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대한 오해 5 -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이고, 다른 성도가 말한 방언은 이교도적인 주문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삶의 목표가 더 이상 구원 받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초보적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우리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는 우리가 열매 맺어(성령의 열매 -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고, 교회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입니다.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은사가 사용 되어져야합니다.

만약 방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 되어진다면...

교회는 거룩해집니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에 힘있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주는 가짜 방언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들 중에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그것들이 모두 사용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현재 성도들이 하는 방언은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퍼져 나가면서 성도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보편화 된다면 한국 교회에서 방언은 사라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심히 우려되어 지금의 방언은 성령님의 은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글을 또 씁니다.


오늘은 그 다섯번째로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이고, 다른 성도가 말한 방언은 이교도적인 주문 같은 것이다.’ 라는 주장을 성경 말씀을 통해 반박하겠습니다.


첫째 !

바울의 방언과 다른 성도의 방언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전 14장에서 방언이라 번역된 모든 단어는 헬라어(글롯사)가 사용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방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한 방언 사이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2절 단수, 4절 단수, 5절 복수, 6절 복수, 13절 복수, 14절 단수, 18절 복수, 19절 단수, 14:22절 복수, 23절 복수, 26절 단수, 27절 단수

모두 단수냐, 복수냐의 차이만 있습니다.

원어 성경에서 외국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고 구별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둘째 !

바울이 한 외국어 방언은 복수로 기록 되어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한 방언은 단수로 기록 되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14절에서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단수입니다.

만약 바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린다거나 이방 종교행위를 한다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스스로 말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방언 할 때 자신도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어가 아닙니다.


세째!

예배 순서를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은 이방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그 때 고린도 교회에는 예배 순서에 방언이 있었습니다.

예배 순서는 찬송(찬송시), 설교(말씀), 계시, 방언, 예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의 수를 제한합니다.

두 사람, 많아도 세 사람을 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통역이 있을 경우만 하라는 것 입니다.

통역이 없으면 뭔 소린지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경우도 둘이나 세 명만 하라고 명령합니다.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 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6-28)


네째!

통역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방 종교에서 온 것이 아님을 강하게 증명합니다.

방언이 학습 없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통역 역시 학습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이방 종교의 주문 같은것은 통역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바울은 방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보다 더 많이 했습니다.

방언 많이 말하는 것이 바울의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많다는 것은 종류를 말하지 않고 양을 말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방언과 자신의 방언을 동격으로 말했습니다.

즉 둘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고 양적인 차이만 있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예배의 순서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방언만 통역 하라고 합니다.

은사로 주어진 방언과 은사로서 주어진 통역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론!

바울의 방언이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방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통역 없이는 이해할 수없는 소리였습니다.

둘 다 외국어가 아니었고, 성령님이 주신 은사였습니다.


예배 순서를 보면 현재 한국 교회와 많이 다릅니다.

차이점은 계시, 방언, 예언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타락하지 않고 살아납니다.


바울이 예언을 방언보다 더 많이 하라고 명령했던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언은 하지 않으려 하고 방언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모임) 때 방언은 최대 세 명까지만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저는 방언 은사가 전부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구원의 확증, 성화의 증거도 아닙니다.

무시할 수없는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말할 뿐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환난날의 도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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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성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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