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향기는...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5. 6. 6. 08:54
아직은 이른 아침, 촉촉한 숲으로 간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일상에서 얻은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는 힘이 있기에 피곤하고 지칠 때면 나무가 울창한 뒷산을 곧잘 찾게 된다. 숲은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작은 풀잎 하나에까지 저마다 독특한 향이 있어 한데 어우러지지만, 그 향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감과 행복감을 안겨주기에 좋다. 살아 있는 산 생명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흔히들 말한다. 사람에게서도 저마다의 향이 있다고…정말 그런 것 같다. 사람도 산 생명일진데 어찌 고유의 향이 없겠는가? 어떤 사람은 가까이 있기만 해도 편안함을 선사해 준다. 어떤 이는 멀리 있어도 진실함과 든든한 느낌을 향기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반대로 가까이하기에 너무도 먼 당신, 안타깝게도 유행가 가사처럼 실제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무서운 사람이 비단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성도라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멀리서만 바라보아야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서 사귀다 보면 실망을 넘어 허탈감을 갖게 된다. 대개는 여의롭지 못한 삶에서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못한 채, 앙금으로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조금만 불이익을 당한다 생각될 때 거품처럼 독을 뿜어내는 것이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상상을 불허하는 거칠고 독한 언사가 거침없이 솟아남을 보고 아연실색할 때도 있다. 이런 이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도 향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다 같은 사람에게서 나는 향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다른 것일까?
1. 새로운 피조물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향기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6)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한 상태이다. 아는(knowledge)것이 아닌, 믿는(Faith)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 9) 그리스도가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지는 그 순간이 바로 거듭나는 순간이요, 새 사람을 입게 되는 중생(αναγέννηση)의 순간이다, 흔히들 말하는 종교인, 표면적 유대인과 참 그리스도인, 진실로 거듭난 성도의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여도 넘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거듭난다는 말을 도덕적, 윤리적 변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 거듭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한 진단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은 이성의 고백이 아닌 성령의 감동 하심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을 의미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
하나님과 단절된 심령은 뿌리가 뽑힌 나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뿌리가 생명의 본체인 땅에서 뽑힌 상태라면 형태는 나무이지만 그 나무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땅에서 뽑힌 후 얼마 동안은 입이 푸르고 청청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시들시들하다가 곧 말라서 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다. 존재론적인 인간의 죗값은 죽음이다(롬 6:23).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낼 수 없다. 어느 한순간, 극한 상황을 만나면 속에 감추어두었던 죄 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됨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속 사람이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 산 생명이신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못한 사람은 겉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나 그 속에 생명이 없다.(요1서 5: 12 참조) 그리스도의 영, 산 생명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죽은 영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 겉 사람, 외면을 아무리 잘 치장하고 지성으로 포장한다고 하여도, 그 속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국 사망의 냄새가 난다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죽은 생명에서는 결코 산 생명의 향기를 발산해 낼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고후 2: 15- 16 참조)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 그러니까, 겉은 하얗게 회칠을 했으나, 그 속은 죽은 상태이기에 썩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노라고 착각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우리 주님의 무서운 질책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속 사람을 강건히 하라
거듭난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속 사람, 영으로 거듭난 새 생명을 강건하게 해야 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 3: 16절) 사람들이 대개는 거듭남의 축복만 자랑하고 그 거듭난 상태가 어떠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라, 성도라고 이름 하는 사람들의 삶이 그야말로 시궁창에서보다 더한 악취를 뿜어내고 이로말미암아 현 기독교계가 이방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속 사람은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가 강건해야 나무가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 나무의 생명은 뿌리의 건강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필자는 난(蘭)을 무척 사랑한다. 무엇보다 그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난(蘭)이 지니고 있는 고상한 품격이 그리스도를 닮은 듯하여, 많이 흠모하는 것이고, 내가 그리스도의 고상한 품격을 흠모하는 만큼, 난(蘭)을 가꾸면서 자신도 가꾸어야겠다고 하는, 어떤 고상한 도전의식 같은 것을 고취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여, 손바닥만 한 필자의 아파트 작은 창가,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언제나 난(蘭)이 자라고 있다. 난(蘭)은 그 아름다운 모습만큼, 가꾸는 것 또한 여간 정성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물을 너무 자주 주어도 안 되고 물을 너무 주지 않아도 탈이다. 늘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햇볕, 그리고 적당한 필수영양을 공급해 주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야 한다.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세상 살다가 사라져 가야 하는 뿌리 뽑힌 나무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이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 건강을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이적과 기사에만 정신이 쏠려 있는 사람도 많다. 다른 이, 자칭 신령하다는 어떤 인사들의 감언이설, 주워들은 풍월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그대로 그 자리에서 머문다면 어찌 건강한 인간으로 성숙해 질 수가 있겠는가…난(蘭)을 가꾸는 마음으로 자신의 속 사람을 가꾼다면 그 속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튼튼하게 잘 자랄 수 있을 것인가?
