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아리는 되돌아 오기 마련입니다. ♥

 

 

 

내가 던진 사랑의 한마디는

기쁨의 메아리로 돌아올 것이며

내가 던진 미움의 한마디는

저주의 메아리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으나

마음을 알고 지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내 얼굴을 아는 백 사람을 사귈 바에야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단 한 명의 친구가 낫습니다.

 

 

 

누군가 그대에게 No!라고 말한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No! 라고 말한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를 시험한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차가운 말 한마디는

삶의 모든 의미를 상실케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삶의 모든 시련을 극복케 합니다.

 

 

마음의 쉬는 의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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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최송연 
가을이 되면
내 마음의 정원에도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생명의 열매로 가득하게 하소서

행여, 
지난 여름 동안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엉겅퀴와 가시가 
땡볕 아래서 무성하도록
내버려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성찰하여 돌아보게 하시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보드랍게 가꾸어진 토양
사랑과 인내, 온유와 절제로만
깊이 뿌리내릴 수 있기 원합니다

가을이 되면
내 마음의 정원에도
주님 생명으로 뿌려진 씨앗 
알알이 영글어
그윽한 향기로 뿜어내게 하소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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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수백만 마리 청어 떼죽음 미스터리

무려 3만 톤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청어가 떼죽음을 당하는 미스터리한 일이 발생했다.

지난 5일(현지시간) 아이슬란드 서쪽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의 피요르드에서 적어도 수백만 마리의 청어가 떼죽음을 당한 채 발견됐다.

현지언론이 ‘청어 묵시록’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이번 사태는 지난 연말에 이어 두번째로 이번에 죽은 청어의 양만 약 2만 5000~3만 톤으로 추정된다. 가격으로 환산하면 무려 2200만 유로(320억원).

생물학자인 로버트 스테판손은 “해안가에도 무려 7000톤에 이르는 청어떼가 죽은 채 발견됐다.” 면서 “지난해 12월에 이어 벌써 두번째”라고 밝혔다.

특히 청어의 떼죽음으로 인한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죽은 청어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수만마리의 새들까지 몰려들고 있으며 수산업이 주력인 지역 경제에 물질적 타격까지 주고 있기 때문. 

현지 전문가들은 이번 청어 떼죽음의 원인이 인간들의 환경 파괴로 추측하고 있다.

스테판손 “쓰레기 매립으로 인한 산소 부족 혹은 인근에서 진행된 다리 공사의 영향으로 청어가 떼죽음을 당한 것 같다.” 면서 “보다 자세한 원인은 연구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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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의 지혜...



옛날 어느 富者가 회갑을 맞았다.

아침을 먹은 후 시아버지가

세명의 며느리를 불러 앉혀놓고

한줌의 쌀을 나누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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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10년 후면 나의 고희가 되겠구나!

지금 나누어준 쌀로

고희잔치 선물을 마련하도록 해라' 고 말했다.


 

방에서 나온

첫째 며느리는 '아버님이 노망(치매)을 당겨 하시나봐'

하고는  마당에 있는 닭에게 주었다.



 둘째는 집으로 가지고 와서 쌀독에 도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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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는 집으로 돌아와 한줌의 쌀을 꼭 쥐고

한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10년이 지났다.

고희 잔치를 맞은 富者는 온가족을 한방에 모이게 했다.

'내가 10년 전에 세 며느리에게 쌀 한줌을 주면서

오늘 고희 잔칫날 선물을 준비하라 고 했었다.

준비한 것들을 가져오너라.



 

첫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 했다.



둘째는 아버님이 농담을 하시는 것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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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는 장부 하나를 가만히 내밀었다,

장부를 읽어보던 시아버님은 눈이 둥그레지면서,

'소가 5마리, 돼지가 10마리, 염소가 20 마리, 그리고 닭이 100마리.


 

셋째를 바라보았다.

 그래 막내야! 너는 어떻게 한줌의 쌀로 10년 만에

이렇게 많은 선물을 마련했는지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아라' 하였다.


 

셋째는  조용히 말했다,

'아버님 이 쌀 주신 뜻을  오랫동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뒷집으로 가서 한줌의 쌀과 병아리 한 마리를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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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나자 병아리가 알을 낳고,

그 알을 팔아서 또 병아리를 사고,

3년이 되니 닭이 100마리가 넘었습니다.


 

닭을 몇 마리를 팔아서 염소를 사니, 닭은 계속 알을 낳고


염소는 또 염소를 낳고, 그 다음은 돼지를 샀고,

그 다음은 송아지를 사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불어났지만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2배로 늘어 난 것입니다.

아버님!  생일선물로 부족하지만 받아 주세요.

모든 사람들이 할 말을 잊고 감탄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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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문을 이어갈 사람은 막내며느리 밖에 없구나!

내 모든 재산을 막내에게 상속할 테니

네가 맡아서 가문을 크게 일으키거라!'


 

*하나님이 맡겨 주신 내 직분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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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러려니...하고 
                최송연
남편이나 아내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나요?
그저 그러려니...하고 기다리세요 
때가 되면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멋진 반려자로 세워질 테니까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가 나를 어렵게 하나요? 그저 그러려니...하고 기다리세요 때가 되면 당신의 그 깊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따뜻한 부모님으로 바뀌실 테니까요

며느리가 너무 철없고 미숙하나요? 그저 그러려니...하고 기다리세요 때가 되면 누구보다 든든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질 테니까요

친구나 직장 상사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나요? 그저 그러려니...하고 기다리세요 때가 되면 당신의 그 충성 되고 진실함을 잘 알고 인정해 주는 멋진 동역 자들이 당신 주위로 많이 모여들 테니까요

지금, 나의 삶이 먹구름 같이 어둡고 캄캄한 현실이라 해도 그것 때문에 죽으려고 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휘몰아치던 천둥번개는 사라지고 눈부신 햇살처럼 찬란한 아침이 당신 앞에 펼쳐짐을 보고 놀라게 될 테니까요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성취하려고 하지도 마세요 지금 당장이라고 다구치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먼저 좌절과 실망의 벽에 부딪혀 깨어지고 만답니다

우리의 구속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영광의 주로 만물 앞에 드러나시기 전
아무에게도 인정받으신 적 없으시고
아무에게도 이해받으신 적 없으시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으신 적 없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오늘 당신이 구원받은 백성 되어 이 자리에 오기까지 무던히도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당신의 조급함 때문에 
오늘 어리석고 비겁한 선택을 한다면
영원한 후회로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저 그러려니...하고 기다리세요.세상만사는 다 때가 있는 법이랍니다
"천하에 범사가 다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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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변증학자인 노먼 가이슬러는 지방교회에 가장 비판적인 복음주의 지도자이다. 그는 ‘난폭한 가해자’로서의 지방교회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지방교회는 다시 말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하는 일과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일을 중단할 것을 거부했다… 그리스도인 단체들에 대한 가혹한 말들, 예를 들어 ‘영적 음행’이니 혹은 ‘사탄적’이니 하는 말들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다(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15)”
 
지방교회는 정당한 비판을 받아도 ‘나쁜 이단 사냥’을 당하고 있다고 읍소하며 정당한 비판자를 ‘나쁜 이단 사냥꾼’으로 몰아간다.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난폭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마치 ‘불쌍한 피해자’가 된 것처럼 위장한다. 지방교회에 보낸 ‘공개 항의서’에서7개국의 복음주의자 70여 명이 시정을 요구하는 위트니스 리(이후 WL)의 교리들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쳐졌을 때(joined with us),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신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도 보좌에 남아 계시지 않았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고개 숙여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An Open Letter to the Leadership of Living Stream Ministry and the "Local Churches에 인용됨).”
 
WL이 위에서 말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은 사실상 일반적인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사실상의 ‘삼신론자들’로 비난하는 위와 같은 주장이 정통개신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WL은 알고 있는가? 물론이다! WL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라.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할 때, 나는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Life-Study of Revelation, p. 82-3).”
 
WL의 도발적인 주장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정통교리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그의 난폭한 공격은 자신의 종교적 확신에 기초한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다. WL과 그의 제자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교리적 관점에 의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 이단자들’로 매도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WL은 “전통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로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예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 WL은 여기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 즉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위와 같은 설명은 “거의 삼신론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논쟁을 보면, “거의 삼신론과 같다”는 주장이 ‘삼신론이다’ 혹은 ‘다신론이다’라는 주장으로 확정된다. 예를 들어 ‘이인규님의 지방교회 양태론 비판의 실상’이라는 글에서 지방교회는 이인규 권사를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다신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정죄한다. 그러므로WL이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로 가르치는 것”은 “거의 삼신론과 같다”고 비판했을 때, 실제로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 즉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삼신론(혹은 다신론) 이단자들’이라 비판을 한 셈이 된다! 지방교회는 따라서 전통(혹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위일체 이단자들’로 정죄하며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지방교회의 주장처럼 과연 지방교회는 ‘나쁜 이단 사냥의 희생양들’인가? 천만에, 이는 사실과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WL과 지방교회가 먼저 정통교회를 공격한 ‘난폭한 가해자’이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공격에 대하여 정당한 비판을 받을 때면, 마치 ‘나쁜 이단 사냥의 희생양들’이 된 것처럼 둔갑술을 발휘하곤 한다.
 
