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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음성 

     

배경 음악은 Tom Barabas의 "Moon Dus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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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의 무슬림들이 “(무슬림들에게) 공격적이란 이유 때문에” 스위스 국기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By BI: 스위스의 무슬림들이 스위스 국기에서 하얀 십자가를 제거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저들은 이 상징이 “더 이상 무슬림이 섞여있는 다양한 스위스 문화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런 황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무슬림 단체는 “Secondos”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지난 10월부터 무슬림들에게 “조금 덜 공격적인” 국기로 바꾸어줄 것을 스위스 시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모양으로 바꾸는 것은 어떻겠는가?



 

 

 

스위스 국기를 바꾸어달라는 이들의 요구는 여러 정치 세력들의 분노를 일으켜 스위스 내의 ‘반이민 정서’ 기름을 붓고 있다.

 

기사원문>> MUSLIMS DEMAND cross be removed from the Swiss flag because they “find it offensive”

 

* 대책 없이 이슬람 난민과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유럽 나라들이 곳곳에서 이로 인한 사회적인 갈등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파리 테러와 연초에 독일 쾰른에서 벌어진 이슬람 난민 성폭행 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스위스에서 국가의 정책성을 상징하는 국기를 바꾸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기에 새겨진 십자가가 이슬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offensive)”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저들의 ‘반기독교적 정서’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미 15만 5000명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이슬람 외노자들의 숫자도 계속 증가하고 있어 이들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테러에 대한 우려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했다. 현재 무분별하게 이슬람 사람들을 받아들인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통해 우리가 교훈 받지 못한다면, 우리도 똑같은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슬람 할랄식품 공장설립 반대서명(1)

 




 

- 예레미야 -

휴거는 일루미나티가 거짓으로 만들어 퍼트린다?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안언론 Infowars.com을 운영하고 있는 알렉스 존스가 ‘휴거’는 “세계정부주의자들(일루미나티들)이 NWO 종교를 수립하기 위해 퍼뜨린 거짓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911사태를 예견하고, 보헤미안 그로브 집회에 몰래 잠입(?)하여 인신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유명해진 알렉스 존스는 일루미나티들이 NWO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규합하고 또 의도된 역정보를 퍼뜨리기 위해 저들 쪽에서 퍼뜨린 이중간첩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었다.

 

이처럼 일루미나티의 이중간첩으로 의심받고 있는 알렉스 존스가 성경에 명시된 ‘휴거’의 사건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성경적 무지로 인한 실수인지, 아니면 이 또한 의도된 역정보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안 언론가인 알렉스 존스의 “휴거는 일루미나티가 퍼뜨린 거짓말”이라는 주장은 우려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기 힘든 영적 전쟁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진리(말씀) 안에 바로 서서 모든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휴거되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관련글 >> Alex Jones Calls The Rapture a “Lie and Mind Control By Religious Establishment of the NWO”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영국은 왜 할랄을 허용했는가? 이슬람發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Photo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4년 전 런던에서 10대 청소년이 무슬림에 의해

참수당해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다.

 

1. '할랄'은 아랍어로 '허용된 것'이라는 뜻이다.

 

이슬람 율법에서 허용한 재료를 사용하여 성인 무슬림이 만든 음식을 할랄 식품이라고 한다. 이들은 특별히 가축을 도축할 때 알라 신에게 반드시 기도를 하고 도축 작업에 들어간다. 이러한 모든 요건을 만족해야 할랄 인증 마크가 붙을 수 있다.

 

2. 영국을 비롯 유럽 대다수가 자국에 할랄을 허용한 이유는 당연히 돈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장기 불황을 넘어 대공황으로 넘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경제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이 돈 놀이로 먹고 살려는 금융 행위의 극대화에 있다.

 

이런 사회 구조하에서는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부는 금융 투자자들에게 흡수되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게 되니, 너나 할 것 없이 주식, 펀드, 파생상품 등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계는 금융 거품과 부채로 먹고 사는 아슬아슬한 모래성의 체제 위에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세계적 상황에서 현금을 보유한 나라는 사채업을 금지한 이슬람 국가들 밖에 없게 됐다. 단순히 이들이 오일 머니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산유국은 아프리카나 남미에도 많지만 유독 중동 국가들이 현금을 많이 보유한 이유는 그들이 사채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사채업을 금지하면 사람들은 현금으로 실물 거래를 하게 되고, 자연히 자신의 현금 수준 하에서 사업을 해야 하므로 탐욕을 절제할 수 있게 된다.

 

사실은 이것이 성경이 사채업을 금지한 이유이기도 한데, 어쨌든 성경을 믿는 서방은 맘몬에 사로잡혀 금융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고, 성경을 믿지 않는 이슬람이 오히려 구약 율법을 부분적으로나마 더 준수하는 나라가 돼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돈 나올 구멍이 이슬람 밖에 없게 된 오늘날, 당연히 영국을 비롯한 세계가 할랄을 허용하게 되었다.

 

 

3. 2013년 5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두 명의 무슬림이 거리에서 한 영국 병사를 차로 치어 중상을 입힌 후 그를 산 채로 참수한 것이다. 당시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있었고, 그 중 한 여성이 그 둘을 제지하려 나섰다가 칼부림을 당해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당연히 사태는 일파만파로 퍼져서 영국의 극우세력이 들고 일어나 런던 모스크에 불을 지르는 등 강력한 반발에 나섰고, 경찰이 출동한 가운데 극한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영국 무슬림 위원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곧바로 "이 일은 이슬람에서 근거가 없는 야만적 행위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4. 할랄은 막아야 한다. 이유는?

 

영국 병사 참수 사건, 작년 11월 프랑스에서 터진 국가적 테러 사건, 얼마 전 독일에서 벌어진 집단 성추행 사건, 그리고 이제는 아시아까지 퍼지고 있는 IS 테러 등등 이런 것들은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 아니다. 다분히 영적인 현상이다.

 

신약성경 계시록에 보면 넷째 인이 떼어지자 청황색 말이 등장한다. 이 청황색 말은 지구의 1/4의 권세를 갖고 칼과 기근과 사망과 짐승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이슬람은 16억의 인구로 정확히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의 국기는 모두 녹색이 들어가 있다. 녹색은 이슬람의 색깔인 것이다. 원래 청황색은 원어(헬라어)로 녹색이다. 실제로 청색과 황색을 섞으면 녹색이 된다. 그리고 이슬람은 의도적으로 칼을 사용하여 사람을 죽인다.

 

또한 이슬람이 지배하는 지역은 어디나 땅이 황폐화되고 기근이 발생한다. 네 번 째 짐승은 뭘 의미하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어쨌든 이슬람이란 성경이 예언한, 말세에 등장할 세계적 살육의 세력이며, 그 예언이 선언한 바 청황색 말이 지구의 1/4의 권세를 갖고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할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청황색의 영을 그 공동체에 허용한다는 의미가 된다. 할랄을 막을 수 있다면 일단은 막아야 하는 이유다.

5. 우리는 단순히 현상적인 할랄을 막아서려는 것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도대체 왜 청황색 말이 등장한 것인가? 이것은 기독교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모두 기독교가 부흥했다가 타락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중동과 이스탄불 지역은 사도들이 직접 땅을 밟고 복음을 전파하여 한 때 기독교가 가장 부흥했던 지역이다. 북아프리카 역시 교부들이 신앙을 가르쳤던 기독교 부흥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이 모두 타락하자 곧바로 이슬람이 점령했다. 오늘날은 한 때 기독교 수출국이었던 유럽이 이슬람에 먹혀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심판하는 전형적인 심판 현상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타락하면 주변 악의 세력에 먹히게 하는 것.

 

기독교를 믿는 나라들이 탐욕을 주체 못하여 돈 놀이를 하고, 포르노를 전 세계에 수출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심지어 동성결혼을 허용했고 수간까지 널리 퍼지고 있다. 반면에 이슬람은 사악한 종교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로 구약의 율법을 지키고 있다.

 

앞서 말한 바 돈놀이를 금지하고, 포르노를 금지하고, 노출을 최대한 자제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동성애 자체를 금지하며 수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로 인해 청황색 말을 등장시켜 타락한 기독교 국가들이 심판 받는 상황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결국 할랄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기독교인들이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본질의 변화 없이 현상적으로만 할랄이나 이슬람을 막으려 한다면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더 큰 반발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 함용식 (미래경영연구소 전 연구원)

 

출처: 재경일보 USA (http://www.jknus.com/)

    참 소망 최 송연 生이란 모두 벌거벗은 핏덩이로 태어났기에 주어진 한 세상 헤쳐나간다는 것이 그리 녹록하거나 만만치 않다네 따사로운 햇살은 한순간뿐이며 늘 시커먼 먹구름이 덮쳐오고 겨우 한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다시 또 더 큰 태산을 넘어야 하지 넘어야 할 태산, 캄캄한 먹구름, 생의 질곡 속에 아주 엎드러지거나 망하지 않으려면 참 소망이신 그분을 믿는 믿음 외에 무엇이 더 있으랴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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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십니다
by David Wilkerson | January 7, 2016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힘들고 어두운 시간 속에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1:3-7)

여러분은 여기 하나님의 목적이 보이십니까? 고통에 처한 우리를 성령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극심한 고통속에 처한 다른 이들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일 입니다: 달련되 자들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위로해주시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통이 더욱 심해질수록,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위로가 더욱더 강력해 진다는 것 입니다.

저희 사역 우편물 수신자 명단에는, 이스라엘과 제시란 소중한 두 형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형제는 100살 이며, 제시는 102 살 입니다. 한 형제는 92세에 은퇴 했으며, 다른 형제는 97세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수년간 저희 설교를 받아 들어왔습니다.

