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방대합니다. 초대교회를 넘어서서 플라톤까지 올라가는 아주 방대한 내용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문제가 한국교회에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분별하여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목사들과 교수들이 나서서 신비주의를 현실의 대안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그러한 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로 들었던 것이 관상기도로 영성훈련에서 많이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방대한 내용이며 기도문제와 맞물려 있고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배경적으로 전체적인 신비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읽었던 말씀은 바로 신비주의적인 질문입니다. 빌립이 했던 질문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오늘 신비주의자들이 다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보고 대면하여 그와 합일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너의 추구가 참 갸륵하구나.’ 하고 예수님이 칭찬해주는 것이 아니라 혼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입니다. 빌립이 시도한 신비주의적인 추구,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신비주의인가? 사실 기독교 안에 신비주의적인 모습과 내용이 두드러졌던 시대가 있긴 했지만 보편적으로 거의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안에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마도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이 유명목사님들에 통해서 권장되고 이곳저곳에서 관상기도를 실천하는 교회, 영성 훈련원들이 생겨나고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치고 장신대에서는 입학했을 때 모두 기도원에 가서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심리학적인 기독교의 양태를 띤 것은 데이비드 시멘스 같은 사람 책이 1980년에 번역되고 두란노서원에서 훈련시키고 상처치유 훈련, 상담학, 양육 받은 사람이 개교회로 돌아가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강조하면서 저변 확대 보편화된 것이 한 세대가 흘렀습니다. 관상기도는 신학생들과 교수들에 의해서 책에 의해서 나오고 있으니 30년 후에는 보편화될 문제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영성이라는 이름아래서 신비주의가 90년대부터 특별히 대두되어 지금까지 온 것을 보게 됩니다. 배우는 신학생들과 목사들이 교회에서 분명히 파급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대중화되는 것은 10-20년이면 되리라고 봅니다.

 

항상 유학 다녀온 사람들, 영향 받은 사람들에 의해 책이 추천되거나 번역되고 그 밑에서 영향을 받는 신학생들, 책에 영향 받는 사람들, 대중화 코스를 받는데 지금 우리는 그 코스의 중반기로 신비주의가 중간 단계에 와 있다고 봐집니다.     

 

한국교회는 관상기도를 새로운 것처럼 말하면서 신비주의를 크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합일하게 되는 경험, 황홀경에 빠지면서 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신비주의란 말을 잘 안 쓰고 영성이란 말을 씁니다. 시중에 가면 영성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본래 이 두말은 동의어로 씁니다. 17C 프랑스에서 특히 장르 귀용부인과 관련된 상류계층에서부터 이 말이 두 가지를 거의 동의어처럼 썼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신비주의와 영성이란 말을 신비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내적 지식을 뜻하는 것으로 이 단어를 썼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 신비주의란 말이 부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다 보니까 그것을 기피하고 영성이란 말을 주로 쓰는 것입니다.

 

