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력이 아니라 합심 기도다.
박영돈 목사 2015. 9. 29. 00:07합력이 아니라 합심 기도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신앙생활에 매뉴얼은 없다.
성경을 개인적 의도나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읽으면 온전한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자칫 이해의 부족, 착각, 오류는 물론 이단으로까지 흐릅니다. 환난 중에 힘을 얻어 위로가 되는 말씀만 골라 읽는 정도는 그나마 순진한 편입니다. 잘 믿어서 형통하기 원하는 자의 성경은 기복주의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말씀으로만 가득 찰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판단 정죄하고자 하는 심사가 있다면 성경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의 상대주의 도덕교과서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불순한 의도 없이 읽는데도 쉽게 오류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기도에 관한 말씀을 읽는 신자들의 관심은 거의 대부분 어떻게 하면 빨리 응답을 받을 수 있을 지에만 쏠립니다. 본문도 그 대표적 예로서 두세 사람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응답이 빨리 잘 된다고만 이해합니다. 말하자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나 앞뒤 문맥에서 드러나는 본문의 정확한 의미와 무관하게 예수님이 단지 기도하는 방식을 가르친 양 받아들이고 치웁니다.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 이루게 하시리라”는 표현에만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들이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함께 하셔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또 응답이 잘 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기도의 방식이 응답이 잘 된다고 이해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와 근거는 그 방식에 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심지어 신자들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나 견고한 믿음일지라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완벽하고도 신실하신 당신만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움직이실 뿐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어떤 방식이 있다고 말하면 엄밀히 따져서 틀린 진술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바로 그 방식 때문에 그분의 은혜나 능력이 더 많이 나타나기는 마찬가지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만 보십니다. 특정한 기도 방식을 선호, 고집, 의지하는 것도 사람의 외모에 해당됩니다. 쉽게 말해 어떤 매뉴얼이 있어서 그대로 따라하면 하나님이 더 잘 움직일 것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면 그런 예상, 추측, 기대, 소원, 믿음부터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 대신에 기도하는 우리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가장 먼저 지금 기도드리는 제목과 내용이 정말 자신에게 갈급한 문제이기에 꼭 이뤄져야만 한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뤄져도 그만, 안 이뤄져도 그만인 경우는 구태여 기도할 이유조차 없지 않습니까? 또 모든 기도의 바탕에는 자신의 무능함, 어리석음, 연약함을 철저히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순전한 믿음이 따라야 합니다.
한 마디로 갈급함과 믿음이 기도가 기도되게 하는 두 근본요소입니다. 이 둘이 없으면 아예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기본 구조 위에다 실제적인 기도의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온전한 기도가 되려면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둘 다 갖추어야 하는데 갈급함과 믿음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두 기본 조건은 그런대로 갖추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기도의 충분조건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기도가 응답이 됨으로써 자신의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실은 이 조건이 더 우선되기를 원하십니다.
앞에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더 선호하시는 매뉴얼이 따로 없다고 했지만 특이하게도 기도에만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을 이미 주셨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현실적 안락과 형통만을, 또는 문제와 환난의 해결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을 하나님도 아신 것입니다. 일종의 예외로 제발 기도만은 이렇게 하라고 모범 답안을 가르쳐 주신 셈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소원으로 시작해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드러나길 바라며 마치는 기도입니다. 물론 자신의 일용할 양식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목이 결코 우선이 아니며, 또 단지 일용할 양식이었지 도에 지나친 풍요나 자신의 욕망을 구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기도를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실천해 보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 십자가의 잔을 마시지 않았으면 하는 자신의 소원은 빌되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달게 마시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순전한 중심을 하나님 앞에 하나 가감 없이 온전히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만약 자기 소원의 응답만 목적이라면 십자가를 비켜가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을 것 아닙니까?
기도하는 존재 - 인간
인간의 외모란 인간이 세상에 나와서 스스로 만들어 쌓은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잘 보이려 과장과 가장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본 모습과 다르게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중심은 하나님이 원래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고서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은 곳입니다. 당신과 교제토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외모가 아닌 중심을 드리는 것이 기도라면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은 당신께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 넘어간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그 중심이 부패되었다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면 성령이 내주하는 전으로 바뀝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인간이 만들어졌던 원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교통할 수, 쉽게 말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불신자 때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 믿지 않거나 모릅니다. 어쩌다 간절하거나 위급한 문제가 생기면 알지 못하는 천지신명에게 자기 형통만 빕니다.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확신도 없으니 그분의 뜻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신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분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자신을 향한 뜻과 계획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그대로 살고 싶은 소망도 생깁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에 다양한 뜻이 있지만,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게 된 것도 그 중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만 당신께 기도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피조물과 가장 유별나게 다른 인간만의 특성이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 형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단순히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반드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a)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형상을 닮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우리라는 복수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다신주의(多神主義)를 지지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태초부터 성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창조 사역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을 위격이 다른 세 종류로 만들었다거나, 인간 안에 그런 세 본질을 함께 내재시켰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완전한 사랑으로 합력하고 교제하였듯이 인간들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도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7) 하나님의 형상 안에 남자와 여자 같은 성(性)의 구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남녀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게 다스리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창조의 뜻에 비추건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평생에 해야 하는 일도 두 가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신자가 그분을 사랑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본질상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평생을 두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거기다 처음 만드신 인간의 형상대로 회복되었기에 마땅히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만의 안위만 염려하던 자에게서 남들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처럼 자신이 수고, 희생,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더라도 다른 이들이 주님의 새 생명을 얻게끔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된 것입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사랑은 불신자와는 달라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소유나 능력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자도 현실적으로는 자기 시간, 소유, 능력 등을 사용해 자신의 열정과 긍휼과 믿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이 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 대신에 주님의 것을 사용하여 이웃을 섬기는 셈입니다.
