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주장하는 어느 예언자

 

 

직통계시자들의 특징

충청도 어느 기도원에서 만난 예언사역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직접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사람을 대하면 두 개의 상(image)이 보인다고 했다. 하나는 육의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 사람이라고 했다. 영의 이미지에는 죄, 악, 숨겨온 과거사가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을 한 뒤에 호소하듯 기도원에 필요한 후원금을 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예언사역자가 어느날 내게 특별기도를 부탁했다. 기도원에서 함께 3년 쯤 알고 지낸 뒤에 비로소 나의 신분을 알았을 때였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 드릴까요?" 하자 남몰래 무슨 일을 하다가 들킨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저는 예언사역자입니다. 근래에 예언의 적중도가 점점 낮아집니다. 적중도가 높아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기독교 세계의 예언사역은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계시한 예언은 100% 완전한 적중도를 가지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가 항도 부산에서 개최되기 직전, 대구에 소재한 어느 기도원 원장이라는 분이 찾아왔다. 정중히 사무실로 모신 뒤 말을 하라고 하자 명함을 꺼냈다. "선지자 000 목사, 00기도원 원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WCC 부산총회 반대 운동 단체의 수장이 회개하지 않은 죄를 마져 참회하고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해야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왔다고 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선지자로 보내어 말을 하라고 하여 자비량하여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그 당시 반대운동의 수장의 나이는 85세였다. 며칠만 금식을 해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연세였다.


내가 아는 어느 분은 가정배경, 재능, 성격, 학력, 경력이 모두 빼어나게 우수하다. 언어 감각이 탁월하고, 한국어와 영어에 탁월하다. 함께 주님을 섬기자고 말하고 싶은 분이다. 그러나 함께 교회를 섬기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는 자주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 꿈에서 본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


직통계시자들이나 기독교 점쟁이들은 산앙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부조화를 겪는다. 자기가 받은 계시와 본 꿈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 영으로 보고 들은 '하나님의 계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에게나 강요하고 또 설득하려고 한다. 신학자의 조언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거나 본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조언, 지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타인이 자기의 말에 거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절제, 겸손, 염치가 결여되어 있다..


홍 아무개라는 분은 2014년 12월에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하나님이 시간을 미루었다고 둘러댔다. 하나님이 직접 자기에게 말씀을 한다는 식으로 변명을 쏟아냈다. 그는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다고 했다. 잘 알려진 학교 때문이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예언자는 4년 동안 1500회 입신을 하여 하늘에 다녀왔다고 한다. 바울이 갔던 삼층천에도 다녀왔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롭다. 구약시대였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거짓예언자라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나는 매일 하늘 지성소에 들어간다. 하늘 아버지의 보좌 오른편을 거처로 삼아 거기에 거하면서 기도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자들은 죽고 부활한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기 때문이다(엡 2:6). 나는 매일 하늘의 임금님을 알현하고, 그의 용안을 바라보며 그 분과 대화하고, 그의 음성을 듣는다. 나의 육신은 이 땅에 머물러있지만 영은 천상에 거한다. 하늘 임금님의 어전과 그분의 품은 기독인이 거하는 영혼의 집이다.

 

나는 직통계시자들,  예언사역자들, 기독교점쟁이들이나 무당들의 모습에서 아련히 자신을 드러나는 미혹의 영의 얼굴을 본다. 그런데도  자칭 선지자, 직통계시자, 예언사역자들이 버젓이 활개치고 다닌다.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공포감을 주는 예언을 말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한다. 종말론 강의를 하기도 하고,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기도 한다.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다. 자기의 주관적 생각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한다.


성령 하나님은 기독신자 안에 거하면서 삶을 지도한다. 성경은 성령내주의 진리를 말한다. 성령님은 기독인에게 필요한 영적인 메시지를 주고 깨닫게 하고 확신하게 하고 그것에 따라 살게 한다. 성령님은 “성경 말씀을 사용하셔서”(cum verbo) 우리를 통치하시며 인도하시며 이끄신다. 기독인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되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성령님의 인도에 따르는 일에 민감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기도하고 또 여러 방면에서 심사숙고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시간, 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늘보좌에 계신 임금님의 용안을 보며 또 영의 눈으로 영적인 세계를 간파한다고 함은 직통계시자, 거짓예언자, 기독교 점쟁이나 무당들이 연출하는 그런 종류의 무엇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님은 지금도 역사한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은사를 주고 교회를 섬기도록 특별한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인도가 무당이 사단의 말을 받아 말하는 것 같은 형태가 아니라고 믿는다.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계시, 예언은 사도들과 함께 종결되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기록된 말씀에서, 그것과 더불어 성령님이 내게 말씀하는 '음성'을 들으려 한다. 이 음성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답을 하거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이렇게 말씀합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리가 아니다. 영적 감각과 지-정-의 기관을 거쳐 전달되거나 느껴지거나 확신하게 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직통계시자, 예언사역자, 자칭 선지자들의 공통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페이스북에 올려진 <교회와 신앙> 정윤영 기자(unique44@paran. com)의 글을 참고한 것이다.

 

 

1. 직통계시자는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특정 내용이나 사건에 대해 무엇을 직접 보고, 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받은 직통계시의 내용에는 어느 시점에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는 등의 예언만이 아니라 타인의 경조사, 생로병사·생사화복 등도 포함된다.

2. 직통계시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그 내용에 대해 절대 복종을 하도록 몰고간다. 그 밖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다.


3. 같은 사안에 대한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충고나 경건하고 신앙적인 권면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계시사역, 예언사역, 선지자 사역의 문제점을 말해 주어도 수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하여 화를 낸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준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4. 직통계시자는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거절하거나 그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으로 단정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공포감과 두려움을 신도들에게 심어준다.
 

5. 직통계시자가 초기에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계시의 전달자’로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계시자’로 여긴다.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을 직접 만나주고,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들려준다는 착각에 빠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시의 전달자’와 ‘계시자’의 경계를 허물어 뜨린다. 교만해 지고, 절대적 독선에 빠진다.

 
6. 직통계시자는 조용히 자신 안에 말씀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눈을 감고 하나님께 물어보기도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신들린 무당이 말을 하듯이 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7. 직통계시자는 대부분 성경을 자신이 받은 계시를 합리화하고 수단화하는 방법으로 이용한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이용한다.

 

8. 직통계시자는 하나님이 그분의 음성을 항상 직접 들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지하고 지속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진지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설교 사역을 맡고서도 설교 준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성령이 직접 할 말을 지도하므로 미리 공부를 하거나 사전에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착각에 빠진다.


9. 직통계시자의 최종 목적이 자기 뱃속 채우기인 경우가 허다하다. 늘 추종자들에게 거액의 헌금을 요구한다. 무당이 복채를 요구하듯이 은밀히 돈을 요구한다. 상대의 부요함이나 가난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헌금을 바치지 않으면 더 큰 불화, 재앙,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10. 자칭 직통계시자, 예언자, 선지자는 자신의 신적 권위 또는 영적 권위를 절대시한다. 타인을 지배하려고 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겸허히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11. 자칭 직통계시자, 예언사역자,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신자들이 있다. 처음에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 말씀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한다. 방어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소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얽매이고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러다가 점차 심리적으로 그들에게 예속된다.


12. 직통계시자, 예언사역자, 선지자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독자적이지 못하고, 결단력이 약해진다. 종국에는 노예처럼 끌려다닌다. 잘못된 신앙생활로 빠진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예언을 하게 하고 방언 형태로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한다고 믿는 것은 완성된 특별계시의 기록인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거부하는 일이다.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의 표준임을 부정하며, 성경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발상이다.



최덕성 교수 (브니엘신학교 총장)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Bacha Bazi Reveals The Dark Secret Life Of Islam’s Pedophile And Homosexual Culture

 

아프카니스탄은 오랫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국가로서, 남자와 

여자들이 모두 이슬람의 교리를 신중하게 따른 나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런 경건한 겉모습 속에 숨겨진 어두운 비밀이 있다.

 

무슬림들이 만든 선전 영상에서 우리는 종종 “성난 이슬람 교도들”이 

동성애를 행하는 무슬림 사람들을 지붕에서 떨어뜨리는 모습을 본다. 

이유는 꾸란이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무슬림의 하위문화엔 동성애, 심지어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동성애가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것이 동성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관계의 대상이 되는 남자아이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희한한 주장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Bacha bazi라는 아프카니스탄 용어가 있다. 

직역하면 ‘boy play(남자아이 놀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만 보면 아무런 해도 없는 놀이로 보인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어른들 앞에서 춤추며 노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이들은 성노예에 불과하다. 

약 10살 짜리 남자아이들이 중년남자들에게 둘러쌓여 

그들의 성적인 만족을 채워주는 놀이인 것이다.




 

Shukur는 12살 무렵 납치를 당해 ‘bacha bereesh’가 된 케이스이다. 

5년 뒤 그는 이곳에서 탈출하여 지금은 생계를 위해 춤을 추고 있다. 

그는 매우 다행스러운 경우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칸에 파견되는 미군들에게 아프칸의 어린남자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성적인 학대를 받는 것을 무시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지만, 

많은 미군들이 이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하다가 값진 댓가를 치루기도 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Bf2rBUC6F_0

 


*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비록 경건의 모양을 가질 수는 있어도, 경건의 능력을 경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억압된 숨겨진 욕망을 상대적으로 나약한 아녀자와 아이들에게 쏟아내고 있는 이들의 사악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전북 익산에 할랄단지가 조성이 되면 이 사악한 문화를 가진 

이슬람들이 몰려와 우리의 아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을 희생의 대상으로 삼게 될 것이다.   