이 두분은 혈육이며, 또한 주님안에서 형제 입니다. 두분 다 간증하기를, 일생의 시련을 통해, 그들안에 성령의 기쁨은 깊어져 갔습니다. 그들은 한 세기의 참사 – 1930년 대의 대공황, 두번의 세계 대전, 무시무시한 가뭄 을 직접 목격해 오셨던 분 들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었던 시련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나이에도 그들은 전보다 더 웃으며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시간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단 한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시련을 견뎌낸 그들의 간증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위로 입니다.

펌글 : 글이 좋아 퍼온 글 "David Wilkerson" 목사님의 글

제 1 장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성령으로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육체의 범죄와 육체의 언약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 했다 할지라도 죄의 지배와 그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다.

 

 

제 2 장

 

인간이 불완전함으로 범하는 날마다의 죄와 결점은 성도로서의 최선의 일을 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죄와 결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낮추게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만 의지하도록 만드는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경건을 연습함으로써 더욱더 육체를 제어하고 완전한 목적을 향하여 나감으로 마지막에 이 육체의 죽음에서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과 함께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제 3 장

 

이 죄에 거하는 성도들, 또한 이 세상의 사단의 유혹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떨쳐버리지 않는 한 이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세상 끝까지 자비로 지켜주시고 능력으로 보존해 주신다.

 

 

제 4 장

 

믿는 자들을 은혜 속에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연약한 인간이 거스릴 수는 없으나 회심한 이후에라도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 항상 거하지는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죄에 빠져 육체의 정욕에 유혹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할 때 성도라도 육신적인 이 세상의 사단의 크고 무서운 죄에 빠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실제로 이 죄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베드로와 그 외의 다른 성도들이 연약함으로 인하여 타락에 빠진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제 5 장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심히 거스리는 죄를 범함으로써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고 믿음의 사역을 방해하며 그들의 양심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고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기도 하는데, 이럴 때에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그 길에서 돌아서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빛이 그들에게 다시 임하게 된다.

 

 

제 6 장

 

하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초한 그의 풍성하신 은혜는 비록 성도들이 심각한 죄에 빠져 있을 때라도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은혜를 잃음으로 의인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고통 가운데 방치해 두거나,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며 전적으로 타락되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하시지도 않으신다.

 

 

제 7 장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멸망에 빠져 있는 이 세상 중에서도 결코 썩지 않는 마음의 씨를 보존해 주신다. 다시 말해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새롭게 되고,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속에 탄식하도록 함으로 중보자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고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음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며 두려운 마음과 수고로써 그들 자신의 구원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신다.

 

 

제 8 장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에서 전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며 범죄로 인한 멸망에서 우리가 구원된 것은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비록 인간은 실수하여 범죄함으로 마음속에 결심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거나 실패하지 않으며 그 약속이 취소되는 일이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도고의 기도 그리고 성도를 보호해 주시는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인치심으로 되는 일이므로 결코 좌절하거나 무효화되는 일이 없다.

 

 

제 9 장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지닌 믿음의 정도에 따라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심과 믿음으로 성도를 보존해 주심에 대한 확신을 갖는데, 이 확신을 따라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의 참 지체가 되며 앞으로도 계속 지체가 된다는 사실과 죄사함을 얻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다.

 

 

제 10 장

 

그러나 이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해 주는 것과 어긋나는 그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그 계시된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의 믿음으로만 이뤄지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기업이 된다고 말하는 성령의 증거로서 되는 것이다(롬 8:16). 또한 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 선한 일을 이루도록 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대한 약속을 소유하지 못할 때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제 11 장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육신적인 의심으로 마음의 갈등을 갖게 되며 심한 유혹으로 믿음과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토록 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고 다만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전 10:13).

 

 

제 12 장

 

그러나 성도를 인내하도록 하신다는 이 확신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안일함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과 충성심, 참된 경건함과 모든 시험 중에서의 참음, 그리고 뜨거운 기도와 인내심 그리고 진리를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인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한데,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 성도들이 체험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제 13 장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내하게 하신다는 이 확신은, 죄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함을 무시하고 세상적으로 나가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 정하신 길 안에서 조심스런 마음을 계속 가져서 그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 사랑을 남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양심이 고통을 받는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제 14 장

 

복음을 외침으로 하나님을 기뻐시게 했던 것같이 우리 속에서 이 은혜가 역사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보존해 주시되 그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며 또한 이 말씀에 의하여 권면하고 책망하며, 그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여 성례를 행하게 하심으로 그의 성도들을 지켜 주시는 것이다(견인의 방식).

 

 

제 15 장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성도의 견인에 관한 이 교리와 계시된 말씀 속에서 충분히 나타난 확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자신의 이름의 영광과 성도를 향하신 위로를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를 미워하고 이 세상도 이를 조롱하며,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이를 남용하고 이단들도 이를 적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은 날마다 이 사랑을 갖고 마치 놀라운 보배를 가졌듯이 이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도를 보호해 주실 것이요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만 영원토록 영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멘.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타/한아름

향 그윽한 커피를 오지그릇 찻잔에 마신다고 하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핀잔을 할지모르지

쌍화차나 한방차가 어울릴듯한데 말이다.

본 차이나의 허리가 날씬하게 빠져 금테두리를 두른 키 큰 찻잔이

 화려하게 수놓은 금쟁반위에  사뿐히 앉아 있고

그 속에 향이 깊고 그윽한 커피 한잔 채워  마신다면

커피와 찻잔이 잘 어우러져 맛을 한층 더 깊게 할수 있을 것도 같은데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예쁘고 좋은 잔을 보면 왠지 조심스럽고 불편하다.

보기에는 멋있고 예쁘지만 혹 잘못해서 깨뜨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부담 때문에

몸값은  좀비싸야지

 

그 비싼 몸값이 혹여 잘못되면  두고두고 아까워 할 것인데

그러니 진열장에 잘 모셔두었다가 손님이라도 와야 전시용으로 내어 놓을 수밖에

 아무리 예뻐도 그릇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꼴 이 되는것이다.

 오지그릇이야 생긴 건 촌스럽고 투박하고 멋도 없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줄 수 있고,

혹 실수해서 깨진다 해도 아까워 속상할 만큼 비싼 것도 아니고,

날카롭지 앉아 손상할 일도 거의 없을 것이고

이래 저래 제 구실을 하는듯 하여 좋다.


 주님이 나를 그릇이로 그릇으로 빚으신다면

 난 오지그릇으로 빗어달라고 주문하고 싶은데....

필요할 때 언제라도 꺼내서 쓰고 설걷이통에 푹 담가 놓고

 그냥지나가도  괜찮을 그릇...

두툼한 오지그릇이 입술에 닿을 때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처럼

쓰는이로 하여금 나를 쓸 때 그런 편안함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래서 이다.

그릇이 그릇으로 빚어져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전리품이 된다면 그것 또한 슬픈일 이다..

 

우리는 주님이 빚어놓은 그릇일진데 전리품으로 그릇장 속에 갇혀 있다가

주님 오실 날 언제 뛰어나와 주님 맞이할까...

 그럴바엔 촌스럽고 볼품없어도 아무 때나 요긴하게 쓰이는 그릇이야 말로

주님오실 때 언제라도 뛰어가 주님 맞이 할수 있겠지.....

오지그릇처럼 아무나 집어다 써도 편안해서 자꾸만 쓰임 받는

그릇으로 살고 싶은데 ~~~~ 

 

 

출처: 사모님사모님/해피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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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납  (0) 2016.01.06

 

 

주님의 몸, 교회(敎會)

 

근세에 들어 하나님의 교회 존속[存續], 존재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고 위협하는 기현상이 각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이런 기현상들은 기업화된 대형교회들이나 사명감을 저버린 일부 황당한 목사들에게 그 책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한 방법으로 왜곡시켜 전하고 통전 적이고도 유기적인 말씀을 앞 뒤 문맥을 살펴 총체적인 뜻을 밝혀 전하려하지 않고 한 구절만 똑 떼내어 그 구절에만 매달려 전체적인 뜻을 흐리게 하여 가르치는 데 있다.

이런 사람들이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성교회를 벗어나야 살길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기성교회는 아예 구원이 없는 것 같은 속임수이건만,표면적으로는 사역자들의 비리에 항거하는 거센 목소리, 진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목소리인 것처럼 미화시켜 내어 놓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말에 현혹된 성도가 교회를 멀리하고 집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이단이나 다른 사이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간다.

구원 받는 백성이 줄어 들고 교회를 찾는 발걸음이 점점 사라지게 하려면, 하나님 교회의 권위를 땅에 떨어트리고 교회와 말씀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 중 하나임을 성도들이 인식해야 한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 요즘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가 급격히 하강하고 있다는 통계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좀 생각해 보자.

교회란 무엇인가? 어근(語根)부터 살펴보자:
 
교회(敎會)란 그리스어로는 큐리아코스(kuriakos = 주에게 속하는),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kklesia), 라틴어의 에클레시아(ecclesia)이며, ‘불러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청받은 무리, 성령의 부르심을 통하여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대관식에 참예할 수 있는 거룩한 무리의 모임이란 뜻이 있다. ‘카할’은 구약에서 회중, 또는 이스라엘 공동체, 특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뜻하며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에서 구약교회를 ‘광야 교회(congregation)', 그곳에 모세가 있었다고 했다(행7: 38절).

교회(敎會)의 구분:

1. 민족적으로, 첫째, 예루살렘 교회인 초대교회, 둘째, 이방인 교회다. 이방 세계의 각 나라, 각 족속, 각 지역에 세워진 모든 교회를 총칭할 수 있다 .

2. 영적으로, 첫째, 개인 교회(고전 3:16절), 둘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클레시아,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말할 수 있는데,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다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보이는(가시적인)교회: 보이는 교회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을 말하며, 성경은 이 교회를 가르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골1: 18절),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행 20: 28절, 벧전 1: 17-19잘), 또는 거룩한 무리(히 13: 12절, 벧전 1:2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 비가시적인 교회: 이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로써, 주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계 21:장 전장 참조). 지역과 인종과 역사를 초월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모여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앞으로 구원받을 모든 성도를 총칭한다.

