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수십채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들이 포대가 놓여 있었다. 13년째다 아무도 누군지 몰랐다. 비로소 지난해에 범인이 잡혔다. '나혼자 여러해 동안 소금을 나르다보니 힘이 들어서 읍사무소에 맡기겠다'고 소금을 트럭에 싣고 그가 자수했다.




강경환(50) 충남서산 대산읍 
영탑리에서 부성 염전이라는 소금 밭을  짓는 소금 장수다. 그런데 보니 그는 두손이 없는 장애인이 아닌가 손 없이 염전을? 또 서류를 살펴보니 그는 7년전까지 그 자신이 기초 수급자였던 빈한한 사람이 아닌가!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쁜 사내가 남을 돕는다.

소금 장수 강경한은 사건이 발생한 년월시를 또렸하게 기억하고 있다 1972년 12월 24일  오전 7시40분 1959년생인 강경한이 초등학교 마지막 맞은 6학년 나이는13세였다. 서산 벌말에 살던 강경한은 해변에서 '안티푸라민 닮은 통을 발견했다.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길래 그걸 떼네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에 돌로  깡통을 두드렸다. 순간 앞이 번쩍하더니 참혹한 현실이 펼쳐졌다. 안티푸라민이 아니라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질뢰 속칭 발목지뢰였다. 폭발음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달려와 경환을 업고 병원으로 갔다. 사흘뒤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손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 되었다 노래 잘해서 가수가 꿈이었든 소년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피를 너무 흘려서 죽었다고
 생각했드던 소년이 살아났다 하지만 '남'보기 부끄러워 '중학교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뒤로 3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 뉘어주고 살았다고 했다. 소년은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되도록 그리 살았다. 인생을 포기했다. 

어느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친정에 가셨는데 오시질 않는 겁니다. 배는 고프지 결국 내가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어요. 3년만이었다 석달동안 숟가락 질을 연습해서 그뒤로 스스로 밥을 먹었다. 스스로 밥을먹고 혁대를 차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였다. 모든게 귀찮아서 농약먹고 죽으려 했다. 열일곱살때부터 주막에 출근했다.



'아침10시에 출근해서 밤12시에 퇴근했어요. 주막에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술로 살았죠. 어느날 유인물이 하나 왔길래 무심코 버렸다가 아침에 유인물을 보니까 정근자씨라고 팔 둘이랑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거예요 가서 들었죠. '야'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반도 아닌데 이사람같이 못산다는 법 없지않나?'

강경환은 편지를 썼다 나도 당신처럼 살수있나? 답장이왔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아주아주 훗날이 된지금  강경환은 이렇게 말한다. 손이 있었으면 그손으로 나쁜짓을 하고 살았을거 같다.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되고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고 새롭게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것 강경환은 훌륭하게 그 방법을  찿아냈다.



1994년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너' 염전할 수 있겠나?
이미 1987년 교회에서 사람을 만나 결혼한 가장이었다. 하겠다고 했다. 피눈물 나는 삶이 시작 되었다. 농사짓는것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삽을 손 몽둥이로 놀리는 방법을 익히면서 해야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 밤9시까지 염전에 물을 대고  새벽까지 소금을 펏다. 하루 2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보람으로 일을 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인내라는게 그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1996년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리속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소금 한포대가 1만원가량 하는데 여기에서 1000원을 떼서 모았죠. 그걸로 소금을 저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주는겁니다.'  

한해도 빠지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다 한달 월급 받고선 고된 일 마다하고  도망가 버리는 직원들 대신에 부부가 직접 염전을 지으며 실천하고 있는 일이다. 아산의 한 복지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식 보내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강경한의 '부성염전'은 1만 2000평 한해 소출이 6000만원 정도다. 이거
저거 비용을 빼면 순수입은 한해에  1800만원 정도라고 했다. 뭐'1800만원 거기에서  10% 200만원은 꼬박꼬박 남을 위해 쓰고 있으나 이게 어디 이 사람에게 쉬운일인가요? 작년에는 400만원정도 되더라고 했다.

강경환이 말했다.

“조금만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디다. 소금 한 포대 팔아서 1000원 떼면 5000포, 500만원이잖아요.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돼서 돌아오고, 그 두 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에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




그 나눔과 연결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 2001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꼬리표를 뗐다.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시청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다. 수급자 수당 30만원이 날아갔다.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 6만원이 또 날아갔다.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주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어렵다.
염전도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고, 여고생인 둘째딸 학비도 버겁다. 가난한 사춘기 때 손 잃은 서러움과 방황하던 청년기를 일거에 날려버린 종교적인 깨우침이, 여전히 가난한 그에게 이른다. 손을 내밀라고,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을 내밀라고. 작년에는 ‘밀알’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운 일.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더 도우려고. 꿈? 거창하다.



“한 30억원 정도 모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마음놓고 남 도울 수 있잖아요. 지금은 형편이 이래서 돕고 싶어도 어렵고….” 

맑은 날이었다. 부부가 소금밭에 나가서 소금을 거두는데, 손 없는 남편이 능숙하고 진지한 몸짓으로 소금을 모으면 아내는 얌전하게 삽으로 밀대에 소금을 담고, 남편이 그 밀대를 ‘손몽둥이’로  밀어 소금창고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 모습, 참으로 장엄(莊嚴)했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운 마음을 보았다. 열심히 사시는 인생의 참 모습을...

강경환님의 남은생애 늘 행복과 평안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https://youtu.be/D2aAWctZM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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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말씀: 고전 15:12-13, 고전 15:21, 고전 15:42, 요11:25-26, 요 5:28-29.  

 

요즘 이세돌과 알파고(AlphaGo) 바둑대국이 많은 화제였습니다. 인간 두뇌가 나은가? 아니면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더 나은가? 알파고는 약 1200대의 컴퓨터가 작동합니다. 1초당 10만 가지의 수를 계산합니다. 어디에 둘 것인가를 지시합니다. 결국 이세돌 9단은 1승4패로 졌습니다. 이 걸 볼  인공지능 컴퓨터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했고,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가 대단합니다. 알파고를 이끈 팀장 데미스하사비스도 대단하고 1승이라도 챙긴 이세돌이 대단 합니다. 

하지만 누가 가장 위대한  아십니까? 알파고의 인공지능을 만든 데미스 하사비스    이세돌을 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더 위대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은 2016년  오늘 새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 함께 하나님 만세, 그리스도의 부활 만세 외칠 수 있 바랍니다.     

 

저는 어렸을 때, 슬피우는 상여가 지나가면 언제나 뛰어 나가, 구경을 하면서 인간의 죽음에 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 오리라,  워~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안에 익은 팥이 싹이 틀 때 다시 오랴,    

소반 위에 삶은 닭이 나래칠 때 다시 오랴,    ~  땡그랑 땡~  

한번 가고 못 오는 길 어이 섭지 아니하랴,   

북망산 마지막 길 내가 서러워 하노라,    ~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인간은 죽음 앞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한 번 가  오는  어이 섭지 아니하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과 척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I. 인간은 신비한  

인간은 신비한 존재입니다. 저의 아들 손자가 2살인 데, 가르치지도 않는데도 벌써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울면서 자기의 의사를 표합니다. 그러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하고, 살아있게 하는 그 생명 자체가 신비합니다.   

여러분의 몸 안에 있는 오장육부가 신비합니다. 머리 속 두뇌가 신비합니다. 온 몸에 퍼진 핏줄,   움직이는 신경계.  것들을 내가 있게 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만든 것도 아닌 데. 그것들이 있단 자체가 신비한 것입니다. 있다가 죽는 것도 신비합니다. 인간은 온통 신비 그 자체입니다.  

 

처럼 신비한 인간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오리라”, 다시 살아날  없을까요? 

한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인간일까요?   

거기에 대한 답(answer)이 2016년  오늘 새벽에 일어났던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 가르쳐 줍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 15:13,21,42) 

 

우리 인간을 만 분은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창`:18) 성부하나님/성자하나님/성령하나님 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6-27)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불멸한 존재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으셨습니다. 그러나 장사한지 3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부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계셨 그러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부활이 우리 인간의 생명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존재임을 입증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었던 예수를 누가 살렸나요?  

행2:24에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메여 있을  없음이라 

성부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요?   

(1) 인간들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없다고 체념하고, 포기합니다. 허무해서 울기만 기에,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예수 리심으로 인간은 반드시 살아나는 부활의 존재, 영생의 존재임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는 일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 15:15-16) 

 

(2) 둘째 이유는 예수를 통한 인류 구원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하나님의 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만 끝났다면 우리의 죄문제, 구원의문제가 해결되지를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죄문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고전 15:17-18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그래서 칼빈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십자가 죽으신 예수 중요하나 부활의 예수  중요시 합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죽으심으로 끝난 패배의 십자가요, 부활이 있기에 승리의 십자가 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승리가 있기에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확정적인 것으로서 더욱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죽음에 대한 승리,  대한 승리, 사단 세력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확정적인 것입니다.  

 

(3) 셋째 이유는 부활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소망인 영생의 소망 주기 위함이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그래서 일찍이 구약시대에 선지자 이사야 에스겔 선지자는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사26:18)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37: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만의 부활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께만 국한된다면, 부활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도 우리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우리는 여전히 죽음 가운데 헤메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구원 지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것이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도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새벽에 모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하며 마음껏 기뻐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여러분도 반드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 영생하기 때문입니다.        

 

II.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활할까요? 

여기  씨가 있습니다. 땅에 묻으면 없어지나요? 풀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거기서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달걀이 있습니다. 달걀은 없어지나 거기서 예쁜 형제 병아리가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육체인 몸을 땅에 묻으면, 몸이 풀어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땅에서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 아름다운 부활체 몸을 입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인간은 영 +  + , 셋(3)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죽으면 육과 영혼이 분리됩니다. 육은 땅에 묻혀 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혼은 없어지지 않고 하늘 갑니다. 낙원인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그러나 불신자 영혼은 낙원 아 스올(혹은 음부)로 갑니다.  

스올(=음부)은 지옥같은 곳입니다. 스올(혹은 음부)에 갇힌 영혼은 거기서 제약을 받습니다. 지옥 같은 스올(=음부)과 천국같은 낙원은 일종의 영혼들의 대기장소 입니다. 언제까지 대기 하느냐? 재림의 나팔이 불 때까지 입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의 재림 나팔소리  들여오면 하나님 앞에  영혼은 어찌 되나요?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입고 하나의 인간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올에 갇힌 영혼은 재림의 나팔소리가 들려도 거기 계속 갇혀 있습니다. 

그들도 부활하긴 하는 데,  때가 아닌 1000년 후에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인 부활체 어떤 것인가요?  

 몸은 고전15:43,44에 기록된 강한몸, 썩지않는몸, 영광의몸, 하늘에속한 신령한 몸입니다. 

여기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이란  아닙니다.  육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몸, 새로운 육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낙원에 있던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육체의 몸 결합하여 하나의 완벽한 인간으로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부활의 계획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체 가진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부활체는 현재의 지금의 몸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부활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 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5:44)  그러나 죽기 이전의 주체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부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부활체가 어떠 것인 대략 알 수 습니다. 

예수님은 운명하기 이전의 모습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화되었기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던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 부활의 예수님을 몰라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잠긴 문을 통과했고, 시공을 초월하여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고, 제자들과 만났고 대화하셨고 음식 잡수셨고, 생선도 잡수셨습니다. 제자들 대화하면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체도 예수님처럼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독특한 eunique 한 점이 있듯이  자의 고유한 특성 그대로  것입니다. 이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면  날에 우리가 서로 알아   을까요?   

부활체 가진 우리는 서로 확연히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 3:2절에 “그 날이 이르면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그러므로 그 날에 주님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체  다른 특성은 없나요?  

