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 (조지 휫필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소원한 상태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줄만한 표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감사와 찬송의 임무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낙원에 두셨을 때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성한 감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복됨 안에서 살게 됩니다.

 

 

1. 구속받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찬양과 감사

 

태초에 인간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종종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열려 여호와의 자애로우심을 노래하거나 그의 찬양에 대하여 말하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찬양과 사모함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임무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매일 그의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사랑과 흠모를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은총들도 마치 자기들의 공적으로 받은 것인 양 감사하지 않습니다.

 

1)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이며 ,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신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경향을 가진 이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은총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가까이 다가올 때 그것들은 더 큰 효과를 발합니다. 성도들은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 사실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주 여호와로부터 수천 가지 복을 받은 자들 중에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감사할 줄 몰랐던 문둔병자들에 대한 기록은 인간들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지를 잘 예증합니다. 병에서 고침 받거나 심한 고통가운데서 해결함을 받고 정말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은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이런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것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과 정반대의 성품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성도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7,1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이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항상 상기시켰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습니다. 실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지금도 태양으로 낮을 달로 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물이 갈라져 육지같이 건너는 것을 본적이 없고,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추격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다른 배에 의해서 침몰 할 수 있는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실로 무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을 행운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과 선견지명으로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섭리하심이 모든 것을 관할하십니다. 바람과 바다고 그의 말씀에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때는 가라고 명하시매 바람이 가고, 때로는 오라고 말씀하시매 바람이 왔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광풍 속에서 그 파도를 타고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까닭

 

1) 감사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못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행사를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그분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같이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오직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의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여러분을 단단히 잡아매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그분보다 더 나은 주인을 결코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를 섬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상급이 주어지고 이후에는 결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십니다.

 

다른 주인들은 여러분들에게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준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설혹 모든 세상을 준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분 없이는 여러분은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삶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지만 또한 의로운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가 받은 복만큼 우리의 영적 삶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후에 받을 저주가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함께 항해한 군인들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선원들에게 주는 당부

 

1) 행실을 선하게 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곳 주변은 엄청나게 많은 이교도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방인들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간 헤롯의 군사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조소거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보도 많이 누렸던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말씀의 기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나치게 많은 영적 양식으로 과식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적 진보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패 할 수 없고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저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꺼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 제가 사랑을 덜 받을지라도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2) 옳은 일에 장부가 되십시오.

 

낙심치 말고 강해지고 대장부가 되십시오.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겁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행동하십시오. 용감히 행동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모든 난제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더 나아가 여러분들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불평하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3) 혀를 주의하고 마음의 정결을 지키십시오.

 

여러분들의 아내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혼식 때 엄숙한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자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문을 굳게 지키도록 조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리하여 기도가 막히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둔 여성들은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이 되게 하여 정결치 못한 여자로 의혹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 영혼이 폭풍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하지 않고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폭풍은 우리를 순식간에 삼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심스럽게 항해하기 위해 나침반을 살펴보는 것처럼 믿음의 파선을 방지하고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말씀에 눈을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5)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오늘 듣고 있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병들었을 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취하실 때의 결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약속에 따라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비록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흠모하시기 바랍니다.

 

6)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은 유혹의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될 준비가 된 자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결코 헤어짐이 없는 그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데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필경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과 일에 있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그리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고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7) 입술로가 아니라 삶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심령을 주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면 크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을 포구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험한 파도와 고통의 순간들을 다 이기게 하시고 여기로 도달하게 하셨기 때문에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직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인들을 노래하며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른 모든 노래와 더불어 그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미국 서부에서

캐나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두 개의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워싱턴 주의

노쓰 캐스캐이즈(North Cascades NP)와

몬태나 주의 글래이셔 국립공원((Glacier NP)이지요.


두 국립공원이

캐나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만큼

미본토에서 최북단에 위치하는 국립공원입니다.


그래서

두 국립공원 모두

LA에서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글래이셔 국립공원은

빼어난 산세와 경관을 자랑하지만

LA에서 약 1,340 마일이나 떨어져 있어서

큰 맘먹지 않고서는 좀처럼 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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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이셔 국립공원은

캐나다의 재스퍼, 밴프, 요호를 품고있는

로키 마운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국립공원입니다.


글래이셔 국립공원은

캐나다 지역에도 걸쳐있는데


캐나다 지역의 이름은

워러턴 호수(Waterton Lake)국립공원이라 불리워집니다.


말하자면

글래이셔 국립공원은

미국과 캐나다 두 나라에 의해

동시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유일한 곳입니다.


그래서

글래이셔 국립공원과

워러턴 국립공원을 합쳐서

워러턴-글래이셔 국제 평화공원

(Waterton-Glacier International Peace Park)

이라는 비교적 긴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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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이셔 국립공원은 크게

웨스트 글래이셔(West Glacier),

이스트 글래이셔, 매니 글래이셔(Many Glacier),

그리고 세인트 메리(Saint Mary) 네 지역으로 나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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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역은 모두

커다란 호수를 하나씩 품고 있는데

웨스트 글래이셔는 맥따널 호수(Lake McDonald)를


이스트 글래이셔는

투 메디신(Two Medicine) 호수를,

세인트 메리는 세인트 메리 호수(St. Mary Lake)를


그리고 매니 글래이셔는

셔번 호수(Lake Sherburne)와

스위프트크런트(Swiftcurrent) 호수를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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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glacier)가 있는 산은

모두 많은 호수를 품고 있는데

그 이유는 빙하가 녹은 물이 호수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글래이셔 국립공원 또한

그 이름이 암시해 주듯이

수 많은 호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름을 가진 크고 작은 호수가 100개도 넘을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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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이셔 국립공원의 백미는

Going-to-the-Sun Road의 정점인

로건패스(Logan Pass)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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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투더 선로드는

웨스트 글래이셔와

St. 메리 호수를 이어주는 도로로서

주변 풍경이 매우 아름다운 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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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투더 선로드는

총길이 53마일(85km)로

1932년에 완성되었으며 1997년에

National Historic Landmarks로 지정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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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투더 선로드는

6월 중순 경에 open하여

10월 중순 경에 close 합니다.


날씩에 따라

open과 close 시기는

약간씩 당겨지거나 늦추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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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패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하이킹 코스는

왕복 2.8마일의 Hidden Lake Overlook입니다.


히든 호수를 바라보는 이 트레일은

여름철엔 온간 야생화로 뒤덮이는 환상적인 코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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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호수(Hidden Lake)까지 가려면

오버룩에서 편도 1.2마일을 더 내려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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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패스에서 갈 수 있는

또 다른 하이킹 명소는 Highline Trail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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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패스에서

그래닛 팍 섈리(Granite Park Chalet)까지

편도 7.6마일의 하이라인 트레일(Highline Trail)은

미국의 top 10 트레일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아주 유명한 트레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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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글래이셔의

맥따널 호수((Lake McDonald)는 웨스트 글래이셔의 중심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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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이셔 국립공원의

호수와 크릭(creek) 주변에는

알록달록한 자갈들로 널려져 있는데

맥따널 호수 또한 호숫가의 컬러풀한 자갈들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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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글래이셔에서

가장 인기있는 트레일은

애버랜치 호수 트레일(Avalanche Lake Trail)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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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랜치 호수까지 다녀오는

왕복 약 3.8 마일의 이 트레일은

애버랜치 고지Gorge)를 통과하는데

주변 풍광이 매우 수려하고 멋있을 뿐만 아니라


이 트레일의 종착지인

애버랜치 호수 또한 아름답기 그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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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랜치 호수의

물빛깔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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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글래이셔는

투 메디신(Two Medisine) 호수를 중심으로

캠핑과 하이킹과 보트 투어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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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메디신에는

큰 호수가 두 개 있는데

49번 갈림길 부근에 있는 호수는

Lower Two Medicine Lake 이며


LTML의 서쪽에 있는 호수는

그냥 Two Medicine Lake 이라 불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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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 호수(St. Mary Lake)은

이스트 글래이셔와 매니 글래이셔 사이에 있는

아주 매력적인 호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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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메리 호수(St. Mary Lake)은

이스트 글래이셔와 매니 글래이셔 사이에 있는

아주 매력적인 호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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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엔

글래이셔 국립공원의 트레일은

온통 야생화로 뒤덮여 야생화 천국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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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서도

로건 패스에서 히든 호수 가는 길은

천국같은 야생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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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이셔 국립공원의 심장은

매니 글래이셔(Many Glacier)라고 말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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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 글래이셔 호텔에서 바라보는

마운트 윌버(Mt. Wilbur)와 가든 월(Garden Wall)

그리고 그리넬 포인트(Grinell Point)의 풍경은 환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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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 글래이셔의

조저핀 호수(Lake Josephine)와

그리넬 호수(Grinell Lake)의 물색깔 또한 환상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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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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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이 너무 높아서

나무가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지역을

수목한계선(timberline 혹은 tree line)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식물이나 나무가

서식하는 지역에 따라


알파인(Alpine), 서브알파인

만테인(Montane), 풋힐(Foothill),

Plain 지역 등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를 Life Zones 라고 합니다.


물론 이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식물학자나 수목학자에 따라

용어와 명칭, 그리고 높이가 약간씩 달라집니다.


만테인 존(Montane Zone)은

Lower 만테인(해발 6,000-7,700ft)과

Upper 만테인(해발 8,000-9,000ft)으로 구분되는데


어퍼 만테인은 학자에 따라

하이 마운틴 지역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high mountain 지역은

해발 7,800ft - 10,000ft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그럴 경우

하이 마운틴 지역은

어퍼 만테인과 서브알파인(8,900ft - 11,000ft)을 포함합니다.


하이 마운틴 지역은

활엽수가 살기엔 너무 높은 지역이어서

주로 침엽수인 pine과 fir 종류의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죠.


유타의 5대 국립공원 가운데 하나인

브라이스 캐년은 평균 해발이 약 8,000ft가 넘습니다.


가장 유명한

브라이스 포인트만 해도

해발이 약 8,331ft(약 2,539m)입니다.


말하자면

Life Zones로 따지자면

브라이스 캐년은 하이 마운틴 지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브라이스 캐년에서 서식하는 나무들은

Douglas Firs, Ponderosa pine, Bristlecone pine 등이 주종을 이룹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브라이스 캐년에서 단풍나무를 보기란 쉽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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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브라이스 캐년에서

단풍나무를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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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포인트 지역에

몇 그루의 아스펜 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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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브라이스 캐년에서

계절적으로 가을이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는

바로 선셋 포인트의 몇 그루의 나무에서만 확인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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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들이

노란색, 혹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면

브라이스 캐년에도 가을이 찾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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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머지 않아서

이곳에도 겨울이 찾아올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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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강렬한 햇빛과

겨울의 은은한 빛에 비하면

가을의 빛은 부드럽고 온화한 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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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포인트와

센 라이즈 포인트를 연결하는 길에는

여왕의 정원 길(Queen's Garden Trail)과

나바호 트레일(Navajo Trail)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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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길은 무척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걷기에도 크게 어렵거나 힘들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길을 걸어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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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정원 길은

나바호 길보다 더 길어서

걷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 여유가 있다면

꼭 한 번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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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나바호 트레일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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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호 트레일은

월 스트리트(Wall Street)라고 하는

아무 멋지고 깊은 협곡처럼 보이는 길 아래로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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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여왕의 정원길로 연결된

나바호 트레일로 올라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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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반대로

여왕의 정원 길로 내려갔다가

월 스트리트를 통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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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여왕의 정원 길을 걷는

몇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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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웠으면

이름을 Queen's Garden Trail 이라고 지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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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에서의 일출은

사진작가에게나 일반 관광객에게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감흥을 안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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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의 일출은

떠오르는 해를 본다기 보다는


후두(Hoodoo)에 비취는 

빛을 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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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비췸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브라이스 캐년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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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의

아침 빛을 촬영하는 사진작가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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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의 일몰도

일출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볼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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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에서

가장 유명한 후두(Hoodoo)인

천둥의 신 토어스 해머(Thor's Hammer)에도

일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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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포인트의 일출도 멋있지만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직후에 촬영하면

노출이 거의 동일한 아름다운 사진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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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후에

브라이스 포인트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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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처럼

아름다운 브라이스 캐년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이 가을에

브라이스 캐년을 방문한다면

브라이스 캐년은 절대로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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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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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심스레 꺼내 놓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자질구레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별것 아닌 것들을
        지키려고 각자 마스크를 쓰고 살아갑니다.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 든 척하며
        살기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 안에는 별로 든 것이 없습니다.
        솔직히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 주면서 살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말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항상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이신 그분을 위해 사는 사람은
        상처 받을 겨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과연 당신은 누구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오늘하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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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팡이가 핀 '작은 빵 네 조각'
         
        (나치 강제수용소인)
        비르케나우에 있을 때 
        한 여자가 죽어가면서 내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곰팡이가 핀 작은 빵 
        네 조각을 주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내게 
        말했다. "먹어. 넌 젊잖아. 살아남아서 여기서 
        일어난 일을 증언해. 꼭 얘기해. 앞으로는 
        이런 일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게." 
        
