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

 

 



성도의 견인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 욥기 17:9


1. 교리를 살펴봅시다.


p.33.

우리는 특별구속을 믿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그 구원의 결과로 일어나는 구속받은 자의 견인을 보증합니다. 우리는 효과적 소명을 믿습니다. 이것은 영화를 보증하는 칭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 교리는 하나의 사슬과 같아서, 여러분이 하나의 교리를 믿으면 그 다음 교리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교리는 나머지 교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교리를 받아들인 여러분은 반드시 견인교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견인교리는 은혜교리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효과적 소명


매우 담대한 예언


p.55.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교하는 사람은 담대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명시대는 은혜교리를 거부합니다. 복음을 가르칠 때 은혜교리는 핵심입니다.


p.90.

그 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만, 값없이 주는 은혜는 그를 찾아가서 죄인이여,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어도 그리스도는 손으로 문을 여십니다. 우리가 일어나지 않고 그분을 냉정하게 거절해도 그분은 내가 들어가야 하겠으니 들어갈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눈물로 우리를 이기실 때까지 우리를 보고 우십니다. 그분은 자기의 울부짖음이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시면서 우리를 따라다니십니다. 마침내 자신이 정한 시간, 주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거기 거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제한적 속죄


예수님께 담당시킨 죄


p.110.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나의 경험을 솔직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대속의 교리만큼 나의 영혼을 기쁨으로 불타게 하는 교리는 없었습니다.

 


 

무조건적 선택


야곱과에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로마서9:13


p.164.

사람들이 많은 논쟁에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대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씀에 확고히 서 있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이 큰 교리를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내가 생각한 것, 곧 어떤 사람은 택함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성경적 증거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커다란 증거는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본문 속에 증거됩니다.


이 구절은 무서운 본문입니다. 나는 가능한 한 솔직히 이 본문을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미워하다라는 말이 미워하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덜 사랑한다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를 덜 사랑했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나는 그렇다고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미워하다라는 뜻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다른 성경을 제시할 때까지, 나는 이것을 고집할 것입니다. 나는 이 단어가 정확하고 알맞게 번역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워하다라는 단어가 원문의 뜻보다는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덜 강하게 (p.165)표현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덜 사랑한다는 의미 없는 단어를 제공하는 다른 번역서보다는 나은 표현입니다. 나는 덜 사랑한다는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본문의 뜻을 그대로 사용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는 사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야곱은 택하셨지만, 에서는 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야곱을 끝까지 일생동안 복주셨지만, 그의 은혜는 에서에게 결코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죄의 길로 가도록 여전히 내어버려 두셔서 내가 에서를 미워했다는 무서운 진리를 입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불쾌한 본문을 회피하고자, 다른 사람들은 이 본문이 에서와 야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자손, 에서의 자손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자손, 에돔 자손을 뜻한다고 합니다. 나는 그 차이점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뜻을 확대 해석함으로 곤란한 점이 없어졌습니까?


웨슬리파의 형제 중 몇몇은 민족적 선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민족은 택하시고, 다른 민족은 택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우리에게 말하기를, 한 사람을 택하고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합리적으로 그들에게 한 민족을 택하고 딴 민족을 버리는 것은 똑같은 하나님의 불공평이 아니겠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뒤엎을 수 있다고 생각한 논법이 그들을 역시 뒤엎었습니다. 민족적 선택을 입증하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속임수는 결코 없습니다. 단체나 다수의 선택이 아니라 민족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개인의 제한적 선택과 같은 것입니까? 좀더 생각해 볼 때, 비록 우리는 순간이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한 사람을 택하고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불공평이라면, 한 민족을 택하고 다른 민족을 택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불공평일까요?


그렇습니다. 어려움은 이렇게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과 싸우는 어리석은 싸움으로 더 커질 뿐입니다. 게다가 여기 옳지않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앞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것은 결코 민족들에 대한 것을 (p.166)말하지 않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 구절은 민족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 후에 협박적인 이 말씀이 두 나라의 상태, 곧 에돔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상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구절에서 야곱이란 이름을 가진 그 사람 야곱을 말합니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대로 만지작 거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 있도록 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고개 숙이도록 만들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는 하나님의 보좌만큼 확실하며,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나는 두 가지 문제에 주목하여 말할 것입니다. 나는 본문이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는 의미를 그대로 지닌다고 설명(p.167)했으므로, 이 구 절을 변경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입술을 깨물게 만든 무서운 이 교리의 위세를 꺾기 위해, 나는 이제 이 말씀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자 합니다.