질병이 없습니다. 암에 걸리지 않고, 곰보나 째보도 업고 신체장애자도 없습니다. 성형수술도 필요없는 형용할 수 없는 미인 미남입니다. 주름살도 없 썩거나 죽지도 않습니다. 의사나 보약과 건강보험이 필요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않습니다. 중매장이가 필요 없습니다. 연애로 인해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내나 남편 때문에 속 썩힐 필요가 없습니다. 혈연 관계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로 인해 영향 받는 일은 일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15:48-49절에 부활한 몸의 특성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8-49)  

 

 

그래서  신학자 황승룡 박사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종말은 현실화 된다. 죽은 자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의 종말적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종말은 현재화 된다.   사건에서 죄와 악의 권세는 흩어졌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창조행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적 행위였다. 하나님의 이 행위(부활)는 죄와 악을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시작하신 징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왕이시고 주님이심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러니 놀랍지 않습니까?!! 

 

 

A. 그러면 죽은 자의 부활이 언제 을까요?    

  부활 둘(2) 로 나뉩니다. 예수를 믿었던 자들의 부활과 영접치 않 자들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살아있으면서 재림을 보는 자의 부활까지 합쳐 셋(3) 입니다.  

 부활의 시기와 모양이 다릅니다.  

 

(1) 예수를 영접하고 죽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 부활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4:16)   

 

(2) 예수  믿은 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바로 이뤄질까요?     

재림 나팔이 불어도 믿었던 자들과 함께 부활하지 못합니다. 재림 후로부터 천년이 지난  후인,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끝날 때에 그들은 부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이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를 하나님께 바칠 때에, 백보좌 심판하는 그 때에 비로소 악인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었던 자들과 불신자의 부활은 서로 다르고 차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고전15:23-25)  

 

그러니 여러분은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재림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때 입니까? 아니면 그 때로 부터 1000년 후인 백보좌 심판 때입니까?  것은 살아있을 때인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함을 유념하십시요.  

 

(3) 살아있 체로 재림을 맞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보지를 않습니다. 홀연히 부활체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재림의 주님을 만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리니 /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15:51-5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5-17절) 

 

 

B. 그러면 부활  어떻게 될까요?   

 

재림의 주(Lord)는 지금의 땅과 하늘이 아닌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고 친히 통치합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천년왕국 참여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을 다스리는 왕노릇 하는 특권을 누립니다. 불신자 천년왕국은  

커녕 땅 속에 그대로 묻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4-6절)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안  노릇 하니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노릇 하리라 

 

사도 바울은 고전 15:24-24에 천년왕국을 이렇게 말합니다.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C.  천년(1000년) 지나면 무엇이 있나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인 천년왕국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후엔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 대심판이 있습니다.  인류역사사상 살았던 모든 남녀노소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대심판 받습니다.  

대심판 때에 부활한 불신자는 어찌 되나요  인의 모습으로 부활 그들은 영원한 심판인 엄벌, 즉 지옥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천국입니다.  

 

계시록 20: 12-15절을 보십시요.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자나 작은 자나  보좌 앞에  있는데 책들이  있고 /  다른 책이 펴졌으니  생명책이라 /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25:46) 

  불신자들은 영벌 지옥, 믿음의 사람은 천국입니다 

 

 

그러면 영벌인 지옥은 어떤 입니까?   

 9:48-49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지옥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지옥에도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빠진 사람들은 죽고만 싶어도 죽지 못합니다. 죽음도 그들을 피해 갑니다. 괴로워 하며 영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Fry 판에 콩을 넣으면 팔딱팔딱 튀듯이 지옥에 간 사람들은 그렇게 팔딱팔딱 튀면서 고통 받으며,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은 떻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기에 시간 관계상 생합니다. 집에 가셔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 21-22장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백발의 노인된 그의 어머니가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애야 철학이 무엇이냐? 인간연구냐? 인생 사는 지혜냐? 나는 죽고 싶지 않구나, 영원히 살고 싶구나, 영생하는 철학은 없더냐?   

아들은 그의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영생하는 철학? 나는 지금 인생 사는 지혜를 공부하고 있는 데 영생철학을 원하시다니"    때부터 그는 영생하는 철학을 찾고자 노력헸습니다. 드디어 성경에서 영생하는 철학, 부활의 진리를 발견하였고, 그 후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부귀영화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는 지혜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영생철학,  부활의 진리를 추구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을 섬기며 사십시요. 여러분에게 죄용서와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며   있길 바랍니다.  

 

네가 만일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리라(롬 10:9) 

김한길 목사님 설교 동영상 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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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인류역사를 바꾼 하나님의 혁명 (기독신문 사설)

인간은 두 가지 차원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시간적 차원과 영원적 차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원적 차원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존재의 신비함이나

우주의 존재와 질서정연한 운행에 대하여

생각해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신적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섭리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신 사건이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구체적 사건에서 생겨난 종교다.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 그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

33년이라는 크로노스 시간 안에서의 삶,

갈릴리와 유다 및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에서 사역하신 일,

인간으로서의 삶. 이렇게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위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

그의 삶 마지막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치명적 약점은 성경의 정경성과 표현성을 부인하고

이성을 판단의 표준으로 삼는데 있다.

성경은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처럼 성경자체에 의하여 해석된다.

이성은 해석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성경을 지배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은 이성의 논리가 아닌

신앙의 논리가 적용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거나 어떤 교리를 논할 때

반드시 조심할 것은 인간 판단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

성경의 자체 판단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증언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은 언제 어디서나

절대 변경될 수 없는 기독교의 핵심 신앙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다가

예수 부활사건을 목격한 뒤부터 그들의 삶이 변화했다.

저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지속적 사건이요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구원자 메시아라는 확신을 알게 되면서 초대교회는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교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활신앙이 있다.

따라서 부활신앙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 믿는 자의 부활을 보증해준다.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아름다운 교회 치장과

예배와 수없는 신학이론의 체계는 모두 다 헛된 것임을 잊지 말자.

부활신앙이 없으면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사가 다 허무한 것이다.

부활은 인류역사를 뒤바꾼

전능자 하나님의 혁명적 변혁의 사건이다.
(펌: 기독신문 사설)    
       


대한민국 사망율 1위, 암!
위, 간, 폐, 췌장, 대장, 뇌는 물론이고 눈, 혀,
식도 심지어 코에도 암이 있는데 심장에만 암이 없어요
... 왜 심장엔 암이 없을까요?

우리 몸이 알아서 없게 할까요?

심장에 암이 없는 이유 네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산소가 풍부합니다

우리 몸 생명유지 시스템이 산소만큼은

심장부터 공급하기 때문 입니다



둘째, 에너지가 넘칩니다


우리 인체의 각 장기로 보낼 혈액을 돌리기
때문에 에너지가 넘칩니다



셋째, 규칙적인 운동을 합니다


심장은 엄마 뱃속에서 생명체로 태동될 때

부터 뛰기 시작해서 나이들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규칙적인 운동 즉 박동을 합니다
70세 기준 약 26억만번 뜁니다



넷째, 물이 풍부 합니다


우리 인체 약 7리터에 가까운 혈액을 돌리는

심장, 혈액의 93%가 물입니다

암환자들 보세요, 그 분들 절대로 물 안마십니다
만약 당신이 물을 많이 안 마신지 10년쯤이라면
암을 기다리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 몸은 물, 음식, 공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에너지를 얻고 생명 시스템을 유지
하기 위해 물, 음식, 공기를 몸에 넣습니다

이 세가지 중 혈액, 영양소, 면역체계, 효소를
이동하는게 바로 물이에요

그것뿐입니까 에너지 영양소, 탄수화물, 지 방,
단백질 대사 후 남은 찌거기도 물만이 밖으로 내 몰아내죠



마십니까? 하루 2리터?
절대 안마시죠!
술, 콜라, 커피는 마셔도 물은 안마시죠?
오히려 이 악당 3총사는 몸에 있는 수분을 잡아
빼버린다고요

술 마시면 소변이 나오는데 그게 술일거라고 생각하시죠?
아닙니다. 우리 몸속에 다른 용도로 준비되어 있던
물이 혈액농도 약알카리 7.3을 사수하기 위해
물을 동원해서 침입한 강산성을 씻어 내는거죠
눈물겹지 않습니까?



우리 몸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데 정작 주인이란 작자들은 계속
산성을 넣고 희희낙낙 하잖습니까?

머리 감는다고 매일 3~4리터의 물을 쓰면서
지구 두바퀴 반이나 도는 길이 혈관을 씻어
내는데 고작 1리터만 섭취하고 있자나요

암 무섭다 떠들다가 이제 생존율이 70%가까이

가니 별로 안무서운지도 모르죠
물, 물, 물을 드세요



괜히 식초 희석한다 뭐한다 산성수 만들어 자기
몸 고문하지 마세요

뉴욕주립대교수 고 주기환박사님 강의中!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고 간청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 주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지 않고 나의 소원을 주님 앞에 구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 김경회 목사의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에서 - 주님 안에 거하였을 때의 열매와 주님 안에 거하지 않았을 때의 열매는 너무도 다릅니다. 주님 안에 거하였을 때에는 생명이요 구원이요 능력이지만 주님 밖에 있을 때에는 죄악인 것입니다. 주님과 좋은 관계,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어떤 일을 해도 우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즉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가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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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서 주일로 변경이유/ 칼빈


 

주님의 날을 설교를 듣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기도를 드리는 데 활용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주님의 날은 우리에게 망루와 같은 역할을 해서 우리로 거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멀리까지 바라보게 해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의 날을 게임이나 헛된 오락, 하나님을 완전히 거스르는 행동들로 보냈다면 그들은 자신이 주님의 날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곁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제정하신 이 거룩한 규례가 그런 방법으로 어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 규례는 율법의 구속을 받고 있을 때처럼 의식을 엄격하게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형상이나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날에 따로따로 떨어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어느 특정한 날에 함께 모여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실은 매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지함을 고려하고 그들의 나태함 때문에 특별한 날이 그 목적을 위해서 온전히 바쳐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제 7일을 그날로 지정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정되었던 것과 같은 날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전에는 그날이 토요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를 율법의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율법에 담겨있는 의무를 취소시켰기 때문에 그날이 바뀌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까닭으로 그날이 옮겨졌다. 우리는 일주일 중 어느 날을 안식일로 정해서 그 규례를 준수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이틀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선택에 맡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성찬식을 갖고 하나님께 공동의 기도를 드리고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날을 정하는 것이 편리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 앉아서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이 규례를 지킴으로써 교회의 모든 존속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합당하다.”

 


 


 

칼빈설교. 신 5:12-15.

 

출처: 물과피와성령/글쓴이: 새생명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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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이 성도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쁨과 모든 선(善)의 원천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큰 상급”(창15:1)이시다.하나님이 자신을 선물로 내주신다면 모든 고통을 다 보상하고도 남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내주시는데 그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2 고난이 선을 베푸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시인은 “형통한 것이 유익이라” 하지 않고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선을 베푸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 더 지혜로와진다. 고난은 진리를 가르치는 학교와 같다. 고난은 깨달음을 준다. 고난은 교만, 정욕, 세속주의가 우리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고난은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고난은 성도를 더욱 거룩하게 만든다. 다이아몬드는 깎을수록 더 찬란한 광채를 발한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욱 닮게 해준다. 고난이라는 혹독한 겨울은 은혜라는 봄꽃을 피워낸다.

 

 

 

3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어린아이의 등에 거인이 짊어져야 할 짐을 지우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바이올린의 현이 끊어질 만큼 지나치게 세게 잡아당기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한 손으로 징계를 내리시면서도 다른 손으로 위로를 건네신다(아8:3).

 

 

 

4 고난이 죄를 예방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후12:7)고 했다. 번영은 아편처럼 우리를 죄악의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회초리를 들어 영적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심어주신다. 고난은 지옥의 형벌을 예방한다. 경건한 사람이 맛보는 한 조각의 슬픔은 죄인이 마셔야 할 바다 같은 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5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고난은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 하지만 그 화살을 쏘는 분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징계가 없는 것은 가장 큰 징계에 해당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대한 징계는 사랑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책망하시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잃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징계하신다면 그것은 곧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과 같다.

