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짐보님의 방 2016. 5. 10. 00:1516.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고
깨끗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르셨고
부르심을 저버리는, 형제자매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무시함 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For God hath not called us unto uncleanness, but unto holiness.
He therefore that despiseth, despiseth not man,
but God, who hath also given unto us his holy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4:7-8]
우리를 부르심은 신성(holiness)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성품
but unto holiness,
부르심은
of God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도록
of places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가 되도록
of things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기 위하여
성령님과 함께 하시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으로 서로 사랑하게 함이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But as touching brotherly love ye need not that I write unto you:
for ye yourselves are taught of God to love one another.
And indeed ye do it toward all the brethren which are in all Macedonia:
but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And that ye study to be quiet, and to do your own business,
and to work with your own hands, as we commanded you;
That ye may walk honestly toward them that are without,
and that ye may have lack of nothing. 데살로니가 전서 4:9-11]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했듯이
서로 사랑했고 더하여 마게도냐 교회 형제들도 사랑하였기에
바울은 그 사랑의 행위를 더욱 하기를 간청했다.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이것이 교제(fellowship)이다.
교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경건’으로
교제의 의미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의식이 예배이며
교제의 의미가 하나님을 향한 고백적인 생활이고 삶이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교제라면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들의 예배이다.
그래서 포괄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자하자는
의지와 태도가 표출된 언행이며 감사와 찬양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교제가 예배이며
경건이라
경건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다른 지역의 형제자매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경건하여져서
일용할 양식인 말씀과 물질을 나누어 자신과 같이 서로를 사랑하는 교제가
이루어졌음은 서로 사랑하는 교제, 그 교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의 서로 사랑하는 생활이 삶이 되어
더불어 기도로 간구하고 고백하는 마음의 자세와 실천이 경건이라
이것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여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으로 되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다시 힘을 갖는 공급하시는 힘(power of charity),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었다.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입술로 감사와 찬양으로 고백하고 경배하며
생활로 시인하는 삶의 예배가
이를 하나님께 인정받고
성령님으로 허락받은 능력의 힘(power)이 권능이 되어
서로 사랑하는 능력이 되고 또 다시 힘을 얻는 힘은,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힘이
권능 받은 자가 성령님으로부터 공급받는 힘이라
세상을 이기고 변하게 하는 힘이고
증인으로 사는 자의 힘의 근원이라서
오늘날 우리가 무기력한 원인의 하나는 진정한 교제를 잃었기 때문이며
이는 진정한 예배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건을 잃은 모습은
무엇을 마시고 먹고 입고 더 챙기고 더 가질까 하는
세속화된 믿음을 가장(假裝)한 기복신앙으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의(공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안락(安樂)을 먼저 구하여 자신의 만족의 기쁨과 도취를 믿음의 결과인양
건강하고 부자가 되어 모든 일에 만사형통(萬事亨通)을 바라는 신앙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 경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For the wrath of God is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who hold the truth in unrighteousness;
Because that which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th shewed it unto them. 로마서 1:18-19]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와 공의롭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나타나니, 밝히셨으니
하나님을 그들을 익히 알고 그들에게 진노를, 벌을 심판을 보이셨다는 뜻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며 경건하지 않아서 공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에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1:28-32]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돌아서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경건하지 못한 모든 언행이
이미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 이므로 악을 도모하는 자며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된다는 의미는,
이미 성령님과 함께 한 삶이 아니라서
생명이 붙어 있어 능력을 자랑하며 유명한 사람이 되어 부자와 같이 화려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목숨이며,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옳다 한다는 의미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믿음을 확정하고 확증하지 못하면 버림받은 자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믿음 안에 있다면 일상생활에서 교회에서 생활로 자신을 시험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 ‘charity’
그 고귀한 사랑으로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상대했는지
그 위대한 사랑으로 위대한 넓은 마음을 가지고 형제자매를 대했는지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는지 자신을 확증하고, 증명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삶이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타락한 사람이다.
그럼 현대의 교회와 비교하여
데살로니가 성도 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을까?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고 서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고
말씀과 물질을 나누고 연약한 지체를 도움으로
자신들의 믿음이 더 굳세게 되어 형제의 우애를 더 곤고히 하고
우상을 버림은 물론 다른 지역의 성도를 까지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이 소문이나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비교하면 어떨까?
예수님 이후로
한국교회 만큼 수많은 종류의 예배와 더하여 새벽예배
이렇게 많은 종류의 예배를 드리던 때가 있었던가.
수많은 부흥집회와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은 어떻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헌금의 종류는 어떻고.
아마 타락의 대명사인 중세 교회도 한국교회만큼 예배를 드리지 않았고
한국교회 만큼 많은 헌금의 종류도 없었고
부흥회와 허다한 운동과 프로그램 등
헌신과 열정이 대단한 것 같았는데
그런데 왜
열심과 열성이 두 번째라면 서러울 한국교회가 이처럼 망가졌을까.
교회는 싸움박질 하는 장소로 오래전에 인식되었고
교인이 정직하다는 말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교회의 모든 직분은 교회 밖 세상과 교회 안에서도 더 이상 존경해야할
대상에서 멀어졌고 존경은커녕 존중과 관계도 없어
교회가 거대하고 화려해진 만큼 그 만큼 초라해 보인다.
왜 그럴까?
시대가 변했다고?
문화가 다르다고?
진리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고 그렇지 않다면 진리가 아니기에,
예수님도 그 당시의 문화와 전통을 권력자를 존중하셨다 는 주장의
변명을 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하나님은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그리스도는 주 시요, 우리 모두의 구원자이시자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어찌 한 시대의 위정자와 문화와 전통으로 예수님을 구속(拘束)하여
자신의 설익은 지식에 가두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어그러진 모양이라
능력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 능력을 부정하는 자들이라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고 자신의 명예와 대중적인 명성으로 진리를
가로막을 자들이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종당에 그럴 자들이다.
돌아가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령님의 경건으로,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의 역사에 죄인이 된다.
경건(Godliness),
하나님을 선택(Godliness)할지
자신을 선태(unrighteousness)할지
세상을 선택(ungodliness)할지
선택은,
이제 우리는 복음의 역사에 죄인이 되느냐 아니냐의 선택의
기로(岐路)의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선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선택을 은혜(Grace)라 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태도와 삶의 응답을 경건이라 하고
그 선택을 또 기회(Second chance)라 고백하면
은혜(Second chance)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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