나라의 앞날이 염려스럽다. 




- 예레미야 -






글퍼온곳 : 네이버블로그-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아

6.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맺으며)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love, the love of God & charity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For now we see through a glass, darkly; but then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but then shall I know even as also I am known.]
그 때는 구리 놋으로 거울을 만들었기에
거울의 표면에 얼굴이 선명하게 비치지 않았듯이,
이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아 희미하나,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채찍을 맞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으로 돌아가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안다고 하지만
아직 부분적으로 알아 희미하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하나님의 의(공의)가 아직 믿음이 온전치 않아 희미하나,
이제, 주께서 나를, 우리를, 온전히 지금의 상태를 아시는 것 같이
그 때에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에는
주께서 나를,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된다.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abideth faith, hope, charity,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는 이 13장에
사랑이 없으면 = have not charity, 사랑은 ~하지 아니하며. 8번
사랑 = charity, 사랑은 ~ 하며. 7번 나타나 있다.
이는, 사랑, ‘charity’ 은 모든 걸 감싸주는 무조건 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道)로 분별된 사랑을 의미하기에
믿음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를 믿고 체험하는 신앙의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약속을 믿는 믿음,
이 믿음의 결실은 종당(從當)에 사랑이신 하나님께 돌아가기에  
믿음의 완성은 사랑 ‘charity’ 이다.
소망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 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공의)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charity’ 의 바램이라
소망의 완성은 사랑 ‘charity’ 이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이 이루어낸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의 이 땅에서의 실현이고,
하늘나라에서의 완성이라,
사랑‘charity’ 은 위대하고 영원하기에,
바울은
이토록 위대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체험하고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로 강력하게, 강압적으로 강권(强權,constraineth)하였고
이를 고린도교회 같은 우리 시대, 개인과 교회를 향한 강권으로 받아드려
바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 나를 강권하였고,
마음속에 물밀듯이 일어나는 강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 전서5: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이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고
그가 대신하여 죽으심은 우리로,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죽었다 살아나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 으로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후서5:15]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무엇인가?
그 사랑으로,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6편의 글로, 턱없이 부족하지만 바울의 심정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강권함은,
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그 사랑‘charity’의 능력이 믿는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고,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검이며, 우리의 평안이며, 우리의 기쁨이라
죽음까지도 유익하기에,
그 사랑 ‘charity’ 의 소식, 복음을 받은 자로, 사랑의 빚 진 자로
그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먼저 자신을 향한 강권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서, 삶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산제사가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자신이 변하고 우리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사랑은, love  
사랑의 하나님, the love of God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이 사랑을 증명하시는 성령님의 사랑, love 이
우리의 믿음, 소망이 되어 하나님의 의(義)인 복음이 세상에 전도되어
공의의 하나님(righteousness of God) 의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흘러, 공의가 만민의 빛이 되게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이사야 51:4]
그러다 늙어 백발의 면류관이 같이
[백발의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21:3]
그러다 주님을 따라 구하는 생명과 공의의 영광을 얻고,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잠언 21:21]

사랑이란
사랑이신 하나님께(the love of God)
받은 사랑으로(For God so loved the world)
이룬 거룩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본향으로 돌아가는 영광과 생명을 얻는 길이라
사랑이란,
신실한 믿음과 간절한 소망의 증거요, 결과라,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사랑은 영원하다.

이제 사랑이신 하나님과
거룩한 사랑 ‘charity’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
이를 마음의 중심에서 증거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길 구하노라
For this cause I bow my knees unto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Of whom the whole family in heaven and earth is named,
That he would grant you,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lory,
to be strengthened with might by his Spirit in the inner man;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by faith; that ye,
being rooted and grounded in love,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by faith; that ye,
being rooted and grounded in love,
May be able to comprehend with all saints what is the breadth,
and length, and depth, and height;
And to know the love of Christ, which passeth knowledge,
that ye might be filled with all the fulness of God.
에베소서 3:14-19]

아멘 !



     



배경 음악은 Tom Barabas의 "Adagio"입니다.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겐 너무 멋진 하나님  (0) 2016.01.14
침묵해야 할 때  (0) 2016.01.12
용감한 탐험가의 기도  (0) 2015.12.14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의 표상일까?  (0) 2015.12.08
감사의 힘  (0) 2015.12.04

민간인 상대 잔혹행위 속 대원모친 공개처형 사연에 지구촌 분노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 국가'(IS)의 대원이 7일(현지시간) 친어머니를 공개처형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IS의 잔학한 범죄 행각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IS는 그간 포로를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야지디족 여성을 성 노예로 삼고 어린이를 고문하는 등 각종 반(反)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러왔다.

2014년 미국 국적의 기자 제임스 라이트 폴리를 잔인하게 참수하고 영상을 공개한 데 이어 미국·영국·러시아·일본·중국 출신의 포로를 줄줄이 살해했다.

지난해에는 요르단 전투기 조종사인 마즈 알카사스베(26) 중위를 철창에 가두고 불을 질러 살해해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포로 또는 시아파, 쿠르드족 출신 등을 익사시키거나 건물에서 떨어뜨리고 폭발물을 이용해 살해하는 동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또 비이슬람교도인 포로의 장기를 적출할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범죄행각도 심각한 상황이다.

IS는 이라크 소수민족이자 비(非) 이슬람교도인 야지디족 여성을 납치·성폭행하고 인신매매를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는 코란 암송 대회의 1·2등 상품으로 야지디족 여성을 걸기도 했다.

야지디족 여성들은 10달러나 담배 10개비에 3~4차례씩 팔려 다니며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고된 감금생활 끝에 자살하기도 한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이외에도 IS는 점령지 여성에게도 가혹한 규율을 적용하며 처벌을 가장한 살해를 저지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락까에서는 한 여성이 거리에서 부르카로 아들을 덮은 채 수유를 하다가 순찰대에 적발돼 살해당했다.

복장이 규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채찍질을 당하거나 생매장을 당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이 인권도 위협받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시리아에서 망명한 14세 어린이가 IS에 붙잡혀 전기 고문을 당한 사실을 털어놨다.

IS는 전직 이라크 경찰의 자녀라는 이유로 5개월 된 영아를 살해했으며 6∼9세의 야지디족 여아를 성폭행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또 어린이 대원을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참수 영상을 보여주고 직접 포로 총살을 시키고 있다.

이달 3일에는 포로 총살 동영상에 네 살배기로 보이는 아이가 등장해 "저기 있는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들을 죽일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낳았다.

가장 최근인 7일에는 시리아 락까에서 20대인 IS 대원이 자신의 어머니를 공개 처형하는 반(反)인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공개 처형 이유는 어머니인 레나 알-카셈(45)이 아들 알리 사크르(21)에게 IS를 버리고 도시에서 떠나자고 설득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시리아인권관측소는 IS가 2014년 6월 스스로 국가 수립을 선포하고서 1년 반 동안 시리아 지역에서 처형한 민간인이 무려 2천여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heeva@yna.co.kr

    눈꽃 최송연 하얀 새의 깃털처럼 부드러운 너 뾰족한 가시 탓하지 않고 살포시 그 위에 내려앉네 너의 그 부드러움은 뾰족해서 시린 가슴도 넉넉히 감싸줄 수 있으리 새하얀 이슬 머금어 깨끗한 너 시궁창 더럽다 탓하지 않고 그 위에도 사르르 찾아주네 너의 그 깨끗함이 더럽고 추한 만상(萬象) 모두 덮고 남을 수 있으리니 순결한 그분의 사랑 전해주는 네가 있어 온 누리에 새하얀 꽃이 피네

     

     

    *외면적(표면적), 입술만으로가 아닌, 진실과 순결한 사모(성도)가 나가야 할 길을 쏟아지는 하얀 눈꽃에 비유해 본 것입니다.^^ *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소망  (2) 2016.01.20
당신 사랑은...  (0) 2016.01.13
새해 새 아침의 내 기도  (6) 2016.01.07
성육신의 주  (0) 2015.12.27
기억을 위한 기도  (0) 2015.12.22


기쁨을 같이 하고픈 사람들    

 오늘하루 
 당신이 계신 자리에서 잠시 눈을 감고
 내면을 한번 들여다 보세요. 

먼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단 하나의 걸작품임을 
 스스로에게 일깨우세요. 

그러면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얼굴에 자신감으로 인한 
 미소가 피어날 것입니다. 

이제 
 한사람 한사람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정다운 인사를 나눌수 있도록 
 가슴을 열고 눈을 마주치며 웃어 보세요. 

분명 마음이 닫혀있던 사람들이 
 당신에게 호감어린 시선과 
 뭔가 기대에 찬 얼굴로 마주설 것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자이의"(敎子以義)  (0) 2016.01.23
    겨울에도 씨뿌리는 사람  (0) 2016.01.19
    물이 맑으면  (0) 2015.12.26
    삶이 힘들고 외로울 때  (0) 2015.12.16
    비교하면 멀어지는 행복  (0) 2015.09.22

     

     

     

     

     

    휴거신앙에는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 부정적인 요소는 휴거신앙에 빠져서 날짜와 징조만을 따지면서, 일상을 소홀히 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긍정적 요소는 자신의 행실과 마음을 깨끗히 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기를 간절히 추구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그냥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들림 받겠지요?" "휴거에 대해 관심을 갖는 자체가 커트라인이 될 수는 없지 않나요?"