 

 

 

6 징계를 내리시지만 긍휼을 잃지 않으신다.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렘30:11). 그분은 가혹한 징계를 자제하시고 부드럽게 징계하신다. 즉, 호된 벌을 주실 수도 있지만 가급적 매를 아끼신다. 우리 죄값을 남김없이 치르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잔을 모조리 들이켜도 마땅한 우리에게 약간의 고난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취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육체를 잠시 연약하게 만드시며, 고난의 홍수를 뒤집어써야 할 상황인데도 발목까지 잠기게 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신다(겔47:3).

 

 

 

7 고난이 죄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아론은 두 아들이 불에 타 죽는 혹독한 시련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는 잠잠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입을 다물고 징계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슬러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불의의 수단을 써서 고난을 모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의 용광로에서 온전히 정화되어 나오기까지 인내한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지 않는다. 고난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과도 같다. 고난을 받으면 죄를 피할 수 있다. 고난은 겉옷이 조금 찢어지는 정도로 끝나지만 죄는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준다. 고난은 재산을 조금 잃는 것으로 끝나지만 죄는 하나님을 잃는 결과를 초래한다.

 

 

 

8 성도의 잘못을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성도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태도는 바뀌더라도 그분의 진정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혹독하게 꾸짖으실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의절을 선언하지 않으신다.

 

 

 

9 악인들이 당하는 징벌만큼 혹독한 고난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화살 한 대를 날리시지만 악인에게는 화살을 소낙비처럼 날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는 불쌍히 여기시지만, 악인이 고난을 당할 때는 비웃으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인들처럼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 악인들에게는 죄 값에 상응하는 모든 징벌과 고난이 주어진다.

 

 

 

10 위로를 잠시 거두시지만 더 큰 위로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재산을 거두셨다가 다시 사람들 위에 높이시고, 보화 하나를 거두어가시면 나중에 더 많은 보화를 허락하시며, 사랑하는 자식을 취하시면 더 많은 자식을 허락하셔서 두 배의 위로를 받게 하신다.

 

 

 

11 아무것도 빼앗지 않으시고 더 나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동전 한 닢을 잃고 금을 받았다면 손해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건강을 거두시고 거룩한 삶을 주셨다면 어떠한가? 자식의 생명을 취하시고 그리스도를 주셨다면 어떠한가? 꽃을 거두시고 보석을 주신다면 더 낫지 않은가?

 

 

 

12 하나님이 고난 받는 성도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고난을 당할 때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데 보좌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상태로 감옥에 있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의 임재는 용기를 준다. 폴리갑이 순교를 앞두고 원형극장으로 향할 때 하늘에서 “폴리갑아, 기뻐하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와 함께 불속으로 들어가셨다.

 

 

 

13 하나님께서 성도의 고난을 보상해주시기 때문이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 성도는 때로 큰 위로를 받고 능히 고난을 극복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며 우리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 새 힘을 주신다. 성도는 가장 심한 고난을 받을수록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주님이 고난을 복으로 바꿔주시기 때문이다.

 

 

 

14 성도의 고난이나 시련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흐린 뒤에 해가 비치듯 고난은 마침내 사라진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랑하신다. 결코 영원히 괴롭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성도에게 안식을 주신다. 죄인이 잘되고 성도가 고난받는 상황은 오래가지 않는다. 성경은 고난을 “잔”으로 묘사한다. 악인은 진노의 바다를 들이키고 성도는 고난의 잔을 마신다. 고난은 고통스럽지만 언젠가는 바람처럼 사라진다.

 

 

 

15 고난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천국에 간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어두운 구름 사이로 영광의 빛을 드러내신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는 곧 복된 천국에 이를 것이다. 고된 순례의 길이 끝난 뒤에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다. 그때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 천국의 영광과 낙원의 꽃들로 만든 화환을 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보다 더 많은 영광의 보석들로 치장한 영혼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당한 모든 고난을 보상해 주실 것이다. 이런 복된 미래를 상상하면 고난을 잊을 수 있다. 영광의 빛줄기가 비치면 성도의 눈물은 모두 마를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도 선대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선하신 분으로 생각해야 한다. 환자는 의사가 쓴 약을 처방해준다고 해서 그에게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병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으로 알고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원수의 창날이 아니라 아버지의 회초리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쓴 약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신다. 하나님을 항상 선하신 분으로 생각하자.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우자.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범사에는 고난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성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신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은 은혜가 충만하다는 증거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전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 토마스 왓슨,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pp 241-255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미시건주 교육 위원회는 미시건주의 학교들에게

모든 학생들이 부모나 의사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성과 이름과 화장실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지침서 초안을 작성하였다.

 

위원회 의장인 John C. Austin이 주도하고,

감독관인 Brian Whiston으로 승인을 받은 미시건 공립학교에

배포되는 이 지침서에는 부모나 의사가 아닌

오직 학생들 자신들만이 자신의 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학생들의 성 정체성을 결정할 책임은

오로지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의사나 정신과 전문가나 법적인 확인절차와 같은

외부적인 확인절차는 필요치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지침서에 담겨져 있다.

 

이 지침서에는 또 “성 정체성이란 날 때부터

주어진 생물학적 성과는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성에 대해 느끼는

내적 감각과 심리적 지식에 깊이 연관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기사원문 >> Michigan Schools To Let Students Choose Gender, Name And Bathroom

 


* 날 때부터 주어진 성에 대한 부정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가정과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악인 것이다.

 

삐뚤어진 변태적 성욕의 결과로 비롯된

항문성교를 ‘동성애(사랑)’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교육당국까지 나서서

어린 학생들을 이런 변태적 성욕으로 이끌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롯의 때’라 하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소식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남의 나라의 일이라 생각하면 안된다. 

조만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우리의 어린 자녀들도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동성애자가 되는 방법을

교육받게 될 것이다.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히신 그 손

죄없이 십자기에 매달이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힘을 잃고 온 누리 비치잖네

아~ 아~ 끝없어서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


나의 죄 너희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모두다 사하시려 십자가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의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 위에 피로 붉게 적셨네

아~ 아~ 끝없어서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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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전의 思夫曲(사부곡)

 


* 400년전의 思夫曲(죽은 낭군을 그리워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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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몇 년 전 추석무렵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고성 이씨 분묘 이장 시에 발견한
    미이라와 유품들을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시신을 염할 때 입혔던 옷가지 등이
    우리 복식사나 풍습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하여
    TV에 방영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미이라의 주인공인 이응태의 품에서

    부인이 죽은 남편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 통이
    416년 만에 같이 공개되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ㅡ눈물로 쓴 400년 전의 사부곡(思夫曲)ㅡ

    사부곡(思夫曲)은 죽은 남편을 못 잊어 그리워하는
    아내의 가슴 도려내는 그리움의 읊음이다
    지난 1998년 4월 경북 안동시 정상동의 한 양반가의
    오래된 묘지를 이장하던 중 무덤 안에서 조선 중기에 쓴
    한 여인의 한글편지가 한 통 발견되었다.

    412년이라는 세월을 넘어서 세상에 알려진 이 편지는
    조선조 명종과 선조 때 살았던 경남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응태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간 남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마음을 편지 형식으로 써서
    죽은 남편의 품에 넣어준 만사(輓詞)이다.

    만사(輓詞)-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심정을 적은 글 輓-수레끌만



    원이 아버지에게...로 시작되는 이편지는
    어찌 나를 두고 당신이 먼저 가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몰래 와서
    당신모습 보여주세요...라며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과 생전의 각별했던 부부애를 애틋한 필체로 표현하고 있는
    죽은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思夫曲)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임종 후 장례 전날까지의 짧은 시간에
    써 내려간 이 글은 원지 절반 크기의 한지에 촘촘하게 적혀 있다.
    하고픈 말이 더 있는데 쓸 종이의 지면이 부족하자 종이를 옆으로
    돌려 상단 남은 부분에 다시 빼곡하게 적을 정도로 지아비를 그리는
    아내의 애절한 마음이 곳곳에 담겨 있다.

    또 무덤 안에는 저승갈 때 신고 가라고 이씨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삼줄기와 함께 정성껏 역은 미투리와
    남편이 소중히 여겼던 아직 태어나지 않는 복 중의 아이에게 줄
    배냇저고리까지 함께 들어 있어 죽은 남편의 넋을 위로하려는
    각별했던 정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남편을 그리워한 이씨 부인이
    정작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이 기사는 전하고 있다.

    이 편지는 당시 엄격한 남녀유별의 유교사상 속에서
    이처럼 때 묻지 않고 허물없는 애정표현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뜻밖이지만 무엇보다도 아내와 남편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또 존중했던 당시 조선사회의 남녀 평등한 사고 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았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함께 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이야기는 툭하면 이혼하고
    자기만 위로 받으려는 이기주의 생각으로 나날이 엷어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부부와 가족 간에 대한 사랑의 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400년 전 진실로 서로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
    비록 육신은 떨어져 있을지언정 그들의 영혼만은
    지난400년 동안에도 줄곧 함께였을 것이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
    긴 어둠의 세월 속에서 이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가슴에 고이 품어주었던 마지막 편지였다.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 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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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게 집행된 십자가형은 범법자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 교묘하게 꾸며진 살해라는 견해가 우세하며 또 십자가형 집행의 내용을 알게 되면 잔인무도하기 그지 없어 인류역사상 가장 가혹하고도 혹독한 살해 방법임에 치를 떨게 된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도 십자가형은 죄질이 무거운 범법자로 도망친 노예, 혁명지도자, 탈영병 등에 적용되었으며 시민에는 적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십자가형의 방법은 특별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형 집행인에게 위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행인의 경험에 따라 그 방법에는 많은 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은 팔과 다리를 로프로 십자가에 묶어 고정하는데 양 손목과 팔은 십자가 횡목(橫木)의 뒤에다 고정하는 방법과 손을 횡목에 밀착시키고 손바닥에 굵은 못을 쳐 고정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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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TEGNA, Andrea, Crucifixion, 1457-59, Tempera on panel, 67 x 93 cm, Musee du Louvre, Paris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그린 “책형”(1460)이라는 그림을 보면 중앙에 있는 예수의 양쪽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있는 두 사람은 손목과 팔이 십자가의 뒤에다 고정했으며 예수의 경우는 횡목의 앞에다 못으로 고정했다.


또 손을 횡목에 고정하는데 있어서도 대부분의 그리스도 책형의 그림에는 손바닥에 못질을 한 것으로 그려졌는데 트리노에서 발견된 그리스도의 유해를 쌌던 시트의 손 부위에 해당되었던 부분을 면밀히 검사한 결과 손바닥보다는 손목관절에 못이 박혔던 것으로 해석됐고 또 의학적인 견지에서도 손바닥보다는 손목관절을 못으로 고정하는 것이 십자가에 몸을 지탱하는 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 방법은 정해져 있는 것이 없고 전적으로 형 집행인에게 맡겨졌던 것이기에 사람에 따라 많은 차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발에 못질하는 것도 어떤 그림에는 좌우 발에 각각 따로 못질한 것으로 표현된 것이 있는가 하면 좌우 발을 겹쳐서 못 하나로 고정한 것도 있다. 십자가의 세로목에는 엉덩이 높이에 항대(杭臺)를 만들어 상체가 지지되게 한 것과 발 부위에 족대(足臺)를 만들어 전신이 지지되게 한 것이 있다.