요즘 10년 사이에 한국교회에 갑자기 영성이란 단어가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경계심이나 거부감을 영성이란 단어 때문에 덜 갖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말하는 이 정도가 최소의 내용인데 정말로 알아야 됩니다. 어떤 신학생들이 저에게 향후 10-20년 한국교회 추세가 어떻게 흘러갈 것이냐의 질문에 신비주의가 흘러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빠져 들어갈 것인데 우리가 최소의 가닥을 잡아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 영성 작가들로 알려진 리차드 포스터,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게리 토마스, 달라스 윌라드, 제임스 휴스톤 , 존 윈버 이런 사람들의 책들이 번역되고 과거 영성에 뿌리는 둔 릭 워렌이 쓴 글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안 읽으면 간첩 취급받습니다. 대중들이 그런 것을 접하므로 인해서 영성, 신비주의를 어느새 우리들에게 친숙하고 쉽게 수용해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신비주의, 영성을 추구하는 일이 불 일 듯이 일어나고 있는가? 영성에 대한 간단한 글을 쓴 김상재라는 사람이 한 말을 인용하면 ‘과거의 전통적인 언어와 메시지와 제도적인 틀과 신앙적인 사고와 예배 방식과 사유로서는 오늘날의 다양한 갈등과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하고 섬겨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계속 전해오는 메시지와 제도와 예배 방식을 통해서는 현대인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추세를 아주 고무적인 현상으로 말했습니다. 장신대의 유해룡 교수는 관상기도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도생활에 대한 열망은 전과 다름없는데 기도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족도의 충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성훈련과 관상기도를 크게 보급하고 있는 최일도 목사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주력했었는데 이제 성도 개개인의 내적치유와 내면적인 성숙에 관심을 가지면서 카톨릭교회에서 이야기 되어 왔던 영성 수련과 관상기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신대의 권명수 교수는 관상기도를 더 많이, 더 자주 실천하면 할수록 한국의 기독교인이 점점 성숙해지고 교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모두 요즘의 신비주의적인 추세의 원인을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실과 상태 때문이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상태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런 것을 이야기 했을 때 현재 문제에 대해 자각을 갖는 다거나 각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긍정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 신비주의가 크게 일어났던 것처럼 그런 취지에서 이야기한다면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세 신비주의가 크게 대두되었던 것도 당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반발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이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근본적인 원인입니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리보다 체험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과 무르익은 시대 분위기 때문이라고 저는 진단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말씀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 대신에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대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세계적인 추세이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중심에는 북미가 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영성가들이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바짝 그 뒤를 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1900년에 죽은 반기독교적인 철학자 니체가 이런 서구 교회의 모습을, 현재 야기되는 이런 것을 예견했습니다. 마이크로 로버튼이나 데이빗 윌스가 그대로 인용하는데 ‘교리적인 기독교는 종말을 고했다고 탄식하면서 서구는 이제 새로운 불교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이 죽게 되면 신들이 비같이 내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놀라운 예견을 했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말한 하나님의 죽음은 서구 사회는 모든 진지한 신학적인 자각이 끝났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의식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을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결과를 예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죽고 나니 교회가 교리를 내어 던지고 나니 신들이 비같이 내리게 되고 허무주의가 활발하게 활동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불교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여러 神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일이 뒤에서 생겼습니다. 기독교는 서서히 내면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불교의 양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교리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그것을 말해도 죽은 교리가 되다 보니까 뒤따르는 것은 새로운 불교가 교회 안에 태동되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실재로 오늘날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힌두교와 불교와 같은 명상, 물질주의, 교회 안에 심리학, 실용주의, 실존주의, 종교적인 감정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감정주의, 소비자 중심적인 마케팅 원리나 적극적인 사고방식, 번성 신학, 은사주의 이 모든 것을 뒤섞는 뉴에이지 사상, 종교 다원주의 정말로 모든 것이 기독교 안으로 다 들어왔습니다. 나만의 신, 내면의 영들을 추구하는 현상이 기독교 안에 대세처럼 기독교라는 이름아래서 보편화되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정말로 기독교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전통적으로 믿어온 하나님이 죽고 교리를 버리게 되자 니체 말대로 신들이 비처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니체가 말해서가 아니고 기독교 신앙의 본성상 그렇게 됩니다. 교회가 교리를 버리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으면 다른 신들로 채워지거나 하나님을 바꾸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톤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면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이나 다 믿게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 명쾌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현재의 추세를 잘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들이 신비주의적인 추구를 하는 것은 단순한 현상과 어떤 반동을 넘어서서 근본적인 문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 교리를 뒤로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원인을 덧붙이면 사람을 위한 신학과 가르침이 한몫했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로 호튼이라는 사람은 현재 미국교회가 다시 영지주의로 돌아가서 감정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고 뉴에이지 사상에 물들게 된 그 최초의 원인을 하나님 주권과 은혜의 교리를 거부한 데서 찾고 있습니다. 마이크로 호튼이 쓴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미국제 영성에 속지마라」제가 여기서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차원에서 썼기 때문에 읽어보시면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통찰력이 있습니다. 그 뿌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교리를 거부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국 것을 다 도입하고 있는데 대중적인 복음들이 그런 뿌리 속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미국이 정착한 초기 청교도들이 붙들었던 하나님 주권과 그의 은혜에 대한 말씀으로 균형을 이룬 그들에게서 CORAMDEO 곧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쳤던 그들의 모습에서 이탈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사람을 위한 신학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에드워즈 전에 있었던 현상으로 반언약제가 등장을 하고 사람을 위한 신학, 알미니안주의가 만연하게 되면서 지금의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가 다시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원죄와 하나님 주권과 칭의 교리, 특별히 조지 휫필드는 선택의 교리를 영적 각성을 외치는데 메시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각성하게 하면서 그런 교리에 의해서 영혼들이 회복하고 각성된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에서 메시지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한 1차 대각성 운동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강조점에 두었는데 피니를 중심으로 한 2차 대각성 때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메시지가 주류를 이루고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신학과 교리에서 감정으로 변화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으로 계속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원죄와 칭의 교리와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인 삶이 무너지자 알미니안 신학과 함께 개인적이고 감정적주의적인 신앙이 자연스럽게 자리 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피니 이래로 교회는 사람의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서 모든 말씀을 통해서 사람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데 교회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두는 현상이 교회에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마침내 내면의 빛을 찾고 자기의 직관적인 감정을 중시하며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세계를 초월해서 영의 원천에 도달해 가지고 힘을 공급받으려고 하는 더 나아가서 신과 합일하려는 온갖 신비주의적인 시도와 은사 운동과 대중적인 복음주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신비주의적인 추구는 간단히 말해서 객관적인 진리를 뒤로 하고 인간 중심의 신앙과 감정에 의한 신앙으로 변화된 것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호튼이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무한하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청교도적인 신앙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죄와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약화시킨 알미니안주의에로 다시 성경적 신앙을 단순한 인간의 감정 순으로 약화시키는 지경으로 변해왔다.” 얼마나 신학이 무서운지 모릅니다. 신학이 사람 중심으로 바뀌니까 물꼬를 확 터버린 것입니다.

