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목적 -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

호라티우스 보나르

 

 

 자기 자신만큼 많은 착각과 실수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 중 가장 거짓되고 지극히 사악한 것" 마음이며, 더구나 ‘죄의 거짓됨과 부패’는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찾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의 거짓됨과 죄의 거짓됨이 결합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무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죄의 거짓과 부패를 찾으려는 의지조차 없습니다. 그러한 성찰이 가지고 올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사함을 받았다는 의식으로 인하여 이러한 거리낌은 상당 부분 해소되기도 합니다. 빛으로 인해 드러난 부패의 정도가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이상, 적어도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어떤 상황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뿌린 피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번 다시 진노하실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죄 사함 받은 자의 복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적어도 그의 영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거리낌이 없으며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그 일을 뒤로 미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충격과 수치를 안겨 줄 수많은 것들을 빛으로 드러나게 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우리를 정죄에 이르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러한 내적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막강한 죄의 영향력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경고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에 대해 성찰하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에게 이러한 악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 모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매우 피상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으며, 영과 육의 갈등에 대해서도 생각처럼 맹렬하거나 심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많은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죄의 세력에서도 적절한 방식으로 신속하게 벗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면에 잠복해 있는 죄의 깊이에 대해서도 측량해 본 적이 없으며, 자신이 얼마나 가증한 자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천국을 향하여 순탄한 여정을 하는 가운데서 이따금씩 ‘우리의 여정이 왜 옛 성도들과 다를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부패성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죽은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를 기만하기 위하여 죽은 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줄어들었고, 우리의 성품은 훨씬 나아졌으며, 우리의 영혼은 전보다 평온하고 차분해졌고, 우리의 요새는 든든히 서 있으며, 우리는 ‘결코 요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느 정도 자아와 죄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소경입니다. 자신에게 완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찾아온 시련은 마치 먹구름과 같이 우리를 휩쓸고, 우박처럼 휘몰아쳐서 우리를 좌절과 실의에 빠뜨렸습니다. 그러자 마치 외부의 소란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옛사람이 다시 살아나 더욱 사나운 기질을 분출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치 하늘의 사방 바람이 풀려나 우리의 깊은 내면에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요새와 같은 마음에는 불신이 생기고, 영혼 깊은 곳에서는 도처에서 반역이 고개를 들고, 죽은 것처럼 보였던 정욕이 활개를 칩니다.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상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실 때까지 죄의 힘이나 마음속에 있는 악에 대해 무지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그분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네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신 8:2)

 

 하나님은 광야의 시련을 통해 그들을 시험하셨고, 이 시험을 통해 그들이 가진 많은 허물이 드러났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숨은 죄가 수없이 드러난 것입니다. 시련이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시련은 단지 겨울잠을 자고 있던 뱀처럼 인식하지도 느끼지도 못하였던 존재를 노출시켰을 뿐입니다.

 

 계속해서 마음의 깊은 샘이 터지고, 지옥과 같이 검고 더러운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막의 바람 가운데서 이집트의 풍성함을 떠올릴 때 그들에게 반역, 불신, 원망, 무신론, 우상 숭배, 고집, 자만심, 쾌락 추구와 같은 것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내면에 숨어 있는 악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채찍질을 하시면 우리는 곧바로 반기를 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 옛사람이 큰 상처를 받고 즉시 살아나 이전의 힘을 발휘합니다. 자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깨어 일어나자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그 힘에 전율하게 됩니다.

 

 바다가 요동하는 한, 그 물이 진흙과 오물을 늘 솟구쳐 내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사 57:20). 바다가 잔잔할 때에는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하며 청명하고, 푸른 물결만 넘실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소용돌이가 치면서 모든 것이 돌변합니다.

