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목 법궤

 

 

성경에 나오는 조각목이 무슨 나무인지 아십니까? 저는 처음에 무슨 예술가들이 조각(彫刻)하는 데 쓰는 나무인줄 알았습니다. 한자로 풀어보면 조각목(棗角木)은: 대추나무 조, 뿔 각, 나무 목: 그러니까 대추나무처럼 가시가 돋아나고 뿔처럼 단단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은 아카시아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중동지방 광야에 자생하는 나무입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리고 더위와 추위, 바람에 뒤틀려 있습니다. 단단하게 굳어 깎고 다듬기도 어렵습니다. 세상의 먼지바람 속에 시달리고 강퍅해진 악한 인간들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려진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뒤틀린 가시나무를 깎아 법궤, 분향단, 번제단, 널판 등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그 죄인들로 성도를 만드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심 같다 싶습니다.

법궤는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 길이가 2규빗 반이면 불과 110 센티미터 남짓, 어린아이가 들어가 누우면 딱 맞을 작은 사이즈입니다. 조각목을 깎고 다듬어 만들되 정금으로 싸되 안팎으로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달되 이편에 두 고리, 저편에 두 고리를 달고,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빼내지 말고 꿰어서 두고 증거판을 그 속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위에 속죄소를 두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소는 조각목 없이 정금으로만 만들었습니다. 그 크기는 길이 2규빗 반, 너비 1규빗 반으로 법궤의 크기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정금으로 만든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연하여 마주 보며 덮도록 하였습니다.

법궤는 지성소에 모셔졌습니다. 누구든지 함부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성소 분향단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임 당했습니다. 지성소에는 1년 1차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릴 때만 들어갔습니다. 먼저 제사장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정결케 한 다음 온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의 옷자락에 달린 방울소리로 지성소에 들어간 제사장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와 성막을 옮겨가며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들어서자 범람하던 물이 멈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실로에 두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법궤를 모시고 나갔다가 블레셋에 죽임 당하고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의 전에 법궤를 두었더니 다곤 신상이 동강나고 목이 잘라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금독종 다섯 개를 만들어 제를 올리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 법궤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들여다보다가 (오만) 70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후일에 다윗이 법궤를 모셔오려고 할 때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를 붙잡았다가 웃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랫동안 법궤는 두려우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져 왔습니다. 과연 법궤는 단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갖습니다. 우선 싸이즈가 너무 작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명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 물속 무엇이든 어떤 형상도 만들고 섬기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법궤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거나 모시고 섬기는 것을 명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또 속죄소를 그 위에 두게 하신 것입니다. 법궤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위를 속죄소로 덮으라는 것은 정말 너무 이상한 일입니다. 또 그룹천사입니다. 보호라니요. 누가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호한단 말입니까? 법궤가 하나님이라면 그룹들, 네 생물과 천사들은 법궤 아래에 들어가서 법궤를 떠받드는 모양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각목 법궤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법궤와 싸이즈가 똑같은 속죄소는 조각목이 아닌 정금입니다. 속죄소는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피 흘려 대속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참혹한 피흘림의 속죄를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고 눈물로 옹위하였을 것입니다. 그 속죄소 아래 조각목 법궤는 그 약속, 그 증거의 말씀, 그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품어안고 속죄소의 피,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될,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실 성도, 곧 우리일 것입니다. 애굽에서 죽어 누웠던, 소망없이 썩어가던 관이 하나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하여 법궤로 바뀌는 것입니다. 악하고 쓸모없는 조각목이 황금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법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택정하사 가시떨기나무 같은 죄인이던 우리를 다듬어 법궤 되게 하시고, 모든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함과 부족함과 흠을 정금으로 싸 온전하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천군천사로 지켜 인도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애굽의 관 같던 당신, 가시떨기 조각목 같던 당신, 이제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와 법궤가 되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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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늘 조심해야 
        
 
마땅히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반대로 말하지 않아야 할 때 
그것을 참지 못하고 
쏟아놓는 사람은 미련하다.
 
