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력이 아니라 합심 기도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신앙생활에 매뉴얼은 없다.

성경을 개인적 의도나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읽으면 온전한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자칫 이해의 부족, 착각, 오류는 물론 이단으로까지 흐릅니다. 환난 중에 힘을 얻어 위로가 되는 말씀만 골라 읽는 정도는 그나마 순진한 편입니다. 잘 믿어서 형통하기 원하는 자의 성경은 기복주의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말씀으로만 가득 찰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판단 정죄하고자 하는 심사가 있다면 성경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의 상대주의 도덕교과서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불순한 의도 없이 읽는데도 쉽게 오류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기도에 관한 말씀을 읽는 신자들의 관심은 거의 대부분 어떻게 하면 빨리 응답을 받을 수 있을 지에만 쏠립니다. 본문도 그 대표적 예로서 두세 사람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응답이 빨리 잘 된다고만 이해합니다. 말하자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나 앞뒤 문맥에서 드러나는 본문의 정확한 의미와 무관하게 예수님이 단지 기도하는 방식을 가르친 양 받아들이고 치웁니다.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 이루게 하시리라”는 표현에만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들이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함께 하셔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또 응답이 잘 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기도의 방식이 응답이 잘 된다고 이해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와 근거는 그 방식에 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심지어 신자들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나 견고한 믿음일지라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완벽하고도 신실하신 당신만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움직이실 뿐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어떤 방식이 있다고 말하면 엄밀히 따져서 틀린 진술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바로 그 방식 때문에 그분의 은혜나 능력이 더 많이 나타나기는 마찬가지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만 보십니다. 특정한 기도 방식을 선호, 고집, 의지하는 것도 사람의 외모에 해당됩니다. 쉽게 말해 어떤 매뉴얼이 있어서 그대로 따라하면 하나님이 더 잘 움직일 것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면 그런 예상, 추측, 기대, 소원, 믿음부터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 대신에 기도하는 우리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가장 먼저 지금 기도드리는 제목과 내용이 정말 자신에게 갈급한 문제이기에 꼭 이뤄져야만 한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뤄져도 그만, 안 이뤄져도 그만인 경우는 구태여 기도할 이유조차 없지 않습니까? 또 모든 기도의 바탕에는 자신의 무능함, 어리석음, 연약함을 철저히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순전한 믿음이 따라야 합니다.

한 마디로 갈급함과 믿음이 기도가 기도되게 하는 두 근본요소입니다. 이 둘이 없으면 아예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기본 구조 위에다 실제적인 기도의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온전한 기도가 되려면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둘 다 갖추어야 하는데 갈급함과 믿음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두 기본 조건은 그런대로 갖추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기도의 충분조건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기도가 응답이 됨으로써 자신의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실은 이 조건이 더 우선되기를 원하십니다.

앞에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더 선호하시는 매뉴얼이 따로 없다고 했지만 특이하게도 기도에만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을 이미 주셨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현실적 안락과 형통만을, 또는 문제와 환난의 해결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을 하나님도 아신 것입니다. 일종의 예외로 제발 기도만은 이렇게 하라고 모범 답안을 가르쳐 주신 셈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소원으로 시작해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드러나길 바라며 마치는 기도입니다. 물론 자신의 일용할 양식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목이 결코 우선이 아니며, 또 단지 일용할 양식이었지 도에 지나친 풍요나 자신의 욕망을 구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기도를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실천해 보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 십자가의 잔을 마시지 않았으면 하는 자신의 소원은 빌되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달게 마시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순전한 중심을 하나님 앞에 하나 가감 없이 온전히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만약 자기 소원의 응답만 목적이라면 십자가를 비켜가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을 것 아닙니까?

기도하는 존재 - 인간

인간의 외모란 인간이 세상에 나와서 스스로 만들어 쌓은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잘 보이려 과장과 가장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본 모습과 다르게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중심은 하나님이 원래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고서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은 곳입니다. 당신과 교제토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외모가 아닌 중심을 드리는 것이 기도라면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은 당신께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 넘어간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그 중심이 부패되었다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면 성령이 내주하는 전으로 바뀝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인간이 만들어졌던 원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교통할 수, 쉽게 말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불신자 때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 믿지 않거나 모릅니다. 어쩌다 간절하거나 위급한 문제가 생기면 알지 못하는 천지신명에게 자기 형통만 빕니다.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확신도 없으니 그분의 뜻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신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분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자신을 향한 뜻과 계획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그대로 살고 싶은 소망도 생깁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에 다양한 뜻이 있지만,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게 된 것도 그 중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만 당신께 기도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피조물과 가장 유별나게 다른 인간만의 특성이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 형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단순히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반드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a)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형상을 닮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우리라는 복수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다신주의(多神主義)를 지지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태초부터 성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창조 사역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을 위격이 다른 세 종류로 만들었다거나, 인간 안에 그런 세 본질을 함께 내재시켰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완전한 사랑으로 합력하고 교제하였듯이 인간들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도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7) 하나님의 형상 안에 남자와 여자 같은 성(性)의 구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남녀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게 다스리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창조의 뜻에 비추건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평생에 해야 하는 일도 두 가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신자가 그분을 사랑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본질상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평생을 두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거기다 처음 만드신 인간의 형상대로 회복되었기에 마땅히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만의 안위만 염려하던 자에게서 남들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처럼 자신이 수고, 희생,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더라도 다른 이들이 주님의 새 생명을 얻게끔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된 것입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사랑은 불신자와는 달라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소유나 능력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자도 현실적으로는 자기 시간, 소유, 능력 등을 사용해 자신의 열정과 긍휼과 믿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이 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 대신에 주님의 것을 사용하여 이웃을 섬기는 셈입니다.

또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있기에 스스로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마음이 주님처럼 정말 순전하게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만 비로소 신자의 인간적인 불완전한 사랑이 주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대체됩니다. 하늘에 있던 주님의 긍휼이 이 땅까지 내려와서 신자를 통해 이웃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웃을 섬기되 가장 먼저 이웃의 삶의 모든 영역 위에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란 신자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기독교 신자의 종교적 의무로 그쳐선 안 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는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입니다. 중보기도로 이웃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형상을 회복한 참 인간답게 사는 첫 걸음입니다. 요컨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합심기도의 본질

신자가 동료 성도나 불신자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두세 명 이상 모여서 합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의심이 갈 수 있습니다. 혼자 집에서도 열심히, 간절히, 성실히 이웃을 위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흔히 이해하듯이 합심 기도의 목적과 효능이 하나님 보좌를 흔드는 신령한 능력이 더 강해지는 것인지, 성도 간 교제를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인지, 함께 힘을 합해 기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인지, 잘 분별이 가지 않습니다.

물론 합심기도에 그런 요소들은 분명히 작용합니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기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기도의 본질을 따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독립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다른 어떤 가르침과도 연결되지 않는 말씀이라면 합심으로 중보 기도만 하면 응답이 잘 된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가운데 나온 말씀이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본문 앞에 어떤 기사가 나옵니까?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큰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먼저 낮아져서 소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자여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네 형제 중에 누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권면, 증참(證參)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마18:1-17)

그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절)고 했습니다. 그럼 땅에서 매고 푸는 문제는 어떤 것입니까? 바로 스스로 먼저 낮아지는 일, 소자를 잘 대접하는 일,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여 회개케 하는 일 등입니다. 그 일을 두고 제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면 하늘에서도 용서와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선 바로 합심중보기도에 대한 본문 말씀이 이어지는데 어떻게 시작합니까?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 17절을 풀어서 설명하면서 다시 강조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미 1-17절까지 가르친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처럼 다시 강조하자면, “스스로 먼저 낮아지는 일, 소자를 잘 대접하는 일,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여 회개케 하는 일” 등입니다.

바꿔 말해 하늘나라에서 누가 클지 논쟁, 시기, 쟁투하지 말고 당신의 제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부터 성실히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자연히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한 합심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와 기도 응답의 신속성과는 어떤 직접적 연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합심(合心)은 말 그대로 기도하는 두세 사람이 똑 같은 마음을 함께 모으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하는 힘을 보태어서 강력한 역사를 일으켜보려는 합력(合力)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정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소자를 주님의 심정으로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 중에 범죄한 자도 정말로 불쌍히 여기며 조건 없이 용서해주려는 마음에 일치해야 합니다. 신자가 땅에서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누구라도 죄나 사단의 묶임에서 풀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늘에서 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하나님 대신에 판단, 정죄, 심판할 권세를 주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것입니까? 어떤 이를 정죄 심판해달라고 기도로 요청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와 구원은 얼마든지 신자가 구할 수 있고 또 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정죄 심판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구해선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돕고 섬기며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지, 판단 정죄 심판하라고 창조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신자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인간은, 신자끼리도 서로 사랑만 하기에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최대한 노력, 훈련해도 평생을 두고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정죄 심판은 인간의 몫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 그런 일에 허비할 시간과 여유조차 사실상 없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에서 하신 말씀과 짝을 맞추려는 표현법입니다. 범죄한 형제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는 것이 땅에서 푸는 일입니다. 반면에 교회의 증참, 권면 등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야 하는데, 바로 땅에서 매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출교만 결행할 것이 아니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말씀대로 여전히 하늘에 대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로선 어쩔 수 없이 출교시켜야 하지만 하나님께는 정죄와 심판보다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끝까지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교회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범죄한 형제의 출교를 결행했던 심정 그대로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4,5) 교회 안에 음행한 형제를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내쫓았지만 언젠가는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결행했다는 것입니다. 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 즉, 교회의 영적 순결성을 보존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이르되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왕 다시 강조하려면 더 많은 사람이 합심하라는 것이 좋을 것인데도 왜 겨우 두 사람이라고 했겠습니까? 증인의 최소 요건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 부목사 둘이서 합의만 하면 출교시켜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어떤 행사라도 절대로 법적 하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출교를 시키는 데도 교회 안에 먼저 온전한 합심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간의 모든 행사는 반드시 한 주님, 한 성령, 한 믿음, 한 진리, 한 마음 안에서 기도하며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바로 이어 베드로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 그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포인트가 형제들 사이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에 있다는 점을 확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두세 명이 모여 합심해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 되리라는 요소는 아예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혼자서 하는 합심 기도

재차 강조하지만 합심기도가 신자 여러 명이 모여 함께 기도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몇 명이 모였든 간에 그들의 마음이 같아야, 그것도 스스로 기꺼이 서로 낮아져서 진심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묶인 잃어버린 양들을 되살리려는 애끓는 열망을 똑 같이 공유할 때만이 온전한 합심기도가 됩니다.

단순히 교인들이 모여서 함께 했다고 합심 기도라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더 응답이 잘 되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교회 전체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면 응답되지 않은 일이 없어야 합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되길 원한다는 이상한 결론까지 나옵니다.

물론 신자가 가능한 많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럼에도 가라지와 알곡이 섞인 상태에서 중구난방으로 기도하는 것보다는, 온전히 거듭나서 이웃을 당신을 사랑하듯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단 몇 명의 기도를 더 기뻐 받으십니다. 아니 그런 자 단 한명을 통해서라도 그렇지 못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보다 더 큰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엘리야 한 명의 순전한 기도로 삼년 간 하늘에 비를 그쳤으며, 불이 내려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심판했고, 마른하늘에 갑자기 뭉게구름이 생겨 폭우를 퍼부었듯이 말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 단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고 응답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하고, 스스로 겸비해진 다음에 구하라고 합니다. 또 그러면 이미 징계로 내리신 가뭄, 황충, 염병의 재앙 등도 다 그치고 그 땅을 고쳐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본질은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겠다는 소원과 열망의 표시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스스로 낮아지고, 죄에서 떠나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워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몇 명이 되었든 완전히 합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나아가 신자 개인이 드리는 기도라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드렸던 주님의 심정과 합심해야만 합니다. 이 땅의 황폐함과 길을 잃고 헤매는 목자 없는 양들을 두고 정말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항상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실상은 목사가 기도 제목을 꺼내 놓을 때에 마지못해 중보기도 하는 정도입니다. 또 구역예배에서 각자 기도제목을 꺼내어서 구역식구들과 함께 기도하면 응답 잘 받으리라는 기대밖에 못합니다. 중보기도라는 형식은 갖췄지만 합심이 아니라 합력한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솔직한 영적 수준입니다. 또 현실 문제가 너무 고달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기도라도 하니까 불신자 시절에 비하면 엄청나게 진전한 모습입니다. 또 그런 연약한 모습이라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는 어차피 연약하고 가난하며 아직도 완악한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 진토 같은 체질임을 그분이 더 잘 아시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서 꼭 보기를 원하고 기뻐하는 가장 기본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서두에 강조한대로 외모가 아닌 중심만은 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을 철두철미 까뒤집어서 온전히 실토, 자백,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 분노마저 다 꺼내 놓아야 합니다.

외모로만 경건하고 의롭게 기도하는 것에는 하나님이 일절 귀를 막으시지만, 당신께 욕하고 대들더라도 진짜 중심이 그러하다면 오히려 더 경청하고 심지어 기뻐하면서 들으십니다. 또 비록 내 개인적 기도를, 심지어 불만과 의심에 차서, 했을지라도 중심을 온전히 드러냈기에 하나님은 하늘에 이미 예비해놓으신 놀랍고도 거룩한 은혜와 권능을 기도한 신자뿐 아니라 그 주변에 풍성하게 드러나게 해주십니다.

말하자면 우리 중 대부분이 온전한 합심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영적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개인 기도에서라도 주님과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황폐함과 잃어버린 양에 대한 주님의 민망함과 통분함에 동참한다면 그럴 수 없이 좋겠지만, 그보다 나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라도 제대로 헤아리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분이 왜 나를 택하여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해주셨는지 온전히 깨달은 바탕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심령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셔서 세상으로 다시 보내신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모든 중심을 있는 그대로 하나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자기 자신부터 땅에서 온전히 풀고 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점차 이웃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이미 구원 받은 신자가 믿은 후에 가장 많이 또 크게 누려야 할 권세란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합심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BLUE BEAM 비행접시(UFO)로 가짜 휴거 사건을 일으키어 신자들을 납치하는 PROJECT가 있다고 몇년 전부터 폭로하시는 분들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박은숙 권사는 이 음모와 흡사한 예언을 했습니다.

 

아래 혜성에 대한 내용은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내용인데 니비루라고도 합니다.  아이손 혜성은 소멸했는데 박은숙 권사가 틀린 예언을 했습니다.

 

새예루살렘성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 왕들을 다스리십니다. 성령님이 주인이라는 예언은 성경과 틀린 예언입니다.

 

박은숙 권사는 예수님이 2013.3.31일부터 전삼년반 환란 시작이라고 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래놓고 환란 중간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귀 말을 한다고 모순된 비판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전한 말도 모르고 있습니다.

 박은숙(인숙) 권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머니 성령님이라는 말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외에도 모순되고 틀린 말을 예수님이 알려준 말이라고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박은숙 권사가 전하는 말이 틀리는지 맞는지 따져보지말고 비판하지 말고 2015.9.28일 수장절 휴거를 무조건 믿으라고 했다고 전하였습니다.  

 

성경은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하려 보라고 했습니다.

 

김여명님은 목사라는 칭호를 혐오하니 자신을 목사라 부르지 말고 오빠 , 형님 등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아래 글들은 유트브에 올린 김여명님의 2015.9.28일 수장절 휴거에 대한 전도(광고) 글입니다.

이 글들에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이상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환각 비숫한 상태에 빠진 듯이 보입니다.

 

계속하여 틀린 휴거년월일을 알려주고 광고하고 전하라고 한 영이 과연 예수님인지 시험하고 검증하면서 성찰하고 자각해보야 할텐데

무조건 순종하면서 충성하면서 유리하는 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복음전도가 저항을 받게 하고 

성도의 예언이 불신당하게 한 죄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습적으로 거짓된 휴거년월일 예언을 남발한 김여명 목사, 자타가 인정함, 자신이 말한 날자에 휴거가 안되면 자신이 거짓말 목사라고 말했음 -------- 

 

https://www.youtube.com/watch?v=u1LDhpZ0n1I

 

이만성 목사와 몇 사람은 1991년도에 공중에 예수님이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신 광경을 목격하였으니 1991년도에 예수님이 공중 강림하여 계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만성 목사와 김여명님은 1992.10.28일에 예수님이 공중에 강림하여 계시다고 주장합니다.

그날 성도들의 휴거가 있다고 확고부동하게 전세계에 전파해놓고도 성도의 휴거가 안일어나니까 그 때부터 휴거가 시작된 것이라는 애매한 주장을 합니다. 

예수님의 공중강림과 휴거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휴거확정년월일 예언 선포 전파가 여러 번 틀렸습니다.

이에 대한 회개와 사과가 없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틀린 휴거년월일을 선포하게 도와주신 과거 간증을 하면서 틀린 휴거확정년월일 예언 선포 전파를 늙어서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혹받는 신자들은 계속 있습니다.

무려 23년 동안이나... 지금 30세는 7세였고 40세는 17세였을 때부터...

