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쓴 신학(종말론, 죽음)/ 박일민 교수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여기에는 성별이나 지위나 그 무엇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람은 왜 죽는가 하는 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자기가 처한 시대나 종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설명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대부분이 성경의 교훈과는 거리가 먼 설명들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죽음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리고 죽음의 원인이나 성도가 죽음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죽음의 정의 


최근 들어 괄목할 만한 현상 중에 하나는 의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다. 전에는 불치의 병으로 알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질병들이 지금은 손쉽게 정복되고 있다. 그 결과로 사람의 수명이 매우 길어졌다. 그 중에도 특히 놀라운 발전은 장기의 이식수술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장기 이식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죽음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에 직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심장의 활동(맥박), 또는 폐의 활동(호흡)이 정지되는 것을 죽음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장기 이식기술의 발전은 폐, 심장, 간과 같은 중요한 장기의 이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뇌사, 즉 뇌의 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죽음으로 인정하자는 요구를 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죽음 개념으로는 중요한 장기의 이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나라에도 뇌사를 인정하자는 법률안을 국회에 상정해 놓고 있다. 


그대로 두면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한 사람의 장기로 다른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하자고 하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뇌사를 인정하자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최근에 진행된 장기 기증운동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등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뇌사의 인정에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 반대 이유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제시된다. 


뇌사 판정기준에 대한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뇌사판정 기준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 하바드 외과대학의 기준마저도 완벽하다고 보기가 어렵다. 더욱이 오판을 방지하기 위한 이중삼중의 장치를 마련한다고 해도, 사람의 판단은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 그 자체만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녀야 할 생명이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높다. 즉 뇌사 판단의 결과로 장기 이식이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기이식을 위해 서둘러서 뇌사 판정을 내림으로써, 뇌사의 판단이 장기이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 또는 보다 더 큰 유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발상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생명 주관권을 침해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적을 행사하실 수도 있는 기회를 말살시킨다. 


죽음은 폐 활동의 정지인가, 심장 활동의 정지인가, 뇌 활동의 정지인가. 성경은 죽음의 의미를 정지에서 찾지 않는다. 성경은 정지가 아닌, 분리를 죽음으로 이해한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본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끝이나 종결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죽음의 반대가 되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흙으로 빚은 육체가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영혼과 결합되어짐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결합의 상태가 분리되어, 육체는 왔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고 있다(전 12:7, 약 2:26). 


이러한 의미는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어야 할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는 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엡 2:1). 그리고 천국의 영원한 행복의 상태에서 분리되어, 저주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영원한 죽음, 또는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다(계 2:11).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생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명 되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지는 것 또는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에서 분리되어지는 것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죽음의 원인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씀한 것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히 9:27). 그러면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가 죽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언젠가는 죽게 될 유한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인가. 


성경은 창세기를 포함하여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창조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을 만큼 불안전했다고 한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심히 좋아하셨다. 그러므로 죽음의 원인을 창조, 즉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은 무리이다. 


죽음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하셨다. 아담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했다. 그 결과로 아담은 죽음을 선고받았다. 그러므로 죽음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죽음이 죄의 결과임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확인이 되어진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어짐,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했다. 그리고 야고보께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다. 


하나님과 언약에서의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아담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한 번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롬 5:15)이라고 했고,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왕노릇 하였은즉"(롬 5:17)이라고 말씀했다. 


죽음에 대하여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 


성경은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라고 했다(전 7:2). 사람은 죽음을 대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나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생각들을 가져야 할까. 


첫째, 절망을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성도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고후 5:1).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러 가는 것이다(계 14:13). 눈물을 씻고 위로를 받으러 가는 것이다(계 21:4).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받으러 가는 것이다(딤후 4:7).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 때문에 절망을 하거나, 두려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라고 노래했다. 또 사도 바울께서는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는 사람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빌 1:21). 또 다른 곳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빌 1:23). 그래서 그는 죽음을 가리켜서,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라고까지 말씀했다(고후 5:8). 또 사도 요한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라고 했다. 


둘째, 죽음의 원인 그리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성도들이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축복된 삶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히 복된 일이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축복이 아니다. 그래서 죽음은 쏘는 것(고전 15:55), 또는 맨 나중에 멸망을 받을 원수라고 부를 만도 하다(고전 15:26).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대할 때, 죄가 죽음의 원인이었음을 생각하고, 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되돌아보고 회개의 기회를 삼아야 한다. 동시에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련된 구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또 죄의 결과로 영원한 죽음을 면하지 못할 사람들을 생각하고, 전도의 결심을 다져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생각은 항상 가져야 한다. 그러나 죽음을 대할 때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하여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은 사람이 범한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범죄한 사람의 수한(壽限)을 정하여 각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또 거두어 가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사 38:5).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럴 만한 뜻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은 그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과의 뜻과 섭리를 분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원망이나 불평이나 아쉬움이 생겨날 수 없다. 죽음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고 아쉬운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도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서로를 위로를 받아야 한다(살전 5:18). 그리고 오히려 감사를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사명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사람들은 살려두고 계시는 것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경우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성사되지를 못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이루셔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다 완성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운명을 하셨다(요 19:30).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대할 때, 아직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에게 이루어져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남아 있는 사명을 재확인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또 죽기 전에 그 사명을 완수해야겠다는 결심의 기회를 삼아야 한다. 