또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있기에 스스로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마음이 주님처럼 정말 순전하게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만 비로소 신자의 인간적인 불완전한 사랑이 주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대체됩니다. 하늘에 있던 주님의 긍휼이 이 땅까지 내려와서 신자를 통해 이웃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웃을 섬기되 가장 먼저 이웃의 삶의 모든 영역 위에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란 신자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기독교 신자의 종교적 의무로 그쳐선 안 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는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입니다. 중보기도로 이웃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형상을 회복한 참 인간답게 사는 첫 걸음입니다. 요컨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합심기도의 본질
신자가 동료 성도나 불신자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두세 명 이상 모여서 합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의심이 갈 수 있습니다. 혼자 집에서도 열심히, 간절히, 성실히 이웃을 위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흔히 이해하듯이 합심 기도의 목적과 효능이 하나님 보좌를 흔드는 신령한 능력이 더 강해지는 것인지, 성도 간 교제를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인지, 함께 힘을 합해 기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인지, 잘 분별이 가지 않습니다.
물론 합심기도에 그런 요소들은 분명히 작용합니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기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기도의 본질을 따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독립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다른 어떤 가르침과도 연결되지 않는 말씀이라면 합심으로 중보 기도만 하면 응답이 잘 된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가운데 나온 말씀이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본문 앞에 어떤 기사가 나옵니까?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큰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먼저 낮아져서 소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자여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네 형제 중에 누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권면, 증참(證參)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마18:1-17)
그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절)고 했습니다. 그럼 땅에서 매고 푸는 문제는 어떤 것입니까? 바로 스스로 먼저 낮아지는 일, 소자를 잘 대접하는 일,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여 회개케 하는 일 등입니다. 그 일을 두고 제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면 하늘에서도 용서와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선 바로 합심중보기도에 대한 본문 말씀이 이어지는데 어떻게 시작합니까?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 17절을 풀어서 설명하면서 다시 강조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미 1-17절까지 가르친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처럼 다시 강조하자면, “스스로 먼저 낮아지는 일, 소자를 잘 대접하는 일,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여 회개케 하는 일” 등입니다.
바꿔 말해 하늘나라에서 누가 클지 논쟁, 시기, 쟁투하지 말고 당신의 제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부터 성실히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자연히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한 합심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와 기도 응답의 신속성과는 어떤 직접적 연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합심(合心)은 말 그대로 기도하는 두세 사람이 똑 같은 마음을 함께 모으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하는 힘을 보태어서 강력한 역사를 일으켜보려는 합력(合力)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정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소자를 주님의 심정으로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 중에 범죄한 자도 정말로 불쌍히 여기며 조건 없이 용서해주려는 마음에 일치해야 합니다. 신자가 땅에서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누구라도 죄나 사단의 묶임에서 풀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늘에서 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하나님 대신에 판단, 정죄, 심판할 권세를 주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것입니까? 어떤 이를 정죄 심판해달라고 기도로 요청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와 구원은 얼마든지 신자가 구할 수 있고 또 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정죄 심판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구해선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돕고 섬기며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지, 판단 정죄 심판하라고 창조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신자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인간은, 신자끼리도 서로 사랑만 하기에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최대한 노력, 훈련해도 평생을 두고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정죄 심판은 인간의 몫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 그런 일에 허비할 시간과 여유조차 사실상 없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에서 하신 말씀과 짝을 맞추려는 표현법입니다. 범죄한 형제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는 것이 땅에서 푸는 일입니다. 반면에 교회의 증참, 권면 등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야 하는데, 바로 땅에서 매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출교만 결행할 것이 아니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말씀대로 여전히 하늘에 대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로선 어쩔 수 없이 출교시켜야 하지만 하나님께는 정죄와 심판보다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끝까지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교회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범죄한 형제의 출교를 결행했던 심정 그대로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4,5) 교회 안에 음행한 형제를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내쫓았지만 언젠가는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결행했다는 것입니다. 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 즉, 교회의 영적 순결성을 보존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이르되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왕 다시 강조하려면 더 많은 사람이 합심하라는 것이 좋을 것인데도 왜 겨우 두 사람이라고 했겠습니까? 증인의 최소 요건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 부목사 둘이서 합의만 하면 출교시켜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어떤 행사라도 절대로 법적 하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출교를 시키는 데도 교회 안에 먼저 온전한 합심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간의 모든 행사는 반드시 한 주님, 한 성령, 한 믿음, 한 진리, 한 마음 안에서 기도하며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바로 이어 베드로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 그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포인트가 형제들 사이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에 있다는 점을 확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두세 명이 모여 합심해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 되리라는 요소는 아예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혼자서 하는 합심 기도
재차 강조하지만 합심기도가 신자 여러 명이 모여 함께 기도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몇 명이 모였든 간에 그들의 마음이 같아야, 그것도 스스로 기꺼이 서로 낮아져서 진심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묶인 잃어버린 양들을 되살리려는 애끓는 열망을 똑 같이 공유할 때만이 온전한 합심기도가 됩니다.
