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C.H.매킨토시


5. 성도의 기업 


자 이제 우리는 회심의 주제에 대한 긍정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상 버림" 즉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휘어잡았던 모든 사물로부터의 돌이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그것들은 헛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의 어둡고 캄캄했던 모든 지난날들의 정욕과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행전 26:18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악한 세대"로부터의 돌이킴이다. 


그러나 회심은 그 이상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회심은 단순히 죄된 세상과 사단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면 너무나 협소한 것이 되리라. 

회심은 우리들의 모든 비참한 과거 생활과 영적 타락으로부터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건짐을 받은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확실한 은혜임에는 틀림없다. 

회심은 이 세상 신과 이 세상 임금의 비참한 속박으로부터의 건짐이요, 악한 자의 손아귀 안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세상으로부터의 건짐이요, 한 때 우리를 휘어잡았던 사악한 세상 애착 즉 죄에 대한 사모와 죄된 행실로부터의 건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모든 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데, 회심에는 그 이상의 것이 더 있다. 

우리는 마음에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댓가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모든 것을 부정만 하는 제도인가? 

우리가 만일 이 세상과 나 자신과의 이음줄을 끊는다면, 또는 우리의 과거 쾌락과 오락을 포기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등진다면, 그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데살로니가 전서 1:9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모든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준다. 충분하고도 확실하고, 분명하고도 납득이 갈 만한 해답을 준다.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귀한 해답이다. 그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의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귀한 해답이다. 

나의 과거라는 우상 대신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 세상의 헛되고 죄된 즐거움 대신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세상의 부와 영예와 세상의 우월감 대신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이다.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고도 완전한 대치인가? 


탕자가 먼 나라에서의 넝마 조각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바로 그것은 아버지 집에 있는 최고의 옷이었다. 돼지의 쥐엄 열매 대신 무엇을 얻었던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하신 살찐 송아지였다. 먼 나라에서의 비참한 고역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환영이었고, 아버지 자신의 품이었고, 바로 아버지의 식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대치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항상 참 회심 속에 있는 두 면(곧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의 감동적이고도 인상적인 예를 탕자의 비유에서 쉽게 얻지 않는가? 이 비길데 없는 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멋진 회심인가! 얼마나 멋진 우상으로부터의 돌이킴이며, 하나님께로의 

돌아감인가!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인간의 언어가 감히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의 온화한 사랑의 빛에 쏘임을 받는 그의 감정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헌옷, 쥐엄 열매, 돼지, 종살이, 냉냉하게 굳어진 자아, 궁핍, 기근, 비참, 도덕적 타락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영원히 없어졌다. 그 대신 이루 말할 수 없는 밝고도 행복한 가정의 기쁨과 게다가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주위에서는 축제의 즐거움이 되살아났고, 또한 그의 돌아옴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신 채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예인가? 귀하고도 거룩한 사실에 대한 예이다. 

하늘의 기준에서 볼 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참 회심에 대한 예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헛되고 어리석은 세상 것의 포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곧 그것은 하나님 앞으로의 인도됨이다. 고향으로 돌아옴이다. 아버지 품으로의 되돌아옴이다. 가정으로의 돌아옴이다. 어떤 틀에 박힌 메마른 공식 문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전능한 역사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 하늘나라의 상속자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이것이 참 회심이다. 독자들께서 충분히 납득하기 바란다. 

이 위대한 사실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안일하게 있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흑암에서 빛으로의 돌이킴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세력과 우상 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강렬한 말 같아도, 복스럽게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무엇이라고?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라고? 

아니다. 지금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이다. 