Ⅰ. 이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선택의 교리를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진실로, 나는 그들이 그러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몇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알미니우스파 형제에게 선택에 대해 물어 보십시오. 금방 그는 당신을 무섭게 쳐다보고 화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 사실을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에게 전쟁의 아우성 같은 끔찍한 일이며, 그는 즉시 논쟁의 칼을 날카롭게 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 형제여! 당신을 자연의 상태에서 부르셔서 지금의 당신을 만드신 분이 주님이 아니십니까?라고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는 말하기를 물론이지요.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 다음, 왜 한 사람은 개종하고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그는 오, 성령님께서 이 사람 안에 역사하셨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의 형제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취급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 안에는 놀라운 일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날마다 이것이 사실임을 인식합니다. 저기 2층 복도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한만큼 열심히 일했지만, 일주일에 15실링 이상 벌 수 없었습니다. 여기 일년에 일천 실링 버는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요? 한 사람은 왕의 궁궐에서 태어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지붕도 없는 마굿간에서 그의 첫 호흡을 내쉬어야 하다니!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요? 하나님의 예정이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이 상황에, 또 어떤 사람은 저 상황에 놓으십니다. 여기 두 가지 이상의 생각은 할 수 없는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함께 무엇(p.168)을 할 것입니까? 여기 앉아서 책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질문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것은 독수리로, 어떤 것은 벌레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것은 사자로, 어떤 것은 기어다니는 도마뱀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어떤 사람은 왕으로, 어떤 사람은 거지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은 아주 넓은 마음을 가지고 태어 났고, 어떤 사람들은 거의 천치가 되려고 합니다. 왜 이럴까요? 이것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평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뿐, 불평함으로써 유익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들에 반항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맨발로 저항하면 상처를 입을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만 상처를 입을 뿐, 사실들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자, 그렇다면 선택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일광처럼 분명합니다......(p.169)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토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잘 믿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견해를 달리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실을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단순한 교리를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를 바꿀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시는 것보다 확실히 몇 사람을 더 잘 대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변호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변호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해석자이시며 사실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그 교리에 대해 논쟁하기 전에, (p.170)여러분이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이 교리를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이 교리를 반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적인 사실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은 전적 구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디모데후서1:9


p.185.

생각이 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확고한 논증이 필요합니다. 생각이 얕은 사람은 단지 감정과 흥분에 의해서도 설득되지만, 사회 중요 계층의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영향을 주기 원할 때-디모데는 부지런하고 열심히 있는 제자였고, 은혜와 은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그는 단순한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확고한 교리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디모데에게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이것이 목회에서 행해져야 할 학습입니다.


어떤 열심히 있는 목사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흥분시키지만, 교육시키는 (p.186)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불을 많이 일으키지만, 빛은 거의 비춰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에 호소하여 말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정처리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감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흥분에 기초하여 지탱하고 유지하는 종교는 틀림없이 보잘것없고 견고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편의 도전이나 짓누르는 시간의 손아귀에 매우 빠르게 굴복할 것입니다. 그 목사는 하프 연주자가 하프 줄을 튕기듯이 큰 호소력으로 감정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만약 잘 준비된 훌륭한 악기를 무시한다면, 그는 정말 어리석은 바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그는 반드시 이치와 이해에 바탕을 두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령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잘 이해력에 호소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강력한 동기를 우리에게 틀림없이 부여해 줍니다.


만약 우리가 비이성적인 충동에 의해 여러분을 어떤 행동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불안전하고 신빙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와 같은 일에 능수 능란한 사람들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길이 똑같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러분의 마음에 확고한 진리와 견고한 논증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하실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에 도 변치 않는 능력의 불변성에 의해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깃털은 바람에 날리지만, 그것은 고유의 힘이 있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강풍이 불 때, 깃털은 땅에 떨어집니다. 흥분의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자체 내에 생명을 지녔으므로, 바람이 불든 아니 불든, 높이, 드높이 날아갑니다. 진리의 확실성으로 견고한 종교는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실패하거나 사라지는 곳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진리 안에 잘 서 있어서 요동치 않습니다.


