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상의 칠언: 네번째 말씀 "나를 버리셨나이까?"

김한길 목사 2016. 6. 19. 03:43

십자가상의 칠언: 네번째 말씀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못박히신 지 5시간이 지난 오후 2시쯤, 네번째 하신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서 “엘리“는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아람어인 ”라마 사박다니“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 홀로 처한 고독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던 심한 절망감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아버지여,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반문하며 절규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온 세상이 당신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이신 하나님만큼은 버리지 않으실 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마저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절규하며 반문했습니다.
그러한 반문 앞에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정오 12시부터 갑자기 온 세상이 캄캄해졌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순간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을 볼 때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버리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왜 버리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찍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준비했던 침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요1장) 이 세상 온 인류의 죄를 예수님이 홀로 다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죄의 대가를 치룸으로서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 죄사함 받도록 하는 하나의 희생양이 될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온 인류를 대신한 죄인이기에 죄인입니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인이기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그대로 당하도록 방치했습니다. 그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루도록 했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맛보도록 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의 절규를 듣고서 그대로 방치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어찌 아들 예수의 절규 앞에 아픔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계획했던 인간구원의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그 아픔을 참고, 당신의 아들 예수를 그대로 방치해 두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처절한 고통과 죽음과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버려둠 속에는 독생자 예수를 희생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과 눈물이 들어있습니다.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열망과 동시에 아픔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그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멜깁슨”은 그것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영화 속에 하나님의 눈물 한방울로 그것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철저한 공의와 철저한 사랑을 함께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많지만 죄에 대해선 잔인하고 가혹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그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루도록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도 많다”고 했습니다.(시40:12)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한 인간이 평생에 지은 죄는 자신의 머리털 만큼 많은 20만개는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대머리인 사람은 죄가 없다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양심에 물어보면 죄가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요, 미국의 영적각성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인간을 가리켜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Angry God”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은 후에 만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눅12:5)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죄가 없다면 모를까 혹시 하나라도 있다면 죄에 대해 준엄하게 보응하시는 “Angry God” 앞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그토록 처절하게 죽게 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고서라도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계획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지옥은 빼놓고라도 “Passion of Christ"에서 예수님이 맞으셨던 그 많은 매와 회초리와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형을 우리 각자가 받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찿아온 절망 앞에 갖는 하나의 질문은 “하나님은 과연 나를 버리셨나?”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만드셨고, 왜 이렇게 하셨는가?”입니다. “왜 나를 버려두시는가”입니다.

그럴 때 저는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처럼 팍팍 대답을 해주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고, 정말 살아계신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왜 이렇게 하셨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보고 계셨던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상황을 다 지켜보고 계셨고,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런 십자가 사건을 통해 당신의 원대한 구속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당신의 보좌 우편으로 올리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천하만민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절규와 신음소리와 고통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당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계획과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장 하나님의 그 뜻과 계획을 알기엔 힘이 들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침묵 속엔 우리를 향한 어떤 계획과 뜻이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언젠간 그것들을 아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독생자를 버려서라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자녀일찐데 어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대로 버려두시겠습니까!

그래서 찬송가 작가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사랑이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얻노라”

제가 그랬습니다. 아내 잃고, 어머님 마저 3개월 후에 잃고,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 때, 밤마다 저는 하나님께 절규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의 모든 걸 지켜보셨고, 제가 알게 모르게 택사스로 인도하고 계셨고, 신학교에 입학시키셨고, 마침내는 천사도 흠모하는 주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아내도 주셨고, 주님의 이슬 같은 청년들을 키우는 교회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약국하면서 살 때 보다도 훨씬 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제가 신학교 갔다고 해서 여러분도 신학교 가야 되는가 부다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에 맡는 가장 최선의 길, The Best Way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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