지방교회가 ‘난폭한 가해자’임을 증언해 주는 지방교회의 또 다른 발언은 이것이다. “모든 교파, 모든 이름은 분열(division)이다(A Defense of the Gospel, p. 102에 인용됨).” “주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취해서 교회를 교파화하는 것은 영적 음행이다(Ibid., p. 98에 인용됨).” 달리 말해서 ‘분열은 영적 음행’이라는 것이다. 이런 ‘난폭한 언어 테러’는 김바울의 지난 글(#3-지방교회, 그리고 ‘나쁜 이단 사냥’의 희생양들)에 잘 나타나 있다. 김바울은 제리 팔웰 목사의 사역의 “열매 자체는 영적 음행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팔웰과 그의 교회”혹은 “침례 교단”과 같은 표현은 주님께 “득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득죄”라는 말은 ‘영적 음행’이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팔웰과 그의 교회’가 ‘영적 음행’이라면 ‘우리 교회’라고 말해도 ‘영적 음행’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미국의 시카고에 위치한 역사적인 ‘무디 교회(The Moody Church)’는 ‘영적 음행’을 한 대표적인 표본이 아닌가!
 
김바울은 또한 ““팔웰과 그(팔웰)의 교회”, 혹은 “침례 교회”(그것이 좋은 의도라고 해도)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반론은 이것이다! ‘교파나 교회 명칭’ 혹은 ‘우리 교회’ 등으로 호칭할 수 없는 근거가 성경에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 “내 교회(마16:18)”,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 혹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오신 하나님의 교회(행20:28)”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를 항상 그렇게 표현하라고 성경이 명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성경의 표현은 지시하는(prescriptive) 표현이 아니라 서술하는(descriptive) 표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교회를 항상 지명이나 “내 교회” 혹은 “하나님의 교회”로 표현하라고 명령한 적이 결코 없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런 개념을 잘 설명해 준다. “내가 다른 목사들에게 우리의 MTR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항상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왜 집사가 한 명도 없는가?’ 초대교회는 집사들을 임명했다. 집사가 한 명도 없는 조직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이렇다. 집사의 직분은 서술적인(descriptive) 것이지 지시적인 것(prescriptive)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업무량을 줄여 주기 위해서 집사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읽어보면 집사를 임명하는 것이 초대교회에서 흔한 일이었다고 안전하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집사를 임명하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명령되어 있거나 요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교회의 모든 일꾼들을 ‘집사’라는 용어로 호칭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이 ‘집사’의 책임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Andy Stanley and Ed Young, Can We Do That?, pp. 115-16).”
 
앞서 언급한 ‘무디 교회’는 19세기 말의 세계적인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가 개척하여 세운 교회로, 개척자 무디를 기념하여 교회 이름을 그렇게 정한 것이다. ‘무디 교회’는 알 에이 토레이와 워렌 위어스비와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목회했고, ‘무디 신학교(Moody Bible Institute)’ 같은 훌륭한 기독교 교육 기관의 모체가 되어 세계선교에 크게 기여해 온 위대한 교회이다. ‘무디 교회’라는 명칭은 ‘무디’라는 개척자의 위대한 신앙과 사역을 기리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무디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영적 음행’과 같은 무서운 죄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들을 그처럼 크게 사용하셔서 영광을 받으셨겠는가! 정통교회들은 무슨 명칭을 사용하든지 그리스도를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명칭에 관해서 관심이 일절 없으시다. 성경을 보라, 주님이 교회의 명칭을 거론하신 적이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는 그러나 교회가 그분의 주재권에 순종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보이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1). 교회의 정통성은 교회 명칭의 존재 여부나 교파의 명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순종,’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교회나 교파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영적 음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난센스이자 ‘난폭한 언어 테러’인 것이다!
 
필자가 앞선 글(#3-‘성령의 역사를 영적 음행으로 모독하는 지방교회’)에서 언급한 팔웰 목사와 그를 따르던 성도들의 ‘분리’는 이전 교회의 담임목사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과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불신과 불만에 때문에 이전 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와서 새 교회를 개척한 일은 ‘영적 음행,’ 즉 죄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모든 과정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그들의 ‘분리’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팔웰과 그를 따르던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분리’하여 교회를 개척한 일을 ‘영적 음행’이라고 모독하는 지방교회는 도대체 누구에게 속한 자들인가? 성경에도 이와 동일한 예가 있다. 바울은 마가를 불신하여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고, 그 결과 바나바와 ‘분리해서’ 새로운 선교 팀을 조직하여 제2차선교여행을 떠났다(행 15:38-40). 그러면 바울도 ‘분리’를 했기 때문에 ‘영적 음행’을 한 것인가? 이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교회사의 모든 분열을 흑백논리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모순된 일이지 정말 모르겠는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2).” 내 짧은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여 주님 앞에 범죄하지 말고 판단은 주님께 맡기라!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지방교회는 비성경적인 관점과 몰상식함을 가지고 정통교회에 가혹한 언어 테러를 하는 집단이다. 자기들만의 비뚤어진 교리적 관점을 가지고 정통교회에 무자비한 언어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이단 집단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지방교회여, 왜 이단의 무리의 특징을 공유하려 하는가!

(필자: 김홍기 목사, Ph.D., D.Min., 교회부흥성장연구원 원장. 필자의 ‘신천지 교리 반박 동영상 설교57편’을 www.21church.com에서 시청할 수 있음)

 

출처: 크리스챤 투데이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 성경 신자들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새로운 사본들의 지속적인 발견과 본문비평이라는 학문의 발전으로 점점 더 고대의 훌륭한 본문을 회복하는 길이 열리고 있다. 성서의 본문이 변한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성서의 본문이 변하기에 우리는 성서를 우상화하지 않는다. 성서를 하나님으로 삼지 않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성서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이 계시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서의 본문이 변하기에 성서가 살아 움직여 우리에게 늘 새로운 말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죽은 텍스트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텍스트이다. 성서는 가지고 다니면서 받들어 모셔야 할 책이 아니라, 읽고, 명상하고,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책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글을 쓴 사람은 불신자로서 정신병자로 보이지만 세상이나 세상과 타협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사람을 위대한 신학자로 추앙한다.
 
이 글은 <신약성서, 우리에게 오기까지>(대한기독교서회, 민경식 지음)의 결론 부분인 176쪽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
 
 
저자인 민경식 박사에 대해 위키 백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민경식 박사는 성서학자인 대한성서공회 민영진 전 총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신약성서 본문비평과 신약성서 사본학을 공부했고,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 1월부터 《기독교사상》에 연재기사 '쉽게 풀어쓴 신약성서사본이야기'와 '성경을 말한다.'를 게재하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그는 다름 아닌 대한성서공회에서 부패된 본문의 개역성경, 개역개정, 새번역 등의 편집/출간 등을 총괄하던 민영진 박사의 아들이다.
 
성경에 보면 아하스 같은 불신자에게서 히스기야 같은 성도가 나오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행운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보다 한술 더 뜨는 사람이 성서학자라는 직함으로 교수를 하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 아버지와 본인의 성경 부수기라는 혁혁한 공로로 인해 대한성서공회의 총무를 맡을지도 모른다.
이러니 한국 기독교의 미래가 얼마나 암담할지 뻔히 보인다.
 
다음은 역시 같은 책의 173쪽에서 발췌한 것이다.
 
우리말 성서에 보면, 학자들이 후대의 첨가라고 여기는 부분들이 본문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가복음의 끝 구절(막16:9-21)이라든지, 요한복음의 음행하다 잡혀온 여인 이야기(요7:53-8:11)라든지,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마6:13b)이 그러하다. 이런 본문은 사본들의 증거로 ‘원문’에 포한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판명되었지만, 그래도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구절들이기에 우리가 보는 성서의 본문에 포함되어 있다. <새번역>의 경우, 겹꺾쇠괄호 안에 본문을 묶어놓아 이것이 원래의 본문이 아님을 명시하기도 한다. 
 
마가복음 16장에 가서 1-8절을 보기 바란다. 거기서 본문이 끝나면 말이 되겠는가?
 
그들이 떨며 심히 놀라서 급히 나와 돌무덤에서 도망하고 두려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16:8).
 
이렇게 끝나는 것이 복음의 소식인가?
주님의 영이 있는 성도라면 누구라도 9-21절이 있어야 마가복음이 끝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불신자들은 9-21절이 원래 자필 원본에 없었다며 신성모독을 범한다.
 
어찌 성경이 훼손되어 학자들의 손에 의해 복구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들 가만히 있는가?
박수를 치며 갈채를 보내는가?
 
영원히 100% 순도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회개해야 한다.
 
애가 타고 애가 끓는도다! 내 마음이 심히 아프고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소리를 내는도다. 오 내 혼아, 네가 나팔 소리 곧 전쟁의 경보를 들었으므로 내가 잠잠할 수 없도다(렘4:19).

 

출처:  Keep 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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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자라기위해서
매일 물과 햇빛이 필요하듯이
행복이 자라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 보이는 건
가진게 없는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행복으로 보고
아무일도 없던 늘 그런 일상에도 감사합니다.

행복을 저금하면 이자가 붙습니다.
삶에 희망이 불어나는거지요.

지금 어려운건
훗날
커다란 행복의 그늘을 만들어 줄 것임을 믿습니다.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건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의 자잘한 열매입니다.

썩은 열매는 스스로 떨어지고
탐스런 열매만이 살찌우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마음의 밑바닥에서 시들어가는 행복을 꺼내고 키우셔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려는 거 그것은 죄입니다.

누군가 나를 안타까운 맘으로 지켜보고 있다면 보여주셔요.
그게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만 합니다.
내 존재의 가벼움은 처음부터 없는거죠.

사랑받고 있음을 잊었나 봅니다.
잠시 일상의 중독에서 벗어나 햇살과 만나보셔요.

세상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유하기 위해서만 사는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요.

사는 모습이 다 다르듯
보는 눈도 달라져야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의 눈은 하나만 보게 된다는 거.

