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목사 2015. 11. 27. 02:44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그리스도와의 연합 

따라서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보다 앞서 배치된다. 그것은 구원의 모든 은혜가 이 연합에서부터 출발할 뿐 아니라, 이 연합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말했듯이, 이 연합은 단순히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모든 국면의 기초이다.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밀 부룬너(Emil Brunner)는 이 교리가 ‘모든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하였다.4) 특별히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구원론을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구원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속죄 사역의 혜택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언약의 모든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진리를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서신에만 이 용어(유사한 표현까지 합쳐)가 164번이나 등장한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는 바울 서신에서 가장 특징적인 문체이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주로 예수님과 ‘함께’(wi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이는 바울이 도입한 독창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사상은 요한의 기록에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할 때 주님과 우리가 상호내주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곧 이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이 연합의 신비를 알기 쉽게 풀어주셨다. 거기서 ‘내 안에 거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바울의 연합 사상도 이 주님의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이 부패하고 유한한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불같은 연단과 고난을 통해 정화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성결해져야만 신인합일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영성의 골(goal)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영성의 근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대응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과 성화의 전 과정의 바탕으로 본 것은 신앙의 특성과 영성의 색깔을 뒤바꾸어 놓은 영적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는 고역스럽고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풍성한 삶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근거와 자격을 우리 안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 성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불같은 고난을 통하여 정화될지라도 그런 자격을 조금이라도 갖출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는 정결한 신부의 자격을 갖추게 한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여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 연합의 근거는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법적 연합’(judicial un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이런 연합의 교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칭의론의 개혁은 연합에 대한 기존의 가르침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경건의 부단한 노력과 신비체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높은 경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회복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법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소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법적으로 연합하면 주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예수님과 같이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 집의 풍성한 것들을 누린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므로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가 되며 추한 자가 아름다운 자가 되고, 빈곤한 자가 부요한 자가 된다. 


이 연합은 법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연합, 즉 생명적이며 유기적인 연합이다. 성경은 이러한 연합의 성격을 머리와 몸, 그리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부활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며 그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연합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의문은 어떻게 시공간의 무한 간극으로 분리된 두 존재가 실질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연합의 영이다. 성령은 하늘에 있는 주님과 땅에 있는 신자, 무한자와 유한자,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의 무한 간극을 극복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인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나 성령은 둘을 긴밀히 연합하는 동시에 구별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그 어떤 “잡스러운 혼합”도 허용하지 않는다.5) 성령은 이 연합의 매개체와 방편인 동시에 이 연합의 모든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이다. 


성령은 연합의 매개체와 채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만남의 장으로 제공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묘사할 때 주로 성령 ‘안에’(in)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우리 육체가 공기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가 물속에서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 즉 영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말했다(엡 2:6). 거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영역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곧 하늘 시민이다(빌 3:20).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과 계획 속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주의 새로운 상황과 질서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과 ‘아담 안’은 서로 대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며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진 새사람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진행되는 새 창조에 참여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 포괄하는 반경을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하였다. 죄로 오염되고 와해된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통합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궁극적인 구속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편입되지 않은 세상의 영역들을 그 반경 안으로 복속시키는 중대한 책무를 띤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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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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