말을 잘하면 유익하나 
잘못하면 화가 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담아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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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떨기나무 불꽃

 

더러 교회들이 수련회 가서 관 속에 들어가는 이벤트를 한다고 하더군요.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면 관 두껑이 닫히고 못을 꽝꽝 박는 망치질 소리가 울리고... 그렇게 한 동안 깜깜한 관 속에 누워 죽음과 절망, 인생의 허무함,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실감나게(?) 느낀다고 그러더군요. 그렇지만 혹 폐쇄공포증이나 심장질환이 있으신 분은 조심해야겠다 싶네요. 창세기는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 다시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관 속에 집어넣으시고 대못을 꽝꽝 박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려 430년 동안 놔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리신 것도 아닌데 그렇게 430년 동안 고통과 슬픔 속에 말입니다.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로공주의 아들, 왕자의 신분으로 40년, 그러나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게르솜을 낳고 40년 동안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구나.” 탄식하며 양을 치는 아무 희망도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산 호렙의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신기한 광경을 보려고 다가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좋은 나무 놔두고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신 것일까요? 가시떨기나무는 소망도 없고 소용도 없이 메마른 광야에 버려진 볼품도 쓸모도 없고 불쏘시개로나 쓰이는 저주 받은 나무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그런 가시떨기나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가시떨기나무 같은 모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며 살인자로 쫓기는 몸, 속절없이 늙어가는 몸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양이나 쳐야하는 신세..... 그 마음은 40년 세월 속에 절망과 울분, 체념과 원망으로 돋아나고 자라난 무수한 가시들로 가득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다 불모지에 버려진 가시나무들입니다. 날마다 아픔과 슬픔의 가시, 미움과 원망의 가시, 체념과 절망의 가시를 돋우고 메마른 광야에서 발악하듯 살아가는 가시떨기나무들.... 조그만 이파리 하나마다 그 이파리 하나도 새에게 먹히우지 않겠다고 가시를 세우고, 그 가시로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삶. 그러면서도 애절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인생, 평생 노래 한 번 부르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 가장 길고 뾰족한 가시에 자신의 가슴을 찔리우고 일생에서 가장 슬프게, 가장 아름답게 운다는 가시나무새 같은, 그러나 아무리 슬피 울고 아무리 목 놓아 운다 해도 아무도 들어주는 이,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들, 슬픈 존재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불로 오셨습니다. 심판의 불로 오셨다면 가시떨기나무들은 불살라져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불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불이 붙은 가시떨기나무들로 광야를, 온 세상을 불타게 하려고 오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앞에 모세는 순종함으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가시떨기나무 같은 우리들, 관 속에 드러누워 430년 동안 썩은 것 같던 우리를 영광스러운 법궤,  세상을 태우는 복음의 불덩어리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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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은 후에 짓는 죄와 구원의 관계 / 박신 목사 


성경문답 사이트를 개설한 이래로, 또 개인적으로 이메일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은 주제는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였습니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경륜이 오래되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데도, 구원에 대해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칭의, 성화, 영화를 구분할 줄은 아는데 각각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그 셋을 연결하여 종합적으로 판단, 적용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으면 미래에 지을 죄까지 이미 다 용서 받았기에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원파 식의 한쪽 극단이 있습니다. 그 반대쪽 극단은 엄격한 도덕주의 율법주의에 치우쳐서 사소한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염려합니다.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이 주제를 직간접으로 이미 여러 번 다뤘지만 각기 조금씩 다른 질문내용에 각도를 맞추어 답변 드리다보니 그 전체를 연결해서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유사한 의문을 가지실 분들이 쉽게 참조하고 오해의 소지를 줄이도록 구원과 죄의 관계를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죄의 본질과 구원

구원은 하나님이 죄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죄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규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에다 말로 남에게 상처 주는 죄(마5:22)와 마음으로 짓는 죄(마5:28)까지 죄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말로 범한 잘못은 당연히 그러하지만 생각 또한 사고 활동이기에 인간이 작심하고 지은 행동의 죄로 봐야합니다. 주님의 뜻은 다른 이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는 행동만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는 자기를 몰라도 자기는 알기에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의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그 모든 죄들이 외부 여건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속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마15:17-19) 행동과 말과 생각을 조종하는 인간의 마음이 따로 있는데 그 자체가 이미 타락 오염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이 타락된 것은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를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배제한 데서 기인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 세우고 마음의 중심에 두었기에 그분을 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선악과를 따먹는 범법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특별히 자기를 최고로 높이려 드니까 인간 사회에서의 경쟁 분쟁 원수가 되는 온갖 윤리적 죄가 발생합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근본 의미도 하나님을 스스로 절대 찾지 않으며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 특별히 자기만 높이는 마음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마음에서부터 죄(생각, 말, 행동)가 나온다면 결국 인간 존재 전체가 죄로 찌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 존재 전체가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요3:5) 존재 전체가 타락되어 있기에 스스로 그 타락된 마음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 심령 안에서 역사해야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죄를 생각, 말, 행동 즉 자신의 의지적 행위로 인한 잘못으로만 정의한다면 논리적으로 의지를 동원해 스스로 깨끗케 되려는 선행 구원이 타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 전체(한 인격체)가 타락되었다면 그 사람을 깨끗케 해야만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진정한 의미

