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13-16절이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일전에 본 신문기사에 이러한 표현이 있어서 씁쓸했다....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오히려 어둡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부정한 일을 해서 교회가 이 사회의 지탄을 받을 때 역공격을 받는 마태복음의 말씀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빛과 소금의 의미는 빛과 같이 세상을 밝히고 소금과 같이 세상의 부패를 

막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세상을 상대로 행하여야 하는 기독교의 역할과 기능"이라는 명제를 만든다.

세상을 정화시키고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기독교가 가져야 할 세상을 향한 책임이라는 점을 강조한 구절로써 우리는 이 마태복음을 이해한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사람들 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하며 세상의 정화에 힘써야 함은 틀림없다 해도 성경이 말하는 빛과 소금의 비유는 그 강조점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성경을 말한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라고 또 말한다.


소금의 맛이란 말 그대로 "짠맛"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성도)는 짠맛을 내는 기능을 한다는 말이다. 

짜다고 하는 기독교의 독특한 맛을 내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다 더 모양새가 있는 소금의 방부제 효과를 첨가하여 

세상의 부패를 막는 기능이란 견해를 만들었다. 


결국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막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사명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금의 부패방지기능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전무하다. 

그것은 우리의 소금에 대한 경험일 뿐이다. 


성경은 "소금은 짠맛을 내고 있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계속보자...“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므로 쓸모없이 버려져 밟히게 되는 이유는 무언가? 

말씀대로 인용하면 "짠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부패방지기능을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소금을 부패방지기능으로 보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좋아한다. 특히 교회는 더욱 그러하다. 


주님이 주시는 사명감이라 말들을 하지만 

우리는 그 사명감이 우리의 성취욕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 못한다. 


기독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결단으로 세워 진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패와 싸워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소금이 아니라 

그저 소금의 기본특성인 짠맛을 내며 세상앞에 서 있는 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빛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사명감에 불타서 이 구절을 본다면 "어두운 이 세상을 빛으로 밝게 비추리라!" 라는 구호를 만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무슨 말인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라는 사명을 주는 말씀인가? 

사실 필자도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빛을 발하여 세상을 비추인다는 내용인가?^^ 

말씀을 그대로 읽어보라... 너무 쉬운 내용이다. 

"산 아래 동네에서 볼 때 산 윗동네가 보이는 이유는 그 윗동네가 빛을 소유했으므로 

숨기우지 못하고 잘 보인다"는 뜻이다.^^  


어두운 밤이 되어도 동네가 있다면 불을 켤 것이고 자연히 그 동네는 그 빛으로 인하여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길을 잃은 나그네라도 그 불빛을 보고 "와 저기 인가가 있구나!"

하고 안심하게 된다. 교회가 이 세상속에서 이러한 존재인 것이다. 

어두운 세상속에서 방황하는 자들이 볼 수 있게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것이 교회이다. 

빛을 세상을 향해서 강렬하게 내 뿜으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불을 켜서 아랫쪽에 두지 않고 윗쪽에 두는 이유는 집안 사람에게 모두 비취기 위함이란 말씀이다. 집안사람에게 빛을 비추는 이유가 빛을 비추어서 그 사람을 밝게 변화시키는 역할로써의 빛이 

아니라 빛은 사람 앞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는 "빛의 속성'을 말 한 것이다. 


'비춘다"는 표현은 사실 "빛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는 빛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 빛을 봄으로 교회가 세상에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짠맛을 내는 독특한 존재인 소금과 같은 존재이고... 

세상을 향해 밝게 빛나고 있는 빛과 같은 존재이다. 


또 한가지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 할 부분은... 

이 소금과 빛의 비유가 "심령이 가난한자는..."으로 시작하는 "팔복"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팔복은 "천국백성의 상태"를 예수께서 가르치셨으므로 그 다음에 나오는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렇다면 "천국백성은 어떠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극히 타당하다 하겠다. 


그렇게 본다면 소금과 빛의 비유는 사명을 가지고 어떠한 일을 하는 역할과 기능의 말씀이 아니라 팔복에 연관성이 있는 천국백성의 상태로써의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말씀임이 자명하다. 


다시말해 어떤 역할을 해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드러나는 업적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팔복을 소유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에 촛점이 있다 하겠다. 


우리는 말씀대로 짠맛을 내는 소금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독특한 소금만이 가지고 있는 짠맛이란 무얼까? 

다시말해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맛은 무얼까? 두말할 것 없이 "복음"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우리만의 이 독특한 복음을 부끄러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할 교회가 사람의 마음을 먼저 위로 한답시고 교인들의 사업번창에 

관심을 보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처세술로 상담하는 기관이 되어 버렸다. 

결국 세상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전혀 독특하지도 짜지도 않은 맛을 가진 소금으로 

짠맛을 내려 하고 있다. 


교회가 짠맛을 내려면 인간의 죄를 들추어 내야 하는데 사람들의 기호를 생각해서 교회는 

죄를 선포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를 연발하며 귀에 듣기 좋은 

"단맛"을 내기에 급급하다. 


성경은 무어라 경고하는가?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의 맛을 잃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죄를 씻는 능력...구원을 주는 능력이 상실된 교회" 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그러한 교회는 어찌 되는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전에 소개한 "달란트의 비유" 와 마찬가지로 "천국백성의 비유"이다. 


달란트를 땅에 묻은 사람이 밖으로 쫒겨나가 슬피울며 이를 가는 것이나 짠 맛을 내지 못한 소금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것이나 똑같이 천국의 대열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게 존재를 드러내는 빛은 무엇인가? 

빛은 요한복음 서두에서도  밝히 말했듯이 예수님을 말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였을 때 우리는 빛되신 예수님의 역할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죄를 사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독특한 짠맛인 소금의 역할이 바로 예수님의 역할이 아닌가! 

결국 빛의 역할이란 그런 의미에서 소금의 역할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사명감에만 불타있는 듯하다.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이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불쌍한 자들을 돕고 의료봉사를 하고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고...하는 선한 일이나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근본적인 뜻을 삼으면 안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유일 무이한 기관이며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더욱 더 말씀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을 삶으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존재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출처: 물과피와성령/es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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