가진 것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내 행복은 지킬 수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쉽게 무너지는 마음은
당신의 모습이 아님을 잘 알고 있지요.
그 누구보다도 모두 행복 할 권리를 누려 보도록 해요

- 담아온 글 -


 


 



生의 진실

                   최송연 


차가운 눈이
하얗게 백골을 덮치는
겨울이 오기 전

아직은
낙엽이라도 남았을 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生의 진실을 알아야만 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초광속 같은 것

죽음 저편에
심판이 있음을 안다면
시기 질투 모함
아옹다옹할 일도 없는 것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 27)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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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말대로 이루어진다 말은 파동과 파장으로 우주를 움직여 놀라운 파워를 보여준다 !! 선한 말에는 선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악한 말에는 악성 바이러스가 침투한다. 하루에 5만마디의 말을 한다.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를 점검하라. 01. 말(言)대로 이뤄진(成)다. 정성(誠)스럽게 말하라. 02. 기도는 말이다. 천지창조가 다 말로 이루어졌다. 03. 사랑 가득한 의사는 힘든 환자도 쉽게 살린다. 좋은 파동 때문이다. 04. 훌륭한 지도자는 말로 비전을 보여준다. 남 험담을 하고 다니면 가짜 지도자다. 05. 흥하는 가정은 사용하는 말부터 다르다. 흥하는 말이 흥하는 가정을 만든다. 06. 자녀에게 좋은 말을 가르쳐라. 말의 힘이 위대한 자녀로 거듭나게 한다. 07.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속에 살아 간다 모두가 말의 파동 때문이다. 08. 전자파가 암을 일으킨다. 말의 파동은 전자파보다 3300배나 더 강력하다. 09. 천지만물에게 사랑의 말을 들려줘라. 말에 따라 감응이 달라진다. 10. 화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 죽어가던 식물도 살아난다. 11. 수돗물을 컵에 담고 "좋은 물" 해 보라. 그 자리에서 성분이 변한다. 12. 악담하는 엄마의 젖을 먹은 아이는 장애아나 문제아가 된다. 말에도 독이 있다는 뜻이다. 13. 밥상에서 불평하지 말라. 음식은 하늘이 내려준 생명 물질이다. 14. 불행은 불평 때문에 생겨난다. 힘들어도 '나는 행복해' 하고 말해 보라. 15.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언어로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 - 모셔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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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복 있는 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Message) 열풍이 대단합니다.
    피터슨은 장로교 목사로 거의 평생을 보내다가 인생의 후반부에 <메시지>를 만들어 파급시킨 영성/신비주의자입니다.
    그는 관상기도, 수행, 신비 계시 등을 추구하는 마담 귀용, 아빌라의 테레사, 노르위치의 줄리아, 이그나셔스 로욜라, 리처드 포스터, 달라스 위라드 등의 카톨릭 신비주의자들에 심취하여 잘못된 것들을 기독교계에 파급시킨 위험인물입니다.
     
    영어 <메시지>는 1993년에 신약이, 2002년에 신구약 합본이 나왔고 국내에서는 신약이 출간되고 현재 구약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메시지>를 선전하는 내용입니다
    1. <메시지>는 일상의 언어로 쓰인 ‘읽는 성경’입니다. <메시지>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게 해주려는 한 목회자의 열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인들이 성경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받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교인들이 성경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그들이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로 "갈라디아서"를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에 걸쳐 완성된 그 번역을 읽은 교인들은, 성경이 능히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다른 도움 없이도 읽어 낼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거리와 시장과 식탁에서 사용하는 언어,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과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2. <메시지>는 성경 원문을 학문적으로 충실히 옮긴 성경입니다. <메시지>는 평생을 원어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가르쳐 온 학자이자 35년을 목회자로 살아온 저자 유진 피터슨의 모든 것이 녹아든 평생의 결실입니다. 그는 이미 좋은 번역본이 많이 나와 있는 직역이 아니라, 원문의 의미를 좀 더 생명력 있고 인상 깊게 전하는 데 적합한 오늘의 언어로 의역(paraphrase)했습니다. 10년의 세월 동안 주 5일 하루 6시간을 이 번역 작업에 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지>는 한 개인의 신학과 목회적 배경과 역사를 지닌 사역(私譯)이지만, 북미의 신뢰받는 신구약학 학자들의 감수를 통해 학문적으로 검증을 받았습니다.
     
    3. <메시지>는 1천만 독자가 선택한 성경입니다. 1993년 신약 출간, 2002년 완역본이 출간된 이후, 영미권에서만 1천만 독자들이 <메시지>를 선택해서 읽고 있습니다. 기존의 성경을 돕고 보완해 주는 탁월한 "보조 성경"으로, 본문의 의미를 살아나게 하는 "성경 옆의 성경"으로, <메시지>는 의미역 성경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읽히고 인용되고 있습니다.
     
    4. <메시지>는 당신을 위한 성경입니다.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나 오랫동안 읽어 왔기에 성경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사람들, 성경을 공부하려는 사람이나 홀로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픈 사람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나 성경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 성경을 한번 읽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구도자나 믿지 않는 친구들…… <메시지>는 바로 당신을 위한 성경입니다.
     
    한국에 피터슨을 소개한 사람은 고(故) 하용조 목사와 이동원 목사입니다. 특히 이동원 목사는 <메시지>의 전도사로 자처하며 다음과 같은 추천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자에게 직접 그의 저작인 이 <메시지>의 저술 동기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유진은 순전히 ‘목회적 동기’였다고 대답했습니다. 교인들이 성경 읽기를 너무 어려워하고, 말은 안 하지만 성경 읽기의 당위성을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고 있는 죄책감에서 교인들을 해방시키고 즐겁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도울 길은 없을까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가 이 책 <메시지>입니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영어 성경을 이 <메시지>로 읽어 왔습니다. 얼마나 쉽고 흥미까지 있는지요! 그러면서도 이 책은 성경 원문의 표현을 벗어나지 않는 학문적 엄밀성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에 흥미를 느끼며 성경을 독파할 다시없는 우리 시대의 대안으로, 단연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_ 이동원 목사 |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외에도 국내에서 다음과 같이 유명한 이들이 혀에 침을 발라가며 <메시지>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뜻을 가장 적절하게 잘 드러낸 최선의 번역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름 그대로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메시지로 들려질 수 있는 번역이다.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하는 이때에, 이 <메시지>가 많은 독자들에게 영의 양식이 될 줄 확신하는 바이다. _ 임영수 목사 | 모새골 공동체
     
    성경은 자구(字句)를 따져 가며 세심히 읽어야 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 존재로 대하시며 건네시는 생생한 일상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살아 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신앙의 내용도 바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길로 나아가는 데 이 책 <메시지>는 크나큰 유익을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_ 박영선 목사 | 남포교회
     
    <메시지>는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을, 지금 이 시대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들에 담아 생동감 있게 전해 줍니다. 성경의 원문에 충실한 바른 번역이 살아 있는 언어로 더욱 빛을 발하는 <메시지>는,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든 오랫동안 상고해 온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깊이 파고드는 생명력 있는 진리의 귀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와 미래를 이끌어 갈 다음 세대에게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크게 쓰일 것입니다. _ 오정현 목사 | 사랑의교회
     
    나는 <메시지> 출간으로, 한반도에 사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성경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유진 피터슨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지만 학문적인 엄밀성도 갖춰서,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 성경을 공부해 온 사람이나 성경을 한 번도 읽은 적 없는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게 했다. <메시지>는 아이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고, 학자들도 물론 읽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사용하셔 서, 이 땅 한반도가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한다. _ 오대원 목사 | 예수전도단 설립자
     
    또한 국외에서는 배도자로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을 비롯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 인사들이 메시지를 적극 추천하고 있습니다.
     
    <메시지>는 내가 아는 성경의 최근 번역본 중에 가장 역동적인 성경이다. <메시지>는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이다. 성경을 많이 읽어 온 사람은 이 <메시지>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_ 빌리 그레이엄
     
    <메시지>는 성경 본래의 목소리를 생생한 언어로 전해 주는 성경이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_ 리처드 포스터 | 「영적 훈련과 성장」 저자
     
    학자적 엄밀성과 생생한 표현이 잘 어우러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다양한 성경 번역본 가운데 단연 돋보이고 뛰어난 성경이다. 성경 원문의 논리적 흐름과 활력적인 정서, 함축된 의미들이 탁월하게 되살아난다. _ 제임스 I. 패커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저자
     
    이외에도 다름과 같은 이들이 <메시지>에 흠뻑 빠져 극도의 찬양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문식 목사(산울교회),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정현구 목사(서울영동교회), 김형국 목사(나들목교회), 김중안(한국기독학생회 IVF 대표), 이윤복(죠이선교회 대표), 한철호(선교한국 파트너스 상임위원장), 정민영(국제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 부대표), 권영석(학원복음화협의회 상임대표), 서재석(Young2080 대표), 고(故) 안수현(<그 청년 바보의사> 저자), 하덕규(CCM 아티스트), 홍순관(CCM 아티스트), 조수아(CCM 아티스트), 조준모(CCM 아티스트, 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 교수), 왕대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구약학), 배정훈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류호준 교수(백석대학교 구약학), 차준희 교수(한세대학교 구약학), 전성민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고든 피(리젠트 칼리지 신약학 교수), 달라스 윌라드(<하나님의 모략> 저자), 빌 하이벨스(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 담임목사), 프레드릭 뷰크너(<하나님을 향한 여정> 저자), 보노(록그룹 U2 리드싱어), 마이클 카드(CCM 아티스트), 에이미 그랜트(CCM 아티스트), 맥스 루케이도(<예수님처럼> 저자), 레베카 피펏(<빛으로 소금으로> 저자), 조니 에릭슨 타다(<하나님의 눈물> 저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이처럼 대단히 유명한 분들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추천하다 보니 순진한 성도들은 이것이 좋은 성경인가 보다 하고 미끼에 빠져들고 맙니다.
     