        
        - 마그다 홀런데르-라퐁의《빵 네 조각이 전해준 살아갈 이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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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천주교가 성모교라는 그 증거들 (2)

       

      천주교를 알면 알아 갈수록
      이들을 과연 이웃 종교 내지는
      기독교의 한 분파라고 받아 들여야 하는가에 깊은 회의가 들며...
      로마 천주교가 아니라 로마 성모교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모님께서는
      <사제들>이 어떠한 거룩함을 지녀야 할것인가를 보여 주시는 <거울>이 되신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우리가 티없으신 <성모님>께 무슨 부탁을 드리면
      성모님께서는
      그것을 예수님께 바치시기 전에
      그것을 <모든 불순한 것>들로부터 <정화시켜> <깨끗하게> 만드신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

       

      <영성체>를 위한 가장 좋은 준비는
      <성모님과 함께하는 것>이다(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만약 당신이 마리아와 밀접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 거기에서 당신은 아드님의 성혈로써
      당신을 양육하시는 <성모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성 알베르또)

       

      성체성사께 대한 신심과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은
      단순히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
      이 신심들은 순결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성 필립 네리)

       

      "아드님이 왕이시면, 그분을 낳으신 어머니는
      마땅히 그리고 참으로 여왕이며 주인으로 간주되신다" (성 아타나시우스)

       

      <하느님께 봉사>하는 피조물들의 숫자만큼,
      <같은 숫자의 피조물들>이 <마리아께> 봉사한다.
      천사들과 인간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통치 하에 있듯이
      그들은 또한 <마리아의 통치 하>에 있다(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 "복되신 <동정녀>께서 천주의 <성자>를 당신 모태에 잉태하시고, <낳으셨을 때>,
      당신께서는 하느님의 <왕국의 반을 얻으셨으며>,
      <이로 인하여> 당신께서는 <자비의 여왕이 되신 것>이다. (성 토마스)

       

      "당신께서는 자비의 모후이시고 저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이오니,
      저는 당신의 자비가 가장 필요한 자이옵나이다.
      오 성모님, 어떻게 당신께서 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수 있겠나이까?"
      그러하오니, 오 자비의 모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맡아주소서>. ( 성 보나벤뚜라)

       

      왜 마리아는 자비의 모후인가?:
      "그것은 우리가 마리아께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께서 원하실 때마다,
      그리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느님의 자비의 심연(深淵)을 열어주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마리아께서> 그를 보호하시면 <멸망될 수 없다.>"(성 베르나르도).

       

      : "오 거룩하신 동정녀여!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연민이 그토록 크므로
      <아무리 크고> <많은 죄>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하나이다." (성 조르쥬)

       

      *****

      성인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는
      18세기 미친 무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리구오리의 신학은 여전히 천주교회에 남아 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요, <마리아는 자비로운 구세주>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단>이다.
      마리아는 모든 은총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은총은 마리아를 통해서 온다.

       

      아무도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으며>
      <우리의 구원>은 <마리아의 손에 달려있다>.

      마리아의 명령에 하느님까지 복종한다.

       

      마리아는 <전지전능한 분>이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같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하느님이 단죄하시더라도 <마리아가 원하면> 구원될 수있다"

      이것이 천주교, 아니 성모교의 실체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성령을 제한하는 예배?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 요즘 몇몇의 한국 교회 안에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는 표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물론 맞는 표현이다.  우리가 감히 뭔데 성령을 제한한단 말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의 의미를 남용하여 성경을 통해 전혀 검증될 수 없는 신비체험이나 전통 등을 예배에 도용하기 위하여 사용한다는 사실에 쓴 웃음이 지어진다. 나는 이러한 작금의 현실에 아파하는 한 예배자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한 비유를 통하여 조직신학적으로 나누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방법이 나눠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연주회의 구성요소: 연주회를 연상해 보자. 연주회에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 네 개가 있다: (1) 지휘자, (2) 악보, (3) 연주자, (4) 관객이다. 이 네 개의 요소는 연주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각각의 위치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1) 지휘자: 지휘자의 역할이 무엇일까? 지휘자는 음악회를 총괄적으로 바라보며 연주를 이끌어 간다. 독수리와 같은 눈으로 모든 구석 구석을 살피기도 하고, 음악의 강도와 빠르기등을 조절하면서 말이다.

      (2) 악보: 악보의 역할은 무엇을 연주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악보는 연주의 시종을 담고 있는 종이일 뿐 아니라 음악회의 이름을 결정하는 뼈대이기도 하다.

      (3) 연주자: 연주자의 역할은 말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반드시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악보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만약 연주자가 지휘를 무시하고 악보를 벗어나 연주한다면 연주회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연주자는 반드시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악보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4) 관객: 관객의 역할은 연주회를 즐김과 동시에 평가를 하는 것이다. 모든 음악회가 관객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2.예배의 구성요소: 이런 연주회의 구성요소가 예배에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 구성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예배의 지휘자: 예배의 지휘자가 누구일까? 담임 목사일까? 아니다.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님께서는 예배를 전체적으로 총괄하시며 지휘하신다. 뜨거움이 필요할 때에는 뜨겁게 지휘하시고, 차가움이 필요할 때에는 차갑게 지휘하시며 예배의 시종을 인도하신다.

      (2) 예배의 악보: 악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이다. 성경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악보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시금석이 된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연주하기 원한다면 이 악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 악보대로 연주되는 예배만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목사가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계시적이어야 한다”고 쓴 책을 읽었다. 나는 이 표현이 영지주의적 독법을 가능케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가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계시적이어야 한다” 고 말했다면 동의할 수 있었겠다. 그러나 “성경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계시적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많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키는 표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을 계시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은 성경이 곧 계시의 극치인 특별 계시라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부인하는 것으로 까지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의아해 하며 계속 읽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성경적인 것과 계시적인 것을 분리한 그는 성경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을 “초 성경적”인 것으로 분류하여 예배에 도용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곡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악보에 남이 멋대로 쓴 저급한 악보를 덧붙이려 한 것이다. 명심하자.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 66권 대로만 연주되는 예배만을 받으신다.

      (3) 예배의 연주자: 연주자는 누구일까? 모든 성도이다. 설교자나, 성가대나, 찬양 인도자들만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가 연주자이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는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성령님의 지휘를 따라 말씀대로만 예배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실 때에 그 영을 거부하고 기쁨의 찬양을 대신 부를 수 없다. 또한 말씀에 나와있지도 않은 현상이나 전통 등을 내 기분에 맞는다는 이유로 연주해서도 안 된다. 예배자는 반드시 성령의 지휘를 받아 기록된 말씀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예배자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순간 이단적인 예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쓰신 성경에 모순되게 예배를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성령 하나님을 빙자하여 성경과 모순되는 것들을 예배에 도용한다면 하나님의 속성(屬性)인 불변성(不變性)과 정직성(眞實性)을 부인하는 악랄한 자가 되어 마귀적 예배자가 된다.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

      (4) 예배의 관객: 그렇다면 관객은 누구일까? 성도일까?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은 예배를 구경하거나 관람(觀覽)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배의 유일하신 관객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하여 연주하는 자들이다. 설교자는 설교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청중들은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린다.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요, 청중들이 설교를 듣는다고 예배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같은 예배자로써 예배의 유일한 관객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하여 연주한다. 그러므로 “예배 보러 간다”는 한국 교인들의 발언을 “예배 드리러 간다”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언어학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옳은 게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뿐 아니라 평가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몇몇의 성도들은 예배당을 빠져나가며 “오늘 예배가 좋았어” 혹은 “오늘 예배는 별로 였어” 말하며 스스로가 예배의 관객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목사의 설교에 강약이 없었다고 예배가 별로였다고 생각하는가? 찬양단의 찬양에 당신이 좋아하는 곡이 없었기에 예배가 별로였다고 생각하는가? 오! 교만한 자들이여, 언제부터 당신들이 예배의 관객이 되었단 말인가? 설교자의 설교에 강약이 있던 없던, 찬양단의 찬양에 당신이 좋아하는 곡이 있던 없던 그 설교와 찬양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에 쓰인 내용대로 선포되고 연주된 것이라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상 진단: 요즘 “거룩한 웃음,” “금 이빨,” “성령주,” “장풍”등의 신비한 현상들이 단지 일어난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 무분별하게 들어오고 있다. 더 가슴 아픈 사실은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목사들이 “성령을 제한하는 목사”라는 딱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가 하는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라는 사고가 옳은 것인가? 이러한 생각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잘못된 유추의 오류, 흑백의 오류, 잘못된 인과 관계의 오류,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바로를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는 모세가 애굽에 내린 신비한 현상을 본 후 마음을 얼추 돌이켰다가 애굽의 술객들이 부린 신비한 현상을 보고 마음을 다시 강퍅하게 했다. 일어나는 모든 신비한 현상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을 분별하라고 말하는 게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깨어나라.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가 하는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라는 어수룩한 논법을 버리고,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 체험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검증되어야만 한다”는 논법을 붙잡으라. 그렇게 함으로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려져야만 하는 예배를 갈취하고 있는 마귀로부터 예배를 되 찾아야만 한다.

       

      맺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성령사역은 비판 받아야 하고, 말씀을 떠난 체험은 판단 받아 마땅하며, 말씀에 검증되지 못하는 경험은 버려져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함으로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가 한국 교회에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기를 전심으로 기도한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바람직하지 못한 이단연구는 무엇인가
      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 ③
      2015년 03월 07일 (토) 08:05:37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다음은 본인이 지난 2월 23일에 호주에서 모인 4차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세이연) 총회 시 이단연구가들 앞에서 한 강의다. 한국교계에는 이단 연구가들을 공격하여 먹고 사는 소위 ‘하이에나’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이 글을 이용하여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이단연구가들을 공격할 빌미를 찾아낼 것이라는 염려가 적지 않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글을 밝히는 것은 이 강의는 나를 반성하는 의미의 강의이며, 이단 연구가들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며,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 대하여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교계의 하이에나와 한국교회와 이단연구가들 몸에 붙은 기생충이 누구인지 밝혀질 것으로 보이며, 3회로 나누어서 게재하는 바이다.


      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3)

      최삼경 목사

      바람직하지 못한 이단연구는 무엇인가.

      1. 정직하지 않은 이단 연구가가 사라져야 한다.

         
      ▲ 최삼경 목사

      주관적인 참을 ‘진실’이라고 하고, 객관적인 참을 ‘진리’라고 한다. 우리는 진리를 향하여 가는 자들로 진실할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않은 자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두 개의 잣대를 쓰거나, 두 개의 저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고무줄 자를 써서는 안 된다. 고무줄 자로 하면, 로마의 한 신처럼, 누구나 짧다고 빼죽이고 길다고 잘라죽일 수 있게 된다.

      2. 부도덕한 이단 연구가도 사라져야 한다.

      성도로서도 여자 문제, 돈 문제에 깨끗해야 한다. 하물며 목회자로, 더욱이 남을 비판하는 이단연구가로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비난 받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혹 헌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고 하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와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함께 한 것처럼 모르고 헌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헌금한 자에게서 이단성이 발견되거나, 또 순수한 헌금이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지면 그를 공적으로 밝히고, 가차 없이 돈을 돌려줘야 한다.

      이단 연구가로서 심지어 한 사람이 검사의 기능과 변호사의 기능을 동시에 하여, 검사로 구형을 높이고 변호사로 수임료를 높이는 식의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빌어먹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도적질해서 먹는 것은 죄다. 성공하지 못할 두려움보다 성공한 후에 찾아올 교만과 타락을 더 두려워해야 하고, 밖에 있는 천만인의 원수보다 내 속에 있는 적은 한 가지 죄의 가능성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3. 극단적 이단 연구도 아주 위험하다.

      토마스 칼라일이 “마틴 루터는 어머니 마음을 가진 개혁자였다.”고 했다는 점을 듣고, 본인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자의 자세라고 보기 때문이다. 뮨쳐와 같은 과격한 개혁자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단과 손을 잡고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와 같은 자들이 많다고 안다. 또한 반대로 들이 댈 곳과 들이 대지 말아야 할 곳을 구별하지 못하고 칼을 들이대는 포악한 이단 연구가도 있다. 사울의 목을 치지 않는 다윗의 그 사랑과 인내는 이단 연구가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눈물로 기도하는 연구가가 되어야 한다. 늘 자신의 죄와 부족을 찾아야 하고,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 없는 이단 비판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단자만 죄인이 아니라 이단 연구가도 죄인이다.

      날카로운 송곳이나 칼 하나를 준비하고 여기저기 찌르는 재미에 취한 아이처럼 이단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 본인은 어렸을 때, 어쩌다 가진 면도칼 하나를 가지고 이것도 베어보고 저것도 베어보고 재미가 나서, 그 칼로 집 옆에 큰 나무 껍질을 돌아가며 다 벗겨 버린 일이 있다. 결국 그 나무는 죽었고, 나도 부모님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사악한 이단을 대처한다는 미명 하에, 자기 아집, 자기 고집, 자기 편견, 자기 욕심, 자기 교만 등을 숨겨 합리화하려고 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분들은 부정적 도구로 사용되는 분들로서 긍정적으로 보면 쓸모없는 무용한 사람들이다. 이단을 공격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그 많은 약점들을 그곳에 숨기는 그 악은 이단자의 악보다 더 적다고 할 수 없다.

      한 평신도 이단연구가는 전천년설도 이단이고, 무천년설도 이단이라고 하고, 어떤 분처럼 방언 자체를 다 마귀의 사역으로 공격하고, 반대로 방언을 못하면 구원도 받지 못한 것처럼 하는 것은 다 극단론이다. 이는 모든 신비적 현상 자체를 모두 사탄 마귀로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단연구가는 누구보다 부드러워야 한다. 속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이단 연구는 위험하다. 이단이나 사이비에게 ‘회개하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한다고 해도 가짜로 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가지는 것은 내 말이 맞는 것이 증명되기 위하여 회개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마약 환자는 갈수록 강하게 약을 먹어야 하듯, 갈수록 더 강하고 더 동정심 없는 이단 정죄에 익숙해져가는 이단 연구를 삼가야 한다. 포르테보다 피아니시모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진리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며, 신의로 진리를 그르치지도 않아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진리란 이름으로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기 쉽고, 자유자들은 신의를 앞세워 진리를 그르치기 쉽다. 물론 이 둘 중에 진리가 앞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믿음도 신의이다. 이단 연구는 보수주의자들이 한다는 점에서 이단연구가들이 이단연구가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개는 주인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논리라도 쉽게 배신한다. 이단연구가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 아무나 쉽게 비판하고 아무나 쉽게 정죄하기 익숙해져 있는 이단 연구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4. 소영웅주의적인 이단 연구가도 사라져야 한다.

      우리 인간은 다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오차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영웅심이 있다. 욕심과 사명이, 애국과 정권욕이 함께 꼬여 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오차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강단에서 망나니 칼춤 추듯 행동을 하는 자도 있고, 이단연구란 이름으로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는 사람도 있다. 본인은 이들을 ‘막가파 이단연구가’라고 부르겠다.