 

 

 

 

 

 

 

 

 

 

 

 

 

 

 

 

 

 

 

 

 

위의 글이 있는 동영상 주소--https://www.youtube.com/channel/UC76swX4Ukq8R4NpqZG6LMNg

 

이 아이들은 왜 '폭탄'이 돼 죽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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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세 선택과 이론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믿는다.15)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과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거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빠진 자기 백성( 1: 21)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이미 인간 역사 가운데 존재할 자기 백성을 구원키로 작정하셨으며 처음부터 유기할 인간들을 택자들로부터 선을 그어 분리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유기의 원인자가 되므로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게 되는 어리석음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1: 28) 하선 창세기의 기록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나님의 택자인 자기 백성 에게 주신 말씀이다. 범죄한 모든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뜻은 택한 자기 백성이 피조 세계를 다스리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인간들( 2: 2) 모든 것을 상실당하여 원래의 상황이 뒤엉키게 되었다.

 

선택할 자들과 유기할 자들 사이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선을 그어 양분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16)

 

만일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창세 전에선택한 자기 백성을 피조 세계인 지구상에 존재케 하려 했을까 하는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남으로 인해 모든 인간들은 여인의 분만을 통해 태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인을 통한 인간의 분만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세상에 출생하는 자체가 심판이 아니라 여인의 자궁을 통해 태어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다.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3 : 16)라는 창세기의 기록은 그에 대한 분명한 증언이다.

 

말씀은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허락하셨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설령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자기 백성을 피조 세계에 보냈을 것이며 그때는 여인의 자궁을 통한 분만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해 인간은 육체적 생식력을 갖추게 된다. 인간의 육체적 생식력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17)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여성을 통해 출산하게 되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18)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선택과 무관한 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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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m.5; The Canons of Dort 1.11;  The Belgic Confession, 16 하나님의 영원한선택.

16) 유기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은연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게 우려가 었다. 하나님께서는 유기한 자들로 하여금 범죄케 했다는 논리가 성립될수 있다. 그것은 결국 죄에 대한 하나님 책임론에 빠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 C머띠n 1552 발표한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사장에 의존하여 창세 선택과 더불어 유기를 매우 중요하게생각했다. 하지만 K. Barth J. Calvin 유기이론에 대해 강한 반기를 들었다. 물론 이런 류의 주장은 이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예정론에 관한 K. Bh의신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우리의 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유기에 관한 그의 주장을 생각해 본다. 그는 1942 출간된교회교의학 n . 2에서 예정론을 다루면서 유기이론을 부인하고 있다. 아직 인간들이 존재하기도 전에 일부를 지옥에 가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기를 예정한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구원을 위해 모든 사람을 선택했을것이며 영원한 멸망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유기할 자들을 따로 예정할 리만무하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만인구원론을 배경으로 히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물론 K Barth 유기이론 부인과 필자가유기이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필자는 하나님의 형상을닮은 자들에 대한 창세 선택이 있었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택하실 자와 유기할 자를 통일선상에서 따로 구별한 것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7) Augustine, On Gensis against the Manichees, 1. x .30; 라은성 , “어거스틴의 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안명준 서울: 이컴비즈넷 2005,p.7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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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빠진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선택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은 사탄의 수하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간에 모든 인간들은 가운데 출생하게 된다. 우리가 분명히 유념해야 점은 모든 인간이 멸망에 처하게 원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궤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죄의 조성자가 없으며 사악한 사탄이 죄의 조성자이다.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그 속성상 결코 죄의 조성자가 없다.19)

 

창세 선택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께서 임의로 택자와 불택자를 구분하셨다는 생각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을 배경으로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할자와 유기할자를 창세 전에 절대적인 자기 주권에 따라 임의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간이 범죄하기는 커녕 생기기도 전에 그런 임의적 분류를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비추어 공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있다.20)  범죄 이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이론을 따르게되면 하나님에 의해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분류에 따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가 있으므로 쉽게 받아들일 없는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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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필자는 성도의 혼인을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섭리로 이해한다. 성도의 혼인은 인간의 배우자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만일 혼인에 있어서 배우자 선택 논리가 성립되면 자칫 진화론적 개념에 빠지게 하는 우려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혼인과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의 비밀을 창세 선택과 예정의 의해 이끌어 가고 계신다.

19)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1.

20) 알미니안주의의 자율구원론이나 만인구원설 등의 이론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할 있는가하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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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일부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주장이 었다.21)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면서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보았으며 그로 인해 미래에 존재하게 인간들 일부를 선택하시고 일부는 유기하셨다는 것이다. 이 역시 개별 인간이 출생하지 않았을 뿐더러 타락하기도 전에 선택과 유기를 했다는 점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속성에 조화되지 않는다.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하나님께서 택할 자와 유기할 자를 정하셨다는 주장이 있다. 인간이 범죄하지 않아 아직 죄가 존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유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논리상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담이 타락한 후라 할지라도 여전히 태어나지도 않은 개별 인간들에 대해 일부를 선택해 자기 백성으로 삼고 다른 일부는 유기했다는 점에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선택설에 문제가 았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행위 구원을 주장하며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행동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가장 공평하다고 한다. 선하게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것이며 악하게 산 사람들은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다수 신학자들은 차라리 이것이 선택설보다는 공평한 입장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히는 인본적인 사고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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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타락 선택과 타락 선택의 신학적 개념은 시간과 역사 속의 사건을 기준으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존재했던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 속에 포함된 개념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철학적 관념에 머무르는 신학적 사변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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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결국 모든 인간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할것이라 주장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성경의 기록들을 근거로 한주 장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때문에 나타나는 양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한면 영혼멸절설을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더러 었다. 하나님은 멸망받을 자들을 영원토록 고통에 빠뜨리는 잔인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인간들의 영혼은 멸절되어 없어진다고 한다. 그들의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 창세 하나님의 자기 백성만의 존재 선택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일 있다.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에 대한 불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없는 이론이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동성애 확산, 사회구조 붕괴될 수도…비난ㆍ정죄 넘어서야”


성경적으로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분명하지만, 교회가 동성애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고 또 품어야 하는가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지난 22일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박문수 교수는 동성애 확산의 심각성과 함께 교회의 대안을 제시했다.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박문수 교수(가운데)가 동성애를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인간 본성 타락의 증거…교회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박문수 교수(목회신학연구원 원감)는 동성애 확산이 사회구조의 붕괴를 가져올 만한 중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서의 역사를 통해 왜곡된 성문화가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었음을 생각하면, 오늘의 동성애 문화는 종말적 현상이요, 인간 본성의 타락성을 여실히 증거해 주는 현상”이라며 “동성연애 풍조가 사회 전반의 인식과 법적용에 있어서 묵인되고, 교회의 지도자로 동성연애자가 안수 받거나 시민적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동성애를 단순히 유전학적이고 하나의 질병으로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동성애 행위를 합리화시키거나 부분적으로 보려는 태도”라며 “동성애를 인간의 전체성(타락한 본성)에서, 시회심리학적인 병리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동성연애자들의 행위를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을 넘어서, 저들의 문제를 신앙 안에서 해결하도록 공동체적 관점에서 도와야 한다는 게 그의 견해다.

박 교수는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욕망으로 심각한 죄지만, 돌이킬 수 없는 죄가 아니”라면서 “교회는 우리나라에 이미 팽배한 동성애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동성애를 접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보호해야 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동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다가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관련 박 교수는 ‘동성애 어젠다’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동성애 어젠다 중 하나는 동성애의 생활방식을 차별하는 교회와 단체 심지어 개인까지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라며 “보수주의 교회의 입을 막고 신망을 잃게 만들기 위한 그들의 전략 중 하나는 동성애 어젠다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하기보다 온건한 교회지도자들의 동성애지지 입장을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회의 일부가 동성결혼을 지지한다면 나머지가 왜 그것에 반대하는지 설득력을 잃게 된다”며 “주류 기독교가 동성애자들의 뜻에 동의할 경우 게이 어젠다에 반대하는 이들은 괴팍한 근본주의자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

따뜻하게 바라보고 치유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결정을 내리도록 이끌어주고, 변화를 원할 때는 적극적으로 돕는 것. 박 교수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동성애자 자신이 원할 경우 교회는 동성애적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며 “변화 가능한 동성애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 치유와 상담, 돌봄 등 지속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성애적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는 독신생활을 권장해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도록 이끌 수 있으며, 동성애적 기질이 고착화돼 어쩔 수 없이 동성애가 행위로 표출될 경우엔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그들의 편에서 감싸고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박 교수는 “동성애자들도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필요가 있는 구원의 대상자”라며 “보다 따뜻한 시각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치유해야 할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말했다.

김민정 ⓒ 뉴스미션
USA아멘넷

동성애, 국가해체 노린 좌파의 최종병기

교회파괴·국가전복·사회분열·가정 해체 겨냥한 좌파의 전략적 노림수

조우석  |  media@mediapen.com
 

[**남.녀 공히 군 미필,운동꿘 출신과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 및 국보법의 엑기스 조항인 참칭조항도 삭제하려 했던 자들의 공직진출을 결사 반대한다.운동꿘의 사기협잡과 '국보법 폐지주장자'들 및 '6.15 반역선언 지지자'들의 교언영색에 속지말고 안보중시의 정통보수를 뽑아 나라를 살리자~!**]

 
지난 주 “종북좌파 침투에 한국교회가 뿌리째 흔들”이란 첫 글을 내보냈지만, 근현대사와 함께 해온 핵심 버팀목인 교회의 위기는 예삿일이 아니다. 필자가 교인이 아니라서 이걸 더 객관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사실 대한민국은 2만3000명 해외선교사를 보내는 나라로, 미국에 이어 기독교 전파의 전진기지다. 신자 1000만에 목회자 10만 명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 이곳이 왜 개혁으로 위장한 종북좌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가? 그건 혹시 대한민국의 때 이른 조락(凋落)을 말하는 게 아닐까? 미디어펜은 긴급진단 ‘휘청대는 한국교회, 그 내우외환의 구조’를 세 차례 싣는다. ⑴반정부-반대한민국의 물결 교회를 덮쳤다 ⑵만악의 근본 ‘동성애’문제, ⑶ 한국교회, 기사회생의 길은 없는가의 순서다. <편집자 주>


[긴급진단]- ‘휘청대는 한국교회, 그 내우외환의 구조’(2)
-노무현이 박은 ‘대못’ 동성애…지금은 박원순이 싸고돌아


   
▲ 조우석 문화평론가

‘휘청대는 한국교회, 그 내우외환의 구조’시리즈를 내보낸 뒤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접했다. 언론에서 금기로 아는 종교 현안을 다룬 미디어펜의 용기에 놀랐다는 얘기에서 한국사회 버팀목인 교회의 내부에 그렇게 문제가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말까지 다양했다.


신자-비신자 사이의 구분이 없는 그런 반응과 달리‘만악(萬惡)의 근본 동성애 문제’예고에 대해서는 기대와 걱정이 엇갈렸다. 그쪽 동향을 좀 아는 분들은 이참에 제대로 짚어달라고 환호했지만, 훨씬 많은 분들의 경우 동성애가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가 우리 형제자매라고?


그게 문제다. 동성애야말로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이자, 극히 첨예한 종교적 현안으로 부상한 지 이미 오래다. 교회파괴-국가전복-사회분열 그리고 가정의 해체를 겨냥한 좌파의 거대한 전략적 노림수가 동성애 전쟁이라는 걸 충분히 유념하고 이 사안에 접근해야 한다.

역사적 배경에 대한 파악도 중요하다. 서구 좌파는 68혁명을 계기로 ‘문화의 옷을 걸친 좌치투쟁’을 시작했는데, 1990년대 초 공산권 붕괴 뒤 신(新)마르크시즘-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을 타고 지구촌에 유행처럼 번졌다. 기존질서를 해체시키는 신(新)좌파의 태동이었는데, 이 물결이 지난 10년 국회-국가인권위-서울시 등에 깊숙이 침투했다.

그 결과 어느 순간부터 국회-국가인권위-서울시 등이 동성애 예방을 말하는 대신 ‘동성애 인권’을 말하고, 성(性)소수자를 옹호하는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헌법기관이나 국가기관이 이 정도이니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종복좌파 침투 탓에 약자-소수자를 감싸 안아야 한다는 정서가 교회 내부에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뻔뻔하게 동성애 지지를 표명하는 이들은 요즘 ‘게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꺼낸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면서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형제자매들을 모두 인정하라”고 떠들어댄다. 이통에 게이신학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동성애를 대놓고 지지하는 교회도 꽤 된다. 로뎀나무그늘교회, 성문밖교회를 비롯해 향린교회(서울 명동), 들꽃향린교회(천호동), 강남향린교회(거여동), 섬돌향린교회(성산동) 등 기장 소속 네 곳이 그들이다. 이중 섬돌향린교회는‘퀴어(qeer, 동성애를 뜻함)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란 표어 아래 서울 신촌에서 열린 게이행사에 참여하는 대담무쌍함을 보였다.

개별 교회 차원만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진영이라는 기장도 동성애지지 쪽으로 기울었다. 선진국 중 동성애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며 대중을 향해 선동몰이를 하는 무리도 있다. 수구꼴통 교회 일부만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흑색선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동성애 문제는 한국교회의 큰 두통거리로 떠오른 지 오래다. 종북좌파와 함께 한국교회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악마세력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 문제를 점검하기 위한 세미나 '통일한국과 동성애'가 국회헌정기념관에서 7일 열린다.


 

동성애 거부 땐 징역 2년 겁주는 동성애차별금지법


그래도 다행인 건 종북좌파에 그토록 휘둘리는 한국교회가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연합전선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겠지만, 이 문제에 밝은 사람들은 “피터지게 싸우는 일은 이제부터”라고 단언한다. 그만큼 동성애 전쟁이 정치-교육-문화-의료 분야를 망라하고 있고, 이미 전지구적 현안이기 때문이다.

그럼 동성애 전쟁이 한국 땅에서 개시된 건 언제부터일까? 시작은 2007년 가을이었다. 노무현 정부가‘대못 박기’차원에서 일을 벌였던 것인데, 당시 국가인권위가 동성애차별금지법안 입법예고를 감행했다. 성 소수자라는 말도 낯설었던 그때 저들이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독소조항이 무서웠다.

동성애자 목사를 모시는 걸 거부하는 교회에는 2년 이하 징역이나 1천 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때린다는 형사처벌 조항(3조)이 그것이다. 신학교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가르칠 경우도 마찬가지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을 그 법안은 담았다.

물론“그럼 우리집안에 항문성교를 하는 남자 며느리를 맞게 할 셈이냐?”는 사회적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잠복한 듯 보였던 동성애 논란은 3년 뒤 SBS-TV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방영을 계기로 되살아났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쓴 이 드라마에서는 구역질나는 동성애가 멀쩡한 청년이 벌이는 멋진 그 무엇으로 표현됐다. 얼빠진 작가 한 명과, 시청률에 목맨 지상파 방송의 한탕주의 모험이었다. 그걸 계기로 구 통진당 등 좌파와, 상당수 야당 국회의원이 끼어들어 동성애 전쟁이 불을 뿜었다. 그때 저들이 저질렀던 뻔뻔한 일의 하나가 군(軍)형법에서 금하는 군내 내 동성애를 허용하라며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북핵(北核) 문제보다 더 무서운 군대 내 동성애


지난해 3월만 해도 새민련 소속 여성의원 진선미-장하나를 포함한 통진당 소속의 의원 김재연-이상규 등 의원 10명이 문제의 군 형법의 폐지안을 발의했다. 이게 좀 뭔가 수상쩍지 않은가? 해산당할 운명에 놓인 저들이 헌재를 대상으로 역습을 감행하다니!

이쯤에서 “동성애 옹호를 통해 저들이 겨냥하는 별도의 목표가 있는 건 아닐까?”라고 가늠해야 옳다. 저들의 음험한 저의를 확인할 수 있는 게 논의가 분분한 이른바 차별금지법안이다. 교회를 무너뜨리고, 온갖 쓰레기 좌파 사상을 허용하며, 이른바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해방의 구상을 여기에 몽땅 담았다.

일테면 차별금지법 제3조 1항 제1호의 경우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前科), 성적지향(동성애), 성정체성(트랜스젠더) 등을 이유로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일체를 부당한 차별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 행위를 소수자-약자에 대한 인권보호 차원에서 국가사회가 무제한 허용해야 한다는 헛소리다.

당시 한국교회언론회에서 “군대 동성애 허용은 북핵(北核) 문제보다 더 경계해야 할 사안”이라고 논평한 것은 당연했다. 군대 보낸 아들이 동성애에 빠져 에이즈 환자로 죽어갈 판이다. 상명하복의 지휘계통이 설 리 없으니 북한 전체주의 집단과 싸워야 할 한국군대의 자멸도 예견할 수 있다.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구 통진당의 김재연-이상규 무리가 정말로 노린 것은 동성애를 퍼트려 RO를 이끌던 리석기 식의 폭력투쟁과 별도로 교회 파괴-국가 전복-사회 해체를 이끌어낸다는 것이었다.

