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세계

개혁주의 자료 2015. 1. 9. 12:22

사후세계 / 박일민 교수


사람들은 대부분 사후세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도 과연 존재를 하는 것인가.
또 존재를 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것인가 하는 등의 질문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 경험을 해보지 못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훈을 따라서,
영혼 불멸과 중간기라는 주제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영혼 불멸

1) 영혼 불멸의 개념

사도 바울께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했다(딤전 6:16).
왜냐하면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히 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피조물을 가리켜서도 죽지 않는다고 한 말씀이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한 말씀이나(요 3:16),
마귀와 거짓 선지자와 악인들이 세세토록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고
한 말씀이 그러하다(계 20:10). 그러므로 영생은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가 없다.

영생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사용될 때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믿는 자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축복된 상태를 누리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귀와 악인들의 경우에는, 죽지 않고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과 악인의 영생에는 그 내용에서 서로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악인들의 경우는 영생이라고 하지 않고, 영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인의 영혼이든 악인의 영혼이든 결코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복되거나 저주스러운 상태와는 상관없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만큼은 서로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영생이라고 하기 보다 영혼 불멸이라고
부른다. 그래야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영생과 구분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2) 영혼 불멸의 증거

사람들은 구체적인  증거를 좋아한다. 그래서 영혼이 불멸함에 대해서도 증거를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영혼이 불멸함을 애써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 속에서 영혼이 불멸함에 대한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죽음을 가리켜서, 흔히 열조에게 돌아간다고 표현한다(창 15:15 등).
이 표현은 조상들의 영혼이 불멸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에녹의 승천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고 했기 때문이다(히 11:5).

욥은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했다(욥 19:26).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혼의 불멸을 전제로 한 말이다. 다윗도 같은 의미에서 말하기를,
"나의 의로운 중에 주를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했다(시 17:15).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던 아들이 죽었을 때,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저에게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했다(삼하 12:23).
솔로몬 역시 같은 의미에서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시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말했다(전 12:7).

예수님께서는 영혼이 불멸함을 전제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0:28).
사도 바울께서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고후 5:1),
만일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이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만다고 했다(고전 15:19).

솔로몬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전 3:11).
영원을 사모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사람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사람의 모든 본능적 욕구들은 각각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식욕은 음식물을 대상으로 가진다.
부귀욕은 재물을 대상으로 가진다. 명예욕은 지위를 대상으로 가진다.
따라서 영원을 사모하는 욕망도 그 대상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러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영혼이 불멸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던 방송 프로 중에 "전설의 고향"이 있다.
전설의 고향은 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귀신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한국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줄거리나 형식은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더운 지방에 사는 아프리카 사람, 추운 지방의 에스키모, 서양의 아메리칸 인디안,
동양의 이집트나 인도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육체를 떠난 영혼의 활동에 대한 생각이 모든 민족에게서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음은
영혼의 불멸이 분명한 사실임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영혼이 불멸함은 천사가 죽지 않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눅 20:36). 천사는 육체가 없다.
그러나 천사는 사람과 동일한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동일한 사람의 영혼도 역시 불멸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한편, 영혼이 지닌 특성도 역시 영혼이 불멸함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공간을 차지하는 않는 불가분적(不可分的)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분적이라는 말은 불변함, 즉 불멸함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2. 중간기

예수님께서는 장차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의 재림은 최후의 심판을 위함이다.
그 심판의 결과에 따라서, 의인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 반면에 악인은 지옥에 던져진다.
그런데 영혼이 불멸한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이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영혼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가.

우리는 한 개인의 죽음에서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중간기(中間期)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중간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만일 중간기가 있다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하는 것과, 그곳에서는 어떠한 상태로 지내게 될까 하는 것이다.

1) 중간기의 장소

기독교 초기의 성도들은 중간기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사말도 "마라나타(주께서 임하시니라)"라고 했다.
그러나 임박하게 여기던 주님의 재림 소식은 없고,
주변에서는 많은 핍박들과 다른 이유들로 죽는 자들이 늘어갔다.
그리하여 점차 중간기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은 죽어서 곧 바로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잘 믿는 소수의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이후에 다시 한 번 고통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고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러한 생각들은 마침내 중세에 이르러, 천국과 지옥 이외에 연옥이나 림보와 같은 곳이 있다는
교리를 낳게 했다.

중세의 로마 교회는 세례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례는 세례를 받지 이전에 범한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가급적 시간을 늦추어서 임종 직전에 가서야 세례를 받으려 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도 중한 죄를 범하게 되면, 세례의 효력을 상실하고
구원에서 멀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마침내 죽은 영혼이 가게 될 중간기의 장소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세의 로마 교회가 말한 중간기의 장소들은 다음과 같다.
세례를 받고, 객관적인 공로를 가진 사람의 영혼은 천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과 중한 죄를 범하여 세례의 효력을 상실한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들어간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지만, 객관적인 공로를 가지지 못한 사람의 영혼은 연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세례를 받지는 못했으나, 구약시대에 살았던 성도의 영혼과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에
죽은 아이들의 영혼은 림보에 들어간다.
이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연옥과 림보라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1) 연옥이란 어떤 곳인가

중세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연옥이란 많은 고통 속에서 정화와 연단을 받는 장소이다.
그런데 그 정화와 연단의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기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도나 제사 또는 성행으로 단축되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중세 교회의 가르침은 외경 마카비 2서 12:38-45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마카비서는 영감된 권?㎏? 가진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임할만한 근거로 이용되어 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구절들 자체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신임을 할 수
없게 한다.
연옥에 대한 가르침은 사람의 죄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용서받아진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된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가졌던 자기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만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성경의 교훈과도 상충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연옥 사상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부패한 교회로 하여금 면죄부를 팔게 하는 구실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연옥을 사단의 고안물이라고 맹렬히 비난을 했다.

