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근 교수, 알파코스는 개혁신학 아니다
논평 :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알파코스의 성경관과 구원론”
 
리폼드뉴스 기사입력  2008/11/29 [10:09]
알파코스(the Alpha course)는 1995년부터 004년까지 보수와 자유주의 진영을 막론하고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파와 로마 카톨릭 교회 등에서 28,000번이상 채택되었고 약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 했을 만큼 세계적인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되었다.[Alpha News (2002) July-October: pp. 31-32.] 그러나 이런 세계적인 위상에도 불구하고 알파코스는 어떤 진영으로부터도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부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 모습     © 리폼드뉴스

 
 
 
 
 
 
 
 
 
 
 
 
 
 
 
 
 
 
 
 

 

그 이유는 오늘의 알파코스를 체계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니키 검블(Nicky Gumbel)이 처음부터 “대중적인 기독교”를 지향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최소한의 기독교 진리를 제시하는 대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는 대중성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주요한 교리적 논쟁점들은 의도적으로 지양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호소력을 갖는 초교파적 전도 프로그램이랑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중대한 신학적 문제점을 노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알파코스의 대중성은 정련된 신학적이고 지적인 내용보다는 토론토 블레싱(the Toronto Blessing)과 같은 은사주의운동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성취된 것이었다. 1998년 전후로 토론토 블레싱이 교회와 정통신학의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알파코스가 등장하게 되면서 꺼져가는 은사주의운동의 불씨를 다시 일으키는 그러면서도 대중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실로 괴이하다 할 황홀경을 수반하는 은사주의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을 잠재우면서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보다 체계적인 모범교안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검블의 알파코스인 것이다.[토론토 블레싱의 은사주의 운동에 흔히 수반되는 극도의 열광주의적 다양한 현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하라. P. Richter, "God Is Not a Gentlemen!" in The Toronto Blessing Or IsIt, ed. S. Porter and P. Richter (Longman & Todd, 1995); J. Hunter, Evange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7); M. Poloma, Main Street Mystics: The Toronto Blessing and Reviving Pentecostalism (New York: Altimira Press, 2003).] 검블은 출판물과 같은 문서화된 도구가 은사주의운동의 매우 유용한 방어책이 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N. Gumbel, Telling Others: The Alpha Initiative (Eastbourne: Kingsway, 1994), 120.]

알파코스는 은사주의운동이 단순한 비교적(秘敎的) 현상에서부터 성경공부와 기본적인 복음적 진리를 제시하는 하나의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반전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은사주의운동이라는 알파코스의 근본적 성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알파코스의 근본적 성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알파코스는 본질적으로 열광적 은사주의운동을 이론화한 결과였던 까닭에 주로 은사주의교회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채택되었고 그리고 이 교회들이 다른 일반의 개신교회와 로마 카톨릭, 성공회, 심지어 제칠안식일재림교에게까지 알파코스를 확산시키는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알파가 급속히 확산되었던 이면에도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이미 빈야드 운동(the Vineyard Movement)이나 토론토 블레싱의 은사 운동에 대한 경험이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정도의 알파코스의 역사적인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만 있어도, 알파코스의 신학사상이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의 신학적 입장에 부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부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에서 알파코스 문제를 논평하고 있는 박혜근 교수     © 리폼드뉴스
본 논문의 저자인 서창원 목사는(편집자 주: 서청원 목사의 <개혁주의 성경론과 구원론의 입장에서 본 알파>에 대한 박혜근 교수의 논평글) 검블의 성경관과 구원관이라는 두 가지의 주제에 한정한 비판적 분석을 수행하였다. 저자는 검블의 저서들 가운데서 현재 우리말로 번역된 저서들을 대부분 검토하였고 두 가지의 주제와 관련한 검블의 신학사상을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입장과 비교하고 그 차이를 규명하고자 시도하였다.