     

    우리 주위에는 실제로 휴거나 재림신앙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볼 때마다 왜 이렇게 극성스럽게 믿어야 하나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딜레마가 생길 때 가는 곳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지?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언급하신 말씀을 기록한 곳은 4복음서 중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첫째, 그 날과 그 시는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다.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은 오신다.

    (마 24:36,42,44,50, 25:3, 막 13:32,33,35, 눅 12:40,46)

     

    이 말씀이 무려 10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확실히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다>는 대명제에 속한다. 그러므로 날짜와 시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주님은 도둑처럼 오신다(마 24:43, 눅 12:39, 데전 5:2, 5:4, 베후 3:10, 계 3:3, 16:15)는 말씀도 7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도둑은 절대 예고를 하고 오지 않는다.

     

    그 날과 그 시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 때를 분별하라는 말씀은 하셨다. 그 날과 그 시는 한 점에 속한 좁은 개념이지만, 때는 그보다 넓은 개념이다.

     

    주님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에게 주신 힌트들은 다음과 같다.

    노아의 때와 같다. 그들은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깨닫고 있어야 한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워라.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재난이 시작될 것이다.

     

    정확한 날은 모르지만 그 시기를 깨닫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런 말씀들을 주셨다. 또 들려오는 뉴스나 서로 격려하는 글들을 통하여 시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 날과 그 시는 어떤 특정한 날을 기다리지만,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이 그날일까를 매일 기대하고 준비하면서 사는 것이다.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그러나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느니라"

     

    둘째, 깨어서 준비하라!

    그냥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분은 깨어 준비하는 신앙과는 다른 신앙이다. 열심히 하는 신앙은 목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열심은 주로 사역에 관한 것이다. 교회봉사, 전도, 선교, 각종 섬김, 예배참석, 찬양 등등...

     

    이런 것들은 교회의 핵심요소들이고, 그리스도인으로써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맞지만, 이것 자체가 깨어 준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언급하신 깨어 준비하라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내가 다시 오는 그 날에 혼인예식이 있을 것인데 그날 깨어서 신랑을 맞이하고 신부로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도록 하라.

     

    이것은 그져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목적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역 지향적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마음을 헤아리면 도움이 될 것이다. 신부는 혼인식날 입을 최상의 드레스를 준비하고 날씬하게 보이고 싶어서 대부분 체중조절에 들어가고 모든 일에 절제한다. 또 신랑과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하고 행실도 조심할 것이다.

     

    따라서 하늘의 혼인식을 앞둔 우리는 <그냥 열심히>가 아니라 목적에 맞게 열심히 해야 한다.

     

    악한 종은 그 날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여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살았다. 반면 충성된 종은 주인이 오면 곧 문을 열어줄 것처럼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열심있는 종은 주인이 오는 것에 관심없이 그져 일만 열심히 하였다.

     

    계시록에 기록된 혼인예식을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어린 양의 혼인하는 날이 임했다. 그의 신부가 단장을 마쳤다. 세마포로 만든 신부의 옷이 주어졌으니 이는 그들의 옳은 행실로 만들어진 옷이다.

     

    어린양의 혼인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복되다. 혼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복인 것으로 보인다. 넓은 의미로 신부단장이라고 한다.

     

    예복은 흰 옷, 세마포 옷, 두루마기 등으로 표현되는데 계시록에만 11번이나 기록되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계 3:4)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 3:4)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계 3:5)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계 3:18)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계 7:9)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계 7:13)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4)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계 16:15)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 19:8)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계 19: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계 22:14)

     

    그냥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예복을 준비하지 않는다. 내가 신부라는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면 전혀 관계없는 목록이다. 열심신앙은 평일로 돌아가면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은 성공과 번영이고 그의 중심에는 삶의 목적이 행복이다.

     

    그러나 신부단장은 삶의 목적과 중심이 오직 그리스도가 된다. 예복은 혼인식이 임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준비하는 것이다.

     

    계시록의 말씀에서 얻은 힌트는 혼인식에 흰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하며, 이 옷은 희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깨끗하게 세탁하는 방법은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여 회개하는 것이고 이에 못지 않게 옳고 깨끗한 행실을 가지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최상품의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혼인식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로 승화되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매우 쉬운 일인데 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너무 세상에 연결된 죄의 고리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일상에서 평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고리들이 무엇인지 자신은 잘 알고 있다. 이 고리들과 싸워서 이겨내고 잘라내야 비로소 바르게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예루살렘 혼인잔치에 참석하느냐, 환란에 남느냐? 자신을 준비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보상이 나타날 것이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카이로스 / acoloje

    존 웨슬리가 동역자들에게 준 열두 가지 지침

     

     

    1. 부지런하십시오. 어느 한순간도 일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이 없게 하십시오. 결코 단 한순간도 그런 시간이 없도록 하십시오.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 필요한 장소, 필요한 일에 매달리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게 하십시오.

     

    2. 진지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이 당신의 동기가 되게 하십시오. 사소하고 가벼운 모든 일들, 농담이나 어리석은 대화들을 피하십시오.

     

    3. 여인들과 , 특별히 젊은 여인들과 사적으로 만나서 대화 나누는 것을 가능하면 피하십시오.

    4. 결혼을 할 때는 먼저 그 계획을 나에게 알려 주십시오.

     

    5. 다른 사람의 악한 행위에 대해서 섣불리 믿지 마십시오. 당신이 직접 그 일을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것을 믿는 것에 항상 신중하십시오. 모든 일에서 최선의 결론을 끌어내십시오. 판사는 언제나 죄수 편이어야 함을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6. 다른 사람을 험담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특별히 당신이 하는 말은 암종처럼 당신 자신의 마음을 좀먹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가슴속에 지켜 두십시오.

     

    7. 단순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점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곪게 할 것입니다. 당신 가슴 속에 있는 분노의 불을 최대한 빨리 밖으로 표출시키십시오.

     

    8. 귀족인양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춤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듯이 당신은 귀족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는 모든 사람들의 종인 것입니다.

     

    9. 죄 외에는 어떤 것에도 수치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허락된다면 나무를 하거나 물을 긷고, 자신의 신이나 이웃의 신을 닦는 것과 같은 허드렛일 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마십시오.

     

    10. 시간을 엄수하십시오. 모든 일을 정확한 시간에 하십시오. 되도록 우리의 규칙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지키기를 힘쓰십시오. 진노하심을 입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11. 영혼 구원하는 일 외에 당신이 해야 할 다른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오직 이 일에만 온전히 모든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리고 항상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지 말고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십시오.

     

    12.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지 말고 복음 안에서 자녀 된 자답게 행동하십시오. 더욱이 당신의 시간을 우리가 지시하는 대로 보내느냐는 당신 자신의 몫입니다. 설교와 심방에 시간을 보내면서도 독서와 묵상, 기도에 시간을 보내기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주님의 포도원에서 동역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가장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때와 장소에서 우리가 권고하는 사역의 부분을 맡아서 담당해야 합니다.

     

    - 존 라일, 『18세기 영국의 영적 거성들』 pp 152-153

     

     

     

    출처: 청교도의 길을 함께     한산 2011.07.29 13:55   http://blog.daum.net/kds2012/245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청교도 1세 목사인 아버지와 역시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11명의 자녀중 귀한(?) 외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신학자이며 저술가이며 영적 부흥을 주도한 목회자로서 더욱 나타난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목회했던 노스 햄프턴은 대각성 운동의 진원지였다. 하지만 250년이 지난 오늘날 노스 햄프턴은 타임지에서 '레즈비언의 수도'로 손꼽혔으며, 매사추세츠는 미국 최초로 동성애자의 결혼을 합법화하기도 했다. 이것은 한인 목회자들이 가서 기도할 제목이다.

    1. 조나단 에드워드 기념교회

    조나단 에드워드는 미국의 1차 영적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으며, 1차운동은 2차 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을 가게되고 평양대부흥운동과도 연결이 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기념교회에서 한인목사들이 모여 그에 대한 소개를 듣는 것도 의미가 적지 않다.

    2. 노스햄프턴 제일교회

    걸어서 기념교회 옆에 있는 노스햄프턴 제일교회(The First church, North Hampton)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지난해에 이어 문석호 목사(뉴욕효신장로교회)가 세미나를 인도한다.

    이 교회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23년동안 사역했던 교회이다. 그는 예일대학 설립자중 한 사람이었던 목사의 딸인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하였으며, 장인이 소천하고 이어 30세에 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적색 오래된 벽돌건물인 노스햄프턴 제일교회의 앞에는 "1727-1750, 조나단 에드워드가 설교했던 제 3 예배처"라는 표식이 있다. 예배당 안의 에드워드를 소개하는 작은 액자들이 있다. 현재의 예배당은 2번의 화재로 새로 지었으며, 400여석 정도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23년간 몸담았던 제일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정회원이 되어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에드워즈는 교인들이 익숙해진 기준보다 훨씬 높고 엄격한 확실한 회심과 그 회심의 열매가 있는 사람으로 제한하는 기준을 고집했다.