3. 교회를 영적으로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둘째,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무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요, 영적인 교회이다.

땅 위에 교회(敎會)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후 특별히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이 지상에 하나님의 기관인 교회를 세우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1.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눅19: 10절).
2.하나님께 경배하고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엡1: 4-6절).
3.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창 되게 하기 위함( 마 28: 19-20).
4.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 요 6: 49절).
5.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함(엡 3: 9-11, 3: 20-21, 5: 9).

교회를 저주해서 안 되는 이유:
a.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시기 때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 18절, 엡5: 23절 참조).”

b.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지역 교회에 등록하고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성도는 마땅히 주신바 탈란트 대로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 15절 말씀).

c. 성경은 혼자 예배드려도 은혜받을 수 있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폐하지 말라고 하신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면 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 24-25절).”

d.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이기에 깨어지면 안된다. “두세 사람이(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20절 말씀).”

e. 성도는 믿음 안에서 친교(코이노니아)해야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친교란 영어로 fellowship,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koinonia)다. 여기에는 물건을 함께 쓴다의 뜻이 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초대 교회는 물건을 함께 나누었다. (행2: 44, 4: 32절 참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적인 요소라면 다음은 회원 간의 친교이다. 왜냐하면, 성도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롬 12: 5, 고전 12: 27절 참조)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 되어진 성도들임을 깨닫는다면, 결코 '혼자만 정결하다’라고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이다.

f. 보이는 성전,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거룩하다. 예수님께서 친히 “ 내 집(가시적 교회)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막 11: 7절)."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시적 교회 성전 건물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개인교회)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 장소 또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파는 곳을 술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모신 개인 교회가 모여서 거룩한 분께 예배드리는 그 장소를 거룩하다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주님을 모신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관계없이 천국이요 거룩한 곳, 성전이다.

이런 것을 볼 때, 가시적인 교회(보이는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에클레시아, 즉 하나님의 대관식에 초청받은 무리는 보이는 교회를 거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회(천국)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 교회 안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라는 것은 그분의 뜻이다
 
1.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마 3: 12)”

본문에서 (his threshing floor)이라고 소유격을 사용하셨음을 주목하자. 그 뜻은 이미 불러냄을 받은 무리(개인교회)가 그분의 소유이다.(광의적으로는 모든 세상이 다 그분의 것이지만...) 개인교회가 모여 공동체 교회(가시적 교회)를 이룬 곳을 주님께서는 (나의 타작마당)이라고 소유격을 특별히 붙여서 사용하시기 기뻐하셨다.(나의 백성, 내 백성 등등)

2.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37-43)"
"Let both grow together until the harvest. At that time I will tell the harvesters: First collect the weeds and tie them in bundles to be burned; then gather the wheat and bring it into my barn.(마 13: 30)

마태복음 13장의  "세상"은 육신 세계를 의미하고 추수 때 교회와 분리시키실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라함은, 믿는 자, 믿지 않는 불신자 모두 섞여 살아가는 육신 세계를 총칭하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모든 세상 사람이 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롬 3: 10절 참조) 과 의인(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개인 교회)을 양이라 하고 주께서 세상 속에서 불러내고 갈라내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러하다.

마태복음 13장 한 구절만 풀이하여 “세상”에는 가라지가 있으나, 교회 안에는 모두 알곡만 있다라고 주장 한다면 모순이다. 교회(개인교회나 공동체교회), 예수님을 마음에 구세주로 믿는 자가 되면, 그 즉시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벗어나서 하늘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을 가리킴이라면 그 성전된 육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육신, 가시적 교회)는 세상에 속하였으나 그 권위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주님의 피로 깨끗게 된 알곡이지만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기 까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주님의 때가 되기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서로 부대끼며 자라고 있는 들판이 세상 속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명이 알곡된 자들에게 주어졌고, 그 사명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단이 날이면 날마다 가라지를 뿌려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개인 교회가 모여모여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임인 (공동체 교회) 안에도 사단의 회가 있다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계 2장 참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가롯 유다가 나왔다. 가라지는 분명히 있다.

세상(코스모스)에서 교회는 제외된다고 그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주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 거듭난 영혼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귀한 무리이기에 하늘에 속하였으나,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땅, 곧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갈 2장 4절 그리고 고후 11장 26절에서 바울은 거짓 형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거짓 형제에게서 해를 많이 당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시대에 가라지들이 있었음을 가리킴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만듦으로써 훨씬 더 많은 가라지들이 들어왔음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교회 안의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낼 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주님께만 있다.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는 자격이 우리(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가라지와 알곡을 가르고 골라내시는 분은, 농부 되신 우리 주님의 고유권한이며 그분의 주권하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라지 같다고 하여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것은 주의 명령이다. 가라지를 찾아내고 갈라내고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올바른 분별을 하도록 말씀의 떡을 떼는 것,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을 밝히고 논하는 그 선(line)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이다. "너는 가라지" 혹은 "너는 사단의 자식"이라고 쉽게 정죄하거나 손가락질하여 알곡과 가라지를 내가 갈라내려 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그 정신을 논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내가 알곡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더욱 겸손하여 나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섬겨야 할 것이다. 내가 참 열매인가? 그렇다면 가지 되신 주님께 더욱 바싹 붙어 있어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죽이는 말을 하기 전, 세워주고 밀어주고 살려주는 말을 하자. 다시는 우리 주님의 몸인 교회(개인교회)를 찢지 말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시고 상하신 것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하심이다. 주께서 당하신 그때 그 모진 고통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찢을까 삼가 조심하자. 말세가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 12)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28절 하 참조).”



글:최송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Andreas 씨는 그의 손에 쌀알크기의 베리칩을 이식하였다. 그는 베리칩이 이식된 이 손을 단순히 갖다대기만 함으로 공항 라운지와 보안 지역을 통과할 수 있다. Stockholm Arlanda 공항이 이 칩을 인식할 수 있는 칩 리더기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조만간 스웨던 기술청이 이 기술을 허용하면 Andreas 씨처럼 비행장 보안지역과 탑승장을 통과할 때(베리칩이 이식된) 손을 한번 흔들어 주기만 하면 된다. 쌀알 크기의 이 칩은 50파운드도 되지 않는 가격에 구입하여 주사기를 통해 피부 속에 삽입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 컨설팅 회사 Sogeti의 부사장인 Andreas 씨는 Mic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마치 여러분이 항공사의 NFC 스티커를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이 반응하게 됩니다. (NFC 스티커처럼) 이를 지니고만 있으면 당신이 해당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이를 통해 당신의 신분을 확인하게 됩니다."

 

손에 이식한 베리칩을 통해 공항 검색대와 탑승장을 통과하는 모습을 시연하고 있다.

 

 

* 유럽에서도 IT 분야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스웨덴이 베리칩을 이용한 항공기 탑승 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현재 세계전역에서 실시되고 있는 ‘전자여권’ 시스템이 이제 그 종착역인 ‘베리칩’ 시스템으로 옮겨갈 시점이 다가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권과 신분증과 의료보험증과 운전면허증의 기능을 통합하고, 모든 전자화폐의 결제 수단이 되며, 개별적으로 부여될 IP주소와 와이파이망을 통해 실시간 위치추적과 통제가 가능한 베리칩 시스템이 각종 편리함을 앞세워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겨울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

 

 

 

에피소드 1.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54살입니다.

가정이 없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아 독신입니다.

자녀도 없고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습니다.

 

공부도 하지 못 하였습니다.

중국집에 취직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자장면 배달하는 배달원입니다.

 

 한달에 70만원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재산이 없어 겨우 한명 누우면 꽉 차는

 쪽방에서 혼자 잠만 자고 있습니다.

 

이 분을 계절로 말하면 봄 일가요?

여름일가요? 가을일가요? 겨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겨울입니다. 인생의 겨울입니다.

 

그의 이름은 김우수입니다.

5년전 9월 23일 중국집에서 자장면 우동을 배달

하던 중 승용차와 충돌하며 병원에서 실려 갔습니다.  

25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명박 대통령과 김 윤옥 여사가

조문을 갔습니다. 나경원, 등 정계 거물들이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왜 온 국민의 관심을 끌었을 가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매월

5만원-10만원을 어린이 재단을 통하여

소년소녀 가장을 도왔습니다.

 

2006년부터 쉬지 않았습니다.

보험 4000만원짜리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

그 돈을 타서 어린이를 돕게 하였습니다.

 

어린이 재단 후원회장 최불암 이 상주 역할을 맡아

장례를 주도하였습니다.그의 영정 앞에는 그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애도하는 편지가 쌓였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라고 항상 격려하여

주시던 아저씨를 가슴에 묻고 평생 살아가겠습니다.”

대통령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영정 앞에서 말했습니다.

 

“기부나 봉사는 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잘 보살펴 드리십시다.”

이명박 대통령도 고인 앞에서 말했습니다.“

고인은 가진 것을 나눔으로서 그것이 더욱 커지고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진정한 나눔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 주었다.”

 

그가 그렇게 죽은 후

어린이 재단 홈페이지에는 기부가 꼬리를 이었습니다.

댓글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천사 중국집 배달원

아저씨의 뜻을 이어 기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인생의 겨울에 이렇게 많은 씨를 꾸준히 뿌리고

나니 아름다운 마침이 되었습니다. 김우수 씨는

겨울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에피소드2.

 

겨울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

 

김 영하 목사가 쓴 책 <하늘을 담는 사람들> 속에

나오는 감동스러운 이야기입니다. 86세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납니다. 자기가 스스로 수프를 만듭니다.

 

20 km 떨어진 아내 묘를 매일 아침 찾아갑니다.

바이올린과 수프를 가지고 갑니다. 수프를 아내 묘

앞에 놓고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묘를 어루만집니다.

 

그리고 아내를 목메어 부릅니다. 그리고 돌아옵니다.