단정적ㄷ으로 말하자면, 알파코스의 성경관과 구원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저자가 주장한 대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은사주의자로서 검블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와 관련하여 연속주의자 혹은 회복주의자의 입장에서 성경의 완료성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참조. S. Ferguson, 『성령』(The Holy Spirit). 김 재성 역(서울: IVP, 1999), pp. 237-274] 예언의 은사와 관련하여 그는 오늘날에도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으로 인해서 예언, 꿈, 환상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가 중단 없이 주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요한복음 14:12의 무리한 해석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형식적인 원리에서는 성경이 완료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성경은 개인의 체험 속에서 개별적인 성령의 지도로 보충되어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검블은 이런 개인적 체험의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붙이기는 한다. 그러나 체험의 유용성에 대한 알파코스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성경의 탁월한 지위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제목 하에서 그는 “성경은 오류가 없으며 신조와 행위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라고 하면서도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 그러한 신적 권위를 갖는다고 명시하지는 않고 있다.

검블의 성경관의 문제는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다. 성경만이 유일한 신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을 때 개인의 체험이나 확신은 얼마든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게 될 수도 있고 로마 교회의 외경들이나 심지어 이단들이나 소위 예언은사자들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권위적인 것이 될 수가 있다. 만일에 어떤 결론이나 결정이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사고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권위는 훼손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성경 이외의 것을 성경보다 더 상위에 두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성경에 대한 검블의 저급하고 비평적인 입장을 고려한다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예를들면 성경은 도덕적인 문제가 있고 또한 역사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거나, 성경이 가이드북이라거나, 혹은 성경보다는 하나님은 상식을 통해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도록 하신다는 등의 주장은 성경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참조. Dusty Peterson, New Age of Alpha: A Critique of The Alpha Course For Those Who Know Their Bible, retrieved May 7, 2008, from
http://www.inplainsite.org/html/new_age_of_alpha.html]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무오한 계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앙체험의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면 성경이 갖는 유일한 최고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검블은 성경은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하는데 그칠 뿐 개별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으므로 성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성경은 질적인 원리에서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알파코스에 참여하는 독자들이 성겯ㅇ을 읽을 때 과연 성경이 무엇을 뜻하고 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적절한 원리도 모른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막연히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을 성경의 특정한 본문이 의도한 진의로 오인하게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경의 바른 해석과 작용은 장기간 전문적인 교육을 요구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알파코스는 독자가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처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성경은 해득되어야 하기보다는 참조되어야 할 대상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검블의 성경관은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성령의 연속적인 사역으로 정당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과연 이것을 두고 알미니안적 태도라고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한편 알파코스의 구원관은 탈현대적 사회에 상관성을 갖고자 하는 동기가 검블의 복음제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본 논문이 검블의 구원관을 논의하면서 단지 개혁주의의 그것과 다르다는 서술적인 비판에 그친 것은 좀 아쉽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저자가 지적한 대로 검블의 죄의 이해는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신학적으로 퇴행적이다. 검블에 따르면, 죄는 삶을 온통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며, 펠라기우스의 입장과 유사하게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구현되지 않는 한 죄가 되지 않는ㄱ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지옥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텅 빈 도시”이며 그것은 “파멸의 날”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죄와 지옥에 대한 검블의 이해는 성경의 그것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성경은 인간의 죄행 뿐 아니라 마음의 뜻과 생각 그리고 인간의 본성까지도 죄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으며(창 6:5; 출 20:17; 마 5:28; 갈5:20; 엡 2:3), 지옥은 불못이며(계 20:15) 영벌(마 25:46)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느슨한 죄나 지옥의 이해는 회개의 필요성이나 복음의 긴급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의 구원관을 평가하자면, 검블의 구원관은 오직 은혜에 근거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획득하는 의로움이라는 개혁주의의 독특한 구원이해를 적절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중생의 의의와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거나 혹은 간과하고 있다. 