독일의 화가 그뢰네발트(Matthias Grunewald 1460-1528)가 그린 이제하임 제단화의 ‘그리스도 책형’은 손바닥을 못으로 고정하고 발에는 족대가 있고 발은 겹쳐 못질을 한 것으로 그려졌다.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가 고통을 이기다 못해 고개를 가슴 쪽으로 숙이고 있다. 가슴의 밑 부분이 잘록하게 파여 들어가고 흉벽에는 늑골 모양이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은 호흡곤란이 오다 지쳐서 탈진상태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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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NEWALD, Matthias, The Crucifixion, 1523-24, Oil on wood, 193 x 152,5 cm, Kunsthalle, Karlsruhe

못이 박힌 손바닥 부위를 보면 손가락은 부채 살처럼 퍼져있는데 이것은 손바닥에 못이 박힐 때의 아픔 때문에 손목과 손가락에 경련을 일으켰을 때 보는 모양이다. 발 부위는 두발이 겹쳐 못이 박혔으며 발가락의 인대들이 줄무늬처럼 일어선 것 역시 아픔 때문에 일어나는 발가락의 경련으로 보는 현상이며 못 박힌 두 발을 족대에 대지 못하고 공중에 뜬 것 역시 아픔과 경련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이나 하듯 못으로 인한 상처에서 피만이 아니라 체액까지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의 고통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 것이었는가를 여실히 표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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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이 장시간에 걸친 수직자세의 강요를 위해 설계된 것이 십자가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하반신에는 체위성 혈관장애가 반드시 오게 돼있으며, 심장으로 혈액이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팔다리의 근육의 활동을 필요로 하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에서는 팔다리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에 혈액의 순환장애가 와 사람은 허탈상태에 빠지게 된다.


항대나 족대 같은 받침대는 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팔다리의 근육을 조금씩이나마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실신하지 못하게 하지만, 결국 오히려 죽음과의 싸움을 연장시켜 고통을 오래 받게 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세에서 흉곽을 움직이기 위한 호흡근에는 최대한의 부담을 받게 됨으로 단시간 내에 마비가 야기되고 어깨의 호흡 보조근은 양 팔이 밑으로 늘어지기 때문에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되며, 복부는 밑으로 땅겨지기 때문에 복식호흡은 불가능하게 되어 흉곽은 숨을 내쉬는 것과 들어 쉬는 것의 중간에 고정돼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양의 혈액이 고정된 사지에 체류되는 결과로 순환은 장애 되어 맥박은 빠른 속도로 증가되고 혈압은 저하된다. 피부는 창백해지고 식은 땀을 흘리며 동공은 산대되고 이명과 어지러움이 일어난다. 이러한 허탈상태가 지속되면서 서서히 쇼크에 빠지게 된다. 즉 호흡장애와 순환장애가 서로 상승적으로 작용해 쇼크에 빠지게 되며 결국은 이것으로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형의 집행으로 죽음의 고통과의 사투는 2일 내지 3일 계속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의 경우는 6-9시간으로 기술되어 있다(마르 15,25.33.44). 예수의 경우는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에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체력의 소모가 컸던 것이 상승적으로 작용해 죽음이 빨리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형벌로서의 사형은 어디까지나 고통을 덜 당하고 사망하는 방법을 택해야 할 것이며, 십자가형의 경우는 일부러 극심한 고통을 주며 그것도 고통을 오랫동안 당하다 죽게끔 꾸며진 것이기 때문에 형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죄악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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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TEGNA, Andrea, Crucifixion, 1457-59, Tempera on panel, 67 x 93 cm, Musee du Louvre, Paris>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북러시아 화파. 16세기. 파리 국립미술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장면의 묘사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조각되거나 그려졌다.


서방교회는 주로 요한 복음의 수난사에 따라 그린 반면 동방교회에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마태오 복음의 수난사에 대한 강론에서 영감을 받아 조직적이고 상징적으로 그렸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서있으며, 그들 뒤에는 거룩한 부녀들과 백부장, 군인들,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군중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마리아를 향해 숙여진 예수의 얼굴은 지극한 고통중에도 고귀한 위엄과 평화를 지닌 표정을 짓고 계신다.
이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분의 몸은 죽음 안에서도 부패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디다.
십자가 아래에는 골고타 동굴이 열려 있는데 이는 죽음과 지옥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상징한다.
이 동굴에는 아담의 해골이 보인다.
전승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구원해야 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무덤위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것은 구약의 아담과 신약의 아담이 연결됨으로써,  죽음을 불러온 첫 아담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된것을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건축물은 예루살렘 성벽이다.
당시의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역시 성벽 바깥쪽에서 고통을 받았다.
즉, 예수의 시신이 도시, 성전 그리고 박해자들을 불결하게 만들지 않도록 도시 밖에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또한 영성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6세기 경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밖에서 수난하신 것처럼 이 땅 위에는 차지할 도성이 없고,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벽을 헐고 나아가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 13,12-13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치욕을 겪읍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팔이 달려 있는 횡목은 하늘을 배경삼고 있다
이렇게 창공에 놓인 십자가는 악의 세력에서 온 우주을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우주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모는 왼손으로는 망토를 쥐고 오른손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밀고 있다.
그녀는 비탄의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반대편의 요한은 영적인 공포와 번민으로 가득차 오른손으로 얼굴을 쥐고  왼손은 십자가를 향하여 내밀고 있다.
성모의 뒤의 여인은 왼손으로 자기뺨을 만지며 통곡하고 있다.
요한 뒤의 터반을 쓴 사람은 백부장 론지노스이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히심의 이콘’은 천상에로의 창문이 되며,  우리를 그 당시의 사건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며 구원의 신비와 결합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주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주의 후사에게 강복하시고
믿는 자에게 원수에 대한 승리를 주시고
십자가로 보호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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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나무 나의 가슴속에 행복나무를 심었어요. 내가 지어준 행복나무의 별명은 감사해요 입니다. 행복한 날은 좋은일이 생기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감사해요. 그저 그런날은 특별히 안 좋은일이 안 생기고 잘 지나감에 감사해요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날에는 이 일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 걸 감사해요라고 말하지요 또한 이 나무는 칭찬을 좋아해요 자책하며 과거 때문에 힘들어 하기보단 현재 스스로의 모습을 칭찬하며 감사해요라고 말해주는 걸 좋아한대요 참 신기한 일이예요 내가 감사해요라는 말을 할 때마다 이 행복나무는 자꾸자꾸 커져만 가니까요

 행복나무


나의 가슴속에 행복나무를 심었어요.
내가 지어준 행복나무의 별명은 감사해요 입니다.

행복한 날은 좋은일이 생기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감사해요.

그저 그런날은
특별히 안 좋은일이 안 생기고
잘 지나감에 감사해요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날에는
이 일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 걸 감사해요라고 말하지요

또한 이 나무는 칭찬을 좋아해요
자책하며 과거 때문에 힘들어 하기보단
현재 스스로의 모습을 칭찬하며
감사해요라고 말해주는 걸 좋아한대요

참 신기한 일이예요
내가 감사해요라는 말을 할 때마다
이 행복나무는 자꾸자꾸 커져만 가니까요


펀으루..안보이시는 분들을 위해..
^^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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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한참이던 지난 12일 조선비즈에서 소개한 인공지능의 미래(현재?)에 관한 기사이다.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승리한 알파고로 인한 ‘인공지능 쇼크’가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지만,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여겨왔던 지능과 종합적인 판단력에서 인간을 뛰어넘고 있다는 내용이다.



>> 인공지능 가라사대


의학·법률·경제 전문직까지… 그의 결정이 '정답'이 되는 시대 왔다.

암진단율 2배이상 정확하고 펀드 수익도 인간보다 월등

새 레시피 만드는 요리사까지 인공지능 여러 분야서 맹활약

미래 아닌 지금 벌어지는 일

인공지능이 환자 문진하고, 藥 35만건도 실수없이 조제


- 이미 곳곳서 인간 일자리 대체

변호사 대신 방대한 증거 수집, 美회계·세무사 수요 8만명 감소

2030년엔 인공지능이 '부장님'… 최소 300만명이 부하직원 될 듯

사람이 맹목적으로 믿고 따를 땐 사실상 인공지능의 지배 가능성


[출처 : 조선비즈]



구체적인 사례로 의학분야에 활용되고 있는 인공지능은 전문의보다 2배 정확한 암진단을 내리고 있고, 펀드 매니저로 활용되고 있는 인공지능은 고객에게 인간보다 월등한 수익을 안겨다 주고 있으며, 요리사들이 새로운 레시피를 만드데까지 인공지능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알파고와 마찬가지로 관련분야의 서적과 논문들을 통해 학습한 인공지능이 이 지식들을 통합 분석하여 이 분야의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의학, 법률, 경제분야 뿐 아니라 요리와 같은 전문직까지 진출한 ‘인공지능’은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종교 분야’에도 쉽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종교의 경전들(성경, 불경, 코란)과 관련 서적들(신앙서적, 논문 등)을 통째로 암기한 ‘인공지능 성직자’가 해당 종교 분야의 신도들에게 신앙상담을 해주고, 기도를 해주고, 때마다 필요한 설교를 해주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런 인공지능의 기능이 조금 더 발전을 한다면 단순히 ‘성직자를 대체하는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를 온전히 채워주는 ‘대체 신’의 역할까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장차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상징되는 거짓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에다) 적그리스도의 우상을 세우고,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하며 이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할 것”(계 13:14,15)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각 종교의 경전들과 관련서적들을 통째로 암기한 인공지능 로봇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체신'의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체 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을 포함한 모든 종교의 경전들과 관련 서적들을 통째로 암기하고,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 우상'이 예루살렘 성전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 세워져 사람들에게 말하며(신앙상담과 기도, 설교를 하며) 경배 받는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구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교감하기 위해 몸 속에 이식하는 칩이 곧 적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상징 즉, 짐승의 표가(짐승을 경배한다는 표식이) 될 것이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요한계시록 13장 12-18절)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폴 임(Paul Lim)박사의 저서!
'우리가 모르고 있는 모든 것이 이 책 속에 있었다'를 참고하여 편집하였습니다. 


1.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에 고층건물이 없는 이유
의사당
▲워싱턴D.C 에는 고층 건물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국회의사당(높이 94m) 보다 더높은 건물을 지을수 없도록 건축법이 제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2. 미국 국회의사당에는 의자가 국회의원 수보다 적게 배치가 돼 있다. 

워싱턴 D.C 랜드마크 대탐험! [ 백악관 / 국회의사당 ]
회의에 늦게 참석하는 의원은 뒤에 선채로 회의에 참여해야 되고 물론 명패도 없으니 화난다고 명패를 내던질 수도 없거니와 만일 기물을 내던졌다간 법의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게됩니다. 우리 나라 국회에도 적용했으면....


3. 피카소의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있을까?

입체주의 화가 피카소의 그림들  피카소의 작품로 보는 생애
루브르 (The Louvre) 박물관에 전시되는 작품은 그 작가가 죽은지 60년이 지나야 전시될 수 있습니다. 단 한사람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화가 조오지 브라크(George Braque1882~1963) 입니다.


4. 매미의 일생

하룻밤을 살기 위해서 매미는 17년 동안 땅속에서 번데기로 살다가 17년이 지난후 화려한 잠을 깨면 비로서 성숙된 매미로 변신되어 교접한 뒤 알을 낳고는 하룻밤을 잔 뒤 죽습니다. 


5. 새는 왜 노래를 부르나?

서양 사람들은 새가 기뻐서 노래를 부른다고하고 한국 사람들은 새가 운다고 합니다. 생각이 다르군요.
그러나 새는 노래하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새는 자기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 짝을 찾기위해서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앤드류 베이커의 조류학에서> 


6. 누에 실의 길이

누에는 자기 몸 길이보다 12, 000배나 더 긴 실을 짜냅니다. / 1200m 


7. 로댕(Rodin)의 사망

 

불란서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 중의 한사람인 로댕(Rodin)은 1917년 어느 골방에서 동상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가 조각한 작품은 알맞은 온도와 호사스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생전의 그가 상상도 할수 없는 엄청난 고가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8. 지구가 달리는 속도?