이렇게 56살부터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 그렇게 하여 주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한번 한다고 한 것은

죽기까지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86세가 되었어도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건강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슬픔을 이기는 길이 되었습니다.

건강의 겨울에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몸이 편할수록 건강은 나빠집니다.

두 다리가 의사입니다.

 

에피소드3.

 

나이의 겨울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

 

소년기가 인생의 봄이라면 청년기는 인생의 여름입니다.

장년기는 열매를 따먹은 인생의 가을입니다.

노년기는 인생의 겨울입니다.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7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23%는 70-80세 사람에 의하여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6%는 80대 인물에 의하여 성취되었습니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64%가 60세 이상의 인물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일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나이와 관계가 없습니다.

나이의 겨울에도 우리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사진을 중심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잡지가 둘 있습니다.

 

national geographic과 life 지입니다.

얼마 전에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입니다.

공항 대합실에 아주 가난하게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아서 비스킷을 먹는 장면입니다.

가난하기에 비싼 음식을 주문하지 못 하였습니다.

비스킷과 차를 하나씩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비스킷 반을 잘라 할아버지가 먹었습니다.

그리고 틀니를 빼어 닦아서 할머니에게 주었습니다.

 

할머니가 그 틀니를 끼고 나머지 반을 먹는 장면의

사진입니다. 너무나 가난하여 따로따로 틀 이를 하지

못 하고 하나를 가지고 교대로 사용하는 장면입니다.

 

비스킷도 하나요,

차도 한 잔이요, 틀니도 한 개요, 몸도 하나요,

생각도 하나요,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이런 뜨거운

사랑으로 겨울에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에피소드4.

 

날마다 한강 다리를 건너던 사람

이내용을  읽으시고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이 꼭 있다고 봅니다 신용은 출세의 기본이요

부자가 되는 초석이란걸 명심 또 명심하시길.

 

상고를 졸업하고 전자회사 영업 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김우준 씨는 십 년 동안 성실히 일하여 모은 돈과

주변사람들의 돈을 빌려 조그만 가전 제품 대리점의

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사업이 안정되고 빌린 돈도 거의 다갚아 갈

즈음,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아는 사람으로 부터 빌린 빚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빚을 갚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가전

제품 외판원으로 나섰는데, 날마다 방문 판매를 하면서

버는 돈중에서 하루에 오천 원씩 빚을 갚아 가기로 했다.

 

매일 저녁 그는 오천원을 주머니에 넣고 한강다리를 건너

용산까지 돈을 빌려 준 사람의 집을 찾아가 돈을 갚은 뒤,

온 길을 되돌아 집으로 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강바람을 맞으며 한강대교 위를 걸어다

니면서 그는 언제가는 반드시 사업을 다시 일으키리라는

희망의 싹을 가슴속에 키워갔다.

 

몇 년이 지나 드디어 빚을 다 갚은 그는 재기할 계획을

차곡차곡 진행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전자회사 판매 이사가

그의 신용을 믿고 물건을 대줄테니 다시 유통업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돈이 좀더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즈음 우연히 예전에 오천 원씩 돈을 갚았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둘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얘기 끝에 김우준 씨의 처지를 알게 된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당신이 오천원씩 빚을 갚기 시작했을 때,

나는 며칠 지나면 그만둘 거라 생각했소, 하지만

 

당신은 끝까지 해냈고,

그 사이 당신에 대한 내 믿음도 쌓여갔소.

 

나는 언젠가 당신이 꼭 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오.

새로 출발한다니, 내게도 출자할 기회를 주겠소?"

그 동안 그는

돈을 갚은 게 아니라 신용을 쌓은 것이었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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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고 외로울 때  (0) 2015.12.16

예정론에 대한 오해들


아직도 칼빈의 예정론은 많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칼빈에 의해서 예정론이 바르게 정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칼빈의 신학이 예정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칼빈의 예정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칼빈이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작정과 섭리의 사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칼빈의 신학 사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섭리의 사상이라 할 만 합니다. 칼빈은 1545년의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논박>을 통해 세 가지 차원의 섭리를 논합니다. 첫째, 자연적 질서를 주관하시는 우주적 차원의 일반섭리가 있고, 둘째,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보응하는 특별한 섭리와 셋째, 성령으로 믿는 자들을 부르시고 다스리시는 구원을 위한 독특한 섭리가 그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기독교강요> 116~28장에 걸쳐 섭리를 강조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이 하나님의 섭리 중 매우 특별한 섭리에 속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섭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바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 목적을 향해 보다 멀리 바라볼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떠한 인간이든지간에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속에서 다스려진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기독교강요 116-4, 9)


예정론을 이해하려 할 때 다음 두 가지의 이론과 주장에 대해 명확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운명론(fatalism)입니다. 이는 누군가 결정하는 존재를 전제하지 않은 채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운이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운이 나쁘다고 하는 우연성의 산물입니다. 이런 사상은 인격적으로 계획을 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는 거리가 먼 비인격적인 사상입니다. 비슷한 용어로 숙명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동양철학에서 사람의 미래가 사주팔자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생의 다양성과 복잡 미묘함과 절묘한 조화와 신비를 사주팔자라는 틀에 집어넣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너무 형이하학적인 발상입니다. 둘째, 예정론과 유사한 사상 중 하나가 결정론(determinism)입니다. 이는 인간의 앞날을 사전에 입력된 컴퓨터 프로그램에 따라 결정되어 움직인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상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의 행위들이 행위자 밖에서 주어진 결정된 프로그램에 의해 발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적하시고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죄인의 구원을 위해 죄인으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며 진노와 심판을 거두시기도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예정론을 운명론이나 결정론 혹은 기계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눈을 깜빡이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발걸음을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예정하셨단 말인가?” 이런 오해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사전 지식의 결여로 나타나는 무지입니다. 칼빈주의가 내세우는 예정론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높이시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시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장하십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나의 자유로움입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의 재량권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나 자유로움을 억압하거나 제약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몇 시에 일어나고 아침에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을지 내가 결정하고 판단하도록 허용하십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해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되는 선한 선택에는 보상을 하시고 악한 선택에는 징계와 진노와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일이기도 합니다. AR.


참고서적: 1. <개혁신학의 전통과 유산>, 김재성 저, 킹덤북스 2. <교리와 신앙>, 칼 트루먼, 지평서원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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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커뮤니케이션<<에서 나온 "마지막 신호<<"(Final Sign)라는 신간이 일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현재 인터파크 "기독교의 이해" 부문에서 이어령 씨의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이어서 판매량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책은 (데이비드 차라는 필명 외에는) 저자가 누군지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저자는 20대 청년이라고 함) 정체불명(?)의 책이 기독교 매체와 데이비드 오워 집회를 주관한 "..신부" 카페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블로그의 독자 중의 한 명이 이 책에 대해 문의를 한 덕분에 나도 이 책을 사서 훑어 보았다. 과연 이 책이 건전한지를 알아 보기 위해서..

 

잠시 신세계질서 비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복 음모로 알려진 신세계질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신세계질서를 비판하는 크리스천(?)은 모두 참된 신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곧 신세계질서는 더욱 구체화될 것이고, 신세계질서에 대한 반발도 이에 따라 거세어질 것이다. 따라서 틀림없이 마귀는, 신세계질서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위한 미혹도 준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귀는 이중 삼중으로 덫을 쳐 놓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작전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신세계질서를 밑밥으로 희생하면서까지 크리스천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오워가 "회개"를 밑밥으로 뿌리고 있듯이.. 다시 강조하지만, 누가 "일부" 진리를 말한다고 그를 전적으로 믿으면 위험하다. 마귀는 진리와 비진리를 혼합해서 우리를 미혹하는 데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제적인 예로서, 대표적인 음모론 비평가인 PrisonPlanet.com의 알렉스 존스는 카톨릭 신비주의 비밀집단인 예수회 에이전트라고 한다. 또한, 신세계질서에 대해 상당히 심층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말씀보존학회"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한 성경이라고 주장하며, 여러 교단으로부터 이단 또는 주의 처분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 신세계질서를 경고하는 영화로서 다큐멘타리 상까지 받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시대정신(Zeitgeist)"이 반(反)기독교적인 영화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런 것들이 바로, 신세계질서를 폭로한다고 해서 그들을 무조건 믿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물론 반 기독교 세력이 스스로의 신세계질서를 비판할 때에는 수박 겉핥기 식의 폭로가 대부분이다.]

 

마지막 신호로 돌아가서 이 책에 대해 더 살펴 보도록 하겠다. 다음은 이 책에 대해 극동방송이 진행했던 출판담당자와의 대담 내용이다.

 [플레이 버튼을 클릭!]

 

위 라디오 대담에 의하면, 예수 안에서의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책 표지에 붉은 십자가를 그렸다고 하는데, 걸리는 것은 이 십자가가 하필이면 위가 긴 거꾸로 된 십자가라는 점이다. 물론 디자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생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거꾸로 된 십자가는 예수에 대한 배척과 조롱을 상징한다. 사타니스트들이 목에 건다. 출처<< ]

 

[2010/10/30 추가] 출판 관계자에 의하면, "십자가 디자인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험한 발상으로 디자인 된 것이 아니라, 책 표지로 디자인을 하다보니 그렇게 나왔다"고 합니다. 이에 전해 드립니다.

[2011/2/14] 이 책의 표지가 바뀌었습니다. 새표지그림<< 오해의 여지를 없애버리기 위한 것인지 저의가 드러나서인지 저로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2011/3/8] 하지만, 아직도 거꾸로된 십자가 표지를 사용해서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에 올려진 광고 이미지 (3월 8일)

[2012/2/18] 아직도 인터파크<<, YES24<<, 알라딘<< 등의 인터넷 서적쇼핑몰에서는 원래 표지 (역십자가) 그림으로 책을 팔고 있습니다.