 

동성애 인권 타령을 반복하는 서울시장 박원순의 꼴값


무섭다. 그래서‘동성애=만악의 근원’이란 표현은 결코 과한 게 아니며, 종북좌파와 함께 한국교회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악마세력이다. 또 다른 강적의 한 명이 친(親)동성애 정책을 펼쳐온 서울시장 박원순이다. 믿기시는가? “한국이 동성결혼을 하는 아시아 첫 국가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던 위인이 바로 그다.

그 발언은 지난해 말 미 언론과의 인터뷰인데, 물론 박원순은 앞 다르고 뒤 다르다. 한기총 등 교계 관계자들을 만나서는 자신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며 빤한 거짓말을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동성애축제를 서울광장에서 벌이는 걸 ‘건전문화활동’으로 인정해 허용한다. 국민일보는 “성소수자 인권에 시민건전문화는 뒷전…박원순 시장 친동성애 정책에 혈서 2억 원”이란 기사(6월4일 자 보도)를 보도했지만, 이 사안의 중대성을 잘 모르는 주류 언론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실제로 서울시장 후보 시절의 박원순은 문화적 소수자는 특별히 배려한다는 내용의 ‘서울시민권리선언’을 선보였으니 그는 본래가 그런 위인이라고 봐야 한다. 인류 최악의 전체주의체제 북한의 인권문제엔 애써 눈을 감은 저들이 동성애 인권 타령을 늘어놓는 위선이다. 역겹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땅에 살아선 안 될 사람이 정치인 노릇을 한다는 게 더 어이없을 뿐이다. 우리의 고민은 그 때문이다. 종북세력과 동성애 문제라는 내우외환의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 위기를 탈출할까? 그 지혜를 다음 회에 함께 찾아보자.


조우석 문화평론가





창세전에 택함이란? (Q&A) / 박신 목사


[질문]

에베소서 1:4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요? 창세전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택함을 받는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하는 자로 구별을 하였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신학적으로 아주 무거운 주제인 예정론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나기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잘 알다시피 알미니안주의와의 끝없는 논쟁의 핵심이자 전부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현대 기독교의 주된 흐름은 유감스럽게도 이를 반발, 거부, 비난,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개인적으로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말하자면 이 문제를 깊이 따지자면 신학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한 요소들을 다뤄야 하며 또 자칫 이 홈피의 방문자들 사이에도 쟁론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두 신학이론을 인용하여 논증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도 이해하기 용이한 차원에서 순전히 성경말씀에 따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시간은 피조물, 특별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의 연속 내지 누적인 역사도 지구상의 인간들의 행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를 주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대적 구분에 따른 해석, 적용, 예측은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설명할 때마다 필립 얀시가 든 비유를 저는 자주 인용합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는 약 8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해가 뜰 때에는 사실상 8분 전에 벌써 떠있는 해를 보게 되며, 지는 해도 이미 8분 전에 진 해를 봅니다.

그런데 한 발은 태양에, 다른 한 발은 지구에 걸쳐 놓을 만한 거인이 있다고 치면, 순전히 논리적 가정으로, 그에게 8분의 시차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구나 태양을 한 순간에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거인에게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실종되고 없는 셈입니다. 지구 시간의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우주 한 쪽 끝에 한 발을, 다른 쪽 끝에 다른 발을 두실만큼 큽니다. 하나님이 그런 가시적 물리적 형체를 갖춘 거인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시간과 연관해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자존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시간이란 행성과 항성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각 행성마다 시간 개념과 실제 길이도 각기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 전부를 운행, 통치하시기에 시간 개념이 전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다 본다는 것은 시간 밖에 존재하여 시간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할 것은 시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에 실려 다니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각기 시간에 묶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물체와 존재는 반드시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시간과 완연히 구별된 유일한 분입니다. 시간 밖에서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본다는 것은 그분에게는 현재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영원하신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오직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하라는 권면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연관된 하나님의 특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나님이 하루만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반면에 천 년간의 인간 역사도 단숨에 허물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태초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주만물을 관리 통치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관자로서 그 시간마저 통치하고 계실지라도 하나님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분 또한 시간에 종속되기에 수정, 변개, 쇠퇴, 소멸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  

대신에 그분에게는 하루나 천 년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역사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해 있다는 초시간성(超時間性)과 초역사성(超歷史性)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에게는 항상 현재 즉, 영원만 있습니다. 또 그래서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언약 또한 전혀 수정 변개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달성되는 법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영생을 유토피아 상태에서 시간적 무한대로 살아간다는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죽으면 그 육체는 멸망하고 영은 예수님 계신 낙원으로 옮겨집니다. 죽음으로 인간 존재가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영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이가 죽으면 그렇게 되지만 그 새로운 존재 방식이 옮겨지는 거처만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으로,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또 낙원으로 옮겨진 신자는 마지막 날의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미 천국에 올라간 신자에게도 시간 개념이 전혀 없어집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영원한 현재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천국에서 무병(無病)은 몰라도 장수(長壽)는 어울리지 않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 됩니다. “이제는(이 땅에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주님의 실체 뿐 아니라, 그분의 구속사적 경륜, 또 이 땅에서 가졌던 의문과 오해 등이 씻은 듯이 밝혀집니다. 아니 그 전에 어쩌면 그런 것들을 문제 삼을 시도는커녕 용의조차 사그리 없어질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과 이 셋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우선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이 목적하던 바는 천국에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완전히 달성된 셈입니다. 신자가 그 둘을 더 이상 소유할 이유나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사랑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아니 그곳은 아예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는 시간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자가 그 육신까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돌아갈 소망이나 믿음을 구태여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군인이 매일 달력에 표시하면서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예수님이 지구상으로 재림할 때 육신도 부활해 그 분과 동행 귀환할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영원한 현재로 천국 신자에겐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성삼위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덧입혀져 그 분처럼 변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이후 이 땅에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하게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의미가 시간적 무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온전한 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신자가 이 땅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완성된 상태로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신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완성된 관계의 실체를 가시적 형태로 하나씩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8,29)

바로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교리적이 아니라 일대일의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영생 즉, 구원을 자꾸만 시공간의 차원 안에서 이해하려 들면 그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아니 맛도 보지 못합니다. 수박을 잘라 먹지 않고 그 겉만 핥은 셈입니다.

토기장이가 악한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이런 기본적 이해를 갖고서 질의하신 본문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먼저 "창세 전"에라는 뜻은 하나님의 경우는 시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형체나 존재들을 질서정연하게 조성하기 이전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계실 때입니다. 시공간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한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 계셨던 상태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분, 정확히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창세 전은 인간이 이해할 때에만 아주 오래 된 과거사입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에겐 결코 창세  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라도, 지금 당장 오늘이라도 죄로 물든 이 땅과 하늘을 없애고 새 하늘과 새 하늘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은 이런 진술마저도 인간의 사고로 즉,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차원에서 이해 적용하려 들어선 명료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데도 한국인이 속도와 억양만 조금 다를 뿐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고 믿고 해석하려 들어선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착할지 악할지, 또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구원 줄 자와 안 줄 자를 어떻게 창세 전에 독단적으로 나눴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그분이 아주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처럼 여겨집니다. 언뜻 일리 있는 판단 같지만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어 판단하는 인간적 오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 구원, 택함, 예정은 전부 하나님이 일방적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인간이 간섭은커녕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피조되었고, 신자와 불신자로 나눠져 택해졌고 예정 받았기에, 구원 받거나 그렇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해도 단 한 치의 불공평성, 편애, 자의(恣意: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함), 불합리성, 불완전성 등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신학적 과제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답게 사고 유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려 듭니다. 이는 아주 크고도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본 주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태어난 인간이 나중에 착할지 악할지, 믿을지 안 믿을지 미처 모르는 데도 하나님이 무조건 편 가름 했다고만 여기고 치웁니다. 반대로 인간의 하는 짓과 그 처한 사정을 다 감안해서 구원해주어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아예 처음부터 믿을 자와 안 믿을 자로 나눠서 창조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피조물 신분에서 그렇게 나눈 창조와 창조주가 잘못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비유이긴 해도 인간은 물건, 토기에 불과합니다. 본차이나가 아니라 뚝배기로 만들었다고 감히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에서 대신에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택함의 근거가 인간의 소원이나 달음박질(공적)이 아니고 오직 당신의 긍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에서나 야곱 둘 다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의 진노 아래에서 지금 당장 몽땅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선언하는 바는 인간에게 아무리 높은 도덕성, 영성이 있어 보여도 창조, 택함,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논의 밖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택함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로 이미 예정되어 지어진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함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함이 결코 무조건적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또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은 반드시 예수 안에서의 택함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택함도 없고 예수가 있기에 택함이 가능하고 또 타당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타락과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 전제가 된 창조라는 것입니다. 전제라는 말은 시간적 전후 순서는 논외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예수님의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의 타락도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부분에서 타락 전(supra) 예정설과 타락 후(infra) 예정설이 옳은지, 또는 예지예정인지 이중예정인지 같은 복잡한 신학논쟁이 대두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런 측면은 제외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그 선택을 완성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는 때에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택함 받은 자 쪽에선 하나님이 볼만하고 기뻐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당신께서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로 자라게 하시고, 나아가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덧입는 자리까지 한 치의 착오 없이 당신께서 이끄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일지 궁금해지는 것도 지구 상의 신자들이 살아 있을 때만 문제됩니다. 천국에선 그 재림은 하나님의 영원한(누차 강조하지만 시간의 무한대 개념이니, 아주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뜻임) 뜻 안에 이미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성경 계시대로 모든 역사가 진행되어져서 꼭 오셔야 할 때가 되면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반드시 다시 지구상에 강림하십니다.

신자는 확보된 재림의 영광 속에 살기에 그 종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소유한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 앞에도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하나님에겐 그저 “영원한 현재의 사안”일뿐입니다. 영원한 현재라는 용어 또한 그분의 신비한 경륜을 결코 다 드러낼 표현이 되지 못하겠지만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세 전에 세운 당신의 뜻과 계획은 당신 안에선 창세 전부터 현재 시제로 다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시공간 안에 제한되었고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인간에게만 창세 전이 시간적으로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이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창조는 물론, 21세기의 한 신자의 탄생과 그 택함과 구원까지도 그분 안에선 이미 성취되어 있으되,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시기와 방식만 미결로, 그것도 인간에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올라가 있는 이름을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당신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앎으로써 자기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기에 그만한 위로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택함과  예정에 따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와 은혜에 속할 뿐입니다. 토기장이가 아무 계획 없이 도기를 굽지 않듯이, 하나님도 태초에 이미 당신만의 마스터 플랜이 있었고 그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4)

질의하신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또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려고 택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그 택함은 완벽한 거룩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신자가 할 바는 이어진 말씀 그대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5,6절) 뿐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 땅에선 물질적 차원에 머무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천국에선 그분과 맛 대면할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너무 독단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예정이란 신비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낙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잠시 남겨 놓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함 받았으니 잠시 있다 없어질 이 땅보다는 영원과 맞대어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5/25/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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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하면 행복은 멀어집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보기 부러워할 정도의
              여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일듯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추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움을 아는 사람은
              행복의 조건을 알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은
              만족을 모를 터이니
              마음은 추운 겨울일지도 모릅니다.
               
              몸이 추운 것은 옷으로 감쌀 수 있지만
              마음이 추운 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사는 기준이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처럼
              행복의 조건이 하나일 수는 없답니다.
              생긴 모양새가 다르면 성격도 다른 법
              가진 것이 작지만 행복을 아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이지요.
              남과 비교할 때 행복은 멀어집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실 것입니다
               
              - 좋은생각 中에서 -
               
               Just Loving You (그저 당신만 사랑해요) / Mary Du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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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기도 주기도문

          ~~~~~~~~~~~~~

          스티븐 율리(J. Stephen Yuille)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말과 삶으로는 그대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윌리엄 퍼킨스


          엘리자비스 1세가 잉글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 중 한 사람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운명적 만남의 결과로 태어났다. 그리고 개신교도인 이복동생 에드워드와 카톨릭교도인 이복언니 메리가 모두 사망한 후인 1558년, 드디어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 직후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였다.

          국내에서는 자신의 출생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카톨릭교도와 그녀의 통치에 필수적이었던 교회의 감독 제도를 거부하는 청교도 사이에 중용을 지키고자 애쓰는 가운데 기성 종교 세력과 씨름해야 했다. 또 나라 밖으로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침공 시도를 포함한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엘리자베스 1세는 이 모든 것을 견뎌 내고, 세상을 떠날 1603년 무렵에는 영국을 개신교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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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의 걸출한 통치 시기는 잉글랜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퍼킨스의 삶과 중첩된다.

          윌리엄 퍼킨스는 워익샤이어 벌킹턴 교구의 마르스턴 자벳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 시절 캠브리지 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한 후로 계속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퍼킨스 본인도 인정했던 대로, 그는 방탕함과 술에 빠졌던 것이다. 그의 영적 상태는 처절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셨다. 그는 죄의 무게에 짓눌려, 죄인들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갔다.

          이후 퍼킨스는 학업에 매진하여, 1581년에 학사학위, 1584년에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그는 세인트 앤드류스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교회를 섬겼다. 퍼킨스는 설교자로서 상당한 영향략을 행사했다. 벤자민 브룩Benjamin Brook에 따르면 "그는 율법의 공포를 청중의 양심에 너무나 직접적으로 제시한 나머지 청중의 마음이 죄에 대한 확신으로 깊이 가라앉곤 했다.또 '지옥에 떨어질'damn 이라는 단어를 너무나 또렷하고 강하게 발음하여, 설교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그 단어가 청중의 귓가에 구슬프게 맴돌곤 했다."

          세인트 앤드류스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될 즈음 그는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연구원으로도 선임됐다. 여기서도 그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10여 년 간 그는 교사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쌓았다. 퍼킨스가 사망하고 10년이 지난 1613년, 토마스 굿윈이 캠브리지에 입학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이 여전히 퍼킨스의 사역을 생생히 기억했고, 온 마을이 그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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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킨스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그의 저술이 존 칼빈,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하인리히 벌링거Heinrich Bullinger의 저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퍼킨스는 "복잡한 신학적 문제를 동료 학자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명료하게 정리하고 설명하는 능력과, 난해한 신학적 가르침을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갈망과 이어 주는 은사" 로 인해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의 저술이 큰 인기를 얻음에 따라 퍼킨스는 잉글랜드 종교개혁 신학 및 그로부터 태동한 청교도주의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교도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퍼킨스는 자신을 청교도라 칭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과 사역에 뚜렷하게 나타난 경건함으로 인해(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간에) 사람들은 그에게 청교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일말의 좌절감을 내비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마음이 정결해지고자 애쓰고, 누구보다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이들에게 청교도라는 흉악한 이름이 붙곤 하지 않는가?" 거룩함에 대한 열렬한 추구는 퍼킨스의 경건함의 특징이자, 이후 유럽과 미주의 기독교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청교도 운동 전체의 본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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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청교도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퍼킨스를 이 책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저서에서 기도는 당연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특히 주기도문에 대한 강해는, 잉글랜드 청교도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퍼킨스의 경건함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초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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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기도의 선결조건, 진실성]

          ?'진실한'sincere이라는 영단어의 어원은 두 가지 라틴어 단어 sine(없는)과 cera(밀랍)이다. 고대 사회에서 부정직한 상인은 항아리에 금이 간 자리와 같은 결함을 숨기기 위해 밀랍 칠을 해서 더 높은 가격에 제품을 팔곤 했다. 그래서 평판이 높은 상인들은 항아리 위에 .'sine cera'(밀랍을 칠하지 않음)라는 표식을 붙여 손님들에게 제품에 거짓이 없음을 알렸다.

          마태복음 6장 1-18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함을 실천하는 데 있어 진실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영적 의무를 행할 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구제, 기도, 금식이라는 세 가지 예를 들어 이 메시지를 전하셨다. 퍼킨스는 이 메시지의 목적을 이렇게 요약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모든 거룩한 의무를 행하는 데 있어 외식을 피하고 소박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행하기에 힘쓰기를, 그로써 진정으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우리 행실의 감찰자요 인정하시는 분으로 삼기를 비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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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에 관하여 그리스도는 외식을 경계하라며 두 가지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첫째,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이는 공중기도를 정죄하는 말씀이 아니다. 퍼킨스가 분명히 밝혔듯이 예수님은 "개방된 공공장소에서만" 기도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 같은 외식에 맞서기 위해

          그리스도는 명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퍼킨스는 여기서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이해했다. 우리가 항상 은밀한 곳에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이해하기보다, 언제나 자신이 은밀한 곳에 있는 것처럼 기도해야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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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그리스도는 경고하셨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퍼킨스는 이 말씀을 근거로 중언부언, 그의 표현에 의하면 지절거림"의 죄를 비판한다. 중언부언하는 자는 영혼의 중요한 문제는 무시한 채 의미없는 반복에 초점을 맞춘다.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기는 거부하면서, 자기는 말을 많이 하니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실 거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외식에 대응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이렇게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무의미한 반복을 불필요하다고 허탄하게 여기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외식에 대해 이 두 가지 경고를 하신 후, 진실하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신다.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말씀인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퍼킨스에게 주기도문은 "누군가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도 중 최고의 기도 형식이다. 아버지의 지혜이신 아들이 직접 짓고 주신 기도이기 때문이다."