[짤막잇슈] &apos;제2의 지구&apos; 행성 발견돼... 외계인 생명체 가능성은
1) 公轉(공전) : 지구는 시속 106,560km의 무서운 속도(총알의 속도보다 8배나 빠름)로 태양을 한바퀴 도는데 365일 하고도 6시간9분 9.54초 걸립니다.

2)自轉(자전) : 위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한국의 경우 북위 37도를 기준으로 하면 자전속도는 초속 350m 이며 시속은1260km나 됩니다. KTX고속열차의 시속보다도 네 배나 빨리 휙휙 돌고 있는데도 안 어지러운게 이상하죠? 


9. 1초에 $241,758 (한화로 약 2억9천만원)을 벌다.

1988년에 6월 미국 아틀랜틱시에서있었던 세계 최대의대결 이라고 불리워졌던 헤비급 권투시합에서 미국의 마이크 타이슨은 마이켈 스핑크스를 91초 만에 녹다운 시키고 $22, 000, 000을 벌었으며 이것은1초에 약 $241,758을 번 셈입니다. 


10. 소금 이야기

식용으로는 생산량의 불과 5% 정도 쓰임, 소금이란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의 봉급 salary 를 의미하는 salarium에서 나왔습니다. 고대 로마시대에 소금의 가치는 대단해서 군인들의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봉급자를 salary man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시대에도 소금의 가치와 금의 가치는 대등하였답니다. 소금이 음식의 간을 맞출 때 사용되는 것은 전체 소금 사용의 5%에 불과 합니다. 나머지 95%는 유리, 비누, 가죽, 플라스틱, 종이, 페인트, 약품, 고무, 화장품, 밧데리를 만드는데 쓰이고, 도로 포장이나 콩크리트 공사에도 쓰입니다.


11. 누가 합판(合板Plywood)을 발명(發明) 했나?
 노벨    코아합판  
베니다 합판(Plywood)을 발명한 사람은 노벨상의 창시자인 앨프렛 노벨이 발명했습니다. 


12.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기네스북에도 올라 있음)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은 인도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 묘당으로 무갈제국의 샤자한이 황비 무무타즈 마할을 위해 건조한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데에는 20,000명의 남자가 18년 동안의 노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완공은 1648년에 되었습니다.


13. 강철王 앤드류 카네기

강철왕 카네기는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한 결혼을 안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52세의 노년신사였습니다.


14.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
 [물의효능] 한잔의물의효능 알고 건강한 물마시기
지구 위에 있는 물은 97%가 바다의 소금물입니다. 그 중의 2%이상이 얼음과 눈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로 우리가 마실수 있는 물은 0.009%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물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이러다가 물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남 캘리포니아주도 물 부족현상으로 절수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15. 지문(指紋)에 관한 사실

세계의 인구가 60억이라면 그 60억인이 모두 틀립니다. 그런 똑같은 가능성은 640억분의 1이랍니다. 그래서 오늘날 범인검거에 절대적인 증거로 활용됩니다.


16. TIP의 뜻
 
이 단어는 To Insure Promptness의 약자로 T.I.P를 한 단어로 만든 것입니다. 한국말로는 봉사료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미국에서는 식당 웨이츄레스나 웨이터에게 식사후 식사대의 15% 정도를 Tip으로 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17. 수백만 그루의 나무는 다람쥐에 의해서 심어집니다.

귀여운 다람쥐

다람쥐는 자기가 먹기 위해서 땅 속에다 숨겨놓은 열매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에 나무는 자동적으로 자라게 됩니다.
 


18. 조개가 진주를 만드는 데는....

Re:진주의 고귀함 그 이유

조개가 진주를 만드는 데는 5~10년이란 긴 세월이 걸립니다. 진주 한 알을 만들기 위해서 조개는10년 동안 이물질과 싸움에서 오는 고통과 아픔을 참아야 한답니다. 


19. 세계 금생산의 51% 생산

北.초대형 금괴 밀수 사건 적발..금광산 1년 생산량과 맞먹어

세계 금생산의 51%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생산됩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채굴된 金은112,000 톤에 이릅니다.

 

20.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들

카네기 [Carnegie, Andrew] - 미국 철강왕  찰리 채플린  토마스 A. 에디슨의 명언 &quot; 그것은 모두 재미 있는 놀이였다. &quot;

미국의 실업가이며 자선가인 앤드류 카네기, 영국의 영화배우 찰리 채프린, 영국의 소설가 찰스디킨스,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 소련의 소설가 막심 고르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 이들 모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천재들입니다.


21. 라이트형제와 보잉 747

세계최초 비행사, 라이트형제 아니다..美 공식 인정

라이트 형제가 키티호크에서 최초로 비행한 역사적인 기록은 12초였으며, 이 12초의 비행거리는 오늘날 보잉747의 날개 길이보다 짧은 비행 거리입니다.

 

22. 나무와 모든 식물의 영양 공급

[ENKOFE] 편백나무숲과 하늘정원을 빼놓고 &apos;힐링&apos;을 논하지 말라!

나무와 모든 식물은 영양 공급을 흙으로 부터는 10%밖에 받지 못하고 나머지는 모두 대기 중에서 탄소동화작용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23. 개구리의 일기예보(日氣豫報)
개구리 아이콘 
고대 중국인들은 개구리 우는 소리로 일기 예보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개구리가 청명한 날에 울면 비가 이틀 동안 내리며, 비가 온 후에 울면 날이 맑게 갤 것이며 그 적중율은 80%였다고 합니다.

 

24. 악어의 위산(胃酸)

악어100마리,사자100마리VS크리링 어릴때(전투력171)

악어의 위 속에는 많은 양의 염산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삼킨 쇠붙이도 녹여서 소화시킵니다. 그러니 사슴같은 짐승도 통채로 삼켜 버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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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통을...


사람의 죽음앞에서
이토록 슬피 목놓아 우는 나
천국에 입성 하였음에도
육신이 그리워 놓지 못하는 나
이것이 우리의 모습

주님이 나를위해 채찍에 맞을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걸을때
십자가위에 매달려 신음할때

얼마나 울었을까?
울다 들키면 십자가 형 받을까 하여
외면 하였을 나
주님의 고통을 보며
누가 울었을까?


누가 입을틀어 막고라도 울었을까?
그렇게 따르던 제자들도
주님을 위하여 통곡 하지 못했고
못박으라 외치던 군중들은
주님을 향해 조롱하고 침뱉고
주님의 고통에 누가 가슴을 쳤을까


나도 그들과 똑같이
아파하지도
가슴을치지도
통곡하지도 못했습니다


고난주일 주님앞에
주님 우리의 무지함 을 용서 해 달라고
고백합니다


출처: 사모님사모님/해피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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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다시 오시려는 발자국 소리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아멘"

 

마지막 때 주님께서 구약 때 이미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인류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역사의 종말이란 것은 인본주의의 인간이 왕노릇하는 세속적이고 인간 위주의 역사와, 악한 마귀가 역사하는 죄악의 세상과 죄의 세력이 끝난다는 것이고, 주님께서 통치하는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신성모독적인 것이 끝나고 주님에 의한 신령정치가 시작이 됩니다.

 

눅21: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이런 일의 징조들은 곧 하늘에서 나타나는 징조들과, 땅의 징조들과, 성도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받는 징조들이 있고, 그리고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안일무사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있고 재난이 있는 징조들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평안한 것 같은데 재앙과 재난이 일어나고 한쪽에서는 은혜가 풍성하고 한쪽에서는 은혜가 없는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재난이 몇 십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재난이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지진으로만 봐도 전에는 몇 백번 그랬는데 지금은 몇 천번이 일어나고 강도수도 더 높으며, 재난도 더 강력하고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이런 것이 표적입니다.

 

이런 징조들은 약속하신 주님께서 오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고 하나님께서 왕됨을 원치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러 오실 날이 가까움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주님께서 너희 문 앞에 이르신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이런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오시고 계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의 진행을 보면서 주님께서 오시고 계시구나를 압니다. 또한 주님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을 깨워주시고 계십니다. 어떤이에게는 예언을, 환상을 자꾸 보여주셔서 깨워주십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하늘의 것은 볼 수 없어 영감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알 수 있지만 주님은 하늘에서 준비를 거의 다 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위에서 하실 일은 위에서 하시고 이 땅에서 하실 일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해서 오신다는 말씀도 있으시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오신다는 말씀도 하셨기에 어떤 말씀을 이루시고 오실지 모르지만 더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기름부음을 받게 하시면서 준비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우리가 사모하고 준비하고 나가는 것이 주님의 기쁘신 뜻인데 이것을 주님께서 하시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재난도 또한 표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난리가 자주 나는 지를 모릅니다. 이런 표적들이 전부 주님께서 점점 가까이 오시고 계신 표적입니다.

이런 일이 시작된 것을 보거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다고 하십니다. 완전히 구속해 주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깝고 곧 도착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웠고 너희가 이 땅을 떠날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께서도 이 장막을 떠나 주님께 갈 날이 얼마 안남은 줄 아셨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로 갈 날이 이르신 것을 아셨고, 베드로 사도는 아예 주님께서 이 장막을 떠날 것을 지시하셨기에 다시 주의 강림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뭔가 이전과 다른 은혜를 주시는 것을 보거,든 고개를 들라는 것입니다. 주위에서도 갑자기 회개하고 봉사하고 그러더니 주님께서 데려가시는 것을 봅니다.

준비하시더니 천국에 가는 경우도 있듯이 오늘 우리 안에 마음으로 역사하시고, 변화되게 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을 보면서, 이전과 다른 물붓듯이 부어주시는 것을 보면서, 이전과 다른 재난들을 보면서, 계시록의 13장에 나타나는 666을 보면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보면서, 복음의 현장에서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를 보면서,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안남은 것 같다고 많은 분들이 말을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현장을 강하게 체험하신 분이 마지막 추수를 하시고 계심을 느끼면서 두렵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역사나 변화의 역사나 성령님의 역사를 보면서 마지막 장마비임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씨를 뿌릴 때 비가 많이 오고, 마지막에 추수 때 비를 많이 주시는데 이런 마지막 늦은비를 주시고 계심을 느낍니다.

인간에게 무엇을 넣어 감시하고 이런 것이 기분 나쁜 일입니다. 문명사회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에 넣어서 점점 뜨겁게 하면 점점 익어 죽는다고 합니다. 갑자기 뜨거운 물에 넣으면 놀라 튀어 나오지만 서서히 물을 뜨겁게 하니까 모르다가 죽는 것처럼 문명이 그렇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과학문명에 의해 점점 과학화와 세속화시켜 결국 영혼을 죽이는데 이것이 표적중의 하나입니다.

성도들의 표적은 은혜입니다. 은혜로 변화되는 분명한 표적이 없으면 이런 지식을 알아도 안됩니다. 이런 것이 옳다, 아니다 논쟁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지옥의 군대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부터 악한 마귀가 꿈꾸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권세가 깨어지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서 주님께서 기도케 하시면서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은혜의 단계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은혜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지금 이 시대가 마지막 때가 맞는 것 같아도 어둠의 세력에 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소름끼치는 악의 영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과 영의 싸움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기도생활에 몰두해야 합니다. 수십년부터 기도하면서 이런 시대가 올 줄 알고 준비시킨 사람들은 그대로 계속해서 하면 되지만, 정말 이런 시대가 진짜구나! 하고 이제 정신을 차리신 분들은 생명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자칩이 현실로 나와버리니 성도들이 이제야 놀라 버립니다.