    <메시지>는 저자인 피터슨이 말한 대로 완전 의역 성경(?)이므로 ‘성경’이라는 말 자체를 붙여서는 안 되는 책입니다.
    의역했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대로 적었다는 것이므로 이런 책은 성경이 죌 수 없습니다.
    피터슨은 또한 이것을 가리켜 스스로 ‘소설 같은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메시지>는 소설이나 다름없는 책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소설보다 위험하고 무서운 책입니다. 순진한 양들이 이것을 소설로 생각하지 않고 성경으로 생각하고 읽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 책은 유진 피터슨을 빙자해 성경 원문을 현대 한국 일상어로 읽어 내려는 발칙한 음모의 소산이다. 꽤 잘나가는 전문번역자들과 믿었던 성서학자들이 이 소란에 줄줄이 동원된 듯하다. 신속 과감하게 이 작전을 배후에서 조종한 출판사의 배포에 움찔했다. <메시지>에 부화뇌동할 젊은 세대들과 초신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다.
     
    <메시지>는 NIV를 이어 뉴에이지 세대를 위해 마귀가 마련한 작품입니다.
     
    성경이 주어진 목적은 다음과 같이 명백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성경은 사람의 운명을 영원토록 결정해 주는 교리의 책입니다. 이 책에 의해 사람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사느냐, 마귀와 함께 불타는 지옥에서 사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절대로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방법 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그 책은 말 그대로 사람을 잡는 책이 되고 맙니다. 그런 면에서 <메시지>는 사람을 갉아먹는 조미료 즉 MSG이고 사실은 MSG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책입니다.
     
    먼저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 살펴봅시다.
     
    KJB: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MSG: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귀 기울여 듣지 않는구나. 다시 말해 주겠다. 사람은 누구나 근본적인 창조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태초에 수면 위를 운행하시던 성령'을 통한 창조, 보이는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게 이끄는 세례, 이 과정들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과연 물세례가 사람을 새로운 생명으로 이끕니까? 이것은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세례 중생 교리입니다. 머리에 물을 100번, 1,000번 뿌리거나 심지어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았다 해도 이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받으려면 영이 가난해야 합니다.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MSG는 이것을 벼랑 끝에 서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KJB: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마5:3)
    MSG: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사람이 벼랑 끝에 서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위기에 몰리든지 그런 상황으로 인해 구원받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이 가난한 사람만을 기뻐하고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MSG는 이런 것을 흐리게 만듭니다.
     
    KJB: 어느 때나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으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요1:18).
    MSG: 아버지의 심장에 계신 분,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모습 표현이신(this one-of-a-kind God-expression) 그분께서 하나님을 대낮처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셨다.
     
    예수님이 한 종류의(one of a kind) ‘하나님의 표현’이라면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표현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든 면에서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10:30에서 예수님은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MSG는 신성모독의 발언을 합니다.
     
    KJB: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라(요10:30).
    MSG: 나와 아버지는 한마음 한 뜻이니라.
     
    MSG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게 과연 성경입니까?
     
    예수님이 마귀를 내쫓은 일을 두고 MSG는 마귀와 짜고 친 고스톱이라고 말합니다.
     
    KJB: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마귀들의 통치자를 통해 마귀들을 내쫓는다, 하더라(마9:34).
    MSG: 바리새인들은 흥분해 중얼거렸다. "속임수다. 속임수에 불과하다. 아마 마귀와 짜고 한 일일 것이다."
     
    또한 모든 천사들 - 정사, 권능, 치리 - 의 통치자이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씀이 MSG에서는 우주와 망원경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KJB: 또 너희는 모든 정사와 권능의 머리이신 그분 안에서 완벽하며(골2:10)
    MSG: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알고 또 그분 없이는 우주가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망원경이나 현미경이나 점성술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악한 마귀의 뉴에이지 책을 두고는 "<메시지>는 천상의 언어를 알아듣기 쉬운 일상의 언어로 번역한 성육신적 성경입니다. 어느 것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겁니다." 라고 하거나 혹은 “<메시지>는 현재 성경에 다가갈 수 있는 최고의 성경이라고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시간까지 자신의 모든 말씀을 담은 성경책을 보존해 주셨습니다. 우리 손 안에 들린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바로 그 책입니다. 이 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샬롬
    <SPAN style="FONT-SIZE: 11pt">출처: Keep Bible</SPAN>
    1.
     
    성경을 전서도 아닌 일부만을 구해다 좀 읽으려고 해도, 필사가 끝날 때까지 며칠을 기다리고 인건비도 지금 우리 시세로 수십만원을 줘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가 박해 받는 곳에서는 마을 사람 전체가 목숨을 걸고 한데 모여 한 권뿐인 성경책을 읽으며 영적 생활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풍요 그 자체이다. 널린 게 성경책이고, 인터넷으로 위치만 입력하면 몇 초만에 원하는 성구를 바로 볼 수 있고, 단어 검색도 되고, 그것도 모자라 열몇 종류의 역본들을 줄줄이 꿰어서 한 눈에 볼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성경에 접근하는 방법이 그렇게 바뀌었을진대, 지금은 성경을 두고 하나님과 마귀 사이의 영적 싸움의 양상도 180도 변했다.
     
    그렇다. 마귀는 과거에는 성경을 보는 대로 몰수하고 불태우는 식으로 공격했으나, 성경을 무식하게 없애 버리는 게 불가능해진 지금은, 숫제 가짜 짝퉁 성경들을 마구 만들어 내서 진짜 성경을 매장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는 역정보 유포라는 대단한 첩보 전략이다.
     
    본인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라는 타이틀을 쓰고 나온 역본들이 내용과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와 혼돈의 창시자가 아니며, 따라서 이런 여러 성경을 모두 인정하실 리는 전무하다. 이는 기독교의 보안과 근간, 정체성이 걸린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크리스천이 자신이 읽는 성경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 후, 가짜 성경을 단호하게 버리고 진짜 성경을 손에 쥐어야만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다음은 그 몇 가지 예이다.
    •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없음’ 처리되어 삭제된 구절이 없다. (마 18:11, 마 23:14, 행 8:37 등)
    •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탄 마귀의 옛 이름이 루시퍼(사 14:12)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 이름인 갈보리(눅 23:33)를 찾을 수 있다.
    •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티로스, 유니콘, 용 등 초자연적인 영적 존재에 대한 조명을 얻을 수 있다.
    •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구약 성경에 지옥(hell)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천국, 하늘은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유독 지옥만은 음부, 무덤, 스올, 하데스 따위로 정체를 가리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오로지 진짜 성경만이 판권이 없으며, 판권을 따내기 위해 다른 역본들과는 다른 어렵고 장황한 단어와 표현을 일부러 찾아 애쓴 흔적이 없다. 이렇듯, 진짜 성경의 특성만 열거해도 책을 한 권 쓸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이유들 중 좀 색다르고 어찌 보면 매우 심각한 주제를 두고 진짜 성경과 가짜 성경을 판단하고자 한다. 이제 여러분은 ‘킹 제임스 성경보다 읽기도 편하고 뜻도 정확하다는’ 소위 현대 역본(영어 성경) 번역자들이 기를 쓰고서 조장하는 표현, 그리고 한편으로는 필사적으로 혐오· 기피· 거부하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보고, 그들의 비양심적인 태도와 현 시국의 심각성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의 지성과 양심을 자극하는 명확한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증거의 열매는 당신의 결단과 행동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2.
     
    성경은 인간의 끔찍하고 추악한 죄, 그리고 인간의 가장 은밀한 면모에 대해 다룰 때, 이를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상상과 자극도 일으키지 않게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특히 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언급하나 모른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창 4:1), “교접의 씨” (레 15:16), “여인들의 관례.” (창 18:11) 음란한 단어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성 교육 시간에 다 배울 법한 단어조차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을 만드신 분이다. 그래서 성경이 성인물처럼 취급되지 않게끔,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 가미되지 않고 지극히 ‘순수하다’(시 12:6, 시 119:140)고 성경이 스스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이에 대해서까지 성경의 접근성을 고려하신 것이 틀림없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눅 18:16 중간)
     
    그렇다. 하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모름지기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고(딤후 3:15) 영적으로 자라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이야말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쉽고 간결한 성경이며, 어린이를 향한 하나님의 따스한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성경이다. 폭력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정작 예수님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대인 어린이가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그리스도의 수난> 같은 영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성경들에서는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를 찾을 수 없다. 앞에서 예를 든 세 구절만 해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은 그렇게 기록돼 있지 않다.
    • 하나님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에게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라고 영감을 주셨지, “이브와 동침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 “여인의 관례에 따른 것을 멈추매”라고 말하셨지 “폐경기가 지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 “짐승과 함께 눕는 자”라고 했지 “짐승과 성관계를 갖는 자”라고 안 했다.
    •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와 즐겁게 논다”(창 26:8 sport)고만 했지, 서로 껴안고 있었다고 표현 안 했다.
    • “자기 쾌락에 빠져 바람을 맡으며 킁킁대는 암나귀”(렘 2:24)라고 말씀하셨지 “발정 나서 헐떡대는 암나귀”라고 하신 적은 없다!
    이래도 성경이 뜻만 통하면 괜찮은 책인가? 성경 번역에서 동적 일치 기법이 얼마나 사탄적인 생각인지 부디 경각심을 가지기 바란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라는 바이블은, 통계에 따르면 ‘주 lord’라는 단어가 71번밖에 안 나오고(킹 제임스는 8000여 번), 마치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한 번도 주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저질이다. 그런데 sex라는 단어는 199번이나 나온다. 특히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행음에다 비유한 예레미야, 호세아서를 이 역본으로 보면 가히 섹스 성경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나라를 포함, 전세계적으로 읽기 쉽고 잘 와 닿는다고 격찬을 받고 있는 <메시지> 바이블의 정체이다. (☞ 관련 링크)
     
    NIV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알다(know)’, 개역성경도 ‘상관하다’라고 옮긴 단어를 ‘have sex with’ (창 19:5, 삿 19:22)라고 친절하게 진짜 의미를 써 놨다. 성령님의 가르침과 조명을 받으며 경건하게 묵상해야 할 성경에 이 무슨 난장판인가? 하나님이 정녕 성경을 그렇게 기록하셨단 말인가?
    그 중 단연 압권인 예를 보이겠으니 놀라지 마시라. NIV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신약 시대가 됐는데도 아직도 할례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너희를 혼동시키고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정말 그런 문제아들은 아예 자기 X을 짤라 버렸으면(emasculate) 좋겠다.” (갈 5:12)
     
    정말이다. 직접 책이나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시길.
     