2.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비례만큼, 죄의 습성은 약하게 된다.
칼빈은 의지(意志-the will)의 노예 성을 주장한다. 즉 인간이 그리스도에게 지배받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를 필연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한 설명을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어 서술하는데, 인간의 의지(意志-the will)를 말(horse)에 비교하여 기수가 하나님일 경우 바른 길을 가게 되고 내 의지(意志-the will)를 사단이 기수가 되어 조종할 경우 결국 절벽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은 선행을 위한 자유 의지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이것이 곧 의지(意志-the will)의 노예 성이며, 인간 의지(意志-the will)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을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필연성(necessitas)과 강제성(coactio)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펠라기우스의 "만약 죄를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라는 말에, 칼빈은 인간이 죄를 진 것은 의지를 반대해서 된 것도, 강제로 한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인간은 마음의 가장 커다란 열정을 갖고서 죄를 범했으며, 또 인간의 본질은 너무나 부패한 나머지 악을 향하여서만 움직인다고 반박하고, 인간의 의지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 의지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이 구절들은 이단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한데, 이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거듭난 사람은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런 뜻이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거듭나기만 하면 그 이후에는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거듭났다고 해서 타락한 본성이 갑자기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거듭난 후에도 그 안에 찌끼처럼 남아 있는 육신의 정과 욕심 때문에 죄로 기울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옛사람의 행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무엇보다 죄의 실체와 해악을 깨닫게 되며, 죄가 얼마나 자신의 존재와 삶을 망가뜨리고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선한 복들을 가로막는지 알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혐오하시는 지를 깨닫게 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증오하시는가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아직 죄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하드라도, 죄에 대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새롭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을 통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전과는 달리 얼마든지 죄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고 또 그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신학상 술어로 성화(sanctification)요, 그 나라에 가기까지 견인(perseverence)해 나가시는 성령님의 은혜(grace)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부터 변화된 상태가 거듭난 상태라면, 그는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며, 날마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마음속에 품지 않으면, 표면만 부드럽고 고요하여 마치 가슴에 가스와 마그마 같은 불필요한 것을 품고 있는 화산 같다. 화산은 터지기 전까지는, 표면적으로 더없이 고요한 것 같으나 그 속에 엄청난 가스, 마그마 따위가 있어서 그것들이 지각의 터진 틈을 통하여 지표로 분출하면 그렇게 무서운 화력을 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산속이나 바다 속에서 불필요한 가스, 마그마 같은 이물질이 부글거리고 있는 한, 어느 시점에 가서 틈새가 보이면 그만 뢀화산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런 날에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 모두, 그 불길 반경에 있는 사람을 태워서 죽일 수도 있다.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쳤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 산 기슭에서 ‘사루누스’ 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 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 멋지게 꾸며주고 있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가 오듯 쏟아져 내렸다. 새들은 날다가 나뭇잎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 새 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그 무서운 불길은 끝내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 네이버 백과 사전 참조
오늘 아침, 주께서 내게 주신 깨달음은, 성도는 과거 폼페이시의 멸망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수비오’ 산은, 영적으로 각종 죄악의 불, 시기, 질투, 음란, 사기, 협박, 공갈, 이런 온갖 악독으로 가득채운 마음, 재앙을 가슴 속에 품은 표면적 유대인의 멸망을 예고해 주는 본보기란 것이다. 폼페이시의 멸망, 그것은, 언제가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너무 많은 가스와 마그마 같은 것을 ‘베수비오’산 땅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베수비오’ 산이 대폭발을 일으키기 전까지, 표면적으로는 더없는 고요를 누리는 것 같았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노래했었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 혹은 거듭났다고 하여도 그 속 사람을 강건하게 성장시키지 못하여 죄의 속성, 멸망할 지옥 불을 가슴 속에 품고서야 어찌 안전하겠는가…
그런고로, 우리는 거듭난 것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속 사람(inner person) 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갈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이 내 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말씀에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난(蘭)에 물을 주듯, 날마다 기도로 내 영혼의 메마름을 적셔주어야 하고, 햇빛 같은 그리스도 사랑의 빛이 내 영혼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오래 전 저를 아껴주 목사님께서 올려주신 댓글 중, "人香百里, 茶香千里, 蘭香萬里"라는 아름다운 말씀이 눈에 띈다. 사람의 향기는 백리, 차의 향기는 천리, 난의 향기는 만리...라는 뜻이겠는데...생각해보면, "人香"이란 하나님 나라에까지 올라갈 것이니, "人香"의 퍼지는 길이는 가히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 17-19) 오늘 이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5-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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