 

댐을 하나 열어준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참고로 우리들이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독일 경건주의자들도 교회 역사 속에서 개인주의적인 감정적 기독교로 바뀌게 되는데 한 몫을 하게 됩니다.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 이성중심의 반동으로 개인주의적인 체험과 감정을 중시하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우리가 그들이 상당히 경건한 모범으로 알지만(진젠도르프 백작의 그룹들) 이런 물꼬를 텄습니다. 한 몫을 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정통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을 중시했던 그런 현상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을 무시하고 감정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다각적으로 교회사에서 물꼬를 터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이고 감정주의적인 신앙은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판을, 배경을 역사 속에서 설정해 주었습니다. 대륙은 대륙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오늘날 기독교가 개인감정을 중시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합일하려는 신비주의로 나가게 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상 그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적을 보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곧 악하고 불충실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핵심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충실한 세대가 핵심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리를 뒤로 하고 개인감정을 중시하며 하나님과 합일하려고 했던 신비주의가 가졌던 모습은 흥미롭게도 기독교 역사상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대중들에게 통용되지 않았던 시대, 신앙생활을 개인의 체험에 크게 의존했던 중세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 신비주의가 가장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 그런 신비주의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아주 기이한 현상입니다. 지금 미국에도 영성운동이 굉장히 일고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넘어오고 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데 지금 이것이 기이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종교적인 형태는, 교회는 나오는데, 교회라는 곳은 다니는데 기독교라는 껍데기는 가지고 있는데 마치 그들의 신앙의 행태와 중심성은 악하고 불충실한 세대에 있는 현상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유념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이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세 신비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동양 정통의 명상수행을 본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의지적 노력을 중시한 인본주의도 아니라고 그들이 말합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을 하기 위함이고 그것을 위해 옛날 신비주의자들이 했던 방식 중에 긍정적인 것들을 재창조하여 사용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구색을 갖춘 말에 불과합니다. 물론 관상기도를 몰라도 우리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진실하게 나가기 위해서 관상기도에 해당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무리 바뀌어도 핵심적으로 붙들고 있는 그 중심, 그들이 의존하는 것,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개인감정이요 내면의 무엇입니다. 이것 때문에 결정적으로 얼굴 바꾸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비주의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신비주의는 무엇이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는가? 성경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는 공식적으로 사람들이 사용하고 인정하는 것만도 약 30가지나 됩니다. 신비주의가 주관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도 다양합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간단한 정의를 먼저 말하면 하나님과 개인적인 연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면 우리는 기독교와 똑같이 생각하는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맥아더 목사의 정의를 덧붙이면 ‘신비주의란 역사적 사실이나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보다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직관이나 경험에 의해 하나님, 또는 궁극적인 실재에 관한 지식을 직접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목적하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체험과 그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성으로 제대로 포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로서 제대로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초월적인 지식을 얻었다는 것이 모두 자신들의 감각, 감정에 의한 것이어서 각각 설명이 다릅니다. 그들은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깨닫고 경험한 것을 신비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19C 탁월한 신학자 B.B. 와필드가 그것은 사실 신비주의자들이 말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언을 고집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끝없이 깊은 침묵과 묵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 감각을 발견하려고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이 심연에 접해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신성시 합니다. 그런데 그 막연한 감정과 두려움을 신성시하다보니 그때 보거나 경험한 것을 신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힌두교의 브라마가 될 수도 있고 제우스가 될 수 있고 알라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굳이 설명하자면 성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종교의 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감정에 근거한 신비주의적인 하나님과의 합일은 이런 면에서 너무 위험하고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입니다. 따라서 권위의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해 온 신비주의는 계시가 없는 정신의 종교요, 따라서 권위가 없는 종교입니다. 여러분 모든 종교는 두 개로 나눕니다. 계시의 종교와 비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 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이고 비계시의 종교는 사람들의 사상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도 같은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비주의가 다 그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가 없는 그저 정신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권위가 없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을 말하면서 정신의 종교요, 감정과 이 감각의 종교 방식을 따르는 것은 기독교가 가진 고유하고 특별한 권위를 스스로 내던지는 것입니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종교세계나 어떤 신앙의 세계에서 고유한, 유일한 특성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내 던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들어온 신비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인 성경, 곧 기록된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를 무시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자신의 종교적 감정과 체험으로 대치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해 나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내부, 종교적인 감정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내부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잘 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좋은 줄만 압니다. 성경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모든 종교적인 체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체험을 인도받고 지시받으며 정정함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찰스 하지는 이런 신비체험이 성령의 사역에 따른 것인지 인간 스스로 노력에 의한 것인지 악한 영의 역사에 따른 것인지 구분하는 방법을 말했습니다. 첫째, 성경의 충분성을 저해하고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가? 이것을 해 본다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자신의 직관이나 명상에 더 의존하는가?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와 법령과 학문을 무시하고 말씀보다는 성령의 직접적인 내적 조명 또는 내적인 빛을 더 중시하는가? 이것도 유사한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퀘이커교도들이 주로 했던 것입니다. 죄와 회개를 무시하고 신비적이고 황홀한 체험만을 추구하는가? 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일 신비주의자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범한 오류입니다.

또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범신론적인 주장을 하거나 하나님이 아닌 것에 수동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가? 이것이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것과 정적주의자들, 침묵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우리나라에 방문했던 틱카탄 워킹 메디테이션 하는 사람들, 틱란탄이라든가 이런 사람들도 침묵주의 정적주의를 추구합니다.

 

불교에도 이런 신비주의 요소는 있습니다.

게다가 신비주의자들이 찾는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입니다.