     
    기가 차지도 않는다. 게다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킹 제임스 이외의 모든 성경들은 결국 저런 뜻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로, 신약 역사상 성령으로 가장 충만했을 거라고 회자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성경에 음담패설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다. 저게 도무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부패한 대화는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도 말라”(엡 4:27, 29)고 권면한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지껄일 소리인가?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아들이 제발 교회에서 끊어지고(be cut off)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그걸, 불온사상을 지닌 성경 번역자들이 cut을 능동으로 변개한 것이다. 이 정도면 성경 번역자가 아니라 성경 “반역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3.
     
    성에 탐닉하고 있는 현대 역본들의 추태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그야말로 맛만 좀 본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예를 든 것보다 더욱 치명적인 독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만큼 성 범죄, 성 문란,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해 단호하게 엄금하고 정죄하는 책은 없다. 결혼한 남녀의 1:1 부부 관계 외의 모든 성적 접촉은 음행이고, 성 정체성이 문란해 지는 것도 중죄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경은, 그런 죄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그런 죄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을 혐오하고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있는 그대로 폭로하고 정죄하고 있는 성 범죄에 대한 언급은 표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이다. 아무리 인간이 의학, 심리학으로 동성애를 합리화하려고 한들 소용없다. 하나님이 그건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롬 1:24-27) 못을 박아 버렸다면 그런 것이다. 그게 정말 맞는지는 동성애자 본인이 잘 알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동성애자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동성애자’라고 중립적으로 불러 주기에도 너무나 가증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꼭 ‘남색하는 자’, ‘남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자’라고 길고도 적나라하게 일컬으셨다. 영어로는 죄악의 온상 소돔의 이름을 딴 sodomite.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한 왕들은 부임할 때마다 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했지만 이런 자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그런데 구약 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 sodomite가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사라졌다. 미동(꽃미남 같은 남자), 내시, 남창 등으로 바꿔서 그냥 선천적으로 나긋나긋하고 남자 구실 못 하는 남자, 또 성매매를 하긴 해도 그렇게 변태 같은 느낌은 안 드는 표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까와 같은 과감하던 문체는 어디로 사라졌나?
     
    가나안 이방 종교에는 남창· 내시가 있었다고 아무리 신학자, 고고학자들이 변명하더라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동성연애자라고 말씀하셨다면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동성연애자, 아니 남색하는 자가 맞는 것이다!
     
    한편으로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 1장과 더불어 성 문란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구절은 단연 고전 6:9이다. 그런데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가 언급되는 이 구절이 킹 제임스 성경만치 확실하고 단호하게 번역되어 있는 성경 역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너무나 명백해서 동성애자 이외의 핑계가 틈탈 여지가 도저히 없으니, 변개된 성경들도 어쩔 수 없이 동성애를 뜻하는 단어로 번역을 했다. 하지만 abuser 같은 단어도 빼고 마지못해, 아주 중립적이고 그다지 도덕적인 느낌이 없는 단어인 homosexual을 삽입한 것에 그쳤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은 아주 직설적이고 민망하기까지 한 토박이말로 성과 관련된 죄를 폭로하셨는데, 잘 와 닿지 않고 좀 중립적인 느낌이 드는 한자어로 바꿨다는 뜻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지옥에 간 부자를 다루는 눅 16:23은 상황이 너무 명백하니까 어쩔 수 없이 hell을 인정했지만, “지옥의 문”들이 교회를 능히 이기지 못할 거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응당 음부, 하데스라는 뿌연 말로 바꿔 버린 고약한 센스이다. 지옥의 입구에는 문이 있고, 주님께서는 그 열쇠(계 1:18)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음부 권세”(마 16:18. 개역)는 도대체 뭘 뜻하는가?
     
    그나마 NIV는 그 동성연애자에다가도 “homosexual offenders”이라고 단어를 또 바꾸어, 모든 동성애가 다 나쁘지는 않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얼마나 치떨리고 교묘한 변개인가!
     
    고전 6:9에 역시 존재하는 effeminate, 즉, 하리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천성을 버리고 여자가 되어 버린 남자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남아나지를 못해 있다. 전부 구약의 sodomite와 마찬가지로 남창으로 단어를 변개했다.
     
    끝으로, fornication(음행)이라는 직설적인 단어도 요즘 성경에서는 좀체 찾을 수 없다. fornication은 주님께서 인정하신 이혼 사유 중의 하나이다. (마 5:32, 19:9) 이 단어도 구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창녀짓으로 바뀌었다. (대하 21:11, 사 23:17, 겔 16:29) 창녀짓은 킹 제임스 성경에도 따로 언급되어 있다. (겔 16:15) 즉, 다른 의미이다. 그런데 왜 기를 쓰고 음행이란 단어를 안 쓰려는 것일까?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성적 부도덕함(sexual immorality)으로 바뀌었고, 어떤 데서는 그냥 sexual이라는 단어까지 빼서 의미를 훨씬 약화시켰다. 음행을 책망하는 고린도전서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이다. 그리고 롬 1:29와 갈 5:19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목록 가운데 간음(adultery)만 남기고 음행은 아예 삭제해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음행에 대한 정죄가 희석되고 약화된 성경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종교 개혁자들, 그리고 바른 믿음의 선조들이 손에 쥐었던 그 성경이 결코 아니다!
     
    4.
     
    독자들이여, 이 모든 예가 결국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현대 역본 번역자들은 독자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음란한 생각을 조장하는 한편으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추하고 역겹고 죄스러운 성 범죄의 실체를 가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영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은 어떠할까? 문자적으로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만치 동성애나 음행을 혐오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사람이 당신이 읽는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말을 굉장히 돌려서 번역하거나, 아예 변개· 삭제까지 한 것이다.
     
    이것은 마귀의 세력의 음모이다! 어떻게 성경을 만드는 일에 마귀가 개입하겠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말라. 성경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응당 돈이 되는 책장사이다. 지금이 성경을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시대가 아닌 이상, 성경으로 이익 챙기고, 덩달아 성경을 부패시키고 그 속에 독약을 타려는 음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AND와 OR의 차이를 기억하기 바란다. 선은 오로지 AND이다. 지극히 작은 말씀 하나만 부패시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선하고 순수함은 깨져 버린다. 마귀는 성경의 무오성과 일관성을 깨뜨리고 성경에 대한 자그마한 의심을 심으려고 노력 중일 뿐이지, 성경에 “너는 사탄을 숭배할지니라”란 멍청한 구절을 넣으려고 투쟁 중인 게 결코 아니다.
     
    근래에 영어권에서는 성별·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특정 계층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중립적인 용어만을 공식 석상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죄까지 덮어 주는 제도로 오래 전부터 변질되었다. 오늘날이 얼마나 죄로 넘쳐나는 음란한 세상인가? sodomite가 gay가 되고, drunkard가 alcoholic이 되고, fornication이 free love나 pre-mature sex로 미화되는 것 말이다. 성경은 악을 악이라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자에게 화를 선포하고(사 5:20), 이런 거짓된 입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말한다(잠 17:4). 그런데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경 자체가 죄를 미화하는 단어로 물갈이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런 저질 성경을 읽고서 참 성경의 저자인 성령님의 조명을 어떻게 받겠으며, 제정신 박힌 크리스천이 어떻게 양성되겠는가? “읽기 쉬운 우리 시대 길거리 말투”라는 광고 문구는 그 자체가 저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란 성구로 유혹을 이겨라.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는 한낱 인간의 고대 영어가 아니라, 지극히 절제되고 연단된 하나님의 언어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언어라서 처음에 좀 생소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은 고어일 수는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은 어중이떠중이가 다 자기 권리 따지고 외치는 말세의 라오디게아 교회 기간 대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에 탄생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카톨릭을 대적하던 올곧은 왕, 그것도 리처드, 찰스 같은 이름도 아니요 성경의 인물과 이름이 일치하는 제임스라는 왕의 명령에 의해 질서 있게 번역되었다. 왕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저작권, 돈 같은 문제가 개입할 여지도 전혀 없었다.
     
    번역자들은 TV, 인터넷처럼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매체가 없던 보수적이고 건전한 시절에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원어 성경을 술술 외우고 성경의 원어는 물론 인접 국가들의 고대 언어들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 수재였다. 덕과 지식을 고루 갖추었으며, 더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임을 진심으로 믿고 두려워한 신앙의 위인이었다. 소설 쓰듯이 제멋대로 번역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원어와 문자적 일치가 이루어지게끔 하나님의 의도를 살려 번역하였고, 심지어 부득이하게 원어와 대응이 안 되는 단어를 추가할 때는 두려워서 이탤릭체 처리를 하는 정직함까지 보였다. 한 마디로 사상이 건전하고 올발랐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쓰셔서 신구약 성경을 걸출한 영어 합본으로 완성한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미디어(책, 신문기사, 영화, TV, 게임, 인터넷 등)를 영적으로 시험하고(prove), 저자나 번역자가 무슨 믿음과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이것을 만들었는지 따져 보자. 성경도 예외가 아니며, 성경이라고 다 받아들이지 말자. 개역성경, NIV를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과, 올바른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을 받아들인 사람은 서로 사상이 다르고, 믿는 영이 다르다.
     