      누구보다 더 고상하고, 누구보다 더 인격적이고, 누구보다 품위 있는 사람이 이단연구가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인격과 학문성과 영성을 요구하는 행위가 이단연구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단 연구는 일반 목회자의 수준과 신학적 수준을 넘어서는 최상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 일이 없어서 이단연구나 하고, 인격적 결함과 정서적 결함을 가진 자가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유치원생이 대법관을 하는 것과 같다.


      결론 : 이단 연구자들의 하늘 상급이 클 것을 믿는다.

      목회의 고통은 목회자만 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목회다. 그러나 이단 연구의 어려움은 그보다 더 하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서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을 믿는다. 단 정직한 이단 연구에 한하여 그렇다. 십자가를 아는 자가 적고, 십자가를 지는 자는 그보다 더 적고, 십자가를 지고 기뻐하는 자는 그보다 더 적다. 이단 연구의 길은 십자가 중에 십자가이다. 그 고통과 어려움을 이단이나 정통교회에 화풀이를 하듯 하지 말고, 그 고난과 고통을 기뻐하는 이단 연구가가 되기 바란다.

      본인은 이단 문제를 거울로 삼아서 볼 때 한국교회가 가장 잘 보인다고 자부한다. 그런 점에서 내 죄가 교회의 죄가 되었고, 교회의 죄가 민족의 죄가 된 것 같아 눈물로 회개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아파서 견딜 수 없다. 이제 눈물도 말라간다.

      솔로몬 앞에 두 여자가 있었다. 하나는 가짜 어머니요, 하나는 진짜 어머니다. 진짜 어머니는 내 아들인데 아니라며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하였고, 가짜 어머니는 찢어서 갖자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앞에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가? 아들을 살리려고 자기 아들을 포기하는 진짜 어머니가 누구일까? 한국교회와 이 민족 앞에 진짜 어머니를 찾기 어려운 것이 교회와 민족의 위기요 비극이다. 이단연구가들은 교회를 위하여 내 이익은 물론 내 사상, 내 교파, 내 자존심까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진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도 존귀한 이단 연구가가 되기를 눈물로 호소하며 강의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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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각속에 사는 사람들~

      웃음의 파노라마.


      남자들 ~
      못 생긴 여자는 꼬시기 쉬운 줄 안다.


      여자들 ~
      남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되면

      관심 있어 따라 오는 줄 안다.



      꼬마들 ~
      울고 떼쓰면 다 되는 줄 안다.


      엄마들 ~
      자식이 공부만 잘 하면 다 되는 줄 안다.
      자기 애는 머리는 좋은데, 열심히 안 해서

      공부 못 하는 줄 안다.


      대학생들 ~
      철 다 든 줄 안다. 대학만 졸업하면

      앞날이 확 필 줄 안다.



      부모 ~
      자식들이 나이 들면 효도할 줄 안다.



      육군 병장 ~
      지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줄 안다.



      아가씨들 ~
      자기들은 절대 아줌마가 안 될 줄 안다.



      아줌마 ~
      화장하면 다른 사람 눈에 예뻐 보이는 줄 안다.



      연애하는 남녀 ~
      결혼만 하면 깨가 쏟아질 줄 안다.


      시어머니 ~
      아들이 결혼하고도 부인보다

      자기를 먼저 챙길 줄 안다.



      장인 장모 ~
      사위들은 처가집 재산에 관심 없는 줄 안다.



      회사 사장 ~
      종업원들은 쪼으면 다 잘 열심히 일하는 줄 안다.


      골퍼 ~
      멀리간 퍼팅도 OK받고, 긴 퍼팅도 OK받고,

      첫 홀 자동 보기로 적은 스코아가

      자기 진짜 실력인 줄 안다.



      아내 ~
      자기 남편은 젊고 예쁜 여자에 관심 없는 줄 안다.
      남편이 회사에서 적당히 해도

      안 짤리고 진급 되는 줄 안다.



      남편 ~
      살림하는 여자들은 집에서 노는 줄 안다.
      돈 버느라 고생하는 남편이 불쌍해서 아침상에 반찬

      신경쓰면 자기가 제일 잘하는 줄 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
      자기는 안 그런 줄 안다.
      자기만 고상하고 품위 있는 줄 안다.



      웃으면 복이와요.^^

      웃으면서 삽시다.^^
      오늘도 웃는 하루 되세요.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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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사모님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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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로 갈라지는 가인族과 아벨族   창4:1-7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온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말씀 받기 전에 먼저 ‘같이 은혜 받읍시다.’ 옆 사람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장은 똑 같은 한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출생했으나 하나는 의인이 되어 하늘에 영원히 빛나는 스타가 되는 인물이 되었고, 하나는 무서운 심판을 받고 멸망 받을 대표자 모델로 갈라진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한 이유가 무엇 인가? 를 살펴보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다 아벨에 속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하셨던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왜 창조하셨다고 했지요? 이제는 대답이 술~ 술~ 나와야 될 때가 되었는데 창세기 1장 26절, 27절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하려고요? 다스리도록.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억만 하실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믿으시고 나 같은 못된 자, 못난 자에게 그렇게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창조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창세기 2장 3장에서는 아담을 돕기 위해 지은 배필인 여자 하와가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치 않고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제 마음대로 믿다가 망한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님께서 그런 인생들을 버려두지 않고 옛날 에덴동산 축복의 자리로 회복될 수 있는 길과 방법을 알려주신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3장 15절 말씀을 한 번 볼까요. 주보에다도 써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여자를 유혹한 뱀 마귀에게 하신 말씀인데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란 말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단마귀를 제압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란 약속인 것입니다.
      3장 21절도 읽어봅시다.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 이 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입어서는 죄악의 수치를 가릴 수 없기에 짐승의 가죽, 곧 양을 죽이고 양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어야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차 어린양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범죄한 인생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임을 예표적으로 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그 한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똑같이 듣고 아버지가 하는 것을 똑 같이 보았어도 가인이란 자식과 아벨이란 자식이 갈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악한 자 마귀에 속하여 세상 것만을 추구하다가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의 시조가 되었고, 아벨은 하나님을 경외하다가 순교하여 의인의 반열에 들어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쓸 위대한 신앙인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무엇이? 이 둘을 이렇게 갈라놨을까요? 신체적인 차이 때문일까요? 한 부모에게서 나왔잖아요? 학벌이나 직업일까요? 얼마나 가졌느냐 일까요.  최초에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그런 차별이 전혀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럼 무엇이 이 둘을 갈라지게 했을까요?

      첫째는 누구에게 속한 자인가 가 둘로 나뉘게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요?) 누구에 속했느냐?
      성경은 하나님에게 속했느냐? 악한 마귀에게 속했는가? 가 영생이냐 영벌이냐를 나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요한 일서 3장 12절 신약성경 390페이지를 찾아봅시다.  요한일서 3장 12절 찾았으면 읽어봅시다.

      [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누구에게 속했다고요? 악한 자.  
      3장 10절을 읽읍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창세기 4장으로 돌아갑시다. 6절부터 읽읍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고 죄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경고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죽여 버리고 최초의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악한 자에게 속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악한 자에게 속하면 그 누구든 영원히 저주받을 길로 가는 것임을 분명하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사 곧 예배를 인해 갈라지는 것입니다. (뭐로 인해 갈라진다고요?) 예배로 인해 . (따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누구에게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신약시대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구약에서는 제사란 형식으로 드려졌습니다.  신구약 차이는 있지만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대 과거 우리 조상들은 누구에게 제사를 드렸어요? 조상에게, 용왕에게 산신령, 땅의 지신에게 드렸습니다.  지금 미국 같은 나라에는 사단에게 경배하는 사단교가 있어요.  성부, 성자, 성령 삼위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것은 다 귀신들에게 한다고 성경 고린도 전서 10장 20절에 말하고 있어요.    

      자신을 창조해주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거짓 것이라 우상에게 예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멸망의 길로 갑니다. 다 지옥에 가 형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만 예배하여야 될 터인데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겸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앞에서 말한 고린도 전서 10장 20절을 펴보세요. 신약 275페이지.  시작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누구에게 하는 것이라고요)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너희가 주의 잔과 누구의 잔을?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을 겸하여 참예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안 된다는 말은 그래서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탈락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겸하여 섬기다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10장 11절에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면서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추구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야고보 선생님께서는 야고보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우상은 세상이요, 황금만능이 우상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면 높여주시고 필요한 것을 주실 터인데도 믿지 않고 부귀 권세만을 찾다가는 망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누구만 따르고 경배해야 합니까?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됩니다.  
      ♪ 주 우리 하나님 하늘에 계시니  온 천하 만민 주 앞에 찬송하네.    이 천지 만물도 주 앞에 엎드려 그 거룩하신 이름을 늘 높이네

      여러분,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을 보면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근거로 여러 가지 추정들을 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타당성이 있는 주장은 아벨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가인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입장을 지지합니다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뭐라고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예배를 드려야.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실 마음과 진정 성을 가지고 드려야 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구약시대 제사는 여러 가지 절기와 형편에 따라 다르게 드려야 한다고 레위기란 성경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딱 한 구절로 아주 간단명료하게 알려주신 것을 요한복음 4장24절에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같이 한 번 해볼까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시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기에 예배하는 자는 자신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이신 진리와 부합되는 예배를 드려야 받지, 그렇지 않고 외식적이고 말씀을 떠나 무모한 열정만을 가지고 예배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합당한 예물과 정성을 가지고 드려야지 어쩔 수 없이, 혹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혹은 자기만족을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열납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창세기 4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4-5절 시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은 아벨의 마음과 예물을 받으셨다는 것이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은 가인이 드린 제물이 나빠서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인이 악한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드렸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예배할 때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중심을 다해 예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도 하나님께 속한 자냐? 세상에 악한 자에게 속한 자냐? 따라서 두 길로 나뉘고, 예배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올 때 미련한 처녀까지 데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슬기롭고 정결한 처녀신부후보생 알곡 성도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우리들은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 群에 속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벨 群에 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자신이나 혹은 가족이 가인 군에 속했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잘못된 것을 알고 가인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해야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볼 말씀은  동생을 죽여 놓고서도 뻔뻔한 가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봅시다. 13절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 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이렇게 오래 참으시며 표까지를 주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면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3장까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창조하셨는가? 불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어떻게 해야 에덴동산의 축복을 회복할 수 있는가? 4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배하는 삶을 산 아벨이란 계열이 있고, 악한 자에게 속해 제 맘대로 제사를 드리고 시기심으로 동생까지를 죽이는 가인이란 계열로 나눠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정하신 끝의 때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벨처럼 믿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마음과 양의 첫 새끼를 드리는 정신을 가지고 예물을 드리며 예배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리해야 될 줄 믿습니다.

      충처: USA 아멘넷 게시판/김정한 목사

      제국주의-3 (대영제국의 흥망)

       

      C. 대영제국의 흥망 

      로마제국에 이어 17~19세기에 결쳐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던 대영제국의 흥망사는 이 시대에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현재 세계 유일의 초 강대국인 미국도 대영제국의 전철을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영제국이 지나친 군비와 산업경쟁력 약화, 잦은 전쟁 등으로 국력이 쇠약해졌듯이 미국 또한 그러합니다.
      원래 영국은 잉글랜드만을 가르키는데 17세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통합하면서 브리튼(Britain)이 됩니다.

       

      * 목차

      1. 대영제국의 개관

      2.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페인 무적함대

      3. 대영제국의 위기

      4. 대영제국의 수치 - 보어 전쟁

      5. 미국의 도전

      6. 대영제국 몰락의 내부적 원인

      7. 영국의 대참사 - 1차 세계대전 (1914~1918)

      8. 아라비아의 로렌스

      9. 잠에서 깨어난 식민지들

      10. 대영제국의 말로 - 2차 세계대전

      11. 대영제국의 종말 - 인도에서의 퇴진과 수에즈 운하 사건

       

       

      1. 대영제국의 개관

      대영제국은 한 때 세계 육지 면적의 1/4, 세계 인구의 1/6을 지배하였으며, 세계 산업과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럽의 외딴 섬에 있는 혼열민족(이베리안, 켈트, 앨글로 색슨, 데인, 노르만 등)이 장기간에 걸쳐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 학문 등을 주도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영국은 16세기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18세기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럽의 강자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1899~1902)으로 제국주의의 자성론이 일었고, 1,2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을
      거의 소모하였으며, 미국과의 수에즈 운하 분쟁(1956)으로 제국주의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영국은 17세기 이후 200년에 걸쳐 서서히 융성하였다가 절정에 올랐고, 다시 200년에 걸쳐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는데, 19세기가 대영제국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은 제국 초창기에는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중상주의적인 팽창을 했고, 제국 중반기인 19세기에는
      강한 산업 경쟁력으로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번영기를 가졌으며, 제국 말기에는 독일, 프랑스 등과 과잉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다가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를 실행해 필연적으로 세계전쟁을 유발하였습니다.
      영국의 힘을 지탱한 것은 막강한 해군력, 거대한 공업 생산력, 광대한 식민지, 금융 보험 해운의 발달 등입니다.

      대영제국이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은 1,2차 세계대전때문인데 전쟁기간동안 국민소득의 60% 이상을 전비로 쏟아
      부었고, 영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945년 영국의 부채는 33억 6천만 파운드에 달했고, 11억 2천만 파운드에 상당하는 영국의 해외자산이 매각되어
      중동의 석유 이권 등 해외자산을 미국 기업에 헐값에 넘겼습니다.

      과도한 군비지출이 강대국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전 단원에서도 지적한 바 있는데, 영국이 오랫동안
      제국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이 전성기인 19세기에도 국민생산의 2%만 군사비로 지출했다는 점입니다.
      영국이 이렇게 적은 군사비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란 외교정책을 썼기
      때문인데, 세력균형 정책은 한 나라가 강대해지면 다른 경쟁 국가가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도모하는 정책입니다.