          퍼킨스는 주기도문을 서론, 간구, 결론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을 '의미' 와 '지침'이라는 두 개의 제목 아래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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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그때 그시절,

          대한민국 건국일 미공개 사진  

           

          한민국 재건 사업 발대식

            

          월드피스자유연합이 대한민국 건국일을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 사진을 18일 공개했다.

          사진은 1952년 8월 19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 재건 사업 발대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제임스 밴 플리트 주한 미8군 사령관 등

          시민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한편, 월드피스자유연합은 정의실현국민연대와 공동으로

          역사 바로 알리기 사업을 진행한다. 2014.08.18. (사진=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건국기념일 축하 행사

            

          사진은 1952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진행된

          건국기념일 축하 행사 및 제2대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서

          합창단이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다.(사진=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만세 삼창하는 시민들

           

          사진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기념행사장인

          당시 정부청사인 중앙청 앞에서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대통령과

          맥아더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 모두가

          만세 삼창을 하는 모습

           

          인사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맥아더 장군

           

          사진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초청으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행사인 정부 수립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을 처음 방문한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축사하는 양성봉 시장

           

          사진은 1948년 8월15일 서울에서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3주년 축하 기념행사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축하 행사가 열린 가운데

          양성봉 부산시장이 부산 운동장에서 진행된 건국 축하 체육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대한민국 건국 축하 체육대회

           

          사진은 1948년 8월15일 서울에서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3주년 축하 기념행사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축하 행사가 열린 가운데 행사에 참석한 여성 연맹 회원들이

          태극기를 들고 있는 모습. 

           

          국방경비대장 격려하는 맥아더 사령관

           

          사진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3주년 축하 기념행사에 참석한 맥아더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이

          국방경비대장 송호성 중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국방 경비대 검열하는 맥아더 사령관

           

          사진은 1948년 8월15일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 건국과 해방 3주년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맥아더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이 대한민국 국방경비대를 검열하고 있는 모습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과 존 호지 주한 미군사령관

           

          사진은 1948년 8월15일 19발의 환영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김포공항에 도착한 맥아더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이

          주한미군사령관 존 호지 중장과 함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 

           

          국방경비대 분열 행진 보는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

           

          사진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기념행사에서

          국방경비대의 분열 행진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


          대한민국 건국 축하 체육대회

           

          사진은 1948년 8월15일 서울에서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3주년 축하 기념행사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축하 행사가 열린 가운데 김철수 경남지사가 부산 운동장에서 진행된

          건국 축하 체육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축사 하는 마크 클라크 대장

           

          사진은 6.25전쟁 중인 1952년 8월 15일, 제3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마크 클라크 대장이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 축하 행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2대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 참석하여 축사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답례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월드피스자유연합이 대한민국 건국일을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 사진을 18일 공개했다.

          사진은 6.25전쟁 중인 1952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앞에 각국 외국 사절,

          정부 관리, 시민들이 운집하여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을 축하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2대 대통령 취임 행사가 진행된 가운데 참석한 시민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답례를 하고 있는 모습.

          한편, 월드피스자유연합은 정의실현국민연대와 공동으로

          역사 바로 알리기 사업을 진행한다. 2014.08.18. (사진=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축사하는 올란드 와드 소장

           

          사진은 서울에서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3주년 축하 기념행사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축하 행사가 열린 가운데

          미 육군 6사단장 올란드 와드 소장이 부산 운동장에서 진행된

          건국 축하 체육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만세삼창 하는 시민들

           

          사진은 6.25전쟁 중인 1952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앞에 각국 외국 사절, 정부 관리, 시민들이 운집하여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 축하 행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2대 대통령 취임 행사가

          진행된 가운데 참석한 시민들이 만세 삼창으로 환호를 하고 있는 모습. 

           

          취임 선서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은 6.25전쟁 중인 1952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앞에 각국 외국 사절, 정부 관리,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을 축하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2대 대통령 취임 행사가

          진행된 가운데 이승만 전 대통령이 2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취임선서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은 6.25전쟁 중인 1952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앞에 각국 외국 사절, 정부 관리,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을 축하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2대 대통령 취임 행사가

          진행된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2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연설하는 이시형 전 부통령

           

          사진은 1949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정부관리,

          각국 외국 사절, 시민들에게 이시형 초대 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대한민국 건국 1주년 기념식

           

          사진은 1949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정부관리,

          각국 외국 사절, 시민들에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대한민국 재건 사업

            

          사진은 1952년 8월 19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 재건 공식사업을 하는 모습. 

           

          대한민국 재건 사업

           

          사진은 1952년 8월 19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 재건 사업 발대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제임스 밴 플리트 주한 미8군 사령관 모습. 

           

          대한민국 재건 사업 발대식

           

          사진은 1952년 8월 19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 재건 사업 발대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제임스 밴 플리트 주한 미8군 사령관 등 시민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

           

          사진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3주년 축하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맥아더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 존 호지 중장 모습. 

           

           이승만 전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

           

          사진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3주년 축하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맥아더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 모습.

           

          축사하는 맥아더 총사령관

           

          사진은 1948년 8월15일 한반도에 새롭게 건국된

          대한민국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맥아더 연합군 극동군 총사령관이

          남북한 국민들에게 축사하는 모습. 

           

           기념 연설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당시 정부청사인 중앙청 앞에서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과 정부 수립 기념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대한민국 건국을 축하하는 서울 시민들

           

          월드피스자유연합이 대한민국 건국일을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 사진을 18일 공개했다.

           사진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3주년 축하 기념행사에 참석한 군중들로 가득 메워진 서울 중앙청 앞 모습.

          한편, 월드피스자유연합은 정의실현국민연대와 공동으로

          역사 바로 알리기 사업을 진행한다.

          2014.08.18. (사진=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가을 호수
                       최송연

           

          넓은 저 하늘 닮고 싶어
          산이 외롭다면 산을 품고
          별이 투정하면 별을 품고

           

          돌이 날아들면 그 돌마저 품으니
          누가 가시채를 던진다 한들
          되갚아 줄 리 없는 깊은 수심,

          보드랍기가 천사의 치마 폭 같아라

           

          때때로
          불어치는 모진 광풍에
          할퀸 생채기 아파 눈물 흘릴 때면
          달빛 내려앉아 쓰다듬어 주니
          은가루를 뿌린 듯

          밤 깊을 제면 되려 더 반짝이네

           

          이제 곧 폭설 내려치는
          무서운 겨울이 닥칠 것이나
          그때도 달빛이 함께 할 것을 믿으니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으리라
           

          **달빛 같은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역경을 견뎌내는 성도의 삶을 그린 것임**

           

           

           


           

           

           


          마음이 따뜻해지는 아침입니다.

          깨끗하고 맑은 사모님 글을 읽고

          쭈~~욱 찾아 읽고 감사한 마음을

          가을색으로 드립니다. -은총

           

          저의 졸시 '가을 호수'를

          읽고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을

          작품을 만들어 주신 '은총 '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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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지인(Ien Chi)

          교황의 미국방문으로 보는 카톨릭에 대해 알아야 할 10가지

           

          교황의 미국방문을 앞두고 개신교인들에게 카톨릭과 교황의 실체를 알기기위해 필라 목회연구원은 9월 17일(목) 오전 10시 새한교회에서 "교황과 천주교의 실체"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열었다. 발제자는 필라교협 회장을 역임하고 필라이대위 위원으로 있는 김선훈 목사.

          김선훈 목사는 "교황은 기독교의 근거인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하는 유사 기독교 즉 기독교와는 사실상은 무관한 다른 종교의 대표자임을 알아야 한다. 교황과 가톨릭이 가르치고 주장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성경에 상반된다"고 강조했다.

          김선훈 목사는 ①교황 제도의 문제점 ②사제에 대한 잘못된 주장 ③고해 성사의 문제점 ④잘못된 마리아에 대한 사상 ⑤가톨릭의 잘못된 구원론 ⑥가톨릭의 잘못된 예배론 ⑦가톨릭의 잘못된 기도론 ⑧가톨릭의 잘못된 성도론 ⑨십자가 숭배 사상 ⑩교황 제복의 문제점 등 10가지 소주제로 카톨릭과 교황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강사 김선훈 목사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 1세의 미국의 뉴욕과 필라델피아에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방문한다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미 2014년도에 한국 방문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개신교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한국 개신교 신도수가 감소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가톨릭 교세는 커지고 있기에 개신교는 교황의 방한으로 교세가 더욱 위축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분석하기도 했다.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여 교황의 미국 방문을 비판하면 일반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개신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가톨릭의 교황의 엄청난 인기를 시샘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교황과 로마 가톨릭가 가르치는 거짓된 교리들을 용납하고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이 미국을 방문함에 있어서 너도 나도 칭송하고, 심지어 그가 온 세상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평화의 왕이라고 추앙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는 정말 괴롭다. 단언컨대 교황은 기독교의 근거인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하는 유사 기독교, 즉 기독교와는 사실상은 무관한 다른 종교의 대표자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는 가톨릭(Catholic)를 개신교의 장자교회로 생각을 하며 구교(Old Church)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으나 가톨릭은 사실상 기독교가 아니다. 교황과 가톨릭이 가르치고 주장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성경에 상반된다. 

          특별히 미국에 방문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1세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 ‘거룩한 아버지’, ‘최고의 제사장’이라고 공식적으로 호칭한다. 어떻게 죄인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고, 부패하고 타락한 인격과 영혼을 가진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 있으며, 또한 감히 은혜를 구해야 할 죄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해 감당하시는 최고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교황에게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성경이 존재하는 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자 이제 가톨릭의 실체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1. 교황 제도의 문제점

          로마 가톨릭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인 교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지만 다 거짓이다.

          ⑴ 사도 베드로가 제1대 교황이며, 결혼을 안 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가 주장하는 교황제도의 근거로 예수님의 12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의 직분을 교황이 물려받았다고 주장한다. 베드로 사도가 최초의 로마의 감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이후 후대의 로마 감독들이 그의 직분을 계승했다고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성경에 교황이라는 단어는 없다. 베드로는 결혼을 안 했으며 로마에서 25년 동안 교황으로 있었다고 주장을 하지만 베드로가 교황이 된 적이 없다. 사도로서 평생을 지냈다. 그는 어부요 결혼을 한 사람이다(마 8:14).

          그리고 가톨릭은 마태복음 16:18의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성경의 내용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예수님의 신앙을 교회의 기초라고 여기지 않는다. 대신 베드로라는 인간을 교회의 기초로 여긴다. 또한 영혼을 구원하는 참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뿐 아니라 교회와 모든 복음전도자들에게 천국 열쇠가 주어진다고 보지 않고 베드로 개인과 그의 직분을 계승하는 로마의 감독들과 교황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베드로가 전체 교회와 12 사도를 대표한다고 불 수 있는 내용이 성경에 없다.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역사적인 증거도 없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보낸 편지에 로마에 있는 많은 성도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으나 베드로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 감옥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도 베드로가 로마에 체류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없다.

          베드로의 사도직은 구원계시인 성경과 신약의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단회적인 직분이었다.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설립된 후 사도직은 종결되었다. 최초의 사도들이 사망한 후 사도 직분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계승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12사도를 대표하였던 베드로의 사도직이 후대의 로마 감독들에게 계승되어 현재의 교황에까지 이른다는 가톨릭의 주장은 엉터리이다.

          ⑵ 교황은 절대 잘못이 없다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한다. 교황 무오설은 1869-70년에 개최된 제1차 바티칸 종교회의에서 로마 가톨릭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교황이며, 교황은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제정함에 있어서 전혀 오류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황 피우서 10세는 제 1바티칸 종교회의에서 결의한 교황 무오설을 적극 변호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교황의 절대무오성에 도전하면 이단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성경 로마서 3장 9절과 10절, 23절에 보면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모두 다 죄인이라고 했다. 죄의 삯으로 인간은 모두 죽는다고 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교황은 잘못도 없다고 하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⑶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 교황을 부를 때에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9개의 호칭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식 호칭은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는 호칭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타락하였고, 죄와 허물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주어진 정확 무오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 성경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한다고 하는 것은 교황이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제정하는 활동을 하는데 있어 오류가 없다는 교리를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⑷ 교황을 성스러운 아버지(the Holy Father)라고 한다.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이 교황을 알현할 때에 ‘Holy Father’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 사전에서 이 단어를 검색하면 로마 가톨릭의 교황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설명되고 있다. 성경 어디에 사람을 거룩한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기록되어 있는가. 성스러운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은 성부 하나님뿐이시다. 성경에서 거룩한 아버지로 표현되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요 17:1)라고 호칭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인 교황에게 Holy Father라는 호칭을 사용된다는 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⑸ 교황을 최고의 제사장(Pontifex Maximus)이라고 한다. 원래 이 말은 고대 로마에서 신들에게 제사하는 업무를 관장하는 국가의 사제집단의 수장을 의미하는 호칭, 즉 최고 제사장이라는 뜻이었다. 로마 제국의 기초를 놓은 천재적인 정치인 율리어스 카이사르에게 이 호칭이 사용된 후 모든 로마의 황제들에게 이 호칭이 부여되었다. Pontifex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로마인들이 경배하였던 신들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던 우상 제사장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Maximus라는 말은 최고(great)를 뜻하는 단어이다. 즉, 사탄과 사람들 사이를 중매하는 최고의 무당을 뜻하였던 호칭이 지금 로마 가톨릭의 교황에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호칭을 사용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죄인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는 분(중보자, 딤전 2:5)은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이다.

          2. 사제에 대한 잘못된 주장

          ⑴ 가톨릭에서는 성도와 구별된 직분으로, 즉 특별 계급으로 그리스도 교회를 위하여 사제들의 교직 정치를 설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복음 전하는 자, 사도, 목사, 집사 제도를 주신 것뿐이다. 사제란 제사장이란 뜻으로 신약시대에는 성도가 만인 제사장이다. 특별히 누구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예수님 이름으로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사제를 특별한 사람으로 가르치며 권위를 내 세우고 있다.

          ⑵ 추기경단 조직도 로마의 다신교의 사제단과 대등하다. 추기경(Cardnal)의 어원이 라틴어 Cardo(돌쩌귀)인데, 이는 야누스 신의 사제들의 명칭이기도 하다. 야누스 신은 문지기 신이라 한다.

          3. 고해 성사의 문제점

          고해 성사는 바벨론 종교에서 행하던 의식이었다. 바벨론 밀교에 입교하기 위해서는 비밀 고해를 해야 입교할 수 있었다. 이 고해를 통하여 사제가 비밀을 폭로한다고 겁을 주어 신도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만일 고해 성사가 성경적인 것이었다면, 아마 그 제도는 주님이 떠난 후에 바로 초대 교회에서부터 실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해성사 제도는 1215년이 되어서야 이노센트 3세에 의해 (라테란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사도들이나 초대교회가 1200년 동안 실시해하지 않았던 일을 1200년 후에 갑자기 실시한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죄의 자백과 용서에 대한 문제는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사제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가졌기 때문에 사제에게 죄를 고해야 한다고 하여 사제의 권위를 높이고 있으나 우리는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고백하면 사해 주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4. 잘못된 마리아에 대한 사상

          ⑴ 가톨릭은 동정녀 마리아가 죄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요, 신령한 은혜의 조제사요, 새벽별이요, 예수님과 함께 속죄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했다. 인간은 모두 죄 가운데서 출생하고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죄인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함을 받지 못하며 지옥에 간다. 오직 인간의 죄를 대속할 자는 죄 없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뿐이시다.

          ⑵ 마리아는 하늘에서 성도의 기도를 듣는다고 가르친다. 하늘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요한복음 16장 23- 24절에 하나님께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과 8장 4절에 기도가 향연이 되어 천사의 손에 의해 금 향로에 담겨 하나님 보좌 앞에 올라간다고 했다.

          ⑶ 마리아는 영, 혼, 육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요3 :13).

          ⑷ 그들은 죽은 부모나 형제, 자녀들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고 예물을 많이 바치면 토요일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천국에 올라간다고 하여 돈을 많이 내도록 한다. 그들이 드리는 미사 중에 하이퍼 둘리아(Hyper Dulia)라는 특수 공경 미사는 마리아에게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다. 이 피조 세계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출 20장). 그런데도 가톨릭은 자기 맘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지키고 있다.

          ⑸ 가톨릭은 마리아에게 기도해야 한다며 기도 묵주인 로사리오라는 묵주 도구가 있다(염주알). 이것도 이교의 풍속이다. 불교의 염주와 마찬가지이다. 회교도 염주를 사용하고 있다. 완전한 로사리오는 성모 기도 53번, 주기도 6번 등을 반복하는데 주기도보다도 마리아에게 하는 기도가 9배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6:7-13).