    지구와 온 우주가 불로 소멸된 뒤에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셋째 하늘에 영원히 정착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때 하늘에 적혀 있을 말씀은 도대체 어느 역본 말씀일까? 우리의 자녀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야 하듯이,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음란한 성경으로부터 보호하자!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오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제임스 왕이 동성애자이기에 킹제임스 성경은 좋지 않다고 하는 자들도 있고
    제임스 왕이 프리 메이슨(Free mason)이라 킹제임스 성경은 좋지 않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다 허수아비를 때려서 실체를 죽이려는 것으로서
    역사의 증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허수아비를 쳐도 실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역사 부록에 실린 ‘제임스 왕’에 대한 글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성경만큼 동성애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정죄하는 성경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임스 왕이 동성애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제임스 왕이 프리 메이슨이라는 말은 아마 그의 복장 등을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왕궁이나 의사당 빌딩, 왕의 제복 등에는 프리 메이슨 상징들이 더러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제임스 왕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제임스 왕이 번역한 성경이 아닙니다.
    그는 국가의 통치를 위해 그 성경을 번역하라고 지시했을 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정확성에 대한 권위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 인쇄본에 있지도 않고, 제임스 1세의 인품에 놓여 있지도 않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문학의 뛰어난 업적에 있지도 않고 심지어 그리스어 「공인본문」에 있지도 않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KJV)이라는 절대 무오한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그분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에 그분의 말씀이 손 안에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킹제임스_성경의역사_2판.pdf (504.0K), Down : 282, 2013-05-23 14:02:41

    출처: Keep Bible.com 

     


      사랑하며 산다는 것

                             최송연

    이 세상에

    사랑이 없노라

    말하지 말게 하소서 

    사랑은 내 안에 있는 것

     

    그대를

    사랑하노라

    입으로 말하지 않게 하소서

    사랑은 희생이 따르는 것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병든 이를 찾아가는 발걸음

    소외된 자를 다독이는 손길

     

    그리고,

    내게 악을 행한 사람마저

    용서로 품어 안는

    넓고 큰 가슴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나를 사랑하셨듯...


     


     


     


     


     

                        

         

     

     

     

     

     사랑하며 산다는 것

                             최송연

    이 세상에

    사랑이 없노라

    말하지 말게 하소서 

    사랑은 내 안에 있는 것

     

    그대를

    사랑하노라

    입으로 말하지 않게 하소서

    사랑은 희생이 따르는 것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병든 이를 찾아가는 발걸음

    소외된 자를 다독이는 손길

     

    그리고,

    내게 악을 행한 사람마저

    용서로 품어 안는

    넓고 큰 가슴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나를 사랑하셨듯...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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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터키주 로완 카운티의 법원서기 킴 데이비스
    법원 "증명서 발급 약속하면 석방"…다른 서기들은 5일부터 발급키로

    (워싱턴=연합뉴스) 심인성 특파원 =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결정에도 동성 커플에게 결혼증명서 발급을 거부한 미 켄터키 주(州)의 법원 서기가 결국 법정구속됐다.

    켄터키 주 연방지법의 데이비드 버닝 판사는 3일(현지시간) "법원은 이번 사안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결혼증명서 발급을 거부해 온 로완 카운티의 법원서기 킴 데이비스(49·여)에 대해 연방법 위반 및 법정 모독 등의 이유로 법정구속을 명령했다.

    데이비스는 버닝 판사의 명령 직후 곧바로 교도소에 수감됐다.

    다만 버닝 판사는 데이비스가 동성 커플에 대한 결혼증명서를 발급하겠다고 약속하면 석방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데이비스의 변호인단은 법정구속 대신 벌금형을 내려야 한다고 맞섰으나, 버닝 판사는 벌금형으로는 데이비스의 의지를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해 구속한다고 설명했다.

    데이비스는 그동안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라며 동성 커플에 대한 결혼 증명서 발급을 거부해 왔고 이날 버닝 판사 앞에서도 "내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동성 커플에 결혼 증명서를 발급하라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버텼다.


    데이비스는 이날 20분간의 법정 진술에서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러분은 당신의 가슴과 영혼에 있는 어떤 무엇과 자신을 분리할 수는 없다"며 결혼증명서 발급 거부가 자신의 '종교적 양심'에 따른 결정임을 강조했다.

    이날 법정 밖에서는 동성결혼 찬반 양측에서 각각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데이비스는 지난 6월 말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결정이 나온 후에도 동성 커플에 대한 결혼증명서 발급을 거부해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약 4년 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데이비스는 오랫동안 법원서기로 재직한 자신의 어머니 밑에서 부서기로 일해 오다 지난해 11월 선거에 출마해 법원서기에 당선됐다.

    다만 데이비스와 같은 법원에서 일하는 다른 5명의 법원 서기는 4일부터 동성 커플에게 결혼증명서를 발급하겠다고 약속했다.

    sims@yna.co.kr

     


    朴 대통령, 도우미 아줌마가 전하는 퇴근 후 일상생활 

     


    새벽 기상해 자료읽고 웹서핑

     삼성동서 가사 돕던 도우미가 관저 출퇴근하며 식사 준비,

     점심은 수석들과 본관서… 오후 6시 정시 퇴근후에도 업무

     

     

     

    <동생 지만씨의 아들인 조카
    세현(8)>

     

     

    '오전 9~10시 출근, 오후 6시 퇴근.

    박근혜 대통령은
    자동차로 3~4분 걸리는 관저(숙소)와 본관(집무실)
    사이의 도로를 하루 한 번 오가는 것 외에
    다른 동선(動線)이 없을 때가 다반사다.


    그는 '아침형' 인간이다.
    지난 15년간 매일 새벽 4시30분쯤이면
    눈을 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에 와서도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참모들이 올린 각종 보고서와 자료를 읽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반대 진영의
    독설(毒說)이 담긴 인터넷 댓글도 챙겨 읽는다.
    그는 1974년부터 5년 넘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는 동안
    아침식사를 주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단둘이 먹으며
    '지도자 수업'을 받곤 했다.

    그러나 지금

     

     

    독신인 박 대통령에겐 식탁에 마주 앉을 가족이 없다.
    관저로 출퇴근하는 '삼성동 아줌마'가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삼성동 아줌마'는
    박 대통령의 서울 삼성동 사저에서
    수년간 일했던 가사 도우미다.

     

     

    맵고 짠 음식을 싫어하고 채식을 즐기는

     

    박 대통령의 식성과 생활 습관을 잘 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본관 도착 시간은 오전 9~10시인데,
    관저에서 하던 일이 마무리되는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보통 오전 7시 30분에 출근했던 것과 비교하면
    청와대 시계가 2시간쯤 늦춰진 셈이다.
    박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도 대개 오전 10시에 잡힌다.

     

     

     

    낮 일정은 빡빡하게 돌아간다.
    접견실에서 외부 인사를 만나거나
    수시로 수석들을 호출해 보고를 받는다.

     

    이번 주부터는 매일 업무보고를 챙기기 시작했다.
    외부 일정이 없으면 점심은 본관에서 해결한다.
     
    본관에도 주방시설이 갖춰져 있고 요리사도 배치돼 있다.

     

    점심을 함께하는 사람은 그때그때  다르다.  

    수석들과 먹을 때도 있고 외부 사람을 부를 때도 있다.
    물론 비공개다.

    지난 정부 때까진 VIP(대통령)가 식사를 하면
    언제나 곁을 지키는 총무기획관실 소속 행정관이 있었다.
     
    청와대에 오래 근무한 이들은
    이 남자 행정관을 우스갯소리로
    '감식관(鑑食官)'
    또는 (왕이 먹는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살피는)
    '기미상궁'이라 부르기도 했다.
     

     

    19년간 청와대에 근무했다는 이 행정관은
    최근 그만뒀고 따로 충원하진 않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오후 6시쯤 관저로 '칼 퇴근'한다.
    관저의 총넓이는 6093㎡(1843평)이다.

     

    도배와 인테리어를 바꾸고
    삼성동 자택에서 쓰던 가구와 물건들도 옮겨 놓았다.

    저녁식사는 혼자서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삼성동 아줌마'가 퇴근하면
    경호원과 여직원이 대기하고 있지만
    편하게 말 붙일 사람은 없다.

     

    밤에도 올라오는 상황 보고를 챙기고
    수석들에게 지침을 내리는 대통령의 업무는 계속된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다시 들어온 직후
    "내부가 너무 달라졌다"고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스케이트를 타던 연못이 없어졌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피붙이는
    동생 지만씨의 아들인 조카 세현(8)이다.

     

    박 대통령이 유일하게 공식 회의를 중단하고 나갔던 게
    2005년 세현이가 태어났을 때다.

     

    아직 지만씨 부부와 조카를
    청와대에 불렀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청와대 인사들은
    "그렇게 하고 싶겠지만
    박 대통령이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이 너무 바빠서
    외로울 시간도 없을 것"이라는 참모도 있다.
    박 대통령은 평소 개인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조카인 박세현 군에게는 따뜻한 고모다.
    사진은 박 후보가 박세현군을 안고 있는 모습

    ◆또 다른 발전의 기회

    우리는
    익숙해진 생활에서 쫓겨나면 절망하지만,
    실제는
    거기서 새롭고 좋은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동안은 행복이 있다.