    3. 조나단 에드워드의 기념비

    버스로 10분정도의 거리에는 인근의 묘지에는 에드워즈 기념비가 있다. 비바람에 씻긴 초라한 기념비는 비문조차 읽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곳에는 그의 11명 자녀들과 후손들의 무덤이 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묘지는 이곳에 없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1758년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됐으며, 총장으로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55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에드워드 부부의 묘지는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묘역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70조 결심문

    1. 나의 전생애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지금 당장이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수많 은 세월이 지나가든지 간에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말자.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인류 전체의 행복과 유익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내가 부딪히게 될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한 그 어려움이 아무리 많고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자.

    2. 전에서 언급한 사항을 잘 지키기 위해 도움을 주는 어떤 새로운 수단이나 방 법을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노력하자.

    3. 혹시라도 내가 넘어져 점점 무감각해져서 이 결심문 중의 어떤 내용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다시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회개하자.

    4.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면 영혼에 관계된 것이든지 육체에 관계된 것이든지 또는 적든지 많든지 간에 어떤 것이라도 절대로 하지 말자. 만일 내가 그런 일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자.

    5. 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6.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힘껏 살자.

    7. 만일 내 생애의 최후 순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면 절대로 하지 말자.

    8. 모든 면에서, 즉 말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도 나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는 것처 럼,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똑같은 잘못과 실수를 범한 것 처럼 행동하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나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계기로 삼고, 나의 죄와 비참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기회로만 삼자.

    9. 매사에 나의 죽음과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자.

    10. 고통스러울 때는 순교의 고통과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자.

    11. 해결해야 할 어떤 신학원리가 있을 때, 만일 상황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 문 제 해결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즉시로 하자.

    12. 만일 내가 교만이나 허영이나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을 좋아하 고 있다면 즉시로 그런 것들을 버리자.

    13. 도움과 사랑을 꼭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자.

    14. 절대로 복수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지 말자.

    15. 비이성적인 인간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화라도 내지 말자.

    16. 절대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자. 그렇게 하는 것은 다수간 다른 사람을

    불 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며, 실제로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17. 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 일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자.

    18. .내가 최고로 헌신한 상태일 때, 그리고 내가 복음과 천국에 대해서 가장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때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그렇게 살자<

    19.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기 전, 최후의 한 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라고 가정하고 그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말자.

    21. 먹고 마시는 것은 엄격하게 절제하며 살자.

    22.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나의 힘, 능력, 활력, 열심, 적극성을 다하여 가능한 한 천국에서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이 생각되는 일을 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행하자. 그리고 그 일의 원래 의도와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원인을 파악하자. 만일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을 '결심문4'를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자.

    24. 내가 어떤 현저한 나쁜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추적 하자. 그런 다음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나쁜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과 내 힘껏 싸우도록 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찾 아내자. 그런 다음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과 싸우자.

    25.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찾 아내자. 그런 다음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과 싸우자.

    26. 내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들을 발견하면 버리자.

    27. 절대로 고의로 어떤 일을 태만하게 하지 말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태만은 예 외지만, 자주 내 태만을 점검하자.

    28. 성경을 아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자주 연구하자. 그렇게 해서 깨닫고, 쉽게 이 해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라가자.

    29. 절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바랄 수 없는 것을 기도라 고 생각하거나 기도로 인정하거나 기도의 간구라고 하지 말자. 또한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바랄 수 없는 것을 죄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30. 지난주보다 신앙과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더 나아지도록 매주 노력하자.

    31. 결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어떤 말을 하지 말자. 그러나 성도의 명예를 아주 실 추시키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을 아주 저해하는 것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

    32. 잠언 20장 1절에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기록된 것이 나에게 해 당하는 말이 되지 않도록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내 신념에 충실하자.

    33. 다른 면에서 지나친 손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언제나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유지 하고 평화를 지키는 방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자.

    34.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참되고 단순한 진실만을 말 하자.

    35. 내가 지킨 의무에 대해서 의심이 많이 생길 때마다 그 일로 내 마음의 고요함과 평안함이 깨어지면 의문 사항들을 기록하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을 강구 하자.

    36.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말자. 단 그렇게 하는 것이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경우는 예외다.

    37.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내 가 자신을 부인했는지 등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또한 매주 말, 매월 말, 매연 말 에도 그렇게 하자.

    38. 일에는 절대로 농담이나 우스개 소리를 하지 말자

    39. 절대로 합법성에 의문이 많이 제기되는 일을 하지 말자. 동시에 그런 일을 하고 난 후에는 그 일이 합법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조사하자, 또한 만일 내 가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합법적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일도 마찬가 지다.

    40.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지 자문해보자.

    41. 매일, 매주, 매달, 매해의 마지막에 어떤 면에서 더 낫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그 렇지 못했던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42. 세례 받을 때 하였고, 성찬식 할 때 진지하게 하였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종종 새롭게 하자. 그리고 오늘 1월 12일 나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였다.

    43.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이 나의 것인 양 행동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인양 행동하자. 토요일에 깨달은 것과 일치하게 행동하자.

    44. 다른 어떤 목적도 아닌 신앙만이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자. 신앙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행동하지 말자.

    45. 신앙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에도 절대로 쾌락이나 고통, 기쁨이나 슬픔 등을 느끼지 말자. 어떤 감정도, 조금의 감정도 품지 말자. 그리고 그런 것과 관련된 어떤 환경도 만들지 말자.

    46. 부모님에게 어떠한 걱정이나 심려도 끼쳐 드리지 말자. 가능한 한 말이나 눈동자 에 전혀 내색을 하지 않도록 해서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특히 가족중의 누구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도록 조심하자.

    47.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선하고, 보편적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고, 조용하고, 평화롭 고, 만족하고, 편안하고, 자비롭고, 관용적이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적이고, 의무를 다하고, 부지런하고 근면하며, 자애롭고, 침착하고, 인내하고, 절제하고, 용서하고, 진지한 성품에 도움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지 말자. 그리고 항상 이러한 성품이 되도록 하자. 그리고 매 주말마다 내가 그렇게 실천했는지 여부를 엄격하게 점검하자.

    48.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알기 위 해서 그리고 내가 임종의 순간에 이 문제에 대해서 회개할 무관심의 죄를 조금 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아주 세밀하고도 부지런하게 그리고 가 장 엄격하게 내 영혼의 상태를 조사하도록 하자.

    49. 만일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절대로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자.

    50. 내가 내세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한 것이 최선이었고, 가장 지혜로운 것이었다 고 판단하게 될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자.

    51. 죽을 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것 처럼 모든 면에서 그렇게 하자.

    52. 나는 종종 노인들일 자기가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겠다라고 말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노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때 가서 '내가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되는 바로 그런 일들을 하자.

    53. 내가 가장 기분이 좋은 상태일 때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내 영혼을 주 예수 그 리스도께 던지고 맡기자.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자. 완전히 주님께 헌신하자. 이 로써 내가 나의 구속주를 알므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54. 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내용을 들을 때마다 나도 그런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그 일을 본받도록 노력하자. 1723년 6월8일

    55. 이미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을 맛본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최선을 다하자.

    56. 아무리 내가 실패하더라도 내 안에 있는 부패와의 싸움을 절대로 포기하지도 말 고 조금도 긴장을 풀지도 말자.

    57. 불행과 불운에 대한 염려가 생길 때, 내 의무를 다했는가를 돌아보고 의무를 다 하도록 결심하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 자. 할 수 있는 한 나는 내 의무와 내 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자.

    58. 대화를 나눌 때 불쾌하거나 초조하거나 화를 낸 표정을 짓지 말고 사랑스럽고 즐거우며 친절한 모습을 보이도록 하자.

    59. 나쁜 성질과 분노가 가장 많이 치밀어 오르려고 할 때, 가장 많이 노력해서 좋은 성경이 드러나도록 행동하자. 그렇다. 그럴 때 비록 다른 측면에서 불이익이 있 을 수도 있고, 다른 때는 경솔하게 될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성격을 드러 내도록 하자.

    60. 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하게 되기 시작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 아주 불편한 마음이 생기거나 감정이 밖으로 일관성 없이 표출될 때는 내 자신을 엄격하게 검사해 보자.

    61. 핑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사실 게으름은 핑계 거리를 만들도록 하는 경향이 있 지만- 신앙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내 생각을 흐트러 뜨리고 풀어지게 하는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62. 결코 어떤 일을 의무감으로만 하지 말고, 에베소서6:6-8에 따라서 기쁘고 자원 하는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자. 어떤 사람이 어떤 선 한 일을 하든지 간에 그는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자.

    63. 어떤 순간에도 모든 측면에서 인격의 어떤 부분이나 어떤 환경 하에서도 언제나 성도다운 참 빛을 비추며, 탁월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참으로 완벽한 성도가 세상에 단 한 명 있다고 가정할 때, 만일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힘껏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자.

    64. 바울 사도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시편 기자가 시편119:20에서 말하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 을 다하여 이것들을 향상시키도록 하자. 또한 나의 소원을 아뢰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러한 열심을 반복적으로 내는 것이 약 해지지 않도록 하자.

    65. 전 생애 동안 이것을 있는 힘을 다해 연습하자. 즉 맨톤 박사의 시편 119편 설 교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나의 모든 죄와 유혹과 어려움과 슬픔과 두려움과 희망과 소원 그리고 모든 것과 모든 상황 속에서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열어 놓자.

    66. 어느 곳에서나, 어느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항상 친절한 태도와 분위 기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자. 의무상 다르게 행동해야 할 때는 예외다.

    67. 고난 후에는 고난으로 인해 내가 더 나아진 점이 무엇인자. 어떤 유익을 얻었는 지, 또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도록 하자.

