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의 비밀과 한국인의 정체성-2편
사회/정치 2016. 2. 25. 22:50
단군의 조선 건국 연대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이라는 설이 통용되어 왔다. 이 기원전 2333년 설은 고려의 13세기 말 이승휴의「제왕운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인데, 그때 이승휴는 자기 저서에서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조선 건국 연대를 중국의 요(堯)임금 건국 연대와 똑같이 무진년(戊辰年)으로 본 것인데, 그것은 실제 우리나라의 그 어떤 구체적인 자료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당시 요임금을 중국 한족의 시조로 보면서 -요임금은 동이족이었다- 그의 건국 연대가 우리 단군의 건국 연대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그런 논법을 세웠던 것이다.
건국시조 단군 때로부터 상당히 긴 세월이 흐른 후세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연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고, 다만 단군이 매우 오랜 옛적에 나라를 세웠다는 막연한 인식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의 건국 연대를 자기들이 알고 있던 가장 오랜 옛 임금에 비교하여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이요, ‘요와 같은 시대’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주전 2333년인 단군기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단군의 즉위 원년의 절대 연대는 사실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삼국유사」등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군이 요와 동시에 즉위해 나라를 건국했다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다. 요와 순은 이상적인 통치시대를 펼친 인물의 대명사격이다. 특히 요는 공자가 성군으로 추앙하던 인물이다. 바로 그러한 요임금과 단군이 동시대에 즉위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즉 우리나라가 중국과 대등한 시기에 건국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것을 알리려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단군의 즉위 연대는 그 절대 연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내세우고자 했던 의식세계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따라서 단군을 성경상의 셈의 현손(玄孫) 욕단이라고 단정할 때에 단군 시대와 욕단 시대의 일치 여부는 논란의 소지가 될 것이 전혀 없다. 주전 2333년이라는 단군기원은 사실로서의 연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는 그보다 훨씬 더 옛날로 소급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주전 2333년인 단군기원이 성경상의 욕단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역추적하여 계산해 보면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당한 타락 원년(元年)은 B.C. 4114년이 된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타락을 계속해서 온 땅이 강포와 죄악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큰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는데, 그 홍수가 발생한 연대가 B.C.2458년이다. 셈의 증손자 에벨은 B.C.2391년에 태어나 B.C.2357년 욕단의 형인 벨렉을 낳았고, B.C.1927년까지 살았다.
이 성경 연대는 성경 연구가에 따라 연대 계산에 조금씩 차이가 있어 좀 더 위로 소급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정확무오한 연대 산출(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이 아니라 욕단의 연대가 바로 단군 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을 취하든 우리는 아득한 옛날 백두산정에서 창조주 하느님께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조선을 건국한 밝달임금, 곧 단군이 성경에 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갔다고 기록된 욕단이라고 얼마든지 단정할 수 있다.
예수원 설립자 토레이(R. A. Torrey? 대천덕, 사진)는 셈의 세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이 단군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제시한다:
“…창세기 10:25에 ‘에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에게는 ‘벨렉’과 ‘욕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벨렉’이란 ‘나뉘어진다’는 뜻으로 그는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 ‘욕단’은…알모닷, 셀렙 등 여러 사람들의 조상이 되고,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으로 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동방의 산지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셈의 족속들이기 때문에 동방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욕단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욕단이 혹 단군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계산은 할 수 없지만 단군의 시대와 욕단의 시대가 비슷한 연대입니다.”(대천덕,「우리와 하나님」, 도서출판 예수원, 1988, 163쪽)
그의 추측은 옳았다! 우리 알이랑민족사를 시작한 단군은 역사적 인물로서 성경상의 셈의 현손 욕단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누가 단군을 믿을 수 없다고 했는가
애석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군을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때로는 ‘우리는 곰의 자식이 아니다’라며 비장한 자세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단군을 부정한다. 그들은 단군을 그렇게 신화 속의 인물로 오해하게 만든 것이 일제의 식민사관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지배시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단군 신화가 우리 겨레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사화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온갖 학설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단군은 원래 묘향산의 산신 또는 평양 지방의 토지신이었는데 이것이 책에 기록되었다가 뒷날 몽고의 침입 때 고려인의 일치단결을 위해 건국 신화로 고쳐졌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단군 신화는 일연 등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왜 일본 학자들은 그토록 단군을 부정하려고 했을까? 여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한 침략 논리가 숨어 있다.