 

벌거벗은 하나님,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동시에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감추인 하나님 그것이 아닙니다.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구도자적인 하나님을 추구한 나머지, 기독교는 구도자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릭 워렌 같은 사람에 의해서 구도자를 위한 예배라고 하면서 구도자를 위한 기독교를 오픈하는 것은 기독교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복음의 구원입니다. 구도적인 마인드가 있으면 다 오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을 기독교라는 사상을 집어넣어서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값싼 복음을 유포하는 것입니다. 구도자적인 하나님을 이들은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부패와 죄를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론적으로 말하면 회개와 믿음, 칭의를 말하지 않고 성화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르는 것.

 

신비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 가운데 어떤 긍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손 치더라도 기독교 안에 어떤 신비자들에게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초와 표준에서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보다 자신들의 감정에 근거한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타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비주의자들은 계시를 뒤로 하고 내적인 빛, 내적인 말씀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난 하나님을 찾고자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번에 글을 실은 최일도 목사의 관상기도에 대한 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박동을 따라서 예수란 단어를 넣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집중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며 단어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예수를 이야기하지만 실재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에는 예수가 없습니다. 직접 벌거벗은 하나님,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추구입니다. 이번에 글 속에서 내적인 빛, 내적인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것이 같은 맥락입니다. 현대 개신교의 작가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 이런 것을 추구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리차드 포스터입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합일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 단계를 밟는가?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갖는 여정은 3단계, 좀 더 상세히 말하면 5단계를 말합니다.

 

먼저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5단계를 간단히 말하면 각성, 정화, 조명, 영혼의 어두운 밤, 하나님과의 연합(합일)입니다.

 

여기서 존 웨슬리는 신비주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서 이 중에서 4번째 영혼의 어두운 밤만 빼고 4가지를 수용하고 체계화하려고 했습니다. 3단계를 말하는 사람들은 정화, 조명,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합니다.

 

저는 3단계만 간단히 말하고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정화라는 것은 깨끗케 하는 단계로서 자아를 살피고 회개하는 것에서 시작해 가지고 거룩한 삶으로 나가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서 사람들은 물질과 육적 욕망을 포함해서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죄를 죽이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행, 금식 이런 것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 조명은 내적인 소리와 통찰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참된 영적 진리를 알고자 애를 쓰고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초점을 맞추고 영혼의 내면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상상하려고 힘쓰면서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이런 모든 추구와 알고자 하는 노력도 이성을 사용하기보다 직관적인 앎을 추구합니다. 이성이란 것을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최종적인 결정은 직관적인 앎 이 감정에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깊은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는 바로 이 조명 단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조명 단계서부터 하나님과 합일한다고 하면서 황홀경으로 들어간다고 하면서 이 단계를 중시여깁니다. 이 조명에 대한 이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신비주의자 로욜라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주장했는데 그것을 오늘날 리차드 포스터가 많이 차용해서 책을 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은 앞의 것을 실현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과 합일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모든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몇몇 사람들은 지복의 비전이다. 곧 아름다우심과 엄위로우심과 영광과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으로 말을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합일하게 되면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적인 ecstacy 황홀경, 무아경을 경험하게 되고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이 신에게 전가되어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가진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세 신비자들은 바로 이런 경험을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용어로 특히 하나님과의 혼인 관계 속에서의 연합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중세 사람들이 아가서를 많이 강론했습니다. 술라미 여인과의 약간 그런 내용들을 이런 식으로 강의를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신비자들은 최소한 이런 정화, 조명, 연합을 통해 또는 하나님과 연합 전에 영혼전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것은 십자가 요한이라는 사람이 특히 많이 강조했는데 영혼이 흑암에 압도당하는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때 영혼 가운데 어떤 하나님의 탄생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종의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어떤 신적인 무엇이 자신까지 잊게 된다. 신적인 자신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이 신적인 것과 접촉하게 되는 동등한 무엇으로까지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이들은 죄와 은혜, 하나님의 성육신 같은 진리를 다 뒤로 해버립니다. 아무런 중개 없이 직접 하나님과 합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이성적인 사고과정이나 정상적인 자각 경험, 일종의 이런 지각 활동들, 이런 경험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방해거리라고 여깁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조명과 하나님과 연합의 과정 속에서든, 하나님과 관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든 그 과정에서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척이나 사랑을 이 과정에서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의존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이 굉장히 사랑을 강조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지금 나와 있는 영성에 관한 책들을 보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이때 사랑은 신비주의적인 사랑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이 인간의 육체에 갇힌 영혼이 추구하는 사랑, 곧 에로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그렇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사랑을 강조하는 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시간에 이것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신비자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중요시하는 감정, 특히 사랑은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요, 헬라 신비주의자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이런 것을 느낀 것이 바로 하나님을 느낀다고 하면서 다 빠져 들어갑니다. 지금도 영성 훈련하는 사람들이 그거 하면서 관상과정 겪으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하면서 다 빠져 들어갑니다. 끝없이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느낌에 의해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신비주의 또는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이 관상의 모든 과정을 사랑의 과정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 플라톤 철학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철학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인 것 같지만 일단은 아닙니다.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구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이미 그런 영혼의 숭고한 지식으로서 관주된 헬라 철학의 에로스, 사랑 이것이 영지주의적인 부류들의 영향을 받아서 특별한 지식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이 말한 그노시스를 정죄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그노시스는 바로 이거였습니다. 영혼의 숭고한 지식으로서 간주되는 헬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그 에로스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알고 이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노시스, 곧 지식은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 육신에 갇힌 영혼이 추구하는 에로스와 같은 것을 알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우리가 유명한 사랑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랑을 말할 때 헬라 철학자들이 말한 에로스와 구별해서, 또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노시스, 지식과 대비해서 아가페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우린 바울이 왜 고전 13장에서 ‘아가페 사랑은 사라지지 않지만 지식은 폐할 것이다’라고 말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그 지식 이었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 영혼의 숭고한 사랑, 그것을 구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배격하고 정죄한 영지주의자들의 지식, 곧 영혼이 갖는 신비적이고 직접적인 지식이요, 더 높은 지식, 신비적인 직관, 헬라 철학자들이 말한 육체에 갇힌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한 곳으로 나가게 하는 에로스 사랑을 그대로 차용해서 하나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은 뿌리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기독교 양태를 거론하고 예수를 이야기해도 뿌리가 잘못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헬라 신비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에로스는 인간 중심적인 획득적인 사랑이요, 신에게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사랑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바울이 말한 아가페가 아니었습니다. 신비자들은 바로 이런 사랑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중세 신비자들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것을 차용해서 하나님과 연합하려고 하는데 사용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지복의 비전에 이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모든 기독교적인 무리들, 곧 퀘이커교도, 로마 카톨릭교도, 경건주의자, 자유주의자, 은사주의자, 심지어 보수주의자들까지 수용해서 개인적인 내면의 체험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차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분별해야 합니다. 다른 무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자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까지 신비주의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너무 흥미로운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난 복음주의 교회 역사 속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룹이나 탁월한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인 모습을 가졌고 그런 그들의 사상과 글들에 꾸준히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개혁이후에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갖도록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무리들은 제가 조금 거론하겠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후 17세기에 이성을 무시한 개인의 신앙 감정을 중시한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8세기로 넘어와서는 윌리암 로라고 하는 이런 사람들, 윌리암 로는 웨슬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조지 휫필드도 회심하기 전에 그 사람들 책을 읽었습니다.