    68. 약점이든지 죄이든지 간에 내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나 자신에게 솔직히 고백하자. 만일 그것이 신앙에 관련된 것이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필요 한 도움을 간구하자.

    69.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볼 때, 나도 저렇게 했으면 하는 것들을 항상 행하도록 하자.

    70.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자.

    ⓒ 아멘넷 뉴스 7주년(USAamen.net)

    '조나단 에드워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교만  (0) 2017.09.21
    사람들이 미혹에서 해방되어 진리로 인도될 때  (0) 2015.02.03
    영적 교만  (0) 2014.08.03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의 특징  (2) 2013.11.18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0) 2013.11.04


     

     

     새해 새 아침의 내 기도
                       최송연

    주님,
    이 새해 새 아침에…
    당신의 영을 내게 부어주소서
     
    주의 순백한 영으로
    내 삶에 순수성을 잃지 않고
    날마다 영원을 향해 피어나는
    새순(筍)이기 원합니다
     
    흐르는 세월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갉아 병들게 하고
      
    숨겨진 죄악은
    마음에 느껴지는 모든 것을
    시꺼멓게 더럽힐 수 있습니다
     
    미움과 증오는
    인생이 가꾸어야 할 초원을 
     바싹 마른 검불로 태워 사위고
     
    매서운 역경의 된서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살아가는 날 동안 
    쉽게 낙담하는 연약함에서 벗어나
    조금 더 강해지는 것은 좋으나
    당신의 도움없이도 잘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자고하지 않게 하시며
     
    사람을 사랑하되
    그 영혼을 사랑하게 하시고
    한 점 죄악도 가슴에 숨겨두지 않도록
    분초마다 내 안과 밖을 살피시사
    견인(牽引)해 주시기를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그리하시옵소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 사랑은...  (0) 2016.01.13
    눈꽃  (0) 2016.01.09
    성육신의 주  (0) 2015.12.27
    기억을 위한 기도  (0) 2015.12.22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0) 2015.11.19

    전쟁 속의 거짓 평화, 이제는 깰 때라!

     

    성경의 예언을 믿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써 지금의 세계정세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심판의 마지막 때를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가는 매우 급박한 시대임을 느낀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이슬람을 통하여,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대 환난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본다.

     

    매 5분마다 그리스도인들이 알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족이 잘리고, 목 베임을 당하고 있다.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서 그렇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상한 것은 전 세계가 이것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테러와 학살은 몇몇 잘못된 과격주의자들의 짓이지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거짓되고 가증한 소리만 녹음기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란의 기록을 보여주어도 그것은 이슬람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일 뿐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거짓방송을 내보내고 있음을 본다.

     

    지나간 역사들을 바라볼 때, 만일 기독교가 지금의 이슬람이 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단 하나라도 하였다면 전 지구촌이 들썩거리며 여기저기에서 기독교를 규탄하려고 난리들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전 지구촌은 이슬람의 극악무도한 행위들에 대하여 숨을 죽이고 있다.

     

    동성애 등을 위한 차별금지법, 이슬람의 한국 상륙이라는 심각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그것도 지극히 적은 일부의 사람들만 그것에 대하여 울부짖을 뿐, 대다수의 나머지 국민들은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음을 본다.

     

    지금 유럽과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의 극악무도한 행태들에 대하여 전혀 무감각하게 바라보거나, 혹은 아예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지금 전 지구촌은 무슬림들에 의한 심각한 인권유린과 차별금지법에 의한 정상인들의 역차별로 인한 심각한 고통들로 신음을 하고 있다.

     

    이슬람이 주장하는 것은 전 세계의 이슬람화이지 종교평등과 자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슬람의 샤리아 법은 비무슬림들을 참수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가족들마져도 명예살인으로 죽이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슬람과 차별금지법의 심각성을 알리는 글을 여기저기 올려본다.

     

    놀라운 것은 여러가지 증거자료들과 함께 올려진 그런 글들에 대하여 이슬람을 공격하기 위한 편향된 허위사실의 유포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세상 사람들이야 그럴 수 있고, 또 그렇다 치더라도, 깨어 있어야 할 교회들마저 그런 것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혹은 무감각한 상태로 요지부동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사 56:10-12)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한국 기독교계가 혹시라도 이상과 같은 것은 아닌지...

     

    주님,

    한국 교계가 혹여 그런 상태라면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보는 눈,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 던지는

    믿음의 전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

    마지막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유용하게 쓰임 받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이병천 카페 [성령전인치유목회] 원문보기   글쓴이 : 이병천 목사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탈북 경험담!

     

     

     

    정말 말도 안나오는 일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리 땅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구별하지 못하고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북한은 영원히 저런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정신차리지 않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교회(그리스도인)가 분별하지 못하고, 관심갖지 않고,

    회개치 않고, 이런 상태로 계속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북한땅을 여실리 만무합니다.

    되려 우리에게 심판이 임할까 두렵습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이땅의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통회와 자복하며 행동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부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끊이지 않는 살육!

     

    끊이지 않는 살육 속에서 북한 주민들이 절규합니다. 말을 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을 하며 소망이라곤 전혀 없는 처절한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발버둥칩니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너진 마음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신음과 핍박 그리고 아픔들이 바로 남한 교회를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유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지 않고 침묵하는 수많은 남한 교회들에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북한 정권의 칼부림 아래서 극도로 탄식하는 북한 주민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북한 정권과 거짓 평화를 외치며 북한 정권을 어르고 달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악독함을 넘어서는 국가적 차원의 악독함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다가 걸리면 총살당하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연명하는 북한 주민들을 애써 외면하고 김일성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봉수교회에 남한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바치는 사역자들은 무슨 연유인지 이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창궐한 영적 불모지 북녁 땅을 위한 기도보다 이땅에서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악독함을 하나님은 조명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잔인한 이기심입니다. 수천만명을 학살한 짐승같은 정권과 무슨 경제협력이며 수백만명을 굶겨 죽인 사탄 정권과 무슨 연방제입니까?

     

    한낱 인간에 불과한 김일성을 신으로 숭배하는 북한 정권은 무너져야 합니다. 북한 정권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인본주의 시각은 부서져야 합니다. 종북좌파 세력은 무너져야 합니다.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의 탄식에 대한 남한 교회의 태도가 바로 남한을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현재 남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남한 교회는 이것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합니다.

     

     

    글 출처: '예슈아 제4권' 수록글 (예슈아 출판사)

    http://cafe.daum.net/biblemunjanara


    하나 됨은 다른 사람을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 됨은 다른 사람이 변화되길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논쟁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용납입니다. 하나 됨의 첫 걸음은 무엇입니까?

    용납입니다.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용납하는 것입니다.

    타협이나 중재나 동화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용납이라는 첫걸음을 뗀 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들입니다.


    #은혜를 만끽하는 비결/맥스 루케이도


    용납 :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이해 :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출처: 사모님사모님/이화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0) 2016.01.13
    소중한 만남  (1) 2016.01.12
    새해 다짐  (0) 2016.01.03
    진짜 중요한 일  (0) 2015.12.21
    감정을 숨기는 것도...  (0) 2015.12.20

    눈(snow)은

    우리의 마음을

    동심의 세계로 돌려놓는

    참으로 이상한 마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눈은 사람의 마음을

    순결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눈을 보면 웬지 깨끗하고

    순수해지고 싶은 마음까지 생깁니다.

     

    눈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요?

     

    눈이 있어서

    세상은 더 아름답고,

    눈이 있어서 겨울이 더 즐겁습니다.

     

    벌거벗은 산이라 할지라도

    눈이 덮이면 아름다운 설산으로 바뀝니다.

     

    보기 흉한 산도

    눈이 내리면 곱게 화장한 여인같이

    순식 간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게 되죠.

     

    그럼, 눈이 내리는

    겨울 요세미티의 모습은 어떨까요?



    21091846_1.jpg

    눈이 내리는 날,

    연인과 함께 요세미티를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1091846_2.jpg

     

    동화같은 풍경 속에

    동화 속에나 나올 듯한 요세미티의 채플...



    21091846_3.jpg

    요세미티에 눈이 내리면

    California black oak, ponderosa pine,

    incense-cedar, white fir 등의 나무가 거대한 성탄 tree로 바뀌게 됩니다.



    21091846_4.jpg

    엘 캐피탄 주변의

    ponderosa pine 들이

    거대한 성탄 장식용 tree로 보이지 않나요?


    21091846_5.jpg


    21091846_6.jpg

    Tunnel View 앞에 서 있는

    거대한 폰데로사 소나무(Ponderosa Pine)에 눈이 내린 모습...


    21091846_7.jpg

    사진의 오른쪽 뒤에 요세미티 폭포의 모습이 보입니다.


    21091846_8.jpg


    요세미티의

    Upper Fall(1,430ft / 435m)과

    Lower Fall(320ft / 98m)의 모습이 보입니다.

     

    요세미티 폭포는

    Upper와 Lower를 합친 것을 말하는데

     

    Middle Cascade(675ft / 205m)까지 합하면

    총길이 2,425ft(740m)로 높이로 따지면 세계 7위의 폭포입니다.


    21092901_9.jpg

    길이 320ft(98m)인 Lower Fall의 모습입니다.


    21092901_10.jpg

    약간 멀리서 바라 본 요세미티 폭포의 모습...


    21092901_11.jpg

    조금 더 가까이서...