20세기 초 조선을 강탈, 영구 지배를 꿈꾸던 일제의 가장 큰 고민은 조선이 그들보다 긴 역사를 가진 문화 민족이라는데 있었다. 구한말 조선 강점 당시 자기들의 역사는 기원 후 1700년인데 비해 조선의 역사는 기원전 단군 조선(고조선) 이래로 4200년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역사의 반에도 못 미치는 어린 역사를 가진 섬나라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와 같은 분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격으로서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논리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는 우선 그들의 역사보다 2천년 이상 앞서 있는 조선 상고사를 말살하는 것이 시급했다. 그 방법은 단군을 부정하고 단군 조선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교활한 일제는 단군을 말살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시조가 없어지는 것이니 한국인은 단군을 하나의 조상으로 하는 단일민족으로서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잃게 되어 그 기(氣)가 꺾일 수밖에 없으며, 또 민족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일제 침략자들은 단군과 조선 고대사 말살 작업을 저들의 대조선 식민지 정책의 중요한 하나의 고리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20년대부터 우리의 역사를 날조?축소?왜곡?부정하는 작업을 조선 총독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단군 관계 역사책들에 대한 전면적인 약탈과 소각활동을 단행하였다. 일제의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찌는 헌병들을 내세워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책방들과 향교, 서원, 개인 집들을 샅샅이 뒤져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보이는 단군 관계 역사책들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역사, 문화, 지리책들을 수십만 권이나 압수하여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총 51종 20만권이나 되는 책들이 사라졌다. 그 후 일제는 유구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저들의 역사보다 뒤늦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직적인 조선사 위조 작업을 감행하였다.
교활한 일제는 「조선사」를 편찬함에 있어 자료가 부족하다는 구실을 걸어 단군조선의 역사를 빼버렸으며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역사 위조의 ‘명수’들을 내세워 단군은 후세에 꾸며낸 신적 존재이며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논증’하게하고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기 때문에 「조선사」에 서술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일제는 한국 고대사를 말살하여 4천여 년 조선의 장구한 역사를 2000년으로 깎아내렸고, 자기 나라의 역사는 5백년을 소급하여 2200년 이라고 했다.
일제는 조선을 영구지배 하고자 그들이 만든 새로운 역사, 조작된 역사 설계도에 두 나라의 국민을 맞춰 일본을 형으로 조선을 아우로 하는 이른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한나라를 만드는 망상을 실현하고자 허구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소행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현(現) 숙명여대 한국사 교수인 이만열 박사는 당시 일제 식민 사가들의 그 간교한 단군 말살 책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군 연구가들은 단군에 관한 기록들이 신화적인 요소와 함께 사실적인 부분도 있음을 중요시 한다. 즉, ‘옛날에 단군이라는 분이 있어서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니,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 기록은 신화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사실적인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에 근거해서 예부터 단군을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해 왔던 것이다. 물론 신화적인 부분으로 전해지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그것이 역사적 사실의 어떤 부분을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그 기록에서 신화적인 내용을 벗기고 실체의 알맹이를 찾아내려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주의 사관론자들은 신화에 나타난 역사적 실체를 탐구하려는 데에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신화가 곧 역사 일수 없다는 전제하에 단군에 관한 기록을 왜곡하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단군 관계 기록에서 신화적인 요인을 부정하기 위해 앞서 말한 사실적 부분도 신화와 함께 거부해 버렸다. 이렇게 거부한 것은 신화가 역사일 수 없다는 표면상의 이유와는 달리 식민지 한국의 역사가 그들의 소위 2200 여년의 역사보다 훨씬 상한선이 높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왜곡된 민족 감정 때문이었다.”(이만열,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p.57)
단군의 고조선 개국사화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사료적 가치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신화적 내용은 단순히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적 체험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 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당시대의 역사성이란 근거위에 그 시대상이 반영된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겨레 영아기 때의 이야기로서 한국인의 역사적 체험을 담고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따라서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현실의 대지를 밟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간교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군 관련 기록을 몽땅 ‘신화’로만 해석했다. 그래야만 단군조선, 곧 고조선을 말살시키고 우리 민족사의 상한선을 내려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축소 왜곡하려는 일제 어용 식민주의 역사가들에게 ‘단군’의 문제는 늘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단군’을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해 버리면 우리 겨레의 건국 역사가 무려 반만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단군’이나 ‘단군 조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왜곡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한국 교회의 일부 무지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과거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한국 상고사를 말살하기 위해 주장했던 논리를 마치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단군은 신화다”라고. 이는 서글픈 일이다. 학문적 검토 없는 한국 교회의 이와 같은 태도는 기독교회가 비이성적?비애국적 집단이라는 오해를 초래하고 있다. 이것이 선교 측면에서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교회에 끼치고 있는지 모른다.