       

       

      2.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도 한 때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1558년)하기 전에 영국은 유럽에 남은 최후의 영토인 칼레를 상실하고 섬나라로 고립�습니다.
      그러나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공회 수장이 되었고, 세심한 국정과 세련된 외교로 나라를 일으킵니다.
      엘리자베스와 재상 세실은 즉위 다름 해 스코틀랜드를 점령해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하여 스코틀랜드를 통합하였습니다.

      1567년 스페인 정예 육군 5만명이 명장 알바 공작의 인솔 하에 네델란드 프로테스탄트들의 반 스페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건너편인 네델란드에 진주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네델란드를 스페인군이 점령하고, 그 곳이 영국 켄트 주의 해안까지 불과 48km밖에
      안된다는 것은 영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에 영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네델란드의 반군을 지원하며, 해적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의 보급을 방해하는 등의
      간접적인 전략을 사용합니다.
      결국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참모들의 치밀한 준비와 지도 끝에 130척의 함선과 3만명의 군사를 동원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이룬 것은 다름 아닌 풍부한 학식과 차분한 인품을 갖춘 엘리트들인데 이들은 폭 넓은 정보수집과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약점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엘리트가 배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영국의 귀족제도, 옥스퍼드 대학 같은 우수한 교육
      시스템, 인격을 중시하는 영국의 신사(Gentleman) 정신 등이 있습니다.

       

       

      3. 대영제국의 위기

      영국은 19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1850년부터 1879년까지 영국의 대외무역은 3배나 신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선박이나 철도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북미와 동유럽의 농산물이 싸게 들어와 영국 내 농산물
      생산은 저하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해외 투자가 급증해 영국의 경제적 불안감이 높아졌습니다.

      1820년대까지 보호무역을 시행했던 영국은 경제패권을 확립하여 공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자 해외 시장확보를
      위해 자유무역의 기치를 들고 외국에 시장개방을 요구하였습니다.
      자유무역은 영국은 공업은 발전시켰지만, 농업시장의 개방으로 대량의 식량 수입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무역적자가 일어났습니다.

      19세기 말의 20년 동안 세계를 덮은 경제불황은 각 국을 보호무역주의로 몰아 넣었고, 면제품 등 영국의 수출은 대폭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영국은 경쟁력이 저하된 자국 산업의 유지를 위해 식민국가와 경제 블록화를 형성했고, 개방적 블록으로서의
      대영제국의 세력권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노력은 제국의 과잉 확대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의 군사적 개입에 따른 비용이 증가되었고,
      고전적인 제국의 피폐로 연결되었습니다.
      영국의 팽창주의는 세계적인 '대경쟁의 시대'를 격화시켜 선진국과 후발 공업국과의 마찰을 빚었고, 식민지에 대한
      무리한 억압은 식민 지배에 대한 도덕성과 명분의 상실을 가져 왔습니다.

       

       

      4. 대영제국의 수치 - 보어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도 하는 보어전쟁은 1899~1902년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이 벌인 전쟁입니다.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시켰고, 그 북방에는 네덜란드인의 자손인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예자유국이 있었다. 1867년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강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지배권 확립을 기도하여, 많은 영국인을 이 지방으로 옮겨 들어가게 하였다. 따라서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마찰이 생겨, 1881∼84년 제1차 전쟁이 일어났다. 그 후 트란스발은 영국과 대항하기 위하여, 오렌예자유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1899년 10월 마침내 양측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1900년 6월 영국군은 트란스발에 침입, 점령하고 9월 트란스발공화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오렌예자유국도 전쟁이 개시되자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나, 2월 영국군은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5월에 오렌예자유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연합보어군은 그 후 2년 동안 게릴라전을 전개, 반항을 계속하여 영국군을 괴롭혔으며 두 나라의 대부분을 다시 해방시키고, 영국령까지 진격하여 들어갔다. 이에 영국은 철저한 전멸전법을 취하여, 인구 50만 명에 총동원 병력 약 7만 보어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45만 군인을 동원하여 보어인의 전답 ·가옥을 불사르고, 21만의 비전투원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 집어 넣었다. 이 강제수용소의 설비 ·대우는 최악의 상태로서 총 약 2만의 사망자를 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민족전멸의 위기에 봉착하자, 1902년 마침내 보어인은 영국에 굴복하고, 영국은 두 나라를 영국령 식민지로 함으로써 남아프리카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희생도 매우 컸다.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고, 국제적으로도 ‘영광의 고립’ 정책을 버려야 하였다. 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고조되어 자유당의 로이드조지는 이때에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론자로 활동했으며, 노동당 결성이 촉진되었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도 보어인의 생활부흥을 위하여 30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내주어야 하였고, 그들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두산 백과사전>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끌어 모은 50만 대군으로 총력전을 펼치고도 3만5천명의 보어군과
      오랫동안 접전을 벌렸고, 야만적인 민간인 학대는 국제적인 비난과 제국주의에 대한 영국내 자성론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명분도 없었고, 단지 남의 나라에서 발견된 금광이 탐이 나서 침략전쟁을 벌인 것은 영국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었고, 대영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전초적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세실 로즈 일파가 영국인 중에서 범법집단을 군사적으로 조직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을 침공해
      정부를 타도하고 금광의 지배를 꾀한 제국주의적 음모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3일만에 보어 정부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영국 제국주의'라는 오명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899년 10월 보어전쟁의 개전과 함께 영국은 불러 대장의 지휘 하에 3개 사단 8만명의 병력을 남아프리카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의 두배 이상 되는 병력입니다.
      20세기 들어 첫 전쟁인 보어전쟁은 공교롭게도 미국이 사상 처음 패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게릴라전이었는데
      보어군의 용감한 반격과 매복공격에 의한 영국군의 패배는 영국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영국 육군 최고의 명장이었던 불러는 경질되었고, 수 많은 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70세의 로버츠 원수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지휘는 49세의 참모장인 키치너가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는 거대한 조직에 의한 '기계 전쟁'을 위해
      총동을 체제를 지휘하였습니다.

      키츠너는 조직화된 병력의 집중 배치와 계통적인 보급체계를 중시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정면돌파를 실시하는
      세계대전형 군인이었는데, 훗날 1차대전에서는 징병제를 도입해 거대육군을 창설하고 총력전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1차대전의 솜 전투나 파센텔의 대량전사라는 결과로 연결되고, 영국군의 궤멸적인 손실을
      초래하게 된 전략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영국군은 보어군에 대한 민중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농촌의 부녀자들을 일정한 공간에 한사람씩 수용하는
      콘센트레이션 캠프(concentration camp)에 강제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 엘리트 중 양식 있는 사람들의 커다란 환멸과 반발을 일으켜 '제국의 이상'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게 하였으며,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체임벌린과 세실 로즈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전 세계로부터
      거대한 증오를 사고 있습니다. 저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불 태워 죽인 이래 이만큼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지른 적인 없다고 확신합니다.

      부도덕한 전쟁에 대해 전쟁을 찬동하는 측은 좋든 싫든 우리 조국의 전쟁이라는 '애국주의'와 배타적 맹목적 광신적
      애국주의이자 대외 강경론인 '징고이즘'(jingoism), 인류 평등을 위한 전쟁이라는 호전론(好戰論) 등으로 옹호하였습니다.
      양자간의 격렬한 논쟁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엘리트 가운데서도 친구 가족 사제 간에도 분열을 일으켜 '양심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게 됨으로 영국인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균열은 자유당의 붕괴와 노동당의 대두라는 20세기 영국 정치사의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고, 지식인들 가운데
      냉소주의를 심었으며, 이 후 스패인 내전과 수에즈 전쟁에서의 국론 분열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보어 전쟁은 영국군 5만명의 사상자와 보어군의 4천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 2만명의 부녀자가
      희생되었고, 2억 3천만 파운드(1900년 국민 총소득은 17억 5천만 파운드)의 전비를 들인 끝에 3년만에 끝이 났습니다.

      역사가 테일러는 보어 전쟁의 결과 보어인의 독립이 무산된 것 이상으로 영국인의 '제국에의 신념'에 대한 정신적인
      권위가 실추된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제국 지배에 대한 정당성이나 도덕적 확신을 흔들리게 하였고, 국민의 정신적 활력의 쇠퇴를
      가져와 제국의 종말을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에 이은 20세기 영국의 쇠퇴기인 에드워드
      7세의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Age)는 근엄했던 빅토리아와 방탕했던 에드워드의 성격만큼이나 극명하게 다릅니다.
      중후하고 성실하며 확신에 찬 빅토리아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무책임하고 허무주의적이며 향락적인 에드워드 시대는
      '마음의 상처'와 '자기 확신의 상실'을 초래한 보어전쟁으로 기점으로 갈리기도 합니다.

       

       

      5. 미국의 도전

      영국은 1763년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의 승리로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 세력을 일소하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앵글로
      색슨의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러부터 20년만에 미국과의 독립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북미에서 지위를 잃어 버렸고, 영국인들은 심한
      배신감을 맛 보아야만 했습니다.

      새로 태어난 미국 공화국은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였으며, 이후로 1세기 동안 영국과 대립과 마찰을
      빗었습니다.
      1820년대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가 독립 움직임을 보일 때 프랑스가 개입하려 하자 영국은 미국에 '아메리카에 유럽의
      개입을 허용하지 말자'는 성명을 공동 발표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영국을 빼돌린 채 먼로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캐나다 국경문제, 파나마 운하 구상, 영해군의 전시 봉쇄권 등을 놓고 대립했는데, 미국은 영국과의
      힘의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굴복하지는 않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영국은 1861년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에 남부의 편을 들어 참전함으로써 미국을 분할하거나 미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30년만에 공업생산과 무역액이 두 배로 증가될 정도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인구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서부 개척이 끝나자 미국은 해외에 눈을 돌려 1890년부터 불과 10년만에 세계 3위의 해군국이 될 정도로 성장해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였습니다.

      1895년 미국이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영국령 기아나의 국경분쟁 때에 먼로 선언을 내세워 자신의 강제적 중재권을
      인정해 줄 것을 영국에 요청하였으나 영국이 이를 일축함으로써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같은 앵글로 색슨족끼리의 충돌을 꺼려 1901년 파나마 운하를 미국에게 넘겼고, 알래스카 국경 문제를
      미국에 양보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영국에 당시 급격히 성장하는 독일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 세계 각지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켜 유럽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프랑스나 러시아, 미국에 대해 양보해 협상을 맺는 외교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포위망을 벗어나려는 독일과는 계속 충돌을 빗어, 1905년 탕헤르 사건(1차 모르코 사건)과 1911년
      아가디르 사건(2차 모르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영국은 독일의 위협을 과대 평가하고 독일과의 공존 가능성을 포기하고 억지와 봉쇄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1차세계대전
      이란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대국의 포용력을 잃어버리고 조급하게 대응했는데, 영국이 미국에게 양보한 것의 절반만 독일에게 양보했더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차대전으로 영국의 국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미국으로부터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채무국으로 전락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영국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다 가지려고 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과 '쥐도 코너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는
      값 비싼 교훈만 얻게 됩니다.

       

       

      6. 대영제국 몰락의 내부적 원인

      당시에도 현재와 같은 자유무역으로 각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영국은 신흥 공업국에 대한 가격과 품질의 우위를
      점점 잃어 버리고 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기업가들은 해외에 공장을 세워 투자하거나 금융산업에 집중했는데, 이는 영국의 산업 공동화와 무역적자,
      인력의 유출과 교육수준의 저하 등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에 일부 개혁파들이 제조업의 기반유지와 관세수입에 의한 재원확보를 위해 보호무역을 주창하였으나,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보수파에 밀려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영국은 독일을 견제할 거대육군을 창설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었고, 필연적으로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하는 삼국협상을
      맺었는데, 이는 오히려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거대 토지를 소유한 귀족 중심의 사회였는데, 사회개혁을 위한 재원 조달을 위해서는 세제(稅制)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토지 귀족이 스스로 개혁을 이루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로써 사회 활력의 고갈, 자유무역을 둘러싼 대립, 그리고 부족한 재원이라는 세가지 장벽이 대영제국의 개혁을
      좌절시키게 됩니다.

      1906년 구성된 자유당 내각에서 보어전쟁의 반대와 복지사회의 이상을 부르짖었던 로이드 조지가 재무장관에 취임해
      1910년 '민중 예산'(peoples budget)에 의한 사회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개혁' 노선은 1차세계대전과 그것이 몰고온 여파에 의해 난파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맙니다.

       

       

      7. 영국의 대참사 - 1차 세계대전 (1914~1918)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군인의 전사자는 무려 90만명으로 2차 세계대전 전사자 40만명의 두배가 넘습니다.
      독일 또한 1차 대전 때 180만명과 2차 대전 때 350만명의 전사자를 낳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탈진시켰고, 비인간적인 작전은 영국인들에게 전쟁에 대한 환멸을 가져왔습니다.
      참호전으로 대표되는 1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가장 비참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독일의 강대국화와 해외진출을 대영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이고
      군사 외교 경제적 수단을 통한 억제와 압박으로 독일을 유럽 안으로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1914년 8월 거대한 독일 육군이 성난 파도처럼 벨기에를 지나 파리로 쇄도했지만 9월 4일 프랑스가 파리 근교 마른
      강가에서 반격에 성공하여 간신히 프랑스를 지켜내었고, 전선은 프랑스 내에서 고착되었습니다.

      전쟁은 철조망과 참호로 대치한 지루한 참호전이었고, 공격하는 쪽은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방어하는 쪽은 포탄 세례를
      받으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독일 측으로 참전하자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했는데, 적의
      집중 포화를 받아 그 곳에서만 20만명이 사상했습니다.

