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게 살면 우리의 삶이 잘 풀릴까?

 

 

욥기는 모든 재물과 자녀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리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 흠 없는 사람은 없다(욥 4:17-19; 15:14-16; 25:4-6. 롬 3:9-18, 23 참조). 그렇다고 인간은 고난받아도 마땅한 것일까? 죄의 분량이 고난의 이유만은 아니다. 엄청난 죄악을 행해도 대대손손 건강에 호사를 누리는 이도 있고 사소한 죄밖에 없는데 엄청난 재앙을 겪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죄가 고난의 원인이라 하기엔 분명히 죄와 징벌 사이에 지나친 불균형이 있다(욥 13:23-26 참조).

...

 

만일 개인이 당하는 고난이 죄의 크기와 어느 정도 비례한다면 욥은 우주 전체에서 가장 몹쓸 악인이어야만 한다. 욥은 그럼 도대체 왜 그리 처참한 재앙을 겪은 걸까? 욥기에서 설명하는 그가 당한 고난의 유일한 이유는 그의 경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두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내기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그깟 내기 때문이라고? 사실 표면적으로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냥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으면 안 되나? 이 내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사탄과의 이런 내기를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일까?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계명대로 신실하게 사는 것은 오로지 그 대가가 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욥 1:9). 맙소사! 사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린 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절대로 원망하지 않고 인간의 죄인 됨을 인식하고 늘 그분께 순종하며 찬양해야 한다고. 사실 욥도 처음엔 그랬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로다!” 자신의 한계가 오기까지는! 그때부터 그는 악에 받쳤다. 달라졌다. 이젠 전투 모두로 바뀐다. 더는 하나님의 섭리에 무조건 굴복할 수가 없었다. 그분의 처사가 틀림없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건 정말 아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자신의 결백과 의로움을 주장한다. 자신을 괴롭히시는 하나님께 따지고 비난하며 모질게 대든다(욥 9:19-22). 이런 욥이 정말 하나님이 생각하던 "천하에 이만한 자가 없느니라"고 장담한 진짜 하나님의 사람 맞을까?

결국 하나님이 옳았다. 사탄의 주장과 달리 욥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가장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결코 하나님이 권선징악의 원칙대로 세상을 잘 다스리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삶에 아무 대가가 없이 오로지 재앙과 치욕만 있을지라도 원망을 할지언정 하나님을 떠날 그가 아니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끝까지 읽어야 한다. 욥기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가 복을 받는다는 원칙은 완전히 무시되지 않았다. 시험의 때는 기한이 있다. 이 기간이 다한 후 욥은 모든 면에서 훨씬 큰 복을 받는다. 그는 이전보다 행복한 가정과 번영을 누리며 백사십 세까지 산다(욥 42:10-17). 전에 죽은 자녀를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시험을 이겨낸 그는 말년까지 그 당시 최상의 복을 받으며 살았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욥의 고통은 공감하지 못하면서 오로지 하나님 편에 서서 신학적으로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하나님을 변호하며 욥을 가르친 친구들을 꾸짖고 벌하시는데 오히려 그들의 교훈을 격렬하게 거부하며 하나님께 무례하게 원망한 욥의 말이 정당하다고 그의 편을 들어 주셨다(욥 42:8). 물론 하나님은 욥에게도 인간이 주제넘게 하나님께 무례하게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자제하라고 명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이 막상 그의 소원대로 나타나 말씀하셨을 때 욥은 곧바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고(욥 42:1-6), 자신의 성급함과 무지함을 뉘우친다. 사실 그의 투정들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한 말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진작 나타나실 것이지!

 

욥기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고난받는 이유를 사실 설명하지 않는다. 욥의 질문들에 대한 답은 욥기에는 없다. 의인이 고난받는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일 뿐 인간에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어떤 인간의 지혜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대로 행하셔야 한다는 주장은 다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이 욥을 통해 보여주시는 신앙의 자세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 가운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무례하게 구는 것도 용납하신다.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인간이 감정적이고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창조주께서는 잘 아신다. 우리는 욥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길 고집해야 한다. 제발 만나 달라고 떼를 써야 한다. 하나님이 이런 요구에 쉽게 응하시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신앙,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버티다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만나주신다. 그때는 알게 될 것이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정말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왜냐고? 만나 보면 그 이상의 복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욥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유일하게 행복하고 성공으로 향하는 통로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신앙, 그분이 우리의 복이라는 가르침을 알려준다. 전혀 다른 복을 받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을 것이란 말이 아니다. 욥의 결말을 보라. 다만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라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때가 되면 다 충분히 주어질 것이다. 버텨라. 끝이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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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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