또한 위 라디오 대담에 의하면, 저자는 이 책으로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사역을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이 책을 출판한 의도가 신세계질서 비판에 있다기보다는 앞으로의 사역(?)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려는 것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즉, 겉으로 보기에 이 책의 주된 내용인 신세계질서 비판은 역시 밑밥일 가능성이 큰 것일까? 이와 같은 우려는 이 책의 에필로그를 보면 현실로 드러난다. 에필로그의 내용은 이스라엘회복운동과 (젊은이들의) 마지막 추수군대 등의 신사도적 내용으로 차 있다. 저자가 정작 하고 싶은 말과 앞으로 저자가 힘써 알리려는 내용은 에필로그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에필로그의 내용 일부를 발췌해서 옮긴다:

그리하여 한국은 말세에 마지막 대추수를 위해 전 세계로 그 어떤 백성보다 가장 빨리 나갈 수 있다. 한국은 복음의 마지막 주자이다... 한반도는 마지막 대추수를 위해 마지막 때 쓰시고자 하나님꼐서 감추어 두신 또 하나의 선민이 살고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땅이다.

 

영적인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이제 또 한 번의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고 믿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성경에 있는 대로 짐승의 표, 생체칩을 받지 말아야 한다.

 

은혜도 이방인의 때가 있다. 성령의 역사가 이스라엘로 가면 이방인의 은혜는 끝이 난다... 주님과의 친밀함과 사랑의 관계를 더 맺는 것도 지금이다.

 

이 전쟁은 주님이 계획하신 마지막 전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전략을 들을 수 있는 주민과의 친밀함 유지이다. 이것이 최선의 전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흔들 군대를 모으고 계신다. 주님의 군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으시는 병사들은 오순절 때의 제자들보다도 하나님의 능력을 더 확실하게 보여 줄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미 모집된 병사들에 함쳐질 당신들은 엘리야의 으로 굳게 세워질 것이며, 그 목적은 다시 한 번 주님이 오시는 길을 곧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전문적 군사 훈련으로 영적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이 기드온의 군대에 적합하지 못한 자들을 '추려 내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다음은 작년 12월 책을 쓰다 쉬던 중 하나님이 저자에게 직접 보여주셨다는 "계시"(?)의 내용이다:

전 세계의 순교의 피를 보았다... 마지막 때에는 우리가 순교의 피를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 때는 동방에서부터 이스라엘까지 길이 열리는 시기인 것이다.

 

한국은 마지막 때에 순교의 피를 보내는 심장과 같은 곳이다. 우선 한국에서는 지역 곳곳에서 순교의 피를 많이 흘렸다. 이를 위해 한국의 젊은 20대들을 중심으로 많은 청년들깨어남을 보았다. 그들은 정결한 신부와 같이 준비되어 하늘에서 주시는 참된 생수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그 생수에 깊이 취하였다. 그리곤 얼마후 각각 전 세계로 자신의 생수를 가지고 갔으며, 그곳에 그 생수의 물을 뿌릴 때 그 땅이 오랜 가뭄에 메말라 있다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그 물이 닫는 곳마다 땅이 회복되었으며 마지막을 준비하는 십자가 용사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마지막 대추수를 준비하며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다.

 

매우 정결하고 깨끗한 피가 한국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피의 선발대에는 매우 크고 날카로운 이 있었는데 그 검이 땅에 길을 내고 있었으며, 그 앞에는 기타를 메고 찬양하며 나아가는 주의 자녀가 있었다. 처음 시작된 그 피는 매우 붉고 깨끗한 피로 시작하여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어느 새 중국까지 나아갔다. 앞에서 찬양하는 주의 자녀가 조금 지칠 때쯤 한국에서 매우 큰 교회에 큰 검이 붙었다. 이 검은 매우 컸으나 그 칼끝은 약간 무뎌 보였다. 또한 처음의 피보다 조금 검은 빛이 돌았다. "주님 왜 이 피는 색깔이 탁한가요?" 라고 물었고 주님이 "이 피는 지식으로 순교의 필요성을 깨닫고 비자발적인 순교자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아니 순교에 비자발적 순교가 있어요?" 참 놀라웠다. 어쨌든 그 거대한 순교의 물결로 다시 순교의 길은 이어졌고 이어서 중국에서 거대한 순교의 물줄기가 합쳐졌다. 이 세번째 검은 너무 많이 적을 베어 무뎌진 칼이었다. 그리하여 3개의 검이 합쳐져서 거대한 순교의 길이 나고 있었으며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스라엘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도달했을 때쯤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옴을 보았는데 이는 천 년간 주님과 왕 노릇한 새 땅이었다. 그들은 기쁨에 감격하여 주님의 나라로 들어갔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 놀랍고 기뻤다.그리고 다시 한국을 보았다. 그때까지도 한국의 순교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또 북한을 잠시 보았다. 참으로 놀랍게도 북한은 마치 모세 혈관처럼 순교의 피가 촘촘하게 흐르고 있었다. 또한 미국을 보았다. 그곳은 순교의 피가 곳곳에 고여 있었고 흐르지는 않았다...

에필로그 속의 저자의 아이디어를 내 나름대로 간단히 줄여 보면, 전형적인 신사도의 주장을 압축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주님과의 친밀한 신부로서 준비된, 초대 사도들보다 더한 능력을 가진 젊은이들의 마지막 추수군대가 온 땅을 회복시키며 이스라엘까지 진군한 후 새 땅에 들어가 다스린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신사도 운동은 세상에 대한 물리적인 승리를 말하고 있는 반면, 이 책의 저자는 핍박과 순교 속에서의 영적 부흥과 승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쨌거나 마지막 추수군대를 포함한 위의 내용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마지막으로, "마지막 신호"에 나온 신세계질서와 관련된 내용의 신뢰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할 말은 없다. 동의하는 부분과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혼합되어 있다. 굳이 한마디 하자면, 신세계질서(와 프리메이슨)의 "영적" 배경에 대한 저자의 이해의 한계는 아쉽다고 하겠다. 고대 "미스테리" 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신세계질서의 영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분별은 각자의 몫이다!

 

참고글

마지막 신호를 읽고<<

데이비드 차의 '마지막 신호'<<

[2011/1/17 추가]

2010년 12월 15일 저자가 LA 세계등대교회에서 강연을 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디오듣기<<) 참고로, LA세계등대교회 이상남 목사는 신비주의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출신이며, 1992년 이단으로 규정된 시한부종말론 추종자들이 그 교회서 활동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고 합니다. (출처<<)

강연 내용을 들어 보니 자기는 예수님과 친구 처럼 대화를 나누고 눈으로도 예수님을 본다고 하더군요. 자기가 처음 집회를 했을 때에 손잡는 사람들 마다 부들부들 떨며 쓰러져서 결국 모두가 기절해 버렸는데, 자기는 황당하고 그런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물으니까 '너의 데뷔 무대잖아. 내가 연출 한번 해줬어'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 저자가 말하기를, 책 나오기 전날 저녁에 예수님이 너무 심하게 펄펄 뛰면서 춤을 추시길래 "아니 예수님. 뭐한다고 이렇게 춤을 추세요?"라고 물으니깐 "내가 장가갈 걸 생각하니 너무 기쁘다. 너희 신부들이 준비될 걸 생각하니까 너무 기쁘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블로거주. 그가 주님으로부터 세세하게 들은 음성은, 예를 들어, 자신에게 사귀던 여자 친구를 끊고 아르바이트하던 과외도 끊고 과외했던 아파트에 가서 전단지를 돌리라고 했으며, 주일날 팥빙수 가게에서 팥빙수를 갈라고 했답니다. 또한, 이 책의 제목과 목차를 환상 중에 받았고, 내용도 모두 예수님이 감수하고 사인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2011/3/18 추가]

저자 데이비드 차는 데이비드 오워의 한국전쟁예언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한국교회 회개기도모임에서 강연을 한다고 합니다.

 

 

[2011/4/11 추가]

신사도 운동권의 영향력 있는 잡지 "뉴와인"에 고정 칼럼을 써왔고, 그리고 금가루가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김우현 PD와 "제3시<<"를 동역하고 있는 성현경 목사의 교회에서 그의 집회를 예정했었다고 합니다. 비록 집회는 불발되었다고 합니다만.. (출처<<)

 

[2015/2/20 추가]

데이비드 차는 신사도운동가 홍정식, 박호종 목사의 하베스트샬롬교회<< 교인이라고 한다. (참고

교회의 표지란 무엇인가?

 

박일민 교수(칼빈신학대학원)

 

 

지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다. 그 중에는 천주교회도 있고, 성공회도 있으며, 개신교회도 있다. 개신교회 안에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교회, 루터교회 등 많은 교회가 있다. 또 그 안에는 각기 많은 교단들이 나뉘어 있다. 그래서 어느 교회가 과연 참된 교회인지를 분별하기조차 쉽지 않다. 이러한 어려움은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심했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많은 교회들 중에서 참된 교회를 구별해 주는 기준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그 기준을 가리켜서 교회의 표지라고 한다. 교회의 표지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되어진다.

 

말씀과 참된 전파

 

참 교회를 분별케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 또 말씀을 수호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만을 전파해야 한다. 이 말은 교회가 기록되어진 성경 말씀만을 전파해야 함을 의미한다. 성경에 없는 계시를 새롭게 받아 전하려 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역사적인 전통이나 학설들을 전파하려는 교회도 참된 교회가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말씀을 주시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말씀이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그 말씀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서 그 진위 여부에 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설사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실천함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만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이외의 것을 전해서는 안 된다. 이에 벗어나는 것은 참된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가감이 없이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또 좋던 싫던 자신의 느낌과는 관계없이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성경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어렵다고 피해 지나가서도 안 된다.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성경 말씀을 수단화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성경을 사사로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억지로 풀려고 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참되게 전파되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사도신경에 고백된 내용을 그대로 믿고 전파해야 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기본적인 내용들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믿고 가르치셨던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 천지창조,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사람되심,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의 용서, 성도의 육체적 부활, 영생, 최후심판 등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교회는 이러한 내용들을 그대로 믿고 전파해야 한다.