    - 톨스토이 -

    지금의 안위가 최고라 여겨지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 상태로 유지되거나
    아니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대부분의 마음일겁니다.
    하지만
    일상은 반복 속에서도 변화하고
    때로는 전복되는 것이어서
    불안은 가중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변화가 새로운 삶의 계기가 되고
    또 다른 발전을 가져오는 기회라고
    달리 생각하면
    피할 일만은 아닙니다.
    기회는
    문을 여는 사람에게만 얼굴을 보여주니까요.

     



     

     




    영감과 보존: 원본, 사본, 역본의 관계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All script-x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성경대로 믿는 신자라면 누구나 성경의 영감을 믿을 것입니다. 영감이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문자들을 써서 단어들로 기록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리스말로 영감(inspiration)은 ‘숨을 불어 내어 쉬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감’은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내어 쉬셨음’을 뜻합니다. 영어 ‘inspiration’에서 중간에 있는 ‘spir’는 영을 뜻하는 ‘spirit’에서 나왔습니다. 또 앞의 ‘in’은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감은 ‘하나님의 영이(숨이) 들어갔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에 숨을(혹은 영을) 불어 넣으셨을까요? 그분은 ‘모든 성경 기록’에 그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완전한 성경 기록의 모든 단어에 자신의 숨을 불어 내심으로써 그 단어들이 살아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이것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단어)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히4:12-13).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단어)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영감 과정이 과거에 몇 차례 있었느냐, 또 지금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감이 과거에 한 차례만 있었을까요? 여러 차례 있었을까요?
     
    즉, 원본의 단어들만 단 한 차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아니면 사본의 단어들도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혹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나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어떤가요? 그것들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이 영감 과정이 과거에만 있었을까요? 아니면 현재에도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여러 사람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일단 분명한 것은 딤후3:16에 나오는 영감이 자필원본의 단어들을 기록할 때에 사용된 영감이라는 점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히브리말(약간의 아람어)로, 신약성경은 그리스말로 나왔습니다. 그 단어들을 인간 기록자들이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벧후1:20-21).
     
    분명히 처음에 원본 성경 기록들이 주어질 때 영어나 우리말로 단어들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단 한 차례 자필원본의 단어들만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기록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을 보존하십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완벽하게 보존되면 그 성경은 사본이든 역본이든 자필원본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하나님의 숨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읽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이해하지 않거나 잘 표현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영어와 한국어를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입에서 영어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나와서 인간 기록자가 완벽하게 기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필 원본: I am a boy.
     
    자, 시간이 지나면서 ‘I am a boy.’가 담긴 자필 원본이 해어져서 어쩔 수 없이 사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이것을 정확하게 다른 사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본: I am a boy(필사자와 필체는 다르지만 네 단어는 정확하게 같음).
     
    자필 원본의 ‘I am a boy.’는 딤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그 이후에 자필 원본의 모든 단어를 정확하게 그대로 옮겨놓은 사본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존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다만 둘이 정확히 일치하므로 원본과 사본은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하나님의 숨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과거의 유대인들은 피땀흘려가며 구약의 히브리 성경을 처음의 원본과 동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1960년, 밀러(H. S. Miller)가 지은 「일반 성경 입문」(General Biblical Introduction)에는 유대인들이 구약시대 회당에 있던 두루마리들을 복사하면서 지킨 여덟 가지 준수 사항이 있습니다.
     
    (1) 양피지는 정결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되 오직 유대인만이 만들 수 있으며 정결한 짐승으로부터 만든 끈으로 묶어야만 한다.
     
    (2) 두루마리의 각 난에는 48줄에서 60줄이 들어가야만 한다.
     
    (3) 잉크는 반드시 검은 색이어야만 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제조해야만 한다.
     
    (4) 어떤 단어나 글자도 머리로 외워 적어서는 안 된다. 서기관은 반드시 자기 앞에 정통 복사본을 놓고 기록하기 전에 먼저 각 단어를 큰소리로 읽고 발음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전에 그는 반드시 두려운 마음으로 펜을 닦아야만 하며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을 적기 전에는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온 몸을 씻어야만 한다. 이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주(主) 즉 전체가 대문자로 된 ‘LORD’로 번역되었는데 따라서 그는 필사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이 몸을 씻어야만 했다.
     
    (6) 글자의 형태, 글자와 단어 사이의 간격, 펜을 사용하는 방법, 양피지 색깔 등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규례들이 있었다.
     
    (7) 두루마리를 수정하려면 그것이 완성된 후 30일이 지나기 전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두루마리는 무효가 된다. 또한 한 장에 단 한 개의 실수라도 있으면 그 장은 버려야만 했으며 전체 필사본에서 세 개의 실수가 발견되면 전체를 버려야만 했다. 다시 말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다 기록했는데 그중에 단 세 개의 실수가 나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창세기부터 필사해야 한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어느 정도 신중을 기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필사하는 말씀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들임을 믿었으며 따라서 이런 철저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들을 완전하게 보존해 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본문에서 빼거나 본문에다 첨가하거나 본문을 바꾸거나 하는 NIV, NASB, NKJV 등의 현대 역본 기록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런 치밀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완전하게 보존해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친히 읽으신 말씀이 자필 원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성경이라고 부르셨다.
     
    (8) 그들은 글자와 단어 수를 세었으며, 만일 글자가 삭제 혹은 첨가되었거나 다른 글자와 붙어 있으면 필사한 사본 전체를 버렸다.
     
    이 같은 규칙들을 소개한 뒤 밀러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이런 규칙들이 좀 부조리하거나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거룩하게 여겼는지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읽으셨던 성경, 즉 처음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성경을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손 안에 가지고 있다고 확신해도 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이 읽은 성경 말씀이 비록 자필 원본의 말씀이 아니고 필사본의 말씀이었지만 그것을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시며 기록된 필사본에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단 한 번도 우리 주님은 사본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손에 있는 필사본 두루마리가 곧 원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every word)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분명히 위 구절 안에 있는 구약성경 말씀은 주전 1500년경에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록된바’(it is written)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모세의 자필 원본이 아니고 모세로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약 1500년 동안 필사되어 보존된 성경(사본)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원본만 옳았다면 ‘it was written’으로 과거 시제로 기록되었어야 합니다. 참고로 여기의 현재형은 예수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뜻하는 현재형입니다.
     
    또한 ‘모든 말씀’(every word)이란 것은 말 그대로 모든 말씀이(단어가) 보존되지 않은 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손 안에 들어 있는 필사본 성경이 자필 원본과 똑같음을 증명해 주셨으며 그 필사본에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려면 이 외에도 다른 구절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마5:17-18; 눅24:27; 눅24:44 등).
     
    자, 그러면 번역본은 어떨까요? 자필 원본을 그대로 동일하게 베껴 쓴 사본의 ‘I am a boy.’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번역본: 나는 소년입니다(참고로 우리말은 존칭이 있으므로 ‘나는 소년이다’, ‘저는 소년입니다’도 다 맞는 번역임).
     
    하나님의 입에서는 분명히 처음에 ‘I am a boy.’가 나왔고 인간 기록자는 그것을 원본에 기록하였으며 이 네 단어는 사본에 그대로 정확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이 보존된 사본에서 정확하게 ‘나는 소년입니다.’라는 역본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역본도 최초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원본과 동일한 효력을 지닐까요? 물론입니다. 정확하게 번역된 역본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100%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역본의 단어들 역시 사람을 살리며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신약성경이 완성된 뒤로 실제로 이방 사람들을 구원한 것은 다 역본이었습니다. 즉 AD 100년 이후에는 원본이나 사본의 시대가 아니라 역본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리고 역본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손에 들린 성경(역본)에 하나님의 숨이 없다면 그것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번역 성경의 단어들이 딤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영감은 단 한 차례 자필 원본이 기록될 때만 하나님이 사용하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자필 원본의 단어들만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원본이 정확하게 필사되었고 그 필사본에서 지금의 역본이 정확하게 나왔으면, 지금의 역본에도 하나님의 모든 단어가 동일한 효력을 갖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자, 이제 원본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비교해 봅시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모든 단어는 원본을 정확하게 보존한 사본의 원어들에서 나왔습니다. 신약 성경의 경우 이러한 사본에는 성경 기록 필사본, 성경 기록을 담고 있는 성구집 등이 포함됩니다. 물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사본의 모든 단어를 가능하면 1 대 1 대응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심지어 원어의 문장의 구조까지도 영어로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당연히 언어의 차이로 인해 무언가를 첨가해야만 합니다. 번역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것을 잘 압니다.
     
    예를 들어 다시 딤후3:16을 보도록 합시다.
     
    All script-x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is]가 이탤릭체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자들이 번역을 위해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is]가 없어도 말이 되지만, 영어에서는 [is]가 없으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역자들이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역자들은 정직하게 이것을 이탤릭체로 표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것은 원래 원본에 없었으나 번역을 위해 첨가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두 개의 [is]를 제외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사본)을 있는 그대로 영어의 구조 안에서 가능한 한 1 대 1 대응이 되게 정확하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형식적 일치’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번역되었기에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온전히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해서 이 성경을 들고 “이것은 하나님의 ‘오류가 없는 완전한 말씀’입니다.”라고 외칩니다.
     
    세상에 수많은 성경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거의 완벽한 형식적 일치를 보이는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611년 이래로 이 성경에 복을 주셔서 이 세상 모든 교회와 신학교의 교리, 신앙신조 등을 정리하며 5대양 6대주에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성경을 쓰셨습니다. 온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여러 나라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수백 개 나라 성경의 번역 대본으로, 표준 잣대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을 너무 과장한 나머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에서 향상된 계시’ 혹은 ‘원본보다 더 좋은 계시’ 혹은 ‘영감을 받은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원본보다 더 좋은 역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들(단어들)을 형식적 일치를 통해 정확하게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나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니고 ‘정확하게 보존된 성경’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원본이 아니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라고 부를까요? 다음의 예를 보겠습니다.
    향상된 계시’의 한 예로 행12:4를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군사가 넷씩인 네 소대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스터가 지난 뒤에 그를 백성에게로 끌어내려 함이더라(행12:4).
     