    21092901_12.jpg

     

    Cook's Meadow에서 바라 본 Oak tree와 Half Dome의 모습...


    21092901_13.jpg

     

    조금더 가까이서...

    오른쪽에 Big Oak Treedml 모습이 보입니다.


    21092901_14.jpg


    21092901_15.jpg

    요세미티의 설경을

    카메라에 담는 여류 사진사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이런 여류 사진사를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또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21092901_16.jpg

    메세드 강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방문객들의 모습...


    21094017_17.jpg

    눈내리는 혹한의 겨울인데도

    oak tree에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단풍들이 남아 있군요.


    21094017_18.jpg


    21094017_19.jpg

    아이구 허리야!

    눈 때문에 허리가 구부러졌나 봅니다.


    21094017_20.jpg


    21094017_21.jpg

    마지막 잎새...

     

    세월에는 장사가 없는 법,

    아무리 붙어 있으려 발버둥 쳐도

    언젠가는 모두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오겠죠.


    21094017_22.jpg


    21094017_23.jpg

     땅위에 살짝 덮인 옅은 운무가 몽환적인 모습을 연출합니다.


    21094017_24.jpg


    21094752_25.jpg


    21094752_26.jpg


    21094752_27.jpg

    Valley View 방향에서 바라 본

    신부면사포 폭포(Bridalveil Fall)의 모습입니다.


    21094752_28.jpg


    21094752_29.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21)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입니다.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내리막길을 걷는 반면,

    이슬람은 가장 성장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근거없는 루머도 많이 퍼지고 있는 양상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사실일까요?

    이슬람 전문가 유해석 선교사는 말합니다.


    1. 영국
    무슬림 수 550만, 모스크 1,800곳... 

    700여 개의 교회가 모스크로,

    기독교 정복 의미로 헐값에 사들여

    이슬람 개종자 대부분은 지식인과 중산층 출신의 기독교인

     

    2. 독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나라 독일도 루터의 경고처럼 

    신생아 중 25%가 무슬림, 2041년이면 원 인구 상회 예상

     

    3. 프랑스
    '톨레랑스의 나라'에서 부르카와 니캅 착용을 금지한 이유:

    국가 정체성마저 변질되고 있기 때문

    매년 소녀들 7만 명 강제결혼, 3만 5천 명 할례수술


    4. 이탈리아
    이슬람, 교황이 거주하는 로마 가톨릭의 상징

    국가를 노리다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보다 큰 모스크 건축 열망

    가까운 리비아 해변에서 무슬림 난민 대거 유입

     

    5. 다른 유럽 국가들 무슬림 숫자
    유고 276만명(26%), 보스니아 230만명(60%),

    알바니아 220만명(70%), 불가리아 170만명(21%),

    오스트리아 34만명(4.1%), 스위스 31만명(4.2%)...

     

    중동정치 연구자 버나드 루이스는

    "금세기 말까지 유럽이 이슬람화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유럽은 지금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출처 : 옛적 그 선한 길(the old path way) 원문보기   글쓴이 : kns113

    안식일’과 ‘주일’ 박영선목사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킨다. 십계명에서 안식일은 네번째 계명에 해당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성일로 지키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밖에 없다. 모든 교회가 다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지키고 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문제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어떤 율법보다도 중요한 계명이었다.

     광야생활 중에서도 안식일에는 만나마저 내리지 않았고 안식일 전날에 이틀분이 하늘에서 내렸다. 또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본인 뿐만이 아니라 집에 유하는 손님도 일을 못하게 했다. 물론 가축도 일을 시키지 못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우리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이다. 이때에는 돈도 최소 금액만 지니도록 했다. 무게를 달아 너무 무거운 옷은 입지 못했다. 필요 이상으로 옷을 많이 입는 것도 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의 안식일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신자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고 주일에 모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초대 교회에서는 안식일 대신에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을 모이는 날로 정하였으며 의미에 있어서도 안식일보다 주일이 더 중요한 날로 바뀌었다. 오늘날도 안식일에 모이지 않고 모두 주일에 모이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안식일을 지키는 동일한 개념으로 주일을 지켜야 되는가? 아니면 어느 부분은 이제는 안 지켜도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이야기 하는 관점에서 안식일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천지창조를 메세지화 한 것이다. 하나님은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레 되는 날에는 쉬셨다. 이것을 ‘하나님이 이레 되는 날 쉬셨으니 너희도 쉬어라’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하나님이 여드레 되는 날 다시 일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레 날은 끝이 없다. 날자는 엿새까지 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되돌려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셨다. ‘이레 되는 날 쉬셨다’는 뜻은 ‘더 이상 만들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레 후에 모든 날들은 쉬는 날이다. 엿새동안 하신 일로써 천지창조는 완벽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준 요일의 개념 속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하나님이 일하신 날들의 대표라고 한다면 칠일은 하나님이 일을 다 하시고 완성한 표의 날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에는 더 손댈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이제는 할일이 없다. 안식을 명하여 쉬어라’ 하는 뜻이다. 이 말의 뜻이 왜 일을 안하는 것으로 요구되고 있는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메세지 화하려는 의도가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

       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

       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출 31:12-17)”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적 차원에서의 명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메세지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그 ‘표(表)’를 어기는 것이다. 

      안식을 어긴다는 것, 말하자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메세지화 작업’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이 심각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그것이다. 믿는 사람이 말로는 창조론을 믿으면서도 자기의 삶의 표현에 있어서는 진화론으로 가게 된다면 그것은 신자가 ‘신앙생활로서 만들어야 될 모습은 아닌 것이다’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자주 오해되는 부분은 율법의 요구를 단지 윤리 도덕의 요구로 바라보는 점이다. 율법의 요구는 그것이 그 계명이 갖는 메세지 때문에 요구되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부분들을 상징화하고 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던 제사 제도는 폐지되었다. 상징화의 뜻이 확실해진 부분에 대하여는 우리에게 그 예표나 상징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지켜야 하는 것들의 하나가 안식을 주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식일이 왜 주일로 옮겨졌는가?’하는 문제는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살펴 볼 것이나 그 둘 사이에 면밀히 이어지는 하나의 공통되는 점이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3)”

     

    ‘안식일의 개념’과 ‘주일의 개념’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주일의 개념’이 구속적 차원의 메세지이고 ‘안식일의 개념’을 창조하는 차원의 메세지라는 것이다. 안식일이 ‘하나님이 혼자서 완벽하게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것의 표로써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기를 요구한 날이라면 주일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역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날이다.

     

      초대 교회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안식일이 주일로 옮겨졌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다’라는 표현을 우리 삶의 영역에서 ‘표(表)’로 걸어 놓고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날‘, 그날이 구약식으로 하면 안식일이고 신약식으로 하면 주일이다.

     

      우리가 식사를 하기 전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기도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하는 것은 내가 개인적인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보다 더 큰 메세지가 있는 것이다. ‘주일은 교회에 나간다’ 이것이 제 삼자들에게는 커다란 메세지가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주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주일을 상당히 많이 틀리게 지키고 있는 셈이다. 제 삼자가 볼 때에 “저 사람은 주일에는 남다르게 굴더라”하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만큼 지켜야 한다. 이날만은 가능한 한 돈을 안 쓰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이날은 주일이라는 것이 전달되어야 한다. 다른 날과는 절대 구별이 있어야 한다. 시험을 망치는 한이 있어도 주일에는 공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형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형식을 왜 미워하는가 하면 그것이 위선과 형식주의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 자체가 욕먹을 일은 아니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장 아름답게 메세지화 하라고 준 주일이 우리가 치장하지 못해서 제 삼자에게 그날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책임이다. 

     

      주일이 주말로, 레저의 날로, 뛰노는 날로 인식된 것은 신자들에게 99% 그 책임이 있다. 믿는다는 문제가 전달되고, 십자가는 전달이 있어도 ‘주일’이라는 날이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 그렇게 큰 힘을 갖고 형태화 되어 있지 않다.

     

      주일을 지킴에 있어 우리는 가장 쉬운 일부터 해야 한다. 그날이 다른 날과는 구별되는 날이라는 마음의 준비와 긴장이 필요하다. 주일은 다른 날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날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 가족 모두에게 그날은 ‘주일’ 즉 ‘주의 날’로 전달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 아버지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 메세지를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은 생각에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날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로서  형식화해야 한다. 형태화해야 한다. 그 일은 내 삶의 한 부분을 구별해서 어느 형태로 만들어야 되는 날이기에 어렵다. 가장 먼저 그날을 만들기로 마음 속에  결심부터 해야 한다. 우리는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메세지화’하는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형태를 마음 속에 지니기로 결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안식일의 개념’과 ‘주일의 개념’에서 공통되는 부분이 하나가 있습
    니다. 그것은 ‘주일의 개념’이 구속적 차원의 메시지이고 ‘안식일의
    개념’을 창조하는 차원에서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하나님 혼자서 완벽하게 천지를 만드셨다’라는 것의 표로
    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기를 요구한 날이라면 주일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역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혼자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에 이루어
    ...
    지기 때문에 안식일이 주일로 옮겨졌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안식일이 갖는 의미가 천지창조 말고도 구속의 사건
    과 연결되는 부분이 앞으로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다’하는 표현
    을 우리 삶의 영역에서 ‘표(表)’로 걸어 놓고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
    하시는 ‘날’, 그날이 구약식으로 이야기하면 안식일이고 신약식으로
    이야기 하면 주일입니다.