전쟁이나 테러나 재난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은 더 쎄진것 뿐이지만 이 칩은 나라에서 다 하도록 계획이 되어 있습니다. 우선 겁나니까 이것은 아니고 앞으로의 것이 맞다고 하는데 어떻든지 중요한 것은 진짜로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는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시대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옵니다. 사시면서 점점 피부에 와 닿게 옵니다. 온 세계를 하나로 통치하는 세계가 오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도 이런 단계를 통해 점점 오고 있고, 주님께서도 이런 일들을 통해서 오시고 계시고, 우리도 가고 있는데 지금도 깨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발에 불이 떨어지면 그때는 늦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해보려고 열심히 하고 주의 일에 몸바쳐 일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지금이라도 깨어서 기도하고 기도에 생명을 걸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성령안에서 변화 받고 주님 앞에 설 은혜의 단계에 들어올 수 있지 시간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고 앞으로 주의 일을 이렇게 해야 겠다고 이렇게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변화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내 마음대로 주님을 한두번 부른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흑암의 세력이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는 세계가 오고 있습니다. 성령님도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기름부음을 부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물결을 타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면서 회개부터 해야 하고, 기도해서 영적 수준이 충만한 은혜의 수준까지 와야 하고, 주님의 약속을 받아야 하니 제 판단으로는 주의 일을 열심히 순수하게 하시려는 분들께 이제부터 기도에 생명을 걸고 해야 소망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들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십몇년부터 준비했는데 요셉도 십사년을 준비했는데 그동안 기도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았고 또한 시간이 없으니 얼마나 달려야 하겠습니까!

이제 깨어난 분들은 판단을 잘했다 하고 기도가 내 생명이다! 하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할려고 하고 살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들이 구원도 이런 은혜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은혜가 간단한 것이 아니고 쉽게 환란을 피하고 인자 앞에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니 압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시켜주셔야 되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런 자는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시는데 자기 마음대로 천국에 간다고 하듯이 지금 이런 시대적인 준비도 너무나 안되고 있습니다.

시대적인 표적이 개구리처럼 점점점 오고 있으니 이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은 둔해져서 잘 모릅니다. 몇십년부터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압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완전히 우상숭배하는 나라인데 주님께서 사십일 뒷면 멸망한다고 하신 한마디 말을 듣고 회개합니다. 성읍을 돌면서 말씀을 전한 것이기에 많은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니고 또한 미친 소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말이 왕의 귀에 들려 모든 사람들과 짐승까지 먹지도 말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고 하신 것도 아닌데 혹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사해 주실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무슨 환란은 환난이냐 재난은 무슨 재난이냐고 말을 안듣는데 니느웨 성읍은 선지자인줄도 모르면서 한마디 말을 듣고 회개하고 혹시 용서해 주실지 모른다고 도전해 봅니다. 주님께서 그 결단에 감동하셔서 심판을 오십년 가까이 연기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갑니다 해도 설마 그럴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있습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도 받아 보지 못하고 시대적인 징조도 예전부터 있었고 그랬기에 눈치채지 못하고 666도 상징이라고 하는데 이러면 자신만 손해입니다.

죄악이 너무나 쎕니다. 유라굴라 태풍같이 죄악이 심령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평안하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너무나 위험합니다.

거대한 태풍이 오려고 하면 바람부터 이상합니다. 그러면 뉴스를 듣고 빨리 대피를 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경험이 많아서 뉴스만 듣고도 대피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아직도 머뭇머뭇 주저주저 합니다. 롯의 가족처럼 그럽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강권해서 나가게 했습니다. 정말 이런 여러 가지 징조들이 합해서 주님께서 오시고 계시는데 지금은 거의 도착직전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동이 터 오듯이 우리도 곧 주님 만날 날이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인데 혹시 긍휼이라도 받게 하려고,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하면 놀래기라도 하면 소망이 있는데 생활속에 재난속에 강퍅해져서 놀래지도 않습니다.

정말 그러면 주님께서 깨어주실 방법이 더 이상 없으십니다. 나도 주님께서 직접해 주시면 깨어난다고 하면 안됩니다. 먼저 깨어주신 사람들을 통해 주님은 깨어나게 하십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악해졌는지 살아보면 압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피부로 느낄 정도로 압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머리를 들라고 하시는데 이런 일이 진작부터 시작이 되었고 상당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우리 구속이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생각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깝고 어둠의 세력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은행에서 현금을 받지 않습니다. 점점 은행의 시스템이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세금도 현금거래가 안됩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체제가 이렇게 좁혀 오고 있습니다. 진작 시작이 되었기에 진작 머리를 들었어야 하는데, 여러분도 누구를 만나보아 대화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이런 시대가 온다고 하니 이제부터 무릎을 꿇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영광중에 주님을 만나지는 못해도 환난에 긍휼이라도 받아야 하니 정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대를 안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해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준비입니다. 시대가 어느 정도까지 왔을까! 하고 알았으면 이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죽이려고 오는데 정말일까! 하지 않고 주님께 약속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하지는 않고 이것이 맞니, 아니니, 시간이 있니, 없니 이런 논쟁은 유익이 안됩니다. 기도해서 능력 받지 않으면 정보를 안다고 해도 능력이 없어 표를 받게 됩니다.

옛날 신사참배할 때 공포의 분위기로 인해 다 우상에게 경배하게 되듯이, 말레이시야에서도 알라는 오직 유일한 신이다고 스피커에 쟁쟁거리는데 영적 공기부터 다릅니다.

 

공기가 빛이 달라버리니 왠만한 성령충만치 않으면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포의 분위기가 사람을 질려버리게 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기도해야 삽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되고, 변화도 되고, 깨어있지 못함에 대한 회개도 하는 이런 열매가 되어야 하고 이것이 시작이고 계속 주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환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긍휼을 받기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영력만큼 기도할 수 있습니다.

 

30분 영력이 있으면 30분밖에 기도하지 못합니다. 한시간 영력이면 한시간 넘어가면 졸리고 안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도하지 않는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한단계 높아지려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야곱은 살기 위해 환도뼈가 위골되기 까지 기도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삼일금식하면서 혹시 긍휼을 베푸실지 모른다는 소망으로 회개기도 했습니다.

기도해서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말세에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의지로 안받고 도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만지지 말며! 이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메시지 핵심이 기도하게 해야 합니다.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모든 환난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어마어마한 가르침입니다. 기도하면 살고!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 고 이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첫 단추입니다. 기도하면 혹시 그리하지 아니할 줄 누가 알랴 하듯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주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영광에 들여보낼지 모르니 가능성이 있으니 기도하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니 최선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동안 기도를 안했으니 우리보다 두배 세배를 기도해야 하는데 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를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합니다.

진작부터 시작이 되었으니 이런 마음으로 중보기도해 주시고 혹시 이런 대화를 할 기회가 있으면 기도하라고 해야 합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환난이 와도 환난이 온 것을 알았다고 해도 기도해서 능력을 받고 야곱처럼 약속을 받은 사람만 살아납니다. 지금이라도 혹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를 들었으니 종합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회개하고, 기도해야 긍휼도 받고, 정말 잘하면 영광도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아멘

 

 

메시지: 복음교회 조호남 목사님

성경적 헌금-김은태 목사 

시집간 딸이 성경적 헌금에 대해 의 질문을 해왔습니다. 어느 교회나 그렇듯이 교회에서 헌금 문제로 고민이 생겼나봅니다. 딸에게 보내준 내용을  여기 올립니다.

성경적 헌금이란?
구약에 나타나는 헌금은 대략 두 곳 정도에 나오는데 첫째 민31:50에 나오는 (히)‘코르반’ 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막7:11) 바로 그 단어로 ‘가까이, 친밀해지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바치는 예물’이란 의미를 지닌다. 민수기 31장 50절에 나오는 헌금, 코르반은 앞서 발람과 발락의 사건 후 그들의 계략에 의해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과 음행하는 사건 일명 ‘고스비사건’을(민25:) 통해 염병의 저주로 인해 이만 사천 명이 죽은 사건 후 31장에서 미디안을 멸절하여 원수를 갚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재물 중 여호와의 전에 바친 예물이 바로 코르반이다 그러니까 여호와께 잘 보이려는 의도로 드린 헌금인 것을 유대인들이 계속 율법적 종교의식으로 신약시대까지 드려졌던 헌금이다.

또 하나는. 대하34:9,14절에 나오는  (히)’보‘로써 이 ’보‘는 앞의 민수기에 나오는 그 헌금’코르반‘으로 드려지면서 자리 잡은 의무적 성격의 헌금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요시야 왕이 훼파된 성전을 회복할 때에 그 꺼낸 돈으로 목수들과 인부들 임금을 지불하고 성전재건 비용을 충당한 것으로 보아 성전세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이 헌금은 신약성경 막12:41-44,와 눅21:1-4에서 등장하는 (헬)’가좁휠라키온‘과 같은 헌금 형태의 헌금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헌금에 관한 말씀은 막12:41-44와 눅21:1-4절의 내용과 서신서 중에서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 중에 고전16:1-2과 고후8장과 9장을 할애해서 사도바울이 헌금(연보)에  대한 가르침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전에는 분명 ‘연보’로 되어 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헌금으로 바뀌어 있다.  성경적 의미는 헌금 보다는 연보의 개념이 맞고 이 연보는 초대교회에서 자연스레 행하던 것이고 당시의 교회는 지금 같은 조직과 법제도가 없던 상황에서 자연스레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 말씀을 듣고 서로 교체하는 모임이 형성되었고 그 모임에서 어려운 형제들을 서로 십시일반으로 또는 형편과 능력대로 돕고 섬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예루살렘교회에 핍박과 어려움이 생기자 교회인 성도들이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있고 숨어 지내야 하고 때론 순교당하거나 잡혀죽은 성도들의 남겨진 가족들을 남은 교회가 돌보아야 할 상황들이 발생하자 사도 바울은 그가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여 물질적인 원조가 필요함을 알렸고 똑 같이 어려운 가운데 있는 아가야나 마게도냐 교회나 고린도의 여러 교회가 힘써, 지나치게 힘써 연보를 하여 도와 것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두 렙돈은 유일한 헌금 즉 연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의 중요한 가르침은 연보를 하는 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얘기가 아니다.  당시의 교회 즉, 성전에서는 이 연보(헌금)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었고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유대인들 사회와 주님에게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미 구약시대부터 행해지던 하나님으로부터 허용된 신앙행위이었다. 성경적(율법)으로 교리적으로 맞느냐 아니냐는 바리새인들의 사고였다. 주님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문화나 사회적 개념들을 허용하신다. 그 예수님께서는 연보(헌금)의 금액보다 연보를 하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셨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연보(헌금)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십일조 역시 연보(헌금)과 같이 취급하시면서 십일조를 내느냐 마느냐의 교리적 율법적 내용이 아닌 내는 자의 마음 중심, 즉 십일조의 중요한바 ‘의와 인과 신’(마23:23)을 누가복음에서는(눅11:42) ‘공의와 하나님 사랑을’ 중요한 관점으로 말씀하시며 ‘행하되 가장 중요한 ’의미‘ 즉 마음 중심을 버리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사실 십일조나 성전에서 내는 연보는 당시 유대교의 계율대로라면 ‘연보’의 의미보다 ‘세금’의 의미가 더 크다. 구약의 연보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연보는 ‘헬’가좁휠라키온 인데 ‘세금궤’에 세금을 내는 의미였고 이 돈은 국고로 들어가 주로 성전을 수리 보수하는데 쓰였다. 물론 명목상은 그랬지만 성전 지기나 제사장 무리들이 뒷주머니에 챙기고 착복했을 테지만 그러니까 잘 살고 많이 있는 자는 그만큼 많이 내는 것이 법 정신과 형평에도 맞고 없는 자는 적게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그 사역이 끝나고 부활 승천 하신 후 약속대로 다시(재림)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성도 안에 들어오셔서 세워진 참 하나님의 교회인 신약교회에서(교회라는 용어‘에클레시아’는 신약교회에서 사용됨) 행하여진 연보(헌금)은 ‘가좁휠라키온’이 아니라
a. 로기아(고전16:1-2)  b. 하플로테스(고후8: )  c. 율로기아 이 세단어로 나타나는데

첫째 ‘로기아’는 ‘말씀, 설교, 감화’의 의미인 “로고스”에서 기원된 말로 상업적 의미를 지니며  ‘징수’ 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헌금은 교인이 설교를 듣는 그 교회 공동체에 법제적, 의무적 성격의 헌금을 나타내며 이 역시 자원적의미를 담고 있으며 주일헌금 과 같은 성격의 헌금인 것이다. 그래서 주일헌금은 설교를 듣는 그 교회에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둘째로 고린도 후서 8장에 나오는  ‘하플로테스’인데 이 단어는   '단순'히 즉 헌금공여자가 그 마음에 공동체나 어떤 대상에 분열이나 이기주의  없이 '성실'히 혹은 '관용'의 마음으로 그 마음에 진정한 사랑과 긍휼을 담아 어려운 형제자매를 돕는 것을 말한다.  이 연보(헌금)은 어려운 성도를 섬기고 돌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으므로 구제헌금으로 이해하면 된다.