    And when he had apprehended him, he put [him] in prison, and delivered [him] to four quaternions of soldiers to keep him; intending after Easter to bring him forth to the people.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다른 성경들은 여기의 ‘이스터’를 유월절로 번역하였습니다. 루터 성경 같이 바른 본문에서 나온 성경들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 성경 중에 유일하게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이것을 ‘이스터’라고 바르게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우수하므로 이 성경은 원본을 뛰어넘으며 그래서 ‘향상된 계시’라고 주장하거나 영어 성경의 단어들도 딤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다는 ‘이중 영감설’을 펴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의 대표적인 사람이 피터 럭크맨(Peter Ruckman)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이거나 이중 영감을 받으려면, 원본에 없던 무언인가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있어야만 합니다.
     
    자, 그러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이스터’라고 번역한 그리스말이 원어에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것이 없는데 영어 성경이 그것을 번역해서 집어넣었다면 그것은 첨가이고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터’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파스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말 파스카는 명절의 경우 크게 둘을 뜻합니다. 하나는 유월절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터’(이교도들의 부활절 축제)입니다. 파스카는 Oxford English Dictionary에도 정확하게 이 두 개의 명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파스카는 이 둘 중 하나로 번역될 수 있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행12장의 때가 이미 무교절 기간이라 유월절은 지났으므로 무교절 다음에 오는 이교도들의 부활절인 ‘이스터’로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없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향상된 계시’나 딤후3:16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100% 보존된 바른 사본의 단어들을 정확하게 번역한 성경입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처음에 원본이 주어졌을 때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리가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 중 원어들을 담은 사본에서 나오지 않은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나 이중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닙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선포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흠정역: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노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1:14).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것이 헛되어 영을 괴롭게 한다.”(vexation of spirit)고 전도서에서 무려 10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이것을 전적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역: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영을 괴롭게 하는 것’과 ‘바람을 잡는 것’(grasping of the wind)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 혹은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루아흐’입니다. 이 경우 킹제임스 성경이나 개역성경의 대본이 된 원어 성경의 원어가 동일하므로 이 같은 차이가 생긴 데 대해 원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자가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전도서의 문맥상 어느 번역이 맞을까요? 우리는 전도서 기자가 말하려는 요점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번역한 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 우리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도서 기자는 마무리를 하면서 12장 13절에서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영의 문제지 결코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바람을 붙잡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번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주는 번역이라고 믿으며 이런 의미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이것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임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킹제임스 성경이 원어를 정확하게 번역했음을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결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원본보다 낫다는 주장을 펴서는 안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의 모든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해서 하나님의 단어들을 이방인들의 공통 언어로 보존한 성경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반드시 다음의 글을 읽고 진술을 수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대편 진영에서 무식하다고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원어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원본이 최종 권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간에 우리가 원본의 모든 단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들이 바르게 번역되지 않으면 최종 권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파스카’, ‘루아흐’, ‘하데스’ 등의 원어들은 다 여러 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의도대로 번역되지 않으면 원어들만으로는 최종적인 표준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섭리(providence)라는 돌보심을 통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을 인도하셔서 각각의 원어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영어로 번역하게 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본의 모든 단어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번역되어야만 맞는다고 믿습니다.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를 택하셔서 지난 400년 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대 역본들의 역자들은 원본의 원어들의 뜻을 이 세상 문학가나 철학자의 글을 통해 전달하려고 합니다. 원어 사전들의 저자들 가운데는 불신자가 많으며, 심지어 쎄이어(J. H. Thayer) 같은 이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언어는 성경의 언어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지금의 번역본 시대에 하나님의 원어 단어들을 100% 정확하게 옮긴 보존된 성경입니다.
     
    그러면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어떨까요?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1 대 1 대응이 되게 형식적 일치를 유지하면서 정직하게 번역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모든 교리와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말 흠정역 성경에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당연히 주장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딤후3:17의 진리가 흠정역 성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7).
     
    한편 ‘I am a boy.’를 ‘나는 소년입니다.’로 하지 않고 ‘나는 아이입니다.’로 하면 반만 맞습니다. 아이에는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1 대 1 대응을 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나는 한 소년입니다.’로 하면 우스운 번역이 됩니다. 한국 사람은 아무도 이런 말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earth’(창1:1)라는 말씀을 ‘그 시작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번역하고는 이 외의 다른 번역은 다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만용입니다.
     
    ‘In the beginning’은 관용구로서 ‘처음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그 처음(시작) 안에서’로 번역하는 것은 영어와 우리말을 망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머릿속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영감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이므로 그 안에 있는 정관사, 부정관사를 번역할 때 수용 언어(한국어)의 용례를 무시하고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향상된 계시’가 아니며, 이중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닙니다. 원본의 모든 단어들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형식적 일치를 취하면서 정확하게 번역하여 그대로 보존한 성경, 이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처음에 원본이 주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100% 그대로 살아 있는 성경입니다. 결코 100%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원본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비유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분을 알며 또 보았느니라, 하시니라. 8 빌립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그리하면 우리에게 족하겠나이다, 하니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내가 스스로 하지 아니하느니라.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곧 그분께서 그 일들을 행하시느니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그렇게 못하겠거든 그 일들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7-11).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빌립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러자 우리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인격체이지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 행동, 생각이 아버지 하나님과 100%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알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은 다 거짓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우리는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원본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혹은 원본이 우월하다고 하거나 그런 주장에 세뇌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을 통해 보거나 아는 아버지만이 참 하나님이듯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보는 원어의 뜻만이 옳은 뜻입니다. 이 외에는 다른 데서 옳은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버지보다 우월하지 못합니다. 요10:30에서 아들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듯이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온전히 전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원본의 원어들을 정확하게 번역한 ‘완전한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을 본문으로 해서 지난 400년간 수백 개의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바른 교리를 깨달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배도의 때에 마귀가 세상 무대에 등장해서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는 변개된 성경의 등장이 필수 요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귀라 해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의 변개일 것입니다. 마귀는 과거에 이집트에서부터 이 사악한 일을 주도하였고 주후 200년을 넘기면서 그 일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역본들은 한결같이 카톨릭 교회의 사본들만을 번역의 대본으로 쓰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감과 보존,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바른 개념을 정립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비방의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바른 성경을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성경 신자들을 많이 불러주시고 이들로 하여금 바른 교회를 세우게 하셔서 많은 혼들을 수확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DSJ

    출처: Keep 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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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미주리(Missour)주,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미용실,
        그날따라 많은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마다 하나같이 삭발을 요구했습니다.
        손님들은 50여 명 정도가 출석하는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미용사는 이상한 광신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성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암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마친 소녀가
        교회를 나오지 않자,
        목사와 몇몇 교인들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창피해 외출을 못 한다는 소녀.

        목사와 교인들은
        모두 머리를 깎기로 했습니다.

        이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는
        방송국에 연락했습니다.

        여중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주일날, 엄마는 소녀를 간곡히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교회 문을 연 순간,
        모든 교인의 빡빡머리를 본 소녀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 상황을 중계하던 리포터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 교회를 나가게 된다면
        이런 교회를 나가고 싶습니다.”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
        역시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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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V, NASB, 개역성경, 개역개정, 공동번역 등의 현대역본들은 다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소수 사본 계열의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은 비평 본문(critical text)이라 불리며
    여기에는 크게 네슬레-알란드(Nestle-Aland, NA) 판과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y, UBS) 판이 있습니다.
     
    이름은 달라도 사실 이 둘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쌍둥이입니다.
     
    네슬레-알란드 판은 1898년에 네슬레가 초판을 만든 이후로 최근에 28판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4.25년마다 한 번씩 신약성경이 개정되어 온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보존을 믿지 않으므로 카톨릭 텍스트를 근간으로 영원히 성경을 개정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철학은 다음에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듯이 NA 판이나 UBS 판이나 다 카톨릭 교황의 수하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음 사진은 NA 판의 알란드(Kurt Aland) 교수가 교황을 알현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USB 판의 편집자는 알란드, 마르티니, 멧츠거, 니다 등입니다.
    이 중에 마르티니(Carlo M. Martini)는 천주교 추기경으로 밀라노의 주교였으며 교황 성경 연구소에서 신약성경 본문 비평을 가르치는 교수이고 1967년부터 연합성서공회의 그리스어 신약성경 편집자 중 하나로 일했습니다.
     
     

     

    교황을 알현하는 마르티니 추기경

     
    이렇게 현대역본들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은 다 천주교 교황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요, 천주교회의 부패한 소수 본문을 최고로 여기고 그것만을 파급시키려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리는 것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간단히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립니다.
     
    샬롬

     

    출처: Keep Bible.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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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에 대해서 놀랍고 기이한 경험을 했어도...]


    베토벤 교향곡을 듣다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황홀한 음악을 듣는 동안 이 같은 경험을 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자, 그가 그 경험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망상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처럼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 갑시다. 사이비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교향곡을 듣다가 어떤 경험을 했다는 말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막힌 일몰 장면을 보거나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영혼이 이상하게 고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근심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가만히 앉아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경건치 못한 삶을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이 예전에 어떻게 명성과 돈을 위해 살았고 가족과 그 밖의 것들을 위해 살았는지 책으로 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 전체가 잘 못 되었음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고 썼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알리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 설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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