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강림'과 '종말론적 연합'의 의미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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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경계는 일부 성도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모종의 흥분 사태에 대한 마음의 동요였다. 그들은 머지 않아 주님께서 강림하실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직업조차 포기하면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강력하게 선전함으로서 다른 사람들까지 일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형제 사랑을 구현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들에 대한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바울은 형제 사랑에 담겨 있는 성령 충만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종말론적 흥분에 빠져 형제들을 희생시키는 일에 대해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이미 급진적인 종말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흥분과 관련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완성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일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잘못된 종말관을 교정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에 보낸 서신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상고함으로써 이 땅의 성도들이 잘못된 종말론에 미혹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위로 가운데 살아갈 삶의 당위성을 점검하고자 한다.  

 

1. '죽은 자들'의 기업에 대한 오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 1:3)를 품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는'(살전 1:10)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주님의 강림을 소망하는 그들을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살전 2:12).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사도들은 '주 예수께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살전 3:13) 그들을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기를 기도한다.
이 종말론적 신앙은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살전 4:6)에서 극적인 흥분을 가지게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지만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림에 대한 소망은 하나님의 심판 자리가 오히려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복된 자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주님의 강림을 간절히 소망하는 열심히 지나쳐 종말론적 흥분이라고 하는 부작용(살전 4:9-12)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어느 누구도 그 전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염려가 번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 문제, 즉 죽은 성도들과 주님의 재림과의 문제를 다룬다(살전 4:13-18).
반면에 또 다른 기류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에 대한 의문과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날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증폭되고 있었다. 죽기 전에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소망이 현실적으로 무산된 상황에서 그들에게는 이 문제가 또 다시 심각한 주제로 떠올랐음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때와 기한은 알 수 없지만 늦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신과 성도들이 신앙하는 부활하신 그분이 곧 심판주로 오신다는 소망을 고취시기며 깨어 근신해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살전 5:1-11). 이 두 주제들은 성도들이 모두 주님과 함께 할 것이라는 약속(살전 4:17; 5:10)으로 결론을 맺으며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세워주라는 권고(살전 4:18; 5:11)로 끝맺는다.

 

2. '죽은 자들'에 대한 바울의 이해

 

바울은 주 예수께서 언젠가 그의 백성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가르쳤다. 때문에 성도들은 주님께서 언제라도 다시 오실 수 있으며 그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께서 빨리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일자리를 포기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사별을 경험하리라고는 미쳐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람들은 주께서 오시기 전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의아해 했으며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했음이 분명하다.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자들이 과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은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인가? 그들이 재림의 복에 과연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슬픔에 잠기기도 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내세관에 있어서 불확실한 내용이 있음을 암시한다(Grant Osborne).
먼저 바울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로 죽은 자와 관련된 내세의 소망을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라는 문장은 곡언법(litotes, 曲言法)으로 억제된 표현을 통해 오히려 더 강한 인상을 주는 수사법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우리는 너희가 확실히 이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다'는 의미가 된다(Beverly R. Gaventa). 이러한 복잡한 문장을 도입하는 것은 이 내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다루어진 주제, 즉 주의 강림의 날에 나타날 죽은 신자의 기업에 대한 내용은 사도들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충분하게 교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많아야 3개월 정도밖에 체류할 수 없었던 사도들은 이 주제에 대해 가르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데살로니가에서 전파된 사도들의 메시지는 주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는 말로 압축되었던 것처럼, 재림과 그 이후에 대한 가르침에는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는 자들'(          )이라는 완곡한 표현은 흔히 죽은 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교도들은 죽음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잠으로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이 단어가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거나 죽음 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반면 성경에서는 죽은 자를 잠잔다고 말할 때 잠자고 곧 깨어난다는 부활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왕상 2:10).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본문에서는 이 두 개의 개념을 정확하게 구별하여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른 이들'(         )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살전 4:5)을 지칭하는 말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혹은 성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 즉 '그 나머지 인류'를 가리킨다. 이들에게는 부활 신앙이 없었다(김세윤).
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 앞에서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 반면에 바울은 성도들은 그들과 다른 무리임을 비교함으로써 성도들이 가진 소망은 부활의 소망임을 강조함으로써 '그 나머지 인류'들처럼 죽음 앞에서 슬퍼할 이유가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3. 부활의 특징과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

 