(2) 림보란 어떤 곳인가

림보(Limbus)는 라틴어로 가장자리를 의미한다.
슥 9:11에 나오는 "물 없는 구덩이"를 지옥주위에 있는 지하 동굴이라고 생각하여서
사용하게 된 용어이다.
중세 로마교회는 림보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세례를 받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Limbus Patrum, 선조림보), 세례는 못 받았으나 자범죄가 없이 죽은 어린아이들(Limbus Infantum,
유아림보)의 영혼을 위한 중간기의 장소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벧전 3:18-20과 요한 3:5이 그 근거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내용은 림보와 거리가 멀다.
벧전 3:18-20은 예수님께서 노아의 입을 통해서 노아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던 사실과,
그들이 그 복음을 듣지 않다가 지옥에 던져진 사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요 3:5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그래서 죄 사함을 받은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구원은 결코 세례의식이나 사람의 공로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 안에는 낙원과 음부를 중간기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의인의 영혼은 죽어서 낙원으로 가고, 악인의 영혼은 죽어서 음부로 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최후심판이 있은 이후에는 각각 천국과 지옥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한다.

(3) 낙원이란 어떤 곳인가

예수님께서는 한편 십자가에 달려 있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그러므로 그 강도는 낙원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
그 낙원은 어디일까. 예수님께서는
"내 영혼은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하시고 운명하셨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운명을 하신 후에 가신 곳을 알게 되면,
낙원이 어떤 곳인지를 밝힐 수 있게 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켜서,
흠 없는 어린양이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로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히 9:12).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단번에,
즉 운명과 동시에 즉시로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성소는 하늘의 지성소, 곧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이었다.
그러므로 그 강도가 간 낙원은 바로 천국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낙원은 다름 아닌 천국의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된 말이다.
눅 16:26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도 역시 천국의 동의어에 해당된다.

(4) 음부란 어떤 곳인가

성경에는 음부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음부는 악인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시 9:17).
그러나 의인도 가는 곳이라고도 했다(창 42:38).
음부는 아무런 의식이 없는 곳이라고 했다(전 9:10).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장소라고 했다(눅 16:23).
이것은 음부의 의미가 항상 동일하지가 않음을 의미한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특별한 구분이 없이 모두 음부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음부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죽음 또는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무덤을 의미한다.
세째는 지옥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음이나 무덤은 죽은 영혼이 가는 곳이 아니다. 죽은 영혼이 가는 곳은 지옥뿐이다.
따라서 중간기적인 의미의 음부는 지옥과 동일하다.
음부를 죽은 악인의 영혼이 가는 중간기 장소로 보는 것은 음부가 문맥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야 함을 무시함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중간기 장소로
천국과 지옥 이외의 별개의 장소가 따로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인의 영혼은 즉시로 천국에 간다. 악인의 영혼은 즉시로 지옥에 간다.
중간기 천국과 지옥은 육체가 없다는 점 이외에는,
최후 상태의 천국이나 지옥과 다를 것이 없다.

2) 중간기의 상태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죽는 것을 잔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무의식 상태에 들어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죽은 사람의 육체 상태가 자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는 사람들이 깨어나게 되는 것처럼, 죽은 사람도 장차 부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영혼은 자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서 이 땅에 있었을 때와
동일하게 육체를 떠난 이후에도 의식적인 활동을 계속한다.

죽어 육체를 떠난 이후에도 영혼은 지적인 활동을 한다.
그래서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느껴지던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이나 나사로도 알아본다.
또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기쁨과 위로로 받기도 하고,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적인 활동에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차이가 있다.
남보다 더 많이 맞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남보다 더 큰상을 받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태는 고정이 되어 있어서 변경되는 일이 없다.
기쁨이 고통으로 변하는 일은 없다. 반대로 고통이 기쁨으로 변하는 일도 없다.
또 그 가운데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오고 가지도 못한다(눅 16:26).

사람의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의식적인 활동을 한다면,
그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을 수도 있는가.
그래서 필요하다면, 이 세상에 다시 올 수도 있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招魂)도 가능할 수 있는가.

우리 주변에는 제사에나 꿈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는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심령 과학회와 같은 단체도 있다.
때로는 성경에서 그 실예를 찾아보려는 사람도 있다.
곤경에 처한 사울 왕이 엔돌에 살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이미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낸 후, 예언을 들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삼상 28:3-25).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마귀의 간교한 술책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온 것이다.

성경은 죽은 영혼이 이 세상에서 다시 올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욥은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했다(욥 7:9, 10).
그리고 다윗은 죽은 아들과 관련하여 이르기를,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했다(삼하 12:23).
또한 성경은 초혼을 엄히 금지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서 용납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신18:11).
뿐만 아니라, 신접하는 자는 반드시 물로 쳐죽이라고까지 하셨다(레 20:27).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체가 한 번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의인의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의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상태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 달라지는 일이 없다.
그 상태는 이 땅에 살아있는 잠시 동안의 삶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러기에 현재의 삶은 너무나도 값지고 중요하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1월호)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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