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박영돈 목사 2015. 11. 28. 10:27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최근에 들어와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예언훈련학교에서 선무당같이 어설픈 예언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또는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다. 자기 안에서 떠오른 생각에서 나온 말이 주님의 말씀으로 둔갑하는가하면 마귀적 음성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쑤이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계시된 말씀을 전파하는 것 같아 그들의 예언을 성경말씀보다 더 솔깃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의 진리에 의해 전혀 입증될 수 없는 온갖 허튼 소리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교회를 혼란케 한다는 점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인들이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을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예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가 있는 셈이다. 

성경말씀을 듣기는 원치 않아도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드는 이들은 많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에는 은혜를 못 받아도 직통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 같은 예언자의 말에는 엄청 은혜를 받는다. 평소에 늘 설교를 통해 들어도 별 감흥이 없던 말도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으면 큰 감동으로 와 닿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이 귀히 보신다는 말을 설교를 통해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똑같은 말씀을 예언자가 “네가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구나 착한 종아 내가 너를 귀히 여기노라 내가 앞으로 너에게 더 큰일을 맡기리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설교를 통해 누리지 못한 큰 위로를 받는다. 왜 그럴까?

그들이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대신 내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다는 식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교인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을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단언함으로써 마치 주님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믿도록 교인들의 심리를 교묘히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일부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주장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중에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예언사역을 하는 이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야기하는 혼란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뿐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되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요즘 예언하는 이들에게 이런 지혜와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다. 자기 마음에 일어난 감동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함부로 확언하는 것은 아주 경솔할 뿐 아니라 진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병고침의 집회에서 자주 “주님께서 지금 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만지시고 계십니다. 방금 무릎 관절이 치유 받은 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신장에 이상이 있는 이를 고치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몇 천 명이 운집해 있는 모임에 으레 그런 병자들이 있으리란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주셨기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알려 주신 것일까?
소리를 들은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에 어떤 인상을 받은 것인가? 그 계시가 확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면 왜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좀 더 확실하게 계시해 주지 않으셨는가? 정확히 누가 어떤 병에서 나았다고 알려주시지는 못하는가? 

과거 미국의 한 교회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강사가 회중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복음사역자는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의 예언은 마음속에 즉흥적으로 일어난 감동이나 느낌, 또는 예측을 발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백 퍼센트 주님의 말씀인지 사실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과감히 믿고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담대한 믿음이 아니라 경솔한 믿음이다. 분명한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위험성을 간과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확실치 않은 것을 직통계시를 받은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이며 청중을 교묘히 조정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를 굉장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미국의 신유집회에서 허풍쟁이 사역자들이 즐겨하던 짓인데 한국의 사역자들이 그것을 아무런 성경적인 검증도 없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예언집회나 예언훈련학교에서 예언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예언을 해준다. 수많은 예언집회를 쫓아다니며 예언을 받았던 한 교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대부분 가서 받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님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데요. 지금 앞에 일곱 가지 빛이 보이고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축복하고 축복하노라. 네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혹은 ‘네 눈물과 기도를 들었노라’ 혹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님께서 지금 답답한 문제 가운데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 형제님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계속 꾸준하게 인내하며 기도를 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인내하면 그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포도나무가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지금 물질의 축복을 간구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님이 물질을 심으시고 우리 형제님뿐만 아니라 형제님의 가족도 물질의 궁핍함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등 이런 저런 예언을 많이 받았는데, 그 말들은 순간적인 감동은 되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건강한 몸이 병만 들었습니다.” 

이 교인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예언이 이런 식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예언 받으러 나온 사람을 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지껄여대며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성경에서 예언하는 이는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여 자신에게 메시지를 주실 때만 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이 원하면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예언을 해준다. 이는 성령님을 자기들이 필요할 때 호출하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하수인처럼 취급하는 행위이다.

이런 식으로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않아 무당종교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한다. 자기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을 말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그 누구도 구약의 선지자들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무오 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사도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했다(고전14:1). 자칭 예언자들은 주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의 은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예언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한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두 세 사람이 예언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분별하라고 했다(고전14:29). 이 말은 예언의 진정성을 달아보고(weight) 잘 분별하여 참과 오류를 가려내라는 말이다. 그들의 예언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경말씀에 의해 항상 점검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보다 열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해(고전14:3), 또는 숨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고전14:25), 성령이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한 것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이 떠오르게 한 인상과 메시지가 인간에 의해 잘못 이해되고 해석되어 잘못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철저한 검증과 분별을 명한 것이다. 이런 유의 예언이 지금도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아직도 연구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확실한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이와 유사한 예언을 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예언적인 의견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예언적인 통찰을 꼭 말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께서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나 인상이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솔직하고 진실한 태도이며 많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성경말씀을 전하면서는 담대하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외쳐야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하면서 그렇게 선언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번창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반드시 금지되어야한다. 이런 사이비 예언이 난무할 때 교회에 극심한 혼란을 불러오며 기독교 신앙을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무섭게 역사한다. 아무리 신통한 예언의 능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예언할 때 교인들은 성경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며 그 말을 실질적으로 더 의존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의존하는 것에 의해 주관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의해 주관되면, 예언자의 오류와 부패성을 통해 역사하는 거짓의 영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에 관한한 아무리 주의를 기우려도 부족하다. 어떤 예언적인 의견이나 통찰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 점검되어야한다. 그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을 예언자들의 말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의존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한다. 고린도교회에 예언이 성행했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 전체가 아직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말씀의 공백을 잠정적으로 메우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완전한 성경말씀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으로만 부족하여 예언자들의 엑스트라 말씀을 쫓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의 역할을 지금은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설교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함인데 이 일을 하기에 성경말씀보다 더 적합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은 성도를 세우고 위로하고 주의 계명으로 권면할 은혜로운 말씀으로 가득한 진리의 보고이다. 
또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성경말씀은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찔러 쪼개어 숨은 죄악을 드러낸다. 성령님의 대표적인 사역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달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가장 중대한 장래 일을 예언한다.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과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율법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만약 교인들이 성령님을 따라 살면 새 언약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것이나 성령님을 거스르고 육신을 따라 살면 과거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설교를 하고나면 교인들이 목사님은 어쩌면 그렇게 자신들의 사정과 고민을 잘 아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내 일을 훤히 다 아는 것처럼,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직면한 문제에 꼭 적중한 말씀을 해 주셨다고 고마워하는 교우들도 자주 접한다. 바울사도가 말했듯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딤후3:16-17). 성령님은 이 성경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교인들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와 은혜를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예언자의 말이 판을 치고 성경말씀은 뒷전으로 밀려난 최근의 성령운동은 부흥이 아니라 심각한 영적인 탈선이며 쇠퇴이다.

선지동산 55 게재 / 성령의얼굴(5)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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