    기도의 뜻과 안식일 - 박영선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점 보는 크리스천
    기자와 만난 역술인 "신자라면 죽기살기로 교회가라"
     
    황인상 기자   기사입력  2015/12/25 [06:41]
    “점보는 이들 99%가 기독교인... “선교지 어디?” 묻는 목사도
    스스로 자기가 주인되려는 욕망이 점집으로 이끌어

     
    새벽기도를 정말 열심으로 하는 자매가 있다. 그런데 오랜만에 교회에서 만난 그의 표정이 영 편하지가 않다. 이유를 물으니 조금은 충격이었다. “나 내년부터 삼재래 그래서 나쁜 것 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야.”
     
    삼재란 불교에서 유래된 재앙 명으로 12지간에 따라 인간에게 9년마다 걸쳐 찾아오는 3년간의 악재를 말한다. 그런데 그걸 왜 교회에서 막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인가? 그리고 기독교인임에도 삼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고 그 사람을 욕할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믿느자라고 하지만 미신이나 악귀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것을 점술 등에 의지해 대비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나님을 통해 귀신을 쫓겠다며 더욱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경우는 그나마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런 확신이 약한 경우, 무속인이나 기타 의지할 곳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아닌 무속이나 기타 역학 등을 통해 미래를 의지하는 것일까? 또 점을 보러 찾아오는 크리스천들을 보는 무속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그런 궁금증을 한번 해결해보고자 LA 한인타운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무속인의 집을 직접 찾아가 보았다. 신년운세를 물으며 그에게 여러 질문들을 건넸고, 몇 가지 답변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사실 기독교인이라 이렇게 찾아오기가 마음에 부담이 컸다”라고 말을 건네니, 무속인은 “여기 찾아오는 이들 99%가 아마 기독교인일 것이다”라고 답한다. 그런데 그렇게 단정 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성도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럼 목회자들도 심심찮게 들린다고 한다. “아주 친한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분은 심지어 선교지를 나갈 때에도 어디가 좋을지 찾아와 묻기도 합니다. 이곳을 찾는 대부분 목사님들은 특히 가정을 꾸리시기 때문에 특별히 물질과 관련해 조언을 듣길 바라죠”라며, 얼핏 들어봐도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점을 보러 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반 성도나 목회자도 다름이 없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목회자 누구냐고 묻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물어봐도 가르쳐주지는 않을 것 같다.
     
    “선생님은 내년부터 삼재에요. 내년하고 후년의 운세는 생각보다 좋지 않아요. 새로운 일보다는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시는 것이 좋게 나오네요” 말띠인 기자는 올해 말부터 내년이 삼재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말띠, 개띠, 호랑이띠가 앞으로 3년간 악재가 낀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내 나이또래 친구들이나 특히 82년생 개띠 자매들이 유독 결혼이나 사업 등의 이유로 점집을 많이 찾는 것 같다. 하지만 계속 난 기독교인이기에 이런 점을 보는 것이 편치 않음을 내비치니. 그는 현세에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열심히 믿고 죽으면 천국을 간다지만, 글쎄요.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죽으면 그냥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있을 때 내가 천국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계속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무엇을 달라고 하면 그게 나중에 어떻게 될 걸로 많이들 아시는데…”
     
    즉 그의 말을 통해서 보면 이렇게 찾아와 점을 보는 것은 결국 불안한 미래에 대한 대비, 그것을 통해 지금을 천국처럼 잘 살겠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논리가 지금 기독교인들에게도 너무 팽배하다. 새로운 사업을 앞두고 점을 한번 보고 싶다는 한 형제는 “점을 통해 미래를 대비하고 지금을 안정되게 꾸릴 수 있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또 안정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재미로 한번 보는 것이지 그게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는 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현실의 안정과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 점을 보는 이유. 그래서 점을 보는 사람도 종교와 관계없이 부담을 떨치라 말하고, 보러 오는 사람들도 안정이 곧 신앙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라고 여기기 때문에 죄책감을 더는 듯 듯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안정과 미래에 대한 대비를 꼭 점이나 역술을 통해서 얻어야 하나?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음에도 이렇게 점을 보러 오는 기독교인들은 본인의 신앙에 확신이 없는 것 같다. 오렌지카운티에서 비즈니스가 아닌 개인적으로 역술을 보는 지인이 있다. 그는 “아무리 해도 점괘가 안 나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신에게 자신을 모두 맡겨버린 사람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은 이런 통계나 수치가 소용이 없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즉 우리가 너무나 쉽게 내뱉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이라는 것을 실천하는 이들에겐 점집을 찾을 이유가 없다.
     
    이번에 찾은 무속인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다. 무속인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 어떤 종교를 믿든 찾아와 점을 보는 이들을 나무랄 것은 없다. 의뢰자의 요구와 요청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에 관해 조언을 해줄 뿐이다. 그런데 무속인으로부터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교회를 이왕 다니는 거라면 죽기 살기로 나가세요.”
     
    그는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결국 한국 교회가 어떻게 믿음을 펼쳐왔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가 기복에 근본을 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의 사랑을 말하지 않나요? 나의 한쪽 뺨을 맞고 다른 뺨을 내줄 수 있는 교인이 요즘 있습니까? 되레 호되게 더 상처주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이 요즘 기독교인들이 아닐까 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인데, 사랑은 없고 자신의 영화만을 원합니다. 겉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실천이 없는 것이 요즘 교회들이 가진 자화상 같아요”라고 되묻는다. 이런 이야기를 무속인에게 들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사실 이에 대해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교회를 정말 교회답게 열심으로 섬기고 있는지 나부터 묻고 싶었다.
     
    사실 따져보면 주변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 믿음인지 의심되는 사람들이 많다. 기도 제목 대부분은 자신의 영광, 사업이 부흥, 가족의 건강, 좋은 배우자, 자녀의 성공 등이 대부분이 아닌가? 이것들을 하나님이 들어주시길 원하고 바라지만, 사실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럴 때 기복만을 위해 기도를 했던 자들의 경우가 점집으로 발을 옮기는 것 같다. 어떤 종교든 그것을 정말 열심으로 믿으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 무속인의 입에서 “교회를 다닌다면 열심히 다녀라”라는 말은 열심히 믿으면 그 안에서 해결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내 것을 다 내어놓고 하나님을 향하면 그분이 모든 것을 감당하신다는 변하지 않을 진리마저도 의심하고 사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는 쉽게 “재미로 보는 건데 어때? 그냥 한번 보는 것 가지고”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죄악이 분명하다.
     
    ‘성경이 점술을 금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쓴 김지찬 교수(총신대/구약학)의 말을 인용해보자면 “고대 이스라엘의 인근 이방인들은 미래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이들은 미래를 알아내어, 악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소위 액땜을 하길 원한 것이다. 고대 마술사들은 “역사적 운명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들의 미래를 조작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길 원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복술과 초혼과 마술 같은 풍습을 금하는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즉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자신이 주인노릇을 하려는 것이 바로 인간 최초의 원죄라고 김 교수는 전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을 선하게 인도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점집이나 무속인들을 찾아 내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고 든다. 이 얼마나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죄악을 일삼는 동시에 우둔한 일인가?
     
    지금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궁금증으로 고민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내년이 삼재라 의심되고 불안한가? 가족을 부양하는 부담감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목회자인가? 그럴 때 당신이 세례교인이자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자라면 점집을 찾기보다 성경을 찾아라.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 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신18:15)”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으킬 선지자만을 따르는 무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SPAN style="FONT: 11pt/170% Malgun Gothic, 돋움체; LETTER-SPACING: 0px; font-size-adjust: none; font-stretch: normal">



    [앵커]

    올해의 마지막인 오늘 전국 각 교회에서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실 텐데요.
    우리가 매년 드리는 송구영신예배의 기원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문화현장, 이사라 기잡니다.

    [기자]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시간과 1월 1일의 새해 첫 시간에 드리는 예배를 송구영신예배라고 합니다.

    송구영신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로 송구영신예배에서 교인들은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새로운 해를 맞아 새로운 신앙의 다짐과 결단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년 드리는 송구영신예배는 언제 처음 시작 한 것일까?

    UCLA 한국기독교학 옥성득 교수는 1885년 12월 31일 우리나라에 들어 온 초기 선교사들이 했던 제야 기도회가 현재 우리가 드리는 송구영신예배의 기원이라고 말합니다.

    1884년 알렌 선교사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부 등이 우리나라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밤, 이들 장로교와 감리교 초기 선교사 10명이 연합으로 모여 철야 제야 기도회를 하며 이듬해에 개종자 한 명을 허락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같은 기도는 이듬해 7월 18일 노춘경이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는 결과로 열매를 맺습니다.

    같은 해 12월 31일 선교사들은 다시 철야 제야 기도회로 모여 더 많은 개종자들이 생기도록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1887년 9월 23명의 교인으로 새문안교회가 10월엔 4명의 교인으로 정동제일교회가 설립됩니다.

    두 교회 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철야 제야 기도회를 보고 구정 때 한국인 연합 기도회를 가졌고 이 기도회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송구영신예배로 자리 잡게 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송구영신예배,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이 남긴 소중한 신앙의 전통입니다.

    이사라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출처: USA 아멘넷

    허상을 쫓지 않고 곁에 있는 자를 챙기겠습니다.

    대단한 일보다 맡겨주신 양에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평생 은혜를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친절도 귀하게 받고 축복하겠습니다.

