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서 자주 접하는 오류
박영돈 목사 2016. 4. 9. 08:32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이 대목에서 사랑하다는 두 가지 헬라동사,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사용되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처음 두 번은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셨다. 그에 대해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어떤 이는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고 본다. 아가파오는 무조건적, 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반면에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해석하면 주님이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신적인 고차원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셈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신적인 사랑으로는 사랑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했다는 뜻으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세 번째 주님께서 물으실 때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러면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의미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기발한 해석인 것 같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성경은 헬라 문헌처럼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엄밀히 구분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헬라역본인 70인 역(LXX)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상호교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아가파오가 숭고한 신적 사랑만 의미하지 않는다. 한 예로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고 했을 때도 아가파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딤후4:10). 요한도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에서도 두 단어가 등장한다(요3;35, 5:20). 특별히 요한은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동의어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주님과 베드로가 실제로는 아람어로 대화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주님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셨을까? 이 질문에 실패한 자를 일으키는 섬세한 사랑의 배려가 담겨있음을 보게 된다. 실패로 인해 깊은 죄책감과 좌절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이에게 죄와 실패를 잘못 지적하면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그를 회복하기보다 그를 더 망가트릴 수 있다. 베드로의 마음과 그의 상실감을 가장 잘 아는 주님이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밤새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물 가득히 물고기가 잡혔는데 그 수가 153마리였다. 바다 속 어느 곳에 물고기가 몇 마리 있는지를 다 아시는 주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우리 마음을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우리 마음에 센서라도 달아놓으신 듯 우리 마음의 작은 움직임에 대해서도 민감하시다. 우리 마음의 동기와 욕망과 추구와 끌림을 잘 아신다. 베드로가 비록 자신이 장담한 대로 주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에 주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고자 하는 진심과 열정이 있음을 아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 진심을 알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내가 그 진심을 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아심을 직관적으로 안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마음이 서로 통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패로 인해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고백할 수 없었던 베드로도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아시나이다는 말에서 주님이 자신의 진심을 아심을 그가 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주님이 세 번이나 이렇게 물으시니 베드로가 근심했다. 자신이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이 생각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세 번 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심으로 그의 과오를 상기시키시는가. 그것은 그의 실패를 온전히 만회해주시기 위해서였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것을 이제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상쇄해버리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를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변절자가 아니라 세 번이나 최고의 사랑을 고백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책감과 패배의식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자로서의 자신감과 권위와 명예를 회복해주셨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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