뿐이다. 이것이 충성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 훌륭하고 업적을 이룬 사람 이라고 말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상 받는 사람은 크게 이룬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충성이라는 말은 주어잔 조건하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에 바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를 찾지 않고 그 자세로 우리를 찾는 것이다. 어떠한 자세로써 말이다. 그 자리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 왔는가 그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인 것이다. 따라서 충성된 종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너무 큰 것을 이룰려고 하지 말고 너무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말라! 언제나 오늘 내게 그 주어진 작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이 충성된 종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에 따라 그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이다. 여러분 삶의 자리를 바꾸려고 하는 시도자체 어려운 것이고 불순종의 모습이다. 바꾸려는 하는 과정에서 많은 마찰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너희의 부르심 행하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의 수용성이 요구된다. 주시는 대로 잘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 쳐다보지 말고 여기 이 자리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여기 이 자리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할 때 열매 맺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최선이고 지혜이다.


  중생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성을 살펴보면,(요3장 3~5절) 기독교 신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중생이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한 것은 중생이다. 중생은 완전히 본성이 변화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이나 고행이나 깨달음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이방종교의 특징은 한 개인의 노력을 요구한다. 중생을 통해 받는 구원은 세상사람들이 어떤 것으로 이룰 수 없는 존재인 것으로 우리가 받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지도 구하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전적인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다. 우리의 주어진 구원은 특별한 구원이다. 유대인의 지도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성령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출생하므로 (본질의 변화를 가지므로)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니고데모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적어도 행위에 따른 순종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이루는 것이나 종교적인 규례나 규정을 따라서 충실하게 살 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이해를 완전히 거부하신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것이냐 가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구원의 방법에 관한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 전환을 요구하신 것이다. 구원은 니고데모가 생각해 왔던 그런 종류가 아니다. 사람으로부터 태어난 사람 혈육을 입고 태어난 사람들이 거기에 더해질수 있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근본적으로 지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데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사과와 오렌지가 다르듯이 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오렌지가 사과 되고, 사과가 오렌지 되듯이 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새로운 종으로의 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이다 변화가 와야 하는 것이다.


  아마 니고데모는 그날 밤에 절망을 느꼈을 것이며, 이것은 그기 평생을 유대인의 규정에 따라서 말씀을 지킨다고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지만 그러한 자기의 노력이 이룰 수 없는 곳에 구원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해볼 수 있는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 말씀하시는데 성령은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이 동에서 서로 불고 부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성령이 신비롭게 역사해서 역사하는 사람만이 거듭나고, 거듭나는 사람만이 곧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구원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율법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사망 선고이었다. 니고데모에게 그날 밤에 절망감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특별히 결정적으로 절망감을 안겨 준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어로 “게네 아우트”로써 부정시제 수동형으로 위로부터 중생되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 갔을 때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어 루디아가 그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한 지라 라고 했을 때, 루디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바로 그 때가 시제가 없는데,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없는 부정시제인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그 시간이 언제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중의 그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갑자기 열어주신 것이다. 그 어떤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열다 라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힘의 작용이 아니라 자기 밖에서부터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힘에 의해 열려지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있던 중에 그 여자의 마음이 열려진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을때 그 말씀을 깨닫아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소원이 생긴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닌까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를 규정할 수 없고 부정시제로서“위로부터”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 그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는 때,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 이 말씀앞에 절망과 무력감 ,박탈감을 가진 것이다. 그는 그날 더 나은 종교적인 의무감 대문에 예수님을 찾아 오신 것인데, 즉 종교적인 모든 의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가르침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거듭나야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네가 거듭나야 한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요한 복음 3장에서는 위로부터 태어나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은혜로서 거듭남으로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중생이 필요한가? 인간의 육체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사도요한과 사도바울 사이의 육체에 대한 이해가 조금 다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는 인간의 타락성이나 우리 인간을 죄로 이끌어 가는 죄의 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우리 몸속에 죄의 원리를 담고 있는 그릇과 같아서 그 몸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은 죄를 완전히 벗어 버릴수 없다 말한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강한 윤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말하는 육체는 단순히 육체의 원리 죄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대조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나라이므로 성령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자연인들은 성령과 관계가 없는 죄에 종된 사람이다. 그래서 사고 요한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중생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요한은 말하고 있다. 중생은 한마디로 영적 존재의 출생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방언해야 하고 신유해야하고 기적해야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중생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곧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가지 사실은 분명한데, 영적이다 라고 말할 때, 그 영적인 사람은 곧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중생한 사람이 다 영적인 사람이고 이렇게 되는 사람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후 그가 설교할 때, 유월절 지내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설교할 때 “너희가 회개할 때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말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곧 회개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중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계통에서 성령세례를 말하는데 성령세례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믿을 때 받는 성령과는 다른 성령 체험이라고 말한다. 예수 믿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중생도 성령의 능력이고 믿음과 회개도 성령의 능력이고 의롭게 되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난후에 성령의 세례는 무엇을 가져오는가? 방언을 수반한다.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은 오순절 계통에서는 교리적으로 그것이 방언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방언받다는 것이다. 그러닌까 오순절에서는 성령체험이란 중생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게 하는 성령의 체험이다. 그런식으로 성령세례를 가르치는데, 이 성령세례가 신학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라는 것은 사실, 성령께서 우리 구원의 경험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을 가르치는 것이지 이미 성령을 받고 중생한 자가 다시 두 번째 축복인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축복은 성령이 우리에게 중생을 일으키게 하고 회심하게 하고 믿음 갖게 하고 두 번째 축복은 방언하게 하는 성령세례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그렇게 매번씩 일정한 구분을 가지고 체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험의 대상이 아니다. 성령체험이란 말 자체가 온당치 않다. 성령의 체험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인격적 하나님의 신이시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중생할 때 그들이 다 영적인 사람이 되고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고 세상 끝날 때 까지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필요성의 첫 번째 필요성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에 따라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질이다. 자질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선한 사람이 되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도덕군자를 만들어서 안되고 교회안에서 착한 사람을 양성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되고, 사실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곳이다.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다.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착하게 사는 이유는 착하게 살아서 성령 체험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착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서 중생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자연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인은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구스인의 피부와  표범의 비유에서와 같이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선행을 하고 공적을 쌓아서 구원에 이를수 있다는 것은 큰일 날일이다. “선을 행할수 있으리라”는 말은 악과 선을 대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선을 행하여 구원받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표범은 그 반증을 변할 수 없고 사람은 그 타락한 성품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인데 그러나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 선이 완전한 선도 아니고 누구든지 선을 통해서 구원받도록 하나님이 섭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중생한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괜찮다.