      유럽 전장의 교착 상태를 뚫기 위해 영국은 1916년 6월 솜 전투에서 25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공세를 펼쳤는데,
      수십만명의 보병이 광대한 적진을 향해 일제히 돌진한 무모한 전술은 첫날 7만명의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영국은 3개월 동안의 솜 전투에서 50만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대부분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지원병이었고,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출전한 사람의 1/3이 집에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8. 아라비아의 로렌스

      1차 세계대전 후에도 영국은 모든 식민지를 유지하고 독일 식민지까지 취합함으로써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속으로는
      인적, 재정적, 정신적으로 골병이 들었습니다.
      영국의 젊은이들은 제국의 이상에 환멸을 느꼈고, 1925년의 총파업을 비롯해 상습적인 노사분규에 시달렸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문명에 의한 세계지배라는 대영제국의 명분을 흔들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석유수요가 높아겼기 때문에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중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솜전투의 실패 등으로 좌절을 맛 보았던 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영국 앨런비 장군이 지휘하는 중동 파견군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투르크군을 추격하여 십자군이 철수한지 700년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습니다.

       

      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로도 유명한 토머스 애드워드 로렌스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고고학자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카이로 주둔 육군 정보부의 정보장교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 통치 하에 있던 아랍인들을 메카의 족장인 하시미테 가(家)의 후사인을 중심으로
      결집시켜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도록 공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1916년 연락장교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헤자즈 지방에 파견된 로렌스는 그곳에서 후사인의 아들 파이살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로렌스는 파이살과 협력하여 투르크군에 대항하는 아랍-베두인군의 사막 유격전을 지휘하게 되었고, 50기의 베두인
      낙타 부대를 이끌고 죽음의 네프트 사막을 기적적으로 건너 난공불락의 요충항인 아카바 요새 기습에 성공합니다.

      그 후 로렌스의 아랍 군단은 수에즈 운하에서 가자로 진출하여, 아라비아의 정규군 우익과 합류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수복에 성공합니다.
      영국은 이미 메카의 족장 후사인과 만일 아랍인이 영국군과 협력해 투르크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아랍인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해 주겠다는 밀약을 맺은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한편 프랑스와 아랍인 지역을 분할하기로 밀약한 상태였는데, 이를 안 로렌스는 도리상 중동지역을
      아랍인들에게 돌려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아랍의 기병군단을 재촉하여 사라센 제국의 수도이자 아랍의 상징적 도시인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낙타와 말로 구성된 로렌스의 부대는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니는 영국군을 앞지르기 위해 투르크 군의 저항이 적은
      시리아 사막을 횡단해 영국군보다 하루 먼저 다마스커스 입성에 성공합니다.
      대영제국의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에 맞서 영국의 신의와 도덕을 지키고 아랍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원했던 로렌스의
      작은 반란으로 인해 사람들은 로렌스를 이상주의자로 기억합니다.

      로렌스의 아랍 군단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 위해 시리아 사막을 달리고 있을 때 로이드 조지 내각의 외무장관인
      벨푸어는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후에 벨푸어 선언이라고 불리게 된 이 약속은 영국과 미국의 유럭한 유대인 금융가로부터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자금을 순조롭게 조달 받기 위한 것입니다.

      중동의 석유와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기 위해 벨푸어는 아랍에 독립국가 건설을 원치 않았고, 유대인 국가 건설이
      제국의 유지라는 영국의 전 후 구상에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은 아랍 통일국가를 약속한 맥마흔 편지, 프랑스와 중동 분할을 약속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이라는 서로 모순된 세가지 약속을 한 채 1차 세계대전을 끝냅니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벨푸어와 처칠 그리고 권력의 사제로 변신한 로이드 조지 등의 제국 유지에 대한 집념에서 나온 것으로
      서로 모순된 것을 뒤섞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주도권을 쥐는 앵글로 색슨의 행동양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도덕으로 지탱되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영제국과는 다른 제국 정신의 명백한 후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현재 중동지역 지도

      1919년 인도에서 출정한 10만명의 영국-인도군은 페르시아만의 쿠웨이트에 상륙해서 이라크 평원을 북상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다시 북상하여 키르크크와 모술의 유전지대를 확보함으로써 페르시아만과 이라크 전역을 확보하였습니다.
      로렌스는 제국의 야욕에 환멸을 느끼고 영국으로 귀국하여 옥스퍼드 대학의 고고학 연구원으로 돌아 갔지만 전장을
      누볐던 로렌스는 적응하지 못하였고, 국가에서 주는 훈장도 거부한 채 살다가 1935년 오토바이 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1919년 4월 벨푸어 선언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이주가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80년 이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분쟁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지키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려야 했고, 아프카니스탄의 충돌과 이라크의 반란에도
      직면해야 했습니다.

       

       

      9. 잠에서 깨어난 식민지들

      1919년 4월에 북인도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수천명의 무저항 인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은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잔혹함과 오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간디와 네루의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1920년 4월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인도 식민정부의 예상을 깨고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6년 전
      세포이의 반란 이후 '대반란의 계절'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에 있어서 자원과 시장을 제공하는 생명선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1차 대전 중에 출정한 군인 390만명 중
      150만명이 인도 식민정부의 자체 비용에 의해 동원되었습니다.
      영국이 '로렌스의 환멸'이나 '앨런비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대한 노골적인 지배의 야욕을 드러낸 이유도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국이 무려 700년동안 오직 무력으로 지배해온 아일랜드도 1919년 자치권을 획들하기 위한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이후 영국 왕권의 부정과 완전 독립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영국이 1916년 아일랜드의 이스턴 봉기 참가자에 대해 잔혹안 처형을 실시하고, 로이드조지가 투입한 특수부대에 의한
      독립운동가들의 학살은 아일랜드인이 영국인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도취했던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독립열기와 반란에 휩싸였고, 과연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영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까지 후퇴할 것인가?'가 주요 과제가 되었고
      이 가운데 새로 등장한 개념이 유화(有和, appeasement)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의 나약함을 느끼면서도 깨끗하게 화해하지 않는, 지배에 대한 집념을 보여 주는데, 로렌스에게
      환멸을 심어 주었던 속임수적인 대응 방식이 대영제국의 '유화'정책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유화정책은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점차 주변 유럽에
      대한 정책에도 적용되었습니다.

       

       

      10. 대영제국의 말로 -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성장에 대한 영국의 무리한 억압으로 발발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은 피폐해진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무리한 전쟁 배상금 요구로 발발하였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대공황까지 겹치자 독일은 극도의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을 겪었고, 자연스럽게 전체주의적인
      파시즘 정권이 들어선 것입니다.

      히틀러는 집권하자 경제부흥과 함께 금지된 재무장을 실시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군사력에 집중한 군국주의적인
      정책은 단기간 내에 독일을 다시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소련과 불가침 협정을 맺은 독일은 마음 놓고 서부로 진격할 수 있었고, 안일하게 안주했던 프랑스는 참패했고,
      �케르크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영국은 뒤늦게 제국은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영국에 비해 영불 해협을 무사히 건널 해군력이 없었던 독일은 우세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런던을 비롯한 영국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이는 오히려 영국이 군수품을 생산할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영국이 항복하지 않고 새로 개발된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 경보망과 허리케인과 스피트파이어 같은 우수한 전투기로
      대등한 공중전을 벌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게 됩니다.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허약해진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순식간에 밀려 모스크바 앞까지 진격을
      허용했지만 추운 겨울과 대대적인 반격으로 방어에 성공합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을 포기하고 남부의 유전과 곡창지대를 노려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노렸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오히려 포위되어 대군을 잃었고, 이후로 계속 소련군에 밀리게 됩니다.

      독일이 소련과 싸우고 있는 동안 영국은 직접 대응을 피하고 주로 중동에서 롬멜의 기갑사단과 전쟁을 벌여 보급이
      빈약한 롬멜 사단을 물량전으로 물리치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게 됩니다.
      미국이 진주만 피해로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의 상황은 급변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과 동쪽에서 진격한
      소련군에 포위된 독일군은 끝내 다시 패망하고 맙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영국은 엄청난 물직적 피해를 입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투입한 나머지 빚더미에 올랐으며,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고 미국에 제국의 자리를 물려 주게 됩니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아시아 방어에 소홀히 하게 되는데, 아시아의 거점이었던 싱가포르를 일본에게
      뺏김으로써 13만 5천명 이라는 전례 없는 영국군 포로를 만들었습니다.

      1945년 5월 8일 처칠은 하원에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전하고 환희에 빠졌지만 수주일 뒤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1960년 1월 사망합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무기 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한 대규모 경제지원으로 생활을 영위했지만
      전 후 미국은 모든 지원을 중단하였고, 영국은 식량수입에 대한 대금지불조차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무기 대여법'의 규정에는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제공 받은 물자와 비슷한 제품은 어떤 것도 다른 국가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국 공업제품의 수출을 막아 영국 경제를 망가뜨린 독소로 작용합니다.
      1944년 영국의 수출액은 1938년의 1/3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그 해 6월에 영국 상무부는 '전 후 영국은 수출이 증가할
      전망이 없으며 영국 산업의 경쟁력 저하는 피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11. 대영제국의 종말 - 인도에서의 퇴진과 수에즈 운하 사건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1억 파운드의 해외 자산을 모두 잃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7억 6천만 파운드였던
      대외채무는 33억 파운드로 늘어났습니다. (1938년 영국의 국민 총소득은 46억 파운드였습니다.)
      전 후 미국의 무기 대여법 정지로 영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아 배신감을 느꼈지만, 미국에 계속적인 거액의 융자를
      구걸하는 것 이외에는 살 방도가 없었습니다.

      1945년 영국과 미국의 재무 협상에서 미국이 제시한 조건은 37억 5천만 달러를 2%의 이자로 대여해 주는 대신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이른바 '제국 특혜관세'(imperial preferential tariff) 제도를 철폐하여
      미국에 수출문호를 개방하고, 파운드 대 달러 교환율을 1939년 당시의 4달러 3센트라는 고율로 정하고, 조속한 시기에
      파운드의 교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영국은 1945년 12월 12개조로 된 영미 차관협정을 조인하였는데, 이 협정만큼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와 영·미간의 지위 역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협정에 의해 파운드화와 경제적 유대에 의해 형성되었던 '스털링 지역'(Sterling Area)이 붕괴되어 대영제국의
      해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대영제국의 해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반해 영국의 재무부 고문 케인스를 중심으로 한 영국 지도부의 대응은 영국의 객관적인 입장이 고려되서인지
      숙명적인 체념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은 전후 재건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인 원동력을 잃고, 중세시대의 가난한 섬나라로 주저 앉게 되었습니다.

      1차 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재건을 돕고, 히틀러가 재무장 하는데 가장 큰 협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 미국의 록펠러를
      비록한 금융세력이란 보면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연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국은 전후에도 수년동안 식량, 의약품, 연료 등에 대해 배급제를 실시했고, 레스토랑의 메뉴는
      제한되었으며, 성인의 1주당 배당량은 버터 170그램, 치즈 40그램, 달걀 1개가 전부였습니다.

      영국은 전후에도 세계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군사비를 줄일 수 없었고, 1946년의 군사비는 16억 파운드로
      1938년의 7배에 달했습니다.
      피폐해진 경제로 제국을 관리할 능력을 상실한 영국은 전후에도 수에즈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10년 동안 제국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진퇴에 대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미얀마 국경까지 다가온 1942년 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반영 폭동은 영국인으로 하여금
      인도에 대한 지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느끼게 했고, 미국마저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습니다.
      1943년 인도 총독이 된 영국의 웨이벌은 인도인의 독립 요구의 정당성을 깊히 인식해 인도인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도
      '인도 사수'를 반복하는 처칠의 훈령 때문에 고뇌해야 했습니다.

      일본군의 인도 육박을 간신히 격퇴하였지만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무력충돌은 점차 심각해졌고, 식민정부의
      관료와 경찰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영제국의 요람인 인도에서의 단순한 퇴각은 제국의 미학과 위신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모양새
      좋게 퇴진해야만 했습니다.

      1947년 2월 20일 영국 수상 애틀리는 '영국 정부는 1948년 6월까지 인도에서 철수하고, 정권을 인도에게 양도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인도의 불신을 해소함과 동시에 '최후의 총독'이란 단서를 붙혀 46세의 마운트배튼을 임명합니다.
      2차대전 후반에 동남 아시아 연합군 총 사령군으로서 일본군을 항복시키고, 동남 아시아에서 다시 유니온 잭을 펄럭이게
      한 마운트배튼은 이미 아이젠하워, 맥아더와 함께 승리의 영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엇보다도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였던 그는 영국 왕족 신분이고,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평등을 신봉하는 진보적
      지도자라는 점에서 최후의 인도 총독으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종말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인물이었습니다.
      인도 현지인에게 최대한 잘 보인 마운트배튼은 인도와 파카스탄의 분할을 이루고, 예정보다 1년이나 앞당긴 1947년
      8월 15일에 명예로운 퇴진을 실시하여 인도인에게 정권을 넘겨 주게 됩니다.

      8월 15일 이전의 초여름 동안 인도 봄베이 항에서 장대한 군악대가 연주하는 동안 친영 인도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영국 병사를 가득 실은 수송선이 위풍을 간직한 채 서서히 부두에서 멀어지는 모습은 품위의 승리였습니다.
      1947년 8월 15일 오전 8시 30분을 기해 인도 전역에서 유니언 잭이 내려졌고, 300년에 걸친 영국의 인도 지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미얀마와 스리랑카에서도 철수한 영국은 어렵게 점령한 팔레스타인에서도 철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반영 테러를 계속하는 유대인 세력과 전투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걸프 지역의 석유 이권을 지키기 위해 친아랍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영국이었지만, 미국과 국제연합은 유대인
      입장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계속 압력을 가했습니다.

      유대 세력과의 유격전으로 탈진한 영국군은 아랍인의 불신과 모멸의 시선을 받았고, 국제 여론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으며,
      본국은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신음하였습니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1947년 12월 품위 있고 명예로운 퇴진과는 거리가 먼 큰 환멸과 굴욕 속에서 UN과 미국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철수하였습니다.