원죄 하의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에 그분의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자연인이 태어난 이후에 하나님께 범과한 그 모든 결과를 보면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법정에선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은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자 단 한 명도 없기에 그분의 공의대로 하자면 단 한 명도 구원을 입을만한 조건, 자격, 공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심이 너무 크신 그분은 우리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며 우리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동과 서는 먼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만나지 못함)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시103:8-12) 구약 시대 다윗의 고백이지만 바로 십자가 복음을 예표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타락한 아담이나 그 이후의 인간들이 당신에게와 같은 인간에게 지은 죄과로 치면 사형에 처해 마땅하나, 그러면 단 한 명도 살아날 자가 없기에 그 죄는 철저하게 응징하되(공의) 그 죄인은 살려주는(사랑) 구원의 길을 태초 전부터 정했습니다.(창3:15, 요1:1, 엡1:3-14)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당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죄인과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엡2:11-18, 히10:10-20)

따라서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는 정확한 뜻은 우리의 죄과는 주님이 다 짊어지셨기에 한 죄인의 인격체 전부가 하나님에게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어떤 죄를 지었어도(사실상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한 죄를 범했어도) 그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용납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눅15:11-32)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갈4:6), 그분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벧전2:9,10).

이런 예수 십자가의 구원은 다윗 시편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베풀어집니다. 그 경외는 단순한 행동으로 지은 죄를 반성하고 고치는 도덕적 종교적 회개(悔改)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만이 아시기에(고전2:6-16)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대로 성령의 간섭과 역사가 전제 되어서 한 존재 전체가 거듭나는 영적인 회개를 수반합니다. 타락한 마음 전체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으로 회심(回心)이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지난날에 지은 죄 된 행동들만 반성해서 고친다면 여전히 선행구원에 머무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을 중심에 둔 자기 존재 전체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서 썩어 없어졌어야만 했다는 철저한 자각입니다. 자기만 높이려고 살았던 지난 모든 삶이 최악의 실패와 절망뿐이었음을 너무나 깊이 깨달았기에 다시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인생의 완전한 유턴입니다. 앞으로는 주님만 중심에 모시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는 순간 이런 회심이 일어나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그 죄인의 회심한 중심을 아시며 본인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과 미래의 죄

예수님이 죄인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대신에 그 죄인은 하나님께 완전히 용납 받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 관계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기는커녕 훼방도 하지 못합니다.(롬8:31-39) 인간의 부모 자식 관계도 절대 끊어지지 않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신자에게서 그분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나 사건은 우주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권능과 은혜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절대로 구원의 취소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용납하고 자기 자녀로 삼아주었기에 구원이 취소된다는 생각은 하나님 그분을 왜곡 부인하는 짓입니다. 인간 부모도 그것도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 아니라 입양한 자녀가 잘못했어도 내치는 법은 없습니다. 평생을 두고 자기 자식처럼 키울 확고한 결단과 헌신이 따르지 않으면 아예 입양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자녀로 받아들인 그 관계를 취소하고 다시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이 그렇게 잘못을 했어도 아버지가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주고 다시 쫓아내는 법은 없듯이 말입니다. 이를 죄와 연관해서 말하면 죄로 인해 받을 지옥형벌이 완전히 면제(free from the penalty of sin)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입장권을 준 것이며 그 준 것을 다시 회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광스런 완성은 이미 보장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신학적 용어로 칭의(稱義-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전혀 의롭지 않은 자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었기에 하나님이 그 주님의 의를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준,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이는 단회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전부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처음 믿은 때입니다. 죄인 그 상태로 그 신분과 소속과 위치만 흑암 사망 사탄의 미혹 아래에서 빛 생명 하나님의 품 안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간섭으로 일어난 일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요 선물입니다.