세 번째는 고린도후서 9장 에 나오는 ‘율로기아’다. 이 단어는 찬미, 찬양, 봉헌, 축복, 부조, 좋은 말씀, 진심을 담은 축하의 말 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축복’이라는 뜻의 ‘율로기오’가 기원이다. 그러니까 이 세 번째 헌금의 배경은 멀리 있는 타 지역의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해 일 년 남짓 동안 목표액을 정해서 모은 작정헌금 이었다. 이런 헌금은 액수가 클 것이고 바울도 거액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율로기아는 ‘부조’의 개념이 정확한 표현이며 선교헌금의 개념이다.

그러니까 헌금은 1. 목적이 분명하고 2. 대상이 분명하고 3. 사용처가 분명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헌금하는 자의 마음과 자세가 진정으로 돕고, 긍휼히 여기고 감사함고 축복하는 마음가짐으로 성심 성의껏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헌금 개념은 시대가 흘러 이런 형태의 조직교회로 발전하면서 조직과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연스런 요구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그 목적은 분명하고 단순했으며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헌금(연보)는 성경적으로 행하여져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용처는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유지비용과 전도비(선교) 그리고 구제를 위한 비용충당이 전부였다.
어느 시대나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해야지만 사실 십일조는 성숙된 성도는 당연한 헌금이었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헌금은 마땅한 의무이자 도리며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십일조의 용처는 구약의 제사장과 그 가족(다른 수입이나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들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도 십일조는 전임 목회자를 위해 드려지는 것이 맞으며 일정한 생활비를 교회가 제공해야한다.
그리고 주일 헌금이나 각종 감사헌금 역시 성격적이고 이것은 교회 공동체 운영을 위해 마땅히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드려야 할 성도의 도리인 것이며  또한 어려운 이웃이나 외국의 어려운 교회를 돕거나 시골의 어려운 교회와 목회자를 돕고 섬기는 구제와 선교헌금 역시 성도가 성의껏 자원해서 드려야 할 헌금이다.

또한 진리의 복음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교제하고 예배하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써 그 소속된 조직인 공동체를 운영하고 누리려면 마땅히 제반 비용을 충당하고 섬기는 일은 의무요 권리이기도 하다. 작은 친목 모임에도 다달이 회비를 내고 모일 때마다 경비를 책임지는 것이 회원의 의무조항인데 헌금의 마땅한 부분은 자원해서 내는 것이 피차 기쁘고 즐거운 것이므로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직이 크고 방대하면 그 많큼 사용처도 많아질 것은 자명할 것이다.

● 그런데 오늘에는 목회자가 형편에 지나친 사례비를 요구하거나 교회 건물을 건축한다거나 용처가 불분명한 선교비를 걷거나 하는 것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이 정한 이 금액을 채우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교묘히 이용한다거나 축복이나 저주의 말로 성도를 위협, 또는 미혹하고 기만하여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짓이며 또한 용처가 불분명한 지출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또한 필요에 지나는 헌금유도나 무리한 교회건물의 확장이나 그로인한 교인들이 감당해야할 이상의 과도한 헌금배당은 짐이 될 것이고 십일조를 안 하면 지옥 간다거나 저주를 받는 다고 말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오히려 교인들의 신앙을 병들게 하거나 왜곡된 신앙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  십일조나 헌금은 축복의 조건이나 구원의 조건이 절대로 될 수 없다.
● 주님은 여러 명목의 헌금을 상황과 시대를 따라 허용하시지만 이 헌금을 내는 주체와 사용하는 주체가 교인이기에 스스로 헌금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마음이 드려져야 하며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관리 감독하는 것 역시 교인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 신약교회의 교회나 헌금은 율법과 교리적이지 않다. 구원과도 축복과도 천국과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와 축복의 마음으로 내는 진정한 헌금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루어 진 것이어야 하며 이것이 ‘참 연보’라고 사도바울은 말한다.  


● 왜냐 하면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드리는 것이야 말로 참 연보요 하나님 자신께서 이미 받으신 것이기에 드린다고 잘못되는 것도 없고 못 드린다고 해도 정죄에 빠질 필요가 없다. 십일조도 금액이나 비율에 매이지 말고 드릴 수만 있으면 드리는 것이 좋다.  십의 일도 십의 십도 십의 0.5도 모두 십, 일, 조인 것이다. 모든 종류의 감사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율법적, 종교적, 교리적 신앙으로 드리면 소용이 없고 억지로 하는 것 역시 바르지 않다. 교회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그리고 섬겨야 할 대상에 따라 최선을 다 해야 하며 그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누려야 하며 선하고 사랑스런 축복의 말과 물질을 포함한 여러 수단을 동원해서 성도를 섬기는 것이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다.
● 주의해야 할 것은 기도하며 주께 지혜를 구하며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고 자신의 의와 욕심과 교만을 따라 하지 말아야 하며 오해나 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어느 목회자의 눈물의 고백이 가슴을 찌릅니다.

이 기도를 통해 목회 사역을 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주님의 음성 앞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한 영혼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그들 가운데 부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출처: 국민일보 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413932&code=61221111&sid1=chr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복음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1:4-5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택하심을 받았기에 이를 은혜라 하면서
은혜, 은혜, 구호처럼 외치고 노래하면서
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지
말로만 복음의 능력이라 하지만 무엇이 능력인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하여 바라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가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고, 어떻게 그들의 믿음이 되어 믿음의 일꾼으로
믿음의 행위로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인내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이 은혜의 소식 복음은,
소식인 말로 전하였지만 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린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과 함께 간절히, 간절히
간절하여서 목숨까지 내놓은 간절함으로 전 한 바울이 하나가 되어
듣고 전하는 능력이 된 것은, 능력의 말씀이 된 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기에
바울과 동역 자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이 같은 형제가 되었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포함은
이 사건을 통하여 설교를 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이를 배워서 능력이
되어 본이 되었으면 한다.

이 구절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주된 고백이 아닐까 한다.
이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대략 A. D50-51 년으로 추정되며 바울이 2차전도 여행 중
데살로니가에 머문 약 3주간에 설립된 교회이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17:1-2]
세 안식일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들이 세운 교회라
아직 영적으로 어린 데살로니가교회는 외적으로 유대인의 박해와
내적으로 옛 생활의 유혹이 있었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면서
디모데를 베뢰아에서 데살로니가로 파송하였고
나중에 디모데로 들은 기쁜 소식으로 바울은 감사하였지만
아직 재림의 문제와 도덕적인 문제 등으로 또 박해와 시험에 대하여
도와주기 위하여 이 편지를 고린도에서 썼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도들이 어려운 환난 중에서 말씀을 받아 삶이 변하여
그들의 믿음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고
마침내  각 지방에 믿음의 소문이 퍼져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다.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1:6-8]
바울과 동역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머문 짧은 시간에
구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증거하며 증인이 되었고
또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여주었듯이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2:8]
바울과 동역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뿐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했음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자매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교회이고
이를 본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는 자의 본을 보여줌으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어떻게 짧은 3주 만에 복음을 받아드린 데살로니가 교회도 묘하지만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가게 된 하나님의 섭리도 묘하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소동이 일어나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2:2]
고난과 능욕을 당하며 데살로니가로 갔으나
거기에서도 유대인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는데도 복음을 전했다.
그것도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울이라 핍박이 많았는데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더 놀라운 일은 유대인 회당이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복음의 발판이 되었고
세계복음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핍박이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도 없고
핍박이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다.

데살로니가 교인중 이방인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인 바울의 시각에서 보면 이방교회이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이 바라본 바로도 이방교회이지만
이방교회가 설립된 것도
유대교와 다른 이방 종교의 박해를 받으며
교회로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유지 되었고 본이 되었음은 놀라운 일이라
이는 하나님의 계획인 경륜으로 되었음이 틀림없다면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방교회 보셨을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공평 공정하신 분이시라 이스라엘과 분리하여 이방교회라
하지 않으셨음은,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소식이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there is neither bond nor free,
there is neither male nor female: for ye are all one in Christ Jesus.
갈라디아서 3:27-28]
그리스도의 복음의 옷을 입으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지금의 이스라엘인이나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예수 안에서 하나이고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이며
더욱이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이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와 이방의 벽이 헐렸고,
왜 예수님은 성전을 헐 우신다 하셨고 성전을 헐 으셨나?
아직도 성전이 건물인가?
하기야 교회건물을 성전이라 하는 자들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지가 아닐뿐더러
더 이상 그들만이 선택된 민족이 아니고 그들도 복음을 전할 족속인 뿐인데
무엇으로 그들과 이방인을 나누는가?

어느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였기에
이방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는 대체신학을 주장하고
우리의 교회를 ‘이방인 교회’ 라 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예루살렘 제삼 성전의 완성이라 주장하고
일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를 박해한
지난 과거의 역사의 일을 사죄하여야 한다 주장하고
그런 세대주의 무리에 속한 목사가 동성결혼을 반대로
교단을 탈퇴한다 하여 영웅 취급을 받는 일을,
그가 교계갱신과 발전을 위한 토론에서 의견을 내놓고 무엇인가 변화를 바라는
이곳의 기사를 보면서
또 성경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Thus saith the LORD unto this people,
Thus have they loved to wander, they have not refrained their feet,
therefore the LORD doth not accept them;
he will now remember their iniquity, and visit their sins.
예레미야 14:10]


이 지구상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 놀랍고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는

인간 이해로는 불가능한

불가사의한 일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수긍할 수 있는 일들도 있습니다.


인간이 수긍할 수 있지만

너무나도 놀랍고 신비한 일이

해마다 요세미티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의 폭포라고 알려진

호스테일(Horsetail) 폭포에 관한 것입니다.


04093553_1.jpg


해마다 2월 셋째 주가 되면

수많은 아마추어 및 프로 사진작가들이

요세미티의 호스테일 폭포 부근으로 몰려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불의 폭포라고 알려진

호스테일, 즉 말꼬리 폭포를 촬영하기 위해서입니다.


04093553_2.jpg


2월 중하순이 되면

해가 지면서 석양 빛이

호스테일 폭포에 비취게 되는데


바로 이 무렵,

호스테일 폭포는

골든색에서 오렌지색으로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붉은 빛으로 물듭니다.


이 때 폭포는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놀랍고도 장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04093553_3.jpg


이 장관을 촬영하기 위해

혹은 이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미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세미티로 몰려듭니다.


04093553_4.jpg


2월이 지나면

해가 지는 각도가

호스테일 폭포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2월 중순부터

3월 초순 사이에만

이러한 불의 폭포를 촬영할 수 있죠.


04093553_5.jpg


이 불의 폭포는

촬영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이 조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04093553_6.jpg


첫째 조건은

2월 초·중순 경에

요세미티에 많은 눈이 내려주어야 합니다.