단순히 교인들이 모여서 함께 했다고 합심 기도라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더 응답이 잘 되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교회 전체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면 응답되지 않은 일이 없어야 합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되길 원한다는 이상한 결론까지 나옵니다.
물론 신자가 가능한 많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럼에도 가라지와 알곡이 섞인 상태에서 중구난방으로 기도하는 것보다는, 온전히 거듭나서 이웃을 당신을 사랑하듯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단 몇 명의 기도를 더 기뻐 받으십니다. 아니 그런 자 단 한명을 통해서라도 그렇지 못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보다 더 큰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엘리야 한 명의 순전한 기도로 삼년 간 하늘에 비를 그쳤으며, 불이 내려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심판했고, 마른하늘에 갑자기 뭉게구름이 생겨 폭우를 퍼부었듯이 말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 단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고 응답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하고, 스스로 겸비해진 다음에 구하라고 합니다. 또 그러면 이미 징계로 내리신 가뭄, 황충, 염병의 재앙 등도 다 그치고 그 땅을 고쳐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본질은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겠다는 소원과 열망의 표시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스스로 낮아지고, 죄에서 떠나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워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몇 명이 되었든 완전히 합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나아가 신자 개인이 드리는 기도라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드렸던 주님의 심정과 합심해야만 합니다. 이 땅의 황폐함과 길을 잃고 헤매는 목자 없는 양들을 두고 정말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항상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실상은 목사가 기도 제목을 꺼내 놓을 때에 마지못해 중보기도 하는 정도입니다. 또 구역예배에서 각자 기도제목을 꺼내어서 구역식구들과 함께 기도하면 응답 잘 받으리라는 기대밖에 못합니다. 중보기도라는 형식은 갖췄지만 합심이 아니라 합력한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솔직한 영적 수준입니다. 또 현실 문제가 너무 고달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기도라도 하니까 불신자 시절에 비하면 엄청나게 진전한 모습입니다. 또 그런 연약한 모습이라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는 어차피 연약하고 가난하며 아직도 완악한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 진토 같은 체질임을 그분이 더 잘 아시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서 꼭 보기를 원하고 기뻐하는 가장 기본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서두에 강조한대로 외모가 아닌 중심만은 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을 철두철미 까뒤집어서 온전히 실토, 자백,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 분노마저 다 꺼내 놓아야 합니다.
외모로만 경건하고 의롭게 기도하는 것에는 하나님이 일절 귀를 막으시지만, 당신께 욕하고 대들더라도 진짜 중심이 그러하다면 오히려 더 경청하고 심지어 기뻐하면서 들으십니다. 또 비록 내 개인적 기도를, 심지어 불만과 의심에 차서, 했을지라도 중심을 온전히 드러냈기에 하나님은 하늘에 이미 예비해놓으신 놀랍고도 거룩한 은혜와 권능을 기도한 신자뿐 아니라 그 주변에 풍성하게 드러나게 해주십니다.
말하자면 우리 중 대부분이 온전한 합심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영적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개인 기도에서라도 주님과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황폐함과 잃어버린 양에 대한 주님의 민망함과 통분함에 동참한다면 그럴 수 없이 좋겠지만, 그보다 나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라도 제대로 헤아리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분이 왜 나를 택하여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해주셨는지 온전히 깨달은 바탕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심령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셔서 세상으로 다시 보내신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모든 중심을 있는 그대로 하나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자기 자신부터 땅에서 온전히 풀고 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점차 이웃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이미 구원 받은 신자가 믿은 후에 가장 많이 또 크게 누려야 할 권세란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합심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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