맺는 말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영아기 때의 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로서, 한국인이 처음부터 창조주 하느님을 섬긴 욕단의 후손, 즉 이 땅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규명해 준다. 그러므로 ‘알이랑’은 선민(천손) 한민족의 키워드(keyword)이다. 바로 이것이 아리랑의 비밀이다.
한국인의 선조인 욕단 족속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신신앙을 갖고서(알이랑) 동방 산악 지대를 넘어서(고개를) 극동의 이 땅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백두산과 그 변두리를 근거지로 배달나라를 세웠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그 나라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답게 모두가 흰 옷을 입고 살았고, 오직 제천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유일신 하느님만을 섬겼다. 그래서 배달나라를 고대에 신시(神市), 곧 ‘하느님의 도성(City of God)’이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 한민족의 참모습이다!
알이랑! 그것은 우리 배달겨레의 근본사상이요 뿌리 정신이다. 그것은 ‘하느님 중심 사상’이요 ‘신본주의 정신’이니,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여호와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으로 민족사를 시작한 천손민족이라는 사실이 민요 ‘알이랑’으로 말미암아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알이랑’은 욕단 계열의 선민이 단군의 후손인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아주 분명한 ‘물증’이다. 그리하여 우리 겨레는 나라꽃까지 무궁화, 곧 ‘샤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인 것이다(무궁화의 국제적 이름은 한영사전에도 나와 있듯이 'The Rose of Sharon'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긴 세월을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고난 받으며 자기비하(自己卑下) 속에 살아왔다.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 예수원 설립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엔 한국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한국 백성에게 공동의 선(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어떤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만큼 한국으로서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대천덕,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생명의 샘터」, 1987, 70쪽)
그렇다! 우리 겨레는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속히 회복해야 하겠다. 실로 그것은 새 천년을 맞이한 우리 겨레의 가장 긴급한 과제이다.
알이랑! 그것은 우리 한민족의 원형과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 준다. 알이랑!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이다. ‘알이랑’으로 민족사를 시작한 우리는 ‘알이랑’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알이랑’으로 살아갈 것이다.
알이랑! 그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찬송가’이다. 그러므로 ‘알이랑’은 세계문화 유산이다. 우리는 이 귀한 노래 ‘알이랑’을 시편 삼아 함께 자주 불러야 한다. 우리 겨레에게 이 노래가 있는 한 여호와 하느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다.
동방의 성민 배달겨레여! 이제 스스로를 자각하고 다시 일어나라! 알이랑 민족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라! 민족의 주로 예수를 믿고 민족의 하느님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복음의 제사장 나라를 건설하라! 그래서 이 땅으로 다시 신시(神市), ‘하느님의 도성’(City of God)이 되게 하라! 우리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나중에 쓰시려고 동방의 땅 끝에 감추어 두신 또하나의 성민 알이랑 민족이다!
☞ 이 글은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에 수록된 내용을 일부만 요약한 것입니다.
보다 충분한 자료를 얻으시려면 이 책을 일독해 주십시오
백의종군
조국이 피에 얼룩진 백의를 입었나니
이 시련과 굴욕의 백의를 감추지 아니하고
그것을 자랑스레 걷어붙이고
어서 가리라, 나의 영원한 조국 바다로
조국 구원의 그날까지
겨레 부활의 그날까지
역사 회복의 그날까지
- 김성영(전 성결대 총장)의 서사시 ‘백의종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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