          (6) 모자 숭배 사상이 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은 기독교의 산물이 아니다. 바벨론의 유물 가운데는 여신 세미라미스가 아들 탐무스를 안고 있는 신상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 모습이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도 니므롯 태양신 숭배와 통하여, 이집트에서도 이시스라는 여신과 아들 호루스의 모자 동상이 우상화되었다. 그리고 독일, 스칸디나비아, 에투루리아, 드루이드, 그리스, 수메르, 영국, 중국,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후 이런 전통이 초대교회 시절에 이교도들이 회심도 없이 그냥 세례만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이교 풍속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무리들에게 교회가 타협하고, 이교도들의 모자 숭배와 유사한 점을 모방한 것이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이 교리는 A.D. 431년 에베소 종교 회의에서 채택)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교도들의 모자숭배를 기독교화 하고 한편 로마 가톨릭회의 양적 부흥과 함께 우상 숭배를 교회제도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여 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자 상이다.

          그러나 바울은 초기에 에베소에 왔을 때 이방 종교와의 화해를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들이 섬기던 여신상을 스스로 부수어 버렸던 것이다(행 19: 24~27). 그리고 하나님은 이 우주 어디에도 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가톨릭은 이러한 내용이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십계명의 2계를 삭제하고 그 대신 아홉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정통 기독교 신앙은 어떤 형상에도 절하지 않는 것이다.

          5. 가톨릭의 잘못된 구원론

          가톨릭은 구원은 공로가 있는 일이나 공덕으로 얻을 수 있고, 혹은 사제들이나 성례나 마리아나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중재의 수단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주장은 정말 가톨릭의 큰 배도가 아닐 수가 없다. 어디에 인간의 행위나, 물질(돈)이나, 다른 사람을 통하여 구원이 있다고 성경은 말을 하고 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가능하다고 갈라디아서 2장 6절과 에베소서 2장 8-10절에 말하고 있다.

          또 가톨릭에서는 미사 시에 행하는 것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어떤 기도를 외우는 것과 염주도(念珠禱)와 연도(連禱)와 9일간의 기도(근행)와 금식과 금요일과 다른 지정한 말에는 생선 외에 다른 고기를 절식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 고기를 먹는 사람은 사제에게 돈을 바침으로서 특별 사면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먹어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식물은 선하매 기도하고 먹으면 버릴 것이 없다(마 4:10-11)고 했다.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손으로 그리는 성호를 하는데 이것은 은혜의 방법이요 악마를 쫓아내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마를 쫓아내며, 은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마4:10-11).

          6. 가톨릭의 잘못된 예배론

          ⑴ 미사=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사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성경 어디에 보아도 미사라고 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미사 때는 약정한 예물을 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며 죽을 때에 하늘나라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믿음으로 가는 것이지(요3:16) 바치는 예물로 간다는 성경 구절은 없다. 또한 미사를 드리면 연옥에서 불타고 있는 죽은 영들이 휴식을 가지게 하는 행위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연옥도 없고 미사를 함으로 불에서 고생하는 자에게 영향이 미친다고 한 것은 전혀 없는 낭설이다. 성경은 지옥에 가 있는 자는 오갈 수 없다고 했다(눅 16:19-31).

          미사 때에 사제가 매번 성병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갈보리 희생의 반복이 되므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예수님은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을 하였으며 이 땅에 심판장으로서 오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콘스탄틴회의(AD 1414)과 트랜트회의(AD 1545)에서 미사교리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반대하였다. 기독교의 예배는 성경 말씀과 찬송, 기도, 성찬 예식으로 성립되었다.

          ⑵ 잘못된 성례론
          ① 떡과 잔에 대한 주장=사제가 떡과 잔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의 실체의 피와 영과 살이 신성으로 변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3-25)고 했다.

          그리고 성찬식하고 남은 빵을 보관하는 곳이 구약의 지성소와 같다고 한다. 신부들이 축성하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남은 빵이 보관되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현존하는 곳이라고 한다. 가톨릭은 신자들이 남은 빵이 보관되는 곳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여기고 경배하도록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일이다.

          ② 세례에 대한 주장=가톨릭에서는 어린이나 어른에게 세례 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물을 이마에 찍으며 머리에 뿌림으로서 신자가 되고 원죄를 씻고 그 영혼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고 했다. 그럼에도 가톨릭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임을 주님께서 직접 확증하셨다(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 제 1257항)고 가톨릭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은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구원은 값없는 선물이며, 행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세례에 의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카톨릭이 고안해 낸 것이다.

          요한복음 1장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다. 이런 성경 구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은 세례는 모든 죄들을 정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개종자를 하나님의 아들인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며 하나님의 성품의 참예자가 되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며 성령의 전이 된다(제 1265항)고 주장한다.

          이런 교리는 많은 성경 구절들과 상반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선언했겠는가? 또 빌립보 간수가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말했다. "그 후에야 그 밤 그 시간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행 16:30-33)라고 했다. 그렇다. 그들은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는 항상 구원 이후에 이어 나온다. 성경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들을 용서할 수 있으며, 세례와 같은 행위를 함으로써 죄들이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고 한 구절은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결정적으로는 예수님 옆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죽기 직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했다. 그가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낙원에 갔다. 왜 그렇는가? 이는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지 세례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인가? 오늘날 세례를 주장하는 개신교인들 중에서도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카톨릭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반대된다. 카톨릭 교리는 그렇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겠는가?

          7. 가톨릭의 잘못된 기도론

          가톨릭은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도 다른 사람에게도 기도드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6절과 요한복음 16장 23- 24절에 하나님께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릴 수가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리아도 천국에 간 성도에게도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고 주장하나 모두 잘못된 교리이다. 또한 기도는 기계적으로 되풀이 할 수 있다는 것과 염주와 같이 묵주기도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나 성경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중언부언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마6-13).

          8. 가톨릭의 잘못된 성도론

          가톨릭은 교황들이 인정한 사람으로 죽어 하늘에 있는 자만 성도라고 부른다. 가톨릭인들이 죽기까지는 성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고린도후서 1장1절, 빌립보서 1장 1절, 골로새서 1장 2절에 보면 누구나 예수로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거룩한 자 : 구별된 자)라고 부르고 있음을 성경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땅의 사람이 그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듣지 못한다고 했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과 땅에 있는 사람들의 중재자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요한복음 2장 1절과 데살로니가 전서 2장 5절에 보면 오직 예수님만 중재자이심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은 전 세계적으로 약 11억 9567만 1천명의(2010년 12월 31일 기준) 교인들에게 잘못되게 가르치고 있다. 둘리아(Dulia) 미사는 성도들에게 하여야 하며, 제일(祭日)들은 성도들의 명예를 위하여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어디에 죽은 자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했는가?(눅 19장10절을 참조). 이 의식은 우상숭배임을 우리들은 쉽게 알 수가 있다. 사도행전 10장 25절과 26장 8-18절에도 베드로와 바울이 자기들을 숭배하려고 할 때에 나도 사람이라고 하면서 거절한 것을 저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가? 그래서 어느 학자는 가톨릭의 모든 의식의 75%가 이교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9. 십자가 숭배 사상

          가톨릭은 예배가 아닌 미사를 드리는데 그 때에 십자가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사제를 본다. 미사 때에 사제는 십자가 표시를 16번, 제단 축복 시에는 30번 정도 한다. 그런데 십자가는 고대 종족들이 무늬숭배로 사용하여 왔다. 부적같이 여기며 사용했는데 가톨릭에서 이것을 예배의식에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상징하기 위한 형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상 숭배가 된다고 했다.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부적같이 사용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십자가가 없었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 형상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개신교는 촛불을 강대상에 켜 놓는 행위나 태극기를 강단에 장식하는 행위, 화려하게 꾸며 놓아 강단을 미화하는 행위는 성경에 위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려하게 꾸미면서 설교하신 것도 아니요, 화려한 곳에서 설교한 것도 아니다. 자연미가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설교하셨다. 가톨릭에서 제단의 촛대나 화려한 장식 등은 성경에 위배가 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십자가를 예배당에 세우기 시작한 것은 주후 586년부터 이다. 그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진 것을 예배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독교 이전 수세기 전에 십자가는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숭상되고 있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바벨론의 신인 담무즈(Tammuz)의 첫 글자 T 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글자는 바벨론 사람들의 가슴에 다는 호신 패(부적)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형(死刑)형틀로서의 십자가의 유래는 매우 오래 되었다. 먼저 이교도들이 사용해 왔고, 애굽, 앗시리아, 페르샤, 팔레스틴, 카르타고 등지에서 흉악범에 대한 처형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십자가의 모양도 여러 가지이다.

          십자가는 가톨릭으로 물밀 듯이 들어온 우상들 중에 하나이다. 로마 카톨릭이 국가 종교적 형태로 발전하게 된 콘스탄틴 황제 때의 일이다. 밀비안 브리지 전투 하루 전날 콘스탄틴은 태양 신에게 기도했을 때 석양 너머로 십자가와 함께 "이 표로 정복하라(In this sign conquer)"는 글씨를 보았다. 그 다음날 십자가를 앞세우고 진군했을 때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회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유일한 출처는 유세비우스인데, 그는 “역사의 날조자”로 규탄받은 인물로 신뢰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콘스탄틴 황제는 태양신 미트라의 최고 사제로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미트라의 생일이 12월 25일 인데 그리스도 탄생을 기념한다는 명목하에 예수님 탄생일로 둔갑시켜 크리스마스라는 축제일로 제정하는 경정적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역시 미신적이어서 유품들을 찾아다녔다. 수세기 동안 교황들이 인정한 유품들은 가지각색이다. 십자가에 박혔던 못, 그리스도께서 입을 댄 해면, 예수님께 입혔던 주홍색 겉옷, 가시 면류관, 최후에 만찬 때 쓰던 잔, 마리아의 머리카락(어떤 것은 갈색, 고수머리, 빨간 머리, 검정색 등 종류가 다양하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탔던 어린 나귀의 뼈들. 이런 것들은 부적으로 팔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의 땅과 건물이 거룩하다고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787년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성당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십자가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상징”이었다(갈 3:13). 우리는 분명히 해 둘 것은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또한 아무도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상징으로 만든 적이 없다는 것이다.  

          10. 교황 제복의 문제점

          ⑴ 교황이 쓰는 모자=가톨릭 교황이 쓰는 물고기 머리 모양의 주교관을 ‘미트라’(mitre:어두관, 입을 벌린 물고기 머리 모양의 모자)라 한다. 이 모자는 물론 교황만 쓰는 것은 아니다. 교황아래 추기경, 주교들도 무슨 행사 때마다 이 모자를 쓰고 나타난다. 그 모자의 모양은 물고기 머리 형태를 띠고 있다. 또 그 모자에는 라틴어로 'Vicarius Filii Dei'(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하는데 글자를 풀이하면 666이다. 이 모자는 고대 페르시아의 빛과 진리의 신, 즉 태양신 미트라의 모자에서 기원했다. 그러니까 원래 태양신 미트라교의 사제들이 쓰던 미트라 관을 로마 사제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쓰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최고 수장 교황의 어두관은 곧 가톨릭은 성경의 예수님의 교회가 아닌 중세 혼합주의 우상 종교이며 기독교로 가장한 요한계시록의 음녀인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⑵ 우상이나 동상에 교황이 입을 맞추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이교의 풍습이다. ⑶ 교황의 부채도 행렬 시에 대형부채를 가지고 있는데, 역시 이집트 이교의 산물이다. ⑷ 자주 빛과 붉은 빛 옷도 고대 이교의 복장이다. 로마 사제들의 복장이 붉은색이었다. ⑸ 사제들의 검은 예복도 원래는 바알 제사장들의 의복이 검은 색이었다. 스바냐 1장 4절의 그마림이 바로 검은 예복을 입은 바알 제사장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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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 드리는 기도 최송연 이 9월에 나는 소원하네
              저 하늘의 청명함과 넓음을 쏙 빼닮은 내 마음이기를...
              메말라가는 나뭇잎 사이로 흐느끼는 바람소리는 온 여름 다 가도록 불러보지 못한 시인의 애잔한 사랑 노래인 듯...
              봄, 여름 내내 젊음을 괭이질 하며 땀 흘려 일궈낸 화사한 꽃이여 이제 그 떨어지는 영화에 울지 말고 밤송이 같은 알갱이로 알알이 영글어야지
              미움은 사랑보다 아픈 것 아픔은 영혼을 어둡게 하는 것 영혼을 어둡게 하는 아픈 情일랑 흐르는 갈바람에 모두 날려보내야 하리
              저 하늘처럼 넓고 청명한 가슴, 착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죄인을 품고 사랑하신 그분처럼 더 많이 품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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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말씀만을 설교해야 한다 / 윌리엄 퍼킨스

           

           

          설교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1) 설교는 교회를 모으고, 선택받은 모든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도구다. 2) 설교는 주님의 양무리에게서 늑대들을 쫓아 버린다. 설교는 플렉사니마 즉 영혼의 ‘유혹자’다 설교로 인해 자의적인 마음이 누그러지고, 불경건한고 이교적인 삶의 양식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회개하는 삶으로 전환된다. 고대 이교도들의 근원을 흔든 것이 설교라는 무기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14:3)

           

          말씀의 사역자에게는 오직 두 가지 의무가 있다. 하나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대언이라는 말은 설교만이 아니라 기도에도 적용된다(대상25:1). 그러므로 모든 대언자의 임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목소리로(설교로)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백성의 목소리로(기도로) 아뢰는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대언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 은혜로 부름을 받고 은혜 안에서 보호하심을 입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로 오게 하셨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백성에게 간청한다. 이는 우리를 시켜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18-20).

           

          성경의 완전성과 내적인 연속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설교해야 한다.

          성경은 설교의 유일한 주제이며 설교자가 끊임없이 일해야 할 유일한 밭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거룩한 진리이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딛 1:1-2).

           

          성경의 본질이 가진 탁월함은 완전성 또는 순결성 또는 영원성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의 완전성은 충족성 또는 순결성에도 있다.

           

          성경의 충족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완전해서 어느 것도 성경에 더하거나 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어느 것이나 적절한 목적을 위해 항시 제자리에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19: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12:32).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성경의 순결성은 성경이 실수나 속임이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사실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12:6).

           

          성경의 영원성은 침범할 수 없는 특성을 말한다.

          성경이 명하는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다 이루어진다(마5:18).

           

          성경의 효력은 두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1. 인간의 영을 꿰뚫는 능력(히4:12).

          2. 양심을 묶는 능력,

          즉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하여 변명하거나 참소하지 못하게 한다(약4:12, 사33:22).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성경 속에 있다. 성경은 성령의 서기나 비서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교회를 위해 적절한 언어로 쓴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우리가 성경을 정경이라 부르는 이유는 주님이 사용하는 잣대 또는 줄이기 때문이다.

          정경의 도움으로 진리를 발견하고 검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모든 논쟁에 따른 판단과 최종적이며 최고의 결정은 성경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의 메시지의 핵심과 본질을 다음과 같은 논증(삼단논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전제: 참된 메시야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 되실 것이며, 다윗의 씨를 통해 오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 아버지의 품에서 태어나실 것이다. 메시야는 율법을 만족시키실 것이며, 믿는 자들의 죄에 대한 희생으로 자기 자신을 드리실 것이다. 메시야는 죽음과 부활로 사망을 이기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에 올라가실 것이고, 때가 되면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소전제: 마리아의 아들 나사렛 예수는 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신다.

          결론: 따라서 예수님은 참된 메시야이시다.

          이 삼단 논법에서 대전제는 모든 예언서의 범위 내지 주된 요지이며

          소전제는 모든 복음서와 사도 서신 속에 담겨 있다.

           

          - 윌리엄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출처: 자기부인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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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부모의 잘못된 삶은 자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인류 역사상에 가장 끔찍하고 악한 사건중의 하나가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사람 육백만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겁니다. 전쟁 상황 중에 서로 죽인 것도 아니고, 유대인을 하나씩 끌어다가 깨스실에 넣어서 죽였단 말입니다.

          저항도 못하는 유대사람들.. 육백만이 도데체 얼마입니까? 부산 인구가 6백만명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을 다 죽인 것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놀랍고 끔찍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이런 일을 저지른 히틀러 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의 아버지는 본래 행상인이었답니다. 물건을 해다가 돌아다니면서 팝니다. 이거 다 팔 때까지 집에 못 돌아옵니다.