이같은 알파코스의 구원관의 문제는 분명히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 무능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탈선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검블의 구원관의 이러한 결점은 이 시대의 문화적인 상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탈현대적 사회는 어떤 형태의 윤리성이라도 윤리적이라는 점에서 쉽게 용인하며, 특히 본 훼퍼(Bonhoeffer)가 주장한 대로 “죄인”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도발적인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동시대의 문화에 상관성을 확보하고 현대인들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자면 검블은 죄에 대해 극히 종교적으로 절제되고 문화적으로 정제된 표현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결과 탈현대사회에서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고 노골적이지 않은 문화화 된 프로그램이 되고자 했던 알파코스는 결국 불가피하게 사람들에게 참된 회개를 요구할 수 없는 중대한 장애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검블이 죄와 구원에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퇴행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저변에는 “대중 친화적인 기독교의 부흥”이라는 알파코스의 근본취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알파코스는 기독교의 복음을 21세기 탈현대적 사회에 문화적으로 순치시킨 결과물이다. 동시대의 문화에 적응하고 그것의 지시를 받고자 하는 의도로 인해서 알파코스는 성경적인 죄의 이해에서 벗어났고 그 결과 믿음보다는 감정과 자아를, 회개보다는 회오를, 그리고 성화보다는 대중성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을 혹평한다면, 알파코스는 정통과 이단의 혼합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알파코스는 종종 너무 광ㄷ적이며, 성장에 집착하고 체험을 강조하는 등 기업가정신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적 친화성을 교리적 정통성보다 더 우선하는 알파코스가 개혁주의 신앙을 신봉하는 교회에서도 무분별하게 채택되고 있다는 사실은 겉으로는 보수적인 모양을 띄지만 실제로는 현대 문화에 동화되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도 죄에 대한 설교를 기피하고 청중들을 불쾌하게 하는 언사를 지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미 만연하고 있다. 회개를 촉구하기 보다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자아완성 등에 관하여 주로 설교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청중의 지지와 승인이 없으면 교회의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적인 일치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교회의 존립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념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추종자를 더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지가 때로 죄를 낳기도 하지만, 그러나 탐욕은 필연적으로 죄를 낳는다. 교회의 양적 성장을 무한히 추구하는 것은 목회 역시 얼마든지 탐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목회자의 정신과 자세가 사도적인 모범에서 벗어나 현대주의에 물들때 신학은 필연코 부차적인 것이 되고, 교회는 현대 문화의 한 단층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어에서 저자가 언급한바 목회에서 무엇보다 신학이 중요하다고 한 점, 그리고 알파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인 검증을 요구한 것은 지극히 옳다고 할 것이다. 논평자 역시 목회에서의 신학이 차지하는 최우선적인 중요성에 대한 목회자의 심각한 인식결여가 오늘날 현대교회가 정체 현상을 보이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믿고 있는 바이다.
 
목회에서 신학이란 고작 부가적이거나 혹은 “신학교의 일”라는 신학의 중요성에 대한 저급한 인식이야말로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매우 다양한 이단들과 현대주의의 다양한 도전으로 인한 혼란의 한 중대한 원인은 단적으로 신학의 부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이 신앙의 체계적인 표현이라면, 신학은 신앙인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며 그것의 건전한 수립과 발전은 진리를 보전하고 전파하는 일에 필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교회의 제도와 조직 그리고 목회적인 실천의 기법과 장치들은 반드시 신학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과정에서 성경의 승인과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그 본질이 실천적인 효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계시성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갖는 시대적인 상관성과 사회적인 효용성이란 교회의 전도전략이나 원리 혹은 기술의 완성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음이 진리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진리야 말로 가장 실천적이며 효과적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복음이 실효적인 것이 되도록 보증하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하며, 성령께서 사람의 창의적인 고안물이나 프로그램에 의존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박혜근 교수> 영남대학교 전자공학과(B.E.)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현,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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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적분별력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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