로마서 5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이다. "돌이킴"이라든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라는 말속에 함유되어 있는 모든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힘든 일이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 자신의 온전하신 영접으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인도하신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임장으로, 그분의 미덕으로, 그분의 피의 대가로, 그분 자신의 가장 고귀한 이름의 향기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과 우리를 연결하시고 그가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시고, 그분의 자격까지도 나누어주신다. 다만 하나님으로써의 그분 자신의 위치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만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니라"(요 14:19)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5:11)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또 요한 복음 17장에서 신비스런 주님의 기도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본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6-10)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26) 


자, 이제, 이보다 더 고상하고 더 축복스러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리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그처럼 일치되고,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사랑을 나누듯이 그분과 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 그분의 평화, 그분의 기쁨,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이 모든 사실이 한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며, 특성인 것이다. 


지옥 구덩이의 영원한 공포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 죄 사함 받는다는 것, 씻음을 받는다는 것,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 아담이 잃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한 기초로, 동일한 특성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자비이며, 축복이며, 사랑의 배려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사랑과 호의 속에서 하나님께로 인도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아들의 위치와 동일하게 일치된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전지 전능만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걸작품인 것이다. 


자,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말하는 회심 속에 다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엄청난 큰 은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그런 것이다. 비록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때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사악한 일로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도,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에 빠졌을 때에라도, 우상을 섬기고, 영적으로 눈이 멀었고, 죄와 사단의 타락한 종이 되었을 때에라도, 진노의 자녀로 곧바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때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중 최대의 선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과 사랑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마음 자세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보다 뒤쳐지는 자리를 선물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이 못된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이 이 엄청난 은혜로 감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엡 1:3-7) 


여기 얼마나 깊은 사랑과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지혜에 알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배려로 자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보이신다. 우리의 죄사함, 우리의 칭의, 우리의 온전한 구원, 우리를 영접함, 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신 것인데 이 모두는 이 광대한 온 우주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위치말고, 다른 위치에 우리를 둔다면 이것은 영광스런 하나님 자신의 요구에 미치는 것이 못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마음 속 사랑에 대한 만족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너무나 신비하다. 너무 훌륭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고귀해서 확고히 받아들이기 힘들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 사랑에 따라 우리에게 역사 하시고 그리스도의 대가를 기초로 해서 활동하신다. 


탕자는 품꾼 중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집에서 종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만일 행한 공적에 따라 대우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위치는커녕 종의 위치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전혀 우리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이름에 따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심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인도되었다. 

이보다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우상에서 돌이켜,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는 실제로 바로 하나님 존전에 인도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기쁨을 만끽하고, 그와 동행하며,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생수를 찾으며, 소멸되지 않은 근원으로 인도되며,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그분 안에서 찾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만족하게 되고, 또한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우상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절대로 안된다. 

과거의 우리의 대상물을 갈망하고 따라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분깃을 깨닫는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아버지의 상에 같이 앉아 있으면서 돼지나 쥐엄 열매를 찾았던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고, 믿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탕자가 복된 사랑의 가정이라는 밝고도 거룩한 곳에 자신이 살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먼 나라를 한숨 지며 바란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말하고 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돌이켰다고 고백하고, 잠시동안은 그것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방 그들은 열의가 식어지고 지치고 만족을 잃는다. 그들 내면의 역사는 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다. 우상은 잠시 포기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관련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 마음에 만족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참 교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의 만족감과 심령의 안식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이 흐름을 따라, 그 가련한 심령들은 세상을 한번 더 바라게 되고,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평상시보다 더 많은 탐욕으로 어리석게도 헛된 것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슬픈 모습이다. 매우 실망스런 모습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오히려 보다 큰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사단의 옹호자가 되어 회의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회심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 버린다.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단순히 이 악한 세상에서 헛된 꿈과 기만을 버리고 떠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곳에서나 원하는 모든 진실 된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거룩하게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다. 영원히 세상과 끊어진 사람이다. 그의 눈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자신이 이미 세상을 심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준으로 이미 세상을 측정한 사람이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저울로 세상을 달아보았고 세상에 대하여 영원히 등을 돌린 것이다. 대신, 저주받은 나무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진지하고, 당당한 목적을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바로 그를 구원키 위함이요, 영원한 불못에서 구원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케 위함인 것이다. 


-출처: 착한책과 사람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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