          한 달도 걸리고 두 달도 걸리고 그리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래서 집을 늘 비웠습니다. 그 어머니가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이웃남자들과 불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 중에도 돈 많고 세력이 있는 유대사람과 어머니가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을 그는 보고 자랍니다. 눈물로 하소연하고 매달리고 말렸지만 어머님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두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나는 유대사람이고 하나는 여자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는 결과적으로 육백만을 죽이는 그런 사람이 됐고, 주변에 수없이 여자가 많지만은 여자들을 미워하고, 끝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어릴 때 받은 상처는 자녀들의 인생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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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찜통처럼 후끈거리고 무덥기만 하던 여름ning도 어느새 다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해진 것을 보니까, 가을이 완연하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지나고 나면 곧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진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가을은 계절로서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는 것이다.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발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는 꼭짓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갈등과 다툼,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마가 때문에 급기야는 분열하고 갈라서야만 하는 아픔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분쟁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터닝 포인터(Turning point)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시각, 긍정적인 시각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넘어, 초대교회 역사를 재조명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주신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으리만큼 밀접한 관계로 함께 이방인 선교 사역을 펼쳐나갔던 멋진 동역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까지 내어주던 과격한 성품의 바울에 비해 바나바는 그 이름이 주는 뉘앙스대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서로 다툴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 있었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백팔십도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이전의 핍박자였던 바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동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처음으로 설득한 장본인이 바로 이 바나바였던 것이다(행 9: 27). 그 후로, 이 둘은 서로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사이로 급진했으며,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나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그들에게도 갑작스럽게 균열이 생김을 볼 수 있다. 지지해주는 협력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하려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마가 라고 하는 요한을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둘은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만, 바울은 이전의 이탈자와의 합류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강하게 반대한다(행 15: 37-38).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은 두 인물과 그들의 특별한 관계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한 마디로 그들의 불화가 시작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마가였다. 왜일까? 물론,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하던 1차 선교 여행지 중의 한 곳인 '밤빌리아'에서 그들(바울과 바나바)을 등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되돌아와서 두 사도들과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런 마가의 행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다가 도중 하차한 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하는 데도 매개변수였다. (행 15:37∼39) 결국,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돌아가는 여행을 선택하고, 바울은 그의 새 파트너인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역량 있는 선교사로서 바나바보다 더 큰 역량을 발휘하지만, 덕망 있는 권위자(행 4:36), 바나바에게서 좀더 배울 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은 불완전해 보이며 결코 완벽하지 못한 사도로 비쳐질 뿐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화목할 수 없을 때가 종종 발생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들의 주장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강할 때 일어나는 피치 못할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적 불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사역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포인트가 되겠다. 사상이나 견해가 서로 너무 맞지 않을 때는 심하게 다투고 죽기까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무익하다. 그럴 경우에는 서로 축복해주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초대 교회 이방인의 선교사역은,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은 두 사람의 지도자가 각기 등돌리고 돌아서게끔 악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막 태동한 이방인 선교사역에 큰 위험을 주는 요소였고, 큰 아픔이었다. 그런 아픔을 바라보게 된 마가 역시 마음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도의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가슴 아파하며 애통하는 때가 그에게 있었지 않을까? 그런 그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때가 바로 마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남은 여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여기 이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록할 때,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갔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 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1∼52)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그 청년이 바로 마가 자신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희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그렇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비겁한 마가가 아니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다! 훗날, 이런 마가를 가리켜 베드로는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며 아꼈고, (벧전 5:13) 로마에 있던 바울은 마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해 골로새로 보내면서 골로새교회에게 그를 잘 대접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다(골 4:10). 순교에 앞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마가를 데려오라고 간절히 부탁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딤후 4:11)

          이렇듯, 훌륭한 두 사도의 격렬한 다툼의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는 그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듯, 마가의 남은 여정은 신실한 일꾼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국에 가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던 바울 사도에게마저 중요한 사람, 인정받는 동역자로 거듭난 것이다. 마가는 한 때 다른 사람에게 불화를 조성한 원인 제공자였던 부족한 사람이지만, 회개한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근간에 일어나고 있는 뉴욕 교계의 분쟁과 불화의 몸살은 우리가 모두 함께 앓고 있는 심한 몸살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바 된 귀한 형제 자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생명이다. 이런 귀한 생명체 안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이다. 그럼에도 앞선 몇몇 지도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한, 아름다운 화음을 울려야 할 오케스트라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인하여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작금의 뉴욕 교계 역시 모두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 아집이 이런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다툼으로 분열될 지경까지 가게 되었으나, 그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었고 그 일 때문에 더욱더 훌륭한 선교의 장이 열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런 분쟁도 결코 나쁘다고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의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만 하고 주님께 더욱 더 자신을 찢고 겸손한 무릎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도 자신의 주장, 자기 의(Self- Righteousess)에 갇혀서 살았다면, 자기 살을 찢어내는 아픔, 고육지책 (苦肉之策)을 감행하고서라도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 되기 힘써 지켜야 하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세포분열을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오늘이야말로 뉴욕교계가 바른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아픔의 순간들을, 결코 가볍게나 헛되이 허비하지 말고, 주님께로 되돌아 가는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그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멋진 날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세계에 흩어진 성도들)는 뉴교협 교역자님, 평신도 지도자님들, 그리고 뉴욕 교협에 소속한 모든 성도님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 이 아픔을 딛고 잘 해내실 것이라고, 주님 안에서 멋지게 성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굳게 믿어보고 싶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사도행전 15:36~41)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  

          개혁주의 언약교리에 나타난 조직(신학)과 경건의 조화 :

          윌리암 퍼킨스(1558-1602)와 죤 프레스톤(1587-1628)"

           

          송 영 재 (조직신학, 개혁신학연구원)

           

          I. 전체 요약 (Summary)

           

                  스탠리 그렌즈(Stanley J. Grenz)와 로져 올슨(Roger E. Olson)은 현대신학의 역사를 하나님의 초월(transcendence)과 내재(immanence)의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해석 하였다.  20세기 신학은 계몽주의 철학의 도래와 함께 깨어졌던 "초월과 내재의 신학적 균형"을 찾아 가고있는 과정중에 있다고 저들은 결론적으로 말하였다.  신학에서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필자는 영국 개혁주의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의 이분법적 해석에 대한 문제를 본 논문에서 새롭게 조명하여 보려고 했다.  

           

                  초기 개혁주의 언약신학 안에 스콜라적인 전통과, 성경적인 전통이 있었다는 이른바 이분설(two traditions theory)은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에 우호적이지 않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통하는 학설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전자는 조직신학의 특성인 주제별(loci) 혹은 논리적(logical) 접근을 강조하는 예정론 중심의 대륙신학과 영국 개혁신학에서, 후자는 성경신학의 특성인 구속사적 (heilsgeschichtlich) 혹은 역사적(historical) 접근을 중요시 하는 독일(화란) 개혁신학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제네바(Geneva) 신학의 "유언(testament)"에 의거한 은혜일변도의 초월신학이며, 다른 하나는 쥬릭(Zurich)신학의 "언약(covenant)"에 의거한 역사와 인간의 자율성을 무시하지 않는 내재신학 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개혁신학의 언약교리에 대한 "유언적" 접근과 "언약적" 접근의 대립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언약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대립시키는 부당한 신학적 전제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이 낳은 "본체계(phenomena)/ 현상계(noumena)"라는 초월과 내재의 분리가 (이른바 "the post-Newtonian mind") 이와같이 언약신학에 있어서도 유언/언약의 분리해석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역사(구속사)/구조(예정론) 이라는 신학의 총체적인 이분화 현상을 유도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직도 학자들이 과거의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약교리가 주로 주경신학(exegetical theology)의 연구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과거의 추세도 여기에 적지않은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주경신학의 특성상 구원의 역사적이고 내재적인 관점을 초월적인 것보다 더 강하게 하이라이트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언약교리에 대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 "스타일"의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적 방법론이 어디에서부터 체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답을 영국 개혁신학의 최초의 조직신학자로 평가 받고있는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의 언약신학에서 찾게 되었다.  퍼킨스의 언약신학은 칼빈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후자보다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언약의 적용을 한 것이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약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해석하고 "구원의 서정"적인 구조안에서 언약과 Decree, Casuistry, Conscience, Sacraments, Faith, Assurance, Law, Preparation 등의 관계성을 풀어 나갔다.  

                  이와같은 사실을 배경으로 본 논문이 논증하려고 하는 것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초기 개혁신학의 언약에대한 "조직신학적" 방법론을 밝혀 내려고 하였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실제적인 창시자로 알려진 요한 칵세이어스(Johannes Cocceius, 1603-1669)의 "구속사적"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칼빈의 신학을 이어받은 영국의 개혁신학자들이 조직신학적으로 언약을 연구 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언약의 조직신학적 방법론은 네가지로 요약되는데 (1) 언약이 "구원의 서정"적 구조속에서 다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2) 언약은 영원한 작정을 역사속에서 집행해 나가는 "작정집행의 방편(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으로 정의 되었다는 사실이다.  (3) 언약을 은혜(Grace)와 율법(Law)등 신학적 구원론적 초월과 내재의 연결고리로 사용한 사실이다.   (4) Ramist 의 양단법(dichotomous method)을 사용하여 신학을 faith and duty 로 나누어 정리한 사실이다 (예: 웨스트 민스터 문답서).

           

                  이와 함께 조직신학의 특성인 "주제별(loci)"접근과 주경신학의 특성인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 접근은 각각 구원의 구조(redemptive logic)와 구원의 역사(redemptive history)를 구별하는 방법론적(methodological) 구분일뿐 언약의 초월성(영원성과 은혜성)과 내재성(역사성과 조건성)을 분리시키는 신학적(dogmatic) 또는 내용적(substantial) 구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구원의 구조(구원론)와 구원의 역사(구속사)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 전통적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신학의 "조직성"과 "역사성"의 구분을 "유언"과 "언약"의 구분과 동일시 하여 대립적으로 보는것은 신학과 신학의 방법론을 혼동하는데서 비롯된 발상이다.  

                  둘째, 퍼킨스는 "경건주의의 아버지(the father of pietism)"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의 신학은 경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칼빈주의적 예정론자인 경건주의의 창시자로까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경건신학은 곧 언약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음을 필자는 발견 하였다.  그의 경건신학 곧 성화신학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Casuistry, Sacraments, Assurance of Faith, Law, and Preparation for Regeneration 등에서 강렬하게 표현 된다.  이러한 주제들을 초기 개혁자들보다 더 자세하게 연구하여 구원의 "내재"를 조명하고 경건의 dynamic 을 강조한 그가 "조직신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성경적 긴장관계 속에서 유지하려고 했음을 필자는 밝히려고 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만이 인간의 책임있는 삶과 역동적인 경건의 dynamic 을 가능케 한다는 것의 퍼킨스 언약신학의 요약이라고 할 수있다.  초월과 내재, 영원성과 역사성, 은혜와 책임이라는 파라독스적인 신학구조는 칼빈이든 불링거이든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기본 전제인데 Federalist 학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만을 강조하여 그 신학에는 언약적 경건이 없는 것 처럼 결론을 내리었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 하였다.

                  셋째, 구원의 구조와 구원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곧 개혁신학 그 자체를 신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Calvinist/Federalist 이론은 이러한 분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언약적 구조를 기초로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i.e.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로 John Preston)이 신학적으로 Calivinist 가 아닌, Federalist 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언약에 대한 접근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언약개념 그 자체가 예정론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신학적 대립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 학설의 모순점은 퍼킨스와 같은 예정론자들이 언약을 중심으로 구원의 구조문제를 다루었다는 것과, 거꾸로 17세기 쌍무적 언약신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진 죤 프레스톤과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등은 영원한 작정을 전제로하여 언약을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Calvinist/ Federalist 이론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설득력있는 답변을 제시하지 못 하였다.  필자는 저들이 Federalist 로 간주하여 그 전통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고 있는 죤 프레스톤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전무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의 언약신학에 대한 좀더 심도있는 해석을 퍼킨스와의 통일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도 하였다.

           

           

          II. 초월과 내재의 신학적 분리(A Dogmatic Division of Transcendence and Immanence)

           

                  1. 언약의 초월과 내재에 대한 두 학설

           

                  죤 본로(John von Rohr)는 17세기 영국개혁주의 언약신학에대한 연구결과들을 크게 두갈래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페리 밀러(Perry Miller)의 학설인데 그는 칼빈의 예정신학과 차세대 칼빈주의자들의 언약신학이 질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의 다른 신학임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언약신학은 예정신학의 지나친 초월성에 대한 역반응으로 생겨났으며, 후자에서 결핍된 내재성(immanence)을 보완하는 신학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레오나드 트린테루드(Leonard Trinterud), 윌리암 클레브쉬(William Clebsch), 리차드 그리브스(Richard Greaves), 웨인 베이커(Wayne Baker), 알티 켄들(R.T. Kendall) 등의 학자들이 밀러의 학설을 토대로 영국 개혁주의 언약신학에 대한 비중 있는 연구 논문들을 발표 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칼빈의 "유언(testament)" 신학은 은혜일변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신학 이었던 반면에, 불링거(Bullinger)의 "계약(covenant)" 신학은 쌍무적 책임을 강조한 균형있는 신학으로 평가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제 2세대 개혁신학은 두 개혁자들을 분깃점으로 칼빈파와 과 불링거파로 나뉘어 결과적으로 "유언신학(Calvinist)"과 "계약신학(Federalist)"이라는 두 개의 융합될 수 없는 독특한 신학으로 발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이와는 반대되는 입장에서 젠스 몰러(Jens Moller)가 제시한 작정신학과 언약신학의 일체성과 연속성에 대한 학설을 따르고 있다.  그는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것이 예정론을 "무디게(blunting)"하거나 "누그러뜨린다 (mitigating)"는 대립논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약을 영원한 작정(eternal decree)의 역사적 "집행도구(means of execution)"로 이해함으로써 작정과 언약의 신학적 동질성(dogmatic unity)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칼빈의 신학은 예정론적 이면서도 경건적 이었다고 지적 하였고, 후기 칼빈주의자들의 언약신학이 칼빈의 신학에 내포된 언약교리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후 다른이들이 역시 몰러의 학설에 동조하면서 후속 연구논문들을 발표 하였는데 그중 마이클 멕기퍼트(Michael McGiffert), 윌리암 스토버(William Stoever), 죤 본로(John von Rohr)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언약신학의 논쟁에 있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언약을 이해함에 있어서 "공로와 은혜는 본질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언약신학이 철저하게 은혜신학 임을 재천명 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그들은 언약에서 "인간의 공로를 배제한다는 것은 언약에 참여하는 인간의 자발적 기능(conditionality)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들은 언약이 초월성을 전제하면서도 내재적인 관점에서 역사의 유기성과 인간의 자발성(이것은 타락전 행위언약을 가능케 했던 근거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는 사실을 개혁주의 인간론(the doctrine of man)의 관점에서 시사 하였다.  

           

                  2. 은혜와 공로의 속죄론적 구분

           

                  필자는 후자에 속한 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Calvinist/Federalist 학설의 문제는 은혜(grace)와 공로(merit)의 속죄론적 구분과, 은혜(grace)와 조건(condition)의 언약적 구분을 혼동하거나 부정 하는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혁신학은 속죄론적으로 보면 하나님 주권과 은혜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유언"신학이다.  그러나 "회심"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거듭난 이성과 의지의 관점에서 보면 개혁신학은 지극히 "언약"적인  것이다.  Calvinist/Federalist 이론은 이 구분을 수용하지 못하는데서 비롯 되었음이 확실하다.  

                  이 두가지 구분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개혁주의 신학은 "창조언약(the covenant of creation)" 또는 "순종의 언약(the covenant of obedience)"이라고도 불리우는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을 구원론의 대전제로 간주한다.  언약신학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있는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은 실로 개혁주의 속죄론의 "뇌관"에 해당되는 교리이다.  이것은 속죄론에서 공로와 은혜의 질적구분을 명백히 하여줌으로써 "이신칭의"의 신학적 당위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발성을 전제로 하는 심판의 근거가 되는 교리이다.  

                  Calvinist/Federalist 파의 학자들이 "유언신학"을 스콜라 신학으로 치부하고 "유언신학"의 속죄론적 전제인 "행위언약"을 일종의 신학적 금지사항(taboo)으로 규정해 버린것도 이때문이다.  행위언약을 인정함은 곧 "유언신학"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죄론의 관점에서 "유언"을 인정하지 않음은 곧 Sola Gratia 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성향을 놓고 볼 때 필자는 Calvinist/Federalist 의 신학적 의도 그 자체가 심히 의심 스럽기까지 하다.  

                  행위언약의 부정은 곧 개혁신학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신정통주의에 사상에 근거한 "Law in the Gospel" 교리에 대항하여 앞장서고 있는 마크 칼버그(Mark Karlberg)는 이른바 Calvin/Calvinist 학설의 신학적인 문제점이 행위언약의 속죄론적 의미를 간과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 하였다.  그는 개혁신학을 "유언신학"과 "언약신학"으로, 또는 "예정론적" 신학과 "성경적" 신학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개혁신학의 핵심 전제가 되는 '행위와 은혜의 구분' 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한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못 밖았다.  