  롬8장 7~8절에서 보듯이 영적으로 라야 분별하는 것이다.“영적이란”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이다. 성령에 성령에 의해서 조명되어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우리가 비록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의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있는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는 요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믿어야 중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을수 있다고 사람을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성경에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아주 부정적이다. 성경이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진지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탓에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알미니안 주의는 주장한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이 갖고 있는 인간이해의 제일 큰 문제는 성경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토록 부정적이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인간의 타락성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이해를 고상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믿음은 자유적인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 믿는 것이다.


  중생의 두 번째 필연성, 중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변화들의 가시적 변화와 부가시적 변화가 있다. 가시적인 변화에 대한 주의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특히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영적변화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기원 시작 중생의 수요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일은 본질적으로 신비적이다.(요3장 7~8절) 그런데, 성령의 사역을 바람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에스겔서 37장에서 온 것이다. 뼈들의 관한 환상에서 뼈들이 사람으로 육체를 입고 일어설 때에 바람같이 하나님이 성령이 역사할 때에 그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뼈들이 다시 결합하고 살이 덮이고 사람이 되어 큰 군대가 되었다. 그때에 성령의 사역이 바람과 같이 역사했다고 에스겔 37장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서 언제나 바람과 같이 사역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과 같이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은 그 강조점이 성령의 사역이 신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령이 어떤 양식으로 어느 때에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우리 인간이 직접적으로 분석할 수 없고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 거듭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소위 구원파에서 중생은 시간과 날짜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중생의 사역은 신비롭기 때문에 누구도 명확하게 언제라고 말할 수 없다. 방금전 부정시제라고 말하한 것과 같다. 어거스틴 이 말하기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수는 있으나 성령의 사역의 깊이를 알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성령의 역사를 알 수가 있는데 언제 어떻게 역사하는지 사람이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 바람과 같이 신비롭게 사역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아니하시고 동의를 구하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깨서 주권적으로 한사람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본성을 하나님의 자기의 본성으로 바꾸어 버리신다. 새로운 생명을 덧입게 하신다. 우리자신의 구원을 인간의 노력으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다. 주권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구원에 위안과 확신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사도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었지만, 성령에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 할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식하든 못하든간에 그들의 성경기록 모든 사역에 하나님이 감독자로 관여하셨다.  어떻게 어느 부분까지 어떤 양식으로 그 제자들과 성령이 역사하셨는지 본인도 모른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다. 계시가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는 중생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변화) 중생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중생의 역사가 시작되면 중생이 광범위한 변화를 동반한다. 혁신적인 변화다. 이 중생은 우리의 마음(존재의 중심)에 이다. 우리 이성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이 원하는 것만 이해하고 마음이 가르키는 것만 보고 마음이 원하는 것만 듣고 마음이 가르키는 것만 보고 듣고 강조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이 곧 감정으로 나타나고 이 마음이 의지하는 곳에 내 인생과 운명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제물도 있다. 이 마음이 존재의 중심이다. 가장 깊은 곳, 자기 인생의 중추가 어디 있는가는  마음에 있다. 중추가 바뀌지 않으면 그 주변의 것들을 아무리 개선해도 그 개선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수가 없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그런데 이 중생은 우리 마음에 일어난다. 첫 번째는 신비롭게 사역하고 둘째는 우리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