      한편 1956년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자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는데, 수에즈 운하야말로 1875년
      디즈레일리가 사들인 이래 오랫동안 제국의 생명선이 된 중요한 권익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최후의 보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영국의 이든 수상은 수에즈 운하 탈환을 위해 현실을 무시한 채
      이집트 파병을 결심합니다.

      단독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한 영국은 프랑스를 충동질하여 이스라엘을 포섭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 그
      충돌에 끼어 들어 정전을 강제하기 위한 다국적군으로 영국-프랑스군을 수에즈 운하에 파견하는 방법에 열중합니다.
      대영제국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유약하고 치졸한 음모는 보어 전쟁 못지 않은 도덕적인 결함을 드러냈는데, 이전과는
      달리 힘이 없었던 영국은 비참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특히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국주의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국제도덕의 근본을 짓밟은 영국의 독단적 행동에 대해
      워싱턴의 반발은 격렬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의 수에즈 파병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였고, 뉴욕 시장에서 투매로 인한 파운드화의
      대폭락은 과대 평가된 파운드화에 의해 간신히 모양새를 유지한 영국의 자존심을 짓밟았습니다.

      미국의 비난에 이어 수련 흐루시초프는 영국 본토에 대한 미사일 공격의 위협마저 내비침으로써 영국은 미·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 단독으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수에즈 사건은 대영제국의 완벽한 종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사건이었으며, 수에즈 운하 북쪽 끝에 있는 도시
      포트사이드에 걸려 있던 유니언 잭은 영원히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 남아 있던 영국령 식민지의 독립사태가 이어졌는데, 영국은 이제 현실을 직시하고
      순수히 물러나게 됩니다.
      1971년 영국이 EC(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면서 싱가포르의 영국 극동 사랑부에 마지막으로 나부끼고 있던 유니언 잭이
      내려짐으로써 영국은 영원히 제국의 깃발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소제목: 번영 신학은 현대판 바알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자기 만족(滿足)을 위해 끊임없이 욕심을 낸다.  이 욕심이 감추어진 체 종교들도 만들어진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 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탐심(貪心: greedy desire)이 온갖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종교의 원인이요 뿌리란 뜻이다.

      인간의 이런 타락한 이기심을 가장 잘 만족시켜 주는 종교가 바로 무교(巫敎: shamanism)이다.  무교는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종교는 인간의 탐심을 잘 채워주기에 인류 사회를 오랜 동안 지배한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들 즉 불교나 유교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무교에 흡수 당했다.  종교의 세속화이다.

      이 점에서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소개한 ㅅ교회의 ㅈ목사와 그의 동역자였던 ㅊ여목사에 의해 기복주의적인 신학 즉 번영 신학이 한국 교회에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 병 고치는 기도에서 출발되었다.  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번영 신학이 주장되었다.  이를 지지하는 성구가 요한일서 1 2절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번영 신학은 4중 복음으로도 설명된다.

       

      구약 시대에도 기복적(祈福的)인 종교가 있었고 이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직전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이스라엘에게 미리 경고해야 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8:12-14)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고 안식을 얻은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를 맞았다.  이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종교였던 남신 바알과 여신 아스타롯을 섬기기 시작했다(2:11-13).  이 신들은 농업 신들로 구약 시대의 배금 종교(拜金 宗敎: mammonizm)였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 우상(偶像)이라는 헛된 것을 섬기는 것은 모세 율법이 금했다(20:4-5, 32:21, 삼상12:21).

      그러므로 사사(士師)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은 늘 바알 종교와 끊임없이 다투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도 가나안의 기복적인 종교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타락하며 멸망 했다(2:8, 19:4-5).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보다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연유한다.  말씀의 종교가 물질숭배 종교로 바뀌자 선민 이스라엘도 영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부패하며 내부적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이 때 외부의 공격은 쉽게 이스라엘을 쉽게 무너트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상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기독교에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사회로부터도 불신(不信)을 당하고 조롱 받고 있다.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 교회의 부흥기는 지났고 복음이 들어온 지 100여 년 조금 지나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빨리 탄 불이 빨리 꺼지듯이……  이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에 있다.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 종교인 무교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기독교와 한국인의 종교적 정서라는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55475613)

      번영 신학이 어떤 점에서 비성경적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로써 그 동안 한국 교회를 기만한 번영 신학 즉 4중 복음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바알인 형통 신학 즉 번영 신학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진 기독교를 새롭게 세우기 위함이다.

       

      번영 신학은 신구약 성경 사이 존재하는 계시 방법과 내용상 차이를 전혀 모른다.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1:26)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출발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하나님은 선악과 규례를 인간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보존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법치(法治) 즉 말씀 통치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종하면 아담과 하와는 낙원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한다면 이들은 낙원을 잃을 것이다.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며 그 나라 안에서 누리는 복도 물질적(物質的)일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에 실패하여 낙원을 잃었다.  그리고 에덴 밖에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어렵게 살아야 했다.  타락 전후(前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복의 성경적인 관점은 족장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기 위해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에서 그를 불러내 보이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게 했다.  마침내 가나안에 살았지만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다.  그 조건은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살면 물질로 표현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소명 목적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했다.  그 목적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애굽의 노예로 고생한 이스라엘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함이었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는 다윗 왕국이라는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형태로 가나안 땅에서 실현되었다.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와 구별되어야 했다.  그 구별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었다.  율법에 따라 산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일등 나라가 될 것이다.  일등 나라라는 증거는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서 일어날 것이다(4:6, 28:1-14).  이렇게 보이는 형태로 하나님은 구약 시대 자신의 백성을 축복했다.

      여기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원복음(3:15)이 약속한 메시아에 의해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예언해 주기 위함이었다.  신약 시대 세워질 하나님 나라도 법치에 근거할 것이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복이 결정될 것임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미리 계시해 주었다.

       

      다윗 왕국이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윗 왕국은 결국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참이 아니었다.  참이 아닌 것은 곧 올 참 것을 위해 무너져야 한다(7:18-19, 8:13).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은 멸망해야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한 동안 사라졌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복을 앞으로 외형적(外形的)인 것으로 더 이상 표현 또는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신약 시대를 연 예수님이 그 좋은 예이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궁이 아닌 목수의 집안에 출생했다.  창조주가 이 세상에 누울 것이 없어 말 구유에 탄생한 이유였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하늘의 복은 세상 것과 완전히 달라서 세상 것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지 않았고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나라는 구약 시대와 달리 세상 나라에 더 이상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18:36).  그러므로 세상 나라 방식으로 즉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나 권세를 표현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약 시대 계시의 방법과 내용이 구약 시대와 달리 완전히 바뀌었다. 이에 따라 신약 시대 하나님이 복을 주는 방법도 달라졌다.  눈에 보이는 방식에서 안 보이는 방식으로…… 

      산상수훈(5-7)의 팔복(八福)은 이를 잘 증명한다(5:3-10).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복을 받을 대상은 이 세상에서 그리 사랑 받지 못할 사람들일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등등……  이들은 구약 시대 찬란한 믿음의 영웅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처럼 어디에도 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다.  ㅈ목사가 4중 복음의 증거로 내세우는 성구 요일1:2절이 비교적 구약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단 한번만 신약 성경에 기록되는가?  아주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한번의 기록을 보고 구약과 같은 복을 지지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번영 신학은 몇 가지 성구들로 지지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관련 성구들만 주장한다.  예컨대 눅4:18-19절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위해 그가 행할 이적에 대한 기록이지 절대로 번영 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  8:28절에서 언급된 합력한 선()은 앞뒤 성구들을 살핀다면 물질이나 경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인 영화(榮華: sanctification)와 관계된다(8:29-39).  그리고 히11:1절을 근거 성구로 들이댈 수 있다.  역시 앞뒤 성구들을 살피면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믿음으로 산 생애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설명하는 성구일 뿐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대속 죽음과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구세주와 만왕의 왕이 되었다.  번영 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마침내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활한 예수님은 이 위대한 성공과 그 결과를 만인 앞에서 보여주며 누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昇天)했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권세를 부활한 예수님은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그의 부활로 인해 이 세상에 미쳐질 하늘의 복은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헛된 탐심을 품지 못하도록 부활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영화와 영광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본()을 따라 이 땅의 성도들도 세상 것을 부정하며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은 신약 시대 철저히 부정되었다.

      그러나 반영 신학은 아직도 구약 성경에 연연하다.  그렇게 구약 시대 임시적으로 표현된 그림자 같은 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추구는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로 이미 성취된 참 복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이다.  재림 이후에만 나타날 영화를 소망하며 이런 거짓된 복을 거부하여야 하지만 번영 신학은 여전히 거짓 복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런 거짓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진실한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경고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7:29-31)

       

      번영 신학은 성경 진리의 반()만 고집한 결과이다.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의 문제는 대립적인 이분법(二分法)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오래 수()를 누리고 복을 받으며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지만 그와 반대되는 것은 안 좋다.  즉 행복은 좋지만 불행은 나쁘다.  또는 성공은 좋지만 실패는 안 좋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을 번영 신학은 보인다.

      구약 시대 이런 사고가 맞는 듯이 보인다.  족장들의 경우처럼 믿음이 좋은 신앙인들은 마지막까지 수복강령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았다.  나그네는 정착 삶이 아니다.  항상 떠돌아 다녀야 했다.  어디를 가나 정착 사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기근 때는 오히려 약탈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105:12, 7:4-6).  

      이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성공과 강함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에게도 약한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이 세상에 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1:9-10).  물질적인 복을 누린 것을 사실이었지만 나그네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복적인 번영 신학은 이들이 마치 이 세상에서 거부(巨富)처럼 산 것처럼 과장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번영 신학은 의미를 잃었다.  구약 시대 선민 이스라엘 사회도 부패했다.  이 때 의인(義人)들은 진실한 신앙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이지만 이런 사회에서 믿음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시대 의인들은 고난을 기쁘게 받았다. 행복은 좋고 불행은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이 이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뻐했다(34:19).  고난이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됨을 알았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그리고 구약 성경은 고난 자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다고까지 말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77:19)  고통을 주는 멍에를 오히려 기뻐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3:27-33)  예수님도 말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이런 성구들은 구약 성경이 번영 신학을 지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대립적 이분법의 문제는 많고 적음, 크고 작음 그리고 높고 낮음 같은 수준과 정도 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수준과 정도에서 클수록 좋은 것이며 작을수록 안 좋다고 번영 신학은 생각한다.  예컨대 일억 원보다 십억 원을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은사나 능력 면에서도 나타난다.  작은 은사나 능력보다 더 큰 은사나 능력을 이들을 더 선호한다.

      이에 따라 믿음의 등급과 목회자의 등급도 매겨진다.  하급자는 상급자를 지극히 존경한다.  교회 안과 목회자들 가운데 차별이 생긴다.  하나님의 은사인 능력은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봉사하고 섬기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이분법에 근거를 둔 은사론은 기독교 내에 상하계층을 만들어 목회자들을 계급화시켰다.  사도 바울이 설명한 지체이론(고전12:4-27)의 신학적인 의미를 이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나 능력은 작은가 큰가의 문제라기보다 충성의 문제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탈란트 비유가 이를 잘 증언한다(25:14-30).  하나님의 평가는 번영 신학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하나님 앞보다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더 좋아한다.

       

      더 나아가 번영 신학은 믿음의 정도가 물질적 그리고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성공과 출세의 정도가 믿음의 정도로 이해된다.  이들이 구약 식으로 믿음과 복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측량하려 한다.  결국 믿음과 무관하게 부자 신자라면 좋은 믿음의 소유자로 칭찬받는다.  이렇게 기독교와 그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킨다.

      이들의 성경 해석에 크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분법에 따라 번영 신학에 안 맞는 성구들을 모두 폐기된다.  강대상에서 전혀 설교되지 않는다.  그렇게 이들은 성경의 반 쪽만 갖고 신앙 삶을 기꺼이 살려 한다.  이렇게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시킨다.  자기 마음에 드는 성구들만 설교하기 때문이다.  번영 신학은 결국 성경 말씀을 더 하거나 빼고 해석한 결과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4:2, 12:32, 30:6, 22:18-19).

      그리고 번영 신학에 또 다른 문제가 발견된다.  번영 신학은 예수님의 구속의 결과만 누리려 한다.  그 복된 결과를 가져온 과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구속의 결과 얻은 복만 강조하려 함으로 그 복을 초래시킨 예수님의 고난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의 복을 주려고 스스로 십자가에 죽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영생의 복을 얻기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번영 신학은 성공과 복만 추구함으로 복음을 위한 고난과 헌신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과정보다 결과를 즐김으로 신앙의 성숙이 없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삶의 모든 결과는 예수님 재림 이후 나타나고 이를 위해 성도는 복음을 위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재림 이후에 받을 복을 미리 앞당겨 이 세상에서 누리려 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한다(10:38, 14:22).

       

      그러나 구원 이후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리고 그에게 향한다면(11:36) 무엇이든지 예수 안에서 아니요가 아니라 가 된다.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은 어느 때는 복을 그러나 다른 때는 화를 보낸다.  이 때 성도는 화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참 좋은 예는 죽음이다.  성도는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불행 자체이지만 성도에게는 축복 자체이다.  이렇게 구원 받은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점에서 대립적인 이분법에 근거를 둔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번영 신학은 이 세상에 관심을 두게 만들며 재림 이후 완성될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世俗化)이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영리(營利)를 목적하는 세상 조직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부유한 자는 웃고 가난한 자는 우는 그런 곳으로 변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보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4-26)

       

      결론

      번영 복음은 반쪽 진리이다.  아니 거짓 진리이다.  복음이 말하는 두 면을 모두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번영 신학이 잘못된 그리고 비성경적인 세계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같아 4 가지 모습을 지닌다 (‘요단에서 바라본 가나안이란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98073224).  이 세상은 애굽처럼 빨리 벗어나야 할 곳이며 동시에 광야처럼 훈련을 받아야 곳이다.  그리고 가나안처럼 하나님 나라를 세우야 할 곳이면서 아울러 앞으로 불로 심판을 받아 사라질 세상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세계관은 결국 두 면, 즉 낙관적인 것과 비관적인 것을 모두 보여준다.  이 세상이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야 할 곳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곳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 세상은 빨리 벗어나야 할 애굽과 같은 곳이며 그리고 언젠가 불로 사라질 곳이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낙관적(樂觀的)인 세계관만 견지한다.  한 쪽으로 치우쳤다.  그 결과 균형 잡힌 신앙 삶을 가르치지 못한다.  현세(現世)에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잘 언급하지 않는 이유이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야만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마찬 가지로 번영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자신들의 것을 모두 앗아갈 예수님의 재림을 싫어한다.