 

둘째, 성경에 무엇을 더한다거나 빼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성경은 조그마한 가감도 허락하지 않는 책이다. 죄인의 구원과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일점이나 일획을 더하게 되면, 재앙을 받게 된다. 성경에서 일점이나 일획을 빼게 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 함에서 제하여 버림을 당하게 된다(계 22;18-19). 이해하기가 어렵다거나 현대 과학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는 일이 있다면,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궁금하다거나 꼭 필요하다고 하여 새로운 계시를 추가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성경 전체를 편협 됨이 없이 균형 있게 전파해야 한다. 성경 말씀에는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다. 죄를 책망하고 저주를 경고하는 부분이 있고, 위로와 내일의 소망을 가르치는 부분이 있다. 내세를 말하는 부분이 있고, 현실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치는 부분이 있고, 가이사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부분이 있다. 참된 교회는 이 모든 것들을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균형있게 전파해야 한다.

 

넷째, 성경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여겨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그 권위는 그 자신의 권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가진 권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말씀의 전파자를 말씀과 같은, 또는 말씀보다 높은 권위에 올려놓지 않는다. 종이 아들한테 하다가는 버림을 당하게 된다. 헤롯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다가 충이 먹어 죽었다(행 12:23). 말씀의 전파자가 말씀의 권위를 가로채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말씀의 전파자가 아니라, 그가 주장하는 사상의 교주에 불과하다. 참 교회에는 이런 일이 없다.

 

정당한 성례의 거행

 

성례(聖禮)란 거룩한 의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자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거룩한 의식들이 행해진다. 예배, 기도, 안수, 결혼, 임직 등 모든 의식물들이 다 거룩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이 모두다 참교회를 구분하게 해 주는 성례라고 보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성례의 종류가 7가지나 된다고 말한다. 영세성사, 성체성사, 고백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종부성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로마교회와 달리,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신약 교회를 위해 보여준 예표도 하례와 유월절 잔치 의식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 잔치에서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셨다. 주님께서 명하신 성례는 확대나 축소를 할 수가 없다. 선서식 같은 것으로 대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처럼 명령하신 성례를 반드시 말씀 그대로 거행하여야만 참된 교회라고 할 수가 있다.

 

주님께서 교회에 성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는 효과적인 수단을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성례를 주님의 말씀대로 정당하게 거행하면, 교회는 이를 통해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자체만으로 은혜가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례는 다음의 기준에 따라 행해질 때라야, 은혜의 수단이 되어지고 또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어진다.

첫째,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행해야 한다. 정확한 의미를 분별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성례는 성례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이방 종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술적인 의식과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성례를 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성경 말씀을 통한 그 의미에 대한 설명과 확인이 우선되어야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씻어짐을 의미한다. 죄인이 의인으로 인쳐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짐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불어 형제와 자매가 되어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 것에 대한 서약을 의미한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그 몸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의한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영양을 공급받게 됨을 의미한다. 그의 죽으심을 땅끝까지 전할 것에 대한 우리의 다짐을 의미한다. 동일한 음식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 피차 한 지체들임을 의미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정당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 세례는 먼저 자신의 죄인임과 그리스도께서 구주가 되심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은 후에 행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례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죄가 용서받아졌음을 인치는 표에 불과하다. 그리고 세례는 반드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한다. 고백이 없이 베풀어진 세례나, 삼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지 않은 세례는 정당한 세례가 아니다.

 

성찬은 먼저 말씀을 통한 의미의 설명이 있은 후에 행해져야 한다. 오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 떡을 들고 사례한 후에, 나누어 먹어야 한다. 그 다음에 잔을 나누어 마신다. 잔을 나누지 않거나 그 순서가 바뀌면 정당한 성찬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성찬에서 가져야 할 결의를 다짐하며, 찬송으로 마친다.

 

셋째, 지정된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성례에는 지정된 재료가 있다. 세례는 물로 베푼다. 물 속에 잠그는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물 속에 잠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을 찍어 바를 수도 있고, 뿌릴 수도 있다. 또 물을 부을 수도 있다. 또 물만 있다면, 특정한 장소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성찬은 누룩이 없는 떡과 포도에서 난 음료가 지정된 재료이다. 우유나 포도와 관계없는 술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반드시 지정된 재료를 사용하여 성례를 거행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재료 자체가 어떤 특별한 효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또 그 재료가 성찬과 함께 특별한 형태로 변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 재료를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넷째, 합당한 사람에게 베풀어져야 한다. 성례가 아무에게나 행해져서는 안 된다.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에게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유아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아들은 아직 죄나 신앙을 고백할만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례를 예표하는 구약의 할례가 유아들에게도 행해졌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들 중에 유아들이 포함되어 진다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성찬은 그 의미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만 받아야 한다. 또 자기를 살펴서 죄를 회개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찬은 은혜의 수단이기보다, 오히려 죄를 먹고 마시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유아세례 후, 아직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이나, 범죄로 인하여 징계 중에 있는 사람은 성찬을 받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합당한 사람에 의해서 베풀어져야 한다. 성례는 개인적인 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성찬도 주위 몸을 함께 나눔으로서, 서로가 지체됨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례는 공적으로 그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부득이 하다거나 급하다고 하여, 아무나 성례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해서 집사도 성례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빌립은 공궤를 맡은 집사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전도자의 자격으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행 21:8).

 

신실한 권징의 실시

 

참된 교회를 분별케 해주는 또 하나의 기준은 권징이 신실하게 실시되는 것이다. 권징이란 선한 일은 권장하고, 악한 일에는 징계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된다는 것은 권징이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또는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실행됨을 의미한다.

 

교회는 사랑을 내세워 범죄자를 동정하는 나머지 마침내 그 사람을 심각한 죄악에 이르게 하기가 쉽다. 또 작은 쓴 뿌리를 묵인하고 용납하다가 교회 안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쉽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법과 질서를 내세우다가 오히려 심각한 상처를 낳게 할 수도 있다. 또 일부 힘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권징이 악용될 소지도 있다. 그래서 교회는 권징을 신실하게 시행해야 한다. 고린도교회는 이 일을 등한히 하고 당을 만들어 분란을 일삼다가 사도로부터 심한 책망을 들었다(고전 5:12).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이 일을 잘함으로 칭찬을 받았다(계 2:23).

 

권징은 단지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교회가 권징을 실시하는 것은 성경의 실예와 교훈을 따른 것이다. 성경에는 교회에 직원들을 뽑아 세운 기록이 있다(행 6:1-7). 감독자와 장로들로 양무리를 치게 했고(행 20:28, 벧전 5:1), 피차에 가르치고 권면을 하여 덕을 세우게 했으며,(골 3:16, 살전 5:11), 필요에 따라 규례들을 작성했다는 기록도 있다(행 16:4).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셨다.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감독자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행 20:28). 사도 바울께서는 어지러움이 아니라 오직 화평이 되시는 하나님의 교회를(고전 14:33) 질서대로 다스리라고 하셨다(고전 14:40). 사도 베드로께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부득이 함으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치라고 하셨다(벧전 5:2). 또 교회의 순결을 더럽히는 자들과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귀지 말든지(살후 3:14), 내어 쫓으라고 하셨다(고전 5:2,13). 이러한 교훈은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에는 과연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교회의 혼란사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은 권징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권징이 시행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시비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지 않았다고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권징을 신실하게 시행하는 것이겠는가.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성경적 표준을 따라야 한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여 혼란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조직과 제도와 규범들을 만든다. 예배의 형식과 절차를 만든다. 믿음의 표준이 될만한 신앙고백이나 신조를 제정한다. 권징이나 교육, 또는 봉사를 담당할 직분자의 수, 그 임무와 자격 등을 재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성경적 표준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것들을 한 번의 제정으로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 어떻게 하면 질서를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항상 연구하고 살펴야 한다. 그래서 오류가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한다. 시대와 환경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있으면 개선을 해야 한다.

 

둘째, 회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

만일 교회 안에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단을 퍼뜨리거나 범죄를 하는 자가 있다면, 교회는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회는 먼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죄인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를 할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와 순결에 치명적인 영향이 있을 경우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주님처럼,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뒤엎어서라도, 성전을 깨끗게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권징을 실시하는 목적은 교회의 순결과 질서를 바로 하기 위함이요, 범죄자를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다. 권징은 결코 어떤 힘있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권징이 남용 또는 오용되고 있다면, 참된 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셋째, 일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교회는 권징의 실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 따른 일정한 절차를 지켜야 한다. 교회는 범죄자에게 공개적인 징계를 가하기 이전에 문제가 된 사실을 정확하게 분별하여서 오해나 실수가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범죄자에게는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두세 차례 회개를 촉구하여서 가급적 조용하게 해결되어지게 해야 한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증인을 세워서 다시 한 번 조용하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 다음에야 공적인 권면이나 책망을 고려한다. 이때는 범죄의 정도나 회개의 여부를 보아서 정직이나 면직을 시킨다. 또 성찬에 참여할 수 없도록 수찬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도저히 회개의 가망이 없을 경우에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서 출교를 명하기도 한다(마 18:15-17).