  렘31장 33절을 보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을 속에 그 마음에...” 단순히 우리의 기억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호나 선호도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 정결한 소원은 자연인에게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소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없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의 부르심, 성령의 감동, 거기 믿음에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생기는 소원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날마다 말씀을 들을 때 이러한 소원이 생겨나길 사모해야 한다. 중생은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가져 오므로써 어디까지 그 변화를 미치는가 하면 그 변화가 우리의 머리에 있는 과학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중에는 중생의 변화가 그냥 내 마음의 관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내 생각의 길까지 바꾼다. 결국에는 사고하는 방식을 바꾼다. 또 의지를 바꾼다. 우리의 정신(지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가운데 바르게 온전하게 작동한다. 이렇게 하므로써 중생은 예레미야 31장 33절에 있는 말씀을 정말 아름답게 성취한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이 중생하게 되면 근본적으로 마음에 변화가 오고 생각의 변화가 오고 지성과 이성의 변화가 오고 의지의 변화가 오고 그 의지가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면 그 사람의 말도 변화시키고 행동도 변화시키고 외모도 변화시킨다. 얼굴이 박색이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 마음에 신앙이 있으면 그 신앙이 얼굴로 아름다운 빛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겉모습 보다 그 겉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 그런 사람은 함께 살면 살수록 더 사랑스럽고 더 다정스럽고 같이 있는 사람이 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얼굴은 너무 예쁜데 성격은 완전히 괴팍하다. 그러면 그 잘생긴 것이 때로는 괴롭고 가증스럽다. 사람이 중생하면 우리의 전부를 바꾼다. 비록 새마을 운동을 가진 얼굴도 큰 위안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야말로 마음이 비단결 같은 중생된 사람의 증거이다. 중생을 하고 나면, 죄악이 끊어진다. 그러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반드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 중생했는가? 오순절 성령강림때 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했다. 신비적이기 때문에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중생을 일으키시는 자(원 보혜사)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성령이 오순절 성령강림때 오셨지만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례받는 그 때 성령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공생애 기간중에 어떤 때에 이미 중생은 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한 출발이다. 그래서 이 성령세례가 반드시 중생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도 너무 제한적이다. 성령에서 세례는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례는 성령이 임하는 양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이 어떻게 임하는가? 그들에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충만하게 임했다. 그래서 성령이 이끄시는데로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사역했다. 그런데 세례라고 쓴 것은 그 세례식에서 물이 부어지는 양상을 통해서 세례가 어떤 모양으로 그들에게 임할것인가를 보여주는 형용사적으로 사용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세례은 물을 완전히 뒤집어 쓴 세례이었다. 그러나 개혁파의 세례는 물을 의식행위로 뿌리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라는 말은 마치 무리 우리에게 적시듯이 임함을 표현한 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의 삶의 광범위한 외형적인 변화로 반드시 나타난다. 그래서 온 우주가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변화를 보고 내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중생은 못 속인다. 중생받은 사람은 오랫동안 중생의 증거를 숨기지 못하고 잘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했으면 중생에 합당한 열매들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외면적 행위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7절에서 “사람이 태어날 때 모두 죄의 종”이다. 따라서 중생은 마음과 지성을 새롭게 하고 의지를 교정하고 이제는 우리의 의지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아, 그리고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깨끗하게 된다.(요3장 5절의 물은 청결함의 모티브이다) 말하자면,  물이 강조하는 것은 청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각종 더러운 것 악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던 그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중생할 때 그 마음의 생각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일체의 더럽거나 추하거나 악한 것을 사모하거나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악한 것을 느끼는 것은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만 가질수 있는 경지다. 우리 주위에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자도 없고 선한 것을 참으로 선하다고 말 할수 있는 사람도 없다. 백가지의 악을 깨닫는 것보다 한가지의 선을 깨닫는 것이 더 어렵다. 마음이 청결해 지면 선한 것을 선하다고 말할수 있고 무엇이 비로소 무엇이 선 한줄을 안다. 마음의 생각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에서 물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모든 우상들이 다 씻겨져 가는 것을 상징한다. 성령은 새로운 어펙션(affection) 어펙트란 열정, 뜨거움을 말하는데 훨씬 더 감정적인 것에 호소하는 말이다. 의지는 죄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펙트(열정)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내 마음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강한 반응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열정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 믿고 선교하고 남을 돕고 헌신하고 남을 섬기는 것을 왜 기뻐하는가? 이것이 중생의 결과이다. 영적인 기호가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 좋아하던 것이 바뀌고 이제는 새로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열심이 생기는 것이다.