 

 성도의 삶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환난이 폭풍처럼 몰아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악이 살아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온갖 악을 쏟아 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자제력을 잃고 무신론적인 불평과 원망을 쏟아 내면서 그분의 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드러냅니다. 그렇게도 분명한 형태로 매 순간 나타났건만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우리는 그분의 뜻을 좇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토록 심한 징계와 고통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얼마 동안 하나님에 대해 악한 생각만 할 뿐 좋은 생각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평정이 찾아오고 자신의 반역에 대해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근원을 알 수 없는 악의 깊이에 대해 배웁니다. 그리 한편으로는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우리의 죄성에 대해,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에 대해 더욱 깊은 통찰력을 얻습니다. 또한 보혈의 샘을 더욱 귀히 여기며 다시 한 번 보호하심을 얻기 위해 그분의 의에 호소하게 됩니다.

 

 옛 성도들이 시험을 받을 때 일반적인 죄 외에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죄가 드러난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노아가 평생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치스럽고 관능적이며 향락적인 세계에 홀로 남아 그들의 음란하고도 퇴폐적인 삶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환경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 술에 취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용기 있는 신앙의 사람이지만 이집트와 그랄에서 그의 신앙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두려움으로 인하여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롯은 무법으로 가득한 음란한 소돔에 살면서 그들의 가증함으로 인해 의로운 심령에 큰 상처를 받았으나 소돔의 멸망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과 마찬가지로 술과 욕정에 빠져 들었습니다.

 

 욥은 인내의 사람이었지만 고난을 당할 때에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였으며, 모세는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였으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기 입술로 분별없이’ 말하고 말았습니다(시 106:33).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전쟁을 가장 용감하게 수행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피해 가들의 아기스 왕을 찾아갔을 때 그의 용기는 사라지고 대적을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미친 척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왕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심판을 선포하였으며, 하늘을 닫고 여호와의 칼을 휘둘렀으며, 혼자서 수만 명의 군사와 맞선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여인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경건함과 순종으로 빛나는 성품을 지녔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외로 불순종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특심하였으나 나중에는 그분을 정면으로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온유와 사랑의 면에서 주님과 가장 닮은 성품을 지녔으나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사마리아를 태워 버리자고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시험을 통해 드러난 인간, 특별히 성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존 베리지(John Berridge)는 자신에 대해 “오 마음이여 마음이여,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리석고 불합리한 덩어리, 세상에서 가장 헛되고 간사하며 악하고 어리석은 것이 바로 너로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영혼의 깊은 곳을 휘저으면 깊이 숨은 악과 이기심, 자만심과 못된 성품과 세속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집니까?

 

 욥이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순전함과 확신을 견지하면서 인내하였습니까? 그는 계속되는 고통과 시련으로 지쳤지만 절망과 눈물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시련이 그의 자아의 내면 깊은 곳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끔직한 질병이 그를 거름 더미에 앉히고, 친구들이 그를 조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몰아세우자, 그의 신앙과 인내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존재 깊은 곳이 침략을 당하여 시험대 위에 드러나자, 그의 조급함과 불신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날카로운 화살이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을 관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병상에까지 이르러야 했으며, 그 실상이 낱낱이 빛으로 드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서 드러난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악하고도 흔한 죄가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사실 믿지 않던 시절에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악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강력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선하게 대하셨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그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신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랑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지금까지의 불신앙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는 하나님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요.”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징계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우리의 옛 생각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다루시는지 궁금해 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해 의심합니다. 또한 그분의 은혜를 붙들고 있는 손이 느슨해지고 때로는 완전히 놓아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치 시들어 버린 박 넝쿨을 들고 있는 요나와 같습니다. 죽기까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그분의 은혜로우신 손길로부터 죄 사람을 받을 때의 그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은 배신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의도가 없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우리를 타이르시면서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라고 물으십니다(요나 4:9).

 이 질문이 우리의 입을 영원히 닫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여러분의 죄를 던져 버리셨는데도 어떻게 화를 내거나 낙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악한 세상과 앞으로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반석 아래 숨어 있으면서도 화를 냅니까? 여러분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왕국을 영원한 상속으로 받았는데도 화를 냅니까? 밤이 깊고 새 날이 가까워 멀리 동녘 하늘에 노을이 지고 샛별이 여명을 밝힐 준비를 하는데도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습니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 호라티우스 보나르(지평서원)
고난의 목적-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99~108p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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