 

웨슬리가 결국은 윌리암 로에게 나중에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는 진리의 말씀으로 회심을 하고 나서 윌리암 로의 가르침이 잘못 되었다고 해서 편지를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나려고 웨슬리가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비주의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신비주의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신비주의에서 긍정적인 것을 잘 체계화 한 것이다. 복음주의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장점과 신비주의의 장점을 잘 취합한 사람이 존 웨슬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가 그것은 너무 긍정적으로 웨슬리를 본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웨슬리가 주장하는 성화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교리가 바로 신비주의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라가는 교리 완전에 이르는 교리입니다.

 

벗어나지 못합니다. 웨슬리 같은 사람의 영향이 복음주의에 미쳤기 때문에 독일 경건주의나 웨슬리에 의해 영향이 자연스럽게 흡입되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미국의 찰스 피니 이런 사람이 신비주의와 무관하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신학 체계 같은 것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케이직 사경회 그룹들의 성결운동이 신비주의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케이직 그룹은 더 높은 생활 The high of life 더 높은 생활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인 정신을 표방합니다. 더 거룩하고 더 멋진 것은 좋아 보이는데 뿌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서 20세기 초에 케이직 성결운동에 열심이었던 우리나라 여러 사람에 의해 많이 번역되었던 여사 제스판 루이스 1904년  웨일즈 부흥에도 기여했습니다. 그에 영향을 받은 워치만 리의 삼분설 속에서 영에 대한 견해는 신비주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R. A. 토레이 신부 이런 사람들이 다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20세기 중반이후에 가장 크게 개신교회에 열어놓은 사람은 리차드 포스터입니다. 그가 1978년에 출간한 책 번역본으로는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인가 하는 제목입니다.

 