한 죄인 전체가 이미 용납되었기에 그 후로 죄(생각, 말, 행동의)를 지어도 절대 다시는 지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죄까지 모두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은 후에 죄 지었다고 다시 심판하지 않으니까 미래의 죄도 당연히 용서 받은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십자가 구원은 하나님이 한 죄인(여전히 죄에 찌들어 있는)을 있는 그대로 당신 자녀로 품어주시고 완전히 용서해준 것입니다. 이런 확고한 이해가 없으면 자꾸 구체적 사소한 죄들과 연결해서 구원을 의심하거나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성화와 징계

문제는 구원이 한 죄인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것이기에 그 내면에 있는 죄로 찌든 본성은 그대로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치사하고 추하거나 흉악한 행동을 짓고 싶은 생각이나 습관을 죄의 본성이라고 곡해 하면 안 됩니다. 서두에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만 높이려는 고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를 믿어 회심할 때에 하나님을 멀리했던 지난 삶을 철저한 실패로 인식하고 마음의 전체 방향은 분명히 하나님 쪽으로 돌렸지만 자기를 높이려는 옛 자아의 흔적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 있어서 수시로 하나님을 망각 외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짓는 구체적인 죄도 결국 자기중심성에서 발현된 것이므로 죄와 싸워 이기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붙들어야만 가능합니다.(눅9:23, 롬7:17-25) 이는 바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입니다. 죄의 본성과 그 힘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씨름으로 믿은 후 일생 동안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되 자신이 책임지고 계속적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free from the power of sin)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고 말한 까닭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믿거나 선행을 쌓아서 천국 가는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성화를 충실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성화와 칭의가 시간적 혹은 수준적으로 구분되는 두 단계가 아닙니다. 칭의가 되는 순간 성화도 자연스레 필연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의 행동을 다 없애고 뜯어 고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부인했던 타락한 마음은 확실하고도 완전하게 버렸습니다. 죄의 본질은 씻어졌고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앞으로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면서 지난 인생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완전한 방향전환을 했습니다. 그럼 그분과 동행하는 삶, 성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단지 자기를 높이려는 타성은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서 신자가 그 타성을 얼마나 죽이느냐에 따라서 성화의 정도와 수준만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래에 지은 죄까지 다 용서 받았다고(심판이 면제되었다고) 해서 계속 죄에 더 거할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습관적, 의도적,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는 합니다. 자식이 죄를 지으면 부자관계는 결코 끊지(심판) 않지만, 자녀를 바르게 키우려고 매는 드는 것(징계)과 같습니다.(히12:4-13)

그런데 징계는, 하나님만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아주 비상한 경우를 빼고는, 죄를 지을 때마다 혹은 회개치 않는 죄마다 일대일 대칭으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서운 독선적 하나님이 되어서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도 공포심으로 믿는 척만 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이 계속 돌이키지 않고 잘못을 범해 도저히 그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 싶을 때에 매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징계의 시기와 방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신자가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았다고(단지 심판의 면제이지 징계는 하신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죄를 짓고도 무심해선 안 됩니다. 혹시 회개를 못하고 지나친 죄에 대해선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의 사소한 잘못은 눈 감아 주시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그 영혼에 내주하는 신자라면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집니다. 제대로 회개하지 않은 경우라면 정말 죄로 인식하지 못한 아주 사소한 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것까지 징계는 않습니다.

대신에 신자가 죄에 대해 이전보다 아주 민감해졌고 때로는 성령마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기에 습관적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는 사실상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회개를 하게 되거나 최소한 본인의 죄의식이나 내면의 영적 눌림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경우는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요약하면,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 되어 자기를 대신 높이는 것입니다. 구체적 행동(생각, 말,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은 그 결과입니다. 처음 예수 믿어 얻는 구원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 된 것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용납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자신의 이미 바뀐 신분, 위치, 소속, 특권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성화의 과정에서 아무 두려움과 주저함 없이 죄와 당당하게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합니다.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되었기에 구원 후 짓는 죄도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구원이 취소되는 법도 결코 없습니다. 나아가 천국에서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존재로 바뀌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도 이미 확보된 것입니다. 그 영화를 죄와 연관시키면 더 이상 죄의 형벌과 능력은 물론이며 죄 자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그 때까지는 이 땅에서 죄의 세력과 맞서 싸우며 날마다 조금씩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천국에서의 상급만 달라지지 구원 자체가 변경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회심으로서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 받았지만, 그 형벌(심판)에서 면제된 것이지 구체적 죄를 계속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징계는 받습니다.