 

이름이나 소속 교파와 같은 명분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내걸고, 조직은 그럴싸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모두 참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참된 교회가 되려면 말씀을 참되게 전파하고, 성례를 정당하게 거행하고, 권징을 신실하게 실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들이 이러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연구와 노력을 쉬지않고 경주해야 한다






 

성령의 뜻 - 1800 년의 인내심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행 16,  7)
 


    성령이 우리의 정열적인 각종 계획들에 직접 연출하시며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는 사실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두번째 전도 여행에서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게 이런 일이 또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사도 바울은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계속 여행할 수 만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정략적인 계획 안에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인도받을 수 있도록 온전히 종속시킨다. 그런데 성령은 두번씩이나 사도 바울의 애초의 여행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지금 바로 인내와 기다림이 선포된 것이다'는 사실이 사도 바울에게는 명확했었다. 이 인내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꿈을 통해 바울은 순간적으로 '어디로 계속 여행해야 할지' 분명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복음이 성령의 연출에 힘입어 유럽으로 먼저 전해지게 된다. 결정적인 것은 우리 삶 속에서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밀한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해가 떠오르는 동방의 끝이라고 믿었던 한반도에 사는 우리 민족이 1800 여년간이나 복음이 전해지기를 인내로 기다려야만 하는 순간이 결정되는 복음사에 있어서 역사적인 순간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우랄 알타이어족의 조상인 셈족들이 먼저 걸어 갔던 그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흑해 남단인 비두니아에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는 것을 중단시키시고 우선적으로 그 반대의 길을 택하시고 그 당시 로마제국 아래 있는 각 이방민족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당장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파악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긴 안목으로 보면 하나님의 귀한 뜻대로 하나하나 복음의 역사가 진행된 길고 긴 역사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뜻을 굽히고, 하나님의 선한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롬


행  16, 6 - 15   느  9,  1 - 36    


배경 찬송은 "주의 사랑을 주의 선하심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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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나타난 자칭 선지자들

세상이 비웃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심판을 하지 않으신다면 악은 영원히 득세하고 마귀는 영원히 신나고 억울한 자는 영원히 억울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공간에 악이 존재하고 지속되도록 허용하거나 놔두신다면 하나님은 그 악을 위하여 우주의 일부를 창조하여 제공하신 꼴이 되어버리실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시고 죄를 용납하지 못 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세계에서 악을 반드시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온 세상의 죄악을 말갛게 씻어버릴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 주시는 예표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길이가 300 규빗, 너비가 50 규빗, 높이가 30 규빗인데 이를 미터단위로 환산하면 길이 135미터, 너비 22.5미터, 높이 13.5미터의 길고 조금 납작한 축구장보다 약간 더 큰 거대한 상자모양의 삼층 배가 됩니다. 잣나무로 지으라 하셨습니다.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라 하셨습니다. 거친 잣나무를 베고 켜고 다듬어 배를 짓는 일이나 역청을 구해 와서 방주의 안팎을 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며칠이나 몇 달, 몇 해로 끝날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일평생을 몸 바쳐 일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고 어느 한 부분, 한 구석이라도 빠뜨리거나 소홀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고, 대충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를 지은 장소도 바닷가나 강가가 아닌 땅위였을 것이고 비도 아직 안 내리는 때였으니 당시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하는 일은 아까운 시간과 노력과 돈과 인생을 허비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미친 짓이었을 것이니, 어쩌면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에게는 그들의 조롱과 비웃음과 모멸을 이기는 일이 방주를 짓는 일보다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그렇게 험난하고 멀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스티로폼 박스나 구명보트 하나씩 만들어서 타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조롱 속에서 거칠고 무거운 잣나무를 베어 와서 고뱅이들을 잘라내고 다듬고 길이와 폭을 빈틈없이 맞추어 방주를 짓고 석청을 안팎으로 빈틈없이 바르는 일은 가시밭길, 죽음과도 같은 고난과 형극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멋진 백향목이나 적송이나 전나무 같은 좋은 목재 놔두고 거칠고 고뱅이 많은 잣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역청으로 방주의 안팎을 칠하라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가시떨기 조각목으로 언약궤를 만들라고 명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황금으로 언약궤를 싸라 하시고 또 그 위에 속죄소를 두고 피를 뿌리게 하셨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노아처럼 잣나무를 베어다 역청을 발라가며 구원의 방주를 짓지는 않습니다. 가시떨기나무로 법궤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습니다. 방주의 재료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거친 잣나무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메마른 가시나무 조각목은 바로 우리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쳐서 다듬고 맞추고 십자가의 보혈을 안팎에 발라야 합니다.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해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그 방주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 노아 자신과 그의 처, 그리고 그 자녀들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심판이 어디 있느냐고 비웃고 조롱하는 세상 속에서, 세상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여기는 십자가를 지고, 세상이 이해하지 못 하는 일, 저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평생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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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털롭 캐년(Antelope Canyon)은,

캐년 안으로 내리는 환상적인 빛으로 인해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앤틸롭 캐년은

Upper Antelope Canyon과

Lower Antelope Canyon으로 나뉘어집니다.

 

사람들 중에는 가끔

자기가 Upper에 다녀왔는지

혹은 Lower에 다녀왔는지 헷갈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분은 간단합니다.

캐년 안으로 들어갈 때,

 

차를 타고

10여분쯤 간 다음에

입구로 들어갔다면 Upper에 들어간 것이고,

 

처음부터

곧바로 걸어서 갔다면

그는 Lower에 들어간 것입니다.

 

여름에

이곳을 방문할 경우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라면

Upper로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Lower도 좋기는 하지만

Lower는 Upper 만큼 빛이 좋지는 않습니다.

 

다만, Lower는

길이 매우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빛을 촬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Lower도 방문자를 결코 실망시키지는 않습니다.

 

Upper의 길이

대부분 평탄하다면

Lower는 대부분 내리막길입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도 있습니다.

 

Lower가

Upper보다 길 자체가

훨씬 드라마틱하니 볼 것은 당연히 더 많습니다.

 

Lower가

Upper보다 부족한 것은

단 한가지, 빛이 약할 뿐입니다.

 

upper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Lower를 이야기하는 형국이 되었군요.

 

그럼, 여름철에

Upper에 들어오는 빛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16101454_1.jpg

여름철이 아닌,

다른 계절의 경우는

빛이 캐년 바닥 안으로 직접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5월이나 9월의 경우에도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빛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간대가 있기는 합니다.

 

여름철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하지를 전후한

6월 20-22일 사이가 빛이 바닥에 가장 오래 머뭅니다.


16101454_2.jpg

Upper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막의 모래길을 달리기에 적합하도록 개조된

High clearance차량을 타고 이런 길을 10여분 정도 들어갑니다.


16101454_3.jpg

Upper의 초입 부분인

Candlestand 주위의 모습입니다.

 

촛대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보여서

Candlestand, 혹은 Candlestick 이라고 합니다.


16101454_4.jpg

여름철에

포토투어 타임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되는데

 

11시에 들어갔다고 해서

빛이 곧장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또한

11시 30분이나 12시에

빛이 떨어지는 시간대에 그 자리에 있었다 할지라도

 

모든 장소에서

동시에 빛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캐년 위쪽의 상태에 따라 빛이 더 빨리,

혹은 더 늦게 들어오는 위치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16101454_5.jpg

위의 사진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빛이 희미하게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이럴 경우에

Navajo Nation 가이드는

 

(참고: 앤털롭 캐년에서는

나바호 사람만이 가이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사진 촬영에서 빛이 가장 좋은 장소가 어디인지는 잘 모릅니다.)

 

모래를 뿌려주는데,

이 모래로 인하여 빛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6101454_6.jpg

모래를 뿌려주자

빛이 모습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16101454_7.jpg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면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가끔은

이런 유령처럼 생긴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16101454_8.jpg

특정한 시간대에

특정한 장소에서 기다리면

빛이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옆으로 비취는 특이한 경우도 있습니다.


16102107_9.jpg

밑에서

너도 나도 모래를 뿌려대니

 

모래 먼지가

위로 올라서 빛과 합쳐지면서

모래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16102107_10.jpg

아!

이곳엔 불이 붙었군요.

 

돋보기로

빛을 모으면

종이에 불이 붙듯이

 

캐년에 들어온 빛이

마치 불을 일으킨 것처럼 보입니다.


16102107_11.jpg

그리고

그 빛에 모래를 뿌리면

캠파이어의 불꽃처럼 모래가 타오릅니다.


16102107_12.jpg

앤털롭 캐년에서

멋진 빛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가이드가 모래를 뿌린 직후에 곧바로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모래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다음

빛이 일정한 모습으로 보일 때 촬영해야 합니다.


16103854_13.jpg

앤털롭 캐년의 빛은

직광, 순광, 역광, 측광, 사광,

반사광, 간접광 등 여러 가지 빛이 공존하는데

 

실제 육안으로 보는 빛과

사진 촬영 결과에 나타나는 빛이 다르기 때문에

 

좋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다녀온 후에

결과를 비교 측정해 보아야만 합니다.


16103854_14.jpg

캐년 안으로 들어온 빛은

빛의 강도와 위치에 따라

참으로 다양한 색감으로 나타납니다.


16103854_15.jpg

대낮에

육안으로 빛을 볼 때는

빛이 하나의 색으로 보이지만

프리즘을 통과하면 기본 7가지 색으로 세분됩니다.

 

앤털롭 캐년에서는

하나의 빛이 프리즘을 통해 보는 것 같이

평상시에 보기 힘든 여러 가지 색으로 나뉘어져 보입니다.


16103854_16.jpg

 

빛이 가장 강할 때인

낮 12시 경의 사진입니다.

 

이 때는

모래를 뿌리지 않아도

선명한 빛의 광선을 볼 수 있습니다.



16103854_17.jpg

여기에 누군가가 모래를 뿌렸더니

빛이 마치 스타워즈에 나오는 광선검처럼 보입니다.


16103854_18.jpg

빛이 만들어내는 특이한 형상...

빛이 들어오는 캐년 위쪽의 모양에 따라

캐년안에 비취는 모양이 결정됩니다.


16104534_19.jpg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이쪽 방향을 향해 촬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몇 명 안되어 보이지만

실제로 여름철에 이 좁은 캐년 안은

수백명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16104534_20.jpg

가이드가 모래를 뿌리자

갑자기 빛이 확 드러납니다.

 

이 사진의 경우

모래를 뿌린 직후에 너무 빨리 찍은 사진입니다.