       

      그 동안 한국 목회자들이 번영 신학의 영향을 받으며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했다. ㅅ교회의 ㅈ목사 탓만이 아니다.  자신의 건전하고도 참된 성경적 신학을 버리고 그의 실용적인 신학을 많은 목회자들이 추구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이것이 탐심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기초는 서서히 무너졌다.

      이젠 신자들이 목회자 못지 않은 신앙 수준을 길러야 한다.  성도의 수준이 높아져야 비로소 목회자들이 긴장하며 그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신자들에 의해 개혁되어져야 한다.   마라나타!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정신과에 입원한 환자들 중에서 상당수는

      이말 저말 횡설수설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하는가?

      환자가 하는 말들 중에서 건강한 생각들을 찾아내어

      그 부분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즉 환자를 환자로 보지 않고 그냥 사람으로 보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가지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시각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느냐 아니면 무시하느냐 입니다.

       

      존중받은 사람은 마음 안에서 치유작용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존중해준 사람을 존중하는 대인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무시당하게 되면 마음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이 생성되고

      그 감정들이 결국은 무시한 사람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치료에서 가장 강조하는 원리가 존중인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대할 때 가져야 할 자세라고

      누누이 강조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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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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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  



      1. 아이스크림 ---------- 얼음보숭이 
      2. 도시락 ---------------- 곽밥
      3. 쥬스 --------------------과일단물
      4. 운동화 -----------------천신
      5. 화장실------------------위생실
      6. 노크 --------------------손기척
      7. 보조개 -----------------오목샘
      8. 김매기 -----------------풀잡이
      9 오두막 -----------------마가리
      10.뮤지컬 ----------------가무이야기
       
      11. 뒷걸음질 ------------물레걸음
      12. 간섭 ------------------간참
      13. 거짓말 -------------- 꽝포
      14. 꽃다발 -------------- 꽃묶음
      15. 장모 -----------------가시어머니
      16. 날씨 ------------------날거리
      17. 계란말이 ------------색쌈
      18. 소시지 ---------------칼파스

      19. 볼펜 ------------------원주필
      20. 방청소 ---------------방거두매



        21. 미소 ------------------볼웃음
        22. 드레스 ---------------나리옷
        23. 단발머리 ------------중발머리
        24. 들창코 ---------------발딱코
        25. 우울증 ---------------슬픔증
        26. 오전 ------------------낮전
        27. 위기 -----------------고스락
        28. 운행표 --------------다님표
        29. 눈썰미 --------------눈정신
        30. 합병증 --------------따라난병

         

         

        31.도넛 ------------------가락지빵 
        32.주차장 ---------------차마당
        33.라면 ------------------꼬부랑국수
        34.개고기 ---------------단고기
        35.만화영화 ------------그림영화
        36.야간경기 ------------등불게임
        37.꿈나라 ---------------잠나라
        38.기성복 ---------------지은옷
        39.꼭지점 ---------------꼭두점
        40.꾀병 ------------------건성

          

         

        41.록영화 ---------------시보영화
        42.김매기 ---------------풀잡이
        43.꽃다발 - -------------꽃묶음   
        44.교대 ------------------대거리
        45.과거 ------------------어제날
        46.관광버스 ------------유람뻐스
        47.공염불말 ------------공부
        48.공휴일 - -------------휴식일
        49.골키퍼 ------------- -문지기
        50.공무원 - -------------정무원

        51.고함지르다 - -------고아대다.
        52.곧바로(즉시) - -----대미쳐
        53.계모 - ----------------후어머니
        54.교대 - ----------------대거리
        55.과거 - ----------------어제날
        56.가르치다 ------------배워주다
        57.고함치다 - ----------고아대다
        58.궁금하다 - ----------궁겁다
        59.기가 막히다 --------억이 막히다
        60.괜찮다 - -------------일 없다

        61.근지럽다 - ----------그니럽다
        62.가깝다 - -------------가찹다
        63.곧,금방 - ------------인차
        64.기필코 - -------------불필코
        65.눈총을 주다 - ------눈딱총을 주다
        66.나이가 어리다 -----나어리다
        67.높임말을 쓰다 -----옙하다
        68.냉대하다 - ----------미우다
        69.노려보다 - ----------지르보다
        70.덜렁거리다 - -------건숭맞다

        71.도와주다 - ----------방조하다
        72.드문드문 - ----------도간도간
        73.도착하다 - ----------가닿다
        74.떠맡기다 - ----------밀맡기다
        75.마련하다 - ----------내오다
        76.모질고 사납다 -----그악하다
        77.자리없음 - ----------만원
        78.되는대로 - ----------마구 망탕
        79.모락모락 - ----------몰몰
        80.매우 가깝다 --------살밭다

        81.미끄러지다 ---------미츠러지다
        82.큰 걱정 - ------------된 걱정
        83.북적북적 - ----------욱닥욱닥
        84.배웅하다 - ----------냄내다
        85.부서지다 - ----------마사지다
        86.바쁘다 - ------------어렵다
        87.빈정거리는 - ------투비양청
        88.보태주다 - ---------덧주다
        89.살금살금 - ---------발면발면
        90.시원시원하다 -----우선우선하다

        91.싸돌아다니다 -----바라다니다
        92.알쏭달쏭하다 -----새리새리하다
        93.서명하다 -----------수표하다
        94오손도손 - ----------도순도순
        95.유일무이하다 -----단벌하다
        96.지난 번 -------------간번
        97.주저않다 -----------퍼더앉다
        98.창피하다 -----------열스럽다
        99.우람하게 -----------거연히
        100.틀림없이 ---------거의 없이

        101.터무니없다 -------탁없다
        102.기름지다 - -------노랑지다 
        103.푹 수그리다 - ---직수리다
        104.혈안이 되다 -----피눈이 되다
        105.전근하다 - ------조동하다
        106.횡재하다 - ------호박을 잡다
        107.효과를 얻다 - --은을 내다
        108.피나는 노력 --- 피타는 노력
        109.색다르다 맛 - --다르다
        110.자기 스스로 - --자기절로

        111.저마다 - ---------------저마끔 
        112.정신을 잃다 - ---------얼이 치다
        113.토라지다 - -------------시뚝하다
        114.얼떨결에 - -------------어망결에
        115.의젓하다 - -------------의사스럽다 
        116.가게 - -------------------가가
        117.가끔 - -------------------가담 가담





      a17.jpg


          어떤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다.
          사형 집행 하는 날이 다가오자

          집행관이 그에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하시오."

          그러자 그는
          "임금님에게 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직접 임금님에게 드리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을 했다.

          이 말을 임금님께 전하니
          죽을 사람 소원이니 들어주자고
          임금님이 직접 사형수에게 왔다.

          그러자 이 사람이 속옷 깊숙한 곳에서
          금덩어리 하나를 끄집어내더니

          "임금님, 이것은 아주 귀한 금덩어리입니다.
          이 금덩어리를 심으면 나무가 되어서
          금 열매가 열립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사람이 심으면
          금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죄인이므로
          심어봤자 열매가 맺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는 임금님께
          이 금덩어리를 드리니
          정원에 심어 크게 부귀를 누리십시오."

          금을 받은 임금님은 자기가 심었다가는
          금이 안 열리겠다 싶었다.
          (왜? 자기도 죄가 많으니까)

          그래서 옆에 있는 신하를 보고
          "나는 이미 금이 많으니까
          자네가 심어서 금 열매를 따게." 했더니

          신하 얼굴이 새하얗게 되면서
          "아닙니다. 저도 금이 많습니다." 하며
          옆에 동료를 보고
          "자네가 갖다 심게" 하니
          그도 받아서 다른 동료보고
          "아니야~자네가 심게." 하다가
          결국 금이 도로 임금에게 돌아왔다.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에는
          자신을 비롯한 여기 있는 모두가
          난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임금이
          "너는 참 지혜로운 놈이다.
          네 지혜 때문에 방면하노라." 면서
          그를 풀어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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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과 지옥

      (16: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혹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터툴리안(Tetullian)과 암브로스(Ambross), 칼빈(Calvin)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본문에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다이브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믿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 품으로갔다는 말씀이 잘 가리킵니다(22). 부자는 믿지 않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호화로운 연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씀이 증거합니다(19).

       

       

      부자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옷,자동차,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곧 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거지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의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헌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어떤 사유로 거지가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22절에 보면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신적 죽음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형제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지옥은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우리들을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음을 감사 드립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아오니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보혜사 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오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립니다”

      위의 발췌된 기도문의 내용은 "두가지의 [인치시고 성령으로 보증하심]"으로 설명 합니다.

      1. (고후1:22) “우리들을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는 이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삼위의 한분이신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주하셔서 구원받았음을 마음에 인치시며 성령으로 보증하신다는 말씀 입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도록 성령께서 보증하신다는 의미로 이해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성령님이 그들의 삶에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6:44; 14:17; 로마서 8:9; 고린도전서 12:13). 아무도 성령의 자비로운 역사하심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성령세례를 받았건 않았건 성령이 모두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지 못한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사용하실 수 있고 또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결코 그들의 사역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령세례가 우리들의 삶과 사역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만들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에게 그 명령은 주어 집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으라” (엡5:18)

      2.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아오니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것은 (고후5:1-4절)을 인용한 기도 입니다.

      5절에는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즉 1절- 5절로 주님께서 부활승천 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며 복스러운 소망이 우리에게 이루어 지도록 그 보증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는 말씀의 의미 입니다.

      어떤 형제들은 구원을 인치시고 보증(구원의 확신)하시는 성령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기로 작정한 자들 같이 성령을 배척 합니다. 구원의 필수로 따라야 할 구원의 확신에는 아무 가르침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그들이 믿는다는 구원의 인치심(고후1:22)도 없는 것입니다.

      고후1:22절의 중생할 때의 성령의 인치심은 구원의 여정의 시작일 뿐이며
      고후5:5절은 구원의 종착역, 즉 천국으로의 입성을 보증하는 보혜사 성령의 인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부님의 댓글입니다.

      2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17:23

       

      칼빈은 기독교 강요 31장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은덕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실제로 얻게 하는 성령의 적용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 31, 32번은 유효한 부르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하여 칭의, 양자, 성화의 은덕들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핵심이며, 신분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영적 원천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칭의가 있으면 반드시 성화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교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의 은덕으로 인하여 점진적 성화가 계속되는 것을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이 교리는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교리 중 하나이다. 그것은 가장 심오하며 가장 자극적이며 가장 위로가 되는 교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함의 교리만큼 일단 바르게 이해했을 때 더 큰 확신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교리는 없다. 우리가 이 교리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다면 구원의 관한 전체적인 교리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부분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성경에 이런 교리가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연합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적용하시는 성령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은택을 전달하시는 것이다. 그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령의 역사하심 중 가장 주도적인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본문은 세 가지 형태의 연합을 말하고 있다. 성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연합, 그리고 신자들 간의 연합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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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버지께서 내 안에

       

      성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다른 두 연합의 기초가 되는 영광스러운 연합이다. 성부와 성자의 성품과 속성이 동일하다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성부의 인격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고 계신다(1:8). 성부께서는 신인(神人, God-Man)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면서 신성의 충만함을 전달하시고 공급하시는 것이다(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2 ‘내가 저희 안에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신비로운 연합을 말해주고 있다. 성부와 성자 간의 연합이 본질적 연합인 것에 반해 그리스도와 성도 간에 연합은 신비로운 연합이다. 신성의 직접적인 교통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계시는 성부와 성자간의 연합과는 달리,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말미암는다.

       

      3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신자들 간의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은 어떻게 가능하는가? 성령님의 내주(內住)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 머리되신 주님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지체들인 신자들 간의 사랑스러운 연합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연합

       

      1 연합의 은유적 표현들

       

       

      여러 나무 조각들을 아교로 접착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일, 가지를 접붙임으로 한 나무가 되게 하는 일, 혼인의 언약을 통해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일, 머리와 지체가 한 영혼에 의해서 생기(生氣)를 갖게 됨으로 하나의 몸이 되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연합의 신비를 완전하게 설명해 주는 예는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순히 두 사물을 붙여 놓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들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은 신비한 연합을 묘사하는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생명을 나누는 연합이요, 영혼의 연합을 의미한다(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로마서6:5에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연합을 가지의 접붙임으로 설명하고 있다. 가지를 접붙이는 것은 접가지와 원나무 둥치 사이의 생명을 결합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같은 수액과 진액을 공유하는 하나의 생명을 결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예만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이 누리는 탁월한 은혜를 깊이 있게 설명할 수는 없다.

       

      혼인 서약을 통해 남편과 아내가 부부의 연합을 이루는 예 또한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 물론 부부의 연합은 부모를 떠난 남자와 여자가 지극한 친밀함으로 한 몸을 이루는 연합니다. 하지만 이 연합에는 한계가 있다. 죽음이 결국 그들의 연합을 깨트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친밀했던 관계나 교통은 중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그렇지 않다. 죽음마저도 깰 수 없는 영원한 연합이기 때문이다.

       

       

      2 사귐

       

      사도는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는 말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고 있다(요일 1:13). 사귐이란 단순한 만남의 차원을 넘어 공통적으로 가지는 관심에 참여하고 교통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 3:14에서 우리가...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함과 같이 말이다. 시편 45:7에는 동료’(메카베레카)라는 표현으로 성도를 그리스도의 동료들, 그리스도와 함께 한 동료들로 묘사하고 있다.