                  결국 저들은 행위언약에 내포된 은혜와 행위의 속죄론적 대립을 은혜와 책임, 예정과 역사의 대립으로 비약 하였다.  저들이 의미하는 "유언신학(칼빈신학)"에는 언약 당사자들의 쌍무적 책임이 전혀 배제되었다.   개혁주의 안에 칼빈주의 전통은 역사와 인간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무시하는 잔인한(inhumane) 신학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행위언약"은 속죄론에 있어서 행위와 은혜의 절대적 대립을 의미하는 것 뿐이지 칼빈주의 신학 전체를 "유언신학"으로 규정짖는 비약적인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행위언약 교리는 다른 무엇보다 성경적 구원론적 진리이지, 저들이 주장하듯 이중 예정론을 변호하기 위한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공론에서 비롯된 교리가 아니다.  어쨌든 개혁신학의 속죄론과 칭의론(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에 있어서 은혜와 행위의 구분은 명백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이 명백하게 구분 되어져야 한다.  만일 언약적 또는 쌍무적 "협력"이 속죄론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의 혼합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개혁신학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특정신학을 "유언이냐 언약이냐?"으로 규정짖는 것은 그 신학의 속죄론을 규정 짖는 것과 다름 없다.  저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신학으로 보기 때문에 "유언"이라고 했지만, 거꾸로 칼빈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언"이 빠진 언약신학은 알미니안 신학으로 전락하게 된다(실제로 그런 성향이 많이 있음을 필자는 본 논문에서 다루었다).  저들은 유언신학에는 인간의 책임이 배제 되었다고 주장 하지만, 그렇다면 거꾸로 유언이 빠진 언약에는 행위가 구원을 결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저들이 직시 해야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혁신학을 유언과 언약으로 나누는 것은 마치 개혁 신학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로 나누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개혁신학은 속죄론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은혜에 근거한 "유언신학"이지만,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한 "언약신학" 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유언이냐 언약이냐?"는 윌리암 스토버(William Stoever)의 말대로 "post-Newtonian mind"에서 나온 "위조된 이분설(false dichotomy)"이다.

                  그러나 필자는 실제로 저들이 유언신학이라고 규정한 칼빈신학과 그의 영국 후예들은 인간의 자발성과 책임을 전제로한 강렬한 경건신학을 산출해 내었다는 사실을 저들의 모델(construct) 속에서 설명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논증 하였다.  이것은 또한 저들이 언약신학이라고 규정한 츄리히 파의 불링거 신학에도 칼빈신학과 버금가는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가 지배적 이라는 다른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놓고 볼 때 Calvinist/Federalist 이론이 얼마나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3. 대안: 방법론적 구분

           

                  결국 Calvinist/Federalist 의 충돌은 개혁신학을 이분화 시키는 신학적 충돌을 피할수 없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구조/역사"라는 방법론적 구분을 제시 하였다.  Bullinger-Cocceius 전통은 구속사적 렌즈를 통해서 언약의 점진적 발전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법론이며, Calvin-Perkins 전통은 구원의 구조적인 렌즈를 통해서 언약의 체계에 초점을 맞춘 방법이다.  구원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과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분명이 다른 시각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와 히브리서는 같은 언약교리를 접근함에 있어서 "구조/역사"라는 방법론적 차이점을 갖으며 여기에서 생겨나는 긴장관계는 성경계시의 원래적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책들이 두 개의 서로 매우다른 독특한 관점에서 언약을 설명하고 있음은 신학적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파악할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모든 구속행위들(redemptive acts)을 논리적 구조(logical structure)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반면 히브리서는 그것들을 역사적 구조(historical structure)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똑같은 신학적 주제를 놓고 한책은 논리적 통일성을 전제로하여 조직적인 접근을 하고 있고, 다른책은 역사적 점진성을 전제로하여 구속사적 접근을 하고 있다.  성경의 저자들은 이 두가지 방법론의 대립적 관계를 표명한적이 없다.  이 두방법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유추된 언약적 이해가 하나의 획일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 보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교리를 더욱 풍성하게 그리고 다각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필립 휴즈(Philip Hughes)는 히브리서에 나타난 "구속사"가 "성경의 조직성(logic of Scripture)"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바로 지적 하였다.  이것은 성경의 조직성과 역사성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말이며, 바꾸어 말하면 성경의 신학적 구조 역시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만 바로 이해 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칼빈과 불링거, 그리고 퍼킨스와 칵세이어스 사이에 신학적 충돌을 피하면서 그들의 언약신학속에 나타나 있는 분명한 접근방식의 차이점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두가지 방법론은 상호보완적이지 상충대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였다.  

           

                  두 방법론을 신학적으로 상충대립 시킨 사례는 물론 오늘날의 Calvinist/ Federalist 학설외에도 역사적으로  빈번 하였다.  Gabriel Biel 에서 시작된 로마 천주교의 언약 신학("If you do what is in you, God will not deny grace.")과 Calvin 과 Bullinger 에서 시작된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속죄론에서 "주입된 은혜"와 "전가된 은혜"를 구분하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둘다 언약의 관점에서 인간의 책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천주교 신학의 배경을 갖은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구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교리에 대하여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그가 언약교리가 Sola Fide 를 위협한다고 생각 한것도 이때문이다.

           

                  스콜라적 초 칼빈주의(Hyper-Calivinism)는 칼빈의 예정론을 인간의지에 대립 시켰으며, 거꾸로 알미니우스-에미로우(Amyraut) 전통은 불링거의 언약을 하나님의 예정에 대립 시켰다.  오늘날에 거론되고 있는 세대주의 신학, 신정통 신학,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 Nomism) 등은 형태와 유형은 다르지만 사실상 전통적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볼때 두 언약적 방법론을 신학적으로 상충대립 시켰을 때 생기는 자연 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신학의 심장부는 역시 구원론인데 구원론중에서도 속죄론(칭의론)과 성화론의 바른 관계 정립은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양보나 타협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세대주의, 신정통, 언약적 신율주의 신학은 모두 속죄론과 성화론에 있어서, 또는 은혜와 율법에 있어서 전통적 개혁신학과 길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Calvinist/Federalist 의 문제가 실제적으로 오늘날 심각하게 재현 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역사적 개혁신학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작정(decree)과 인간의 결정(decision)을 동시적으로 강조 하면서도, 인간의 결정을 절대로 "공로"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았다.  쌍무적 언약의 책임을 인정 하면서도 속죄론적 "공로"는 철저히 배제 시켰다.  따라서 필자는 "유언과 계약"이라는 신학적 대립을 "조직과 역사"라는 방법론적 대립과 차별화 하지 않고 그대로 연결하여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양극화 시키는 학설의 비약과 무모함을 본 논문에서 밝히려고 했다.  

           

                  제네바와 영국 개혁신학의 systematic(예정론적) 언약신학이라고 해서 구원의 역사성이나 인간의 자발성 및 윤리와 경건을 배제하고 있다거나, 반대로 독일과 화란에서 형성된 redemptive historical(구속사적) 언약신학이라고 해서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외에 다른 어떤것에 근거 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은 신학의 문제와 방법론의 문제를 혼동 한 것으로 보인다.  언약 학자들이 주장하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다양성(diversity)은 속죄론적인 유언과 언약의 개념으로 분리하기 보다는 (soteriological distinction), 방법론적인 구원의 구조와 역사의 개념으로 구분함이 (methodological distinction) 옳다고 생각한다.

                  이분설은 거부하되 분명한 방법론적 다양성과 차이점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유익하다.  한가지 방법론(구원론 아니면 구속사)의 획일적이고 일원론적인 해석이나 적용은 유기적인 계시를 기계화 시키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역사화(historicize) 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언약의 내용적 동질성(unity)은 지키되, 역사적 획일성(uniformity)을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며, 언약의 다양성(diversity)은 인정하되 그것의 불통일(disunity)은 거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의 구조는 불변하지만 그 관계의 역사적 과정은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III. 요한 칵세이어스와 구속사적 방법론

           

                  Calvinist/Federalist 학설에 의하면 칵세이어스는 불링거 계열의 언약신학, 즉, Federalist 신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저들 서클에서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절정(zenith)" 이라고도 불리우는 화란 신학자 요한 칵세이어스(Johannes Cocceius, 1603-1669)는 개혁전통 안에서 언약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시도하였던 최초의 학자로써(그 전에 시도 되었던 모든 언약에 관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집필 했다는 의미에서) 개혁주의 언약신학 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성경의 언약을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연구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언약에 대한 성경신학적 모델을 제시 하였다.

                  개혁신학 전통 안에서 칵세이어스와 그의 성경신학적 혹은 구속사적 언약신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기념비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의 구속사적 방법론은 언약의 내재성(immanence)을 강조한 것으로써, 구속사를 통해 인간과 동행하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적" 하나님을 묘사한 것이 특징 이었다.  구속사는 곧 언약사라고 할정도로 언약은 그의 신학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는데 그 이유는 언약이 역사안에서 초월적인 하나님과 내재적인 인간을 연결해 주는 구원론적 매체가 되기 때문이다.  

                  언약의 역사성에 대한 칵세이어스의 집착은 대단한 것 으로써 그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19세기 "역사주의(historicism)"의 아버지로 불리우기도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내재철학"의 절정이라고 불리운 것 역시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가 시도한 구속사적 접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사를 점진적 이면서도 시대적 구분에 의거한 "세대적(dispensational)" 관점에서 해석한 것 이었다.

                  언약교리의 구원론적 방법론이 역사성과 내재성을 중요시 하는 칵세이어스 스타일의 구속사적 언약신학에서 배울수 있다는 사실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방법론은 언약관계에서 인간의 자발성이나 결정권을 확대 시킴으로 영성신학이나 경건신학을 발전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그렇지 않은 신학보다 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제시할수 있다.  스콜라적 칼빈신학의 "조직적" 방법론이 구원의 초역사적 뉘앙스들을 지나치게 확대 시키어 언약의 현실성을 약화 시키었음은 모든 개혁신학자들이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바 이기도 하다.

                  언약적 신조로 알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의 언약교리 조차도 인간의 자발성을 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근거하여 구원의 기계적 성격을 강조한 이른바 "대륙 주의설(continental voluntarism)"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칼빈주의 언약신학이 구속사의 시대적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역시 획일적으로 구원론적이었다.  이러한면에서 좀더 두드러지고 과감한 해석을 보여준 것은 이른바 비정통파들의 신학과 이론이었다."  요한 칵세이어스(Cocceius)와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 기스베루트스 보시어스(Gisbertus Voetius, 1589-1676)의 논쟁은 바로 이 두신학적 방법론의 차이점을 나타내 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논쟁은 곧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대립이었다고 말할수 있는데, 후에 조직신학적 방법론에 반기를 든 칵세이어스파의 과격론자 들은 극단적인 "세대적" 방법론을 주장하며 구속사의 세대적인 차이를 간과한 기독론적 "이신칭의" 교리의 획일적인 적용을 부정 하였다.  앞서 지적한 대로 칵세이어스의 구속사적 방법론이 과격한 세대적인 해석으로 빠지면서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이신칭의" 교리와 입장을 달리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칵세이어스는 구약에서는 죄의 간과 (παρεσιs, overlooking) 만이 있었을 뿐이며, 죄를 말끔히 제거하는 완전한 속죄는 아니었다고 가르쳤고, 신약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과 유언이 완성된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이 완전한 속죄(αφεσιs, forgiveness of sin)가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구약의 "죄의 간과"와 신약의 "죄의 속죄"가 구약적 칭의(Old Testament justification)와 신약적 칭의(New Testament justification)라는 개념들로 비약 되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명백히 정통 개혁신학의 속죄론에서 벗어 난것이며 결국 신구약을 분리시키는 해석학적 문제와, 신구약의 구원의 통일성을 붕괴하는 구원론적 문제와, Sola Fide 를 위협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헤르만 윗치어스(Herman Witsius) 와 같은 학자는 기본적으로 칵세이어스의 방법론을 선호 하면서도 두 신학의 차이점이 관점의 차이일뿐 질적 혹은 내용적인 차이가 아님을 지적 하였다.  언약의 구속사적인 방법론이 개혁신학에 기여한바는 점진적 계시의 시대적인 다양성에 촛점을 맞추어 언약의 유기성을 확대 시키고 역사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실감나게 할뿐아니라 인간역사에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을 묘사함으로써 실천적인 신앙과 경건의 "내재성"을 가능케한 것 이라고 할수있다.  개혁신학이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초역사적인, 이른바 "초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오류를 피할수 있었던 것은 칵세이서가 시도한 것과 같은 구속사적 방법론이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맞추어 주었기 때문 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을 근거로 하여 칵세이어스의 Federalist 신학이야 말로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Calvinist 신학이 형이상학적인 교리들과 "명제적 정통주의(propositional orthodoxy)"에 집착하여 언약의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배제 했다는 이론을 펼친다.  

                  그들은 "칼빈주의"의 이른바 추론적 예정론(deductive predestinarianism)에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역사성과 인격성, 그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비성경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리라고 비난한다.  "신학을 예정이라는 영원한 작정으로부터 추리함으로써 스콜라적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섭리를 엄격하고 기계적인 것으로 전락시키었고, 그로인해 역사나 구원 그리고 인간의 책임같은 것 들은 거의 무의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이들중 어떤이들은 아예 칼빈주의 언약신학을 중세 유명론(Scotist Nominalism)과 동일시 하여 언약신학 그 자체를 스콜라신학 으로 몰아치는 경우도 있다.  칼빈주의 에서 언약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 마저도 중세 유명론의 "조약(pactum)"교리에서 파생된 것 으로써 스콜라적 형이상학에 근거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에서 형이상학이 성경보다, 예정론이 구속사보다 앞선다는 비난에 대하여 리챠드 뮬러(Richard Muller)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통 개혁주의의 태동은 대략 네가지로 설명 될 수있다 (신학적 변증, 교육적 필요, 체계적 설명, 논리적 깊이와 일관성).  여기에서 한가지 확실하게 배제된 것은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핵심교리(central dogma)에 대한 집착이다."  여기서 "핵심교리"는 물론 예정론을 의미한다.  

                  그는 2세대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더욱 조직적인 방법으로 초기 개혁자들의 신학을 체계화 시켜나간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과정속에서 저들이 중세 스콜라신학의 방법론을 빌려 사용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문제시 되어서는 안될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시말해서 칼빈주의 신학이 스콜라적 방법론을 빌려 사용했기 때문에 두신학이 동일하다는 결론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비약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일반화 되어있다: "스콜라적 방법론은 성경적 진리들을 객관적인 사색의 대상으로 다루지만, 성경적 언약신학은 신학적 사고를 믿음의 범주안에 둠으로써 매우 실천적이고 인격적인 성향을 갖는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의 구조적 방법론은 경건에 대하여 무지한 사변적 신학이요, 구속사적 언약신학 이야말로 개혁주의 경건신학(theology of piety)을 대표하는 실천적 신학 이라는 이론이다.  구속사적 언약신학의 대부로 알려진 화란의 요한 칵세이어스가 개혁신학과 독일 루터신학을 포함하여 저들 사이에서 "경건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것도 이러한 반칼빈주의 정서에서 나온것이라고 볼 수 있다.  챨스 멕코이(Charles McCoy)는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 학자인 릿츨(Ritschl)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칵세이어스의 신학과 당시 스콜라적 방법론을 택하였던 칼빈주의 신학을 풍자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칼빈주의자이면서 또한 성경신학자이었던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기독교가 교리만이 아닌 삶 그 자체라는 것 이었다."

                  여기서 멕코이가 칼빈주의적 언약신학과 칵세이어스적 언약신학을 "교리와 삶"으로 대조한 것은 지금까지 지적한바 대로 저와같은 학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비교의 출발점이 얼마나 그 뿌리에서 부터 부정적이며 분리적 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제네바와 영국 개혁신학의 조직적(loci) 방법론은 교리일변도의 신학이며 독일과 화란 개혁신학의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 방법론은 "교리와 삶"의 균형을 이룬 성경적 신학 이라는 주장은 무리한 논리의 비약이며 다시 우리로 하여금 신학의 초월과 내재의 문제로 돌아가게 한다.  

           

           

          IV. 윌리암 퍼킨스

           

                  1. 서론적 고찰

           

                  앞서서 지적 했듯이 윌리암 퍼킨스의 언약신학에 나타난 구조적(systematic) 방법론은 언약이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을 실제화 시키는 구원론적 도구(soteriological instrument)라는 것이다.   죤 머리(John Murray)는 언약을 "구원의 적용(application of redemption)"이라고 설명 했는데 역시 같은 의미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개혁신학 에서는 구원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설명한다.  성부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시고(arranged), 성자께서 그의 적극적인 그리고 희생적인 순종을 통해 이루신(accomplished) 구원을, 성령께서 택함받은자에게 실제로 적용하여(applied) 구원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성령의 사역을 총체적으로 묶어서 "구원의 과정" 혹은 "구원의 적용"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곧 그리스도 와의 연합의 결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퍼킨스 신학에서는 바로 그리스도 와의 연합을 언약의 본질(essence)이요 내용(substance) 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 부르심, 중생, 회심, 칭의, 화해, 양자, 성화 등의 모든 구원의 선물들은 그리스도 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며, 그리스도 와의 연합은 언약이라는 관계의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 지고,  언약은 믿음을 통해서 체약 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  

                  더 나아가서 퍼킨스의 신학에서 언약은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그 특유의 내재적 또는 인격적 성향 때문에 경건신학과 실천신학을 유도하는 매우 "현실적"인 교리 이기도 하다.  초월과 내재를 연결하는 그 특유성 때문에 언약신학은 철저하게 은혜신학 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반응으로써의 역동적인 경건신학 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퍼킨스의 신학에 나타난 칼빈주의적 언약신학은 "ordo salutis의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분석과 적용이었으며...동시에 조직신학과 윤리적 결의론(moral casuistry)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였다"고 리챠드 뮬러는 말하였다.  