  중생하게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생기는데 그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한 뜨거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헌신에 열심히 생긴다. 중생이 새로운 열정을 마음에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도한 쪽으로 가도록 마음을 변화시키고 이성을 교정하고 의지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열심을 줘서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이 영원 전에 우리를 향해서 그 영광의 성취를 향해서 나도 모르게 그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작은 변화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향으로 내 삶이 갈수 있도록 이끌어 가신다. 그것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매 순간 나의 삶을 정교하게 이끌어 가신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하셨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갖고 오고 이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의지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정열을 주셔서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길을 걷도록 이끌어가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의 능력이다.


  불가항력적 은혜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 원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인데, 칼빈주의자들이 사용한 것은 강제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비롭고 교묘하게 사람들의 의지로 가도록 역사하신다. 왜 이것을 불가항력적 이라고 하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목적의 사람이 반드시 이루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이지, 그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는지 그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를 설명할 때 하나님이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데 그 가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원하고 의지하는 바에 거슬려서 데려간다고 생각하는 데 그것이 아니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란 그것에 결과에 관한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자리에 우리들이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 이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역사하느냐 물으면 그 역사는 마치 중생과 같아서 신비롭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막상 그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자기 의지로 자신의 생각으로 한다고 충분히 느낄만큼 자유롭다. 그러나 충분히 자유로운 그 상황에서 이미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이끌어 가시는 그 역사가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이다. 본인은 모르지만 나중에 이루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거기에 도달하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알게 된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우리를 이끄시는 결과를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신비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를 변화 시키시고 이성을 새롭게 하게 함으로 정말 그 마음이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플랭팅거 신학자는“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는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고 신비롭고 따뜻해서 그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마치 자신이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가는 길이 자기가 정한 길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유롭게 역사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필연성을 말했다. 중생도 결국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중생이 강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중생은 외적인 증거가 꼭 드러난다.


  중생의 증거는? 첫째는 죄에 대한 변화이다. 죄에 대해 달라진 태도이다.(요일서 2장29절,요일서 3장9절)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난자(중생된)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일단은 죄에 대해서 달라진 자세(태도)로 중생의 증거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죄를 짓는 것은 자연(nature)이지만 중생하고 나면 죄를 짓는 것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죄짓고 사는 것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로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지는 것이 일상생활이 될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죄를 짓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지는 것이다. 죄짓는 사람은 죄의 영감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로 난자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생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기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안다. 죽은 고기는 흐르는 물에 그냥 떠내려가지만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그 악한 세월에 묻혀갈 수 없는 것이며 노력하고 거슬리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것이 중생의 증거다. 죄짓지 못한다는 이 말은 죄를 짓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다르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죄인들처럼 짓지 않는다.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수 없지만 죄를 범할 때 즉시 회개한다. 요일서 3장 5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한다. 아무도 죄가운데 살지 않는다. 죄가 그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규정하는 특징적인 원리가 되지 않는다.


  싱클레 퍼거슨 이라는 분이 성령론이란 책을 썼는데, 나의 멘토인데, 요일서 3장 5절 중생한 자가 죄에 대해 죽었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 이것은 현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예수 믿고 중생하고 이 사람들이 영광에 들어가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라는 관점에서 사도요한이 말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뜻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이들은 장차 완전히 죄를 짓지 못하는 자들이 될 것이고 그러한 자들로서 오늘 죄와 다툰다 라고 설명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죄를 짓지 못하는 불가능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지금은 그 죄와 계속해서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와 다투면서 죄와 이기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생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고 의지가 자유롭게 되고 우리 속에 새로운 열정이 찾아왔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할 때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는 자유도 있고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고 성령의 감동도 있으므로 죄와 다투기를 힘써야 한다. 죄와 다투기를 힘쓸 때,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자들이다. 이러므로 중생을 드러내는 자들이다.


(6강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감사,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주님을 떠나 있을 그 때에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중생케 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게 하시고 천국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고 새로운 것을 심게 하시고 나라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놀라운 은사를 부어 주시니 주여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이 글래스에 참석한 모든 종들에게 오늘 이 성령의 과목을 가르치니 관념의 지식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정말 새로운 용기와 도전과 힘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다음 주에 그 동안 우리가 배운 것을 한번 확인하고자 합니다. 주님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다 기쁨으로 이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다음은 11부. "믿음과 회개(돌이킴)1" 입니다. coming soon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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