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의 주체 선언 - 아더 핑크

 

사도신경 강해

  

 서론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더불어 모든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자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도 신경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암송되며 사랑받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은 인간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여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별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성경 자체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에서 구원의 진리를 추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성경적인 것이다.

 한편 사도신경이 언제부터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던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 그들이 전파할 복음의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요강을 만들었는데 이때 사도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한 내용을 엮은 것이 사도신경이란 것이다. 이는 사도신경에 12번의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도신경의 기원을 사도에게 둠으로써 권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710-72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성도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도들의 바른 신앙이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계속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방대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여 일관성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단의 그릇된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바른 신앙을 고백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역사성을 지닌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성부.성자.성령의 사역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구분하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한다. 실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깊이 음미한다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신앙고백의 주체선언 - 각개인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내가 믿습니다.(I believe in)"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의 서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암송자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에 진술된 진리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여 사도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성경에 계시된 동일한 진리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들은 교회에 나아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도신경은 먼저, 교회 각 회원의 개인적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그들의 것이다.

 이 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신앙 생활은 단지 종교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관습적 종교 행위는 조만간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다. 십대들은 주일 학교가 따분하기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간다. 성인들도 설교가 자기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서 멀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내용이 지적된다. 청중은 그 설교 내용을 이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시편 10편에 나오는 악인과 흡사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고 한다. 분명히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은 형식상 교인일 뿐이며 실상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자처럼 교회 안의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은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에 깊이 주의한다면,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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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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