       

      3 사귐의 전제조건

       

      하지만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에 사귐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한다. 접붙임이 있어야만 접붙임을 받은 가지와 원나무가 서로 같은 생명 가운데 교통할 수 있는 것이다. 연합이 없다면 교통이나 교제는 있을 수 없다.

      (고전 3:22-23)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 점은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됨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의 방식으로 우리의 의가 된다는 사실은 로마서 4:23, 24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전 1;30이 이 점을 분명하게 역설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교황주의자들의 반론 : 어찌 다른 사람의 의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의 돈으로 내가 부자가 되며, 다른 사람의 명예로 내가 존경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다른 자가 나의 남편이 되어 나의 보증이 되어 준다면 가능한 일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자기들의 의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 자기들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법은 채무자와 보증자를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사도 바울은 골1:24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하거나 불완전하다는 말인가? 물론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고난의 공로는 완전한 것이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4).

       

       

      그 분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중보자로서의 임무를 완전하게 감당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더 이상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으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고난을 받고 계신다. 당신의 교회와 그 지체들이 고난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고난은 십자가에서 당하신 것과 동등하지 않다. 또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의 목적과도 다르다. 이 고난은 지체들로 인한 고난이다. 지체들인 신자의 고난을 당신 자신의 고난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지체들의 고난과 핍박을 가하는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이 전제되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신비로운 연합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난을 똑같이 느끼실 수 없을 것이다.

       

      5 성도의 부활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신비로운 연합은 마지막 날에 일으키심을 받는 성도들로부터 확실히 입증될 것이다. 성도의 부활은 심판하시기 위해 불신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택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택이 신자들의 죽음 몸을 소생시킨다. 신자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 역시도 그리스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의 성격

       

      1 실제적 연합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가발한 착상이나 관념 따위로 만들어낸 상상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상상하든지 간에 신자들은 그것이 실제적인 사실임을 알고 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2 유기적 연합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격(位格)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사람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와 동등한 위치로 변해 간다는 식의 본질적 연합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속성과 탁월함에 있어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차이가 무한하다는 것을 간과한 무지에서 오는 미혹이다. 물론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의 인격으로 만들지도 않고, 그리스도와 하나의 본체(本體)가 되게 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인격을 그리스도에 인격에 가장 친밀하고 가깝게 결합시키는 연합은 정말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은 거대한 신비이다. 그리스도는 성도의 머리가 되시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육체의 각 지체와 같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연합

       

      신비로운 연합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산출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그 생명과 연합을 이루게 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우리가 믿음의 끈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더욱 단단히 매여야 하지만 이 역사도 사실상 우리의 자의적 행사로 볼 수 없다. 2:8은 이점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을 가져야 할 주체는 우리지만, 믿음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4 즉각적인 연합

       

      즉각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적용되는 범위와 속도에 관한 문제를 말한다. 육체의 여러 지체가 저마다 다른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지체들은 그리스도와 모두 다 같은 가까움의 정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고린도 교회 내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만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는 이런 잘못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저희와 우리의 구주이시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혼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누구나가 동일한 친밀함을 가진다.

       

      5 근본적인 연합

       

      근본적이라 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지속적인 유지를 말한다. 우리가 생명의 진액이 있는 그리스도의 뿌리에 접붙여져 있는 한, 가지인 우리는 결코 말라 죽지 않을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이 연합은 그리스도의 특권과 위로를 근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전제가 된다.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고전3:23). 또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모든 소망도 이 연합에 근거해야 한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전1:27).

      만약 이 신비로운 연합이 파괴된다면, 우리가 누리던 모든 소망의 열매와 특권들은 일거에 소멸되고 말 것이다.

       

      6 불가분해적 연합

       

      어떠한 장애물도 그 신비로운 연합을 해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위격적 결합을 깨트리지 못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체 사이의 본성적 연합을 일시적으로 와해시킨 사건이었지만, 그 경우에도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은 조금도 와해되지 않았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연합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모든 연합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붕괴된다고 해도,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흙으로 돌아간지 오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칭하였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비로운 연합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 그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은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너희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라”(3:3).

       

      신자들은 때때로 강하고 격렬한 시련의 때를 맞이하곤 한다. 그럴 경우 영적 생명은 아주 낮은 수준의 상태까지 밀려나기도 한다. 은혜에 대한 지각의 정도가 약화되어 피조물을 복되게 하는 영적인 기쁨과 영적인 위로들이 동이 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불멸(不滅)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곤고한 영혼들에게 분명 적지 않은 위로를 줄 것이다. 죽음이 영혼과 몸을 묶고 있던 은줄을 풀어버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묶어주는 황금 사슬은 결코 끊어내지 못한다.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12:6).

       

      연합의 영광과 목적과 상속

       

      1 연합의 영광

       

      콘스탄틴(Constantine)은 로마제국의 수장이 되는 것보다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을 더 영화롭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일의 존귀함이 지상의 모든 존영과 영예를 능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신격의 두 번째 위격(位格)을 가지신 분과 우리가 연합을 이룬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리시는 종의 신분도 과한 우리가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었다. 무엇으로 이 놀라운 영광을 대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니라”(5:30).

       

      이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에게 견실한 위로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시고, 나는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어찌 사랑하는 당신 자신의 백성을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이 나의 머리가 되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지체의 안전과 안녕을 도모하실 것이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1:22-23).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고통과 궁핍과 곤고함이 우리에게 닥친다 해도 우리는 위로를 받고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될 것이다.

       

      2 연합의 목적

       

      연합을 통해 열매를 맺는 것은 연합이 가지는 가장 직접적인 목적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7:4).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 당하기 전에 무슨 열매를 맺었는가? 우리가 맺었던 열매 중에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것이 있었는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떠한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접붙임을 받은 모든 가지들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뿌리가 되신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15:8).

       

      3 연합으로 말미암은 상속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즉시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모든 부요에 참여하게 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다 너희 것이요”(고전 3:22).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아버지(20:17), 그리스도의 약속(고후 1:20), 그리스도의 승리(8:28), 그리스도의 영광(17:24),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연합한 자의 삶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강력하고도 친밀한 연합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위로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빈곤하고 궁핍한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채워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궁핍한 자들을 바라보시며 함께 곤궁함을 느끼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채워드려야 할 만큼 궁핍하거나 부족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영광스러운 부요의 원천에 계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부족을 느끼고 계신다. 당신의 몸 된 교회가 주림과 갈증과 추위로 고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단 몇 푼이 모자라 느끼는 궁핍함을 그 지체들과 더불어 느끼고 계시는 더불어 느끼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당신이 느끼는 궁핍함을 채워주는 방편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빈곤한 지체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주리시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형제들에게 하는 모든 것을 당신 자에게 한 것으로 여기시는 분이시다(25:35-40).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인처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늘과 땅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형제에게 베푸는 빵 한 조각으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의 순종과 사랑과 진실함을 증명하는 시금석으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가 한 몸이라는 신비를 이해하였다면,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상처를 내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어리석고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독수리와 나무라는 동화에서 자신의 깃털을 날개를 단 화살에 상처를 입은 독수리와, 자신의 가지로 만든 도끼에 쪼개진 나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손에 상처를 입는 일이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5:35에서 내가 주렸고 목마르고 헐벗었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환난을 당하는 여러분과 같은 아픔을 겪으신다. 친밀한 연합이 아니라면 그러한 예민한 동정심은 나올 수 없다. 신자들과의 신비로운 연합 속에서 그들의 고통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긴밀히 연합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거룩을 자신의 영혼에 전달 받은 자들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죄 죽이기를 실천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본받는 자들임을 증명해야 한다. 마음을 지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굳건히 하십시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3-4).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분이 가지신 모든 부요함과 은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우리의 소유가 되셨습니다. 여러분의 작고 연약한 팔이 그토록 영화로우신 분을 영접하게 되다니요! 이보다 놀랍고 위대한 일이 또 있습니까?

       

       

      청교도아카데미 PBA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가을묵상 BEST 명언 30選

      01
      사람은 오로지 가슴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텍쥐페리-   



      02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고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매튜슨- 



      03
      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촛불이 되거나 또는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이디스 워튼- 



      04
      두려움 때문에 갖는 존경심만큼 비열한 것은 없다  
      -카뮈- 



      05
      당신이 잘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행복에 도움이 된다  
      -러셀- 



      06
      스스로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성실할 수 있다  
      -에릭 프롬-



      07
      큰 재주를 가졌다면 근면은 그 재주를 더 낫게 해줄 것이며 
      보통의 능력밖에 없다면 근면은 부족함을 보충해 줄 것이다  
      -J.레이놀즈-



      08
      부지런함에도 의와 이의 구분이 있다. 
      닭이 울 때부터 부지런하기로는 순임금이나
      도적이나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가정집- 



      09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



      10
      노동은 세개의 큰 악, 즉, 지루함, 부도덕,
      그리고 가난을 제거한다  
      -괴테- 



      11
      지성을 소유하고 
      또 그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렇지 못한 열 사람에게 언제나 승리한다  
      -버나드 쇼-



      12
      재물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쓸 권리가 없듯이 
      행복도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누릴 권리가 없다  
      -버나드 쇼- 



      13
      힘 있을 때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헨리 애덤스- 



      14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한편 그것을 이겨내는 일로도 가득차 있다  
      -헬렌 켈러- 



      15
      사람은 부지런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착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놀면 음탕하고, 음탕하면 착함을 잊으며
      착함을 잊으면 악한 마음이 생긴다  
      -소학-



      16
      미래는 일하는 사람의 것이다. 
      권력과 명예도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게으름뱅이의 손에 누가 권력이나 명예를 안겨줄까
      -힐티-



      17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며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된 일이다
      -존 F. 케네디-



      18
      당신이 자신은 2위로 만족한다고 일단 말하면, 
      당신의 인생은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존 F. 케네디-



      19
      무례한 사람의 행위는 내 행실을
      바로 잡게 해주는 스승이다
      -공자-



      20
      군자가 예절이 없으면 역적이 되고,
      소인이 예절이 없으면 도적이 된다
      -명심보감-



      21
      쓰러진 자 망할까 두렵지 않고,
      낮춘 자 거만할까 두렵지 않다
      -J.버넌-



      22
      예의는 남과 화목함을 으뜸으로 삼는다  
      -논어-



      23
      겸손한 자만이 다스릴 것이요,
      애써 일하는 자만이 가질 것이다
      -에머슨-



      24
      산이 높을수록 골은 낮다
      -T.풀러-



      25
      우선 겸손을 배우려 하지 않는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O.메러디드-



      26
      백권의 책에 쓰인 말보다 한 가지 성실한 마음이
      더 크게 사람을 움직인다 
      -B.프랭클린- 



      27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지니고 있다
      -E.리스-



      28
      시간은 위대한 스승이기는 하지만
      불행히도 자신의 모든 제자를 죽인다
      -베를리오즈-



      29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생텍쥐페리-



      30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다
      -유대인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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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세의 소망이라는 것이 있어?



      이 시대에 참 믿음의 여부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믿음보다 소망이 있는지를 확인해봐야 한다. 믿는다는 이들은 많으나 진정으로 내세를 소망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러나 참 믿음은 소망하는 믿음이다. 오늘날 소망이 없는 믿음으로만 충만한 이들이 많다. 그런 믿음은 이 땅에서 잘 살고 번영하고 성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둔갑한다. 하나님과 성령을 이 땅의 것에 대한 우리 욕망을 시중드는 시녀로 삼으려고 한다. 기복신앙과 번영신학, 그리고 그와 맞물린 성령운동은 대부분 믿음으로 충만하나 소망은 텅 비었다. 성령은 종말의 영이기에 성령으로 충만하면 소망으로 충만한 것인데, 이 소망 없이 믿음으로 가득 찬 것은 사실 성령으로 위장한 세상 신과 욕심으로 충만한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교인과 목사들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나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부흥을 위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 힘써왔다.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 목사가 되기 위한 야심찬 비전 실현을 위해 15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30년 넘게 성령 충만을 간절히 추구하며 탐구해왔다. 그러나 나를 사로잡았던 소망은 상당부분 자기중심적이고 현세지향적인 것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피를 말리는 것 같이 힘든 학위과정을 거쳐 여러 개의 석사와 박사의 간판을 딴 것이 과연 누구의 이름을 위해 한 것이며, 누구를 위해 종을 친 것인지 깊이 반성하게 된다. 내가 가졌던 비전과 소망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교묘히 위장된 현세지향적인 소망, 즉 목사와 교수로서의 성공과 영광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다.


      이제 그런 비전과 소망이 이루어질 가망이 없어지니 내세의 소망을 거들먹거리게 된다. 요즘은 나를 사로잡아 몰아가는 야망이 별로 없다. 솔직히 빨리 사역을 접고 조용히 쉬고 싶다. 나이 들수록 삶과 사역이 고단함을 느낀다. 이 땅의 것에 별 애착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 이루지 못한 세상의 욕망과 소망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면서 내세에나 소망을 가져본다고 자위한다. 이것 역시 성령이 주시는 건강한 소망 같지는 않다. 일종의 현실도피적인 소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뱅의 말에서 위로를 얻어 본다. 칼뱅은 우리가 이 세상을 지긋지긋하게 사랑하기에 이 땅에서 우리가 행복하고 평안하면 결코 내세를 묵상하고 소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신자의 삶을 힘들고 비참하게까지 하여 우리 마음을 이 땅에서 천상으로 돌리게 하신다고 한다. 칼뱅의 말이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솔직한 진단이다. 이 땅에서 평안하고 번성하여도 내세의 소망으로 가득한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증거이지만, 우리 대부분은 사실 그렇지 못하다. 앞길이 창창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젊은이들, 아직 세상에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많은 교인들은 세상에 대한 소망은 가득하나 내세에 대한 소망은 별로 없다. 역으로 이 땅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잘 풀리지 않고, 삶을 지탱하기도 버거우며 오랜 병과 고난과 역경으로 신음하는 교인들은 다시는 고난과 슬픔과 눈물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만큼 더 소망하는 것 같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박영돈 목사>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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