불의 폭포는

눈이 있는 겨울과

초봄에만 흘러 내리는 폭포이기 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거나

혹은 적설량이 적게 되면

폭포는 흘러내리지 않게 됩니다.


또한 기온이 높아서

눈 대신에 비가 오게 되면

폭포의 물이 급속도로 흘려 내려버려서

불의 폭포를 찍을 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04093553_7.jpg


둘째 조건은

불의 폭포가 형성될 무렵의 낮기온이

눈을 빠르게 녹일 수 있을 만큼 높아야 합니다.


기온이 낮으면

눈이 녹지 않게 되거나

녹더라도 말꼬리가 아닌 쥐꼬리가 됩니다.


04093553_8.jpg


셋째 조건은

불의 폭포를 촬영할 무렵

요세미티의 날씨가 구름이 없이 맑고,

해가지는 서산에도 구름이 없어야만 합니다.


구름이 있을 경우,

그 구름으로 인하여

호스테일 폭포에 빛이 생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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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의 2월 중·하순에

위의 요건이 다 구비되는 경우는

2-3일 불과할 정도로 극히 드뭅니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캘리의 극심한 가뭄으로

불의 폭포를 촬영하기 어려워졌습니다.


2년 전인가, 3년 전에

불의 폭포를 촬영하기 위해 갔지만

폭포의 물이 거의 없어서 촬영에 실패했을 정도죠.


04093553_10.jpg


또한 다른 조건은 갖추어져도

구름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불의 폭포 촬영은

통상 오후 5시 30분부터 시작되는데


날씨가 맑다가도

오후 5시 경이 되면

서쪽 하늘에 서서히 구름이 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촬영을 기다렸던

사진사들의 장탄식이 흘러 나오죠.


우리처럼

LA에서 간 사람들이야

허탕치면 내일 다시 오면 되지만,


동부에서 온 사람들이

3일 동안 허탕치고 돌아갈 때가 되면

아마 속이 무척이나 쓰릴 것입니다.


04093553_11.jpg


2016년 올해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이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몰려 들었죠.

때문에 올해 촬영한 불의 폭포는 어느 해보다 좋았습니다.


04100521_12.jpg


※ 촬영시 주의 사항


호스테일 폭포를 촬영할 때

스팟 측광으로 정확히 폭포에 측광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호스테일 폭포는 불의 폭포가 아닌

옅은 골든색으로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폭포의 물이 아닌

실수나 의도적으로 벽에 측광을 맞출 경우

주변부가 밝아져서 불의 폭포에 대한 집중도가 저하됩니다.


또한 호스테일 폭포 촬영시

위치 선정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잘못된 위치에서 촬영하면

주변부의 나뭇가지들이 프레임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럴 경우

사진이 깔끔하지 못하고

폭포에 대한 시선도 떨어지게 되죠.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위치가 다 좋은 곳은 아닙니다.


미리 몇 시간 전에 도착해서

지형과 위치를 잘 잡아야 촬영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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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미국 서부 사진여행, 오지여행 전문 가이드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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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아주 오래전 친구 딸의 세례를 참석했다.
맨해튼에 위치한 프랑스 성당에서 세례를 한다하여
대부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개신교의 신자라
거절하였더니 증인이라도 되어 달라 하여
유럽식 가톨릭 세례를 어떻게 받는지도 궁금하여 참여 하겠다 하였고
성당에 도착하였더니 프랑스 인 신부는 반갑게 맞이하여 주면서
아버지가 가슴에 안은 금발의 딸과 아버지를 위하여 서서 기도를 하기에  
같이 기도를 하였지만 나는 아버지와 딸과 신부를 위해 기도했다.
‘주님, 저들이 주님을 올바로 따르게 하여주십시오.
딸은 이제 세례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삶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믿음을 갖게 하사 온전한 신앙인이 되게 이끌어 주십시오.’
신부는 기도를 마치고 아이에게 손에 물을 젖서 머리와 온몸에 뿌리고
주문을 하듯 세례의 교리를 알아들을 수 없이 빠르게 중얼거리듯 울프고
한 쪽 벽면으로가 옆 사진과 조각의 장식으로 이동하여 그렇게 하고
아마 20여 번을 자리를 옮기고 또 옮기고 성당 벽면을 한 바퀴 돌아
기도하고 손끝으로 물을 뿌리고, 아이는 손끝의 물이 얼굴에 닿을 때 마다 울고불고
두 시간을 그렇게 하였고, 지루하다 못해 내게는 고역스러운 세례를 마치고
세례 만찬으로 프랑스 식당에 가서 신부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은  기억이
아직 생생한 것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의식이 격식이 되고 전통이 되어
종교화가 되어 화석(化石)되었는지, 안타깝고 슬프고 답답하다.
그러면 가톨릭만 그럴까.
아니다. 개신교도 이미 종교의식에 젖어있고
그 의식을 예수님은 외식이라 하셨고
이는 인간의 내적인 경건을, 외적인 틀에 맞춘 권위라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거룩' 이라는 의식으로 치장하면 이미 탐욕의 길에서 조직을,
신앙이 행위를 위한 욕심의 의로 변절되면, 계급적인 조직의 종교가 되고
이에 신앙심을 덧칠하면 이미 종교 조직이 되어
한 몸을 이루하는 교회는 한 몸이 아닌 조직을 위한 조직 유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를 시대의 사조로 받아 드리는 무리가 되면
종교의식의 껍데기만 남은 종교인이 된다.
생각해 보라.
현대의 종교인이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이 간절히 원하셨던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우리를 사랑했던 그 고귀한 사랑으로 새로운 변화를 바라셨던
제자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이었을까?
형제가 자매가 모인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몸을 이루는 형태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며
조직이 직분이 되어버린 모습일까?
직분이 조직이 되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고
모두 모두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세상과 구별된 성도로 세상을 그리스도의 도로 바꿀 사명이 있는데
어찌 오늘날의 교회의 조직에, 생명의 존귀함을 잃었는가?
어찌 교회 건물을 위해, 온 몸의 힘을 빼고 있는 힘마저 탈진하여 소진한
헌신(獻身)을 강요하는가?
이런 생명을 경시한 비천한 문화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
요한이 말한 생명의 부활(resurrection of life, 요한복음 5:29)로
나오는 삶을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된 믿음의 공동체의 삶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란 말인가?
누가 그렇게 존귀한 공동체의 주인 노릇을 하는가?
누가 그런 권위를 주었으며 성경 어디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일이
있었던가?
그 변절된 사도의 권위가 복음을 능력을 감소시켰고
사도의 권위가 더 권위를 더하여 권력이 될수록 부패하였던
교회사를 기억하는가?
기름을 부었다는 선별된 선민 화 된 집단은 복음을 권력의 도구로 삼았고
권력 착취의 수단으로 삼고 세상 권력자의 권력화가 되어 신분을 나누고
평민과 농민 노동자의 착취자가 되어 수탈(收奪)하고  
권력유지를 위하여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으로
고문(拷問)의 방법으로 온갖 고문 도구를 만들어 낸 세상 고문의 역사는
지난 유럽과 미국의 교회사임을 아는가?

틀에 매인 신앙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닮는 나날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리고 그의 부활의 신앙은
그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죽기까지 사랑한 형제자매 사랑은
권능을 알지 못하면 그의 사역을 알지 못한다.
권능이 무엇인가는 다음기회로 미루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이 지도자라면
믿음으로 바라보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는,
믿는 자라면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라 사랑하는 애국자 이어야
하고 특히 교회의 지도자라면 더욱 그래서 어느 정도 세계역사를 배워서
믿음을 현실의 상황에 대조(對照)하여
시대(時代)의 흐름을 읽고 시대의 신앙 대안을 내놓고
신앙의 길을 제시하여야 하는데 그런 안목(眼目)을 가진 지도자를 볼 수가 없고
그런 글을 볼 수가 없다.
설교는 주장은 창세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예언을 하고
철학과 음악과 심리학과 사회상을 죄다 아는 것처럼 말하면서
나름, 이 시대를 흐름과 현상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 하지 못한다면
미안하지만 종교로 밥벌이 하는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에게 현혹되어
눈이 먼 맹신자이거나 그런 사람을 추종하는 광신자라 종교의 노예라고
‘5.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에서 조선의 신분제도를 언급하면서
종교의 계급 화된 신분 화를 쓰고 싶었지만
차마 노예라는 말을 쓰고 분란을 일으키기 싶지 않아 피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틀고 어그러진 길로 가면
진리의 자유를 잃어 종교의 노예가 된다.
왜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분별의 눈이 없을까?
분별력을 잃었다는 것은 성령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다는 증거이고
성령님의 인도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까닭이다.
생각해 보자.
왜 한국과 미주 교회가 하루도 거르지 못하고 온갖 추문으로
떠들썩하고 일상화 되었는지, 언론의 비난을 받고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왜 그리 정직하지 못하고
서로 옳다고 서로를 비난할까?
죄의 노예가 된 종교인들...

예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셨을까?
어떻게 하여야 온전한 교회의 예배모습인가?
화려한 건물의 교회에서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묵직한 소리와
성가대의 중세시대적인 군대 같은 복장으로
목사의 설교 제목과 내용에 맞춘 찬송가로 찬양하는
높고 낮은 목소리를 고용(雇傭)한 성가대원의 소리와
평상시 목소리도 아닌 가성의 목소리로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고
이에 화답받기를 원하는 제사장처럼 복장을 따로 한 가운을 입은 목사의
빈곤한 성경의 풀이로
예화를 반복 반복하는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헌금 바구니를 이리 저리 돌리며 헌금을 거두고
눈물을 짜는 헌금 송과 피아노 반주의 가사처럼 헌신의 마음을 자아내는
희생된 마음을 원하셨을까?
헌금을 주보에 헌금별로 공포까지 하여 헌금의 금액이 믿음과 축복의 척도가 되었고
음성 좋은 사람만 모인 성가대, 그래서 은혜로운 찬송이라면
눈과 귀를 막고 싶다.
무엇이 은혜와 평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대답일까?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 몫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가슴에 그리스도를 간직한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면
그 흔적 때문에 가슴을 울려서 나오는 소리의 말, 대답은, 각자의 몫이고
그 흔적이 없어 영혼을 흔들지 못하는, 가슴의 복판을 울려 나오는 대답이
아니라면 이는 성령의 부재(不在)라
그것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도 아니다.
예배의 시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의(공의)를
성경을 통하여 찾는 시간이며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형제 자매된 모임이라 찬양과 감사와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결단의 시간이라
자백하여 복종하려는 자복(自服)의 시간이라
우리의 영육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겠다는 결단의 행위인
진정한 삶의 산제사 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참석한 자로
낮아짐의 시간이라 주께서 높아지셔서 주를 따르는, 능력을 주신 성령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 영혼과 온몸으로 ‘서로 사랑하라’ 는 사랑의 시간이며 모임이라
이를 실천하고 밖의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삶이 진정한 산제사이고 진정한 예배이다.

그러나 어느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에 대하여 잘못 해석하여
바울을 본받아 교회를 위하여 애써서 헌신하고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으라 는 설교를 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
이 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아직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면
우리를 대속하여 고난을 받으신 ‘고난’ 이
속죄적인 고난이 남아 있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게 되면
완전한 복음이 아닌 우리가 남은 고난을 받아야 남은 고난이 완성된다고,
잘못 뀌어진 단추 하나로 인해 옷이 삐뚤어지듯이 잘못된 해석으로
비틀린, 어그러진 복음이 된다.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이 교회의 일군임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이 헌신하고자 하는 의미로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 는
표현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라 표현 했다.
베드로 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
이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며,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본을 보였듯이 주님을 따라오게 하였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벽하나,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라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몸 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은
고난과 환난 심지어 순교도 감수해야 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소망으로
인내하고 믿음이 행위가 되어 보임으로서 여러 교회에 자랑이 되었고,
그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 후서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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