아주 히트를 쳤습니다. 1978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책 중에서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베스트 10에 이 책이 들어갔고 사람들이 성경 외에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무엇을 뽑겠는가에 3번째에 이 책을 집어넣을 정도로 사람들이  1970년 대 이후부터 이 영성을 통해서 무엇인가 대리 만족하는 획기적인 장을 연 것처럼 생각하면서 모두가 여기에 이 책을 통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의 모든 내용은 퀘이커에 내적인 빛을 말하면서 중세 신비주의 사상을 흡수하여서 정리한 것입니다. 로욜라 같은 사람이 많이 기여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내노발의 운동을 하는 대표로서 자기는 신비주의운동이 아니라고 하지만 말로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향을 미치는 사상 글들이 충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실명을 거론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신문에 기재가 되었고 본인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지에 있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님이 최근에 관상기도를 사역자들이나 목사들에게 많이 전하고 긍정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해를 긍정적으로 해서 하고 있을 것이고 그런 요소가 있을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보완하여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있겠으나 내노발의 그룹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다 그런 것을 같이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카톨릭 교회가 그동안 신비주의를 그렇게 대중화하지 않고 있었는데 카톨릭 교회에 신비주의를 대중화하는데 기여를 했던 대표적 사람이 토마스 머튼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사상에 많이 동조해서 신비주의를 개신교 안에 전한 개신교의 토마스 머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 토마스 머튼 책도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이후에 지금까지 리차드 포스터 뒤를 이은 유명한 영성 작가들이 그 역할을 개신교 복음주의 안에 신비주의를 흡수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신비주의 영성을 가지고 글을 써서 신비주의 영향 배후에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리차드 포스터를 위시해서 달라드 윌라드,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브래넌 매닌, 헨리 나우웬, 게리 토마스,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영성에 대해서 동조합니다. 재임스 휴스톤, 릭 워렌, 존 윈버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굉장히 많은 책들이 번역되었는데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읽어도 됩니다. 분별을 하고 읽으세요. 혹시 여러분들이 시간이 저만큼 없어서 배경이 안 될까봐 거론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개신교 안에 신비주의가 자연스럽게 들어오는데 기여를 한 케이스는 개신교 안에서 개신교 출판사들이 이 번역하고 있는 신비주의적인 글과 그 영향을 받아 쓴 옛날 책들의 번역본들입니다. 일반 신자들은 개신교의 출판사에서 출판되니까 문제가 없다고 접하게 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윌리암 로의 책이나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런 책이나 은성 출판사에서 나오는 옛날 신비주의자들의 책들, 쟌느 귀용 부인의 책들, 제스펜 루이스의 책들, 토마스 머튼의 책들 이것이 다 개신교에서 출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것들이 어떤 배경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너무 개신교에서 쉽게 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파상적인 신비적인 영향에 대해서 또 현재 추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이 중요합니다.

 

제가 4가지를 말해야 되는데 일단 3가지를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개혁주의에 있으니까 우리는 무조건 잘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중간중간 성경적인 내용들을 언급했기 때문에 3가지 정도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는 것, 또는 체험하는 것, 추구하는 것을 외적인 권위에 철저하게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셨다 하는 사실들 이런 외적인 권위에 우리의 모든 발견과 체험과 추구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발견하고 체험하고 추구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다시 말해서 나의 주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행하심, 특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들 그런 것들을 더 알고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다는 것에 지금도 계속 놀라고 있습니다.

말씀을 계속 살펴야 하니까 묵상하면서 계속 놀랍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이 율법주의에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구원 그 이후의 삶을 말하면서 왜 그토록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특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신 것을 집요하게 말하는지를 제가 묵상하면서 정말 깊은 감동, 너무 행복한 감동을 흥분하게 되는 그런 감동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그러셔야 됩니다.

 

바울 같이 왜 그렇게 의롭다하신 것에 갈라디아서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지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셨다는 것에 부요함이 과거 한 때, 우리가 과거에 구원받았다는 것이 교리적으로 그것은 과거적인 것이야 하고 우리를 손상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과거를 넘어서서 현재 미래로 계속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은 이런 의롭다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있게 된 이 부요함을 더욱 알고 계속 확인하고 체험하기에도 너무 인생이 짧다라는 이런 이해를 가지고 여러분들 그런 객관적인 진리, 외적인 권위에 더 마음을 쏟으셔야 합니다. 현재 우리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자가 되었는지 어떤 은혜를 누릴 수 있고, 또 누려 마땅한지를 여러분들이 더 알고자 하여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면서 이것의 부요함 때문에 행복한 감동, 그런 것도 경험하게 됩니다. 정말 조금씩 경험 속에서 깨닫고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수많은 것들 제가 의롭다 하심 그 하나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이루신 그 수많은 것들을 머리로 아는 것에서 벗어나서 삶속에서 이루기를 원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요하겠습니까?

 

우리 전 삶을 소진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겨우 조금 알다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적인 권위들을 뒤고 하고 내면의 뭣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그것은 아무리 기독교적인 무엇이라고 한다고 해도 워필드 말대로 훨씬 낮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을 최고로 높은 것으로 여기면서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 외적인 권위, 계시의 내용에 비하면 훨씬 낮은 수준이고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경험에 의한 그런 이해를 가져야 됩니다. 저는 누구보다 못지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시 안에서입니다. 여러분 내면의 무엇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지 말고 외적인 권위에 항상 눈을 고정시키고 특히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무한한 것에 온 마음과 시선을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벗어나면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해도 길을 잃게 됩니다. 아니 기독교가 아닌 곳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워필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비주의 역사는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 사람이 스스로를 하나님과 혼돈 하는 것으로 끝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체스터 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

 