                  뮬러는 퍼킨스의 언약신학이 초월적인 작정과 내재적인 신앙을 일관성 있게 체계적 (systematic)으로 연결시키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던 방법론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지적 하였다.  필자는 뮬러의 지적을 더욱 발전 시켜 퍼킨스의 언약 신학에서 영원한 작정과 역사적 신앙을 상충대립 구도 속에서 해석하는 역사주의(historicism)적 전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결정 사이의 신학적 접촉점(theological point of contact)으로서의 언약 개념을 찾으려고 하였다.

           

                  2. 퍼킨스의 언약신학

           

                  영국 개혁신학의 선구자였던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의 언약신학은 지나치게 조직신학적 이고 스콜라적 이었다고 학자들에 의해 비난을 받고있지만 하인릭 헵(Heinrich Heppe)같은 대 학자도 퍼킨스의 언약신학을 대표하는 황금의 고리줄(A Golden Chaine)을 인용하며 퍼킨스는 엄격한 스콜라주의자가 아니라 "경건주의의 아버지(der Vater des Pietismus)" 였다고 그의 경건신학을 높이 평가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언약신학이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을 이어주는 신학적 접촉점 으로써의 당위성과 역할이다.       

                  하나님의 은혜(초월)와 인간의 자발성(내재)의 조화라는 역설적인 원리를 동시적으로 강조하는 개혁신학에 있어서 언약이 바로 그 둘을 이어주는 신학적 "고리줄(chain)"이라는 것은 타당한 이론이다.  이 "고리줄"은 성령에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개인에게 적용되는 이른바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이라고 앞서 지적했다.  

                  칼빈주의 언약신학에서는 특히 이 언약의 "고리줄"에 의해서 연결되는 두가지의 역설적 관계를 강조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God's decree)과 인간의 결정(man's decision)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은혜와 율법이다.  이 것들은 신학의 "신경중추(nerve center)"로써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수많은 신학적 논쟁들은 사실 이 두가지의 긴장관계를 해석하는데서 파생된 것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퍼킨스는 바로 이처럼 극도로 민감한 신학적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언약안에서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은혜와 자발적 순종의 합체라는 언약의 본래적 속성때문에 그런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퍼킨스 언약신학의 조직적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살펴보았다.

                  첫째, 앞서 언급 하였듯이 퍼킨스는 언약을 "예정의 집행도구"(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로 정의 하였다.  그는 예정론을 성경에 충실한 진리로 확신하여 사변적인 공론이 아닌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호하는 교리로 부끄럼없이 천명하였다.  그의 예정과 언약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17세기 초반 영국의 알미니안 신학을 상대로 했던 죤 프레스튼과는 달리 로마 천주교의 구원론을 상대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상으로는 매우 흡사한 배경 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천주교는 개신교적 구원론이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공격했고, 루터와 칼빈이후 이른바 제 2세대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를 보호 하면서도 Sola Fide 교리가 초래할 수 있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답변으로 언약교리를 발전 시킨 것이다.  

                  어쨋든 퍼킨스는 예정론이 인간의 자발성과 대립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것 이며 은혜신학의 타협할 수 없는 대전제임을 그의 신학체계 속에서 일종의 prolegomena 로 삼았다.  물론 이러한 면이 그의 신학을 스콜라주의로 공격한 그의 적들에게 원인제공을 한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는 복음선포를 통한 신앙결단의 필요성과 경건의 자발성 역시 성경에 근거한 정당한 가르침임을 인정하였고 경건성 계발을 위한 수많은 글과 운동을 실천에 옮기었다.  예정론이 은혜신학의 절대적인 전제라면, 인간의 자발성과 그에따른 책임성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개혁신학의 인간론적 원칙 이었던 것이다.  

                  성경의 이 두가지 진리사이에 생겨나는 긴장과 파라독스 앞에서 퍼킨스는 언약을 선택했다.  그가 언약을 "영원한 작정을 집행하는 도구(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로 정의하여 그것을 예정과 자발적 의지의 고리줄로써 이해한 것은 개혁신학의 본질을 꿰?는 심오한 신학적 통찰력 이었다고 평가되며, Calvinist/Federalist 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필자는 논증 하였다.

                  둘째로, 언약을 통한 초월과 내재의 결합은 그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해해서 상세하게 다루어 진다.  퍼킨스의 구원의 서정은 사실상 중생과 성화로 요약된다. 왜냐하면 중생은 구원의 초월성에 해당되며 성화는 구원의 내재성에 해당 되기 때문이다.  중생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 지지만 성화는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퍼킨스는 이와 같은 은혜의 객관성과 주관성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곧 구원의 서정을 성도에게 가져다 주며 그것이 곧 구원론적 언약의 이해이다.  

                  셋째, 퍼킨스가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운 것은 그의 언약신학이 율법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정론자인 그가 율법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율법적 경건(the piety of law)"이란 말도 그에게서 비롯 되었다.  퍼킨스는 믿음과 행위가 구원의 방법으로써(as a means of life-inheritance)는 대립적 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적 관계적인 차원에서 볼때 율법에 대한 순종을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창조론적 그리고 더 나아가서 종말론적 요구라고 이해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순종에는 율법에대한 적극적인 순종(active obedience)과 십자가의 희생적인 순종(passive obedience)이라는 두가지 "행위"가 포함되어 그것들이 믿는자에게 은혜로 전가된다는 것이 그의 속죄론이다.  이것이 그의 언약신? 속에 담겨있는 은혜의 객관성이다.  

                  성화는 은혜의 주관적 적용이라고 보았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하다.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 하면서 율법을 심비에 적어 자발적인 순종을 하도록 도와 주실 때 성화가 이루어 진다.  성화 역시 믿음으로 시작되고 지속되지만 인간의 의지와 협력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결국 은혜는 창조론적 하나님과 인간의 순종의 언약 관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은혜이다.  그래서 은혜는 절대로 순종을 배제하지 않으며 배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칭의(justification)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마치 내것처럼 전가받았다는 것이지 선한 행위 자체를 면제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율법은 거룩의 기준이요 하나님이 본래 언약적으로 인간에게 요구하신 불변하는 성경적 진리이기 때문에 은혜는 진정한 율법(순종)으로의 회복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은혜를 전제로한 이 "행위"라는 인간의 자발적인 선택과 활동이야 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와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죄로 인하여 율법은 은혜를 필요케 하고, 은혜는 또다시 율법을 그 본래적 역할로 회복시키는 것은 퍼킨스 신학에서 언약적 경건의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라고 말할수 있다.  따라서 퍼킨스 신학에서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은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을 완성하는 언약으로 이해 되는 것이다.                

                  그의 언약적 경건이 이러한 근거에서 나오게 되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커베난트(co-venant)"라는 단어의 원의미는 "함께오다"이다.  이말은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발적 책임이 "함께올수" 있도록 묶어주는 "고리줄"임을 시사하는 것 이기도하다.  특히 언약의 쌍무적 성격(bilateral character)이 그것을 대변해주는데 이러한 언약적 특성에 근거한 퍼킨스의 율법론, 성례론, 윤리적 결의론(moral casuistry), 구원의 확신(assurance), 구원준비(preparation for salvation) 등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경건주의(pietism) 신학의 모체가 되도록 하였다.  Calvinist/Federalist 학설은 퍼킨스 신학에서 이러한 경건의 이론적 근거와 힘(dynamic)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지 못한다.

                  넷째, 퍼킨스의 조직적 언약신학은 또한 프랑스의 개혁주의 철학자인 피터 레이머스(Peter Ramus)의 "주제별 방법론(loci method)"과 "양단법적 방법론(dichotomous method)"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제2세대 개혁신학의 조직적 방법론은 사실 레이머스의 양단법을 많이 사용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문답서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레이머스의 주제별 방법론은 성경의 내용들을 신학적 주제별로(논리적으로) 구분하여 나열하는 방법이며, 그의 양단법적 방법론은 신학을 "이론과 실천"으로 구분하는 방법으로써 이론은 곧 실천이며, 실천은 이론에 근거하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서가 "믿음과 실천(faith and duty)"으로 구분된 것도 이러한 라미스트(Ramist)의 양단법적 방법론에 근거한 것이다.  저 신앙고백이 당대 최고의 언약신학자들에 의하여 쓰여졌으며, 그 것의 신학적 하부구조가 언약적이며, 나아가서 언약의 본질인 "믿음과 실천"으로써 요리문답을 정리한 것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이 Calvinist/Federalist 로 나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V. 죤 프레스톤(John Preston, 1587-1628)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은 죤 프레스톤을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에서 Calvinist 계열을 벗어나서 Federalist 신학을 대표하는 언약신학자로 뽑는다.  또한 그와 함께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역시 내용적으로 Calvinist 가 아닌 Federalist 로 평가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죤 프레스톤의 언약사상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한 번도 비중있게 다루어 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Calvinist/Federalist 라는 모델에 끼워 맞추는 것에 반론을 제기 하였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을 평가하는 두가지 접근을 논하고 그것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첫째로, 초기 개혁자들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자들을 직접 비교하는 식의 접근이 많이 시도되고 있다.  "칼빈과 프레스톤," "칼빈과 퍼킨스"식의 연구 논문들이 많은데 이런 접근의 문제는 두 부류의 신학자들 사이에 신학적 방법론의 차이점들이 무모하게 질적(substantial) 차이로 해석 된다는 데 있다.      언약교리에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쉽게 설명이 된다.  칼빈이나 불링거는 제 2세대 개혁자들에 비해 언약에 대한 집착이나 경건적 적용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론적인 문제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 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는 퍼킨스와 같은 언약신학자를 고려하지 않은 칼빈과 프레스톤의 직접비교는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 하였다.  신학과 방법론의 차별화, 이론과 실천, 구원과 성화의 강조점들이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변화된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채 직접 비교하여 일방적으로 차이점을 극대화 시킨 문제가 따르는 것이다.

                  둘째로, 퍼킨스에 대한 해석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딜레마 이론"이라고 볼 수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신학에는 예정과 언약이라는 이중적인 원리가 공존 하는데 퍼킨스 자신도 서로 상충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이중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범주안에서 예정과 언약을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역시 필자의 견해로는 퍼킨스의 신학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퍼킨스"를 만들어 놓고 그의 제자들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은 예정과 언약이라는 딜레마속에서 언약을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Calvinist/Federalist 모델에 퍼킨스와 영국 개혁신학을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 한 것이다.  앞서 본것같이 실제로 퍼킨스는 예정과 언약을 신학의 이중원리로 보지 않았다.  "이중원리"는 해석자의 사고속에서 온것이지 그의 신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말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현대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종교개혁과 개혁주의 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post-Newtonian mindset"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분리시켜놓은 전제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퍼킨스와 프레스톤의 언약신학은 강조점과 적용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뿐이지 신학적 내용과 언약의 구조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 하였다.  프레스톤은 영국교회안에 퍼지기 시작한 알미니안 신학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는 알미니안 신학과 논쟁 하면서 구원론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고(그것은 이미 초기 개혁자들과 퍼킨스와 같은 학자들이 충분히 해 놓았음을 감안할 때 이해가 된다) 알미니안 신학자들이 칼빈주의 신학에 윤리와 성화가 없다고 비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그의 언약신학은 자연히 신학적 논문형식이 아니고(퍼킨스 처럼) 설교형식으로 다루어 졌다.  그의 언약적 관심이 구원론적 이슈가 아니라 칼빈주의 성화와 윤리에 있었고, 딱딱한 신학적 글을 통해서보다 자연히 설교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이것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레스톤의 글과 설교들을 분석해 보면 퍼킨스와 같이 예정론과 구원의 구조 등에 많이 집착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있다.

                  그런데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은 바로 이점만을 보고 피상적으로 그를 읽었다.  그에 대하여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한 번도 진지한 연구를 하지 않고 그의 신학이 칼빈주의에서 벗어났으며, 그는 예정론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의 신학은 쌍무적 언약신학으로서 실제로 이중예정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저들이 선택적으로 취급한 (이것은 놀랍게도 사실이다) 프레스톤의 글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프레스톤의 언약신학은 설교적 유형이라는 사실과 언약교리를 사용하여 칼빈주의적 성화와 경건을 강조하려고 했다는 사실외에는 퍼킨스의 언약신학과 신학적 내용에서나 조직적 방법론에서 전혀 다르지 않음을 논증 하였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퍼킨스나 프레스톤등 제 2-3세대 개혁주의 신학은 앞서 말한 라미스트(Ramist)의 양단법을 사용하여 신학을 "faith and duty"로 나누어 이론과 실천을 논하였다.  따라서 때로는 실천에 있어서 이론과 상충되는 듯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특히 preparation for salvation 에서 강한 conditionality 의 개념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있다.          

                  이 preparation 교리는 학자들에 의하여 한편으로 청교도와 영국 개혁신학이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알미니안화 되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확정적인 증거로서 거의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고, Federalist 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거꾸로 이 교리야 말로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했던 오리지날 언약신학(불링거)을 다시 회복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preparation 은 Calvinist 의 예정과 유기 교리의 엄격성을 극복하는 매우 긍정적인 교리로 저들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필자는 새로운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속죄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측면이 있고, 인간론(언약)적 관점에서 볼것이 있다.  퍼킨스나 프레스톤이 인간론(언약)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발적 의지나 preparation 의 conditionality 를 말한 것은 저들이 속죄론에서 하나님의 은혜나 그것을 보호하는 예정론을 강조한 것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저들의 신학적 체계 속에서는)을 이해해야 된다.  대립과 상충은 앞서 지적한 것 처럼 해석자의 상상(imagination)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있다.

           

                  저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근거한 것이지만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갖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실제적으로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의 자발적 의지가 한계점에 이르도록 제한적인 "자유성"을 허용 하였다.  성경은 "공로(merit)"의 차원에서가 아닌 인격적 존재로서의 자발성을 인간에게 언약의 "조건(condition)"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윌리암 스토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his seems to be a more difficult problem for post-Newtonians, who tend to conceive of causality exclusively in terms of efficiency.  In the scholastic  conception, human will and grace...may consist as the formal and efficient   causes...of the act of faith...and as the instrumental and efficient causes of the individual's justification.

           

                  필자는 스콜라적 방법론에 익숙한 퍼킨스나 프레스톤이 라미스트의 양단법을 동원하여 "faith and duty"로 신학을 체계와 한 것이나, 아리스토틸리안 적인 causality 이론을 구원론에 사용하여 efficient cause 와 instrumental cause 로 이해한 것은 언약의 본질을 바로 이해 한데서 비롯 된것이라고 생각한다.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이 속죄론과 언약을 구분하지 않음으로 유언/언약이라는 이분설을 주장한 것과, preparation 교리를 두고 예정교리를 "누그러 뜨리는" 인간의 의지 개념으로 생각한 것은(예정/의지) 다를바 없다.

           

                   "효율적 원인"과 "도구적 원인"의 구분은 곧 merit 와 condition 을 구분함과 같다.  모든 merit 은 하나님에게 그러나 인간에게는 condition 을 요구 하는 것이 언약이다.  결국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을 폭군으로 그리고 인간을 꼭두각시로 보는 신학이나, 반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돕는 존재로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신학이나 개혁주의 언약교리를 잘못해석함에 있어서는 다를바 없는 것이다.

           

           

          IV. 결론

           

                  구원은 예정론적(decretal)이면서도 역사적(historical)이고,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와같은 속성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면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무엇으로 연결 시키는가?  바로 언약이라는 성경적 진리속에서 이 두가지 속성들이 상호관계를 갖으며 서로 맞물려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필자는 개혁주의 언약 교리안에 이처럼 초월성과 내재성, 영원성과 역사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구속사적" 방법론과 "구조적" 방법론이 갖는 차이점의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언약의 이분설은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구조적 방법론을 언약신학 그 자체에서 효과적으로 제외 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것은 현대신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차별(prejudice against metaphysics)"과 무관하지 않으며 신학에서 초월적인 내용을 배제하려는 부당한 출발점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난 다른 무엇보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속죄론적 은혜의 개념과 언약적 책임의 개념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부정하는데서 시작 되었다고 지적 하였다.

           

                  언약신학의 방법론적인 다양성을 인정하고 확대할때 성경에 계시된 언약의 풍성한 은총들을 더욱 값지게 누릴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 두가지 방법론은 각각 그들의 독특한 특성과 기능에 따라서 차이점을 갖게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한가지 방법만을 통해서는 얻기 어려운 언약의 다양한 뉘앙스들을 유도해 낼 수 있는 장점들이 있다.  물론 장점들이 있듯이 단점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단점들 때문에 두 방법론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들이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이 둘중 어느 한 방법을 극단적으로 고집할 경우 생기는 신학적 오류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칵세이어스 시대에 그의 구속사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던 알미니우스파의 학자들(the Remonstrants)과 에미로우(Amyraut)파의 학자들은 언약을 지나치게 세대적으로 분석하여 옛언약을 "행위언약"과 동일시하고, 결과적으로 신구약의 기독론적 구원론의 통일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Old Testament justification 이 여기에서 유추되었다.

                  반면에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구조적 방법론을 지나치게 고집하다가 "초 칼빈주의 (Hyper-Calvinism)" 라는 오명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날 신정통신학의 "Law in the Gospel" 개념이 여기에 근접한 이론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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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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