    스승의 허물을 들추지 않고 감사한 것만 담겠습니다.


    일 때문에 사람을 잃지 않겠습니다.

    천하보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작은 약속도 신중히 이행하겠습니다.

    늘 사람의 마음을 살피겠습니다.

    앞서 지휘하기보다 받쳐주고 격려하겠습니다.

    인격과 예의를 갖추고 제 안의 주님을 높이겠습니다.

    늘 화목을 도모하고 겸손하겠습니다.

    하루해가 넘도록 분노하지 않으며 그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겠습니다.

    성취 형이 되기보다 과정 하나하나에 진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며 현재를 최상으로 누리겠습니다.

    어디서나 자족하며 맑고 따듯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더 갈망하며 달려가리니 결코 자만하거나 게으르지 않겠습니다.

    온전하고 흠이 없도록 나 자신에게 엄격하겠습니다.

    죽기까지 죄와 싸우겠습니다.

    항의하고 탓하기보다 제가 끌어안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눈앞에 늘 서있겠습니다.

    부엌일을 하며 수도사들을 섬겼던로렌스 형제 그는 하찮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상 속에 빛나는 진리의 소중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중한 만남  (1) 2016.01.12
    용납  (0) 2016.01.06
    진짜 중요한 일  (0) 2015.12.21
    감정을 숨기는 것도...  (0) 2015.12.20
    사과 좀 깍아주세요  (0) 2015.12.14

    사랑의 매는 줄


    지구와 또 모든 혹성들이 수십 억 년 한결같이 태양을 돌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인력 때문입니다.
    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줄 같이 잡아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별도 물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변함도 없습니다.
    전기자기력은 중간에 철판 같은 것을 넣으면 차단됩니다.
    그러나 인력은 어떠한 장애물이나 다른 별이 중간에 끼어도 차단되지 않습니다.
    만일 인력이 가로 막히거나 차단될 수 있다면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끼어들어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지구는 태양으로부터의 인력을 잠시 덜 받게 되어 흔들거려야 합니다.
    반대로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를 가로막아 개기월식에 일어날 때는
    달이 출렁,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야 합니다.
    만일 인력이 차단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인력차단판을 설치해놓고 그 위에서 하늘높이 뛰어 오르고
    그 위에서 쉽게 로켓도 쏘아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력을 차단하거나 그 강도를 변화시키거나 그 방향을 굴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인력이 한 순간이라도 그 세기가 변하거나 방향이 휘거나 끊어졌었더라면
    지구와 또 모든 혹성들은 이미 오래 전에 태양으로부터 튕겨져나가 흩어져 우주의 미아가 되어 제멋대로 가버렸을 것입니다.

    사랑의 띠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잡아매는 줄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우리에게서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랑의 강도가 변한 적도 없습니다.
    휜 적도 없고 방향이 바뀐 적도 없습니다.
    만일 한 순간이라도 그랬더라면
    우린 이미 옛날에 다 하나님으로부터 튕겨져 나가 뿔뿔히, 먼지조각처럼 흩어지고 허무와 멸망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띠 안에서 우리는 왜 불안해 하고
    그 사랑의 띠로 하나 되지 못 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 하고 다투는 것일까요?

    .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짐보 ㆍ 2015-12-28 (월) 10:43 IP: 96.xxx.163    

    4.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love, the love of God & charity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seeketh not her own, is not 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간직한 사람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사랑은 꼴사납게 행하지 아니하며,
    부적당 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seeketh not her own,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The wife hath not power of her own body, but the husband: and likewise also
    the husband hath not power of his own body, but the wife.
    고린도전서 7:4]
    은 결혼에 대하여 바울이 권하는
    아내와 남편인 부부 조차 자기 몸의 주장(유익)을 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
    ‘Love seeketh not its own.’
    사랑은 자기의 것을 찾지 아니한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is not easily provoked,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자는 쉽게 화내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의 사람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thinketh no evil,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 2:8]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having no evil thing to say of you)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은 사람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교회는,
    너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실히 그 증거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너희 안에 있는지 확증하고 확인하고
    그래서 그 사랑이 없다면 버린 자라 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다시 언급하면 너는, 너희는, 너희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간직하였는지
    세상 사람처럼, 세상 사람보다, 더 부적당 하고 무례 한지,
    자기의 유익과 주장을 구하여 니편 내편 편(便)을 가르고
    성을 쉽게 내고 싸움박질 하는지,
    그래서 악한지, 시험하여 스스로 증명하여 확증하고,
    우리의 허물로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로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사랑 ‘charity’ 가 너희 안에 있는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다면 너는, 너희는, 너희 교회는 버림받은 자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한국이나 이곳 교회의 크나큰 실책은
    세대와 세대의 신앙의 단절 이다.
    기성세대에 집중하여야 교회의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고
    부모들의 교회출석은 자녀들과 같이 참석하기에,
    2세들의 예배와 교육은 전도사나 부 교역자의 몫이었다.
    이후 급격한 경제 문화 사회의 충격적인 변화를 교회가 감당할 신앙의 능력이 양성되어 있지 못했고, 잘못된 부흥관과 치우친 은사주의의 맘몬니즘의 폐해, 등은 각종 미디어의 출현으로 이미 폐쇄적인 교회와 교단의 모습이 속속히 알려지게 되었고, 부모세대보다 부차적이고 소홀했던 2세 교육은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을, 신앙의 불신을 가져 왔고, 여러 원인이 있으나 신앙을 다음세대에 무려주어야 할 유산인데 결론은 실패하였고
    이제라도 교회다운 교회를 위하여 회개하고 개벽 같은 개혁운동이 일어나야 하는데 우리의 모습은 겉모습만 교회라 종교인의 모습이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제 출산율이 늘더라도 빈 교회가 생길 텐데, 줄어드는 출산율로
    노인들만 남은 교회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모두들 무사태평이다.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을 간직한 모습일까?
    젊은이 들은 우리 부모세대에 불신으로 떠나는데,
    그들의 눈에 교회는 다투고 싸우는 장소로, 돈 욕심에 눈이 멀었다 하는데.
    좀 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랑 charity를 간직했더라면
    좀 더, 정직하여 정의롭고, 공정하여 공평하였더라면
    좀 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것을
    이로서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줄 알아 전도가 되었을 것을.
    이로서 세상이 좀 더 환 했을 것을.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을 잃어버린 우리시대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변함없이 유효하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34-35]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낮게 오신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charity, 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 ‘charity, 로 서로 사랑하라 하신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얼마나 마음의 중심에 간직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얼마나 가슴에 박혔는가, 라
    그 분량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의 분량만큼이, 믿음의 분량이고
    그 분량만큼, 상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안다.
    이 의미는,
    이 현실은, 세상에서 질타(叱咤)의 대상이 된 교회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만큼, 그 만큼의 질타가 된다.
    이 원인을 모르면 그는 교회 선생의 자격이 없고 더구나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
    구실은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으로
    세상이 악하다는 건, 초 신자, 요즘 같이 교회출석만 얼 만큼 해도 직분이라고 받는
    서리집사의 구실 거리를, 교회의 선생이나 지도자의 변명이라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거나
    아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약 이다 고?
    성경을 보자.
    에베소서 2장 1-2절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사랑
    ‘charity’ 로.
    [2.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Wherein in time past ye walked according to the course of this world,
    according to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 the spirit that now worketh
    in the children of disobedience:]
    그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몰랐을 때에는,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으니
    불순종한 자녀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권세를 잡은 영을 따랐으나
    그러나 이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는 살리셨는데
    아직 세상 풍조를 따르고,
    세상 사람들의 시류를 따르고 문화를 따라서
    불순종한 자녀로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름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길도 아니다.
    이제 눈을 떠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18]
    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도리를 지켜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개혁해야 하는데,
    그런데 요즘 대부분의 설교는 구원론에 벗어나지 못한다.
    10년 전에 설교하였던 내용을 오늘 설교하고 반복 또 반복이다.
    왜,
    구원받은 자의 언행이나 가치관에 대하여 성경을 풀어서
    구체적으로 설교하지 못하는가.
    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charity’ 을 퇴색시키어
    거룩한 능력을 무시하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켰고 변화시키는 역사(work)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역사라 우리 모두는 역사의 일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고백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애 못 박히고
    바울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애 못 박혔다는 고백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로 말미암아
    세상의 풍조로 시류를 따르던 사조를 버렸기에 단절을 선포하며
    세상과의 격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
    그 거룩한 사랑 ‘charity’을 간직한 사람으로,
    세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개혁하겠다는 단호한 태도이다.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람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

      새 해에는 새 소망 지난 한 해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 감사드리면서... 모든 아픔과 슬픔일랑 사라지게 하시고 새 해에는 새 소망으로 채워주소서 사랑하는 식구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목양연가 섬기미/최송연 드림

    ;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은 부활의 때가 아니다  (0) 2016.04.13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자!  (3) 2016.02.05
    난 정말 주님을 닮고 싶은데...  (4) 2015.12.12
    가장 슬픈 것  (2) 2015.12.08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0) 2015.11.24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앤털롭 캐년의 오묘한 빛  (0) 2016.01.13
    눈오는 날의 요세미티  (0) 2016.01.06
    꽃보다 더 매력적인 희귀 '난초 사마귀' 화제  (0) 2015.12.29
    우주의 크기  (0) 2015.12.23
    미국 - 선셋 아치의 석양  (0) 2015.12.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