모든 종교들 가운데서 아주 끔찍한 것은 내부에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존스씨가 자기 내부에 있는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존스씨가 존스 자신을 섬긴다는 의미가 됩니다. 차라리 존스로 하여금 내적인 빛보다는 어떤 다른 것, 해나 달을 섬기게 하라 존스로 하여금 내부에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고양이나 악어 또는 거리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어떤 사물을 찾아보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 또는 정체성 의롭게 된 것은 외적인 권위, 내 안에 보아서 내가 살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내 밖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것에 의해서 온 것입니다 여기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선을 내 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박식하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던 바울, 삼 층천에 이끌렸던 경험이 있고 사람들을 살리는 능력을 행했던 바울이 각종 신비적인 체험과 하나님의 은사들로 인해서 날리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했던 말을 유념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유명 구절로 알면 안 됩니다. 이 배경 속에서,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 바울 같은 체험을 한 입장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으로 부족한 듯해서 율법주의적인 무엇에 마음을 빼앗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론적으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을 유념해야 됩니다. 골로새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서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불충분하게 여겨서 골로새서 2장에 기록된 대로 철학과 율법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 등에 유혹받는 것을 보고 바울이 외친 것이 무엇인지를 유념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고 바울이 외쳤습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바울과 다윗의 체험에 대한 묘사들을 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기록한 사람들인데도 놀랍게도 내면의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 밖에서 행하시고 드러내신 객관적인 계시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 선조들이 말한 그 하나님을 믿고자 했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부르짖었고 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의 삶 속에서 바로 그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고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기독교에는 신비스런 체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체험은 오직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고 원한다고 해서 갖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삼 층천에 이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모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 경험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추구하고 경험해야 할 체험은 특별한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고 계시된 하나님을 삶속에서 믿음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약속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너희에게 함께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시면서 말씀하시고 그 다음부터 여호수아가 경험한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해서 요단강을 발로 밟는 것이고 여리고를 도는 것이며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내 삶속에서 같이 계시는구나, 역사하시는구나, 바로 이 하나님이야’ 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하는 것이지 내면을 바라보고 황홀경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모호한 신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런 우리를 계속 어떻게 어떻게 하시겠다 라고 성경에서 말하잖아요? 그것을 믿고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의롭다 하신이가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그대로 우리가 믿고 나아가면서 그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내 어떤 그 문제 앞에서도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나의 삶속에 계셔서 인도하신다는 것,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처럼 나의 삶의 환경에서 인도하신 것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구하고 경험할 하나님 체험은, 보편적인 하나님 체험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어떤 신비체험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삶속에서 체험하려고 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독생자를 주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삶속에서 그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나를 이끄시겠다고 하는 자기 생명까지 주신 그 하나님 때문에 좀 만족해 할 줄 알고 그분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해하고 황홀해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으로의 경험을 오히려 하시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그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이런 체험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웨스터민스터 신앙 교리 문답 1번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체험,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꼭 그런 식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이 다 소진 될 때까지 그래도 모자랍니다. 조금 하다 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신비주의인 현재 추세에 대해서 우리들이 확고히 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은혜주시며 자신을 알고 경험케 하시는 수단,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수단에 충실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신비주의자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이해에 대한 크게 두 기둥이 있는데 초월성과 내재성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 했던 것처럼 보면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초월적입니다. 그 엄위로우심을 누구도 못 감당합니다. 사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때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셨던 분이라도 그분 자체에 부활하신, 승천하신 그 분 속에는 초월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성이 있는 분입니다.

 

동시에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 내재성이 있습니다. 두 기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자들은 내재성만 주장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께 합일하다가 죽은 것은 생각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다가오시기 위해 정하신 수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고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그 수단에 우리가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수단은 말씀, 기도, 성례라고 세례 문답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 셋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데 먼저 중시할 것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이 두 가지 기초위에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비자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은혜의 방편 외에 많은 것을 추가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기도를 무척이나 중요시 여기고 말씀, 계시를 뒤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장했던 은혜의 방편들은 우리가 말한 이런 것 외에도 묵상, 죄고백, 훈련, 노동 리차드 포스터는 금식 기도 공부 독거 검소함 죄고백 시련 이런 것도 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철저하게 자기감정과 자기주관적인 경험들을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섭리적인 이야기를 그저 그런 식으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수단조차 정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알게 하시고 성례를 통해서 자신과 연합됨과 은혜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신비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합일하는 도구의 기도를 가장 중시하지만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아는 유익을 얻지 못하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계시 없는 이방 종교인들처럼 모호한 신을 찾고 만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씀과 성례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안에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종교 개혁자들처럼 기록된 말씀과 설교는 우리들이 듣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례는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특히 성령의 사역에 대한 말씀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될 때마다 ‘성령님은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임하신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정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정하신 대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경험하려고 하고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통해야지 다른 방법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성례전에 참여할 때 여러분의 헌신 결심이나 다짐에 초점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생명으로 또 우리 주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스스로 맹세하신 사실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피는 독생자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맹세요, 자신이 몸과 피를 쪼개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도 그리스도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맹세해요?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시고 그를 영원한 가족으로 삼으시겠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보이는 말씀을 보아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성례에 참여할 때, 그 하나님 그 은혜의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 정한 수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개인적이고 실질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믿고 주님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특별히 말씀을 들을 때는 그리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성령님께서 만나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은 절대적으로 독립적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성령하나님께서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시해서 그렇지. 이 말씀은 그분의 말씀입니다.