장례의 방식 


영혼이 떠난 육체는 단지 썩어질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시신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그 육체는 영혼과 더불어서 생명체를 유지하던 몸이다. 영혼을 담았던 그릇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차 부활하게 되어질 육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신을 존중시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장례는 죽은 자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엄숙하게 치루어야 한다. 


장례는 어떠한 방식으로 행해지든지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장례가 보통 매장(埋葬)이나 화장(火葬)의 방법으로 시행된다. 특수한 경우에는 수장(水葬)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민족들에게서는 초장(草葬), 조장(鳥葬), 풍장(風葬) 등이 행해지기도 한다. 


기독교에서는 화장을 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화장을 하게 되면 부활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데서부터 나온 생각이다. 그러나 장례의 방법이 부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육체가 화장으로 공중에서 분해되는 것이나, 매장으로 땅 속에서 분해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장례는 어떤 방식이든 형편에 따라서 엄숙하게 행하면 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부득이 한 방법을 택해야 할 때가 있다. 특별한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화장을 해야 한다. 또 장기간의 항해 중에 사망한 사람은 수장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법이 다 가능한 상황이라면, 매장을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장은 죽음의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육체를 영혼과 분리되게 하여, 그 왔던 흙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은 매장이다. 성경에서는 매장이 일반적인 장례방법으로 등장한다. 성경에 화장의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간과 사울 왕의 장례는 화장으로 치뤄졌다(수 7:25,26; 삼상 31:10-13). 그러나 이들의 장례는 정상적인 장례가 아니었다. 아간은 저주의 죽음을 당한 사람이었다. 사울 왕은 전시 상황 때문에 부득이하게 화장을 했었다. 


한편, 기독교 역사를 보면 화장은 종종 부활을 반대하는 의도로 시행되어 왔다. 기독교룰 핍박하던 자들은 부활을 부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방 종교에서 행하던 화장 방법을 따르도록 강요를 했었다. 따라서 화장을 따르면, 부활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매장 방식은 여러 가지 고려되어질 요소가 없지 않다. 매장지의 부족으로 토지 이용에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장방식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필요 이상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지나친 치장으로 사치를 조장하는 일도 금지되어야 한다. 특히 그릇된 성묘 방식을 유발하여, 우상숭배의 위험에 말려들게 해서는 안 된다. 


추도 예배 


예배는 형식이나 장소나 조건과 관계없이 어느 경우에나 가능하다. 탄생을 감사해서 예배할 수 있다. 생일을 맞이해서 예배할 수 있다. 승진을 감사해서 예배할 수 있다. 질병과 고통 중에도 예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과 관련하여 예배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장례 예배나 추도 예배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예배는 어떠한 경우이든 조건과 관계없이, 그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한다. 사람이나 사람의 업적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졸업이나 개업 등 예배의 조건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추도 예배는 죽음을 계기로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사망한 사람을 위한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한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추도 예배는 자칫하면, 이미 죽은 사람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과오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이를 피하기 위한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나라의 전통 제사에서 하는 것처럼, 사진이나 음식을 진설하고 예배를 하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오직 죽은 자가 가졌던 그 믿음으로, 그가 믿었던 하나님께 예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가 마친 후에, 그가 걸어갔던 믿음의 발자취, 또는 그가 남겨 놓은 업적들을 되새겨 보는 일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추도 예배가 전통적인 제사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여 우상숭배에 흐를 위험이 많다면, 탄생일을 기념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자살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으려는 자들이 있다. 억울함을 참지 못해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죄의식을 이겨내지 못해서, 살길이 막막하여서 등 그 이유도 매우 다양하다. 근래에 들어서는 자살하는 숫자가 늘고 있다. 또 그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종종 교회의 상당한 직분자들 중에서도 자살을 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어떤 사이비 단체에서는 그릇된 사상 때문에, 집단 자살을 하여 충격을 주는 일도 있다. 


그러나 자살은 어느 경우이든 옳지 못하다. 자살은 하나님의 고유한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손상을 입히거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을 하는 것은 분명히 죄이다. 자살은 회개할 기회도 얻지 못하는 죄이다. 


자살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시고, 고통을 면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험을 주시되 감당할 만큼 주시고, 피할 길을 겸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비하심을 부인하는 죄이다. 


또 자살은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믿음은 행함을 수반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는 자답게 모든 여건들을 용감히 헤쳐나가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자살은 가장 용감한 사람의 행위 같아 보이나, 사실은 가장 비겁한 행위이다. 죽음의 유혹까지라도 이겨낼 만한 믿음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의 위대한 무기이다. 믿음은 자살을 유혹하는 모든 조건들을 극복해낼 수 있게 해준다. 믿음은 태산이라도 저 바다에 옮겨 놓게 할 수 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다(막 9:23). 


죽음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온다. 죽음은 죄의 삯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는 성도에게는 죽음이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따라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것이 없다. 오히려 소망 중에 감사하고, 사명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삼아야 한다. 성도는 스스로 생명을 헤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래서 죽음의 유혹과 사망의 쏘는 것을 이겨야 한다 



-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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