몇 초쯤 더 기다렸다면 빛이 고운 모습을 찍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에서 밀고 당기고,

너무나 복잡한 상황이기에

그럴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16104534_21.jpg


16104534_22.jpg

 

시간대에 따라

빛이 위에서 직진으로

바로 떨어지는 때가 있는데 그 시간은 극히 짧습니다.



16104534_23.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21)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그 한 마디 약속을 천금처럼 귀하게 여겨라!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경룡이 엄마에게 온 전화였다. 그녀는 내 근황에 대해 물었다.
나는 이야기했고, 그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경룡이 엄마는 내 오래된 학부형이다. 교직에 있을 때, 나는 그녀의 아들 경룡이가 5학년 때 담임을 했었다.
어느 날 경룡이 엄마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학교의 왕따였었다. 불교학교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해서 왕따였고,

 촌지를 받지 말자고 해서 교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경룡이 엄마는 “선생님이 학교에서 아이들과 예배를 드린다는 게

너무 감사해서 왔어요”라면서 감사의 표시로 촌지를 내밀었다.

극구 사양을 해도 ‘감사 표시’라며 경룡이 엄마는 고집을 부렸다.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아서 “정 그러시다면 교회에 가셔서 헌금을 하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것이 약속이 되어 그녀는 한결같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경룡이가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을 만큼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녀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면서도, 그녀가 병중에 있을 때도,

그녀의 집안이 어려울 때도 그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내 전화번호가 몇 번 바뀌었어도 어떻게 해서든 먼저 알고

전화를 걸어오는 쪽은 늘 그녀였다. 그녀는 크리스천의 한 마디 약속을 천금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기도할게요”라는 말을 남발하는 바람에 지키지 못한 기도의 약속이 많은 나는

그녀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녀의 신실함을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부도낸 수표처럼 하늘에 쌓여 있을까봐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한다.

손가락 걸고 한 약속도 아닌데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이라 생각하고

그토록 긴 세월을 기도하나보다. 약속이라기보다 일방적인 부탁이었음에도

그녀는 “예”라고 응답했던 그 한 마디에 책임을 걸머졌던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약속을 하고, 그 책임에는 무감각해

교회의 신뢰가 떨어져가고 있는 이 시대에 신실히 약속을 지키는

경룡이 엄마는 기독교인의 “예”에 대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힘들면, 기대렴 #오인숙 #규장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마18:19-20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 약 5:16

 

출처: 사모님사모님/소망의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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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사랑은... 

최송연 나 어렸을 적에 당신 사랑은 별빛 찬란한 꿈이었고 나 젊었을 적에 당신 사랑은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네 나 늙고 병들 때 당신 사랑은 든든한 바위 산성 되시며 내 여정 다할 때 당신 사랑은 그 나라로 이끄는 매개체이네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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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다시 만날 사람도 있겠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서
다시 만날 보장이란 없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너무
경솔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건 아닌지요

옷깃이라도 스치고 눈이라도 마주치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좀더 좋은 인상을 주면서

좀더 짙은 애정을 느끼며 살아가야 함에도
우린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내가 어떤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떻게 유독 그 사람과 마주치게 된단 말입니까

그 숱한 사람들과 그 숱한 세월 속에서 나와 만났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짧은 만남이었다 치더라도

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린 어느 만남이라고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름다운 기억으로써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서
남의 가슴에 꼭꼭 간직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린 모두 아낌없는 노력을 해야 될 겁니다.


 - 담아온 글 -

출처: 사모님사모님/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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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해야 할 때 

     


배경 음악은 Tomaso Albinon의 "Adagio in G Mino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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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살린 단 한장의 사진




동성애를 지지하는 세계 지도자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박원순 서울시장, 애플 팀 쿡 CEO 등 세계 지도자들이 동성애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동성애를 만류해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지지하는 것은 희안한 일이다

더구나 동성애는 정상적인 가정과 부부의 관계를 왜곡시킬뿐 아니라 에이즈 질병을 확산시키는 온상으로 에이즈는 전세계 160여개국에서 3800만명이나 감염되고 약 2800만명이 사망하였다

에이즈 확산의 온상인 동성애를 반대하지는 못할망정 세계지도자들이 앞다투어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성결혼 합법화가 가능한 세계지도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국가들이 동성결혼 합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LGBT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21세기부터 동성 결혼의 입법이 시작되었고

전 세계 15개국에서 동성 결혼을 전면적으로 법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그 밖에 미국의 30개 주, 영국, 멕시코 등에서도 시행하고 있다.

또한 30개 이상의 국가가 동성 커플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고 있다

LGBT는 성소수자 중 레즈비언(Lesbian)과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를 합쳐서 부르는 단어이다. 퀴어(Queer)나 레즈비게이(lesbigay)에 비해선 논쟁이 덜한 용어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우간다, 나이지리아 등에서는 반동성애법이 통과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13년 7월 아프리카 순방 기회를 활용, 아프리카 정부지도자들에게 동성애를 지지하고 형사 처벌하지 말아줄 것을 촉구했다.

오바마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 받아야 하며, 어떤 형태의 차별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네갈대통령 매키 살(Macky Sall)은 오바마의 요구를 거절하고 세네갈은 아직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케냐의 윌리암 루토 부통령도 오바마의 요구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서 비롯된 결혼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루토 부통령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케냐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오바마 대통령은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지만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다.

아프리카가 에이즈로 인해 고통을 당한 것을 감안하면 오바마가 아프리카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평등을 요구한 것을 이례적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한국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좌절된데 아쉬움을 나타내며 LGBT와 청소년을 위해, 학교를 더욱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자며 동성애 지지를 강조했다

동성애를 허용하는 문화가 학교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라니 기가 막힐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13년 8월 인터뷰에서 “우리는 낙태, 피임 방식, 동성애 이슈들에 대해 주장할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들을 바라보실 때, 사랑으로 이 사람의 존재를 지지하실 것인가 아니면 거절하면서 그를 심판하실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미국 가톨릭 신자 70%가 교황의 발언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나 교황은 성경을 믿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금년 10월 "한국이 아시아에서 첫 동성결혼 합법화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고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기사에 실렸다

 

애플 CEO 팀 쿡(Tim Cook)은 오늘 커밍아웃을 선언하였다

그는 동성애가 신이 준 선물이라고 강변하였지만 신(God)은 그런 선물을 준 적이 없다

쿡이 말하는 신은 god(Satan)을 의미한다

동성애는 루시퍼의 복음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팀 쿡이 커밍아웃 하는 날,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이 새단장을 하고 공개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레이디 가가는 양성애자이며 동성애를 지지하고 반기독교 행보를 걷고 있는데 동성간의 결혼 허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동성 커플 주례를 보기도 했었다

동성애 옹호 단체 오렌지 카운티 이퀄러티 프로젝트가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펼친 인기 투표에서 22%의 투표를 받아 3위로 선정되었다.

레이디 가가를 보면 악에 헌신했을 때 실제 드러난 타락상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악의 실제가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원천적인 악으로 인간은 지옥이 자동 종착역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변혁이 필요한 것이다. 

 

WHO의 위촉을 받은 자문위원회는 지난 수십 년간 발표된 심리학 및 역학 연구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국제 질병분류서 F66.0조와 기타 4개 조항에 포함된 `동성애 관련 심리학적 질환`의 질병명을 ICD에서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지도자들에게 다음 질문에 YES 할 수 있을까?

혹시 내 자녀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닐까?

 

1. 에이즈 확산에 대한 견해는?

2. 아들이 며느리로 남자를 데리고 온다면 찬성할 것인가?

3. 동성부부가 자녀를 출산하는 대신 입양하여 양육한다면 전인적 가정교육이 가능할까?

4. 군대에 보낸 아들이 동성애자들에게 괴롬힘을 당해도 그들을 처벌할 수 없다면?

5.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다수 시민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 정의일까?

6. 태국 등지에서 동성부부에 의한 대리모 의뢰가 증가하는 문제점은? ​

7. 학교에서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면 그 영향력은?​ 

 

일본 도쿄 후쿠시보건국의 2013년 자료에 따르면 동성애에 의한 에이즈 감염비율이 이성간 비율보다 2.5배에서 5.5배 높은 것으로 발표하였다 

2011년 미국자료에서는 95%가 동성간에 의해 감염이 되었다


일본, 동성애에 의한 에이즈 감염이 일반인에 비해 최대 5.5배 높게 나타났다. 아래 자료는 2013년 HIV 감염자 및 에이즈 환자의 동향 및 검사,...

 

 

 

한국에서 만약 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면 외국의 사례가 도움이 될 것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자유가 억압되거나 인권이 침해된다 

 

사례 1

미국 아이다호의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결혼식 예배당에서 동성애자에게 장소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든지 매일 1,000달러의 벌금을 내라는 연방법원의 통지를 받았다

 

사례 2

미국 오레곤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한 부부는 레즈비언이 요청한 결혼 케이크를 거부한 이유로 민원이 받아들여져 주정부는 이들에게 15만달러(1억 6천만원)의 벌금을 부과하여 제과점은 파산하였다

동성애자들은 이들 부부에게 갖가지 테러를 가한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사례3

미국 코들레인시에서는 동성결혼의 주례를 거부한 목사에게 하루당 180일간 투옥을 하거나 매일 1000달러의 벌금을 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60세인 냅 목사 부부는 주례를 계속 거부할 경우 일주일이면 투옥일은 3년이 되고 벌금은 7000달러가 된다

차별금지법안이 통과되면 성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사례 4

미국 네브라스카 지역 학교 위원회는 Lincoln Public School 교사들에게 성을 구분하는 표현을 금지하는 지침을 내렸다

예를 들어 소년 소녀, 신사 숙녀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인 342년에 동성 결혼이 금지되었다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가증히 여기며 금하고 있다(레위기 18:22,레위기20:13,고전6:9,롬1:26~27,딤전1:10,열상14:24)

 

동성애자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통계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게이는 인구의 3.8%로 약 9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레즈비언까지 포함하면 1000만명이 넘는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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