성령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우리를 통제하십니다. 따라서 말씀과 성례 속에서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얻고자 하고 경험하고자 해야 합니다. 감각적인 것을 구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 인격 속에서 감동하고 수용하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코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고리타분하게 여기고 그 대신 내면의 빛을 찾는 것은 새롭고 신령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호한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주의의 추세 속에서 점검하여 확고히 해야 할 것은 신비주의를 비롯해서 오늘날 개신교 안에 만연해 있는 이 올라감의 신앙 체계, 루터의 말로 표현하면 영광의 신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 성경이 말하는 내려감의 신앙 체계, 곧 십자가 신학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비주의에 완전히 대두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신학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적인 풍토 속에서 살았고 신비주의에 젖어 있었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결론적으로 뽑아낸 것입니다. 발견한 사실입니다. 성경과 계시 안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좋은 신비주의에 대한 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십자가 신학이. 루터는 당시에 헌신적인 성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 올라가고자 했던 그 3가지 사다리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은 신비주의 사다리요, 공로의 사다리며, 사변의 사다리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루터가 말하는 이 사다리들은 모두 올라가는 사다리입니다. 이 영광의 신학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루터가 성경을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영광의 신학이라는 것은 루터의 말을 빌리면 벌거벗은 하나님, 곧 엄위하신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에 허락된 것이 아닌 것이고 성경에서 볼 때, 또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된 것이요, 죄악 된 인류에게로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신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영광의 신학은 절대 복종 명상 황홀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십자가 신학은 죄범한 우리에게 하나님 편에서 내려오시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와 그런 신학 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아니 오늘날 이 개신교의 추세는 자신들이 올라가는 것 이 영광의 신학이 근거해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나 세계 교회가 크게 이탈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본질을 이탈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올라감의 사상이 모든 종교에 있지만 기독교 신비주의에 들어온 올라감의 사상, 그 영광의 신학의 뿌리는 바로 플라톤을 위시한 헬라 철학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상과 신학이 옛날 영지주의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에 뉴에이지 사상 심지어 오늘날 복음주의 내 은사주의 운동, 번성신학, 긍정적 사고방식 이런 것들로 옷을 입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방언 받기 위해 열광하고 있다고 그러더군요. 베스트 10에 다 방언이야기, 성령님으로 나오는데 저는 요즘 「안녕하세요? 성령님」 하며 성령을 구분하는 내용이 바람직하지 않은 추세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을 이야기하려면 말씀과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다 올라감의 신학을 이야기하다보니 그런 식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현상이 생겼고 모두 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계시는 잘 모르면서 은사를 받겠다고 야단입니다. 부산의 큰 교회의 어떤 분이 나에게 전화로 물었습니다. 강대상에 직분자들을 다 나오라고 하고 성령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다 쓰러뜨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영광의 신학의 잔재들입니다.


이 영광의 신학을 신학적으로 잘 체계화 한 사람이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교리입니다. 그 라인에서 계속 발전한 그룹과 사람들이 더 높은 산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외친 케직사경회 그룹과 한나 스미스, 찰스 피니, R. A. 토레이, 헬레 블랙까미 요즘 대중적인 선교단체들 중에서 신학적으로 이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는 예수 전도단입니다. 신비주의가 가진 영광의 신학을 어느 새 복음주의도 얼굴 모양을 달리 해서 그대로 가지고 계속 추구해 왔습니다. 올라가는 사상은 헬라 철학뿐만 아니라 더 오래 전에 힌두교나 불교 조로아스터교 등에도 있었고 지금의 힌두교나 불교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와 모든 종교는 이런 것을 올라가는 종교 체계를 갖는 다면 똑같아 보여요.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라는 면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다른 종교들처럼 올라감의 종교가 아니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신 종교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십시오. 기록된 내용 중에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발견했다는 사례가 하나라도 기록되어있는지...없습니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밤에 잠자고 있는 야곱에게도 하나님이 왔습니다. 다 하나님이 오십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계시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가 마치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처럼 영광의 신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시면서 길과 진리이고 생명을 통해서 아버지께 이를 수 있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합니다.

 

그를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자연과 귀신과 온갖 질병과 사망까지 주관하시는 그런 모습을 보이셨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움을 보이셨습니다. 완전히 다 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그가 오셔서 말씀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 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벌거벗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겠다고 신과 합일하겠다고 이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이 어떠하심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고 싶거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는 겁니다. 그의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신비자들과 영광 신학을 가진 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봄으로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내면을 봄으로서가 아니고 우리 자신 바깥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봄으로서 입니다. 비밀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와 그의 성품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으신가요? 내면으로 들어가지 마시고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 신학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올라가지 말고 내려가는 삶, 곧 그리스도를 따라서 고난의 삶을 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삼 층천을 경험한 체험이 있었지만 그런 체험을 그리스도 뒤를 쫓아 고난의 삶을 사는 가운데서 삼 층천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뒤를 쫓아서 고난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결론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고후 12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영광 체험을 말하면 좋겠는데 그것은 말하지 않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또 다른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짐이니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함을 인하여 자랑함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력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 이것이 비밀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삼층 체험을 경험한 후에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광 신학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늘의 은사를 받고 신비스런 체험을 하는 것도 좋은데 그런 것들보다 십자가 신학에 온 맘을 쏟으시고 바로 약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하고자 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경험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기도 속에서 내면을 바라보고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해도 이 하나님의 생생함은 고난 속에서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삶속에서 확인되어야만 합니다. 신비주의가 잘못 가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비밀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을 버리고 영광의 신학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신학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까지 말한 이 세 가지를 확고히 하십시오.


제가 마지막으로 워필드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가지 다는 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척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로부터의 변절을 숨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쾌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계시 안에 있는 부요한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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