다소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p.187)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목할 만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즉, 사도는 디모데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그가 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견고히 서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위대한 교리를 디모데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사도는 이 구절 속에서 복음의 짧은 요약을 제시합니다.-이 구절을 어떤 사람은 삽입 구절로 보지만, 나는 완전 문장으로 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드러지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담대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유용성이 은혜 교리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교리적 진리를 비실용적인 이론으로 여기기보다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더 실제적으로 더 유용한 것으로 말하여 왔습니다. 우리가 더 밝은 빛 속에서 건전한 교리가 실제적으로 거룩함을 이루는 생명력과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들을 순종으로 인도하며, 거룩함을 유지하는 길 중 가장 평탄하고 확신에 찬 길입니다.


첫째, 본문 속에서 사도가 가르친 교리를 살펴보고, 둘째, 그 교리의 목적을 살펴보는 동안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1. 본문 중에서 사도가 가르친 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우리의 목적은 가장 인기가 있거나 가장 마음에 맞는 교리를 설교하려는 것이 아니며, 집회에서 어떤 사람의 견해를 발표하려는 것도 아님을 친구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의 단 한가지 목적은 본문이 의미하고 판단한 것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교리를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교리를 싫어한다 해도 우리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이 속상해 하며 화를 낸다 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설교를 듣는 자들을 기쁘게 하도록 위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은혜로운 자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청중의 견해에 우리의 견해를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본문에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본(p.188)문의 의미를 제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와 모순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가 영감된 말씀 속에 분명히 들어 있다면, 정직한 마음을 지닌 모든 자들은 그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p.196) 4. 영원한 목적이 제시되었으므로, 본문은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본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자기 뜻대로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오, 낚시꾼의 낚시에 달린 미끼처럼 사람들은 이 말에 꿈틀거리고, 그곳에 매달려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아니 자기 자신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여, 피조물의 모든 행위와 힘은 이 말씀에 아무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의 행위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나는 여기에서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목적은 선택하신 사랑의 놀라운 신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라도 그 진리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가 구원받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증거를 결코 읽어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주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라......


(p.198) 6. 또한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 선물이라고 말합니다......선물 보다 더 대가없이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은혜보다 더한 것이 무엇입니까?......


(p.199) 8. 더욱이 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영원한 때 전부터. 이 말씀은 영원히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우리의 행위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 있었습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 어떤 손이 여러분을 은혜 안에 있게 했습니까?......

 


 

(p.200)Ⅱ.나는 이 교리의 목적을 설명하는 동안 여러분의 인내를 원합니다.

 

은혜 교리는 잡동사니가 모인 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조 속에서 고백되었기 때문에 진리임이 알려졌습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영국 교회 신조에서도 나타나며, 모든 종류의 개신교 고백서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너무도 적게 설교됩니다! 과거의 유물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활동적인 봉사를 기대할 수 없는 은퇴한 군사를 향해서 갖게 되는 일종의 존경의 요소로밖에 여 겨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 진리가, 주님의 군대에서 늙어 퇴직한 군사가 아니라, 여전히 힘과 정력이 충분한 군사라고 믿습니다......(p.201) 더욱이 이 교리는 사람들에게 견고케 하는 어떤 것을 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을 견고케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는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님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이 신앙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거의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교리는 마치 진흙(p.202)과 구르는 돌이 뒤범벅이 된 산비탈처럼 미끄러 운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자는 순간적으로 발을 발판 위에 디뎌 보기도 전에 산 아래 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이 발판은 마치 영원한 진리의 피라밋 위에 서 있는 견고한 발판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발을 이 발판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그러면 교리적 기준이 서 있는 곳에서 멀리 미끄러져 내려가리라는 두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영국 교회에 서 잘 배우고 진리를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 나님의 영원하신 뜻의 참된 진리를 세상에 알려야만 합니다. 오, 성령님께서 이 진리를 우리 마음에 기록하옵소서.

 

나의 형제여, 게다가 이 교리는 마치 눈사태처럼 사제의 책략적인 모든 주장을 부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줍시다. 그러면 그들은 즉시 그렇다면 사제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그렇다면 면죄부를 사거나 미사를 올리기 위하여 돈을 들일 필요가 없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제는 곧 몰락합니다. 사랑하는 이 여,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옥문을 부수기 위해 사용하신 공성망치입니다. 이것은 많은 신학자의 아름다운 글보다 더욱 힘이 있습니다. 그 글은 큰 고랭이보다 힘이 없고, 연기 나는 아마의 빛보다 빛나지 않습니다.