성도들의 부활 신앙과 부활에 대한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이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이 말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대해 보증하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들을 일으키실 미래에 대해 언약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을 극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곧 신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잠잔다'(         )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반면 어느 신약의 저자도 예수의 죽음을 가리켜 '잠잔다'는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다 되시지만(고전 15:20) 예수께서 친히 잠드셨다는 단어는 신약에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부활로 성취된 하나님의 이적을 가리킴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다시 사심'은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 되었다. 반면에 성도들이 부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때문에 성도들은 죽음은 죽음에 대한 기독교의 새로운 관점에서 '잠자고 있다'는 말로 묘사될 수 있었다(F. F. Bruce).
'잠자고 있다'는 단어가 성도들에게는 부활 소망을 담고 있는 반면에 '그 나머지 인류들'에게 있어 이 말은 소망을 담을 수 없는 단어라는 점에서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그 나머지 인류에게 소망이 없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당시 플라톤을 비롯해 그들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이 세상의 물질의 세계와 시간의 세계를 떠나서 이데아의 세계 곧 영원의 세계로 복귀한다고 보았다. 또한 신비 종교들 역시 자연신과 연합해서 삶과 죽음을 반복하더라고 결국 소생한다는 소망을 갖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비적인 종교인들도 나름대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과 신비 종교에도 불구하고 '그 나머지 인류들'에게는 죽음을 언제나 삶의 끝으로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조차도 죽음을 소망이 없는 상태로 여기고 있었다.

이처럼 자기들 나름대로 소망이 있다고 하는 플라톤 학파나 신비 종교 그리고 유대교조차도 참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그들이 슬퍼하는 것은 단순히 이별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적인 슬픔이었다(김세윤).
반면에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 일부도 죽음 앞에서 이러한 이교적인 상실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서 주를 영접해야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죽은 후에 부활되어 나중에 주의 재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바울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함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잠자는 자들'도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로 번역된다. 이 문장에서 하나님은 주체가 되시며 예수라는 대리자를 통해 역사하실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문장은 바울이 하나님에게 우선 순위를 두면서 동시에 예수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진다(Beverly R. Gaventa).

이 사상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례의 의미 속에 포함된 부활 사상과 더불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고후 4:14)에서도 확인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백성이 누리는 부활은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예수는 자는 자들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는 일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가 되신다. 아울러 성도들이 죽었을 때 그들은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와 하나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고전 15:18)이라고 부르게 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죽은 자들에게 임하는 부활의 특징을 제시함으로써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고 있다. 그것은 재림 때에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나 이미 죽은 자들에게 결코 아무런 차별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엄히 말한다'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본문의 '주의 말씀'(             )은 '파루시아'와 '부활'에 관한 역사적 예수의 말씀들을 보존하고 있는 예루살렘 전승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높다(Jhon Stott).

이 전승에 기초한 가르침에 따르면 죽은 성도들이나 살아 있는 성도들이나 부활에 있어서 아무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가장 절대적인 공평함을 보이실 것이다.
특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살아 있는 성도들과 다시 연합될 것이기 때문에 분리될 가능성은 없다. 이때 죽음은 어떤 성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 함께 누리는 일에 있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롬 8:35-39).

 

4. 주의 강림과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성도들

 

바울은 주께서 강림하시는 때에 대한 구체적인 현상들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이 휴거하게 될 것을 말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는 표현은 '인자가 강림하리니'(막 13:26; 눅 17:24)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광경은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0-31)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계시록에서 나팔 소리는 세상 권세를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가 물리쳤다는 표시이며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가 임했다는 표시이다. 이때 이 '마지막 나팔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은 잠자는 자들을 모으는 동일한 소집에 대한 다른 표현 양식이다(F. F. Bruce).
그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첫 번째 결과이다. 그후에 살아 남은 자들이 휴거하게 되어 각기 그들의 기업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서 '휴거'(        , rapture)란 말은 '낚아채어져 올라가다'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아직 살아 있는 성도들은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휩쓸려 올라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이 '휴거'라는 단어는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의 폭도들로부터 바울을 구해낸 경우(행 23:10),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와 대화를 나눈 후 빌립을 이끌어 가셨던 경우(행 8:29), 바울이 삼층천에 이끌려 간 경우(고후12:2, 3)에도 사용되었다. 이때 '구름'은 공중으로 옮겨가는 수단이 아니라 신 현현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시하고 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수단이었다(출 19:16; 40:34; 왕상 8:10; 시 97:2)

때문에 부활과 휴거의 순서에는 우선권의 문제가 없다. 결국 그 모든 일들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부활한 성도들과 살아 있어 휴거하는 성도들이 공중에서 서로 연합시키기 위한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 부활과 휴거라는 과정을 거칠 뿐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이미 죽은 성도들과 아직 살아 있는 성도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공중에서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Jhon Stott).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빌 1:23; 고후 5:8).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결론적인 표현은 부활한 성도들과 휴거된 성도들이 주를 영접하기 위해 하늘로 끌어 올려진 후에 영원히 주와 함께 있게 될 것, 즉 종말론적 연합을 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강림하신 주님과 하늘로 올라간 성도들은 다시는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의 강림은 신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연합됨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던 그들이 마침내 그리스도와 영원히 한 몸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의 지체인 신자들이 누리고 있는 최상의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신자의 죽음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잔다'고 묘사하는 바울의 인식이야말로 신자의 죽음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은 기꺼이 죽음을 극복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약속 성취일 뿐 아니라 그의 강림은 신자들과 영원히 한 몸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말 신앙을 우리가 가졌다 한다면 장차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될 신자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보람되며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가름하게 될 것이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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