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 한국교회의 오류 중 하나 (1/2)]

 

한국교회의 치명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구원론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무율법주의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율법주의의 문제입니다. 무율법주의는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로 칭의(稱義), 곧 죄용서는 강조하나 거룩한 삶이 없는 문제요, 율법주의는 이런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강조하는 그룹에서 종종 나타나는 문제로 성화(聖化)와 제자도를 강조하나 그것을 전적으로 우리 인간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제입니다.

무율법주의가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키고 삶이 없는 공짜 은혜를 남발하는 것이 문제라면, 율법주의는 윤리적 갱신과 도덕적 책임을 인간에게 지우고 스스로 윤리적 도덕적 삶을 추구하도록 강요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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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들은 둘다 구원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믿음에 대한 통전적 이해의 결여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죄용서와 상관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믿음이 회개를 결과한다는 것은 종종 놓칩니다. 다시 말해 죄용서와 회개, 칭의와 성화는 둘 모두 믿음과 상관있다는 얘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는 은혜의 선물인 죄용서를 결과하고 동시에 우리 안에 거룩을 향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칼빈은 회개를 중생, 그리고 지속적인 성화와 관련시켜 이해했습니다. 믿음의 문제를 죄용서로만 국한시킨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교회의 구원론적 문제를 교정할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믿음의 문제를 칭의에만 국한시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의 거룩한 삶을 간과했습니다. 결국 불의와 부패가 난무한 윤리부재의 현실을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극단적 반동으로 다른 한편의 그룹 역시 믿음의 문제를 칭의에 국한시킨 것은 마찬가집니다. 이들은 믿음을 죄용서, 곧 칭의에만 국한시킨 나머지, 성화의 삶, 곧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는 구원받은 자의 책임의 영역으로 분리시켰습니다.

 

하지만 <죄용서와 회개는 둘 다 믿음과 관계>있습니다. 죄용서와 회개는 둘 모두 믿음의 결과입니다. 죄용서함을 받은 자에게 회개는 필연적입니다. 칼빈은 회개를 중생과 연결하여 이해했고 그가 말하는 중생은 바로 성화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 바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성화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의 문제였습니다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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