 

박해 시대 때 사람들이 숲속에 자주 모이는 것이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 안트위프 시 밖 수천 킬로나 떨어진 유럽대륙이나 이와 비슷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이 시대의 우유에 물 탄 듯 한 힘없는 신학을 들으러 다 함께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현대 반(反) 칼빈주의자들의 우유에 물을 탄 미적지근한 것을 받으러 나온다고 생각합니까? 나의 형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좋은 고기와 그들의 구미에 당기는 더 맛있는 음식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밤의 그림자 아래서, 폭풍우 날개 가운데서, 철학적 연설이나, 단순히 도덕적 교훈이나, 물에 물 탄 듯 하고, 가짜같고, 영혼이 없는 신학적 가설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만한 일로, 사라들은 (p.203)자기 생명이 위협당하는 곳에 모여들지 않습니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는 죽음의 밤에 무엇이 그들을 모이도록 했습니까? 무엇 이 그들을 모이게 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 교리요, 예수님의 교리요, 예 수님의 종 바울의 교리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교리 때문입니다. 이 교리 속에는 기독교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영혼의 사랑과 같은 음식과, 하늘 나라에 태어난 그들 의 구미에 맞는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듣는 사람 들은 용감하게 죽었고, 칼 따위는 문제삼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빨간 모자가 착용자의 머리에서 벗겨지고, 번쩍번쩍 빛나고 번드르르한 로마의 관들이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다면, 또 그것들과 함께 퓨지주의 신봉자의 국교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외쳐야만 합니다. 이 교리가 선언되고 여러 곳에서 주장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들에 게 한순간도 그들의 땅에 설 수 없음을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 하 나님의 사람들이 주의 검과 기드온의 검을 휘두르며, 하나님의 은혜 교리를 선포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사람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이 진리를 기록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이 진리가 사람을 똑바로 서게 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고 걸어갈 것 입니다. 그는 자연과 예정 속에 계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그는 주님께서 모든 곳에서 일하심을 깨닫고 겸손히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연 법칙이나 국가의 계획에 돌리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보이지 않는 통치자를 존경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내가 행하리라. 이것이 신자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믿으며, 하나님의 약속 위에 살리라. 이것이 모든 일에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는 복받은 생활 습관입니다.

 

동시에 이 교리는 사람에게 자신을 쳐다보도록 합니다. 그는 이렇게 (p.204)말합니다. 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존경받을 만한 장점이 내겐 아무 것도 없어. 내겐 선한 것이 전혀 없어. 구원을 받아도 나 자신을 찬양할 수 없지. 나는 조금도 자신에게 존경을 표할 수 없어. 하나님이 하신 거야. 하나님이. 아무 것도 그 사람을 이처럼 겸손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매우 기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은혜자리 까지 낮출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그의 동료의 얼굴을 쳐다볼 만큼 용기있게 만들 수 없습니다. 이 교리는 굉장한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강력한 능력을 알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귀중한 진리는 죄인에게 충만한 만족을 줍니다. 이것이 내가 진리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첫 열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8


p.206

열렬히 믿음에 의한 칭의론을 주장한 믿음의 옹호자인 마틴 루터는, 자기를 대적하기 위하여 야고보서를 인용한 반대자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인정하기를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야고보가 바울의 이신칭의론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주어지는 각양 좋은 은사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믿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합니 다. 야고보는 1장 17절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오나니 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이나 어떤 자유로운 행위에서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완벽하고 선한 은사들은 인간의 더러운 본성 위에 피어난 귀하고 풍요로운 꽃과 같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야고보는 어떻게 영광을 (p.207)돌려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니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릴지라.


사도 야고보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즉, 그는 면류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께 면류관을 드리고,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본서는 Charles H. Spurgeon의 SPURGEON ON THE FIVE POINTS(Florida:Tyndale Bible Society)를 완역한 것입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찰스 스펄젼, 김군섭역 서울:크리스 챤 다이제스트, 1997.

 

 

[출처] 찰스 스펄젼의 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822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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