1/28/2015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2015년 합신 총회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김성수 목사가 생전에 가르치고 주장했던 내용들 속에 이단성이 많다고 판단하였다. 고 김성수 목사는 미국 CRC(Christian Reformed Church) 교단 목사로서 미국에서 남가주 서머나 교회를 개척(2004)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흥을 얻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설교의 내용과 사상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개혁신학에 근거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원망도 함께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우매한 교인들을 현혹하기 좋은 특이한 소리를 남발하였고, 자기의 괴이한 기준으로 다른 교회들을 저급하다고 매도하였고, 그 반대급부로 자신의 줏가를 올리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사이비 괴변가였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개척한 교회를 성장시켰던 고 김성수 목사는 갑자기 한국으로 이주하여 서울 서머나교회를 개척(2012년)하여 급속한 성장을 또 이루어 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고 김성수 목사의 생전 모습

 

고 김성수 목사의 죽음에 관해 서머나 교회 측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관한 여러가지 의혹이 끊이지 않던 중, 그가 기독교인으로서 해서는 안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 많은 사람들이 큰 충격과 혼란을 경험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 김성수 목사의 죽음에 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그가 생전에 인터넷 도박에 빠져 막대한 채무를 가지게 되어 결국 자살했다는 말도 돈다.

김성수 목사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보여준 행동은 한국 교회에 또 다른 종류의 근심과 염려를 일으켰다. 김성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죽은 김성수와 함께 예배드렸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상의 특이한 신념과 영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오직 죽은 김성수가 생전에 설교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만을 틀고 예배드리기를 고집하였다.

지금 현재 역사하시고 교회 속에 운행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나타나지 않는 죽은 사람의 엣날의 설교 영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못하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는 설교자와 성도들의 신앙활동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시고 살고 있는 신자들은 마땅히 지금 현재 같은 성령의 역사를 따르고 있는 살아 숨쉬는 목회자를 청빙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김성수 추종자들은 그런 성경적이고 상식적인 신앙 자세를 가지지 않고 오직 죽은 김성수 만을 좋아하는 것은 인상을 한국 교회에 주었다. 그러므로 과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김성수의 영적인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의문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김성수가 목사로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만들어 낸 신앙의 열매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죽은 사람의 설교 영상만 좋아하고, 죽은 자의 설교 영상을 틀고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 괴이한 성향을 보이는 김성수 추종자들의 모습은 이단스럽다. 결국 '김성수 귀신숭배', '김성수 제사 종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해도 달리 변명할 수가 없는 모습이다. 지금도 LA 서머나 교회, 북가주 서머나 교회, 뉴저지 서머나 교회, 산타 바바라 서머나 교회, 서울 서머나 교회에서는 2년 전에 죽은 김성수 목사의 설교 영상을 틀고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고 김성수 목사의 생전의 가르침 속에 많은 우려함 점들이 많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왔다. 이미 세상 떠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신앙과 행동도 괴이하다. 그래서 합신의 신학위원회는 고 김성수 목사의 신앙과 사상을 연구하여 2015년 총회에 보고하였다. 합신의 신학위원회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고 김성수 목사의 사상과 가르침이 심히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이라고 보고했다.

1)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운명적인 오해
2)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드는 오류
3) 옛언약과 새언약을 분리하는 오류
4) 인간이 선악과를 먹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그릇된 성경해석
5) 거듭난 신자의 행함과 선행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
6)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
7) 기존 교회를 거짓 교회로 몰아붙이는 오류

그리고 합신 신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1. 이상에서 살펴본 것 같이 고 김성수의 강론 내용은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사료됩니다.
2. 그의 적은 누룩이 많은 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사단적인 요소가 많아 보입니다.
3. 억지로 성경을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벧후 3:16). 연약한 신자들이 미혹에 이끌려 굳센데서 떨어질까 심히 염려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단 산하 모든 교회는 고 김성수의 저술과 강론을 듣거나 그것을 추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합신총회카페/강구만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USFA&fldid=GTt3&datanum=761&q=%

 

사람들이 많이 미혹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회개치 않고 내년으로 기다린다고 하네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당신의 마음에서 놓아주라


그 상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놓아줄 수 있는가?


용서하는 것...


그것만이 그들을 놓아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이 용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보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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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최송연


외로울 때
고요히 눈을 듭니다
당신의 은총을 바라며

슬플 때
조용히 눈을 듭니다
당신의 위로를 구하며

두려울 때도
잠잠히 눈을 들게 하소서
당신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며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목양연가 섬기미/별똥별/최송연 드림.^^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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