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삽한 자기 꾀로


‘왕자(王子, Prince)’가 좋긴 좋은가 봅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 그러니까 ‘나는 왕자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 '왕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첫 번째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때, 두 번째 아비멜렉은 이삭 때 등장합니다. 모두 그랄, 애굽으로 가는 길목 바닷가를 다스리는 블레셋 왕입니다. 세 번째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자기 형제 70명을 죽이는 악행 끝에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습니다. 네 번째 아비멜렉은 다윗시대에 제사장으로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닥친 기근을 피하여 사라를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했다가 바로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한 때는 아브라함이 80세 무렵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근으로 인하여 그랄 땅으로 갔다가 또다시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똑같은 실수를 하여 아비멜렉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한 때는 아브라함의 99세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그 실수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얻었고, 이 기사의 바로 앞에는 에서와 야곱의 팥죽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이 기사 뒤에는 에서가 40세에 가나안 족속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80세에 그 실수를 저질렀던 때로부터 최소 60년, 최대 100 년이 지난 다음임니다. 아무튼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데리고 그랄 땅으로 내려가서 자기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죽임당할까 봐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알게 되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데 그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 곧 쓰임 받는 자들에게 형통함과 순적함,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아울러 또한 끊임없는 시련과 연단이 닥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신 자들에게도 위험과 환난이 닥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아무런 어려움이나 고통 없이 주어지는 은혜는 은혜가 되지 못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며 부르짖어 그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동역하기를 원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부름 받은 자들에게 전혀 부름 받을 만 한 자격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응답하지 못 하고 넘어지고 패배합니다. 닥치는 어려움과 환난을 이기지도 못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그릇이 되지도 못 하고 자격도 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조차 없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부르짖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하나님 홀로 알아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도무지 도움 안 되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홀로 ‘여호와의 열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랄에서 담대한 믿음으로 이기지도 못 했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지도 못 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꾀로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스스로 생각해낸 얕은 꾀로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지 아니하셨더라면 그들은 그대로 그 파멸의 구덩이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 하였기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삭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흉년이 닥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이삭이 그랄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하시면서 땅과 자손의 약속을 이삭에게 다시금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쯤 하셨으면 이삭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움 없고 담대하였어야 할 것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지하지 못 하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하였다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비겁한 실수를 는 똑같이 따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화내시거나 꾸지람하시건나 후회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건져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로왕과 아비멜렉을 혼 내시고 아브라함에게 소와 양과 은금과 노비를 주게 하셨습니다. 대적들이 아브라함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찾아와 화친하게 하셨습니다. 이삭에게는 100배를 거두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결국 찾아와 화친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자들이 믿지를 못 합니다. 안 믿는 자들이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아이러니(irony)입니다. 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데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바로와 아비멜렉과 맞서지도 못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못 하고 아내를 누이라 하는 비겁하고 얍삽한 꾀로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저들로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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